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학교를 다니다 뒤늦게 입시 전쟁을 치루고 있는 아들의 수능을 앞둔 친구는 기존의 교육 제도의 통과 의례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런 친구에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그토록 비합리적이라 비판했던 수능이 그나마 자신의 실력으로 자신을 입증하고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기회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고 만다. 그러나 그 조차도 어쩌면 거짓이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좋은 환경에서 남들과 다른 교육적 혜택을 풍요롭게 받은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과의 경쟁은 애초에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육룍이 나르샤>이 이른바 음서 '고려와 조선 시대,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나 지위가 높은 관리의 자손을 과거를 치르지 아니하고 관리로 채용하던 제도) 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던 고려 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것은 '시의적'이다. 그래서 무신 길태미의 아들이 성균관에서 펄펄 날뛰는 음서가 당연시되고, 이인임, 길태미로 대변되는 권문세가들의 권력이 횡행하는 그 시대는 사극의 한 장면이지만, 그대로 현실로 오버랩된다. 그리고, 그 혼란의 고려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망해가는 나라 속에서 무언가를 해보려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정의'는 그대로 이 드라마가 현실에 부르짖고 싶은 간절한 외침으로 전해져 온다. 



혼란의 고려 말, 인간은 저 마다 자신의 바닥을 확인한다. 
'난세'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 어지러운 세상이란? <육룡이 나르샤>는 그것을 '인간이 자신의 바닥을,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시대'라고 말하는 듯 하다. 태평치세라면 그저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 세상의 이치대로 흘러가면 되는 것을,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저 마다 시험에 들고, 삶의 위기에 몰린 채, 자신이 결국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확인하게 만들고 만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영웅도 탄생하고, 비겁자도, 배신자도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이제 2회에 이른 드라마는 말한다. 

애초에 kbs의 대하사극 <정도전>과 비슷한 시기에 기획되었던, 하지만 <정도전>의 편성으로 방송사가 바뀌고, 시기가 미루어 진채 2015년에 돌아온 <육룡이 나르샤>는 <정도전>과 같은 시기를 다룬다. 하지만, kbs의 사극 <정도전>이 역사를 정공법으로 해석해 들어갔던 사실화에 가깝다면, <육룡이 나르샤>는 마치 피카소의 인물화처럼 같은 시대를 여러 각도의 다른 층위를 가지고 접근한다. 그래서 피카소의 그림 속 인물이 그 미묘한 층위를 통해 인간의 본질에 접근하듯, <육룡이 나르샤>도 드라마 속 다양한 군상의 인물들을 통해 혼란기 속에 드러난 인간의 본질을 논한다. 

그래서 북방의 장수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고려 말의 지도자로 등극한 이성계(유동근 분)는 <정도전>에서 마지막까지 왕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조의 신하로서 그 충심을 거스르지 않는 지극히 정의로운 인물로 묘사되었다면, <육룡이 나르샤>의 첫 번째 용 이성계(천호진 분)는 첫 회에 그의 숨겨진 치부를 드러내고 만다. 즉 쌍성총관부를 다스리던 조소생을 배신하고 고려군에 투항해 성문을 열었던,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의 과거가 이성계로 하여금 고려말 도당에 진입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장벽을 만든 것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선'과 '악'의 선문답같은 이인임(최종원 분)과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남다름 분)과의 대화를 통해 조선을 이룬 시조 이성계가 위인전의 시나리오와 달리 이미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도덕의 잣대로는 평가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잔트가르'(최고의 사내)'라 부르며 흠모하던 아들 이방원은 진짜 잔트가르를 찾아 헤맨다. 

그가 발견한 아버지와 다른 잔트가르는 정도전(김명민 분), <육룡이 나르샤>의 정도전과 <정도전>의 정도전은 그 정의의 방향성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정도전>의 정도전이 시대와 불협화음을 내며 성장하는 캐릭터라면, <육룡이 나르샤>의 정도전은 좀 더 노회하게 시대를 짚어보며 전략가의 기지를 갖춘 캐릭터랄까. 그렇게 이인임 앞에서 고개를 숙인 이성계 대신 이인임을 보기 좋게 한 방 먹인 정도전을 따라 이방원은 성균관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정도전과 그를 따르는 신진 사대부들의 길을 쫓는다. 하지만 결국 정도전은 원나라와의 수교를 하려던 이인임의 술수는 막았지만 고문을 당하고 유배를 가는 신세가 되었고, 성균관에 남은 이방원은 불법 서적 '맹자'를 읽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유교, 특히 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그 사상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마에 새길 신세가 될 뻔한다. 



