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이하의 지능을 가졌거나 감정 폭이 극히 제한적인 사람이 특정 분야에서 경이적인 지적 재능을 보이는 희귀한 증상

 kbs2의 월화 드라마 <굿닥터>의 남자 주인공, 성원 대학 병원의 레지던트로 1년간 임시 고용된 박시온(주원 분)은 서번트 증후군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임상 병동 순시 과정에서 김도한 교수의 지시 사항을 고스란히 머리에 입력할 정도로 복사기와 같은 기억력을 가진 천재이지만,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 하는 사회성 발달에 있어 자폐적 장애를 아직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환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드라마 <굿닥터>는 그런 비정상적인 주인공 박시온을 내세워, '좋은 의사'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KBS월화드라마 굿닥터 - 소아외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노력과 사랑. 다시 시작되는 KBS 휴먼 메디컬 드라마!


역설적이다. 

그의 임용 자체가, 그가 역에서 응급 상황 하에서 아이를 살린 해프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듯이, 환자와의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의사라는 직업에, 그것이 불가능한 서번트 증후군 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자체가 도발적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미 2회 만에, 죽은 형과 토끼가 어른이 되게 해주고 싶었다는 레지던트라는 전문 직업임에도 여전히 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지닌 박시온을 통해 과연 의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최고의 능력을 자랑하는 김도한(주상욱 분) 교수이지만, 그보다 직급이 높은 과장 고충만(조희봉 분)의 환자가 위급한 상황에 빠졌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병원의 시스템, 집도의의 말 한 마디에 수술실 밖으로 내팽개쳐지거나, 말 한 마디 못하고 주먹을 맞아야 하는 상명하복의 군대식 서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김도한에게 맞은 박시온을 토닥이며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너의 행동이 어쩌면 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고 달래주는 차윤서(문채원 분)의 영혼없는 설득(드라마 속 윤서는 또 하나의 박시온처럼 행동한다)처럼, 이른바 보다 편의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시스템이, 그 운용 여부에 따라 굳어져 버린 관료 체계화 될 수도 있다는, 그리고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 않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분명, 위태로운  환자의 상태 하나만을 보고, 담당의나, 수술방 예약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다짜고짜 환자를 밀고 들어가는 행위는 혀를 차게 만들 정도로 대책이 없다. 하지만 그의 극단적인 행동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일말의 공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은, 한 두달은 여사로 기다리게 만드는 현재의 대학 병원의 대기 순번 체제에, 겨우 기다리다 의사라고 만나면, 환자와 눈을 마주치기는 커녕, 앞에 있는 차트나 모니터만 들여다 보다, 또 몇 가지의 검사나 하라고 하는 비인격적인 처우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의료 체계가 가지는 비인간적인 합리성에 대한 광범위한 분노들이, 말도 안되는 서번트 증후군의 의사의 돌발적인 행위에 공감하게 만드는 전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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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의학 드라마에서 병원내의 비인간적인 관료적 의료 체계는 이미 '클리셰((문학·예술 평범한 수법)'처럼 등장하고 있다. 2012년의 화제작이었던 <골든 타임>에서 헌신적인 의사 최인혁을 가로막은 것도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병원의 냉혹한 시스템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브레인>의  의사 이강훈은 그 자신이 그 체계의 수호자에서 희생자로, 그리고 다시 저항자로 거듭나는 히어로로 그려졌었다. 이제, <굿닥터>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어쩌면 김도한 교수의 정의가 가장 냉철하게 정확한, 오로지 인간을 살리겠다는 순수 의지만 가진 서번트 증후군의 박시온을 통해, 지금의 의료 체계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문제 제기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충격적 요법을 통한 문제제기 방식은, 2013년에 들어서 화제작으로 관심을 끈 작품들의 공통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직장 내 갑을 관계를 사회적 문제로 까지 환기시킨 <직장의 신>의 주인공 미스 김은 그 어떤 정규직도 넘보기 힘든 많은 자격증과 자격증을 뛰어넘는 능력을 지녔음에도, 3개월 임시직을 고수한다. 그럼으로써, 이 사회에 뿌리박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갑을 관계를 조롱하고 비판한다. 

