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공공연하게 위력 또는 기세를 보여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이다. 물론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1인 시위'의 경우처럼, 한 개인이 주체로 나서는 경우도 있다. '시위'는 '대의 민주주의'가 대세가 된 현대 정치에서, '대의'로 표현되지 않은 국민들의 이익을 현장에서 표출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방식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4.19를 비롯하여, 5.18, 6월 항쟁까지  민족사의 구비구비마다, 역사적 전환점이 된 그 고비에서 대중들의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왔다. 가깝게는 광우병 촛불 시위를 통해, 다수의 학자들이 '네티즌 직접 민주주의 시대의 개막'을 예언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만이 아니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 아래 장기간 펼쳐진 '미국 월가의 시위' 역시 곪아터진 금융 자본주의의 현실을 고발했다. 이렇듯, 세계 역사에서, 혹은 우리의 역사에서 '시위'는 역사적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매개체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문화, 혹은 현실 속 '시위'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아니 여전히 '부정적'인 정도가 아니라, 정치와 사회가 보수적, 혹은 개인주의화 되어갈 수록, 공공의 목적을 위해 분출하는 '시위'에 대해 '불편한 심리적 기제'를 조장한다. 드라마도 다르지 않다. 



정의로운 주인공의 도구가 된 제 정신이 아닌 1인 시위자
7월 30일부터 방영을 시작한 <끝에서 두 번째 사랑>,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고상식에 대해 '오늘도 무사히'를 외치는 안전 무사고 주의의 5급 공무원이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책임감이 투철한 그는 아내의 죽음 이후 '사건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어디에서나 발 벗고 나서는 믿음직한 인물이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드라마는 이 '고상식(지진희 분)'이란 인물의 믿음직한 면모를, 아내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와 그를 뛰어넘는 그의 헌신성을 설득하기 위해 뜬금없이 '개념없는 아니 거의 제 정신이라 보기 힘든 1인 시위자'를 등장시킨다. 구청에서 한참 업무와 관련하여 후배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고상식, 그때 주변이 웅성거리며 한 명의 시위자가 등장한다. 얼굴을 우스꽝스런 가면으로 가리고, 온 몸을 피켓팅한 그는 양 손에 불을 붙인 화염병을 들고 등장하여 다짜고짜 시장을 나오라 외치며 구청 복도를 질주한다. 시청에는 지키고 있던 사람들도 없었던 양, 모든 사람들은 앞으로 있을 고상식의 활약상을 위해 모두들 앞다투어 소리를 지르며 피해가고, 시위자는 순조롭게 계단을 올라 고상식이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던 복도에 이른다. 화염병을 든 시위자를 발견한 고상식, 당연히 그는 말로 그와 대화를 나누려 한다. 하지만, 그런 고상식에게 시위자는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고, 고상식은 그런 폭력에도 주저치 않고 온 몸으로 화염병을 든 그를 저지라려 하고, 그러다 화염병이 떨어져 불이 붙고, 그 과정에서 고상식은 어떻게든 그 피해를 막아보려다 다치게 된다. 이 장면이 1회의 마지막 장면이 되었고, 다음 장면 고상식은 응급실에서 여자 주인공 강민주(김희애 분)와 나란히 눕는 것으로 이들의 남다른 인연이 예고된다. 

왜 하고 많은 드라마를 놔두고, 그저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에 나오는 엑스트라에 불과한 '시위자'를 건드냐고? 그러면 이렇게 반문하게 된다. 왜 하고 많은 설정을 놔두고, 남자 주인공의 정의로움을 들먹이기 위해, 그리고 그 다음 장면에 응급실에서 여주인공과의 인연을 설정하기 위해 애꿏은 1인 시위자를 도구로 사용해야 했냐고? 

드라마는 마치 1인 시위자에 대한 편견을 피해가기라도 하는 듯, 시위의 내용을 '농작물 피해주는 캣할머니'로 희화화시켰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동물 보호에 대한 혐오'를 앞세운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시위자가 뒤집어 쓴 피켓의 내용이 아니다. 과연,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에게 그 문구가 먼저 들어왔을까? 오히려 그 보다는, 그가 1인 시위자라는 점, 화염병을 들었다는 점, 거기에 '대화'는 통하지 않고 무작적 자기 목적을 위해 '폭력'도 불사한다는 점이 우선 시선을 끌지 않았을까? 그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항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든 화염병을 드라마는 주인공에게 상해를 입히는 도구로 소모한다. 뿐만 아니라, 암묵적으로 '시위'자는 자신의 목소리만 높일 뿐, 타인과의 대화에는 소통 불능인 제 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그려낸다. 바로 이런 무의식적으로 다루어 지고 있는 1인 시위'자에 대한 편견이, 주말 10시대 드라마에 남자 주인공의 정의로움을 설득해 내기 위해 '소모적', '편의적'으로 다루어 지고 있다는 점이 바로 우리 사회 시위 문화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암묵적으로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드라마 속 '시위'는 대부분 그 집단 행동이 긍정적이거나, 드라마의 전개 상 개연성을 가지고 등장하는 경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인 비일비재하다. 

