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의 제 1조 1항이다.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래서 헌법은 이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라고 밝힌다. 특히나 '혁명'에 비례할 만한 변화를 낳은 4.13 총선을 통해 '투표'를 통한 국민의 주권 행사는 더더욱 피부에 와닿는다. 바로 이런 시점, ebs는 야심차게 <민주주의> 5부작을 선보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잘 몰랐던 민주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로 규정되는 빈익빈 부익부의 시대, 민주주의의 방향을 짚어보고자 한다. 




1부 시민의 권력 의지
경제가 정치를 규정하는 21세기, 다시 민주주의를 복기하기 위해 <민주주의>는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데이비드 이스턴의 신선한 정의로 부터 시작된다. 즉 우리가 익히 알고 배워왔던 '민주주의'와 관련된 제 개념이 새롭게 해석 시도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민주주의 기원이 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병사로서 그 중요성을 부여받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힘을 배경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과정이 된다. 또한 애초에 재산에 따라 제한이 주어졌던 선거권이 성장하는 노동자 계층을 배경으로 '좋은 외투, 좋은 모자를 쓰고 온 가족이 번듯한 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권리'로써의 '보통 선거권'이 재조명된다.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듯 삶과 분리된 슬로건인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자원 배분'과 관련된 국민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고 민주주의의 역사는 증명한다. 즉 똑같이 가뭄과 기근에 시달린 아프리카의 두 국가 에티오피아와 보츠와나의 정치 체제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가에 따라, 자원의 평등한 배분을 하는가에 따라 100만영이 굶어 죽느냐 마느냐로 귀결된다고 다큐는 설득한다. 

2부 민주주의의 엔진, 갈등
정치에 대해 회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맨날 지들끼지 치고 박고 싸움박질 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바로 이 '치고 박고 싸움박질 하는' 갈등, 이를 <민주주의> 2부에선 오히려 '민주주의의 엔진'이라 정의내리며 편견의 재해석하고자 한다. 

즉 민주주의란 지들끼리 싸움박질 하는 것이 아니라, 교실에서 학생들끼리 치고받는 식의 사적 갈등을 정부나 정치 지도자라는 공적 주체를 통해 공적으로 해결하는 갈등의 사회화 과정이라는 것이다. 권위주의적 정부는 갈등을 억압하지만, 민주주의적 질서는 갈등을 인정하고 드러내어 해결하려 애쓰며, 그 분화구가 되는 것이 바로 '선거'라고 다큐는 규정한다. 

그래서 정당은 수많은 갈등 중 대표적인 갈등을 묶거나, 기존의 갈등을 새로운 정치 쟁점으로 변화시켜 갈등을 조직하여 투표를 통해 그것을 해결하고자 한다. 1980년대 레이건은 뉴딜 정책의 상징적 장소인 미시시피 카운티에서 공식 선거 운동을 시작하며 '인종주의'와 기독교 원리 주의'를 활용하여 '퍼주기식 복지'에 반대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첫 발을 내딛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민주 vs. 반민주로 대립각을 이루었던 정치적 쟁점은 민주주의를 원치않는 집단이 의도적으로 프레이밍한 호남 vs. 비호남의 정치 갈등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호남 vs. 비호남의 갈등 구조에서도 보여지듯 오늘날 선거는 '계급 배반 투표'라는 새로운 양상에 도전을 받는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계급 이해와 다른 투표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 조사 결과 미국 선거 과정에서 민주당 지지층을 살펴보니 계급 배반 투표는 없었다. 심지어 고소득층의 공화당 지지는 확고하여, 계급 이해에 더 충실했음이 드러났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드러나는 세대별 성향 차이는 세대 별 시대 경험과 맞물리며, 특히 신자유시대의 파고를 고스란히 겪어낸 유권자의 목소리가 세대 갈등으로 나타날 뿐 결국 1920년대 좌우 대결 이후 계층간의 분열은 여전히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정치적 갈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다큐는 증명해 낸다. 



3부 민주주의가 우선한다. 
헌법 119조 2항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 경제 및 안정과 적절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며, 시장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경제 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 를 위하여 경제 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누가 이 조항을 넣었는가를 둘러싸고 논란을 빚은 헌법의 이 조항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개정된 헌법의 내용이다. 하지만, 헌법의 조항과 달리, 현재 전 세계는 불평등이라는 세계적 현상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 

금전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합격이 취소된 옥스퍼드 법대생, 이는 영국만의 일이 아니다. 미국 명문대 재학생 중 상위층이 74%인 반면, 최하위층은 3%에 불과하다. 한국 역시 2009년 기준 역시 명문대 재학 생 중 하위층은 14%인 반면, 최상위층은 64%나 된다. 전 세계적으로 상위 1%의 부가 하위 99%의 부를 넘어서는 시대다. 교육 불평등은 다시 소득 불평등을 낳고 이는 정치, 사회적 문제와 적대감을 야기하며 민주 사회의 위협 요소가 된다. 