최근 종영한 <여왕의 교실>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할 선생님이, 가장 포악한 독재자가 되어 아이들을 조련한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아이들로 하여금 똘똘 뭉쳐 선생님에게 대적하는 힘을 가지려고 하는 자생력을 키우게 만드는 것이다. 남들을 밟고 혹은 남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이기적인 인간형을 양산하는 경쟁 제일 주의의 신자유주의 교육 체계를 비판하기 위해, 가장 선생님답지 않은 선생님을 등장시킨 것이다. 

직장, 학교에 이어, 이번엔 병원이다. 

당신을 담당하는 의사가 서번트 증후군이라면 어떨까요? 라고 질문을 던지면 아마도 백이면 백 다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누구나 의사로서는 무리라고 생각하는 환자를 내세워 의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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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학교, 병원,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근간이 되는, 그리고 이젠 가장 시스템화되어 기계처럼 잘 돌아가고 있는 제도들이다. 하지만 가장 원활하게 돌아가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합리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체계 속에서 '사람'의 존재가 무시되어져 가는 제도들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지금의 우리 사회를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존재들이며, 가까이하기엔 너무 거대한 존재들이다.

거기에 드라마들이 질문을 던진다. 마치 골리앗에게 자그마한 바윗돌을 던지며 덤비는 다윗처럼, 

거인을 만나러 가는 다윗을 보고 아마도 동네 사람들은 다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듯이 우리가 당연하다고 변할 수 없다고, 한 개인이 어찌 해보기엔 무력하다고 느끼는 존재들 문제제기를 하기 위해선, <여왕의 교실>의 마여진 선생이나, <직장의 신>의 미스김, 그리고 <굿닥터>의 박시온처럼 역설적 인간형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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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3.08.07 10:00

"찌질대지마! 언제까지 어리광만 피울거야!"

마여진 선생님의 마지막 말을 역시나 마여진 선생님다웠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그렇게 닦아세우는 선생님에게 상처를 받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 여기는 너희 교실이 아니라며 냉정하게 돌아서서 가서 선생님에게 '스승의 은혜'를 눈물을 흘리며 불러준다. 

언제나 그렇듯, <여왕의 교실>의 마지막은 감동적이다. 성큼 커버린 아이들이, 이제는 응석받이가 아닌 아이들이, 냉혹한 선생님의 속내조차 읽어낼 줄 아는 한 마디, 한 마디 감사의 인사를 전할 때 뭉클하게 눈물이 흐른다. 아마도 그 눈물의 의미는, 진실과 진실이 맞닿아 빚어지는 지점에서 자연스레 발산되는 화학작용일 것이다. 


물론 좀 더 따지고 들어가면 <여왕의 교실>의 엔딩이 그리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악역을 자처하는 마여진 선생님의 교실에서 아이들의 변화는 이해가 가지만, 길거리에서 패싸움을 벌이고, 마여진 선생님 대신 들어온 교감 선생님 앞에서 단체로 일어서서 한 명, 한 명이 잘못했습니다를 복창하며,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는 방식처럼, 일사분란하게 무리의 아이들이, 혹은 25명의 아이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전형적인 일본 드라마의 교훈적 결말을 향한 '집단주의' 클리셰를 보는 듯해서 불편했다. 

또한 마여진 선생의 역설적 교육 방식에 의한 아이들의 변화를 감동적으로 그려내려고 했던 의도는 알겠지만, 하루 아침에 아이들이 선생님이 그리워요, 선생님이랑 함께 하고 싶어요 라는 식의 변화는 작위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 위원의 소신어린 결정처럼, 제 아무리 좋은 결과를 낳았다고 하더라도, 과연 교육의 현장에서, 마여진 선생과 같은 역설적 교육 방법이 지닌 수단의 비윤리성 역시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다 라고 넘어갈 수 없는 지점 역시 여전히 남는 것이다. 


<여왕의 교실> 고현정, 드디어 웃었다 이미지-1

(사진; mbc)


하지만 그러기에 <여왕의 교실>은 많은 질문을 남긴다. 

