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도 썼지만 프랑스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다름'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우리 나라 사회에서 익숙한 화법과 전혀 다른 '이방의 언어'는 그래서 매혹적이지만, 그래서 종종 '난독'을 불러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론 모호하고 때론 기괴한 언어들이 도달하는 곳이 결국은 인류 보편의 감성과 주제 의식이라는 걸, 영화 <맨 오브 마스크>는 일깨워 준다. 






영화 <맨 오브 마스크>는 형사 베르호벤 시리즈로 인기를 얻었던 추리 소설가 피에르 르메트르에게 영광의 콩쿠르 상을 안긴 <오르부와르>를 원작으로 한다. 오르부아르au revoir은 영어의 good bye와 같은 프랑스의 또 보자는 뜻의 인삿말이다. 하지만 소설의 제목 '오르부아'에는 보다 처절한 역사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오르부아'로 번역된 소설에는 là-haut가 생략되어 있다. au revoir  là-haut는 '천국에서 만나요'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1차 대전 당시 국가 반역죄로 총살을 당한 장 블랑사르라는 군인이 죽기 전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문구에서 인용한 말이다. 

전쟁의 볼모가 된 병사들 
프랑스는 1차 대전 당시 명령 불복종, 자해, 탈주, 비겁 행위, 반란 등의 명목으로 2천 4백 여명의 변사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 중 6백 여 명이 실제로 총살되고, 나머지는 강제 노역형을 치뤘다. 과연 사형이 선고된 2천 4백 여명의 병사들은 죄가 있었을까? 아내에게 천국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남기고 총살을 당한 장 블랑사르의 그 유언과 같은 문구를 100년 뒤 피에르 르메트르는 자신의 책 제목으로 삼으며, 전쟁터에서 명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병사들을 '볼모'로 '희생'시킨 국가, 전쟁에 대한 회의적 반문을 한다. 

그리고 그 '반문'을 위해 영화는 1차 대전의 종전을 앞둔 113고지의 전선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 당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장훈 감독의 2011년 영화 <고지전>과 같은 아군의 시체에 난 총상에 대한 의문스런 상황이 벌어진다. 전쟁이 이제 더는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감지한 병사들은 더는 총을 들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전쟁의 종식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전쟁'을 통해 획득한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잃고 싶지 않은 중위 프라델(로랭 라피테 분)은 가장 나이많은 병사와 가장 어린 병사 두 사람을 척후병으로 내보내고,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사라진 두 사람의 생명은 종식된 전쟁을 아수라장의 전장으로 복귀시킨다. 

명령에 따라 총검을 들고 참호 밖으로 나와 전진해야 하는 병사들, 그리고 하늘을 뒤덮는 포탄의 세례 속에서 알베르(알베르 뒤퐁텔 분)는 말과 함께 매몰되는 처지에 빠졌고, 말 때문에 겨우 숨을 쉴 수 있어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그를 동료 병사였던 에두아르(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분)가 끌어당겨 구한다. 하지만 동료의 생명을 구명하는 그 에두아르의 행위는 곧 그를 포탄의 저격 대상으로 만들고, 한 발의 포탄과 함께 그는 날라가 버린다. 다시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얼굴의 반을 가린 두건이 피로 흥건한 병원의 침상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몰핀을 훔쳐가며 죽어가는, 아니 죽고 싶어하는 그를 간곡하게 간호하는 알베르가 있었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파리로 돌아오지만 결코 그들은 전쟁 전의 그들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은행 출납원이었던 알베르에게는 다시 은행의 안정적인 일자리는 보장되지 않았고, 전 애인 마저 외면한 엘리베이터맨에서, 광고 샌드위치 맨으로 신분이 하락세를 탄다. 그래도 알베르에겐 멀쩡한 신체가 있었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조잡한 가면과, 보장할 수 없는 재건 수술마저 거부한 에두아르는 알베르가 훔쳐오다시피한 몰핀에 의존하여 버텨가는 절망의 나날만이 있었다. 

세 남자의 끝나지 않는 전쟁
영화는 '전쟁터에서 돌아왔지만 각자의 의미에서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 세 남자'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전쟁과 전쟁의 상흔을 '소비'하는 프랑스 사회에 대한 통찰이 있다. 전쟁을 도발하면서까지 자신의 명예와 지위에 집착했던 프라델은 '전쟁'의 상흔에 감성팔이하는 사회를 이용하여, 병사들의 이장과 매장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하고자 한다. 그렇게 '전쟁'을 통해 '입신양명'을 꿈꾸는 프라델의 맞은 편에는 전쟁터에서 부터 그의 '반국가적, 반인권적 행위'의 목격자가 된, 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처지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알베르가 있다. 그리고 '상이용사'로 자신의 삶을 자포자기하거나, 자신을 그런 처지로 만든 국가와 사회에 대해, 자신의 재능을 기꺼이 재물로 삼으려는 에두아르가 있다. 

