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이병훈 감독 때문이다, 라고 해야 할까? 사극에서 '하오체'를 버리고, 현대극과 똑같은 말투를 쓰게 만든게 바로 이병훈 감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뜬금없는 개그 코드도, 주인공 커플의 '로맨틱 코미디'같은 러브씬도 다 이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욕은 이분께 돌아가야 할까? 하지만 '청출어람'이라고, 제 아무리 스승이 '바담 풍'이라 한들, 제자들은 제대로 스승의 뜻을 이해했다면, '바람풍' 했어야 하거늘, 요즘은 제자들이 한 술 더 뜬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고? 바로 새롭게 등장한 퓨전 사극들이야기이다.

 

얼마 전 종영한 이병훈 감독 '마의'에는 싸이의 강남 스타일 중 가사 일부- '낮에는 정숙하지만, 밤에는 놀줄아는 여자'-가 대사로 등장한다. 그러더니, 얼마 전 시작한 <장옥정>은 장희빈을 새롭게 조명하겠다며 그녀를 졸지에 조선판 패션 디자이너로 만들어 버렸다. <마의>때 저 대사는 대사를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라며 화제가 되었지만, <장옥정>의 패션 디자이너 설정은 대중들의 차가운 반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 되어버렸다.

말 그대로 , '퓨전'이란 서로 다른 두 장르를 뒤섞어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마의>와 <장옥정>의 차이가 무엇이었을까? <마의>의 퓨전은 애교 수준이었다면, <장옥정>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혹은 실재하는 역사를 전복시킨 이질감이 도를 넘었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낯설었달까.

 

'낯설게 하기'는 실제 존재하는 미학 용어이다. 어떤 상황, 혹은 조건을 뒤틀어 냄으로써, 그 주제에 대한 환기를 시키고, 오히려 주제를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낯설게 하기를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냥 낯설어 버린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가 되어버린다. <장옥정>은 퓨전이라는 장르의 역사 해석을 넘어, 역사 왜곡이란 생각을 시청자들이 해버리게 되니, 깜짝쑈를 넘어 외면을 받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 <천명>이란 드라마 역시 어쩌면 <장옥정>으로 갈 것이냐, <마의>로 갈 것이냐의 기로에 놓인 듯하다. 드라마의 제작진은 <천명>의 퓨전적 설정들, 주인공 최원의 헐랭한 캐릭터라던가, 여주인공인 의녀 홍다인과의 로맨틱 코미디같은 아웅다웅을 <마의>의 애교로 받아들이길 원하는 듯하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장옥정>의 패션 디자이너급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를 어쩌나?

 

 

사극을 임하는 시청자의 태도 이러면 너무 거창하지만, 사극을 보려고 마음 먹은 사람들에겐 기본적으로 그 시대에 대한 다른 기대감이 있다. 오늘날과 다른 옷, 말투, 다른 행동거지, 그리고 다른 세계관, 무엇보다 자유로운 개인의 존재가 부각되는 현재와 달리, 엄격한 신분체제 하의 그 시대 사람들이 살며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자 해서, 사극을 보는데, 현대극과 다를바 없는 인물들이, 현대극과 다르지 않는 대사를 치며, 현대극에서처럼 자유롭게 행동하며 사건을 만드는데, 굳이 사극을 볼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극이란 이름을 내걸고 오늘날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은 말투를 쓰며, 오늘날과 비슷한 고민을 하며 비슷한 패턴의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고답적인 사극의 숨통을 튀어주는 정도를 넘어선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천명>은 중종 연간 후계 구도를 둘러싼 문정왕후와, 세자 시절의 인종간의 피튀기는 세력 싸움을 배경으로 한 흥미진진한 구도를 배경으로 한다. 거기에, 그의 할아버지가 세자를 지키려다 팔목을 잃고, 이제는 병든 어린 딸을 보살펴야 하는 내의원 최원의 이야기가 곁들여져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그런데 이미 첫 회에서 충분히 극적인 스토리들이, 번번이 주인공 최원의 허허실실을 넘어 로맨틱 코미디의 백수 스타일의 느슨한 캐릭터로 인해 충돌을 일으킨다. 주인공이 오히려 극의 긴장감을 잃게 만든달까?

 

jtbc의 <꽃들의 전쟁>이 청나라에 굴복하는 인조의 이야기로 첫 회를 이끌어 전체적인 배경을 보여주며 긴장감을 고조시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와 달리 <천명>은 첫 회부터, 시청자들은 모후와 세자 세력간의 숨막히는 긴장감에 집중하려다가, 자꾸 주인공만 나오면 흐름이 깨지니 극의 재미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저 권력에 무심한 지고지순한 딸바보로만 그려내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천재임에도 그 능력을 숨기기 위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지나치게 주인공을 '나이브'하게 그려내다 보니 오히려 극적 몰입감을 저해하게 만들어 버렸다. 천재가 범인인 척 하는 주인공은 이미 현대극에서도 유행이 좀 지난 캐릭터가 아닌가. 제 아무리 '딸 바보'라도, 조선시대의 '딸 바보'랑 오늘날의 '딸 바보'는 달라야 한다. 굳이 '뽀뽀'를 연발하지 않아도, 주인공의 측은한 눈빛에, 딸을 구할 수 있는 의서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시청자들은 공감할 수 있다. 현대의 아빠 코스프레는 과하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가장 연기를 잘 한 사람이 아역과 문정황후란 이야기가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두 사람만이 가장 사극답게, 사극톤으로 연기를 하고 있으니까. 그만큼, <천명>이란 사극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그 흐름을 깨는 과도한 퓨전 스타일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최원 역의 이동욱이나, 홍다인 역의 송지효가 역량이 안되는 것도 아니고, 조금 더 <천명>의 색채에 맞는 톤의 연기로 돌아가보면 어떨까.

by meditator 2013. 4. 26. 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