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하다. 

마치 사귀던 애인에게 느닷없이 이별 선언을 들은 것과 같다. 달콤한 데이트를 기대하며 나갔던 자리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친 이별 선언, 처음엔 이게 뭐지? 얼떨떨하다가, 시간이 흐를 수록, 그 이별의 아픔이 치고 올라오듯이, 영화가 암전된 후, 극장을 벗어나는 거리가 멀어지고, 시간이 흐를 수록, 전진호와, 거기에 올라탄 여섯 선원들이 가슴으로 스며 들어온다. 

영화 <해무>에서 전진호는 IMF의 파고 속에 헐떡인다. 이제는 폐기될 고물처럼 여겨지는 배, 그리고 한때는 여주 다방가에 짜한 소문을 내던 돈 잘 쓰는 선장이었지만, 이제는 온갖 서류를 들이대봐도 돈 몇 푼 꾸기도 힘든 처지의 선장 철주, 하지만 여전히 그에겐 포기할 수 없는 배와, 그를 포함한 여섯 선원이 있다. 

그래서 '돌아갈 집'이 없는, 철주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집', 배를 구하기 위해, 자기를 믿고 따라오는 '가족같은' 선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독단적으로 물고기 대신 사람을 낚기로 한다. 하지만 처음 해본 '밀항'을 낡은 배는 소화할 수 없었고, 배에 들이친 해무처럼 여섯 선원들은 한 치 앞을 모르는 운명 속에 휘말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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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의 쇼케이스에서 이 영화를 어떻게 봐주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심성보 감독은 뜻하지 않은 상황 속에 놓인 여섯 선원들의 서로 다른 인간적 선택을 주목해 주셨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 그대로, 여섯 명의 인간들은, 뜻하지 않게 그들에게 닥친 상황 속에서,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하지만 그래서,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선택을 한다. 

올해 들어 유난히도,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그 중에서도, <명량>, <바다로 간 해적>, 그리고 <해무>까지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그런데 그 중에서, 현재의 우리 사회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을 고르라면, 두 말 할 것도 없이, <해무>다.  

영화 속 '전진호'는 그 살기 힘들었다던 IMF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제 오늘을 사는 누군가는 말한다. 차라리 그때는 견딜만 했다고. 그렇게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들던 IMF 시절에, 선장 철주는, 이제는 한물갔다고, 그래서 보상금이라도 받으라는 낡은 어선을 고집한다. 그의 모습은, IMF 때 한참 우리 사회에서 화자되었던, 바로 그 '무기력한 아버지'상을 다시 한번 재연한다. 이제는 사회적으로 무기력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살아왔던 인생을 포기할 수 없는, 아버지 세대가 바로 철주다.
그래도 아버지 철주는 어떻게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책임지려고 마지막 까지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이가 든, 기관장 완호에게 가면, 인생은 처참하다. 배에 등록된 선원 명부에도 올라갈 수 없이, 숨어 살아햐 하는 그의 인생의 내력은 그의 허물어진 표정만으로도 짐작 가능하다. 70년대 문학에서 만났던, 산업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채, 몇 켤레의 구두를 남긴 채 사라졌던 인물이, <해무> 속 완호 아재로 버티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래도 전진호에 기대 안간힘을 쓰며 붙들던 그의 삶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진짜 무너져 버린다. 
선장이 '밀항' 흥정을 하는 동안 밖에서 지키고 섰던, 눈 하나 끔쩍하지 않고, 선장이 '밀항'을 하라면, '밀항'을 하고, 그보다 더한 일을 시키면, 더한 일도 해치우는 호영,  또한 자기 자식을 거느리고 살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우직한 어느 집안 가장의 현현이다. 

그렇게, 허물어져 가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던 아버지 세대와 함께, 그보다 젊은 경구, 창욱, 동식이 있다. 
<해무> 속에서 그들이 어우러지고, 엉클어지는 사건의 중심에, '성'과 '여자'가 놓인 것은, IMF를 이끌던 세대의 다음 세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장치이다. 약삭빠르게 자기 것은 챙기려는 경구와, 그 누구보다 욕망의 화신같지만 정작 뒷북만 치는 창욱도, 그리고, 첫 눈에 본 여자와 사랑에 빠져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던 동식은, 아버지 이후 세대, 젊음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서로 다른 세대, 서로 다른 삶의 이유를 가진 여섯 명의 선원들의 처음은 '가족'과도 같았다. 동식이 해온 음식을 놓고 술잔을 기울이고, 함께 온기를 나누고, 모처럼 만난 병어 떼를 동식이의 다리와 맞바꾸어도 '다행'이라며 동식이를 다독일 줄 아는 가족이었다. '밀항자'를 처리해야 하는 과정에서도 '해양고' 출신이 이럴 때도 통하냐며 이기죽거리면서도 막내는 접어주려던 '가족'이었다.

