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21일 방영된 도현정 작가가 쓴 mbc베스트 극장<늪>의 엔딩은 충격적이다. 남편의 불륜을 알고 난 후 집요하게 복수를 해오던 여주인공 윤서(박지영 분)가 불륜 내용이 담긴 테이프를 듣고 당황해 하는 남편의 차 위로 자기 자신을 던지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깨진 유리 위로 눈을 부릅뜬 채 남편을 노려보던 여주인공의 표정은 오래도록 시청자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복수의 마지막을 자신을 '산화'시켜 완성하던 <늪>의 여주인공처럼 12월 3일 종영된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속 비극의 주인공인 김혜진(장희진 분)은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을 '단죄'하고자 '자신'을 던졌다. 


우리 드라마에서 자고로 '복수'는 익숙한 코드이다. 아침 드라마에서부터 주말 드라마까지 억울한 사연을 가진, 주로 여주인공이 입지전적 성공을 배경으로 삼아, '복수'를 감행하는 것이 이른바 트렌디한 스토리의 주를 이룬다. 드라마 속 그녀들은 대부분 '권선징악' 복수도 성공하고, 자신의 일과 사랑에 성취를 하며 '해피엔딩'을 이룬다. 현실 속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드라마 속 여주인공을 통해 한껏 '환타지화'되어 시청자들의 마음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자신을 던져 '단죄'하는 여주인공
그런데 2003년작 <늪>의 여주인공은 달랐다. 부유한 집안의 잘 나가는 정형외과 의사이던 여주인공은 남편과 불륜에 빠진 여자를 정신병원에 보내고, 남편을 남자 구실을 못하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결국 자신의 목숨을 던져 '복수'의 정점을 이룬다. 왜? '복수'를 하고 잘 살면 되지? 여기서 도현정 작가의 시선이 드러난다. 남편의 불륜을 통해 산산히 조각난 그녀의 가정, 그리고 남편의 불륜 과정에서 죽어간 아버지, 심지어 불륜의 상대방은 그녀가 가장 아끼던 동생 뻘의 여자, 그건 그냥 불륜이 아니라, 그녀가 의지하고 믿었던 세계의 파괴라고 작가는 <늪>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그 자신의 세계를 파괴한 사람들을 '단죄'하기 위해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그녀 자신 또한 '피폐해져갔음'이 결국 그녀 자신을 던진 또 다른 이유라고도 덧붙인다. 그리고 이것은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혹은 결과만 괜찮으면 되지 않느냐는 현재 대한민국의 허위적 윤리 의식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문제 의식은 십 년 여의 세월을 흘러 <마을-아치아라의 비밀>로 다시 통한다. 마을로 흘러 들어온 외지인 김혜진, 하지만 그녀는 사실 외지인이 아니었다. 마을의 상습 강간범에게 강간을 당한 채 아이을 낳게된 윤지숙(신은경 분)의 버려진 아이였다. 파브리 병으로 인해 신장 이식이 필요했던 그녀는 자신을 도와줄, 그리고 병든 자기가 의지할 혈육을 찾아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피붙이를 찾아 헤맨 여정에서 그녀가 만난 끔찍한 사실, 그녀의 남편에게 불륜을 해가면서 '단죄'를 하려고 했던 친엄마가 사실은 '강간'의 피해자였다는 것, 더구나 그녀를 강간했던 당사자는 여전히 마을에서 자기 자식을 끔찍히 여기며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자신을 버린 엄마를 밝히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녀는, 이제 엄마가 자신을 '괴물'로 여기도록 만든 그 '강간'범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 그리고 신장 이식을 해주겠다고 나선 엄마조차 외면한 채 진실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김혜진의 맹목적 몸짓은 자신의 출생이 주는 절망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애초에 친엄마를 밝히려던 그녀의 시도도, 그리고 마지막 자신과 엄마를 그렇게 만든 강간범을 밝히려던 시도도, 그 어느 것 하나 그녀를 막아서지 않는 것이 없다. 겨우 찾아낸 엄마는 그녀를 괴물로 불렀고, 잘 살고 있는 자신을 흐뜨러 뜨리는 훼방꾼 취급을 했다. 강간범은 한 술 더 뜬다. 