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스페셜은 4월 27일과 5월 4일 2회에 걸쳐 2부작 <하얀 블랙홀>을 방영했다. 

<하얀 블랙홀>은 그간 sbs스페셜이 방영했던 다큐와 달리, 박정헌, 최강식 두 사람의 대원의 히말라야의 촐라체 등정을 재연 드라마의 형식을 빌어 소개했다. 

박정헌, 최강식 대원은 2004년 12월 4일 당시 서른 다섯과 스물 다섯의 나이로, 수직 빙벽으로 악명이 자자한 히말라야의 촐라체의 등정 길에 오른다. 
두 사람의 도전은 그 자체로도 남달랐다. 그간 대부분 우리나라의 산악 원정대가 누가 더 높이 올라가나라는 목표를 두고, 다수의 인원과, 안내원, 그리고 산소통 등의 장비를 갖춘 등반대라는 방식을 구가했다면, 박정헌, 최강식 두 사람은 온전히 '인간의 힘'으로만 촐라체를 정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베이스 캠프를 지켜주는 단 한 사람의 지킴이만을 놔둔 채, 산소통도 없이, 최소한의 장비를 가지고, 최단 기일 1박2일을 목표로 하는 '알파인 등정'방식으로 촐라체 빙벽을 도전한다. 


이런 두 사람의 도전에 대해 그것을 한편의 소설 [촐라체]를 통해 복원하였던 박범신은 말한다.
 '촐라체 빙벽은 불과 6440m에 불과하다. 이런 도전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관성에 반기를 시도로서 의미가 깊다. 개발 독재 이래로, 우리 사회가 젖어든 성과 중심 주의를 벗어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고, 그 성취를 통해 성취의 기쁨을 이루고자 했던 두 사람의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하지만 도전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던 촐라체의 등정은 두 사람의 인생을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하고 만다. 
애초에 예상했던 것과 달리 겨울의 촐라체는 하루종일 햇빛이 들지 않은 차갑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추위를 느끼게 했고, 덕분에 1박2일이라는 야무진 목표를 가지고, 단촐한 짐을 가지고 빙벽을 올랐던 두 사람은, 추위와 배고픔, 탈진과 싸우는 상황에 맞닦뜨리고 만다. 겨우 겨우 며칠 만에 정상오른 기쁨도 잠시, 하산을 하던 중 나이 어린 최강식 대원은 끝을 알 수 없는 크레바스에 추락하고 만다. 다행히 두 사람을 이어준 밧줄 덕분에 최강식은 크레바스 골짜기로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박정헌은 갈비뼈가 부러지는, 최강식은 양쪽 다리가 탈골되고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만다. 최강식을 끌어올릴 수 업는 박정헌, 스스로 올라올 수 없는 최강식, 그런 상태에서 최강식은 자신과 연결된 줄을 끊으라고 절규하지만, 정신이 가물거리는 상태에서 몇 번이고 줄을 끊는 환상에 시달리던 박정헌은 결국 줄을 끊지 못한다. 다행히, 등반길에 필요없다 생각한 장비의 도움으로 최강식이 크레바스를 탈출하고, 두 사람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촐라체를 탈출한다. 
같이 죽고자 했던 박정헌, 자신을 버리고 살아가라던 최강식의 희생 정신이 결국 두 사람을 모두 죽음의 히말라야에서 살아오게 만든 힘이 되었다. 

하지만, <하얀 블랙홀>은 거기서 종료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 인생의 블랙홀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최단 시간 등반을 목표로 했던 두 사람의 등정 방식으로 인해, 그리고 부상으로 인해 자신의 몸만으로도 버티기 힘들었던 생환의 과정에서 버려야 했던 짐들 덕분에, 두 사람은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동상으로, 두 손의 손가락과 발가락들을 잘라버려야 했다. 촐라체의 등정은 짧았지만, 그 등정의 흔적은 영원토록 두 사람의 몸에 낙인처럼 남고 말았다.

<하얀 블랙홀> 2부는 크레바스에서 살아 내려오기 까지, 그리고 겨우 목숨을 건지고 10 여년이 지나 다시 촐라체를 만나러 가기 까지의 과정을 담는다. 
줄을 끊고 싶었지만 끊을 수 없었던, 그래서 그 줄에 의지해 함께 살아왔지만, 박정헌이 '원죄'라고 말했던 그 산을 데리고 간, 그리고 크레바스에 빠졌던 그 기억들이 같은 고통을 나눈 두 사람을 멀게 만든 그 상처의 시간들을 들여다 본다. 자신이 함께 가자고 했기에, 그리고 자신이 크레바스에 빠졌기때문에 자신으로 인해 상대방이 그런 상태가 되었다는 자책감, 하지만, 그런 상대방을 배려해야 하기엔, '피아니스트에게 손가락과도 '같은 등반가의 손가락을 잃은 두 사람은 산에서의 고통만큼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의 끝나지 않는 절망의 시간을 건넌다. 하지만, 결국 촐라체에서 후배의 목숨줄을 끊어버리지 못한 선배처럼, 그리고 그 선배를 찾아 온몸으로 구르며 산을 내려온 후배처럼, 그리고 오두막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고, 그 상대방의 체온 덕분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던 그 시간의 경험이 두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박정헌은 비록 다시 등반을 할 수는 없었지만, 패러 글라이딩 등 그가 할 수 있는 다른 탐험의 길을 멈추지 않았고, 최강식은 선배가 살려준 목숨을 결코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다짐으로 학교 체육 선생님이 되었다. 결국 촐라체에서 서로를 살렸던 끈이 사회에서 장애인이 된 그들을 다시 살려낸 것이다. 

박범신은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까지 형상화시킨 이유를 '우리가 잃어버린 유대'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사회 자체가 히말라야 8000 m 14좌 등반의 경쟁처럼 그렇게 살아간다고, 그래서 두 사람의 촐라체 등반처럼, 자신이 맞는 목표를 찾아 행복하게 살아가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놓지 않았던 믿음과 희망의 끈이, 바로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그래도 두 사람은 비록 두 손의 손가락들과 발가락들을 잃었지만 살아돌아왔다. 하지만, 정작 지금 우리는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로 인해 회복될 수 없는 고통에 빠져있다. 그런 때, <하얀 블랙홀>의 두 사람의 결코 놓지 않았던 끈의 메시지는, 자신의 책임을 방기한 어른들의 행태로 인해 좌절한 지금의 우리 사회에 더 아프게 다가온다. 그리고 다시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점검해야 할 삶의 원칙과 목적들을 <하얀 블랙홀>은 나즉히 일깨워준다. 박정헌, 최강식 두 사람의 촐라체는 그들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등반의 상처들이다. 그렇듯, 우리는 우리 사회가 안고 가야 할 촐라체를 얻었다. 그들은 그럼에도 두 사람의 놓지 않은 끈으로 희망을 길러 올렸지만, 이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시간의 촐라체는 무엇으로 회복해 가야 할까. <하얀 블랙홀>이 그 방향을 밝혀준다. 살아남은 자의 과제이다. 


by meditator 2014. 5. 5. 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