우선은 마여진 선생님처럼 해야 겨우 자생적 능력을 가지고 독립적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는 왜곡된 삶을 살고 있는 오늘날 아이들의 모습이다. 간에 무리가 갈 정도로 자신을 혹사하며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고자 했던 마여진 선생님이라면 왜 아니 정상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자기 밖에 모르는 아이들, 호시탐탐 친구들을 왕따나 만들려는 아이들,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로봇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는 것을, 강력한 충격 요법만이 아이들을 구제할 수 있다는 오늘날의 교육 현실을  <여왕의 교실>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부모들에게 묻는다. 과연 여러분들은 당신의 자녀가 진정으로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라나기를 원하느냐고?

마여진 선생과 대립적 위치에 있던 부모들이나, 교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제일 많이 했던 말이 무엇일까? 그건 바로 '어리다'는 것이다. 너희는 아직 어리니까, 어른들 말을 들어라. 어른들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마여진 선생님의 교육에 의해 달라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꿈을 찾아나선 아이들은 어른들이 너희를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만들어진 마스터 플랜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글로벌 리더가 되라던 고나리는,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위한 모금에 앞장서는 전혀 다른 방향의 글로벌 리더가 되었고, 가업을 이어 받아 의사가 되라던 아이는 기자가 되겠다고 한다. 아이들은 공부를 하겠다고 하지만, 이제 아이들을 하려고 하는 공부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막연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위한 공부가 아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들은 마여진 선생님을 구하기 위해 플랜카드를 들고 교육청을 방문하려고 까지 한다. 


<여왕의 교실>은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 아이, 스스로 자신의 꿈을 찾으려고 하는 아이, 과연 그런 아이를 당신은 진짜 원하시냐고? 혹시 그간 당신이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했던 것들이, 사실은 아이들을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 길들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냐고? 어른들이 만든 세계관을 세뇌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냐고? 그리고, 어른들 말을 잘 듣는 그래서 말로는 니가 언제 혼자 헤쳐나갈 수 있니?라면서도, 끝까지 어른들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사는 아이를 원한 것은 아니었냐고? 묻는다. 


이제 교육을 통해 독립적 인간으로 자라난 아이들은, 키우던 장수 풍뎅이를 자연으로 돌려보내주듯, 선생님을 그리워하면서도 선생님과 이별을 받아들일 줄 아는 아이로 자라났다. 과연 내 아이가 그렇게 담담하게 내 품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자신의 꿈을 향해 떠나보낼 수 있는 부모가 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는지, 아이들이 자신들이 믿는 것을 믿는 독립적 인간이 되어도 되는지, 남겨진 질문이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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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3.08.02 01:59

교육위원회 위원의 조사가 다가오자, 용현자 교장 선생님은 마여진 선생이 더 이상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교육 방식을 바꿀 것을 촉구하며 말한다. 

"제가 선생님을 받아들인 건, 선생님의 교육 방식이 맘에 들어서가 아니예요. 전 선생님의 교육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아요. 단지 선생님이 그 어떤 선생님보다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걸 알기에 우리 학교로 모신 겁니다"라고.


(사진; 스포츠 월드)


마여진 선생의 교육 방식은 '독선적'이고, '억압적'이다. 교육 위원의 질문에 아이들은 아니다 라고 대답할 추호의 여지도 없이. 그리고 14회에 이르른 <여왕의 교실>은 마여진 선생님이 왜 그런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는가가 드러나고 있다. 

부모들이 하라고 하니까 공부를 하고, 잘 되야 한다니까 더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이담에 좋은 직장을 가지기 위해 공부를 하고,그렇게 공부만 하다보니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아이들은 호시탐탐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외면하고 상처를 주고 왕따나 시키는. 이것이 바로 마여진 선생님이 진단한 6학년 3반의 현재이고, 텔레비젼 밖에 우리 아이들의 현실이다. 

그렇게 친구의 소중함, 나아가 인간의, 생명의 소중함을 모른 채, 입시 교육에만 매달려 고사당하는 아이들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마여진 선생이 선택한 방식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반교육적인 방식이다.