정의, 하지만 난세의 정의는 저마다 다르다. 
<육룡이 나르샤>는 <정도전>과 비교가 되지만 오히려 극의 구성 면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미드 <왕좌의 게임>을 연상케 한다. 시청자들이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줄 수 없는, 왕좌를 향한 피비린내나는 욕망이 진동했던 '게임'과도 같은 처절한 권력의 드라마를 향해 <육룡이 나르샤>는 달려간다. 

도당의 일원이 되고자 하지만 자신의 부도덕성에 발목이 잡힌 이성계, 고고한 정의를 향한 의지는 갈급하지만, 그의 뜻을 펼칠 광장은 허락되지 않은 정도전, 그리고, '잔투가르'가 되기를 갈구하지만, 결국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자들의 목숨을 거두고 시작되는 현실적 정의의 이방원까지, 조선을 향한 대의에 힘을 모을 이들의 서로 다른 '정의'의 첫발을 드라마는 그린다. 

주인공들만이 아니다. 오히려 2회에 이르는 동안 주목을 받는 것은, 고려 제일검이라며, 경박하고, 또 경박하고, 경박하기 그지 이를데 없는 길태미의 캐릭터이다. 자신의 욕망에 너무도 솔직한, 그러면서도 자신의 권력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길태미의 캐릭터는 <정도전>의 이인임 못지 않게, 아니 오히려 대한민국의 속물 갑의 본질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시청자의 친근한 주목을 끈다. 거기에, 1회에서 정도전의 가장 가까운 벗으로 그와 함께 정의의 길에 나섰다가, 2회에 이르러 길태미의 사돈으로 변신하는 홍인방(전노민 분) 역시 그의 말대로, 위기 속에서 변절하고 마는, 이 땅의 그 누군가들을 연상케 한다. 

드라마 속 대사가 투박하게 '선과 악'의 변증법을 논하고, '정의'를 내세우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위기 속에서 저마다 자신을 확인한다. 누군가는 변함없는 권력에의 의지로, 그리고 또 누군가는 정의로운가 싶었던 자신의 속된 본질을, 그리고 또 누군가는 선하고 싶지만, 도덕적 딜레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목숨을 내걸고도 여전히 자신의 뜻을 향한 멀고먼 길을 확인하고 마는, 그리고 또 누군가는, 정의보다 가까운 피를 확인하며 저마다의 '정의'를 써내려간다. 그렇게 실존적인 인물들의 이합집산을 통해 드라마는 추상적 정의가 아닌, 역사 속에서 펄펄 살아 움직이는, 그래서 인간적으로 고민해 볼만한 '정의'를 논하기 시작한다. 


이제 2회에 이른 <육룡이 나르샤>의 만듬새는 그다지 매끄럽지 않다. 장면은 들쭉날쭉하고, 인물들의 캐릭터에 집중은 쉽지 않다. 그런가 하면 대사는 사변적이고 어렵다. 그리고 그 핑계의 몫은 상당 부분 피디인 신경수에게 돌려진다. 그런데 신경수 피디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바로 2014년 세상이 바른 리더의 자질을 소리높여 갈구할 때, 부도덕한 대통령(손현준 분)이 젊은 세대의 대변자같은 경호원(박유천 분)과 함께 자신을 던져 나라를 구하려 했던 이야기를 다룬 <쓰리데이즈>가 그것이다. 희망을 기대할 수 없었던 세월호의 시대, 강직하게 '정의'를 이야기하고, 지도자와, 젊은이가 함께 미래를 기약해 볼 수 있었던 것은 어수선했던 연출력에도 불구하고 신경수 피디의 우직한 주제 의식에의 천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여전히 그 어수선함은 쉬이 개선되지 않았음에도 <육룡이 나르샤>가 그 본래의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서 결코 곁가지로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다. 부디 세월호의 시대보다 더 나쁜 시대가 있을까 라는 탄식이 실현되고 있는 2015년, 다시 우리에게 '정의'를 향한 희망을 길어줄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 주길 기대해 본다. 기왕이면, 간지나는 연출의 업그레이드도 함께. 

by meditator 2015. 10. 13. 1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