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응답하라 1988> 자체 최고 시청률 (15.472% 닐슨 코리아)을 찍으며 쌍문동 골목길의 아이들은 저마다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성장과 함께, 80년대가 저물었다. 7수를 하며 사랑하는 여자 애를 위해 학 400마리를 접던 정봉이 마저 성균관대 법대에 들어서며 화려한 90년대를 시작한 '쌍문동 서민'들의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90년대에 접어든 <응답하라 1988>을 보며 문득 질문 하나가 던져진다. 그래서 도대체 19080년대, 그 중에서도 1988년은 어떤 시대였던건가요? 라고.

 

 


핏줄과 우정만 남은 시대?

기꺼워하지 않는 동생을 데려다, 국방색 담요까지 씌운 의자에 앉혀 밤하늘에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자는 정봉, 그리고 그런 형의 해프닝에 언제나 그랬듯이 군말없이 따라주는 동생 정환. 그리고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정봉이 빌던 소원, '정환이 너는 (심장 수술을 한 자기처럼 못하는 거 없이) 하고 싶은 걸 하고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런 정봉의 소원에도 불구하고, 정환은 영화 <탑건>을 보며 파일럿이 되고 싶었던 형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공사를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심지어 그런 정환의 마음을 눈치채고, 형을 위한 것이 아닌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다고 한 정봉의 말에, 정환은 형의 시선을 피하며 아니라고 말한다.

 

아마 이 장면이 '헐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애초에 정환은 '형'의 소원을 알았어도,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형은 흔쾌히 그런 동생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아마도 두 형제의 엔딩은 각자 자신의 길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하지만, 2016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하다는 <응답하라 1988>의 선택은 기승전 '가족'이다. 그들은 '가족'으로 '금의환양'한다.

 

어디 정환뿐인가? 17회에 마무리는 부모들이었다. 도란도란 모여앉은 아빠들, 엄마들은 각자 자신들의 꿈을 떠올리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이, '가족'과 '가정'으로 회귀되었음을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다. 그들의 수다는 그들이 한때 '가수'를 꿈꿨던, '화가'를 꿈꿨던, 심지어 '한 춤'을 했건 기승전 '가족 걱정'으로 귀결된다. 덕선과 보라의 엄마는 보내지도 않은 딸내미들의 결혼 생각에 눈물짓고, '개딸'이라며 버럭거리는 '동일' 아빠는 '꿈'이 없다는 딸을 다독이며, '아버지'로만 살아온 삶에 자부심을 내보인다.

 

부모들만이 아니다. '남편찾기'라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최대 과제를 풀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부모의 재혼 덕분에 하루 아침에 호형호제하게 될 선우와 택이가 서로 이물감없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걱정을 나눌 수 있듯이, 어쩌면 핏줄보다도 더 가까웠던 쌍문동 골목길 아이들은 그 '핏줄보다 진한 우정'때문에 덕선에 대한 사랑조차도 내보일 수 없었다. 자신보다 친구를 더 생각하는 '우정'의 시대다.

 

 


 


대한 뉘우스같은, 트루먼 쇼같은

이런 <응답하라>의 화법은 죽은 동료의 시신을 찾아 히말라야로 떠나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떠나는 산악대의 눈물없이는 볼수 없는 우정과 다르지 않고, 역사의 격동기에 자신을 버리고 '가족'을 위해 살아왔던 <국제 시장>의 할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아니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가족'의 눈물어린 후원 뒤에 '성공'을 일군 우리 앞선 세대들의 영광을 찬란하게 '홍보'했던 ,대한 뉘우스>에 더 가깝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

 

<응답하라>에 없는 것이 있다. 거기에 공중파 시청률 고공 행진을 벌이는 드라마들에 필수 요소인 질투와 질시, 그리고 협잡이 없다. 쌍문동 골목길 아줌마들은 그 아줌마들의 전매 특허라는 뒷담화가 없고, 한결같이 '이웃집을 질투하는 대신' '내집처럼 이웃집을 걱정한다', '부러워는 할 지언정,' 사촌이 땅을 사도 배아프다는 속담이 무색하다. 그래서, 눈물과 감동이 넘쳐나느 대신, 회를 거듭할 수록, 그 눈물과, 가족애와 우정이 공허해진다.

 

마치 가상의 80년대 같다. 드라마 속 80년대에는 80년대의 광주 사태 이후, 깊어질 대로 깊어진 지역 간의 골은 드러나지 않은 채,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격의없는 이웃으로만 등장한다.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심화되기 시작한 사회적 빈부격차는 서울 변두리 쌍문동 골목길은 피해간다. 저마다 아파트니, 땅을 향해 달리던 부를 향한 열망도 그저 tv 배경 화명일 뿐이다. 그저 경제 융성기의 세례를 받고, 재수를 거쳐 다들 무난하게 저마다 화려한 스펙을 얻는다. 공무원 시험 10년이라는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꿈도 꾸기 힘들.

 

허긴 화려한 꽃구경같은 <응답하라> 속 진실은 있다. 광주 사태가 나건, 지역 감정의 골이 깊어지건, 사회적 빈부 격차가 심해지건, 그저 붙잡고 매달리 수 밖에 없는 것은 '가족'밖에는 없었던 것이 우리의 현대사라는 '빈곤함'이다. 아버지 세대건, 어머니 세대건, 그저 그 시대를 이야기할 때, 6.25세대건, 4.19세대건, 70년대 세대건, 이구동성으로 자식을 위한 희생외에는 말할 것이 없는 우리 현대사에 대한 증명이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건 내 새끼, 내 식구 먹고사니즘이 최대 과제였던 '가족주의'라는 구심점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는 우리 현대사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국회 청문회 자리에 앉은 높은 분들이 내 가정의 보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그라지 않는 것이 범사가 되어버린 세대인 것이다. 그리고 한때는 의식이 있건 어떻건 결국은 개인의 '입신양명'으로 귀결되는 서사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보라처럼 의식있는 아이들도 결국은 '사법시험'을 통해 금의환양의 길을 택하고, 홀어머니 밑의 선우는 의대 전액 장학금이라는 화려한 성공으로 보상해야 하는, 하다못해 공부 못하는 보라도 비행승무원으로 제 앞가림 정도는 번듯하게 했다 해야 사람대접을 받는 시대인 것이다. 그게 평범한 서민의 삶이라고 <응답하라>는 은연중에 강요한다.

 

by meditator 2016. 1. 9. 1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