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이 71주년이다, 벌써. 하지만, 7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우리 국회의원들의 독도 입성이 '정치적 행위'가 되어야 하고, 그 상대편인 일본은 오히려 시대를 거슬러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고 있다. 두 나라 사이의 역사적, 정치적 긴장감은 미국의 동아시아 벨트라는 전략적 군사적 연합에도 불구하고 쉬이 잦아들지 않는다. 광복한 지 70년이 지나도록 두 나라 사이의 알력이 쉬이 해소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 경계에 선 사람들은 어떨까? 8월 14일 방영한 <다큐 공감>은 자이니치 연출가 김수진의 이야기를 통해 여전히 그 경계에서 쉬이 자유롭지 않은 재일동포들의 삶을 다룬다. 




자이니치, 경계인의 삶
'자이니치'(在日, ざいにち) 는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통칭하는 표현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재일 한국인들을 뜻한다. 재일 한국인, 그들은 일본에 살며, 여전히 종종 일본인들에게 '조센징'이라 놀림을 받는 처지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일본에 온 사람들이 아니다. 대부분 일본에 의해 강제 징용 등으로 '끌려온' 사람들, 그러다 발붙이고 살다보니 이제 2세, 3세까지 일본에 살게 된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귀화'하지 않는 한 '자이니치'로 여전히 '국외자'로 취급받는 경계인들이다. 

경계인들의 삶은 어떨까? 도쿄케이자이 법학부 교수가 된 자이니치 서경식은 그 경계의 삶을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라는 학문의 영역으로 풀어낸다. 조선, 대한민국, 일본 그 어디에서도 정체성을 확인받을 수 없는 그의 존재가, 역사와 사회의 경계성으로 확산된 것이다. 와세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나가노 데쓰오였던 강상중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한국 이름을 찾았다. 하지만, 그 되찾은 한국 이름으론 일본 사회 진출이 어려워 독일로 유학을 가야만 했다. 그렇게 독일에서 공부한 정치학, 그는 일본의 근대화와 전후 정치사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을 가차없이 하며, 비판적 지식인이 되었다. 그의 '경계'가 그의 '비판'의 토대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도 내노라하는, 책만 내놓았다 하면 베스트 셀러가 되는 학자들이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경계'라는 그 모호한 정체성 위에 놓여있다. 일본인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 일본인 대접을 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한국에서도 환영받는 존재도 아니다.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한국 이름을 지키고 살자니, 일본 사회 내에서 삶은 고달프다. 이것이 여전한 '자이니치'들의 삶이다. 

그들 중 김수진은 대부격인 사람이다. 그의 일본인 아내는, 만약에 그가 '귀화'를 한다면 많은 자이니치들이 실망할 것이다라며 눈물짓는다. 재일 한국인의 대부, 대표적 연출가. 그는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유학왔다가 일가를 이룬 아버지가 물려준 이름 김수진을 고집하며, 30년째 연극 활동중이다. 그가 꾸려가고 있는 신주쿠 양산박은 일본인과 자이니치 단원들이 혼재되어 있는 극단으로, '자이니치'의 이해와 공감을 높일 수 있는 작품들을 주고 공연해 왔다. 

나날이 경직되어 가고 있는 한, 일 관계의 물꼬를 트기 위해 한국의 연극인들을 찾은 김수진, 그들과의 술자리에 그는 '조센징'이라 놀림받던 젊은 시절, 연극이 없었다면, 테러리스트가 되었을 것이라며 토로한다. 그렇게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고통받는 김수진은 무기 대신,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백년, 바람의 동료들>, <두 도시 이야기> 등을 통해 조국을 떠나 일본에서 떠도는 자이니치들의 삶과 애환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일본 내에서도 큰 상을 휩쓸며,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연출가이지만, 그는 공연이 있을 때면, 직접 견인차를 운전하며 무대를 꾸민다. 그뿐이 아니다. 때론 할머니 분장도 마다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다. 그뿐이 아니다. 그의 아내는 극단의 재정을 맡고, 또 다른 단원들을 무대 의상이며, 무대 장치까지 품앗이를 한다. 하루 7000원 짜리 방에서 단돈 33만원으로 한국에서의 며칠을 보내는 그와, 신입 단원을 뽑기조차 힘든 형편의 극단, 하지만 그와 단원들의 열정은 쉬이 지치지 않는다. 가난한 극단의 처지는, 난파선에 휩쓸리는 자이니치의 고단한 삶을 구현하기 위해 무대에 물을 퍼붓는 그의 파격적 연출을 실현하는 '천막 극장'이라는 차별화된 공연 방식으로 실현된다. 덕분에 그와 단원들은 천막이 펼칠 수 있는 곳이면, 일본 신주쿠의 신사든, 한국의 왕십리 역이든, 그 어디서든 자신들의 무대를 펼친다. 