마여진 선생은 결국 쓰러지게 될 만큼 자신을 혹사해 가며 아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를 비롯해, 오동구, 서현이, 보미, 그리고 전학온 도진이에 이르기 까지 각 아이별 맞춤 교육 해법을 실행했다. 

그런데, 부모들은 어떤가? 

드라마 속 부모들은 내 자식을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 매진하는 맹목적인 부모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아이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좋다는 학원에 아이들을 보내고, 아이들의 친구 관계를 코치하고, 학교 생활의 모든 것조차 장악하고자 한다. 

자녀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며 자녀를 과잉보호하는, 특히 교육과 관련된 문제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헬리콥터 맘이요, 통제와 관리,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서하지않는 엄격한 규칙을 강요하는 타이거맘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과잉 보호와 간섭은 다 아이들을 사랑해서이다. 제 아무리 마여진 선생이 아이들을 사랑한다 해도, 부모들만 할까.

이런 적극적인 부모들의 교육열 덕분에 대한민국이 이 정도로 발전했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최근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바로 이런 부모들의 과도한 교육열로 인해 아이들의 온실 속 화초처럼 자생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닮지 않았는가? 비난의 대상이 된 마여진 선생의 교육 방식과 현재 학부모들의 교육 방식이.

부모들 역시 아이들이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유로, 그저 너를 생각해서 그런다는 토를 달면서, 아이들을 냉험한 경쟁의 교육 체계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리고 마여진 선생은, 부모들이 해오던 방식, 그리고 초반에도 드러나듯이, 부모들이 가장 원하던 방식을 더 혹독하게 밀어부침으로써 아이들이 튕겨져 일어설 때까지 아이들을 밀어부친다. 

철을 제련할 때 구부러뜨리고 싶은 반대 방향으로 쳐야 철이 제대로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가듯이, 경쟁 교육 속에 고사 당하는 아이들이 스스로 서기 위해, 마여진 선생이 택한 방식은 '매우 혹독하게 더 세게' 아이들을 다루는 것이다. 마여진 선생님마저 동의하지 않을 정도로 마여진 선생의 교육 방식은 옳지 않지만, 14회에 이르러 달라진 아이들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국 아이들은 그 정도의 충격 요법이 필요할 정도로 심하게 왜곡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마여진 선생의 교육은 불편해 하지만, 사실은 그것만큼 불편하게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엔 무감하거나, 외면하고 싶어하거나, 사랑의 이름으로 혹은 세상을 핑계로 둘러대고 싶어한다. 


(사진; tv리포트)


교육 위원의 참관 수업 시간, 달라진 아이들은 당당하게 마여진 선생에게 질문한다. 

왜 배워야 하는 거냐고. 그러자, 교육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마여진 선생은 대답한다. 물론, 이런 그녀의 교육론에 여러가지 동물의 사례를 들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지만, 마여진 선생이 말하고자 한 취지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다. 

생명이 있는 것들 중 가장 무능력하게 태어난 인간은 그러기에 그 어떤 생명체보다 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그것은 일찌기, 공자님이 말씀하시듯이,' 배우고 때로 익히지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원론적 해석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왜, 이런 배움의 즐거움을 잃게 만들었는가? 굳이 <여왕의 교실>을 시청하지 않아도, 누구나 무엇때문이라는 걸 다 안다. 하지만, <여왕의 교실>은 그 이 시대의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생존을 향한, 경쟁 사회의 교육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마치 왜 살아야죠? 하는 것처럼, 왜 배워야 하죠? 공부는 해서 뭐해요? 라며.

그리고 그 질문의 방향은 10시에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향해있다. 비슷한 방식으로 아이들을 교육하는데, 아이들을 온실 속 자기 밖에 모르는 화초로 만드는 부모님이랑, 그런 아이들을 다시 자생력을 가진 주체적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 마여진 선생의 교육을 보며, 나의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아니 어떻게 키우고 있나?를 질문하게 만든다.. 이게 <여왕의 교실>이 어린이 드라마가 아닌, 10시에 방영되는 미니시리즈인 이유이다.   하지만 여간해서는 오르지 않는 시청률에서 보여지듯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교육에 대해 던지는 직설은 불편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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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3.07.26 10:10

예전에 <바보 엄마>란 드라마가 있었다.