자신의 어린 딸이 아플까봐 애지중지 하는 그는, 또 다른 그녀의 혈육인 그녀를 끝내 '그 여자'라 부르며 '협박범' 취급이나 한다. 병에 대한 치료보다도 더 간절히 원한 '가족'의 손길을 '괴물'이 되어버린 김혜진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신장 이식이 필요했던 김혜진이나, 의붓 오빠가 신장이식을 해줄 여유도 없이 죽어버린 가영(이열음 분)이나, 강간범의 상습 강간의 피해는 십 여년이 지나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낳았던 딸을 괴물이라 부르는 윤지숙에게서 보여지듯이 강간의 상처는 덮는다고 덮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치아라 마을은 곧 현실의 우리 사회
결국 윤지숙 모녀의 불행을 통해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른바 사회의 그럴 듯한 허위적 윤리의 껍데기 속에 숨죽여 사라져 가는 윤지숙 모녀와 같은 피해자들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확장하면 아직도 수요일마다 일 대사관 앞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고 사과받기 위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시위를 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요, 가깝게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성범죄 피해자들의 숨은 상처이다. 또한 그것은 단지 '성'과 관련된 상처만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 사건을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져 가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깊어져만 가는 '세월호' 등 각종 사회적 상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애초에 제대로 단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상처의 피해를 공동체가 보다듬었다면 김혜진이든 가영이든 애꿏은 두 아이의 운명을 달리 할 일이 없을 사건을 십 여년이 지나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야 풀어지는 그 '과거사'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에서 보여지듯이 김혜진은 자신을 던져 그 '과거사'를 해결하려 했지만, 정작 그녀가 죽음으로 드러낸 것은 또 다른 피해자 윤지숙의 슬픈 과거였을 뿐이다. 결국 피해자와 피해자만이 마을의 역사에서 상처를 받은 채 쓰러져 간 모습은 얄궃게도 우리의 현대사와 닮았다.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범죄자는 단죄의 시간을 벗어나 멀쩡한 모습으로 경찰서를 나올 수 있게 되는 그 슬픈 결론이 놀랍게도 현실과 흡사하다. 때문에 결국 윤지숙의 아이러니한 모정이 김혜진을 죽음에 이르게 했음에도 윤지숙에게 쉽게 돌을 던질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우리를, 그리고 우리 사회가 멀쩡한 듯 가리고 있는 위선의 가면을 벗긴다. 그리고 그 평화롭던 아치아라라는 마을이 상습 강간범을 결국 품어준 꼴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또한, 우리가 습관적으로 의지하는 '모성'과 '가족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뿐만 아니라, 결국 피해자였던 두 여주인공의 죽음과 감옥행으로 끝나 버린 채, 그 사건을 둘러싸고 음습하게 등장했던 윤지숙의 남편과 노회장의 커넥션을 남겨 둠으로써, 쉽게 종식되지 않는 사회적 비리의 뒤끝을 여운으로 남긴다. 그것은 이른바 미드처럼, 드러난 한 사건 이후에 보다 큰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시즌제를 위한 포석일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자체 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아마, 그 어떤 드라마보다, 시원한 '환타지'의 여력이 없는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 그래서 생소하고 낯설지만, 그것이 바로 시청률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드라마의 가치이다. 
by meditator 2015. 12. 4. 14:07