경계인으로서 살아남기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60줄의 그는 아직 어린 두 아이의 아버지다. 스스로 충실치 못한 아버지라 자신을 평하듯, 그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인 학교를 다니는 그의 아이들은 인삿말을 제외하고는 한국어가 낯설다. 뒤늦게라도 아이들에게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려는 그, 하지만 그도 안다. 지금은 한국인이기도, 일본인이기도 할 수 있는 아이들이, 20살이 되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더 늦기 전에, 아이들에게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고자 한다. 

그가 서두르는 이유는 바로 아이들도 자신처럼 경계인이기 때문이다. 경계인으로서 부대끼며 살아가려면,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인식이 명확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들처럼, 가야인으로 태어나 신라의 명장이 된 김유신을 빗대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설명해 들어간다. 일본 사회에서 살기 위해, 일본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일본 사회에서 버틸 수 있다는 그의 교육관은, 곧 그의 신념이다. 그리고 그 신념에 따라, 그는 지난 30여년간 자이니치의 삶을 연극으로 구현해 왔으며, 그래서 이제 자이니치들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그것이 그가 일본에서 온전히 살아남는 방식이다. 
by meditator 2016. 8. 15. 06:05

100세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100세 시대라는 것은 그저 100세 까지 오래 산다는 것을 우리 사회 전반에, 그리고 나이 들어가는 삶에 대해 사고의 전환을 요구한다. 즉, 오래 산다는 것은, 오래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고, 거기엔 오래 활동할 수 있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가 따라붙는다. 그래서, 100세 시대를 맞이한 나이들어가는 삶은 그래서 녹록치 않다. 중년을 넘긴, 혹은 초로의 나이들어 가는 이들에게 이 후의 삶은 안락한 노후가 아니라, 또 다른 선택과 고민의 시간이 된다. 바로 이런 나이들어 가는 삶에 대한 선택에 대해 공교롭게도 7월 10일 밤 두 다큐가 길을 제시한다. 바로 kbs1의 <다큐 공감>과 <sbs스페셜>이다.


하루는 혜화동 고갯마루에 앉아있는데 마을 버스가 그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오고 있는 거예요. 평생을 혜화 전철 역에서 대학로 거리만을 오가며 쳇바퀴처럼 살아왔던 은수나 저희나 황혼기에 접어들도록 삶의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았습니다. 충분히 뛸 수 있는데도 은퇴 위기에 놓인 마을 버스의 모습이 저희와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마을 버스와 세 남자, 세계를 가다
7월 10일 <다큐 공감>은 '은수 교통' 출신의 마을 버스 '은수'를 타고 2014년부터 지난 2년간 페루에서 출발하여 중남미를 거쳐, 유럽을 지나, 이제 아시아 일주 중인 '중년'의 세 남자를 만난다. 

평생을 가장으로 '일벌레'임을 자임하며 살아왔던 임택(57세)씨, 그는 자신과 같은 운명이라 느껴진 마을 버스 은수와 함께 평생의 버킷리스트인 세계 일주를 계획한다. 그런 임택씨와 동행한 것은 IT회사에서 23년간 우직하게 일해왔던, 가정과 일밖에 몰랐던 정인수(47세), 하지만 그의 성실함에 아랑곳없이 2년 전 회사는 문을 닫았다. 하루 아침에 실직자 신세가 된 그는 '여행 작가'라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고, 여행작가 모임에서 만난 임택씨와 함께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 그리고 이제 곳곳에서 테러가 발생하는 위태로운 아시아 지역을 일주하기 위해, 그들의 '페친'이자 팬인 호주에서 온 실업자 총각 임성택(40세)가 합류했다. 