하희라가 지적 장애인 엄마를 연기했고, 성폭행을 당해 낳은 그 딸로 김현주가 나와, 엄마와의 긴 세월 동안의 애증을 실감나게 보여주었었다.

그런 하히라처럼, 우리 동네에도 지적 장애인 엄마가 한 분 계시다.

커다란 남자 슬리퍼에, 옷 매무매도, 머리 스타일도 다듬지 않아 흐트러진 그런 한 눈에 보기에도 딱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분, 벌써 그 분이 우리 동네에서 눈에 띈 지 10여년이 넘었다. 그리고 그 10여년 동안 그 분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엔 혼자 다니다, 언제부터이나, 배가 불러오더니, 그 다음엔, 아장아장 이쁜 아가를 포대기에 둘러 업다, 걸리다, 그러고 다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대부분이 그 당시 나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어휴, 저런 분이 어떻게 아기를 키우려고......그랬다. 두 팔, 다리, 정신까지 멀쩡한대도, 내가 낳아놓은 새끼 키우기가 이렇게 버겁냐던 시절이었으니, 멀쩡하지 않아(?) 보이던 그 분에게 '육아'란 더더욱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주 시간이 많이 흘렀다.

마을 버스를 탔는데, 그 분이 거기 계셨다. 아주 이쁘게 다 자란 딸과 함께, 딸이 다듬어 주었을까, 외모도 그 예전 아기를 데리고 다닐 때보다 한결 깔끔해지고, 딸은 어디서 만들었는지, 멋진 종이 접기 작품을 손에 들고 엄마한테 자랑이 한참이었다. 그리고 그 분은 연신 밝은 딸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 훈훈한 모녀의 모습을 보고 '아이는 무엇으로 키울까?' 내 자신에게 깊게 자문해 보았다. 그리고, <여왕의 교실>을 보면서, 모처럼 다시 그 질문을 던져본다.

 

고현정 감동의 엔딩 / 사진 : MBC '여왕의 교실' 방송 캡처

(사진; 더 스타)

 

 

마여진 선생은 분명 바람직한 교육의 롤 모델일 수가 없다.

때로는 감옥의 간수처럼 혹독하게 아이들을 몰아부치고, 때로는 강남 엄마처럼 그 어떤 실수도 용납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회를 거듭하면서, 그런 마여진 선생의 교육 방식이 그 예전 먼 길을 찾아온 한석봉에게 불을 끄고 글을 써보라며 떡을 썰던 석봉의 어머니의 교육 방식처럼 깊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일종의 충격 요법인 것이다. 호시탐탐 누군가를 왕따로 만드는 아이들, 자기 밖에 모르고,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는데 익숙해진 아이들을 주체적인 인간으로 돌려 세우기 위해 강력한 마법과도 같은 교육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6학년 3반은 어느덧 왕따도, 셔틀도 없는 반이 되었다. 그리고 처음엔 저게 어떻게 교육이야? 인권 유린이지 라며 분노하던 마음도, 미묘하게 스쳐가는 마여진 선생의 미소와 더불어, 그녀를, 그녀가 지향했던 교육방식을 이해하기에 이르른다.

마치, 어릴 때 그렇게 지긋지긋해 하던 엄마의 잔소리를 철들고 나니, 그게 엄마의 사랑이었던 것을 깨닫게 되듯이. 그리고, 마여진 선생의 교육 방식에 동의를 하건, 하지않건, 자신의 생활도 없이 아이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아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 않는 마여진 선생의 마음, 그 진심이 바로 교육의 핵심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전학온 도진(강찬희)는 여러 번 파양의 경험을 당한 아이이다.

