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현, 박상현 작가의 sbs 월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정현민 작가의 kbs 대하 드라마 <정도전>이라는 전작의 무게를 얹고 시작하였다. 하지만 10회을 앞둔 <육룡이 나르샤>를 두고 그 누구도 <정도전>의 그늘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정도전>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정극 버전이었다면, <육룡이 나르샤>는 역사라는 밑그림에서 특징적 인물과 사건을 떼어, 새로이 그려낸 '퓨전' 사극의 향기가 짙기 때문이다. 




길태미와 홍인방, 실질적 악의 축
이제 9회를 마친 <육룡이 나르샤>는 '혁명'을 이야기한다. 고려라는 막장을 극복할 새로운 시대로써의 '혁명'. 그 '혁명'을 맞이하기 위해 고려는 날마다 더더욱 어둠이 깊어만 간다. 백성으로부터 30%를 받던 세율을 90%로 늘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먹고 살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한 백성의 땅을 그 개간한 백성들의 목숨까지 거두며 권세가들은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고야 만다. 일찌기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고려 말 백성들이 스스로 권세가 농장의 농노로 전락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은(?) 역사적 사실을 드라마는 개연성있게 설명해 낸다.

그리고 이런 깊은 밤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로서 길태미(박혁권 분)와 홍인방(전노민 분)을 등장시킨다. <정도전>이 정도전이란 인물을 품어내기 위해 '악의 축'으로서 이인임이란 역사적 캐릭터를 형상화시키는데 성공적이었다면, <육룡이 나르샤>에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은 길태미와 홍인방이다. 이미 이인임(최종원 분)이라는 기존 권세가가 자리를 잡고 있는 가운데 새롭게 부상한 권세가로써 어떻게든 자신의 권력과 부를 끌어모으려는 그들의 욕망은 고려 말의 막무가내 식 권력의 부도덕을 가속화시킨다. 

극중 이인임이 <정도전>의 이인임과 비슷한 노회한 권력으로 등장하는 반면, <정도전>에서 막무가내 권신으로 잠시 등장했던 길태미와 홍인방은 극 중 '육룡'이 '혁명'을 잉태하는데 결정적 엔진이 된다. 즉 이제 10회를 앞둔 드라마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해도 무방하다. 비록 그 편이 '악'이긴 하지만. 

첫 회부터 몇 시간에 걸친 화려한 눈화장으로 등장하여 조선 제일검이라 하면서도 이인임 앞에서 철부지 아이처럼 굴던 길태미의 캐릭터는 단박에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아이 같은 순진함으로 '땅을 더 가지고 싶어'라며 서슴지 않고 다른 중신과 백성들의 땅을 탐하는 길태미의 캐릭터는 <육룡이 나르샤>를 매력있게 만든 주요인이 되었다. 그런 아이러니하나 캐릭터를 출연하는 작품마다 비중과 상관없이 캐릭터를 설득력있게 그려낸 박혁권이 역시나 길태미를 매력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가 하면, 사형 정도전을 구하기 위해 한 달음에 달려와 그를 설득하고,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애썼던, 그래서 그와 함께 유배까지 다녀온 홍인방 역시 그 등장부터 존재감이 남달랐다. 그랬던 그가, 유배 후에 180도 변신, 가장 극악하게 권력과 부를 탐하는 존재가 된 것은 길태미에 이은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되었다. 심지어 성균관 동학이었던 그와 정도전이 맞붙는 씬에서 일찌기 그 누구와 붙어도 존재감이 남달랐던 정도전의 김명민과 그 존재감에서 우위를 점치기 힘들 정도의 연기를 보인 홍인방 전노민의 안정적인 사극 연기는 홍인방의 비열함을 묘하게 가속화시킨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다가오리니 
그렇게 박혁권과 전노민이란 걸출한 배우들의 열연 덕분에, 아직은 '혁명'이란 문구가 생경하게 다가오는 드라마에서 '혁명'의 개연성은 깊어져만 간다. '혁명' 세력이 '혁명'을 잘 조직해서 '혁명'이 기대하는게 아니라, 악의 축들의 만행이 깊어져서, '혁명'을 당연시하도록 설득해 내는 것이다. 즉 <뿌리 깊은 나무>의 프리퀼로써 그 존재를 드러낸 '본원' 정도전의 활약은 아직은 뜬구름잡듯 '음모가'에 지나지 않지만, 그 섣부른 음모조차도 개연성있도록 길태미와 홍인방의 '욕망'은 거침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욕망은 현존재적이다. 이인임이란 인물이 전통적인 권신의 모습으로 기존 사극 속 집권 세력의 노회함을 드러낸다면, 길태미는 최근 드라마 속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악역들 처럼 소시오패스(사회적 규범이 없는 사람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죄책감이 없으며 그것이 잘못인지를 인정하지 못한다)적 성향을 보인다. 아이와 같은 순진함으로 눈 하나 끔뻑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한번 지고나면 죽음이라는 그의 무인론에 근거한 생존 방식은 더더욱 '복지부동'의 그 누군가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홍인방은 더더욱 기시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 시작은 개혁적이었으나, 자신이 머리를 채운 지식을 역이용하고, 그 머리에서 나온 지식을 세 치 혀로 휘감아 세상을 농단하는, 그 인물은 최근 '국정화 교과서'를 필두로 우리 사회 보수라고 말하기도 수준에 닿지 않는 반동적 획책에 앞장서는, 그 머리가 되는 일군의 인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때는 그 누구보다 고고한 학식을 자랑했지만, 이제는 그 바뀌지 않은 얼굴로 정권의 나팔수로 앞장서 팡파레를 울리는 그들을 고문받는 자리에서 바로 자신의 존재를 바꾸버린 홍인방을 통해 설득해 낸다. 

그런 길태미와 홍인방의 캐릭터, 그리고 고려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워가는 그들의 욕망을 통해 현재의 막가파식 권력과, 그들의 욕망을 복기하게 된다. 또한 그들의 욕망이 결국은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는 드라마적 설정에 포기했던 희망마저 피어오르게 만든다. 욕망이 욕망을 낳아, 결국 기존의 권세가였던 이인임과 최영과의 관계마저 긴장 관계로 만들게 된 길태미와 홍인방, 그들의 욕망의 에스커레이션 덕분에, 무인 최영, 권신 이인임, 거기에 이인임을 뒷받침하던 무인 길태미와 사대부 홍인방의 아슬아슬한 연합체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각자는 자신이 버릴 카드와 새로이 선택할 카드를 신중하게 고르기 시작하였고, 거기서 이성계와, 정도전의 안변책은 조커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육룡이 나르샤>는 이런 역사적 긴장 관계의 궤멸에 '필연적 계기 속의 우연"이라는 재미를 던져준다. 마치 베를린 장벽의 붕괴라는 역사적 필연이 대변인의 말실수와 그 통역의 잘못이라는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것처럼, 길태미와 홍인방, 최영, 이인임 사이의 일촉즉발의 긴장 관계가 땅새의 분노로 인해 파국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궁지에 몰린 홍인방이나 이인임은 자신의 파멸을 재촉하게 만들, 스스로 손발을 묶어 놓았던 이성계와 정도전에게 스스로 날개를 달아주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실현하고 만다. <육룡이 나르샤> 9회는 바로 그 필연와 우연의 콜라보레이션, 그 곳에서 빚어지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by meditator 2015. 11. 3. 1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