꿈을 찾아 떠난 여행이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9년6개월을 대학로를 오가면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늙은 버스 은수는 종종 불협화음을 냈고, 이제는 여유롭게 빨래를 하지 않고 오래 옷을 입을 수 있는 노하우를 전파하기까지 여정은 험란했다. '쌀이 떨어졌다'던 아내의 말을 접어두고, 은수에서 자고, 밥을 해먹으로 한 달에 60여만으로 유럽을 일주하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당장 가장으로 호구지책 대신 꿈을 향해 포기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을 선택했다. 규정속도 60KM에 묶여있던 은수는 그 속도를 처음 넘어섰을 때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제 고속도로에서 유유히 화물트럭을 앞지를 정도로 능력자가 되었다. 사람으로 치면 70 정도의 은수가 해내었듯이, 세 사람의 여정도 그렇다. 돈을 벌어다 주는 가장 대신, 세계 곳곳에서 만난 우리의, 혹은 이방의 젊은이들이 그들을 '아부지'라 부르며, 그들을 통해자신의 꿈에 대한 의지를 얻는다. 이제 마지막 여정, 그들은 말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도전과 도전을 하려는 의지가 살아있고, 실행에만 옮긴다면 아직 청춘이다.'



젊음도 성형할 수 있나요?
이렇게 쳇바퀴같은 삶의 공간을 박차고, 새로운 도전을 한 '중년들이 있는가 하면, 7월 10일 방영한 <SBS스페셜>의 중, 노년들이 '젊음'을 추구하는 방법은 젊어지는 인위적 방식을 통해서이다. 

”젊었을 땐 사는 게 바빠서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는 게 돈 벌어야 되고 애들 길러야 되고, 나라는 존재가 나를 잊어버리고 살다가 딱 보니까 내가 너무 늙어가지고 이대로 가다간 정말 우울하고 마음이, 이거 아닌데. 나 10년만 좀 약간만 댕겨가지고 10년만 즐겁게 해피하게 (살고 싶어요)“ (석현자씨 대화 中)

다큐는 젊음을 되찾기 위해 수술대위에 눞는 '어르신'들을 찾는다. 2008년 서울시에서 4만8천 명의 가구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40대 이상의 가구원들 중 40%가 성형 수술에 대해 긍정했다. 33.4%, 24.1%의 2,30대에 비해 높은 수치이다. 과연 나이든 사람들에게 성형 수술은 어떤 의미일까?

위의 석현자씨(57세)처럼 가족을 위해 희생한 자신의 젊음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인 경우가 그 하나다. 이들에겐 '젊음' 자체가 인생의 목표요, 자신을 '사랑'하며, '존재감'을 회복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석현자씨의 말처럼 이제는 그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 자신을, 앨범 속 젊은 모습을 통해 보상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조금 더 절실한 욕구도 있다. '어르신'이란 소리가 싫었던 최홍선씨(70세)는 눈 성형을 비롯한 몇 번의 성형으로 자신의 평가론 해운대 백사장을 당당하게 활보할 젊음을 되찾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동안 늙은 자신의 프로필만 보고 외면했던 직장이 성형 수술 이후에 생겼다는 것이다. 몇 번을 더 성형 수술을 해서라도 젊음을 유지하여, 80까지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이렇게 최홍선씨처럼, '젊음 예찬 사회'에서 나이 먹음은 곧, 사회적 퇴출로 여기며, 사회적 기회를 얻기 위한 절박한 선택으로 성형 수술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무모한 도전' 역시 생각보다 녹록치 않다. 성형 수술 후 젊어진 자신의 모습에 거울을 놓칠세랴 만족을 표하는 석현자씨와 달리, 그녀의 남편은 주름을 당기기 위해 찢어진 눈매가 낯설다. 그나마 낯설기만 하면 다행, 조금 더 젊어지려는 도전들이 때로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안면 리프팅과 코 수술을 함께 받았던 이윤정씨는 수술 후 차오르는 고름과 함께 '코'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젠 마스크가 없이는 외출조차 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최근 범람하는 성형외과들로 인해, 이윤정씨 처럼, 애초 의도와 달리, 과도한 성형 권유가 빈번해지며 부작용의 위험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부작용을 생각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것보다는 젊어지고 싶은 욕구가 컸다는 석현자씨처럼, 2014년 12월 기준 성형 시장의 규모는 7조 5천억에 도달했다. 그 중 주름 제거, 필러, 보톡스 등은 2010년 31.6%에서, 2014년 48.6%로 4년 사이 17%나 증가 추세에 있다. 


