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결혼기념일을 지냈다. 어느덧 내가 싱글로 살아온 시간보다 누군가와 '부부'로 살아낸 시간이 길어졌다. 생각해 보면 '경이로운(?)' 일이다.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과 '동거'하며 함께 삶을 누려간다는 것이. 그런데 문제는(?) 수명이 길어진 시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만큼 또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이 얹혀진다. 그래서 1990년대 등장하기 시작한 게 황혼 이혼이다. 자녀가 성장한 이후 부부가 각자의 삶을 찾기 위한 '이혼', 하지만 몇 십년 지속해온 결혼이라는 관계의 형태를 '파괴'하는 이 결정에는 많은 부담이 따랐다. 더구나, '가족'이라는 제도가 사회의 근간이 되어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래서 등장한 것이 '졸혼'. 2004년 일본의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의 책 <졸혼을 권함>에서 등장한 이 단어는 유행처럼 번져 2016,7년에는 한국 사회의 '트렌드'가 되었다. 


그 '트렌드'에 따라 여러 다큐가 '졸혼'에 대해 다뤘고, 연예인 등 유명인사가 당당하게 자신의 졸업을 고백하고, 예능으로 도입되어 '별거나 별거냐(2017)'등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제 2018년 5월 27일 <sbs스페셜>에서 다시 '졸혼'을 다룬다. 바로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한 졸혼 연습>이다. 유행처럼 휩쓸고간 2017년이 지나서 뒷북일까? 하지만, <sbs스페셜>이 다루고 있는 '졸혼'은 작년 붐처럼 유행했던 '졸혼'과는 또 다른 변화가 감지된다. 



차광수 강수미 부부의 졸혼 연습 
<sbs스페셜>은 OECD 이혼율 1위의 현실을 수용하여 준비없이 맞이하는 '이혼' 현실에 대해 <이혼 연습- 이혼을 꿈꾸는 당신에게>를 통해 '가상 이혼 프로젝트'를 실시한 바 있다. 당시 배우 이재은 부부 등은 다큐에서 마련한 방식으로 이혼 생활을 미리 접해보고 서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 2018년에 찾아온 <졸혼 연습>은 바로 이 <이혼 연습>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한다. 하지만 위자료, 재산 분할 등의 현실적인 문제로 묵직해졌던 <이혼 연습>과 달리, 결혼이라는 제도의 외피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않은 '졸혼'답게, 결혼의 종료 연습은 한 편의 달콤쌉싸르한 로멘틱 코미디와도 같다. 

여기 남들에겐 한 쌍의 원앙으로 대접받는 부부가 있다. 바로 연기자 차광수 씨 부부다. 결혼 생활 23년차, 남편에게 10첩 반상을 차려 대접하는 아내, 1년에 한번씩 해외 여행을 데리고 가겠다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는 남편, 이들은 남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젊은 시절 잘 나가던 거문고 연주자의 꿈도 접고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스스로 90점 짜리 아내라 평가해오던 강수미씨는 자신의 삶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남편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이제서라도 자신을 찾고 싶은 강수미 씨 남편에게 당당하게 '졸혼'을 청한다. 

자기의 삶을 되찾고 싶다는 확고부동한 의지를 가진 배우자의 졸혼 요구에 배신감과 허탈함에 빠진 것도 잠시, '자유'라는 또 다른 카드가 차광수씨에게 손을 내민다. 결국 차광수 씨는 독립된 인격체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각자의 삶은 인정하는 '졸혼' 계약서를 쓰고 '가출'한다.

다큐는 각자 홀로 살아보는 '졸혼' 연습의 혼란스러움과 시행 착오와 함께, 실제 '졸혼'의 커플을 등장시켜 시청자들에게 '졸혼'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힌다. 자신의 삶을 모색하던 아내가 찾은 사람은 임지수씨.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그녀는 하던 사업을 정리한 후, 평범한 아내의 삶 대신 산속으로 들어가 홀로 황무지를 아름다운 정원으로 일구어 냈다. 하지만 자유로운 그녀의 삶을 부러워하는 강수미씨에게 임지수 씨는 여전히 고운 외모와 달리,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을 보여준다. '졸혼'이라던가, '자신의 삶에 대한 로망'은 그렇게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천착과 책임이 뒤따른다는 증거이다. 임지수 씨의 손을 본 강수미 씨의 생각도 복잡해 진다. 막연히 남편의 시중을 들지 않아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졸혼', 그러나 생각보다 무료하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없는 삶, 거기엔 홀로 살아갈 삶에 대한 책임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졸혼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휴혼은 어떨까?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의 청소와 빨래에 대해 잔소리로 일관했던 남편, 그러나 막상 집을 나와 살아보니 그 별 거 아니라던 일상의 삶이 버겁다. 그 역시 '졸혼' 선배를 찾아나선다. 파주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 중인 이안수 씨, 그의 아내는 그와 떨어져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해왔으며 최근에는 정년 퇴직을 앞두고 자전거 여행에 이어 필리핀 어학 연수 중이란다. 평범한 직장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안수 씨가 먼저 훌쩍 떠나면서 시작된 부부의 이별, 서로 각자의 삶을 인정하며 존중해 주는 삶은 더더욱 부부간의 정과 사랑을 돈독하게 해주었다고 자부한다. 

'졸혼'의 선배를 찾아본 차광수-강수미 부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을 하던 강수미 씨는 평소 좋아하던 베이킹을 시도해 본다. 막상 만들어 본 첫 번째 작품, 그 빵을 먹으며 강수미 씨가 제일 먼저 떠올린 사람은 남편이다. 결국 부부는 '졸혼'대신 잠시의 휴혼을 마치고 다기 한 집에 살기로 한다. 따로 또 같이 삶은 새로운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아내 없는 일상을 차광수 씨는 상상할 수 없었다 토로한다. 하지만 잠시 떨어져 살았던 시간은 부부를 변화시킨다. 손도 까딱않던 남편은 이제 아내를 위해 차를 준비하고, 떨어진 시간 동안 소중한 서로의 존재가 일상의 시간마저 변화시킨다. 이에 부부는 준비되지 않은 졸혼 대신 부부가 서로를 마주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휴혼을 제안한다. 



다큐가 보여준 건, '졸혼' 조차도 사실상 여의치 않은 우리 사회 부부의 또 다른 대안이다. 이혼이 '위자료', '재산 분할'이라는 경제적 부담과 가정의 파탄이라는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면, 졸혼 역시 차광수 씨 부부에게서 잠시 스쳐지나갔지만, 독립적 생활에 대한 쉽지 않은 여건의 함정이 따른다. 차광수 씨나, 예능 <별거가 별거냐>에서 여유롭게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집을 나섰지만, 과연 배우자에게 여유롭게 어렵게 마련한 집을 양보할 수 있는 부부가 얼마나 될까?  또한 너무 오래 살아서 번거롭고 지겹지만 막상 결혼을 '졸업'할 용기 역시 쉽지 않다. 그러기에 2018년 <SBS스페셜>은 졸혼에서 다시 한 발 물러서 '휴혼'을 제의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가정'을 벗어던지는 건 쉽지 않다. 


by meditator 2018. 5. 28.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