11월 6일 <마을-아치아라의 비밀> 10회 시청률은 5.4%(닐슨 코리아 기준)를 기록했다. 그 전회 4%대로 내려앉았던 시청률이 회복을 한 것이다. 하지만, 평균 5%대를 오르내리는 시청률,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은 결국 실패(?)한 드라마가 된 것일까? 시청률, 즉 대중들이 원하는 재미만을 놓고 보면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은 성공적이지 않은 드라마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다면 과연 성공적인 드라마란 무엇일까 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드라마가 추구해야 하는 재미란 무엇인가란 질문도 던져보게 된다. 


시청률표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프로그램들은 수목드라마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는 예뻤다>와 같은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이다. 그게 아니면 '막장'이라도 좋으니 사건의 전개와 선악의 대비와 권선징악의 코드가 분명한 주말, 아침, 거기에 이제는 저녁 시간 드라마들이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조명하는 시사 고발 프로그램이나, 다큐 프로그램들은 절대 시청률표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시청률이 높지 않아서 좋은 드라마, 혹은 성공하지 못한 드라마라면, 그래서 사람들이 더 많이 봐야하는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라면, 결국 우리 tv에서 저런 시사 고발 프로그램이나, 다큐들의 설 자리는 없다.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은 그렇게 사람들이 보기 편한 것, 즐기는 것과, 다수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이야기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시사 고발이나, 다큐와 드라마 라는 장르의 다름이 아니라, 사람들이 편하게 소비하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공기(公器)'로서의 방송의 존재론까지 그 질문은 이어진다.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아치아라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하 마을)>이 10회를 마쳤다. 16부작의 장정 중 반을 넘어 온 셈이다. 그런데, 드라마는 점점 오리무중이다. 아니, 김혜진의 죽음으로 시작된, 아니 김혜진으로 추정된 백골의 출현으로 시작된 마을 내 사건은 오히려 회를 거듭할 수록 김혜진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용의자로 만들어 간다. 내연 관계로 시작된 사건은 불법 입양으로, 이제 '더러운 피'가 연상케하는 마을 내 유전병의 돌림으로 파문을 확산시켜 간다. 

서창권(정성모 분) 회장과 내연 관계로 추정된 김혜진, 그녀와 머리 끄댕이를 붙잡고 육박전까지 벌인 서창권의 아내 윤지숙(신은경 분)으로 인해 최초의 사건은 이 삼각 관계의 관련자인 서창권과 윤지숙이 용의선상에 올랐다. 하지만, 이제 10를 마친 <마을>에서 그 용의선상의 인물을 동심원처럼 퍼져간다. 굳이 천도제를 지내며 젊은 영을 위로하는 서창권의 모 옥여사(김용림 분)의 눈빛도 의미심장하고, 그런가 하면 김혜진을 도와주는가 싶은데, 그녀를 이용해 어떻게든 마을을 떠날 한 밑천을 잡는데 혈안이 된 윤지숙의 동생 강주희(장소연 분)는 도무지 정체를 알 길이 없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건의 실체를 알고 싶다는 서기현(온주완 분)도 석연치 않고, 이제 서창권 뒤의 실세 노회장 등 새로운 배후 인물까지 등장할 참이다.  오히려 마을 주변을 둘러싸고 연일 발생하는 연쇄 살인 사건이 김혜진 실종 사건에 저만치 밀려버릴 정도다. 심지어 사건을 애써 수사하려는 박우재(육성재 분)와 한경사(김민재 분)까지 한번쯤은 의심하게 된다. 아니 왜 소윤은 그렇게 애써 언니를, 언니의 실종을 캐어내려고 할까?

웬만한 시리즈를 꿰어 놓을 수 있는 연쇄 살인 사건조차 시시하게 만들어 버린 김혜진 실종 사건이 이토록 회를 거듭할 수록 오리무중으로 빠지게 만드는, 거기에 마을의 관련 인물들을 모두 용의 선상에 올리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그 누구도 쉽게 선악의 잣대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쉽게 그 누구도 '선'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10회, 소윤(문근영 분)은 늦은 밤 자신을 찾아와 미술쌤 남건우(박은석 분)의 추행을 호소한 가영(이열음 분)을 보호하기 위해 앞장서 신고를 한다. 하지만 신고 과정에서 득의양양한 가영의 태도를 수상히 여긴 소윤이 가영의 핸드폰을 빼앗아 그 내용을 보고, 자신이 이용당했음을 알게 된다. 남건우에게 사랑을 호소하다, 그와 강주희의 관계를 알고 난 후 배신감에 사로잡힌 가영이, 자신의 허벅지 상처를 확인하려 했던 남건우의 행동을 빌미로 삼아, 그를 추행으로 몰고 간 것이었다. 이런 식이다. 소윤은 선의로 시작했지만, 그녀의 선의는 가영에 의해 이용당하고 만다. 이런 가영-소윤의 관계는 마을 내 일어났던 사건의 전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 누구의 행동도 곱게 보아넘길 수가 없는 것이다. 



