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천명>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된 인종을 끝까지 향초를 이용해 독살하려던 대왕대비 문정왕후의 시도는 최원과 다인의 기지로 밝혀져, 결국 왕 앞에서 목숨을 구걸해야 했고, 자신의 아비가 최원을 죽였다 하여 그를 사랑했지만 그의 곁을 떠나려 했던 다인은 최원과 결실을 맺고 최원과 함께 백성들의 병을 돌보며 행복하게 살았다. 어떤 한 점의 의혹도 없는 말끔한 해피엔딩이었다.

하지만,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명쾌한 엔딩을 보면 씁쓰레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에서는 문정왕후의 최후의 독살시도조차 막아내고 승리를 거둔 인종의 재위 기간이 단 8개월에 불과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사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이덕일의 <조선 왕 독살 사건>을 비롯한 책에서는 인종의 죽음을 문정왕후에 의한 독살로 결론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명>의 엔딩은 딜레마에 빠진다. 드라마 상에서는 문정왕후의 단말마같은 독살 시도를 막아낸 것으로 그려졌지만, 조선의 '서태후'라는 별명을 얻은 문정왕후가 과연 거기서 멈췄을까? 또 하나, 그런 문정왕후가 뻔히 궁궐에 살아있는 걸 알면서도, 그런 위험 요소가 옆에 있는 걸 알면서도, 다인과 최원은 백성들을 위해 의술을 펼치겠다고 궁궐 밖을 나오다니! 지금까지 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깝지 않게 여기던 두 사람의 행보치곤 너무 비논리적이지 않나? 결국 독살로 죽을 지도 모를 왕을 놔두다니, 이건 최원의 성격 상 '직무유기'라 느낄 거 같은데?

 

(사진; tv리포트)

 

언제나, 역사적 사실과 거기에 기초한 드라마에는 상상력과 허구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마치 역사가가 역사를 자신만의 잣대로 해석하듯,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 또한 또 한 사람의 역사가가 되어 역사를 해석해야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가능한 한 사실에 위배되지 않게 사실을 해석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이번 주 종영한 <장옥정, 사랑에 살다(이하 장옥정)>가 끝난 후 주연 배우들은 인터뷰를 통해 악녀로 그려진 장희빈과 무기력하기만 한 숙종을 재해석했다는 것으로 <장옥정>의 의의를 설파했지만, 그 드라마가 장옥정과 숙종을 복원하기 위해, 또 다른 인물들을 왜곡하고 폄하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바로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일본의 역사관이 끊임없이 문제가 되는 핵심은 바로 그들 자신이 2차 대전의 패전국이었다는 피해자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핍박을 가했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은 채,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에, 역사는 왜곡되고, 그 속에서 피해자들은 지속적을 상처입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천명>은 중종 연간 말기와 인종 연간 초기의 정치 세력의 격돌이라는 밑그림에,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의 독살 시도라는 야사의 주장, 그리고 거기에 왕을 지키려는 내의원 의원과 의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합집산이라는 상상력을 얹은 작품이다.

실제로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등을 보면, 드라마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세자를 죽이려던 문정왕후가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 아니게 그려져 있다. 자기 주변의 측근에만 의지하고, 자객을 부리는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 낮은 수준의 악당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드라마 <천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자 죽음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문정왕후를 그려 내고 있다. 게다가 단순하게도 이 드라마를 끌고가는 역동적 동인이 오직 이거 하나다. 최원이 하나의 미션을 '클리어'하면, 왕후가 또 하나의 시도를 하고, 그걸 해결하면, 또 사건을 벌이고. 그러다 보니, 20부작의 드라마가 단순해져 버렸다. 언제 어떤 회차를 봐도, 디테일은 달라도 흐름은 똑같다. 등장인물들은 언제나 똑같은 표정으로 비슷한 대사를 친다. 최원은 위기에 빠졌고, 다인은 그런 최원이 안타깝고 그런 식이다. 게다가 결국 드라마가 미션을 부여하는 문정왕후와 그것을 해결하는 최원 세력의 대결로 되다보니, 당연히 어떤 불운의 그림자도 없는 착한 편의 화려한 승리로 마무리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8개월 후에 인종이 죽고, 그의 세력이 '을사사화'를 통해 모조리 제거가 되건 말건.

 

 

(사진; 헤럴드 경제)

 

과연 <천명>을 통해 제작진이 그리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지막 회, 다인과 최원이 함께 복창을 하듯, 백성을 인술을 펼치는 휴머니스트 의원 최원의 이야기였을까? 그도 아니면 <추노>에 버금가는 도망자 버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딸을 위해서는 궁궐도, 도적들의 산채도, 감옥도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이었을까? 하지만 이 궁금증은 마지막 회에 가서도 해결되지 않았다. 비록 처음엔 거절했지만, 위험에 빠진 것을 알고는 그토록 목숨을 걸고 왕을 구하려 하던 최원이 뜬금없이 백성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논리도 이해가 되지 않고. 죽음에 이을 때까지 천하의 임꺽정에서 금부도사까지 무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며 화려한 무술 씬을 장황하게 선보이다 죽음에 이른 문정왕후 무사의 존재감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장옥정>으로 돌아가서, <장옥정> 제작진 측은 장희빈의 재해석이라고 주장했지만, 드라마를 통해서 보여진 것은 <해를 품은 달>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어설픈 시도였던 것처럼, <천명>에서 진하게 드리워진 , 조선판 도망자의 원래 버전 <추노>의 영광을 재현하려던 무리수였다.

차라리, 도망자 버전 내의원이라는 어설픈 흉내를 내지 않고, 내의원이라는 캐릭터에 어울리는 버전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다면 어땠을까? 결국은 역사에서 패배자가 될 인종과 그의 세력들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위해, 문정왕후와 인종의 대결을 사악한 마녀와 순한 피해자의 대결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서 오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운을 남겼다면 어땠을까? 시작할 때의 <천명>은 충분히 '봉황'을 그릴듯이 보였다. 하지만, 충분히 감동적이고 풍부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납작하게 만들어 단순하게 마무리 해버린 <천명>이 그린 것은 '참새'인 듯 하여 아쉽다.

by meditator 2013. 6. 28. 0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