그리고 양부모님에게는 더 이상 파양을 당하지 않기 위해 갖은 관심을 끌 행동을 해보이다가도, 친구들에게는 그 분풀이라도 하듯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처럼 교실의 제왕으로 등극하려 한다. 시험지를 고쳐 자기 꼬붕을 만들고, 대신 숙제 시키기에서부터, 아이들의 여론을 조작해 반장이 되어 갖은 편법을 일삼는 것까지, 도진의 행태와 그것을 지적하는 마여진 선생의 일갈은 마치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학적 논고 같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그저 몰락하는 엄석대를 그려냄으로써, 권력의 속성과 거기에 쉽게 길들여지는 인간 군상을 비판하려 했다면, <여왕의 교실>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진정한 교유이란 무엇인가 란 질문으로 던진다. 교장 선생님이 걱정하듯이, 그리고 하나가 발견한 마선생의 목의 상처처럼 마여진 선생에겐 트라우마처럼, 도진이와 같은 아이에 대한 나쁜 기억이 있다. 하지만, 마여진 선생은, 그런 도진이의 행동을 '찌질하다고, 어리광이라'고 단정지으며, 상처받은 아이가 자신의 상처를 어쩔 줄 몰라, 자해하는 행동으로 이해하고 대처하려고 한다.

단지 다르다면, 다른 아이들에게, 문제를 던져주고, 스스로 해결하게 만들었던 것과 달리, 스스로의 머리에 손가락 총을 쏘며 자멸의 길을 걷는 도진이의 손을 놓지 않는다. 가장 도진이가 원하던 것,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란 메시지를 강력하게 보낸 것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도진이를 죽음에서 구한다. 그리고, 드라마는 우리에게도 메시지를 보낸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도, 왕따를 하는 아이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구할 수 있지 않겠냐고. 그런 따스한(?) 덕분에, 하나도, 은보미도, 오동구도, 서현이도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진; 뉴스엔)

 

 

 

마여진 선생의 방식이 최선은 아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이 고뇌하는 초짜 담임 양민희에게 고민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은, 자기가 맡은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고 길을 찾다보면 길이 열리지 않겠냐는 말이 아니었을까. 지난 번 학교에서 상처를 입고, 아이를 거두기에 실패했던 마선생이 이번엔 도진이를 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상하다.

감옥처럼 무시무시하고 살벌하기만 했던 <여왕의 교실>이 중반을 들어서면서, 번번히 회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된다. 아이들의 갸륵한 마음 때문에, 마여진 선생의 희미한 미소를 일으키게 하는 결과들 때문에. 그리고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하고. 뭐 정도가 있겠는가. 그저 아이들의 손을 꼬옥 잡고 놓치지만 않아도, 반은 간다. 그게 12회까지 <여왕의 교실>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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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3.07.19 09:55

'학교란 무얼까'

8회가 끝나고, 이어진 9회 예고, 향기가 혼잣말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드라마 <여왕의 교실>도 초반 끓어오르던 마선생의 학생 인격 모독 논란을 거치며, 8회에 이르면서, 이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의 윤곽이 떠오른다. 과연, 교육이란 무엇일까? 21세기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이란 무엇일까?

 

 

'20세기의 교실에서, 19세기의 선생님이, 21세기의 아이들을 가르친다'

균형이 맞지 않은 우리 교육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문구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20세기 교실이란?

흔히들 생각하듯이, 책상, 걸상, 교실 크기 등의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는 20세기 때의 문물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혹시, '파놉티콘'이란 단어를 들어보셨는가?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설계한 원형 감옥으로, 건물 내부에 높이 솟은 중앙탑을 중심으로 죄수들의 독방이 빙 둘러 배치된 곳을 말한다. 이 감옥의 특징으로 말하자면, 중앙탑은 어둡고, 죄수들은 밝게 유지되어, 간수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독방에 감금된 죄수들의 행동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고, 죄수들은 늘 감시 받고 있다는 압박감이 내재화되면서 일일이 통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규칙을 지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옥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에 의해, 근대적 감시의 원형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즉, '시선의 비대칭성'은 피감시자와 감시자 사이에 '권력의 불균형'을 낳고, 이런 원형이 학교, 병원, 공장 등 근대 사회의 곳곳에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여왕의 교실의 강력한 메시지는 시작됐다!_3

 

그리고, <여왕의 교실> 속 마선생의 교실은, 바로 그 파놉티콘이라는 감방에서 유래한 근대적 교육의 극단적 표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불편해 지는 것은, 마선생이 아이들을 전인격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데서 오는 반발감에 더불어, 사실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교육의 본질을 포장되지 않은 뼈대 그 자체로 드러냈기 때문이 아닐까.