더 이상 젊지 않은 나이, 하지만 100세 시대는 젊지 않음을 용인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명퇴를 해도, 살아갈 세월은 창창하고, 부양할 가족은 여전하다. 그 남은 세월을 어떤 삶으로 살 것인가, 우리 시대의 그 방식에 대해, <다큐 공감>과 <SBS 스페셜>은 서로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공통점은 늙음에 안주하지 않고, 청춘에의 욕망에 기꺼이 답한다는 것이다. 답은 쉽지 않다. 쌀이 떨어진 가족을 두고 떠나는 가장의 길도, 기꺼이 수술대에 올라 젊음을 되찾는 방식도. 그들의 꿈에 쉬이 박수를 쳐주기에 우리 사회의 현실은 각박하고, 성형 수술로 젊음을 되찾으려는 노년을 비웃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나 '젊음'을 숭배한다. 노년의 바람직한 문화, 아니 사회 전체적으로 건강한 삶에 대한 공감이 없는 사회에서, 결국은 나이들어가는 각자가 선택할 몫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에 따라, 우리 사회 중, 노년의 삶, 그리고 나아가 우리 사회의 삶의 질도 달라질 것이다. 

by meditator 2016. 7. 11. 17:32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개성 부근 판문점에서는 3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6.25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정전 협정 서명식이 이루어 지고 있었다. 북한의 김일성, 중국의 팽덕회, 유엔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정정 협정서에 서명을 하였다.( 그곳에 남한 대표의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종이로 된 문서만이 있을 뿐이었다. 정전 협정이 발효가 되는 시간은 밤 10시, 10시가 되기까지, 155마일의 휴전선 각 고지에서는 마치 그간의 한풀이라도 하듯, 남과 북이 가지고 있는 모든 포탄을 소비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무차별 포격,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밤 10시,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은 적막에 접어 들었다. 정전이다!


그로부터 61년이 지난 2014년의 7월 22일, <다큐 공감>은 정전 협정 61주년을 기념하여, 우리 민족의 운명선이 되어버린, 휴전선의 존재를 되돌아 볼 '운명의 북위 1도'를 방영함으로써, 6.25 전쟁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운명의 북위 1도'는 올해 97세가 된, 6.25참전 당시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이었던 에드워드 로우니의 회고록 제목이다. 그는 맥아더 장군에서 북한의 남침 소식을 최초로 전한 장교였으며, 인천 상륙 작전과 흥남 철수 작전에 참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가 그의 책을 통해 전해준, 우리 민족의 운명선 '38선'의 결정 과정은 바로 우리의 운명을 좌우했지만, 전혀 우리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던 6.25전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1945년 8월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항복 이후, 소련군과 함께 우리나라에 주둔하게 된 미군은 '점령군'으로서 과연 군사 분계선을 어디에 정할 것인가를 놓고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작전팀의 장교들이 여러가지 조사를 통해 취합한 결과는 지금의 38도선이 아닌, 북위 39도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39도선은 한반도의 가장 잘록한 허리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혹시나 있을 지 모를 북의 도발시 방어에 가장 유리한 위치였으며, 그러기에 애초에 '도발'의 의도를 가지기 조차 여의치 않게 만드는 절묘한 위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장교들의 조사 결과에 대해 전략 기획단의 링컨 장군은 'NO'라고 답한다. 당시 인기리에 팔리던 책 중에는 니콜라스 스파이크만의 '평화의 지리학'이라는 책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 스파이크만의 주장은 전세계 주요 사건들은 북위 38도선 주변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파이크만의 이론은 근거가 희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링컨 장군은 스파이크만의 이론을 신봉했고, 그의 신념에 따라 남과 북의 경계선은 전략적으로 유리했던 북위 39도가 아니라, 155마일의 가장 긴 전선을 가진 38도선이 되었다. 

<다큐 공감>은 미 육군 역사 재단에서 6.25 전쟁과 관련된 역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스토이 부부가 에드워드 로우니를 비롯한 당시 참전 군인과, 38도선 주변에 살았던 민간인 등을 찾아다니며 당시 역사적 상황을 수집하는 과정을 함께 한다. 이제야 회고록을 낸 에드워드 로우니씨는 회한에 젖어 말한다. 당시 자신이 조금 더 강경하게 38도선의 결정을 반대했더라면 하고. 6.25를 연구하는 교수들도 입을 모아 말한다. 39도선이었다면, 어쩌면 전쟁은 없었을지도 모를 거라고, 아니 전쟁이 있더라고 전략적 우위를 점한 39도 선으로 인해, 남침은 그렇게 일사천리로 이루어 질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고. 역사에 'if'는 없다지만, 퇴역 미군 장교의 후회스런 한 마디를 통해 전해들은 우리가 간여할 수 없었던, 우리 역사의 진실은 안타깝다. 