실험적이기까지한 <마을>의 시도 
10회에 이르러 이제야 조금씩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엄마 살려줘!', 김혜진은 유전병인 파브리 병을 앓고 있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혈육을 찾기 위해 이 마을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출생은 그녀가 엄마로 추정하고 만난 뱅이 아지매 윤지숙의 생모를 통해 들려주듯이, 원치 않는 것이었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 그 누구도 그녀의 귀환을 반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그 원치 않는 출생과 김혜진의 파브리 병, 그리고 그 병을 가진 것으로 추측되는 가영 등으로 인해 마을 내에는 원치 않는 출생이 더 있음이 그리고 그 원치 않는 출생에 관련된 사람이 서창권만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마을은 김혜진의 출생과 관련된 부도덕한 사건을 통해, 그리고 그 부도덕한 사건을 마을 이라는 공동 사회가 덮으며 어린 아이들을 희생시킨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공동체 사회의 부도덕을 드러낸다. 즉, 우리 사회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다가가 그 허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남보기에 그럴 듯한 아름다운 마을, 오래도록 공동체의 정을 나누던 곳, 하지만 그 허명을 한 꺼풀 벗겨내고 나면 거기엔, 그걸 유지하기 위해 부도덕한 잡음들을 싹부터 자르고마는 잔인한 전설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잔인한 전설을 덮으며 생존한 마을은, 이제 '관광 특구'가 되고, '카지노'를 만들어 오랫동안 부귀 영화를 누리고자 한다. 이렇게 보면 결국 아치아라는 강원도 어느 골짜기에 있는 이름모을 마을이 아니라, 근현대의 얼룩진 역사를 성장과 성취로 덮으려는 대한민국의 왜곡된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10회에 이르러서도 오리무중인 드라마는 재미가 없을 지는 몰라도, 불편할 지는 몰라도, 말도 되지 않는 '막장'은 아니다. 오히려 모르면 모를 수록, 사건이 확산되어가면 되어갈 수록, 인간의 얼굴을 하고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인면수심의 민낯을 철저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그 불가지론의 묘미는 오묘하고 깊다. 그런 면에서 <마을>의 시도는 실험적이기 까지 하다. 선보다는 보통 사람의 얼굴을 하는, 가족의 이름으로 저지른 악의 얼굴을 샅샅이 드러내고, 한 회 한 회 시청률에 일희일비해서 시청자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드라마들과 다른 호흡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따지고 보면 이른바 '막장' 드라마 속 가족의 맨 얼굴이, <마을>과 무에 그리 다를게 있을까? 단지 미사여구의 차이일뿐. 그런 면에서 <마을>은 모처럼 짙은 화장을 지운 우리네 삶의 민낯이다. 

by meditator 2015. 11. 6. 14:11

<마을-아치아라의 비밀> 4회 시청률이 5.2%(닐슨 코리아 기준)가 나왔다. 야구 중계 관계로 mbc의 <그녀는 예뻤다>가 결방한 가운데 3회가 7.1%나왔던 거에 비하면 폭락에 가까운 수치다. 하지만, 역시나 <그녀는 예뻤다>의 결방으로 12%까지 치솟았던 <객주-장사의 신> 역시 10%대로 내려 앉은 거나, 그 이전 1,2회 시청률이 5~6%였던 거로 보면, 그저 조금 낮아지거나, 그 수준을 유지한 것이라 평가하는 것이 맞겠다. 5~6%의 시청률, 그 결과만을 놓고 보면,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에서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야 하는 드라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하 마을)>의 낮은 시청률이 왜 당연한 것이냐고? 그것은 굳이 <마을>을 걸고 넘어질 것이 아니라, <마을>과 유사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시청률을 살펴보면 알 수 있겠다. 

8월 11일 종영한 kbs2의 <너를 기억해>는 최고 시청률이 5.3%였다. 콘텐츠 지수면에서 양호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방영 내내 이 드라마는 4~5%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좀 나은 편은 2014년 4월 종영한 <신의 선물>이다. 역시나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였던 이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이 10.6%를 기록했다. 하지만 역시나 대부분의 회차는 8~9% 정도 수준이었다. 

