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로 가는 길>을 보러 갔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나이때문일까? 중장년층의 여성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극장을 채운다. 영화 속 여주인공 앤(다이안 레인 분)의 프렌치 로드를 자신들이 떠나기라도 하는 듯 어딘가 설레임을 담뿍 담은 표정들, 과연 엔딩 크렛딧이 올라가고 이분들이 원했던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셨을까?


공자께서는 나이 마흔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不惑), 오십에는 하늘의 뜻을 아셨다는데(知天命),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오십이란 '갱년기'라는 신체적 증상만으로는 다 품을 수 없는 막막한 시절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막막한 시절에 <파리로 가는 길> 여주인공 앤이 서있다. 



아내라는 이름표로 살아가는 앤의 뜻하지 않은 일탈
미국 나이로 쉰 두 살. 앤은 영화 제작자인 마이클(알렉 볼드윈 분)의 아내다. 그녀를 소개하는데 마이클의 아내라는 이름표가 가장 앞선 건, 현재 그녀의 존재가 그렇다는 것이다. 영화 제작자인 남편을 따라 영화의 도시 칸으로 휴가를 온 부부. 한때는 의상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젠 그것마저도 손을 놓고, 애지중지하던 딸도 다 커서 그녀의 품을 떠났다. 휴가라고 칸에 왔지만, 바쁜 남편은 업무상 스케줄로 바쁘고, 그녀는 호텔에서 시켜먹은 식사조차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 하지만 샌드위치를 두 개나 시켰다고 잔소리를 하던 남편은 정작 그녀가 없이는 자신의 물건 하나 제대로 찾을 줄 모르는 사람, 거기에 그녀의 존재가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 속 앤만이 아니라, 오십 줄에 들어선 '아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사는 대다수 여성들의 '존재'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사업차 바쁜 남편이라도 그래도 함께 칸에 온 그 여행조차도 남편의 바쁜 영화 제작 스케줄을 허락치 않는다. 문제가 생겨 당장 부다페스트로 떠나야 하는 부부,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앤의 귀 통증은 그녀의 비행을 허용치 않고, 거기서 등장한 남편의 사업 파트너 자크(아르노 비야르 분)가 그녀에게 자동차를 이용한 파리 행을 제안한다. 

그런데 7시간이면 도착할 것같던 파리 행, 공항 가는 그 잠깐 동안에도 아픈 그녀를 위한 약에서 부터 딸기 등등을 구하느라 차를 멈추던 자크는, 이제 앤과 길을 떠나자 작정을 한듯, 샛길로 빠진다. 하지만 그런 자크의 곁눈질에 이미 남편으로부터 프랑스 남자의 방탕함을 경고받은 바 있는 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파리에 도착해야 한다는 현대 미국을 사는 사람으로서의 강박이 그녀를 재촉한다. 

영화는 그렇게 바쁜 남편 마이클을 제외한 그의 아내 앤과 그의 사업 파트너 자크의 동상이몽을 주된 갈등으로 제시한다. 남편이 있는 아내와, 여전히 그 나이에도 독신의 삶을 즐기는 남자, 미국식 시간 관념이 내재화된 사람과, 지금이 아니라면 맛볼 수 없는 그것을 위해, 혹은 지금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것들, 혹은 사람을 위해 언제라도 시간을 허용할 수 있는 프랑스 식 삶을 대비시킨다. 또한 부유한 남편을 가졌지만(?)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아니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조차 자신이 없는, 하지만 그 무엇을 해야할 이유조차 없는 사람과, 지금 현재 이곳에서의 삶과 즐거움이 곧 인생이라고 믿는,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사업 일정과 자금에 쫓기는 사람의 만남이다. 

자크는 길을 떠나자 마자 마주친 생 빅트와르 산을 세잔의 명화를 통해 그녀에게 소개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여전히 귀는 아프고, 남편의 잔소리에, 파리로 갈 여정만이 가득하고, 이 프랑스인 남자도 부담스럽다. 그런 그녀가 자크의 도발적인 프로방스, 가르동 강, 리옹으로의 여정을 통해 변해간다. 빅트와르 산을 쳐다보지도 않던 그녀가, 자크와 함께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을 재현하며 마을을 열고, 리옹의 자수 박물관과 베즐레이의 성 막달레나 대성당으로 기꺼이 에돌아 가기를 원하기에 이른다. 



로맨스를 넘은 질문들 
자크는 이 여정에서 그녀에게 '손끝하나 안 대기로 마음을 먹었다'지만, 영화 속 그가 보인 행보는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의 그것이다. 여자가 원하는 장미로 차를 채우고, 여행지의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그녀를 유혹하고, 달콤한 말로 그녀의 귀를 간지른다. 하지만, <파리로의 여행>을 그저 오십 줄 자크와 앤의 연애 이야기로 보면 아쉽다. 오히려 그 보다는 오십줄, 자신의 존재에 길을 잃은 앤에게 자크는 그녀 앞에 얼마든지 열려있는 새로운 길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전도사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자크는 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건 그저 첫 눈에 이 여자가 이뻐라고 하는 그 남성적 본능이 아니라, 마이클의 사업적 파트너로서 오랜 시간 그녀를 보아오며, 오십이 되도 여전히 매력적인 앤에 대한 '헌사'이다. 남편은 그녀를 자신의 물건을 찾아주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소모하지만, 자크에게 그녀는 늘상 카메라를 달고 살며, 그 카메라를 통해 섬세한 지점을 포착해낼 줄 알고, 그것을 통해 전체를 연상케 만드는 능력자이다. 이제 남편의 도구와, 자식에게마저 지켜볼것만 남겨진 그녀가 자크를 통해, 그와의 여행을 통해 오십 줄에도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본질인 것이다. 

귀가 아프던 그녀는 어느 틈에 귀가 아프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여정에 동참했던 관객들조차 자크의 도발적 행보와 그 행보에서 그녀가 보이는 긴장감에 어느덧 그녀의 그 '스트레스성 증후군'을 놓아버린다. <파리로 가는 길>의 매력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뻔히 스트레스성 질병인 게 보이는 앤과 함께 여행을 하며, 그녀가 자크의 담배처럼 자신의 초콜릿 중독을 털어놓고, 결국 그 누구에게도 끄집어 낼 수 없었던 오랜 아픔을 고백하기까지, '프랑스 로드'의 여유와 낭만이 주는 일탈을 만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짝짝이 양말을 줬다고 모로코에서도 양말을 찾는 남편과 그녀가 쥐어준 짝짝이 양말을 기꺼이 신어주는 남자, 이 현실적이고도 낭만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그녀는 마지막 자크가 보내준 장미 초콜릿으로 답한다. 그리고 그 답은 누구를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천명의 시절,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갈 것이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비록 함께 여행하며 유혹해주는 멋진 남자는 없지만,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by meditator 2017. 8. 10. 1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