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이>를 보고나서, 문득 어디선가 이 비슷한 이야기를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봤는데.......아, <스캔들>! <스캔들>의 그 '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은 영화 <화이>와 유사하다. 괴물이 된 아버지를 맞딱뜨린 아들, 아들들에 대한 또 다른 보고서이다. 


무엇보다 두 이야기는 모두 '유괴'가 사건의 실마리가 된다. 
영화 속 아버지들도, <스캔들>의 아버지 하명근도 아이를 유괴한다. 그리고 그 유괴는 그저 단순한 유괴라는 범죄만이 아니라, 그 순간 충동적이었건 그렇지 않건, '징벌'의 의미를 지닌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또 다른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두 영화 모두, 유괴해 온 아이를 죽이지 않는다. 그 아이를 죽이면, 자신은 완전 범죄로 후환을 없앨 수 있음에도 결국 그 아이를 품고 산다. 그리고 아이는 유괴범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란다. 유괴범을 닮아가며. 유괴범을 배워가며. 

(사진; osen)

물론 여기서 영화와 드라마의 길은 나눠진다. 
애증의 휩싸여, 늘 하은중이 된 장은중에게 거리감을 두었던 하명근 형사는 그럼에도 어느새 자신의 아들만큼 그에게 깊은 정을 주어버린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유괴범이 되었지만, 여전히 '태하'의 비리를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는 강직하던 형사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하명근을 하은중은 닮아간다. 
반면, <화이>는 아버지를 다섯이나 두었고, 그들 각각의 방식으로 넘치는 사랑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들처럼 되어가는 방식도 훈련받는다. 그리고, 괴물이 된 아버지들의 전사에는 또 다른 괴물이 존재한다는 걸, 그리고 그 괴물에게서 도망가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 했음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아니다. <스캔들>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명근과 하은중 부자의 관계가 '부전자전'의 긍정적 효과였다면, 장태하와, 그의 두 자식, 장은중, 지금의 구재인, 그리고 장주하는, 아버지를 닮은 괴물로 키워진다. 구재인은 자신이 빼앗긴 장태하의 아들 자리, 태하 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되찾기 위해, 또 다른 장은중을 없애달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태하 그룹을 얻기 위해 장인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장태하처럼, 그의 품에서 자란 자식들은 그의 방식대로 사는 것을 배운다. 

두 작품이 말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괴물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세대, 그리고 그 아버지 세대의 방식대로 보고 자란 아들의 세대가 살아가는, 살아가야 하는 방식에 대해, '부전자전'의 태도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에서, 사건을 확산시키는 계기로 '철거'가 등장하는 것은, 당대성을 상징하는 가장 적절한 소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스캔들>의 장태하는 자신의 부를 완성하기 위해 부자비한 철거를 감행한다. 주저하는 경찰과 철거 용역들 앞에 그 스스로가 불도저를 밀고 들이 닥친다. 철거와, 건설이라는 두 단어로 상징되는, 개발 경제 시대의 아버지이다. 
<화이>의 아버지들은, 경찰과 철거 용역조차 해결해 내지 못한 단 하나 남은 철거 현장의 집을 없애기 위해 투입된 특수 용역인 셈이다. 우리가 그런 일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결국 경찰의 끄나풀이, 기업의 하수인이 된 또 다른 세대의 아버지들을 상징한다. 

<화이>의 아버지들이 그들을 괴롭히던 괴물을 피하기 위해 그 스스로 더 잔혹한 괴물이 되어가는 방식을 택한 것처럼, 그 아버지들은 그들의 방식을 화이에게 강요한다. 너도 우리처럼 괴물이 되어서 살면 편하다고.<스캔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십 여년 만에 처음 만난 아들에게 장태하가 권하는 것은 자기 대신 재판에 나가, 자기처럼 철면피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장태하의 아들이 되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아버지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아들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기를 강요한다. 