즉자적이거나, 무기력한 반응으로서의 '시위' 
여배우 정혜인(김아중 분)의 아들 유괴 사건을 빌미로 방영되는 리얼리티 방송 프로그램을 그리고 있는 sbs 수목 드라마 <원티드>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범인의 요구에 맞춰 리얼리티 방송을 마련한 정혜인을 비롯한 원티드 팀, 그들에 반대하여 방송을 하게될 ucn 방송사 앞에는 '시위'대들이 상주한다. 현실적으로 범인의 요구에 맞춰 리얼리티 방송 프로그램을 한다는 사실 자체는 충분히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그에 반대하는 '시위'는 있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드라마 속 '시위대'는 어쩐지 그런 시의적절한 사회적 요구를 반영한 의식적 목소리라기 보다는, '대중의 감정적이고 즉자적인 반응'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하동민 원장이 출연하는 회차에서, 시위대는 그의 사주를 받은 그로부터 호혜적 시술을 받은 환자의 엄마가 시위대의 일원이 되어 등장하여, '시위'의 목적성을 훼손한다. 물론 이를 통해 작가는, 우리 사회 벌어지는 이른바 '관제 시위' 등의 현상을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그런 부정적인 일면을 지적하고자 하기엔, 그에 반한 '시위'의 긍정성에 대한 주목이 드라마의 전개 상 취약했다. 그저 <원티드> 속 '시위대'는 배려심없는 대중의 즉자적 반응이거나, 조작된 반응으로 다루어 지며, 대중에 대한 '냉소'를 깊게 한다. 

그런가 하면 <38사기동대>에서의 시위는 무기력하다. 극중 최철우 회장은 '마석동'을 재개발 하려고 하고, 이에 마석동 주민들은 철거 반대 시위를 한다. 그 중에는 백성일(마동석 분)과 양정도(서인국 분)가 즐겨찾는 국밥집 주인 할아버지도 있다. 그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마석동을 찾은 천성일 시장(안내상 분), 하지만 최철우 회장의 계략에 따라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천성일 시장에게 달걀을 투척하고, 그 과정에서 국밥집 할아버지는 '폭력 시위' 주동자로 경찰에 잡혀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38사기동대>는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시위 현장에서의 '불순 과격 시위' 조장자에 대한 이면을 까발리며, 철거 시위의 속내를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드라마에서 자신들의 터전을 잃은 마석동 주민들이 하는 일은 없다. 시위를 하지만, 국밥집 할아버지처럼 억울한 법의 희생자가 될 뿐이다. 현대판 홍길동을 그려내는 <38사기동대>의 활약을 위해, 철거민들의 애닮은 사연과 무기력함은 드라마를 위해 한껏 조장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드라마는 힘없는 자들의 반격을 위해, 힘없는 주체들을 '소모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선 피해갈 수 없다. 



물론 지난 4월 13일 방영되었던 sbs의 2부작 <나청렴 의원 납치 사건> 처럼, 철거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회의원 납치까지 감행하는 역대급 슈퍼 을들의 반란을 통쾌하게 그린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단막극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시위'에 나선 군중이나 개인은 <끝에서 두 번째 사랑>에서처럼 도구적이거나, <원티드>에서처럼 즉자적이고 감정적인 우중이거나, <38사기동대>에서처럼 무기력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이미지들인 반복되다 보니, 이미 우리 사회에 전반적으로 지배되어 있는 '시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개선될 여지가 점점 더 줄어든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통치 방식은 '분할주의'이다. 우리 사회 세월호에 이어, 최근 성주 군민들처럼,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여 나서는 사람들을 대다수의 군중으로 부터 고립시키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고, 특히나 군사적 전체주의 문화에 아직도 길들여져 있는 한국 사회에서 그런 분할 통치 방식은 매우 잘 먹히고 있는 편이다. 그리하여 세월호든, 성주군민들의 사드 시위 등은 모두,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문제, 그래서 좀 있다보면 듣기 지겨워지는 남의 소리로 우리 사회에서 '매장'되어져 간다. 그런 분할주의 통치 방식 이면에는, 우리 역사에서 분명 '혁혁한 역사적 도화선으로' 자리 매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직접 민주주의 방식'에 대한 거부감으로 자리잡고 있는 '시위 문화'에 대한 대중 매체의 표현 방식도 한 몫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by meditator 2016. 8. 1. 1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