<마을>을 비롯한 <너를 기억해>, <신의 선물>과 같은 장르의 특징은 미스터리 스릴러로, 그저 틀어놓고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인 드라마가 아니라, 잠시 잠깐 한 눈을 팔면 중요한 힌트를 놓칠 수도 있는, 사건의 추이를 주의깊게 주목하고 그 이면의 것들을 추리해야 하는 생각하는 드라마들이라는 것이다. 제 아무리 유괴 사건으로, 연쇄 살인으로 시작된다 한들, 결국 드라마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하며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이들 드라마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마을>은 무섭다. 심지어 방영하는 시간 혼자 보기 힘들 정도로. 그런데 <마을>dl 무서운 이유는 그저 간간히 나타나는 죽었다던 김혜진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드는 의심, 그리고 그 의심을 뒷받침하는 시청자의 머릿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이 드라마를 무섭게 만든다. 실제 드라마 속 설정들은 그리 잔인하지 않다. 무섭지도 않다. 기껏해야 해골 쫌 나오고, 귀신인 듯한 여자가 창문에 매달리고 만다. 하지만 그보다는 비밀을 숨긴 사람들의 묘한 시선, 속을 알수 없는 사람들이 횡행하는 마을이 무섭다. 그들의 숨겨진 사연이 가진 폭발력이 두려운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하는 드라마' 라는 것이 현재 공중파 드라마에서는 '이질적'인 장르가 되었다는 것이 이들 드라마의 낮은 시청률의 한 원인이 된다. 즉, 스스로 '바보 상자'란 그 이름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공중파 드라마들은 시청률이란 이름으로 대중들이 가장 손쉽게 소비할 수 있는 장르에 몰입해오다 보니, 결국 이제 이렇게 생각을 하며 따라가야 하는 드라마는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편성에 따른 '광고'를 무시할 수 없고, 그래서 리모컨을 수호하는 중장년층의 구미에 맞는, 그들이 쉽게 '소비'할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드는데 천착하다 보니 점점 더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을 한다는 것이 낯선 일이 되어가는 것이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sbs의 월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묵직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드라마를 시작했지만, 역시나 시청률이라는, 그래서 대중들을 손쉽게 유혹할 수 있는 이야기꺼리를 위해, 미성년자 강간 장면을 여과없이 내보내고, 마치 무협 게임의 설정과, 일본 사무라이 검법을 우리의 검법인 양 잔뜩 버무려 무술의 내공으로 시청자를 현혹한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 이 높은 시청률의 전제가 되는, 리모컨을 쥐고 있는 중장년츠의 기호라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드라마, 자극적인 내용의 드라마'를 선호하는, 그들은, 결국 우리나라의 '생각하지 않는 중장년층'으로 귀결된다. '생각없는 세대'를 위한, '생각하지 않는 드라마', 그 속에서 새로운 시도는 점점 고갈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생각없는 세대를 위한 생각없는 드라마는 역으로 이렇게 생각없는 사회를 조장하는 중이다.



생각하는 드라마, 그렇다면 무엇을 생각할까?
생각없는 세대를 위한, 생각하지 않는 드라마, 이 정언은 궤변과도 같다. 그저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에 대한 호불호가 갈린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주말 드라마, 혹은 아침 드라마, 그리고 이제는 그런 드라마를 흉내내는 주중 미니 시리즈에 등장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적을 죽음으로 몰아넣거나, 자신과 똑같이 의식 불명 상태의 환자로 만들어 버리는 설정. '복수'라는 미명아래 자신의 자식마저 외면하고, 혹은 자신의 자식을 이용하여 누군가를 위해하는 설정들은, 오히려 웬만한 미스터리 스릴러의 내용들을 능가한다. 설정의 호불호, 혹은 자극성을 가지고 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는, 대부분 미스터리 스릴러물이 추구하는 주제 의식이 대중들의 입맛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너를 기억해>도, <신의 선물>도, 그리고 이제 <마을>도 모두, 결국 그 끝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에의 반추, 반성, 그리고 징벌이다. 여타 드라마들이, 욕망에 대한 징벌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 왜곡된 욕망을 또 다른 욕망으로 상쇄하는 반면, 대부분의 미스터리 스릴러들은, 인간의 욕망이 저질러 놓은 범죄로 시작하여, 그 헛된 욕망의 헛헛한, 혹은 무자비한 결말로 시청자를 이끈다. '성공'과 '밝은 미래'와 '화목'을 이야기하는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꺼림찍한 것이 시청자들의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

이제 4회에 이른 <마을>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수상하다. 이제 4회에 불과하지만, 등장인물들은 주연이고, 조연이고 할 것없이 저마다, 자신의 욕망으로 인한 숨기고 싶은 과거를 가진 인물들인 듯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마을을 관광 특구로 만들기 위해 살인 사건마저 덮으려는 도의원 서창권(정성모 분), 하지만 그가 살인 사건을 덮으려는 데는, 의문의 실종자 김혜진이란 인물과의 석연찮은 인연때문이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다. 가영이란 여고생이 자신의 어머니와 서창권의 사진에 집착하듯, 혹은 서창권의 아내 윤지숙의 '서창권의 여자 관계때문이라면 마을 모든 여자들을 적으로 돌려야 한다는' 말처럼 과연 이 마을에는 서창권의 아이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의 삿된 욕망은 마을의 실종 사건의 배경으로 검게 피어오른다. 하지만 권력을 지닌 서창권만이 아니다. 그에게 전화 한 통화로 미술 선생을 정직원으로 만들 수 있는 그의 처제처럼,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저마다의 욕망으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른 김혜진 실종 사건에 직간접적 관련자들인 듯 보인다. 심지어 파출소 한경사(김민재 분)마저 예외가 아니다. 