하지만, 그 '가족'은 그들이 살기 위한 이기적 선택의 풍랑 속에 해체되고, 무너져 간다. IMF 때이후로 끊임없이 해체되어 가는 우리 사회처럼. 
같은 하지만 다른 뉘앙스의 조선족을 '상품'으로 여기며, 그들을 다루는 철주, 그들의 저항에, 그들이 이 살기 힘든 세상에 내 밥그릇을 빼앗아 먹는 '것'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경구, 그리고, 묵묵히 그들을 '상품'답게 뒤탈없이 처리하려는 전진호 선원들의 행태는, 완호의 정신적 아노미가 일탈처럼 여겨질 정도로, 우리 사회의 냉혹한 '민족 이기주의'를 복사한다. 
그리고 그런 '민족적' 이기주의는 상황에 따라, 완호 아재마저 거추장스러워지고, 그가 사라지자, 그의 돈과 물건을 챙기는, '나 하나의', 이기주의로 자연스레 넘어간다. 그렇게 경계를 넘어선 인간다움은 끝을 모른 채 추락해 간다. 
영화 속 그들은 뜻하지 않은 운명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전진호와 함께, 혹은 따로 운명이 갈리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그들은 이 시대을 사는 우리들의 선택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아직, '인간적'이라고 믿고, 우리가 탄 이 배가, 아직 침몰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을 뿐,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닻을 포기하지 못한 선장 철주처럼, 우리도 우리의 가슴께까지 차오른 물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인간 군상의 극단적 선택들 속에서, 맹목적인 동식의 '사랑'은 그래서 더 대비된다. 사실, 마지막 순간까지 '그 가이내 내꺼'라는 창욱과, 내 목숨을 다해 너를 지켜주겠다는 동식의 사랑 사이에, 욕망과 순정의 지수를 논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홍매를 만난 처음 순간부터, 마지막 6년 후까지, 포기할 줄 모르고 자신을 던진 동식의 사랑은, '욕망' 그 이상의 '연민'을 남긴다. 덕분에, <해무>제작 발표회 이후 계속 풍문으로 떠돌던, 홍매와 동식의 베드신은, 아마도 우리 영화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사랑' 그 이상의 공감을 나누는 교감의 나누는 씬으로 회자될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이 몸을 나누는 그 순간의, 절망과, 두려움과, 슬픔,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삶에 대한 갈구의 정서가 '정사'를 뛰어넘는다. 

STILLCUT

영화적 화법을 두고 논하자면, <해무>에 대해 각자의 의견이 갈릴 수도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그동안의 영화적 기법에 익숙한 누군가는, 좀 더 스릴있게, 좀 더 서스펜스가 강하게, 좀 더 하나, 하나의 캐릭터를 진하게 라는 아쉬움을 피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처음에 서두를 띄웠듯이 묘하다. 어쩐지 아쉽다고 했던, 그런 것들이, 영화가 끝난 후, 묘하게, '인간적 조심스러움'이나 '존중'처럼 남는다. 그들은, 좀 더 '극악'해질 수 있었지만, 여전히 한 자락, 인간이기에, 라는 연민을 위해, 어쩌면, 그 미진함이, <해무> 전진호의 여섯 선원에 대한 기억을 당긴다. 

그리고 그 기억을 오래 저장시키도록 만드는 건, 김윤석, 박유천, 김상호, 이희준, 유승목, 문성근, 진짜 전진호에 있을 것만 같은 여섯 배우들이다. 결국은 '악의 화신'같은 폭발적 연기력을 보이면서도, 스러져가는 아버지 세대의 허망함을 놓치지 않는 김윤석의 카리스마도, 오랜만에 돌아와 그림자처럼 폐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고 하지만, 그의 표정 하나만으로도 연민이 울컥 솟아오르게 하는 문성근도, 끝까지 '욕망'에 충실한데, 그게 결코 미워지지 않는 이희준의 창욱에 대한 훌륭한 해석도,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갑판장의 우직함이 드러나는 김상호의 뚝심도, 이제야 유승목이라는 배우가 있었구나 깨달음을 주는 경구 역의 유승목도, 그리고, 그의 사랑이 안쓰럽게 못해 미어지게 만드는 동식 역의 박유천까지, 좋은 배우들의 진솔한 연기의 향연으로 <해무>는 남을 것이다. 


by meditator 2014. 7. 28. 2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