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 드라마 kbs2의 <천명>과 mbc의 <남자가 사랑할 때>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청률 1등을 다툰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두 작품 모두, 겨우 10%대이거나, 10%에 못미치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 요즘 시대의 화두가 '아버지'라고, 그래서 아픈 딸 '랑이'를 위해 감옥을 탈주하고, 또 그 딸을 살리기 위해 딸을 놔두고 돌아서야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아역 김유빈의 연기와 맞물려 충분히 이목을 끌어낼 수 있는데, 어쩐 일인지 <천명>의 반응은 영 거북이 걸음과 같다. 그런데 막상 <천명>을 보고 있노라면 거북이 뒷걸음질 같은 시청률이 종종 이해가 간다. 아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니까.

 

최원이 추노의 대길이였어?

방영하기 전부터 '조선판 도망자'라고 흐드드하게 알렸듯이, 4회에 접어든 <천명>의 주인공 최원(이동욱 분)은 도망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최원의 도망자 내공은 무술 실력이 출중한 조선의 추노꾼 대길이 저리가라잖아! 저 사람 헐랭한 내의원 의관 아니었어?

게다가 최원은 동료 의원 민도생(최필립 분)의 살해 혐의를 받고 의정부 앞 마당에서 갖은 추국을 받던 죄인이었다. 조선시대 추국이 어떤 것이었나? 실제 많은 추국 당사자들이 그 과정에서 형장에 이르지도 못한 채 추국의 고통 그 자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종종 있던 바로 그 무시무시한 고문 아니었나 말이다. 도망을 가는 최원의 옷 허벅지 부분이 피에 물들어 있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드라마 상에서 최원은 '주리틀기'를 당한 것으로 나온다. 주리틀기는 다리를 묶어 놓고 그 방향과 반대로 힘을 주는 것으로 심할 경우에는 다리뼈가 으스러진다는 무시무시한 고신 방법인 것이다. 심지어 나중에 의금부 도사 이정환이 증명해 주듯 감옥에 갇힌 최원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여 먹은 것이 없다는데, 제 아무리 딸을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갑자기 도망자 신분이 되자, 능력치가 너무 올라가 보이니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씁쓸해 보인달까. 심지어 조금 전에 물에 빠져 죽어가던 최원이 금세 도망간 길을 순식간에 역주행해서, 관원들이 오기 전에 딸이 숨어 있던 곳까지 돌아온 모습은 해도 해도 너무 했달까?

최원의 도망 과정은 화려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빼어난 연출로 그림같은 장면을 완성했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개연성에서 접고 들어가서 봐줘야 하니 몰입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문정왕후와 왕세자 사이의 긴장감이 아쉬워

아마도 이 드라마 제목이 천명인 이유 중 하나는 중종의 뒤를 이를 후계자로써의 '천명'이 누구에게 주어져야 하는가라는, 중종의 큰 아들이 왕세자여야 하는가, 당시 조정의 중심 세력이던 문정왕후의 아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가라는 권력 간의 생사가 달린 쟁투를 극의 배경으로 깔고 가기 때문 아닐까.

그리고 지금은 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도망을 다니는 최원이 개인의 목적을 넘어, 왕세자의 구명,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의 왕으로의 등극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극 중에서 왕세자가 왕의 큰 아들이라는 적통으로의 정당성 이상의 존재감이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천명>이란 드라마에서 이미 문정황후나 그 세력의 존재감은 너무나 크다. 반면, 그에 비해 왕세자의 존재는 너무나 미미하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문정 왕후를 연기하는 중견 연기자 박지영과 왕세자 이호를 연기하는 아이돌 출신의 임슬옹의 연기에서 너무나 비교가 된다.

임슬옹의 연기를 발연기라고 낙인 찍을 수는 없지만, 왕후와의 대치씬이나, 최원과의 조우하는 씬에서, 오랜 세월 의붓 모후의 그늘에서 숨죽여 온, 하지만 자신의 사상이 확고한 미래의 젊은 왕을 조금 더 풍부하게 표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이돌을 기용하는 건 상관없지만, 그의 연기력으로 담을 수 없는 배역으로 인해 드라마의 흐름이 깨어지는 건 고스란히 시청자들에 대한 민폐로 남는 것이 아닌지. kbs2 수목 드라마는 지난 번 <아이리스>에서도 같은 실수를 범하더니, 이번에도 똑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장담컨대, 아직 사극에 익숙치 않은 이동욱의 최원이 캐릭터를 잡기 이전에, 왕세자 역의 배우가 조금 더 노련한 연기로 문정왕후와의 대립적 각을 보였다면 지금처럼 <천명>이 10%를 넘지 못하는 시청률로 고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천명>을 버티어 가기에는 취약하다. 문정왕후와 왕세자 간의 권력 투쟁이 좀더 실감나게 다가오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럴 듯한 도망씬으로 시청자의 눈을 호리는 건 <추노>로 족했다. 그리고 되돌아 보면, 추노도 도망씬으로만 시청자를 호린 건 아니었다.

 

한 마디 말 밖에는 하지 않는 단선적 캐릭터들

문정왕후 역의 배우와, 왕세자 역의 배우가 가지는 내공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도 하지만, <천명>이란 드라마가 사건 전개가 빠르고, 도망씬등이 박진감 넘치게 전개 됨에도 불구하고 종종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결정적으로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가 너무 단조롭기 때문이다.

문정왕후는 몹시도 노회하게 나오지만, 줄곧 그녀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왕세자 너는 죽고, 내 아들이 왕위에 올라가야 해'이다. 이건 최원의 '내 딸을 살려야 해'라는 도돌이표 대사랑 똑같다.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홍다인도 다르지 않다. 1,2회에서는 자기랑 별 이해 관계도 없는 최원을 나쁜 놈이람 몰아 붙이더니, 이젠 그가 은인이라며 목숨을 걸고 그를 구하겠다고 나선다. 캐릭터의 변화가 아니냐고? 그를 나쁜 놈이라고 몰아 붙일 때나, 목숨을 구하겠다고 나설 때나, 홍다인의 태도는 다르지 않다. 마치 단세포 동물처럼 그거 하나만 생각하며 달린다. 도망자로 달리는 건 최원만이 아니다. 홍다인도 종횡무진 달리기는 마찬가지다.

사건은 장황하지만, 모든 캐릭터들이 등장할 때마다,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 문정왕후가 왜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릴려고 하는지, 그녀가 왕세자가 착해보이는데도 그를 꼭 죽이려고 하는지 중간 과정은 없이 물불을 안가리고 왕세자의 죽음을 향해 달리는 건, 홍다인이나 마찬가지다. 최원을 잡으려고 애를 쓰는 이정환(송종호 분)이나, 도망가는 최원이나, 상황만 다를 뿐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목표를 향해 달리는 그 캐릭터에서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사람만 다를뿐.

그나마 그의 속내가 미묘하고 복잡해 보이는 캐릭터는 왕세자이지만, 안타깝게도 배우의 연기력이 캐릭터의 다층성을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천명>을 보다보면 종종 지루해 진다. 사건은 궁금하되, 인물은 궁금하지 않다. 도망가겠지, 구하려고 애쓰겠지, 죽이려고 하겠지 라며 지켜보는 드라마는 매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음에도, 도돌이표처럼 같은 노래만 반복하고 있는 천명이 아쉬운 이유다.

by meditator 2013. 5. 3. 0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