 

미셀 푸코는 모습을 알 수 없는 간수를 두려워하다, 나중에는 신성시 하게 되는 죄수들의 딜레마를 통해, 권력의 본질, 권력에 한없이 약한 인간의 모습을 갈파한다. 그리고<여왕의 교실> 역시 마선생이 무리하면서도 혹독한 규율을 통해 반 아이들을 장악해 가려는 시도, 그리고 두려워하다, 거기에 굴복해 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역시나, 권력적 속성을 통해 아이들을 길들이는 것이 여전한 교육의 본질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드라마답게 향기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런 마선생의 전형적인(?) 교육 방식을 일탈해 나간다. 하지만, 공부를 하기 싫어 모인 미술실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른다거나, 이렇게 놀아도 될까 불안해 하거나, 막상 다같이 청소하자 했지만, 그 조차도 반 아이들 전체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해 불화를 겪는다거나 할 뿐이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규율과 벌칙으로 아이들을 혼돈에 빠뜨리고 언제 어디서나, 영화 <내니머피>의 유모처럼 아이들의 행로를 지켜보는 마선생의 모습을 보면, <여왕의 교실>이 지향하는 교육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듯하다

19세기에도, 그리고 20세기에도 이 사회가 필요로 한 '역군'들의 생산 작업이 필수인 세상에서, 그들이 사회에 필요한 인재로 거듭나기 위한 주입식 지식이 교육의 주를 이루었다면, 이제 21세기의 교실에서,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학원'을 통해 사육당하는, 혹은 저마다의 개성이 각양각색인, 하지만, 한 자녀 혹은 기껏해야 두 자녀 가정이 주를 이루는, 그래서 그저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야생 동물같은, 하지만 상처가 많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_2

 

그리고 정말로, 언제 어디서나 지켜보며 아이들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던 영화 <내니머피>의 유모처럼, 그 어떤 선생보다 아이들을 잘 아는 마선생은, 하나씩 하나씩 아이들이 닥친 문제를 터트리고 스스로 그걸 해결해 나가도록 역설적(?)으로 유도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시청자들은, '얘들'이라는 무색의 단어 안에, 얼마나 수많은 고민과 고뇌들이 짖눌려 있는가를 <여왕의 교실>을 통해 깨닫게 되는 중인 것이다. 그리고, 질문이 남을 것이다. 21세기의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무엇일까?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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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3.07.05 10:15

<여왕의 교실>은 어려운 드라마이다.

학교 체육 시간, 형식적으로 행해지는 호신술 교육을 무의미하다고 일갈하는 마여진 선생(고현정 분)에게 학생 오동구(천보근 분)가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러자, 마여진은 당당하게 말한다. 나보다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도망가는 것이거나, 상대에게 굴복하는 것이라고. 그러자 다시 오동구는 묻는다. 도망가기도 싫고 굴복하기도 싫으면 어떻게 하냐고? 마선생은 대답한다. 도망가기도 싫고 굴복하기도 싫으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굴복을 하는 게 현명하다고. 마선생의 단호한 이 결론에 늘 중학생 형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오동구는 주먹을 그러쥔다. 그리고 알고보면 자기보다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오동구를 괴롭혔던 형들의 실체를 깨닫고, 그들이 질려 달아날 때까지 덤벼 그들을 물리친다.

드라마가 이렇게만 되면 그래도 마선생의 방침을 이해할만하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다. 신이 난 오동구는 마선생을 존경한다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듣자고 반 아이들을 독려한다. 그런데, 그런 오동구에 대해, 마선생은 가차없이 그의 실체(?)를 폭로한다. 오동구를 낳은 10대 엄마가, 그를 낳은 것을 저주하며 도망갔다는 사실, 그런 자신을 잊으려고 자꾸 옛날 개그맨들 흉내나 낸다는 사실을.

