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첫 선을 보인 tvn의 월화 드라마 <풍선껌>은 늦가을의 시린 마음을 달래 주기에 손색이 없는 로맨틱 멜로 드라마이다. 여느 사랑 이야기와 달리, 드라마는 1회 사랑하는 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싸들고 나온 여주인공으로 시작된다. 사랑의 시작이 아닌, 그 끝에서 시작된 드라마는 이 가을 가슴 시린 시청자들을 달래주기라도 하듯이, 주인공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개연성있는' 관계를 직조해 나가기 시작한다. 한 집에서 자라났지만 서로가 이성에 눈을 뜰 사이도 없이, 버려질 두려움에 밀려나버린 여주인공, 그런 여주인공의 아버지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배려맨'이 되어버린 남주인공, 그리고 그들 곁에 저마다의 사연으로 포진한 개성 강한 주변 인물들. 그리고 그 공감가는 이야기의 결을 살린 분위기있는 화면과, 그 분위기를 한껏 배가시킬 ost들, 마치 달콤한 음식에 저절로 손이 가듯 스르르 드라마에 휩쓸리게 만든다. 이동욱, 정려원은 역시나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한껏 살리고, 시크한 이종혁과, 상처받은 듯한 눈매의 박희본도 반갑다. 




스펙좋은 이들의 그들이 사는 세상 
그런데, 드라마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소개가 끝나갈 즈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렇게 분위기 좋은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상처를 받았네 어쩟네 하지만, 결국 백화점이나 병원 집 자손에, 그게 아니라도 부모 없이 자라도 씩씩하게 공부 잘해서 피디가 되거나 해야 하는 건가 라는 의문말이다. 방송 도중 자살을 하겠다고 옥상에 오른 고등학생을 달래느라 두서없이 던지는 여주인공 김행아(정려원 분)의 대사는 학창 시절 공부를 잘 해 1등도 했지만 지금은 만년 꼴등이었던 DJ보다 못번다이다. 그런가 하면 방송국 숙직실에서 라면이나 끓어먹는 조동일(박원상 분)은 말한다. 방송국에 발에 걸리는 게 서울대라고. <프로듀사> 에서도 서울대 나온 백승찬(김수현 분)의 굴욕을 드라마는 중요한 관전 포인트로 삼더니, 이젠 그 스펙에 이런 일이 드라마 속 주요 설정이 되어간다. 드라마 속 그들은 자조적으로 스펙좋은 자신들의 삶을 투정하듯 말하고, 시청자들은 그걸 여사로 들어 넘기지만, 현실은 말한다. 밤을 꼴딱 새서 측른들이 걱정하는 라디오 방송국 DJ라는게 이른바 '언론 고시'를 통해야 하고, 그 방송국에 가면 발에 걸려 넘어진다는 서울대 역시 때론 수능을 만점 받아도 떨어지는 곳이라는 것을. 

잘 나가는 선남선녀들의 사랑 이야기는 <풍선껌>만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니 더 문제다. 요즘 한창 인기몰이 중인 <그녀는 예뻤다> 속 주인공들도 그리 다르지 않다. 이 드라마 속 여심을 설레는 남주인공들의 직업은 여성지 부편집장에 기자다. 비록 부수 경쟁에 밀려 몇 달 후에 모스트가 폐간될 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성준(박서준 분)은 미국 본사에서 온 엘리트 부편집장에, 어수룩하고 털털한 김신혁(최시원 분)은 호텔 스위트 룸에 사는 능력있는 명칭부터 멋들어진 피처 에디터이다. 여주인공들도 그리 다르지 않다. 민하리(고준희 분)는 집안 좋은 호텔리어이다. 이들에 비해 외모에서 부터 딸리는 여주인공은 낡은 윤전기를 돌리는 광고업자 집안의 미래를 기약할 길 없는 인턴 사원이지만, 여성지 인턴도 현실에서는 그리 만만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구직자들은 안다. 허긴 멜로 드라마 뿐인가.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랑하는 이들은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부모님들이 원하는 직업 상위 50위 안에 들 직업만을 가지고 나타난다. 



삼포, 오포 세대의 거세된 욕망의 표현?
직업만이 아니다. 드라마 속 그들에게는 '전세 대란'이란 없다. '월셋집 전전' 역시 남의 일이다. 그 정도 스펙에 그런 집은 당연하다는 듯, 하늘을 찌를 듯 깍아지른 아파트 숲이 그들의 집이다. 집뿐만이 아니다. 그 집의 실내를 채우는 인테리어의 면면은 그 바쁜 사람들이 언제 그렇게 멋들어지게 꾸몄는지 웬만한 인테리어 업자가 두 손 들고 갈 정도로 세련됐다. 어디 인테리어 뿐인가. 주방을 채운 한 눈에 보기에도 럭셔리해보이는 주방 가전이며 기구, 용기들은 또 어쩌고. 마치 그 정도 직업에, 그 정도 집에, 그런 인테리어는 할 수 있어야 드라마는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은연 중에 말하는 듯 하다. 10월 24일 방영된 드라마 스페셜 <짝퉁 패밀리> 속 엄마가 진 빛을 10년 넘게 갚고, 여행 한번 해보지 못한 채 삶이 지긋지긋해서 의붓 동생마저 외면한 채 제주도에서 1년만 살다 죽겠다고 결심한 여주인공의 현실은 공중파든, 케이블이든 그 어는 곳의 사랑 이야기에서도 발을 붙일 곳이 없다. 

황교익 평론가는 최근 범람하고 있는 먹방, 요리 프로그램에 대해 현실에 욕망을 거세당한 현대인들의 '구순기적 정체'의 표현이라 정의내리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드라마 속 현실에서 쉽게 취득할 수 없는 버젓한 직업, 소유하기 힘든 커다란 나의 집, 그리고 그 집을 채우기 버거운 멋진 만큼 비싼 인테리어로 대변되는 사랑 이야기는, 사랑조차도 '포기' 해야 하는 삼포, 오포 세대의 또 다른 거세된 욕망을 채워주는 '환타지'가 아닐까. 그런데 과연 그 욕망은 '위로'일까? '환각'일까? 이 가을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줄 달달한 사랑 이야기에 쉬이 젖어들지 못하는 건 현실의 퍽퍽함이 깊기 때문이다.

by meditator 2015. 10. 28. 1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