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번째 광복절이다. 여느 해와 다르게 각 방송사 별로 풍성한 광복절 특집이 마련되었다. 그 중에서도 kbs는 공영방송답게 다양한 특집을 마련했다.  14일 <시사 기획창- 전쟁 범죄>는 1942년 이래 일본군 1105명의 783건 심문보고서를 바탕으로 위안소가 일본군에 의해 주도적으로 설치 운영되고, 위안부가 강제 모집된 실태를 밝힌다. 15일 광복절 기념식이 끝난 오전 11시에는 <특집 다큐 -독립 운동을 한 의사들>이 방영되며, 이어 이어 15일 오후 7시 30분 역시 <특집 다큐 -그곳에 여성이 있었다>에서는 여성 양반 부녀자층에서 유행했던 '내방가사'를 통해 여성 독립 운동가의 삶을 조명한다.

그 중에서 <독립 운동을 한 의사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입신양명'의 상징이었던 '의사(醫師)'가  되었지만 일본 제국주의라는 시대적 숙명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의사(義士)'된 선열들의 삶을 그려낸다. 




사천의 나창헌, 연변에 박서양, 몽골의 이태준, 하얼빈의 김중화, 북경 이자해, 장가구 김현국 등 1945년까지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의사'들은 156명에 이른다. 그 중에서 포상을 받은 사람은 불과 67명, 아직 89명이 '포상'조차 받지 못한 상태다. kbs1의 <독립운동을 한 의사들>은 독립 운동의 숨은 주역,  '전문직 종사자 의사'로써 독립 운동에 참여한 그들을 '환기'시킨다. 

요즘도 sky하면 다들 한수 접어주는데, 일제 시대 경성 의전이나, 세브란스 의전이라면 어땠을까? 남한이 아니라, 남과 북을 합쳐, 심지어 연해주, 북간도까지 국내외, 해외에서 내로라 하는 수재들이 가던 곳이었을 곳이었으니 그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까? 영화 <동주>에서도 간도에서 연세 의전 문학부에 가는 두 청년을 그곳 친지들이 얼마나 감개무량해 하며 축하해 주었던가. 하물며 여전히 당시에는 '신학문'이었던 '의술'을 공부하겠다고 간 청년들에게 거는 '입신 양명'의 기대는 얼마나 컸을까? 하지만 시대는 그들에게 그저 '환자'를 고치는 '의술'만을 편하게 펼치도록 만들지 않았다. 

몽골에서도 뜨거웠던 독립에의 의지, 이태준
청년 이태준은 1907년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했다. 그가 입학했던 1907년은 군대 해산이 있던 시기, 즉 나라의 운명이 바뀌어 가던 시기였다. 그리고 2년 뒤,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에 전세계적으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안중근 의사가 하얼삔에서 '의거'를 일으키셨다. 그 격동의 시절 의대생인 이태준의 운명은 옥고의 후유증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안창호 선생을 만나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안창호 선생을 만나며 달라진 것이 아니라, 안창호 선생이 위태로운 국운에 고뇌하는 젊은 의학도를 알아보셨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의형제였던 세브란스 의전 1회 선배였던 김필순 선생을 소개하셨을 테고, 최남선이 만든 청년 학우회에 기꺼이 입회하게 하셨을 것이다. 

1907년 안창호의 발기로 비밀 결사조직으로 만들어진 신민회는 국권 회복운동을 벌이던 중 105인 사건을 계기로 조직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더는 국내에서는 활동하기 힘들게 된 신민회의 인사들이 대거 망명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교과서에 실려있지 않은 이태준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이태준은 김필순과 함께 신민회 활동을 한 혐의를 받게 되고, 그 역시 '망명'의 길에 나서게 된 것이다. 

단동을 경과하여, 당시 신해 혁명을 통해 근대적 공화 정부를 세운 중국에서 가장 '혁명'의 열기가 뜨거웠던 남경으로 옮겨간 이태준 선생, 그곳에서 해외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취직하여 힘겨운 망명 생활을 보내셨다. 그리고 파리 강화 회의에 민족 대표 3인 중 한 분으로 파견되셨던 김규식 선생과 몽골에 '독립'에 대비할 '무관학교'를 만들기로 뜻을 모아 몽골로 향했다. 

장래가 촉망됐던 세브란스 의전 학생은 1914년 말도 설고, 땅도 설은 몽골의 후레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가 시도하고자 했던 무관학교는 자금과 현지 사정으로 무산되고 만다. 그래서 동의지국이라는 병원을 개업하여 마지막 몽골 왕이었던 복드 칸의 어의로 활약하며 공을 세운 외국인들에게 주는 에르테닌 오치르 훈장을 수여받는가 하면, 몽골 현지에 2차 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탑 앞에 이태준 기념 공원이 있을 정도로, '극락 세계의 여래불'같은 존재로 현지인들에게 '의술'을 펼쳤다. 