아버지가 평양 출신이었던 그래서 6.25 이후 다시는 고향을 찾지 못했던, 재미 교포인 스토이 부인은, 말한다. 역사란, 그 기록을 후대에 남겨 전해주어야만 역사로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라고. 당대에서 사라지는 사실을 역사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래서 고향에 가지 못한 아버지 대신, 아버지로 하여금 고향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한 6.25 전쟁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한국과 미국을 종횡무진 누빈다. 

그리고 그렇게 미국 역사재단 연구자의 입을 빌어, <다큐 공감> 역시 61주년을 맞이한 정전 협정 기념의 의미를 되묻는다. 과연, 정전 협정의 그 순간에 조차 참석하지 못한, 우리에게, 38선이 결정된 역사적 아이러니를 통해 6.25 전쟁의 실체를 반문한다. 

그리고 이런 <다큐 공감>의 시도는, 6월 24일 방영된 '마지막 전사자' 등을 통해 일관되게 이루어지고 있다. 즉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하지만 정작 우리 손으로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던 비극적 현대사에 대한 꾸준한 발굴 작업이다. 


by meditator 2014. 7. 23. 17:19

7월 8일 <다큐 공감>은 대한 청년 자력 갱생 프로젝트 '열정이 힘이다'를 방영했다. 힘든 수능을 마치고 대학에 들어서는 순간, 또 다른 관문 '취업'을 위해, 스펙 전쟁에 휩쓸려 젊은이들이 고사되어 가는 현실에서 시험과 취직이라는 '정석'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젊은이들을 다룬 것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청년 장사꾼'의 두 ceo, 김운규, 김연석이다. 
두 사람은 인도 여행길에서 만났다. 이방의 낯선 여행길에서 운명처럼 네 번이나 조우하게 된 두 사람, 두 사람은 그 우연을 필연으로 여겨, 의기투합 함께 일을 벌인다. 
함께 장을 보러 간 시장, 가격도 물어보지 않고 필요한 비닐을 끊어버린 김연석 대표, 하지만 정작 값을 치루려고 보니, 자신이 선택한 비닐이 특수 처리된 것이라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놀란다. 그런 김연석 대표에게 김운규 대표는 아는 집이라더니, 미리 알아보지도 않았다며 조곤조곤 따진다. 한 사람은 덥수룩한 수염에, 반바지, 샌들차람, 또 한 사람은 깔끔한 옷차림에, 운동화, 겉모습부터 판이하게 다른 느낌을 주는, 그리고 그 느낌만큼이나 생각도, 취향도 다른 이 두 사람이 '청년 장사꾼'을 이끄는 동업자다. 

결혼한 배우자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두 사람은, 2012년 이태원 우사단로에 처음 문을 연 카페 '벗'을 시작으로 현재 모두 7개의 가게를 소유한 돌풍의 주역들이다. 
그들은 그저 많은 가게를 소유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장사'에 문화를 접목한 문화 게릴라들이다. 

이태원 우사단로, 철거가 예정된 이 지역은 이태원에서도 외진 오가는 사람조차 없는 쓸쓸한 거리였다. 당연히 점포 세도 싼 이곳에 두 사람은 첫 가게를 연다. 취재진이 찾은 날, 우사단로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매주 토요일, 우사단로는 노점들로 북적인다. '들어와 프로젝트'로, 지역 주민과 예술가들이 함께 '플리마켓'을 열고, 입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이곳을 찾은 것이다.  금천교 청년 장사꾼 매장이 있는 골목에 들어서자, 청년 장사꾼의 파란티를 입은 청년들이 거리에 서서, '어서오세요.'를 외친다. 오래된 가게들에, 그저 그곳을 알고 찾던 손님들만이 오가던 거리는, 청년장사꾼이 오면서, 거리 자체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즉, 두 사람은, 상권이 형성되지 않은 이곳에, 문화적 마케팅을 하고 사람을 불러 모아, 상권을 창조해 내었다. '다같이 잘 사는 마을'을 만들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없었다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7개 매장 모두가 이런 문화적 경영의 소산이다. 


