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21일 방영된 도현정 작가가 쓴 mbc베스트 극장<늪>의 엔딩은 충격적이다. 남편의 불륜을 알고 난 후 집요하게 복수를 해오던 여주인공 윤서(박지영 분)가 불륜 내용이 담긴 테이프를 듣고 당황해 하는 남편의 차 위로 자기 자신을 던지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깨진 유리 위로 눈을 부릅뜬 채 남편을 노려보던 여주인공의 표정은 오래도록 시청자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복수의 마지막을 자신을 '산화'시켜 완성하던 <늪>의 여주인공처럼 12월 3일 종영된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속 비극의 주인공인 김혜진(장희진 분)은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을 '단죄'하고자 '자신'을 던졌다. 


우리 드라마에서 자고로 '복수'는 익숙한 코드이다. 아침 드라마에서부터 주말 드라마까지 억울한 사연을 가진, 주로 여주인공이 입지전적 성공을 배경으로 삼아, '복수'를 감행하는 것이 이른바 트렌디한 스토리의 주를 이룬다. 드라마 속 그녀들은 대부분 '권선징악' 복수도 성공하고, 자신의 일과 사랑에 성취를 하며 '해피엔딩'을 이룬다. 현실 속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드라마 속 여주인공을 통해 한껏 '환타지화'되어 시청자들의 마음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자신을 던져 '단죄'하는 여주인공
그런데 2003년작 <늪>의 여주인공은 달랐다. 부유한 집안의 잘 나가는 정형외과 의사이던 여주인공은 남편과 불륜에 빠진 여자를 정신병원에 보내고, 남편을 남자 구실을 못하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결국 자신의 목숨을 던져 '복수'의 정점을 이룬다. 왜? '복수'를 하고 잘 살면 되지? 여기서 도현정 작가의 시선이 드러난다. 남편의 불륜을 통해 산산히 조각난 그녀의 가정, 그리고 남편의 불륜 과정에서 죽어간 아버지, 심지어 불륜의 상대방은 그녀가 가장 아끼던 동생 뻘의 여자, 그건 그냥 불륜이 아니라, 그녀가 의지하고 믿었던 세계의 파괴라고 작가는 <늪>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그 자신의 세계를 파괴한 사람들을 '단죄'하기 위해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그녀 자신 또한 '피폐해져갔음'이 결국 그녀 자신을 던진 또 다른 이유라고도 덧붙인다. 그리고 이것은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혹은 결과만 괜찮으면 되지 않느냐는 현재 대한민국의 허위적 윤리 의식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문제 의식은 십 년 여의 세월을 흘러 <마을-아치아라의 비밀>로 다시 통한다. 마을로 흘러 들어온 외지인 김혜진, 하지만 그녀는 사실 외지인이 아니었다. 마을의 상습 강간범에게 강간을 당한 채 아이을 낳게된 윤지숙(신은경 분)의 버려진 아이였다. 파브리 병으로 인해 신장 이식이 필요했던 그녀는 자신을 도와줄, 그리고 병든 자기가 의지할 혈육을 찾아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피붙이를 찾아 헤맨 여정에서 그녀가 만난 끔찍한 사실, 그녀의 남편에게 불륜을 해가면서 '단죄'를 하려고 했던 친엄마가 사실은 '강간'의 피해자였다는 것, 더구나 그녀를 강간했던 당사자는 여전히 마을에서 자기 자식을 끔찍히 여기며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자신을 버린 엄마를 밝히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녀는, 이제 엄마가 자신을 '괴물'로 여기도록 만든 그 '강간'범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 그리고 신장 이식을 해주겠다고 나선 엄마조차 외면한 채 진실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김혜진의 맹목적 몸짓은 자신의 출생이 주는 절망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애초에 친엄마를 밝히려던 그녀의 시도도, 그리고 마지막 자신과 엄마를 그렇게 만든 강간범을 밝히려던 시도도, 그 어느 것 하나 그녀를 막아서지 않는 것이 없다. 겨우 찾아낸 엄마는 그녀를 괴물로 불렀고, 잘 살고 있는 자신을 흐뜨러 뜨리는 훼방꾼 취급을 했다. 강간범은 한 술 더 뜬다. 자신의 어린 딸이 아플까봐 애지중지 하는 그는, 또 다른 그녀의 혈육인 그녀를 끝내 '그 여자'라 부르며 '협박범' 취급이나 한다. 병에 대한 치료보다도 더 간절히 원한 '가족'의 손길을 '괴물'이 되어버린 김혜진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신장 이식이 필요했던 김혜진이나, 의붓 오빠가 신장이식을 해줄 여유도 없이 죽어버린 가영(이열음 분)이나, 강간범의 상습 강간의 피해는 십 여년이 지나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낳았던 딸을 괴물이라 부르는 윤지숙에게서 보여지듯이 강간의 상처는 덮는다고 덮어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치아라 마을은 곧 현실의 우리 사회
결국 윤지숙 모녀의 불행을 통해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른바 사회의 그럴 듯한 허위적 윤리의 껍데기 속에 숨죽여 사라져 가는 윤지숙 모녀와 같은 피해자들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확장하면 아직도 수요일마다 일 대사관 앞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고 사과받기 위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시위를 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요, 가깝게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성범죄 피해자들의 숨은 상처이다. 또한 그것은 단지 '성'과 관련된 상처만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 사건을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져 가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깊어져만 가는 '세월호' 등 각종 사회적 상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애초에 제대로 단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상처의 피해를 공동체가 보다듬었다면 김혜진이든 가영이든 애꿏은 두 아이의 운명을 달리 할 일이 없을 사건을 십 여년이 지나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야 풀어지는 그 '과거사'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에서 보여지듯이 김혜진은 자신을 던져 그 '과거사'를 해결하려 했지만, 정작 그녀가 죽음으로 드러낸 것은 또 다른 피해자 윤지숙의 슬픈 과거였을 뿐이다. 결국 피해자와 피해자만이 마을의 역사에서 상처를 받은 채 쓰러져 간 모습은 얄궃게도 우리의 현대사와 닮았다.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범죄자는 단죄의 시간을 벗어나 멀쩡한 모습으로 경찰서를 나올 수 있게 되는 그 슬픈 결론이 놀랍게도 현실과 흡사하다. 때문에 결국 윤지숙의 아이러니한 모정이 김혜진을 죽음에 이르게 했음에도 윤지숙에게 쉽게 돌을 던질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우리를, 그리고 우리 사회가 멀쩡한 듯 가리고 있는 위선의 가면을 벗긴다. 그리고 그 평화롭던 아치아라라는 마을이 상습 강간범을 결국 품어준 꼴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또한, 우리가 습관적으로 의지하는 '모성'과 '가족애'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뿐만 아니라, 결국 피해자였던 두 여주인공의 죽음과 감옥행으로 끝나 버린 채, 그 사건을 둘러싸고 음습하게 등장했던 윤지숙의 남편과 노회장의 커넥션을 남겨 둠으로써, 쉽게 종식되지 않는 사회적 비리의 뒤끝을 여운으로 남긴다. 그것은 이른바 미드처럼, 드러난 한 사건 이후에 보다 큰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시즌제를 위한 포석일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자체 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아마, 그 어떤 드라마보다, 시원한 '환타지'의 여력이 없는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이 그래서 생소하고 낯설지만, 그것이 바로 시청률로 설명할 수 없는 이 드라마의 가치이다. 
by meditator 2015. 12. 4. 1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