<화이>도, <스캔들>도 결국에 돌아오는 건 질문이다. 그것이 개발 독재 시대의 아버지들이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괴물이 되어버린 그 이후 세대의 아버지들이건, 결국 모든 사건의 열쇠는 결국 아들의 손으로 넘겨진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화이>는 영화답게, 두 시간에 모든 것을 끝장내야 하는 완결적 스토리답게, 그리고 청소년답게, 화끈하게 징벌과 극복을 해소해 버린다. 말 그대로, 괴물을 삼켜버린다. 
반면, <스캔들>의 해법은 복잡하다. 장은중과 또 장은중은 사회 물도 먹을 만큼 먹은 만큼, 머릿 속이 복잡하다. 계산해야 할 것들이 많다. 더구나, 36부작의 장편을 이끌어 가야 할 만큼 고민할 꺼리도 많다. 
그래도 역시나 길을 두 가지이다. 이제는 구재인이 된 장은중처럼, 그 아버지가 그랬듯이, 자신의 것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이 상처받은 걸 돌려주기 위해 괴물이 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은중이었던, 이제는 장은중이 선택한 방식은 <화이>의 방식일 것이다. 화이가 화끈하게 몇 자루의 총으로 해결했던 청소를, 장은중은 아주 복잡하게 도대체 아직은 그 해법이 무엇인가조차 그저 짐작만 할 수 있게, 큰 그림의 청소를 해나간다. 그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는 여자와 재판에서 대면해 놓고서도, 그녀의 공소 사실을 천연덕스럽게 부인할 만큼 속을 내보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믿어달라고 외칠 만큼, 그의 행보는 의심스럽지만, 의지는 확고하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든, 공은 <화이>와 <스캔들>을 보는 관객과 시청자들에게로 굴러온다. 
당신들이 부정해 마지 않는 역사가 이제 당신들의 몫으로 던져졌다. 당신들은 어떤 방식을 택할래? 하고, 언제까지 아버지가 나뻐서 라고 징징거릴 때가 아니야! 라고 .

* <스캔들>에는 괴물이 되느냐, 마느냐 서로 다른 두 아들의 선택이란 흥미진진한 볼거리와 함께, 현실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대사를 쫄깃하게 즐기는 재미가 더해진다. 
에피소드 1; 윤화영이 검찰 총장을 찾아갔다고 하자, 장태하는 그 검찰 총장을 구워 삶으라 한다. 하지만 그 검찰 총장이 강직해서 그럴 것이 없다고 하자, 없는 애라도 만들어서 신문에 뿌리라고 한다. 
에피소드2; 조진웅 태하 건설 사장과, 그의 아버지 조치국 장관이, 개발제한 구역 땅을 풀어 땅 장사를 한 이야기를 나눈다.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땅 장사에 빛을 내서 끼어들어 망해가는 것을 조롱하며. 대한민국은 땅도, 집도, 강도 모조리, 자기들 봉이라며 낄낄거린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빛을 내서, 그걸 사지 못해 안달을 한다고 비웃는다. 


by meditator 2013. 10. 14. 10:14

이제 수능이 한 달도 채 남지않은 아들과 함께 <화이>를 보고 왔다.

어라, <화이>는 청소년 관람불가인데? 다행히도 우리집 고3은 이미 주민등록증이 나왔다. 게다가 생일이 빠른데, 1년을 숙성시켰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바람에 실질적으론 대학 1학년 나인인 셈이라, 법적으로 하등 <화이>를 관람하느데 문제가 없다. 그래도 나이로는 대학생이라도, 아직 고등학생이라서, 정체성은 여전히 '고딩'인지라, <화이>라는 영화를 받아들이는 건 딱 고딩 그 수준이다. 
<화이>를 보고 나온 아들 녀석의 한 마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그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굳이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영화같다. 설정은 충격적이지만, 화이와 아버지들의 연기가 그 잔인함을 뛰어넘는다.'

살부(殺父)의 스토리를 가진 <화이>가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 근본적으로 청소년 관람가가 되기는 힘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장준환 감독도 일찌감치 청소년 관람가 따위는 포기하고 한껏 폭력의 미학(?)을 심화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에서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중학년, 아니 저학년 때 이미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비를 오인하여 죽이고, 심지어 자신의 어미와 결혼을 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만화로 된 것 부터 안기는 우리나라에서, 좀 더 직설적이고, 폭력적이라고 해서, 화이의 살부 스토리를 청소년 관람불가로 처분하는 것은 어찌보면 눈 가리고 아웅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자신을 입시제도라는 틀에 눌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하지만 이미 그 속에는 진짜 괴물이 들어있어, 피씨방만 가면, 흠씬 두들기고 패죽이고 나오는 청소년들 속의 괴물이 혹여라도 튕겨나올까봐 절대 그런 불손한 이야기는 청소년들에게 알려져서는 안되기에 절대로 청소년 관람가가 될 수 없는 것인지도.

