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0일부터 9월 9일까지 방영되었던 ebs의 다큐 프라임은 <한국인의 집단 심리 WE>를 통해 우리의 집단 문화를 진단해 본다. 그 중 1, 2편은 PD인 오정호씨에 의해 책으로도 발간된 홍보, PR, 프로파간다의 매커니즘을 다룬 <대중 유혹의 기술>이다. 그  대중 유혹의 기술 세번 째 명제, '그들의 귀에 드라마를 집어 넣어라'는 태국의 드라마와 현실의 맞물림을 분석한다. 


2013년 태국 범죄 중 성폭행, 강간과 관련된 범죄가 3만건을 육박했다. 하지만 신고된 범죄 중 10% 정도가 조사를 받았고, 그 중 2000 명만이 검거가 되는게 태국의 현실이다. 왜 이렇게 성과 관련된 범죄는 만연한 반면, 그와 관련된 단속이나, 단죄는 허술한 것일까? 이에 대해 <대중 유혹의 기술>은 태국 드라마의 경향성을 예로 든다. 태국 드라마 내용 중 연인간 말다툼이나 데이트 폭력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드라마는 이를 낭만적 연애의 한 과정처럼 묘사한다. 그리고 이는 9시도 안된 시간 태국의 어린이들까지 보는 시간대에 높은 시청률로 인기를 끈다. 태국의 여성 단체들은 이런 드라마 속 성적 내용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지만, 시청률에 투항한 제작진들은 아이들과 함께 보는 이 시간의 성폭행에 가까운 내용을 포기하지 못한다. 심지어 2008년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서 데이트 강간이 드라마 중 가장 선호하는 장면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태국 드라마의 내용, 그리고 시청자의 선호도, 그리고 시청률을 미끼로 이를 양산하는 제작진, 그리고 높은 성폭행 범죄율을 통해 다큐는 드라마 속 내용과 현실의 상관 관계를 설파하고자 한다. 



태국엔 성폭행 드라마, 우리나라엔 막장 드라마 
태국의 성폭행 드라마와 우리네 드라마가 무슨 상관이냐고? 태국에 데이트 폭력을 다룬 드라마가 만연한다면, 우리네 드라마에는 외국어로도 번역되지 않고 고유 명사로 쓰이는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있다. 아침 드라마로부터 시작되어, 주말로 번지고, 이제 시청률이 변변치 않자 주중 미니 시리즈에까지, '막장'의 막강한 영향력은 지칠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 중이다. 

<왔다 장보리>를 통해 악역 연민정을 연기한 배우 이유리에게 연기대상을 안겼던 김순옥 작가는 '역시 김순옥'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신작 <내딸 금사월>을 주말의 스테디 셀러로 등극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런가 하면, <상류 사회>, <가면>에 이어 <용팔이>는 재벌 집안을 배경으로 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막장 스토리로 SBS 드라마에 시청률 1위의 보상을 안겨주고 있는 중이다. 

갱도의 마지막 부분을 뜻하는 막장이 드라마로 오면 시청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연성과 설득력을 제친 채 자극적인 설정의 반복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드라마의 한 장르가 된다. 거기에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들엔 몇 가지 특징이 더해진다. 

우선 드라마의 전반적 코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복수'이다. 최근 종영한 <여자를 울려>의 경우에서도 보여지듯이 시청률이 좀 안나온다 싶으면 드라마는 그중 '복수'의 코드'를 강화시키고 애초에 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궤도도 변경시킨 채, 극중 주연의 비중조차 변경시키는 것이 이제는 한국 드라마에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내딸 금사월>에서 신득예 역을 맡은 전인화는 <전설의 마녀>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 복수를 위해 칼을 갈며 남편과 자식까지도 이용하는 집요한 집념의 캐릭터로 다시 한번 등장하여 <내딸 금사월>의 동력을 추동한다. 남편으로 인해 망한 친정, 그리고 잃어버린 첫사랑을 되갚기 위해 자신이 낳은 딸도 보육원에 버려둔 채 본래의 얼굴을 숨기며 복수를 위한 칼을 간다. 그런가 하면 <용팔이>는 재벌가의 경영권을 독차지하기 위해 의붓 동생을 의도적으로 뇌사 상태에 빠뜨린 철면피한 오빠가 등장한다. 그리고 의로운 의사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 여동생은 경영권도 되찾고 자신을 의식 불명 상태로 빠드린 인물들에게 '복수'를 한다. 

