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한 장면, 국왕인 정조와 척을 지어야 하느냐고 묻는 아들 이선준(박유천 분)에게, 좌상을 맡고 있는 아버지(김갑수 분)는 일갈한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다!"
라고, 거기에 덧붙인 그의 설명은, 왜란 당시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려는 임금과 달리,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 사대부라는 명목이었지만, 기실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실권은 사대부의 손에 달려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배경이 조선이 건국된 지 어언 300여년이 흐른 1700년대, 그 드라마에서 국왕으로 나온 정조는 무려 조선의 22대 임금이었다. 비록 드라마라지만, 300년이 흐른 조선의 좌상 입에서 당당하게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라는 정언을 드러내게 하는 그 기초를 세운 자가 바로 KBS 대하 사극의 주인공 정도전이다. 300년이 뭔가, 조선 왕조 500여년을 걸쳐, 숱한 사화와 정쟁으로 얼룩진 피비린내 나는 대전을 치루게 만드는, 결국 조선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동안 끊임없이 왕권과 신권이 자신의 헤메모니를 성취하기 위해 싸울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정도전인 것이다. 



하지만 그 갈등의 원인을 입안한, 하지만  혈연에 의거한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국왕이 아니라, 철저히 유교적 실력에 기초한 사대부에 의해 다스려지는 이데올로기적 이상적 국가, 국왕조차도 날마다 신하들에게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며, 자신의 명령 하나의 정당성을 두고 신하들과 쟁론을 벌여 정치적 이상 국가를 지향한, 어찌 보면 조선 건국의 진정한 어머니인 정도전은 그간 조선 건국을 다룬 드라마에서는 들러리의 역할을 넘어서지 못하거나, 미욱한 신하이거나, 불운한 역적의 모습으로 그려졌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대부분의 정통 사극'이 그려낸 주인공은, 왕좌의 자리를 차지한 왕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제 아무리 화려한 세트에 웅장한 스케일로 그려낸들, 이제와 되돌아 보니 궁색하고, 시대에 뒤처진 왕조의 영화를 논하는 대신에, 오랜만에 돌아온 KBS 대하 사극은 그 주인공을 조선을 입안한 정도전으로 눈길을 돌린다.

덕분에, 고려 말 신진 사대부의 일원으로 정치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정도전의 생애를 그려내기 위해, 고려의 군주 공민왕은 단 두 회만에 신하의 칼에 도륙되고 만다. 국사 시간에 개혁 군주라 이름 붙여졌던, 그리고 노국 공주 죽음 이후 그의 개혁은 흐지부지 되었다던 그 역사의 행간을, 하지만 그보다는 대중들에게는 영화 <쌍화점>의 그 파렴치한 군주의 모델로 상상되던 공민왕의 모습을, 자신을 목숨을 걸고 국왕에게 진실을 고하던 고려의 충신 정도전이 자신의 꿈을 조선의 건국으로 틀게되는 과정의 인큐베이팅 과정으로 적나라하게 다루었다.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대쪽같을 수록, 그의 의지가 무너져 내릴 때, 그의 궤도 수정은 자연스레 시청자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덕분에 그간 이성계의 건국이라는 왕조 중심의, 어찌보면 절름발이 조선의 건국이 이제야 비로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사진; 세계 일보)

제작 발표회에서 정도전 역을 맡은 배우 조재현의 당당한 발언처럼, 모처럼 만나는 정통 사극 <정도전>은 굳이 역사를 뒤틀거나 왜곡하지 않아도, 정사에 실린 역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드라마적 재미를 줄 수 있으면 증명한다. 역시 KBS1의 사극이구나 라는 전통이 느껴지는 스케일에, 그의 죽음이 역사적 인물이라서이기보다, 그의 연기가 안타까운 마음이 더 들게 만드는 공민왕(김명수 분)을 비롯, 시트콤에서 그 헐랭한 인물을 연기한 사람이 맞는가 싶은 이인임 역의 박영규 등 중진 배우들의 정통 사극다운 연기가 모처럼 그래, 이게 사극이야 라는 찬탄을 불러오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통 사극에서 처음 선보인 조재현의 연기는 정통 사극의 그것과 약간 불협화음같은 걸 느끼게 하는 게, 오히려 그 나름 고려 말 정치의 이방인 정도전이라는 캐릭터에 색다른 생명력을 불러 넣는다. 또한 드라마 끝 무렵 이어붙인 짤막한 역사 다큐 분량은, 일본의 NHK 사극의 형식을 고스란히 빌려온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사실성에 보탬이 되며, 정통 사극의 분위기를 살린다. 비슷한 시기에 정도전를 다룬 사극을 준비했던 MBC가 지레 주춤할 만 하다 싶다. 부디 이 분위기를 쭈욱 유지해 모처럼 되살아난 KBS1사극의 전통을 잘 이어가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4. 1. 6. 0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