불평등의 세계적 현상을 토마 피케티는 자본 수익율을 통해 분석해 낸다. 즉 경제 성장률이 1700년대의 0.1%에서 2013년 3%로 성장하는 동안, 자본 수익율은 항상 4~5%를 넘나들었다. 즉 자본 수익율이 경제 성장률을 앞지르는 비율만큼 부는 편중된다는 것이다.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로 자본주의는 정착되게 되었다. 평균 4%의 성장을 보였던 1940년대에서 8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 전쟁을 경험한 인류는 경제적 불평등 앞에 정부라는 조직화된 권력에 힘을 부여하며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의 집권으로 시작된 신자유즈의 정부는 통제하지 않는 정부라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전세계적 불평등의 심화를 낳았다. 자본에 전적으로 특권을 부여하는, 민주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해방하려는 2차 자본주의 혁명의 시도는 결국 고삐풀린 자본과 정체된 경제 성장과 복지의 파괴로 실패했다. 결국, 그래서 다시 '민주주의'인 것이다. 

4부 기업과 민주주의 
그렇다면 오늘날 불평등의 주범이 된 자본주의, 그리고 그 주체인 기업, 그 존재는 민주주의에서 어떤 위상을 가질까? 2011년 미 대선에서 밋 롬니 후보가 내세운 슬로건 '기업이 곧 사람이다'는 기업의 위상과 관련된 논쟁을 낳았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은 토지와 노동의 주인이 되는 자영농 중심의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실제 당시 미국 시민의 60%가 자영업자여서 제퍼슨의 이상은 현실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사회는 변화되었다. 60%이던 자영업자는 12%로 줄었고, 대신 당시 임금 노예에 해당하는 노동자가 54%로 늘어난 것이다. 즉 기업에 소속된 노동자가 다수가 된 현대, 시민이 자본의 통제를 받는 사회, 과연 기업에게 사람처럼 '자유를 부여해야 할 것인가가 오늘날의 과제가 된다.

더구나 2010년 미 연방 대법원은 기업의 선거 자금 지원을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허용했지만 지난 30년간 최상위 계층 1%의 정치 자금이 15%에서 41%로 늘어나는 현실에서 과연 이런 자본의 막대한 돈을 지원받은 정부가 모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론이 지배적이다. 뿐만 아니라 기업의 존재 자체도 문제가 된다. 기업은 주주 자본주의라 하여 기업의 주식을 산 주주의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그 활동을 하는데, 실제 기업을 일구고 위기에 기업을 책임지는 직원의 이익에 배제하거나, 오히려 주주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복지와 고용에 반하는 방식으로 존재론적 이율 배반을 실현한다. 

즉 정치의 외부에서 정치 자금의 형태로 정치에 영향력을 끼치는가 하면, 정치의 단위인 시민을 고용을 통해 내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주는 기업에 대한 문제가 오늘날 민주주의가 가진 최대의 고민으로 귀결된다. 



5부 민주주의의 미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라는 막연한 경구로써의 민주주의를 신자유주의 시대에 맞춰 재해석 해냈던 5부작 민주주의, 결국 다큐는 오늘날 불평등을 낳은 압도적 자본의 힘에 맞서 국가와 시민의 힘을 재규정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의 과제가 귀착된다. 

그렇다면 과연 민주주의의 미래는 어떨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노엄 촘스키, 아마티아 센, 쉐보로브스키, 존 던, 토마스 프리그먼, 리처드 프리먼 등의 석학들의 고견을 인터뷰한다. 민주주의는 이제 쓸데없는 흔적 기관이라고도 평가되는 시대, 즉 무대 뒤편에서 기업과 부유층이 조정하는 시대 민주주의 무대는 현실감을 잃어가는데, 과연 여전히 민주주의는 유효할까? 소득의 재분재를 둘러싼 부의 재분배의 결정권을 놓고 벌어지는 논쟁의 귀결점은? 뿐만 아니라, 선출되지 않은 비민주적 권력으로 관료주의의 대두와 그들에 의한 민주주의의 잠식, 그리고 선출된 권력 사이의 불평등에 대한 무기력한 대응이 낳은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환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학들은 민주주의를 대체할 체제는 아직 없다고 입을 모은다. 유일하게 민주주의는 투표를 통해 정부를 해고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인 점을 강조한다. 인구의 증가와 함께 정치와 사람들의 연결 고리는 약화되고, 그래서 실제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는 설득력은 저하되며, 기업의 업청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피해의 당사자인 더 많은 하층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그 결과 사유재산과 금융 시장을 정부가 규제하는 틀을 마련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선점해 버린 현재의 민주주의의 위기는 희망을 가진다고 당연하지만,  엄정한 결론이다. 결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사람들에게 달려있다. 
by meditator 2016. 6. 5.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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