사망으로 처리된 자신의 과거를 찾아 마을로 찾아온 한소윤(문근영 분), 그녀가 찾아낸 죽지 않았다던 언니 한소정, 하지만 죽지 않았다던 언니는 자신의 친언니가 아니었고, 입양된 언니는 사고 후 살아남았지만, 소윤의 외할머니의 외면으로 보육원에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어렵사리 찾아낸 고모로부터, 아버지조차 친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렇게, 회를 거듭하며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는 사건들은 어른들의 부도덕함이다. 그리고 그런 어른들의 부도덕함으로 덮인 마을의 비밀에 유나, 가영 등 철모르는 아이들이 덤벼든다. 문근영이 분한 한소정 역시, 여전히 앳된 그녀의 모습처럼, 여섯 살의 나이에 사고를 당한 그 시점에 머물러 있는 어른 아이이다. 즉, 부도덕의 세계에 세례를 받지 않은 그래서, 면죄부를 가진 아이들이, 부도덕한 어른들의 세계에 메스를 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을은 단막극 <늪>으로 몬테카를로 tv 페스티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도현정 작가의 작품이다. 남편의 불륜을 궁극으로 자신의 처절한 죽음을 통해 복수를 가했던 처연한 <늪>의 주제 의식은, 일반적인 드라마의 '복수'화법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복수'도 하고, 나는 나대로 승승장구 해야 하는 요즘 시절, 과연 <마을>속 욕망의 노예가 되어 과거를 덮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결말을 이끌런지, 부디 시청률이 낮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지 말고 자신의 몸을 던져 남편을 징죄하던 <늪>처럼 오래도록 기억되는 드라마가 되길 바란다. 어차피 욕망을 반성하는 미스터리 스릴러에 내일은 없다. 

by meditator 2015. 10. 16. 15:18

<용팔이>의 후속으로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하 마을)>이 첫 선을 보였다. 20%를 육박하던 전작의 후광은 아랑곳없이 첫 회를 선보인 <마을>은 단번에 <그녀는 예뻤다>, <객주>에 뒤를 이은 꼴찌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환영받지 못하는 '미스터리 스릴러'인 <마을>은 아마도 앞으로도 '로코',와 '사극'이라는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장르를 뛰어넘기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점, 공중파에서는 쉽게 만나기 힘든 미스터리 스릴러 <마을>, 그것이 이 드라마의 묘미이자, 장점이다. 




마을의 비밀, 장소가 주인공이 된 드라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은 흡사 니콜 키드먼이 출연했던 2003년의 영화 <도그빌>을 연상케 한다. 로키 산맥의 평화로운 마을, 거기에 의문의 여인 '니콜 키드먼'이 등장한다. 마을은 아름다운 그녀로 인해 술렁이기 시작하고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러나 정작 이 영화의 제목이 '도그빌'인 것처럼, 영화가 그려내고자 한 것은 여주인공 니콜 키드먼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드러나는 '도그빌'이란 마을의 숨겨진 모습이다. 

그렇게 영화 <도그빌>처럼 <마을-아치아라의 비밀>도 우리말이지만, 생소한 '아치아라'라는 지명의 마을을 내세운다. 어린 시절 온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신마저도 '죽은 이'로 만든 '아치아라'로 향하는 젊은 여교사 한소윤(문근영 분)으로 드라마는 시작된다. 