여기까지 되면 마선생은 영락없이 또 '사디스트'에 가깝다. 그런데 또 거기서 끝이 아니다.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며 오동구를 몰아가자, 울먹이던 심하나(김향기 분)가 일어서서 오동구의 편을 들어준다. 자기가 오동구를 좋아한다며, 오동구는 좋은 아이라며.

 

 

텔레비젼을 볼 때 가장 편한 방식이 선악 구분이 분명하게 되어 있고, 시청자는 선한 자의 입장에 이입해서 드라마를 따라갈 때이다. 그저 그가 위험에 빠지면 어쩔 줄 몰라하고, 고난을 겪으면 같이 아파하고, 그가 이기면 내가 이긴 듯 신이 나서 박수를 보내면 된다. 그런데 <여왕의 교실>은 그게 안된다.

. <여왕의 교실>을 보며, 주인공인 마여진 선생의 그 어느 편에도 설 수 없는 대신에,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시대에 수많은 멘토링이 범람하면 할 수록, 젊은이들은 더 갈 곳 몰라하는 것 같듯이, 혀에 단, 어린이를 향한 많은 선의에 입각한 교육이 정말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나 생각해 보게 된다. 말이 교육이지, 아이든, 선생이든, 학부모이든, 궁극에는 대학 잘 가기란 목표로 일심동체되는 제도 교육에서, 차라리 딱 깨놓고 현실은 이래? 니들 부모들이 원하는게 이런 거잖아 하는 마여진 식 방식이 솔직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 아무리 솔직한 현실에의 접근이라도, '공포'와 '위협'을 무기로 인간을 길들이는 그 수법에는 동조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이 많아진다.

무엇이 어떻든, <여왕의 교실>이 지금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고질적 문제인 교육에 대해 직설을 던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언제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더 좋게 만든다면서, 하면 할 수록 나빠지는 교육 정책의 문제는, 어쩌면 마여진 선생이 말하듯이, 현실을 외면한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바로 그 우리의 현실에 대해 첨예한 문제 제기를 하는 이 드라마의 원작이 일본 꺼라는 것이다. 2005년 일본 NTV에서 방영된 동명의 <여왕의 교실>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심지어 얼마전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던 우리 사회의 갑을 관계를 다뤘던 <직장의 신>역시 2007년 일본 NTV에서 방영된 <만능 사원 오오마에>가 원작이다. 좋은 작품이라면, 사실 어느 나라 꺼가 되었든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현재 우리 사회를 현실적으로 다루는 드라마의 원작이 외국 작품이라는 것에서는 적어도 우리 드라마계의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최근 우리나라 작품이 사회 문제에 완전히 무심했다는 말은 또 아니다.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추적자>도 있었고, 비록 용두사미가 되긴 했어도 사회적 멜로의 장을 연 <보고싶다>의 시도 역시 훌륭했다. 법과 돈의 카르텔을 풍자했던 <돈의 화신>의 시도 역시 신선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 가장 화제가 된, 혹은 화제가 될 것같은 드라마가 잇달아 일본 리메이크 작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다. 물론 이전에 <꽃보다 남자> 라던가, <아름다운 그대에게> 처럼과 같이 로맨스물에 치우쳤던 리메이크 물이, 이른바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장르물로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는 건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리고 <직장의 신>에서 보였듯이, 리메이크였어도 일본 드라마의 흔적을 상당히 지운 채 우리의 맛을 제대로 살릴 수도 있다.

그래도 어디선가 느껴지는 미묘한 정서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여왕의 교실>도 마찬가지이다. 겨우 2회이지만, 과연, 마여진의 역설적 교육 방식이 그리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는 아이들이, 온전히 교육 방식의 문제일까? 란 생각이 든다. 일본 사무라이식의 훈련 방식, 혹은 가학적 방식이 쉽게 용인되는 일본식의 정서 혹은 이런 것이 아닐까란 생각도 드는 것이다. 우리 식의 정서였다면, 오동구가 도망치거나 굴복하기 싫다고 했을때, 목숨을 걸라고 했을까?

이렇게 드라마를 보면서, 이게 방식의 문제일까, 국민 정서의 차이일까 고민없이 질좋은 우리 드라마를 보고 싶은 거? 지나치게 편협한 국수주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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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ditator 2013.06.1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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