결국 이들 세 사람을 국가를, 그리고 '전쟁'을 감성적으로 소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를 벌인다. 그들의 의도야 어떻든 그들은 '사기'의 주범이 되고, 하지만 프랑스 사회와 사람들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이런 사기극에 기꺼이 마음과 돈을 내어준다. 그리고 그 중에는 자신의 사업을 이어받을 재목이 아니라며 어릴 적부터 외면해오다, 뒤늦게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들에 대한 회한으로 거금의 기념비 사업 자금을 낸 에두아르의 아버지 페리쿠르도 있다. 



돈으로 자신들이 벌인 전쟁을 보상하고,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눈먼 돈'을 활용해 자신의 발판으로 삼거나, 궁극의 가난으로 부터 도피하고, 자신을 상이군으로 만든 사회를 징죄하고 도발하고자 하는 세 남자들, 그들이 사기친 돈을 그들을 구제했을까? 사기로 원하던 돈을 받아들고 기뻐하던 알베르, 그런 알베르에게 에두아르는 자기가 돈을 조금 써도 되겠냐고 묻는다. 당연히 네가 번 돈이니 얼마든지 쓰라는 알베르의 답, 조금 후 에두아르는 그의 기막힌 예술적 재능으로 돈다발을 갈기털이 휘날리는 멋들어진 사자 가면으로 둔갑시킨다. 그리고 에두아르에게 돈의 효용은 거기까지였다. 파리의 가장 화려한 호텔에서 벌인 파티도, 알베르가 권유한 돈을 갖고 식민지로의 도피도, 그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 무엇으로도 회복될 수 없는 트라우마 
한 판의 사기극 이후에 화려한 새의 가면을 쓴 채 공허한 눈빛으로 앉아있는 에두아르. 그의 심정은 결국 물질적 대가로는 회복되어질 수 없는 '사회적 트라우마'의 명징한 상징이다. 최근 4주기를 맞이한 세월호를 둘러싸고 다시 한번 재연되고 있는 '지겹다'는 돌림 노래에 대한 삼풍 백화점 참사 피해자의 호소문 속 심정과도 같다. 

나는 이런 종류의 불행과 맞바꿀만한 보상금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나 역시 당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그 돈이 그 후의 인생에 도움이 됐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일을 피하고 그 돈을 안 받을 수 있다면, 아니 내가 받은 보상금의 열배를 주고라도 그 일을 피할 수만 있다면 나는 열 번이고 천 번이고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당신들은 모른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잘 모른다. 이런 사건 사고가, 개인의 서사를 어떻게 틀어놓는지. 사고 이후로 나는 세 번이나 자살 기도를 했다. 한순간 모든 것이 눈앞에서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을 본 후로 나는 세상에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고 언제나 죽음은 생의 불안을 잠재울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그깟 돈이 삶의 이유가 되어 줄 수 있을까.-산만언니, 딴지 일보 

어린 소녀의 공감어린 위로도, 알베르의 우정도, 사기를 통해 획득한 일확천금도, 그리고 그 사기의 목적이었던 사회와 국가, 그리고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조소와 복수도 에두아르의 삶을 회복하지는 못한다. 원작과 달리, 하지만 원작자인 피에르 르메트르가 감탄할 만큼 외려 뒤늦은 아버지의 참회는 그의 남은 생을 재촉하는 것으로 영화는 전쟁의 트라우마의 강렬함을 극대화시킨다. 알베르의 오랜 숙원이었던 죽어간 전우에 대한 숙제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했던 '흙의 매몰'이 대신해 준다. 그리고 뒤늦게 완수한 그의 임무가 식민지에서의 그의 체포에 대한 면죄부가 된다. 



뒤늦은 아버지의 참회를 불러온 에두아르의 재능은 아름답고, 절묘하고, 때론 기괴하기 까지 한 그의 가면으로 빛난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재능과 삶을 빼앗아 간 프랑스 사회에 대한 대국민 사기극의 수단이 된다. 아름답고 처연한 가면극과 미술적 재능을 군불 삼아 피어난 사기극의 여정이 향하는 건, 결국 '전쟁'에 대한 질문이다. '전쟁'이, 전쟁과 같은 사회적 트라우마를 낳는 사건들이 인간을, 사회를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한, 그럼에도 여전히 그에 대해 무신경한 사회에 대한 냉소이다. 1920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전쟁 후 그 전쟁을 잊어버리고자 요동쳤던 프랑스 사회를 관통한 갖가지 사기극이 도달하는 건, 1차 대전으로 상징된 사회적 참사에 대한 도덕적 질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왜곡된 세 남자의 생애가 벌인 때론 우스꽝스럽고, 슬프며, 기괴했던 여정이 도달하는 건 가장 원론적인 '인간 사회'의 문제이자, 도덕적 결론이다. 


by meditator 2018. 4. 21. 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