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송승헌의 행보가 심상찮다. 그저 번듯한 외모를 앞세워 '치명적 멜로'의 단골이었던 이 '미남 스타'는 주춤했던 행보를 건너고 이영애와 함께 한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만 해도 예의 캐릭터를 답보하는가 싶더니, 영화 <김창수>에서 고문을 일삼는 악랄한 감옥 소장으로, 이제 드라마 <블랙>에서는 '바바리맨' 스타일의 안하무인 저승 사자에서 시체만 보면 토해대는 어수룩한 초년 형사까지 다양한 캐릭터로 자신의 연기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하지만 <블랙>을 그저 새로운 송승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준 작품이라는 수식어로만 설명하면 아쉽다. 오히려, 그런 송승헌을 가능케 해준, 두 사람 최란 작가와 김홍선 감독을 빼놓은 <블랙>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의 선물> 최란과 <보이스> 김홍선의 콜라보, 거기에 화룡점정 송승헌 
그러고 보면 송승헌이 처음은 아니다. 김홍선 감독의 전작 <보이스> 역시 익숙한 연기로 고전하던 장혁에게 오히려 그 익숙함을 극대화시킨 '미친 개'라는 '추노' 대길에 이은 새로운 닉네임을 선사하며 중견 배우의 영역 확장을 시도한 바 있다. 그리고 장혁만큼 그 '트레이드 마크'에 갇혀있던 송승헌에게 <블랙>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최란 작가 역시 이제는 황시목이 된 조승우에게 고전했던 <마의>이후 다시 드라마를 할 의욕을 불러일으킨 '기동찬'의 캐릭터를 선물한 <신의 선물> 작가이다. 

하지만 김홍선 감독과 최란 작가를 그저 배우를 다시 새롭게 탄생시키는 콤비로만 규정하는 건 아쉽다. tvn에 이어 ocn에서 김홍선 감독이 선보인 <라이어 게임(2014)>, <피리부는 사나이(2015)>, <보이스(2016)>는 100억원을 놓고 겨루는 생존 게임, 인질극과 위기 협상팀의 일촉즉발 협상극, 그리고 범죄 현장 112를 배경으로 범죄의 골든 타임 수사극에 이르기까지 신선한 소재와 구성으로 장르물의 신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가, 비록 마무리는 아쉬웠지만 매회 시청자들에게 롤러코스터를 선물했던 독특한 장르물 <신의 선물-14일>의 최란 작가와 만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송승헌의 출연 이전에 이미 <블랙>은 기대작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화제의 감독과 작가, 그리고 스타 배우까지 얹힌 <블랙>의 서장은 어땠을까? 생과 사의 미스터리를 화두로 삼았던 <신의 선물-14일>의 최란 작가답게 이번에도 드라마에는 '죽음'의 기운이 뻗친다. 범죄 현장의 시체만 보면 토해대기가 바쁜 신참 형사, 조폭들 앞에서 기를 못쓰는 '형사'라는 직업이 안어울려 보이는 어수룩한 한무강이 송승헌이 첫 회에 선보인 캐릭터이다. 그런 그가 햄버거 집에서 우연히 선글라스를 쓴 하람(고아라 분)을 만나게 되고, 죽음을 보는 자신의 능력을 저주라 믿는 하람에게 '축복'이라는 선의를 던진 바람에 그녀와 함께 '죽음'을 구하는 길에 나선다. 
하지만 인질극 현장에서 죽을 운명의 사람을 구했다는 기쁨도 잠시, 역시 운명을 거스를 순 없는 것이었을까? 그 자리에 대신 나간 한무강이 총을 맞고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과 함께 주인공의 죽음으로 마무리될 뻔한 1회, 한무강의 시체가 누워있는 영안실에 잠입한 킬러는 그의 머리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려 하고, 뜻밖에도 그 손을 잡아챈 건 죽은 줄 알았던 한무강, 그렇게 1회는 반전의 결말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2회를 열고보니, 살아난 사람(?)이 그 한무강이 아니었다는 것이 진짜 반전이다. 시체를 보면 토하던 한무강은 온데간데 없이 시체를 들척이며 초짜 형사의 티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시체의 사인을 척척 알아맞추는가 하면, 1편에서 한무강을 꼼짝못하게 하던 조폭들을 혼자의 힘으로 제압해 버린다. 게다가 마치 '인간 세상'에 처음 온 신처럼 '인간들'을 낮잡아보며 바바리맨 차림에 아래를 훤히 내놓는 걸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가 하면, 장농이고 드레스룸이건 문만 열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무언가를 찾는 듯한 새 무강의 행보는 1편의 한무강과 극과 극이기에 더욱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죽음의 사자, 능력자 여주인공, 그리고 과거의 사건, 익숙하되 신선한 조합
이렇게 배우 송승헌을 앞세원 한무강의 양 극단 캐릭터가 1회의 씨줄이었다면, 그 날줄은 죽음을 보는 능력으로 인해 자꾸 죽음과 엮이는 하람의 바람잘 날 없는 인생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나타난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도 그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어머니에게 그 주둥이를 꼬매고 다니라는 막말을 듣는 이 소녀는 선글라스를 벗을 때마다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친다. 어린 시절 그리고 지금의 무강으로 인해 용기 백배하여 세상에 나서기가 무섭게, 이제 달라진 무강과 엮이며 그녀의 죽음을 보는 능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2회의 마지막, 빗속을 거닐어 집으로 돌아온 무강과 그 무강에게 너는 이미 죽었다는 무강의 몸을 빌은 검은 옷의 인물을 대치시키며, 두 무강의 존재로 인한 흥미를 극대화시킨다. 하지만, 무강의 두 캐릭터 이전에, 전혀 형사스럽지 않지만 미국 유학까지 마치고 막내 형사가 되어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97년 무진 주택 화제 사건을 뒤쫓던 한무강과 알고보니 무강이 찾던 그 의문의 여중생이 지금의 약혼자라는 미스터리에 숨겨진 음모는 <블랙>의 또 다른 밑그림이다.
그리고 거기에 얽혀든 어린 시절 무강과 하람의 인연, 그리고 하람의 비극적 가족사와 능력. 드라마는 마치 페스트리처럼 켜켜이 복선과 복선을 쌓으며 저마다 빛나는 구슬처럼 사건과 캐릭터를 나열한다. 

그래서일까? 너무 많은 구슬같은 이야기들은 아직 엮어지지 않은 티를 내며 각각 굴러다니기도 한다. 1,2회 나열한 구슬들은 저마다 흥미를 가지로 굴러다니지만 드라마의 초반이기에 우려보다는 기대가 크다. 거기에 새로운 면모의 송승현을 발견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마지막 장면의 김태우는 그 한 장면만으로도 다음 회를 기약하게 만든다. 죽음의 사자를 내세운 드라마가 처음은 아니고, 과거의 사건을 현재와 다른 드라마 역시 처음은 아니지만, 적어도 <블랙>은 이 낯설지 않은 제재들을 신선하게 환기시켰다는 점에서는 성과를 거둔다. 과연 이게 '편집'의 미숙인지, 과유불급인지 그 답은 결국 '다음 기회'로  남겨진다. 
by meditator 2017. 10. 16. 1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