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이가 드디어 길고 길었던 대학 입시의 터널을 지났다. 무사히 원하던 대학에 수시 합격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순조롭게 대학 입시를 끝내준 아들에게 덕담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묘한 현상이 있다. 
소위 이른바 우리나라 중위권 대학 중 하나에 합격한 아들 녀석에 대해 아들 녀석 또래들은 흔쾌히 축하의 인사를 보내주는 반면, 부모인 내 또래의 사람들은 아들이 합격한 대학 명을 듣고 나면 한 템포 쉬고, '원하는 대학을 갔으면 돼지'라든가, '요즘 뭐 대학만 가면 돼지'라던가, 심지어 '가서 자기만 열심히 하면 돼지'라는 식의 형식적 축하를 보내주는 식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 어른들에게 대학이란 이른바 'sky'를 제외하고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통속적 관념에 지배되는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키우는 학부모가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이 되는가를 보여준 것이, <sbs스페셜 부모vs. 학부모>이다.

(사진; 스포츠 월드)

자랑같지만, 아니 대놓고 자랑하고 싶은 것은, 이번에 대학 입시를 순조롭게 치뤄낸 작은 아들 녀석도, 그리고 지금은 군대에 간 큰 아들 녀석도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만 대학 입시라는 관문을 통과해 낸 것이다. 나라를 망치고, 아이들을 망친다는 사교육의 도움을 받지 않고 대학을 들어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넉넉치 못한 가정 형편이라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다. 하지만 넉넉치 못한 가정 형편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의 길을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행운(?)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할 기회를 얻은 아이들 혹은 그렇지 못한 아이들의 이야기로 <sbs스페셜 1부 공든 탑이 무너진다> 가 시작된다. 

다큐는 서울대 학생들로 시작된다. 실제 서울대 학생들을 조사해 보니, 대부분의 예상과는 달리, 어릴 적 부터 늘 공부를 잘해왔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다양한 성적 분포를 보였으며, 심지어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그것도 3학년부터 공부를 잘하기 시작한 학생들이 많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오히려, 입시에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서울대 경영대 학생들의 입시 성공의 관건은, 이른바 자기 주도적인 학습 태도였다는 것이다. 부모들은 그저 도울 뿐,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학업을 선택하고 공부했던 학생들의 서울대 취학률이 높았다는 것이다. 

(사진; 스포츠 월드)

물론 씁쓸하다. 진정한 아이들의 행복을 이야기하면서 서울대 경영대의 입시 앙케이트로 시작해야 하는 현실이. 서울대 경영대를 간 아이들이 사실은 부모의 집요한 조련이 아니라, 자기 주도적인 선택의 결과라는 정도는 되어야 그래? 하면서 귀기울여 주는 현실이. 하지만 이런 '서울대 경영대'라는 그럴듯한 낚시밥 속에 들어있는 진실은, 입시 교육에 짖눌린 우리의 아이들이, 그 속에서 고사되어가다 못해 진짜 자신의 목숨을 끊고, 자신을 억압한 부모를 해치는 존속 범죄의 주인공이 되어간다는 현실이다. 지금 학부모가 된 부모들이 달라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지금 우리의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현실인 것이다.

우리집이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넉넉했더라면 과연 아들 녀석들이 사교육의 도움을 하나도 받지 않고 스스로 공부를 하도록 했을까? 그런 질문을 던져 본다면, 자신만만하게 그렇다 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물론,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중학교, 고등학교에서의 삶도, 그 과정의 행복도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기는 했지만, 나에게 조금의 여유라도 있었다면 과연 그런 태연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 역시 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야기를 sbs스페셜 2부 <기적의 카페>에서 하고 있다. 

말 그대로 조련이다. 부모가 조련하면 조련하는대로, 따라와 주는 아이들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대한민국 아이들을 줄세우는 대학 입시가 승패의 서바이벌 게임과 다름없듯이 아이들은 그 속에서 줄세우기의 어느 한 켴에 서있게 된다. 아이들은 소신껏 한다고 하지만, 그 아이들의 노력은 늘 부모가 보기엔 미덥잖고, 그래서 아이들을 다그치고, 조련을 하게 되는 것이다. sbs스페셜은 이른바 강남 엄마라 불리우는 교육의 랜드마크 대치동에 까페를 만들고 아이들과 교육적 갈등을 빚는 부모들에게 6개월간 교육 과정을 실시한다. 