하지만, 그 낯선 몽골에서도 이태준 선생은 독립에의 의지를 꺽지 않으셨다.  의사를 하면서 번 돈으로 김규식 선생에세 2000원의 여비를 제공 하는 등, 독립 운동을 하는 인사들에게 숙소와 교통편, 자금원으로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또한 영화 <암살> 속 속사포 캐릭터의 본 인물로 추측되는 당신의 운전사였던 폭파 전문가 마자르를 소개하는 등 김원본 선생의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한인 사회당의 비밀 당원이 되어, 당시 그 어려운 자금 사정을 위해 레닌이 희사했던 자금의 유입을 위해 애썼다. 1차로 12만불의 금괴를 2400km의 먼 거리를 안전하게 수송해낸 선생은, 다시 8만 루불을 김립 선생에게 전하고, 다시 4만 루불을 전하기 위해 준비를 하던 중 일제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몽골을 점령한 러시아 백위파들에게 발각되어 가솔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만다. 그게 1921년 선생의 나이 불과 38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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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보스톡에 번쩍, 상해에 번쩍, 곽병규 선생
그렇게 이태준 선생이 먼 몽골에서 유명을 달리하셨던 것과 달리, 곽병규 선생은 천수를 누리셨지만, 정작 선생의 독립 운동에 대해서는 그의 가족들에게 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평양 숭실중을 나와 이태준 선생에 이어 3회에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한 선생은 역시나 독립 운동의 물결에 몸을 맡겼다. 이태준 선생이 몽골로 떠났다면, 청년 곽병규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는 건 블라디보스톡이다. 

블라디보스톡에는 당시 만명 정도의 한인들이 모여 '신한촌'이라는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이곳에 살던 한인들과 유학생들을 모아 조국에 '문화 공연'을 하러 오게 되었는데, 이 해삼위 음악단장이 바로 곽병규였다. 의사가 음악 단장? 

당시 이러한 '조국 방문 문화 행사'는 그저 '공연'이 아니었다. 고국에 살 수 없어 먼 이방의 땅에서 살아가는 동포 학생들의 공연은, 삼일 운동 이후 그 어떠한 정치적 행사를 불허한 일제 하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유일하게 함께 모일 수 있는 '집회'였다. 그래서 일제는 이 집회를 불을 켜고 감시했으며, 그런 감시의 눈길을 피해가며 해외 동포들과 고국의 국민들은 '공연'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어우러져 눈물을 흘리고 '한 민족으로서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유선영 지음, <식민지 트라우마> 중에서)

곽병규 선생의 활약은 말 그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1920년 상해, 대한 적십자사 의사로, 그리고 임정의 외부 활동이었던 간호부 양성소 교수였던 곽병규는 1927년 사리원에서 경산 병원과 유치원을 개업했고, 사리원 신간회 회장으로 그 사건으로 체포당한다. 그로 인해 활동에 제약을 받은 선생은 1930년대 서울로 근거지를 옮긴다. 의술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봉사라는 신념 덕분에 의사의 자녀들이라도 어렵게 살아야 했다고 아버지를 추억하는 딸, '불의의 악을 극복하고 전진하라'는 아버님의 숨겨졌던 유지는 뒤늦게 아버님의 활동을 알게 된 딸의 노력으로  2011년에야 비로소 국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환자를 치료하던 손에 들려진 폭탄, 나창헌 
여기 또 한 명의 의사가 있다. 아니 의사이기보다 열사인 한 분 나창헌 선생이다.  경성의전에 2학년 24살에 에  3.1운동을 겪은 선생은 당일 1차 시위에 참여한 후 2차 시위를 준비하던 중 연행되고 만다. 미결수로 서대문 감옥에 갇혀 갖가지 심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입원하게 된 선생은, 감시의 눈길을 피해 탈출, 대동단에 가입하여 의친왕 이강 망명 작전에서 '경호'의 임무를 맡게 된다. 

하지만 정보를 미리 알게 된 일제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 작전, 선생은 포기하지 않고 제 2의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하고 1919년 11월 8일 종로 경찰서 앞에서 200 여 명의 동지 및 군중들과 '독립 만세'운동의 거사를 일으킨다. 일제는 선생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그런 일제를 피해 상해로 망명, 결석 재판은 나창헌 선생에게 3년 형을 구형했다. 비록 재판은 피했지만, 험란했던 망명 과정, 선생의 부인은 망명 과정에서 발톱이 몽땅 빠졌었다 고통의 기록을 남긴다. 

상해에서 독일 병원에서 의술을 다시 배운 선생은 세움 병원을 세워 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임정의 재정을 돕는 한편, 임시 정부 의정원에서 두루 요직을 맡으며 활약한다. 하지만 점점 더 독립의 가능성이 멀어져만 가고, 임정의 상황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온건한 투쟁 방식 대신, 일제에 직접적 손실은 물론, 민족의 자긍심들 독려하기 위해 암살, 파괴 등 투쟁 방식의 변화를 꾀한다. 직접 폭탄을 제조하시는가 하면, 1926년 상해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에 주모자로 참여한다. 하지만 그 사건은 더는 선생을 상해에 머무를 수 없게 만들고, 다시 중경으로 발길을 돌린 선생은 그곳에서 만현 의원을 개업하여 독립 운동을 돕던 도중 약관 40세의 나이에 위암에 걸려 순국하시고 만다. 

의사인 열사들의 운동은 '전문직 종사자'로서의 특수성을 가진다.  한 곳에서 병원을 개업한다는 직업적 한계를 의사들은 '자금 지원'과 '인적 교류의 통로, 혹은 교두보'로서의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한편,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해에서, 중경에서, 몽골에서 지역을 막론하고 독립의 기치를 드높였다. 의사라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의사건 그 누구건 독립 앞에서는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세 분 선생의 행적은 기록한다. 하지만, 2011년에야 비로소 딸에 의해 알려진 곽병규 선생, 우리보다 몽골 사람들이 더 기억하는 이태준 선생, 그리고 1993년에야 유해가 발굴되어 환국하시고 57년만에 건국훈장을 받게 되신 나창헌 선생처럼, 그분들의 업적과 그에 대한 국가와 역사의 보답은 여전히 미비하다. 그런 미비한 기억을 광복절 특집 다큐를 통해 환기시킨다. 



by meditator 2018. 8. 15. 1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