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람되지만 <크로닉>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전에 우리집 애완견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9살, 다 늙어서 우리집에 첫 발을 들인 녀석은, 첫 건강 검진을 간 병원에서 나이가 있으니 소파에 오르내릴 때 조심하란 말이 무색하게 정말 강아지처럼 종횡무진 우리집을 누볐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녀석은 나이들어 가며 '노견'이라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10여년을 우리 가족과 함께 살다 몇 해전 세상을 떠났다. 그 녀석이 세상과 이별하는 과정에는 우리의 결단이 필요했다. 몹시 고통스러워 보이던 아이를 보며 이제는 보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르고, 간사하게도 오래전 떠나보내드린 혈육보다 첫 인사부터 불쑥 내 이불 속을 파고들던 녀석이 그립다. 그리고 그 그리운 감정과 함께, 늘 과연 녀석을 보냈던 그 순간의 선택이 옳았을까란 '윤리적' 고민이 따라온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 수록, 녀석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흐릿해 질 수록, 조금 더 시간이 주어져야 하지 않았을까하고 되묻게 된다. 


굳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애완견에 대해서도 내내 해명되지 않는 질문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데, 그 대상이 나의 혈육, 하물며 나보다 더 소중했던 내 자식이라면? 호스피스 간호사가 맞닦뜨린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려니 하고 본 <크로닉>에서 마주친 건 뜻밖에도 어쩌면 인간으로서는 답을 내릴 수 없는 또 다른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질문이다. 



경계를 넘어선 호스피스 간호사, 그 이면에
에이즈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 발레리나를 전처라 소개하고, 뇌졸증의 건축가를 형이라 소개하는, 내내 아와 타를 구분하지 못하는, 자신과 자신이 간호하는 말기 환자와의 경계를 넘나드는 데이비드, 정작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은 그의 삶을 재구성해보게 되는 건, 충격적인 결말 이후, 적막이 감돈 흑백의 스크린 위로 흘러가는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면서이다. 마치 의도적으로 관객들에게 자신들이 본 영화를 다시 생각해 보라 강요하기라도 하듯, 그 흔한 ost 하나 없이 묵묵히 알파벳의 자막만이 남겨지고 관객석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침잠한다. 

그리고 문득, 마지막 순간 그 충격적이었던 결말이 새삼,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단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시선을 사로잡은 건 환자와 자신의 경계를 넘나들며, 어떻게든 조만간 세상을 등질 환자의 편의를 봐주고자 법적으로 금지된 수단마저 마다하지 않던 호스피스 간호사 데이비드였지만, 오히려 다시 되돌려 생각해 낸 데이빗은 마치 막간극처럼 호스피스 간호사로 활동하는 그 사이사이 그 무엇으로도 채울 길 없는 공허한 눈빛을 가진 언제 죽어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영화에서 단편적으로 등장하듯이, 아마도 그는 그의 딸이 그에게 뿌듯하게 자랑하며 의논하듯 그 언젠가는 의사였던 적이 있는 듯했고, 한때는 이제는 가끔 들르는 그 집에서 아내와 아들과 딸과 행복하게 살았던 적이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4년전 그의 아들 댄에게 찾아온 병으로 산산조각나고, 영화 후반 그에게 자신의 삶을 맡긴 노년의 환자처럼 그는 견뎌내기 힘든 아들의 고통 앞에 윤리적 경계를 넘어섰던 듯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직업적 윤리'로서 호스피스 간호사 데이비드의 행위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면, 영화를 다 본 이후 호스피스 간호사 데이비드의 행위들은 존재론적 윤리로 그 영역이 확장되게 된다. 아비로서의 결단, 하지만 분명했던 것 같은 그 결단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주는 그 무게가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세상에 무게에 자신을 내맡기듯 휘적휘적 걷던 데이비드의 모습 속에서 온전히 다가온다. 아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날 수 없었던 아비의 고통은, 말기의 환자들과 함께 온전히 하는 것으로도 해소될 길 없는 공허함을 주었고, 결국 충격적 결말 뒤에, 그것이 어쩌면 진작 의식적으로는 세상을 떠난 그에게는 마침표와 같은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혈육으로 맞닦뜨린 존엄사, 그 윤리적 질문 
우리 사회에서 이제 막 문제 제기가 시작된 존엄사의 문제는 서구의 영화 속에선 구체적 고민의 형태로 등장한다. 얼마전 마리 끌레르 영화제를 통해 상영된 파스칼 포자두 감독의 <마지막 레슨>은 존엄사를 선택한 어머니 마들렌의 결정에 이견을 보이는 아들과 딸의 갈등을 다룬다. 어머니는 더 늙어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되기 전에 삶을 마무리하려고 하지만, 아들은 끝내 그런 어머니의 결정을 수긍하지 못한다. 

글로만 보면 한 개인의 존엄한 죽음이지만, 아들의 입장에서는 어머니의 죽음을 방조하는 불효이자, 자신들을 방기한 어머니의 마지막 욕망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 레슨>이 어머니의 존엄사 앞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자식과 부모의 갈등이라면, <크로닉>은 아들의 존엄사를 지켜낸 아버지의 불가항력인 고통을 다룬다. 아들처럼 죽어가는 이들을 자신의 아내나 혈육처럼 지켜내는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삶의 근거지가 붕괴되어가는 그 파멸의 과정으로써. 어머니가 죽어가는 순간까지 어머니를 찾지 않고 홀로 괴로워하는 아들이나, 아들의 고통을 줄여주고, 자신의 삶마저도 함께 잃어버린 아버지의 고뇌는 법이나, 선택의 영역 속에 가두기 힘든 인간의 세 치 혀로 쉽게 논할 수 없는 존재론의 영역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의 영역에서는 버거운 문제를 통해, 우리는 역설적으로 존엄사의 문제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된다.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처럼,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경계에 대한 고민을 한 꺼풀 벗겨내고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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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이 깊어지고 젊은이들이 삶의 무게에 짖눌려 이제 극장가는 중장년층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치 드라마들이 중장년층들의 구미에 맞는 뻔한 통속극으로 채워지듯, 극장가도 중장년층 구미에 맞는(?) 뻔한 기획 영화들이 득세하며 한국 영화계가 암담해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그런데, <크로닉>을 상영하던 일요일 오후의 극장 안은 반 넘게 중장년의 관객들로 채워져 있었다. 난 일요일 오후 주변 어느 극장에서도 상영하지 않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한 시간 여를 가야만 했다. <크로닉>은 주변의 그 번다한 멀티 플렉스에서는 참 보기 힘든 영화였다. 새벽 댓바람이나 오밤중이 아니고서는. 쉽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시청률을 올리기 쉬운 막장 드라마를 양산하며 중장년층의 핑계를 대는 방송가처럼, 어쩌면 극장가도 역시나 중장년층의 핑계를 대며 편한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게 어쩌면 이리도 쉽지 않은 건지. 
by meditator 2016. 4. 21. 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