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제들>을 보고 나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는 느낌은 깔끔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란 느낌이다. 만듬새에 있어 군더더기 없고, 배우들의 연기가 적절했으며, 감독의 과잉조차도 피해간 삼박자가 잘 갖춰진 영화말이다. 


엑소시즘, <검은 사제들> 표현에 따르면 구마(驅魔)는 귀신을 쫓는 의식 또는 일을 지칭한다. <검은 사제들>에서 다루고 있는 엑소시즘 자체는 1973년에 개봉한 영화 <엑소시스트>를 넘어서지 못한다. 소녀의 몸 속에 들어간 악마를 사명감을 가진 두 사제가 축출한다는 원론적 이야기구조를 그대로 따른다. 

하지만 이 평범한 엑소시즘의 이야기 구조가 장대현 감독이 구현해 낸 '한국 사회'라는 곳에 오면 특별한 구제 장치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사회적 의미를 지닌 엑소시즘 
영화의 시작은 뺑소니 사건으로 시작된다. 12 악령 중 한 악령이 한국으로 잠입(?)했다는 소식을 받아든 로마 교황청은 비밀리에 구마 사제를 한국으로 급파하고 악령를 손에 넣은 채 다급히 한국을 빠져나가려던 교황청의 사제는 그 과정에서 뺑소니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영화는 초반 그저 사제의 차량 충돌 사고로 보여졌던 사고가, 이후 사실은 뺑소니 사고였음을 드러내면서 평범한 엑소시즘의 영화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즉, 구마라는 목적을 위해 거리를 거닐던 평범한 여고생을 치고 뺑소니를 치는 교황청의 사제의 행동은 비록 그것이 악령의 의도된 도발이라 할 지라도 자신의 권위와 목적의 정당화를 위해 평범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권력을 상징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 악령을 퇴출하는데 실패한 로마 교황청, 그를 대신해  뺑소니 사건의 희생자 소녀의 몸 속에 들어간 악령을 퇴출하고자 나선 것은 김신부이다. 하지만 한국의 기성 카톨릭 교단 및 관계자들은 김신부의 구마 의식에 냉소적이다. 구마와 관련된 회의를 하지만, 대주교는 참석은 하되, 자신은 참석하지 않은 듯, 악령에 대해 그 어떤 메시지도 남기지 않은 듯 그 자리를 떠나 버린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12번째 부사제인 최부제를 선택하고 소개시켜주면서도 막상 그에게 김신부의 비리 영상을 찍어오라는 학장 신부나, 어떻게든 김신부의 구마 의식을 무마하려는 수도원장이나 김신부의 엑소시즘에 대한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문제를 어떻게든 최소화시키면서 잡음은 없애려고 하는 무사안일한 권위주의의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다. 그런 권위에 대항하는 김신부는 교단의 정통 신부의 모습에서 삐껴선 아웃사이더 그 자체이다. 

이렇게 권위 혹은 기성 권력에 대항하는 엑소시즘은 또한 이성에 대한 대비로서도 스스로를 규정한다. 학장 신부는 최부제에게 한국의 카톨릭에 대해, 모든 미신에 맞서 싸우며 성장한 이성의 종교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가 하며 대주교와의 회의에서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드러내 보였던 수도원장은 정작 정부에 대항하는 반정부적 시위의 배후 인물로서 활약한다. 이렇게 영화 속 엑소시즘은 근대의 산문이었던 이성이 활약했던 제 영역의 모든 것을 그 존재의 상대편으로 자리매김하며, 탈근대적 모습으로 등장한다.  종교성 자체가 이성만의 영역이 아님에도 근대 이래 이성이 세계에서, 역시나 그 호혜를 받아 성장했던 이성의 영역으로서의 종교와, 사회 민주화를 외치지만 한 소녀의 불행에는 둔감한 사회 운동의 영역을 건들면서 한국 사회에서 편협하게 성장한 종교와 시민 운동의 영역을 드러내 보인다. 결국 근대 사회는 '이성'이라는 굳건한 토대를 만들었지만, 영화 속 김신부의 엑소시즘을 어떻게든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처럼, 그 '이성'만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영화는 주장한다. 