틈을 내어 청년 장사꾼들은 홍대를 찾았다. 이른바 '간판 깨기', 오늘의 목표는 햄버거 집이다. 홍대 상권에서 알아준다 하는 햄버거 집을 돌며, 파는 상품, 서비스, 인테리어 등, 모든 것을 샅샅이 분석하고, 이것을 청년 장사꾼 모두와 공유한다. 청년 장사꾼의 직원들은 모두가 사장이다. 대표는 두 사람이지만, 함께 합숙을 하며 가게가 끝난 시간 잠을 쫓으며 회의를 하고, 상권을 연구하는 직원들은, 모두 매장의 주인이 될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취업이 예정된 교육생은 있지만, 알바는 없다. 모두 정직원이다. 

매장 운영도 독특하다. 세상 어디서도 만나기 힘든 톡톡 튀는 인테리어,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비이커가 맥주잔이 되는 기발한 아이디어, 거기에 수시로 벌어지는 이벤트, 당연히 양질의 음식은 기본, 사람들이 즐거이 이곳을 찾게 만든다. 

누구도 생각지 않은 아이디어로, 고사되어 가는 상권을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겠다는 문화적 마인드로 되살린 이들, 청년 실업 시대, 말 그대로, 자력 갱생의 모범이다. 

이렇게 자신의 꿈을 향해 돌진하는 젊은 ceo들이 맞닦뜨린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떨까? 상권 분석 시간, 지도를 펼치고 김운규 대표는 말한다. 중심 상권, 거기에는 대기업의 각종 프렌차이즈 업체들이 자리잡고 있다고, 그런 중심을 제외한, 외진,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그래서 상대적으로 세가 싼 곳이, 바로 문화 게릴라 청년 장사꾼의 목적지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날, 같은 시간, <pd수첩>은 어쩌면 이들의 부푼 꿈이, 대한민국에서는 여의치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1001회를 맞이한 <pd수첩>은 1000회 특집으로 '돈으로 보는 대한민국' 시리즈를 방영 중이며, 그중 2부로, '임대업이 꿈인 나라'를 방영했다. 
1000회를 맞이한 pd수첩은 20세 이상 1000 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했다. 이들 중 88.4%가 돈이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고 대답했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편하게 돈을 벌수 있는 일이 '부동산 입대업'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이른바 '핫플레이스'로 각광 받고 있는 곳이 '가로수 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로수길'이라는 곳이 원래 부터 그런 곳이 아니었다. 청년 장사꾼의 김연석, 김운규 대표가 문화 마케팅을 통해 외진 상권이었던 이태원 우사단로를 사람들이 들끓는 인기 상권으로 만든 것처럼 그런 곳의 유래가 바로 가로수길이다. 
강남에서 비교적 외진 곳이었던 가로수길, 압구정동과 신사동 상권 사이에 끼어, 비교적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던 이곳에, 상대적으로 싼 임대료에, 조그마한 가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독특한 분위기의 까페, 예술가인지 상인인지 구분되지 않던 가게 주인들, 그리고 '발효빵'처럼 야심차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게를 연 사람들이 처음 가로수 길에 모여 들었다. 

하지만 지금 가로수 길에 이들은 없다. 발효빵으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은 가로수 길에서 밀려나, 가로수 길 뒤편 골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날이 올라가는 가로수길의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게가 잘 되자 주인이 나가라고 했단다. 처음 가로수 길에 모여들어, 우리가 '가로수길'이라고 알고 있는 정체성을 만든 이들은 모두 이 빵집 주인의 처지이다. 

'PD수첩' 1000회 특집방송 2부로 '임대업이 꿈인 나라'가 방송됐다. ⓒMBC 화면 캡쳐

그렇다면 지금 가로수길을 차지하고 있는 건 누구일까?
3년전 모 대기업 회장 자녀가 당시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가로수길에 있는 지하 이층, 지상 6층의 건물을 구입했다. 겨우 대리 직급인 이들은 은행으로부터 170억의 담보 대출을 받아 이 건물을 구입했다. 3년 만에 이 건물은 330억원 무려 두 배가 뛰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 가격이 아니라더라도, 이 건물에서 벌어들이는 임대료만으로도 이들이 대출받은 돈은 갚을 수 있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기존에 가로수 길을 만들었던 상인들은 하루 아침에, 혹은 서서히 집주인의 통보로, 혹은 감당할 수 없는 임대료 때문에 가로수 길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대기업 계열의 각종 프렌차이즈 업체들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대한청년 갱생 프로젝트라며 가슴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는 '청년 장사꾼'의 미래일 지도 모른다. 