사이코패스를 향한 복수를 종용하는 드라마 
이렇게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막장' 드라마의 주된 동력은 '복수'이다. 자신을 가해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보복, <용팔이>의 한여진이 냉정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인물들에게 복수를 하고, 신득예가 자신의 가문을 파멸로 빠뜨린 사람들을 향해 케이크 독살 사건과 같은 술수를 부릴 때 시청자들은 통쾌해 한다. 과연, 이런 '보복성' 드라마의 설정은 우리 사회에 최근 급증하고 있는 묻지마 증오 범죄와 무관할까? <미세스 캅> 마지막 회, 강태유(손병호 분)를 죽이겠다고 다짐했던 강력팀 반장 최영진(김희애 분)는 결국 그 다짐을 실천한다. 물론 드라마는 칼을 뽑아든 강태유를 향한 최영진의 정당방위로 처리했지만, 이제 드라마도,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시청자도  더 이상 강태유같은 사람을 법의 심판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좀 더 끔찍하게 잔인하게 가혹하게 복수를 할 것인가, 새롭게 등장하는 '막장 ' 드라마들은 저마다 기묘한 방법을 강구한다. 

그리고 또 하나 막장 드라마의 새로운 특징으로 등장한 것은 악의 주구가 '사이코패스'스러워 졌다는 것이다. 극중 복수의 대상은 '인간'이라 치부할 수 없는 파렴치한 인간 말종들이다. 도덕적 기준 따위는 저버린 지 오래, 수치심, 죄책감 따위도 들어설 여지가 없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의 인물들이 드라마 속에 넘쳐난다. <용팔이>의 한도준(조현재 분)은 마치 중2병 인물처럼 여동생을 두고 아버지로 부터 받은 차별을 내재화시켜 도덕심 따위는 말아먹은 파렴치범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파렴치범에 대한 동생의 복수는 모든 경제적 특권을 빼앗긴 채 자신과 똑같이 13층의 병실에 의식 불명 상태가 되어 눕히는 것이다. <내딸 금사월>은 부모대의 애증 관계가 고스란히 아이들대로 이어진다. 심지어 강만후(손창민 분)는 자신이 목숨을 빼앗으려 했던 가해자임에도 오민호(박상원 분)의 아이와 자신의 아이가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을 내보일 정도이다. 도덕적 가치 따위는 버린지 오래, 전도된 감정과 가치관들이 드라마를 통해 '악'의 이름으로 마구 분출된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이런 '정상'을 벗어난 사이코패스적인 악행의 당사자들, 대부분 극중 부도덕하게 부를 축적하여 선한 이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인물들에 대해 '현실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만나는 미디어를 통해 만나는 가진 자들의 맨 얼굴이 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뉴스에서 휠체어를 타고 등장해 조롱거리가 되었던 재벌은 곧 드라마의 주된 설정이 되고, 자식의 아들을 위해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고 돈을 던져 준 재벌 에피소나, 땅콩 나부랭이에 갑질을 했던 해프닝은 드라마를 자극적이란 수식어에서 구해준다. 

이런 반인격적 장애를 가진 나쁜 놈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시청자들은 이렇게 현실을 베낀듯 나쁜 사이코패스적 악인들을 향한 착한 사람들의 마지못한(?) 보복 범죄에 카다르시스를 느끼며 응원한다. 나쁜 놈들은 '반인격적 장애'를 가진 파렴치범을 상대하는 방법은 이기에,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하고, 복수하는 대상이 될 뿐이다. 맞써 싸우는 방식은 그들처럼 힘을 가진 존재가 되어,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 '복수'이다. '싸움'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고, 보복하는 것이다. 드라마는 통쾌하고 시원해질 수록, 현실에서 싸울 방법은 요원해진다. 왜냐하면 시청자들은 신의 손을 가진 대번에 재벌가의 딸이 반할 의사도 아니요, 그렇다고 눈만 뜨면 대번에 경제력을 회복할 재벌가의 딸도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의 싸울 대상은 여전히 전지전능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이 매료된 '막장'은 보는 동안은 시원하고 통쾌하지만, 보고나면 한결 더 허무해지는 이유가 그때문이다. '막장'식의 복수에 길들여지다 보니, <어셈블리>의 '당신이 외면하는 정치'를 향한 진득한 외침은 그저 시시해 보일 뿐이다. 그저 통쾌한 맛에 보고, 즐기면 그뿐이라고 하지만, 그 '막장'에 중독되어 조롱하고 대리만족 하는 동안, 어쩌면 우리는 '막장'의 세상에 무감각해지고, 무기력져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싸우는 방법조차 잃는다. 그저 기억나는 것이곤, 보복, 복수, 현실의 범죄는 이걸 증명한다. 재밌어서 보는 드라마, 시청자들이 즐겨 찾아서 만드는 드라마가 낳은 결과이다. 

by meditator 2015. 10. 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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