▲ SBS <SBS 스페셜-부모 vs 학부모> ⓒSBS
(사진; PD저널)

시민 단체 <사교육 없는 세상>과 <아름다운 배우>이 주최하는 이 기적의 까페에서는 아이들과 갈등을 빚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부모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아이들에게 멘토링을 하는 양방향 교육이 이루어진다. 물론 당장 기적이 이루어 지지는 않았다. 몇 번의 교육을 통해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이 개과천선했음을 자부하는 부모들과 달리, 노트를 들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적으며 대화를 하려는 엄마들에게, 아이들은 수법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억압적이라며 냉정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들보다 나은, 혹은 자신들만큼은 이 사회에서 경제적 지위를 누리기를 원하는 부모들의 욕망이 거세되지 않는 한, 이 교육 과정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일 수 밖에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딘 진전이지만, 부모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맹목적으로 더 나은 성적에 매달려 아이들을 학대해 왔으며, 아이들은 그런 부모들에게 마음을 닫아 걸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노력하는 시작이야말로, 시작이 반이 되는 것이다. 

여전히 국제적인 성적 평가 제도인 PISA에서 한국은 성적 최상위를 자랑하지만, 그 속에 드리워져 있는 학습 성취도 최하위의 그늘을 지울 수는 없다. 3부 <부모의 자격>은 그렇게 병들어 가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변화의 물꼬를 어디서 틀 것인가에 대한 담론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해를 손쉽게 하기 위해 다큐의 시선을 핀란드로, 미국으로 옮긴다. 나라에서 모든 교육적 재정을 대신해 주는 핀란드의 아이들은 경쟁 대신 스스로 성취해 가는 시험을 치르며 방과 후 활동을 즐기며 학교 생활을 지낸다. 국가적 뒷받침이 되어 있는 핀란드야 그렇다 치고, 공교육에 있어 경쟁 체제를 도입하고자 했던 미국의 실상도 다르다. 다수의 학부모와 학생들이 그런 경쟁 체제 도입에 반대하고 있으며, 미국의 싱크탱크라 할 수 있는 실리콘 밸리의 학부모들은 그런 미국 정부의 결정과는 반대로, 경쟁이 없는 학교를 선택하는 추세라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경쟁'이라는 것이 인간 사회의 본질이 아니라는 교육심리학자의 조언도 덧붙인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있다. 경기도 교육청을 중심으로 몇몇 혁신 학교에서 시작되고 있는 경쟁 중심이 아닌, 교과 중심이 아닌 교육 과정의 실험이 그것이다. 하지만, 부모들은 불안해 한다. 그저 3년간 머물다 간 중학 과정이 문제가 아니라, 거대한 입시 교육 대열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이탈할까봐. 하지만 SBS스페셜은 말한다. 부모가, 학부모가 시작해 한다고. 시작할 수 있다고. 그러면 교육도 달라질 수 있다고.

사회에서 실패를 겪으면 고스란히 그 몫을 개인에게 짐지우는 우리나라 사회와, 그것을 사회적 안전만으로 뒷받침해주는 핀란드같은 나라를 비교하며, 우리나라 학부모들에게 새로운 선택을 하라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다. 학부모가 된 부모들의 불안은, 결국 그들이 이 사회에서 겪는 경쟁과 생존의 불안감의 즉자적인 반영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SBS스페셜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 병들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을 구제할 사람 역시 부모밖에 없다고 설득한다. 

드디어 천만을 넘은 <변호사>를 두고, 모 평론가는 이 영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저 그에게서 연상되는 전직 대통령의 모습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속물적인 주인공의 모습이요, 그 주인공이 변화되는 모습에서 공감하고 감동했기 때문에 이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다. 2014년에도, 여전히 체제도, 사회도, 그리고 교육도 강고하다. 어쩌면 사회, 그리고 사회적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는 한 교육의 변화는 요원할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변호인>에서 속물 변호사의 변화가 한 청년을 구했듯이, 당장 우리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아이들의 부모들, 우리 자신들의 변화이다. 그리고 그걸 SBS스페셜 부모VS학부모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4. 1. 20.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