화이

하지만 역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성장'과 '극복'의 담론이 가장 진지하게 필요한 세대가 누굴까 하고 생각해 보면, 바로 청소년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직, 간접적 폭력에 가장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는 세대 역시 청소년들이다. 
그러기에, <화이>의 주제 의식이 정치적 함의까지 확장되기 이전에, 보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청소년 화이와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의 근간을 놓고, 함께 논해 보기에는 청소년 세대보다 더 좋은 대상이 없을 듯하다. 

아들; 그런데, 화이가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안 것까지는 좋은데, 그래도 좀 더 해명이라도 들어보지 다짜고짜 아버지를 죽이기 시작한 건 좀 그랬어.
엄마; 그건 바로 화이가 청소년이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너네들이 그러잖아. 욱 하고 행동부터 들어가고. 이 영화에서 화이의 행동방식은 '매우 청소년적'이지 않니?
아들; (끄덕끄덕)그건 그렇네.

역시나 아들에게는 그래도 방식이야 어떻든 자신을 키워 준 아버지를 죽이는 화이가 충격적이었던 거 같다. 그래서 다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주었다. 신화에서 영웅들은,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를 죽이거나, 아버지를 떠나거나, 아버지가 없다고. 그리고 그건, 실제의 아버지가 아니라, 한 사람이 성장하면서 극복하고 지양해야 할 그의 앞 세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즉, 신화 속 성장이란, 앞선 세대를 밟고 일어서 자신만의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화이>는 또 하나의 신화적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절주절 부연 설명을 붙여본다. 

몸은 이미 중학생만 돼도 어른만큼, 아니 어른보다 훌쩍 커버린 요즘 아이들에게, 정신적 성숙을 아무도 논하지 않는다. 특목고도 모자라, 국제중이란 특수 학교가 만들어 지면서, 초등학교부터 아이들은 입시 전쟁에 휘몰리고, 중학교 학제 조차 교장 재량이란 이유만으로 제 멋대로 바뀐지 오래다. 하루에 수학을 몇 시간씩 공부해도, 예체능 따위는 1학년 때 몰아 때려넣고 때우는 과목이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아무도 그들의 균형잡힌 성장과 성숙을 배려하지 않는다. 어른 세대는 너무도 폭력적이지만, 그들은 이유도 모른 채 교육이란 이름으로 당하고만 살고, 웃자란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에 귀기울일 수 없다. 그저 '일베'나 기웃거리며 감정을 배설할 밖에. 그들이 대학이란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이 시기가 어떤 정신적 성숙을 거쳐야 하는 시기임을 모른 채, 반항과 반발로 채우며 왜곡되어 가는 것이다. 그 시기를 거쳐 괴물과 싸우던, 삼키던 자신의 것을 만들어 가야 하는 과정의 의미라고는 씨알만큼도 깨닫지 못한 채. 

<화이>의 아버지 역 김윤석은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를 통해 진지한 논쟁이 벌어지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 진지한 논쟁이 청소년들에게 까지 확장되기를 바란다. 
교실과 입시에 갇힌 그들에게, <화이>를 통해, 그들이 겪어내야 할 성숙과 성장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을 부여받았으면 한다. 괴물을 벗어나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아빠들과, 괴물이 삼켜버린 화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그 무엇보다, 이 시대의 '괴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종종 좋은 영화 보고 난 후 평론가나 큐레이터가 들어 와 영화를 해석해 주고, 질의 응답을 받는 시네마 톡이 진행되곤 한다. <화이>를 청소년들이 단체 관람을 하고, 영화가 끝난 후, 진지하게 성장의 의미를 놓고 '시네마 톡'을 하는 불가능한 신화를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3. 10. 1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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