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건너뛰는 '타임 슬립'은 이제 드라마에서는 울궈먹을 대로 울궈먹은 단물이 거의 나올 것도 없는 소재다. 하지만, 그 '시간'의 환타지는 얼마전 <너의 이름은> 흥행에서도 보여지듯이 또 여전히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대중적 공감대를 배가시킬 '마법'의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비슷한 시기 두 편의 '타임슬립'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두 편 찾아왔다. kbs2의 <맨홀; 이상한 나라의 필(이하 맨홀)>과 tvn의 <명불허전>이 그것이다. 


시작은 두 드라마 모두 미미했다. 수목 공중파 3사 드라마에서 부진했던 전작 <7일의 왕비>의 후속작이란 부담때문이었을까? 첫 회를 방영한 <맨홀>은 3.1%(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로 시작했다. <명불허전>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도 화려한 <비밀의 숲>의 후광은 순식간에 사라진듯, 2.715%(닐슨 코리아 케이블 전국 기준)로 첫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숫자로 보면 2%나 3%나 라고 보여지지만 공중파의 3%와 케이블의 2%는 사실 하늘과 땅의 차이다(2%대에도 불구하고 <명불허전>은 케이블 시청률 1위다). 하지만 두 드라마가 더욱 간격을 넓힌 건, 이어진 2회이다. <맨홀>이 2회 2.8%로 kbs2의 10년 내 최저 시청률을 기록한 것과 달리, <명불허전>은 2회 3.995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며 앞날에 서광을 스스로 펼친다. 무엇이 이 '타임슬립' 두 드라마의 궤적을 달리하도록 만들었을까?




대략난감의 고난을 타임슬립으로 
왜 타임 슬립을 해야할까? 그건 아마도 '환타지'임에도 시간을 거스르는 개연성을 설명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전제 요건이 될 것이다. 이것을 위해 <맨홀>과 <명불허전> 두 드라마는 남자 주인공의 대략 난감 현실적 딜레마를 제시한다. 

<명불허전>의 주인공 허임(김남길 분). 그는 그에게 병을 고치려는 환자들이 줄을 서는 혜민서의 뛰어난 침술을 가진 의원이다. 하지만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밖의 환자들을 핑계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그는 혜민서를 찾은 민초들이 우러러 마지않는 신의가 아니라, 천출로 인한 만년 참봉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고관들의 비밀 진료를 통해 얻은 부로 보상받으려는 '속물'일 뿐이다. 그런 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편두통에 시달리는 왕에게 침으로 시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방에 나타난 뜻밖의 침통을 들고 어전으로 달려간 그의 손이 떨렸다. 혜민서의 신의에서 하루 아침에 어심을 거스르는 죄인이 된 그, 쫓기던 그는 그만 화살을 맞고 다리 아래로 떨어지고, 그가 눈을 뜬건 2017년 청계천 한복판이다. 

<맨홀>의 봉필(김재중 분)이라고 해서 나을 게 없다. 하음 봉씨 집안의 3대 독자라고 하나, 공시생 2년차에 동네 대표 백수 그의 부재에 부모님은 안부조차 궁금해 하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심지어 같은 산부인과 병동에서 태어난 인연으로 28년째 짝사랑을 해오던 수진(유이 분)가 겨우 만난 지 3개월된 남자와 결혼을 한다니. 봉필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런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결혼 앞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술의 기운을 빌려 진심을 토로해 보려 하지만, 보여지는 건 그저 '진상', 그런 그를 외계의 기운을 받은 '맨홀'이 집어 삼켜 버린다. 맨홀을 토해낸 그가 도착한 곳은 수진과 그의 인연이 꼬이기 시작한 고등학교 시절. 

비슷한 타임슬립 고난기? 하지만 그 극과 극의 차이를 낳은 건 개연성. 
얼핏 보면 2%나 3%라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숫자 같지만 공중파와 케이블이라는 매체의 차이로 극과 극의 결과가 된 <맨홀>과 <명불허전>, 하지만 더 심각한 건 <맨홀>이 2회만에 자체 최저 시청률을 찍었음에도 앞으로 그다지 시청률 회복의 기미는 커녕, 더 낮아질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는 것과 달리, 단 한 회만에 1%대의 상승률을 보인 <명불허전>은 의학 드라마 불패의 신화까지 얹은 채 <비밀의 숲>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입소문을 타고 있는 중이다. 

똑같이 난처한 처지에 빠진 남자 주인공인데 무엇이 두 드라마의 희비를 엇갈리게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극중 초반 많은 비중을 가지고 활약을 보이는 남자 주인공 캐릭터의 개연성과 연기력이 아닐까 싶다. 




이미 허준이라는 조선의 걸출한 명의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는 상당수의 시청자들은 같은 '허씨 집안'인가 싶은 허임의 등장에 솔깃해진다. 심지어 극 초반, 이 허임이란 자가 허준못지 않은 명의같아 보이니 더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명불허전>은 반전으로 천출의 만년 참봉이란 새로운 설정을 들이민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 거기서 제 아무리 침술이 뛰어난다 한들, 신분제의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없는 허임은, 대체적으로 신분제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그 벽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비탄의 세월을 보내는 것과 달리, 그런 자신의 처지를 역으로 이용하여 이재 축적에 몰두한다. 