김신부의 구마 의식, 그리고 그보다 강력한 악령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온 최신부가 숨어든 골목, 그 어둠, 그리고 그가 한 발만 내밀면 들어설 수 있는 휘황찬란한 거리는 그가 숨은 어둠과 대비된 허상의 밝음을 절묘하게 대비시킨다. 더구나, 소녀가 악령에 시다리며 죽어가는 소녀의 집은 서울의 중심 명동 한 복판, 그 복잡한 도시의 한 구석이자, 중심의 틈샘라는 걸 통해 영화는, 번듯한 우리 사회가 가진 체계와 권위의 그 허약함과 빈곳을 고스란히 설명해 낸다. 최부제가 한 발짝만 나서면 그 몸의 흉한 흔적마저 사라질 빛의 세계이지만, 역으로 거기서 한 발짝만 내딛으면 소녀가 악령에 휩쓸려 희생되어가는 어둠의 세계란 것을 영화는 역설적으로 그려낸다. <검은 사제들>의 엑소시즘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엑소시즘을 다룬 어느 영화에서나 등장했던 구마 의식 그 자체가 아니라, 발전과 성공, 그리고 이성의 체계가 자리잡은 듯한 한국 사회의 어둠, 골목, 그 틈새이다. 

그렇게 기존의 권위와 이성의 영역에서 정당하게 인정받는 그 모든 것을 상대편으로 하며 드러낸 구마 의식이 맞닿아 있는 곳은 뜻밖에도 소녀의 구마 의식에 서로 협업하는 샤머니즘이다. 즉 근대의 이성을 탈피한 엑소시즘이 찾아간 곳은 뜻밖에도 가장 원시적이며 원초적인 종교성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김신부는 제천 법사와 그의 뒤를 잇는 딸 영주 무당과 함께 영신의 몸속에 들어간 악령을 퇴출하고자 한다. 마치 이성의 세계에 환멸을 느낀 탈근대주의자들이 감성과 비논리, 상대주의의 세계에 침잠했듯이. 한국 사회를 이룬 기성의 체계에 대하여, 그 절름발이 이성의 뒤안길같은 구마 의식으로 소녀를 구원한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그저 전체를 제쳐버리고 개인으로의 회귀는 아니다. 개인적 고뇌에서 신부의 길로 도피한 최부제가 자신의 고뇌를 소녀의 구마 의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으로 '구원'의 길을 얻듯이, 결국 개인의 문제 역시 전체의, 혹은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될 수 밖에 없음을 영화는 제시한다. 




배우들의 호연, 그보다 돋보인 감독의 절묘한 배합 
대부분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관람객들의 평은 '강풀의 조조'에서 '강동원이 나왔다. 강동원이 사제복을 입고 나왔다'처럼 배우의 존재감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동일하게 강동원의 존재감을 표명했지만 아쉬움을 제기했던 <군도>와 대비되는 평이기도 하다. 즉, 스타로서의 그 존재감이 강력한 강동원이란 배우가 똑같이 그 우월한 실루엣으로 영화를 휘젓지만, <군도>가 그로 인해 이야기구조를 무너뜨린 것에 비해, <검은 사제들>은 오히려 그것이 득이 된 바, 결국 강동원에 빠져들지 않고 '약'으로 잘 친 장대현 감독의 성과라 할 것이다. 

김윤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영화에서 김윤석은 그가 버려진 고아로 또 다른 아이를 유기하여 자신과 같은 괴물로 키울 때나(화이), 폐선 직전의 배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칠 때나(해무), 언제나 그 무언가와 대적하여 그 스스로 괴물이 되어 싸우는 존재로 등장한다. <검은 사제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부제였던 정신부가 결국 악령의 손아귀에 넘어갔음에도, 그리고 그의 구마 의식을 성폭행이라 폄훼함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고 악령에 대항하여 싸운다. 그런 김윤석의 연기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지만, 동시에 진북하거나, 그 무시무시한 싸움의 기로 인해 영화가 흐트러질 수 있다. 그러나, 강동원이 최부제로 절묘하게 씌였듯, 김신부의 괴물같은 존재감도 <검은 사제들>에서 소모적이지 않다. 

그저 묵직하게 구마의 맥을 놓치지 않을 뿐. 덕분에 영화는 역으로 강동원의 존재감도 살고, 김윤석의 연기도 진중하게 전해진다. 연기뿐만이 아니다. 구마 의식 자체와 적절하게 배합된 거리에서의 악령과의 대치 씬은 블록버스터 영화 못지 않은 흥미를 자아낸다. 덕분에 평이한 엑소시즘은 적절한 의미와 깔끔한 만듬새의 영화로 완성된다. 

by meditator 2015. 11. 20. 1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