몇 년 만에 겨우 가게가 자리를 잡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집주인의 일방적인 통보로 가게에서 밀려나게 된 옷가게 주인은 법에 호소해 보았지만, 법은 가진 자의 편이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했던 잔인한 슬픈 기억과 7000만원의 빚이다. 

낙수 효과는 커녕, 우리나라의 대기업은 새로운 사업을 창조해서 돈을 버는 대신, 손쉽게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온갖 특혜와 특권을 이용하며, 중소상인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것으로 기업의 생존 전략을 짠다. 그리고 그 결과, 가로수길 등 이른바 '핫플레이스'는 그 명망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밀려나고, 대신 대기업들의 밥그릇 싸움터가 되었다. 
가로수 길의 집주인들을 분석해 보니, 장년층도 있지만, 20대도, 심지어 10대도 있다. 지난 10년간,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애써 일하는 사람들의 임금은 그다지 큰 폭의 차이가 없다. 특수 의료업계 종사자의 2005년 임금이 125만원에서 현재 133만원인 것처럼, 반면, 가로수길에 평당 시세는 2000만원에서 2억원이 되었다. 40만원의 간호사였다가, 복부인이 되어 월 600만원이 임대 수익을 바라보는 주부는 당당하게 자녀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좋겠다'고, '엄마가 나'라서. 그녀는 부자가 되기 위해 '부동산'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임대 수익이 좋을 때는 맑은 공기마저 자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하는 교수, 임대업이 꿈이라고 말하는 초등학생, 바로 이것이 대한민국의 또 다른 현실이다. 이런 나라에서의 청년들의 자력 갱생 프로젝트? 어쩌면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닐까? 청년들에게 꿈을 꾸라고 하기 전에, 꿈을 꿀 수 있는 나라, 꿈을 꾸어도 절망하지 않는 나라가 먼저가 아닐까? 아니, 꿈이 부동산 임대업이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언젠가 몇 년 후, 청년 장사꾼이 닦아놓은 상권에 대기업이 침을 흘리지 않는 세상 그런 날이 가능할까? 같은 세상, 다른 현실, <다큐 공감><pd 수첩>은 바로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by meditator 2014. 7. 9. 13:52

6월 10일 밤 10시 50분에 방영된 다큐 공감은, <글로벌 리포트- 파리, 뉴욕, 그리고 서울>이라는 제목으로 세계 속의 대한민국 여성의 현주소를 다룬다.


왁자지껄한 화장품 시연장, 그곳에 모여든 중국 등 외국 여성들은 한국 여성들의 화장 비법에 관심을 쏟고, 그 비결이 되는 화장품을 사기 위해 지갑을 연다. 최근 <별에서 온 그대> 등 한국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캐릭터가 인기를 끌면서, 그 주인공들의 패션, 화장 등 스타일 비법 등도 함께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파리지엔느'나 '뉴요커'처럼 '서울여성'도 이제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적 상품이 되어 세계 시장에 당당하게 자리매김할 가치가 있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 <글로벌 리포트-파리, 뉴욕, 그리고 서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글로벌 리포트-파리, 뉴욕, 그리고 서울>에서 문화적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한 이른바 '서울 여성'상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큐는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상으로 자리매김한 몇몇 유명 인사들을 찾아나선다. 

우선 오랫동안 슈트트가르트 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활약하다가 최근 국립 발레단 단장에 취임한 강수진, 그녀는 말한다. 어제의 내가 바로 오늘의 나 자신의 경쟁 상대라고. 발표회 날 단 하루를 위해, 345일 연습을 한다는 그녀는, 바로 그 '자기 계발'이라는 말로 대신할 345일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여성이다. 

또 다른 여성상으로 등장한 이는, 아나운서에서 여행 작가로, 이제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음악회 주최자가 된 손미나이다. 그녀는 앞날이 보장된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내던진 채 무작정 여행을 떠났던 시절을 회고하며, 인생이 늘 장밋빛 일 수 없으며,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더 좋은 일이 있으려고 그런다는 자신의 긍정 마인드가 자기 삶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확신한다. 

외국 유학 경험이 없이도 영어 동아리 경험 만으로 CNN기자가 되고,  아이랑 TV 사장까지 역임한 손지애에게 일만큼 중요한 것은 아이 셋의 엄마라는 사실이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엄마라는 위치를 놓지 않은 그녀는 불굴의 의지로 세 아이들의 모유 수유를 성공했던 것처럼, 늘 자기 삶의 또 다른 한 축으로 성공한 엄마를 놓지 않았다.