신분제의 처지에 절망하는 대신 고위층 상대로 의술을 팔아먹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신선하지만, 또한 이전 사극과는 다른, 현대적인 그 속물 캐릭터로 인해 그의 타임 슬립 이후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 바탕이 된다. 무엇보다, 그의 이중적 속물 캐릭터가 그런 이면의 모습으로 인한 갈등과 사건을 만들어 내며, 어전 침술의 해프닝에 대한 개연성을 뒷받침하게 되는 것이다. 뜻밖에 그에게 나타난 신비의 침통, 마치 하늘이 내린 그 침통은 진정한 의술의 길에서 비껴간 그에게 벌을 주듯이 '타임 슬립'을 선사한다. 그리고 시간을 거스른 이곳에서 만난, 과거와 똑같이 자신의 삶을 포기한 소녀, 그 소녀로 인해 인술은 천술 대신, 재물 축적의 기회로 삼았던 속물 의원에겐 새로운 개과천선의 기회가 열리게 될 것이라는 걸 1,2회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설득한다. 

그에 반해 일본 드라마 <프로포즈 대작전>의 갖가지 설정을 고스라히 빼다박은 듯한 <맨홀>의 문제점은 바로 그 드라마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 주이공의 캐릭터와 시대와의 불화로 인해 덜커덕거리기 시작한다. 3포 세대, 5포 세대, 9포 세대라며 취업이 안되면, 설사 취업이 된다 하더라도 결혼은 사치가 된 세상에서 동네 대표 백수 봉필의 캐릭터는 너무나 유유자적이다. 공시생 3년만에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는 다큐 속 주인공의 표현이 아니더라도, 취업이 하늘에 별따기인 세상에서 '자존감'의 무너짐을 청춘의 댓가로 알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28년을 짝사랑했다고 그녀의 결혼 앞으로 돌진하는 봉필의 패기는 설득력을 잃는다. 

또한 패기 잃은 설득력을 설득해 내는 방식도 매번 화를 내는 건지, 진심을 말하는 건지 모를 악다구니와, 술의 힘을 빌린 진상이라니, 그 조차도 그렇다 치더라도, 시간의 힘을 빌린 그의 타임 슬립에서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봉필이며, 그럼에도 그런 그에게 변화하는 여주인공의 설정은 이해를 불가하게 한다. 아니 결정적으로 이 드라마가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건, 결혼이라는 제도 앞에선, 혹은 28년 짝사랑 앞에 선 여주인공의 비주체적 설정이다. 2007년의 일본 드라마를 2017년의 대한민국에 어떤 고민도 없이 베끼듯 들여놓은 설정에서 여자 주인공은 비중을 말하기 전에 너무도 극중 설정에서 '대상화'되어 있다는 점이 굳이 당찬 <명불허전>의 최연경(김아중 분)을 비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상 남자 주인공과 함께 젊은 층의 외면을 받는 두 번 째 패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설정이 시대착오적이라 하더라도 때로는 주인공들의 연기로 호흡기를 달고 기사회생하는 드라마가 있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맨홀>에서의 김재중과 유이의 연기는 주인공으로 극을 끌고 가기에는 너무도 안이하다. 특히 극중 80%의 활약을 보이는 김재중의 경우, 감독의 디렉션이 있었는가가 의심스러울 만큼 그의 소란스러운 연기와 소통안되는 대사 처리로 인해 지레 채널을 돌리게 만든다. 후에 이 드라마의 패인에서 남자 주인공의 책임을 결코 피해 갈 수 없을 만큼. 

그에 반해 김남길이 연기하는 허임은 절묘하다. 사실 극중 진상짓이라고 하면 봉필에 못지 않다. 심지어 음식을 앞에 두고 침까지 질질 흘린다. 하지만 그런 진상짓조차 순간 순간 진지해지는 의원으로서의 그의 연기와 절묘하게 합을 이뤄가며 속물 의원의 타임 슬립기를 그저 가볍지만은 않게 무게 중심을 잡는다. 거기에 이제 김아중이 선택한 작품이라면 믿고 보게 만든 김아중의 작품 선택과, 그 선택이 아쉽지 않은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 역시 <명불허전>을 믿고 다음 회를 기다리도록 만든다. 



사실 두 남자 주인공의 연기를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잘 되는 집은 모든 것이 다 이유가 되고, 안되는 집은 지푸라기 하나도 핑계가 되듯이, <명불허전>의 과하지 않은 연출과 신선한 스토리, 하물며 기가 막힌 배경 음악까지 아직은 섣부르지만 2회에 이르러서까지 이 드라마의 앞날을 밝게 해준다. 그런 반면 <맨홀>에 이르러서는 무엇보다, 한류 스타를 앞세운 안이한 외화 벌이 드라마의 기획을 다시 한번 질타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이 드라마의 작가가 기대주였던 <텐>의 작가였다는 점에서 더더욱 안타까움을 남긴다. 설사 이 드라마가 국내에서 최저의 기록을 세우고, 해외 판매에서 호조를 보인다 한들, 과연 이런 식의 영업 방식이 안그래도 위기를 맞이한 한류에 도움이 될까?
by meditator 2017. 8. 14. 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