하지만 비오는 날 연쇄 살인범의 사건 소식을 들으며, 호두를 문지르는 소리에 쫓겨 거리를 달리는 한소윤으로 시작된 드라마는 그녀가 도착한 아치아라가 그곳 사람들 말처럼 '가족같은' 곳이 아님을 감지시킨다. 그리고 장면은 바뀌어 이제는 마을의 유지가 된 마을 출신의 지역구 도의원이자, 한소윤이 일하게 된 해원 재단의 주인인 서창권(정성모 분)과 윤지숙(신은경 분)의 내연녀를 둘러싼 갈등이 보여진다. 윤지숙은 자신의 딸이 몰래 지켜보는 가운데 서창권의 내연녀랑 머리끄댕이를 잡고 '육박전'을 벌인 것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해원 중학교 원어민 영어 교사가 된 한소윤, 하지만 '작은 연못'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커다란 호수를 품은 마을은 온통 수상한 모습들 투성이다. 그녀의 방 맞은 편에 '신당'을 연상케 하는 이웃집 여인에서 부터, 그녀를 따라다니는 의문의 남자, 그리고 그런 수상한 모습 끝에 그녀는 폭우가 내린 얼마 후 따라나선 사생대회에서 범죄라고는 없었던 이 마을의 유일한 오점, 사라진 여선생으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을 부르는 듯 모습을 드러낸 시체의 앙상한 모습에 혼이 나가고, 아이들이 붙인 '시체샘'이라는 별명에 혼란에 빠진 한소윤을 한편으로 한채, 첫 회 드라마가 드러낸 것은, 시체의 발견과 함께 반응을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수상한 모습이다. 마치 모두가 공범자인 양, 그 시체와 관련된 범행을 아는 양, 석연치 않은 모습을 보이는 마을 사람들의 면면에서, <마을>의 실질적 주인공은 한소윤이 아니라, 어쩌면 아치아라라는 마을 그 자체일 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흘리며 드라마는 열린다. 거기에 미술 교사의 '아치아라에 빠져 그 누구도 이 마을을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그 심증에 의혹을 더한다. 



서로 다른 결의 추리가 주는 재미
앞서 니콜 키드먼의 <도그빌>을 예를 들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김은희-장항준 콤비의 <위기일발 풍년 빌라>가 '저주받은 역작'으로 불리워지듯이 생소한 장르이다. 하지만, 미드, 특히나 영드에서는 이렇게 장소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가 가장 인기있는 장르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닥터 후>로 인기를 끌었던 데이비드 터넌트가 형사로 등장한 영국에서는 인기리에 방영되어 시즌 2가 제작된 <브로드 처치(broadchurch)> 역시 조용한 마을에서 발생한 어린 아이의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입소문을 끌고 있는 < 포티튜드(fortitude)> 역시 북극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다룬다. <왓 리메인즈(whatremains)> 역시 한 건물과 거기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이다. 

이렇게 '장소'가 주인공이 된 미스터리 스릴러들은 <마을>처럼 하나의 사건, 주로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숨겨진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고, 거기에 그저 평범하고 착한 것처럼 보여지는 인간 군상의 숨겨진 비인간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물론 그 전개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그 비인간성의 폭로의 매개가 '종교'가 될 수도 있고, '바이러스'가 될 수도 있고, '이기적인 육친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든 평화로움과 이웃이라는 집단애에 숨겨진 인간의 또 다른 이면을 폭로하는 한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렇게 인간의 숨겨진 이면을 그린다는 점에서 벌써, 폭로와 반성보다는 환타지와 복수에 익숙한 우리나라 시청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장르라는 점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점에서 <마을>은 더더욱 시도되고, 웰 메이드의 좋은 선례로 남겨져야 할 '사명'이 있는 드라마가 된다. 기왕에, 막장식의 몇몇 재벌 치정극으로 재미를 본 sbs가 이쯤에선 그간의 오명을 씻을 조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 마을에서 벌어진 여느 장소를 배경으로 한 미스테리 스릴러의 공식을 순조롭게 따라나선 <마을>은 하지만 이미 첫 회 '마을의 진실'을 향한 추리의 갈래는 다양하게 갈라지며 볼 재미를 선사한다. 

단적으로 발견된 시체는 누구일까? 드라마 초반 복병처럼 등장한 윤지숙과 젊은 여선생의 육박전에서 보여지듯 한소윤의 방에서 사라진 여선생일까? 왜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공범자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과연 '시체샘'이라 불리게 된 법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한소윤의 정체는 무엇일까? 마을, 그것도 아치아라에 사로잡혀 귀신이 된 채 마을을 빠져나가지 못했다는 미술 교사 말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마을>은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심령극까지 다양한 갈래의 상상력을 추동한다. 과연 첫 회만으로 사고를 풍성하게 만든 ,마을>이 시청자들의 뒷통수를 '갈기며' 추리의 묘미를 더해갈 것인지, 그것이 바로 장소 스릴러 <마을>의 관건이 된다. 
by meditator 2015. 10. 8. 13:20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