디자이너 최지형 역시 미혼의 그녀도 멋진 사람이었지만, 결혼을 한 이후의 자신은 일과 삶의 균형을 완성한 느낌이라 자신있게 말한다. 


거침없는 자유로움의 뉴요커나, 쿨한 멋스러움을 내세운 파리지엔느와 달리, <글로벌 리포트-파리, 뉴욕, 그리고 서울>이 내세운 서울 여성상은 진취적이며 열정적이면서 동시에 현명한 여성상을 의미한다. 
진취적이면서 열정적인 여성상은 이른바 우리 사회가 일반적으로 그려내는 슈퍼 우먼으로 연상되는 바로 그 모습이다. 그 어떤 장애물도 꺼리낄 것없이, 모든 분야에서 성공을 향해 도전하는 여성,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서울 여성'은 거기에 또 하나의 요소를 더한다. 역사적 인물로서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에 까지 그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며, 전통적 여성들이 가진 현명한 미덕을 서울 여성의 장점으로 덧붙인다. 즉, 손지애처럼 사회적 성공을 거두었으면서도, 여전히 엄마로서의 역할을 놓지 않는 모습이라던가, 최지형처럼 결혼을 인생의 완성이라 여기는 가치관을, 한국 여성이 가진 또 하나의 미덕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조화을 추구하는 '서울 여성'의 스타일은 그들이 추구하는 외향에서도 드러난다고 한다. 가장 세련된 화장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 화장을 한 듯 보이기보다, 자연스러운 본연의 매력처럼 드러나기를 원하는 '서울 여성' 스타일이, 바로 진취적이고, 열정적이면서도, 현명한 서울 여성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다큐는 정리한다.

<글로벌 리포트-파리, 뉴욕, 그리고 서울>을 통해 본 '서울 여성'은 한류 붐을 타고 인기를 끄는 드라마 등을 통해 인식의 저변을 넓히고, 거기에 활발하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 인사들의 성취를 더해, 하나의 문화적 캐리터로 자리잡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해석의 이면은 존재한다.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면은, 자본주의 사회 속 경쟁에서 유리 천장을 뚫고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기 위한 슈퍼 우먼의 생존 본능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니까. 또한 '서울 여성'의 또 다른 매력적 요소로 등장한 '현명한 지혜'란 여전히 전근대적인 가족 제도의 틀이 압박하고 있는 슈퍼 우먼의 또 다른 그늘로써 풀이 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글로벌 리포트- 파리, 뉴욕, 그리고 서울>을 통해 문화적 상징성을 띤 '서울 여성'은 충분히 그러할 만 하다 하지만, 정작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에 있어서는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음을 다큐도 숨기지는 못한다. 

대기업의 입사 시헙에 면접관으로 자주 참여했다는 이상봉 디자이너는, 입사 지원자들의 얼굴이 서로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해져가는 상황을 애석해 하면서, 성형이 일반화되는 우리의 실정이, 트렌드를 따라가는 데 있어서는 발빠르지만, '획일화'의 함정이 있음을 짚고 넘어간다. 

<글로벌 리포트- 파리, 뉴욕, 그리고 서울>은 자랑스레 서울 여성이라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문화적 상품으로서 서울 여성을 내세우지만, 정작 다큐의 도입부, 서울 거리에서 만난 우리의 젊은 여성들에게서, 그렇게 세계가 인정한 서울 여성에 대한 자부심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 여성하면 떠오르는 질문을 던졌을 때, 화면에 비춰진 대부분의 여성들은, 된장녀, 성형이란 단어를 떠올리며, 그런 단어에 부합되는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문화적 상품이 되고, 세계적 트렌드가 되어간다는 '서울 여성',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성형 중독에, 된장녀라는 부끄러운 소비 사회의 풍조가 숨겨져 있다. '소퍼 홀릭'이라는 이면을 가진 '뉴요커'처럼 말이다. 남들에게는 자랑스레 팔 수 있는 상품 가치를 지닌 여성사이라도,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자부심을 가진 여성상이 될 수 없다면 생각해 볼 여지을 남긴다. 문화적 상품으로서의 '서울 여성'과, 현실의 '서울 여성' 사이의 괴리는 우리 시대의 남겨진 숙제이다. 


by meditator 2014. 6. 1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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