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개봉한 영화 <미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혜수의 열연으로 <미옥>이어야 할 이유를 설득함과 동시에, 김혜수의 캐릭터가 가진 태생적 한계로 인해 <미옥>이라서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을 안게 된 영화인 듯 싶다. 


모성적 수동성으로 소모되는 여성
<미옥>은 지난 6월에 개봉한 <악녀>에 뒤이어 다시 한번 여성 캐릭터를 원톱으로 내세운 느와르 액션 스릴러 영화의 계보에 놓여있다. 두 영화 모두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19금이라는 장르 영화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악녀>가 현란한 살상씬을 전면에 내세우며 자신의 존재를 증며하려 였다면, <미옥>은 언더보스 나현정의 주도 아래 호텔의 cctv 아래에서 벌어지는 범죄 조직이 배후가 된 '성접대'의 적나라한 행위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자신을 드러낸다. <악녀>에 홀로 건물 몇 층에 포진해 있는 양아치 무리들을 피칠겁을 하며 홀로 싸워내며 주인공임을 드러내는 숙희(김옥빈 분)가 있다면, <미옥>에는 그와는 정반대로 화면으로 벌어지는 그 '성의 항연'을 지휘하는 마스터로서의 미옥, 아니 나현정이 있다. 캐릭터의 활약상 그 양상은 다르지만, 영화는 그렇게 여주인공의 대단한 능력을 전면에 드러내며 존재감을 설명한다. 



하지만 그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들은 결국 영화의 중반 이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상황을 주도해가던 능력이 무색하게 자신에게 닥친 '모성성'의 한계로 인해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킬러로 거듭난 숙희가 자신의 목숨 대신 선택한 아이와의 안온한 삶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거두어 살며 '사랑하는 이와의 가정'을 꿈꾸듯이, 나현정 역시 자신이 잉태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적진에 뛰어들어 조직을 살리고, 그 조직의 언더보스로 성장해, 이제 범죄 조직에서 재계 유력 기업으로의 마지막 관문만을 남긴 상태이다. 하지만, 범죄 조직의 성공적인 전향은 언제나 그렇듯 성공적일 수가 없다. 정작 누수는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부터 시작되어, '어머니'로서의 그녀를 도발하고 '어머니'로서 그녀를 파멸과 최후로 이끈다. 

아마도 <악녀>도 그렇고, <미옥>도 영화의 만듬새나, 배우의 열연보다 더 '폄하'되는 이유에는 그 도발적인 등장의 여주인공들이 자신에게 닥친 운명에 허무하게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끌려들어가고 파멸에 이르른다는 점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본질은 어쩌면 '모성'보다는 '수동성'에 더 방점이 찍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이 모성이거나, 사랑을 한다는 것이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어서는 아니다. '낙태가 허용되는 세상'이라고 해서 모든 여성이 모성이기를 거부할 것이라는 편견처럼. 오히려 문제는 '사랑'을 하고, '어머니'가 된 여성이, 그 상황에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끌려들어가 '휘발'되어 버린다는 점이 본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건 애초에, 여성을 전면에 내세웠으면서도, 여성이 느와르, 혹은 액션 스릴러의 주인공이 되는 것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만든 이의 편견이, 멋들어지게 여성으로 부터 시작된 영화를, 여성의 운명적 비극으로 막을 내리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원초적 의심을 갖게 만든다. 

충돌하는 세 욕망의 치킨 게임
그런 면에서 더욱 <미옥>은 아쉽다. 김회장이라는 보스가 있지만 실직적 '언더 보스'로서 범죄 조직을 재계 유력 기업으로 '성접대'를 매개로 '전향'을 조직적으로 이끌어내는 보스 나현정을 그렇게 밖에 소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애초에 자신의 아이로 인해 보스에 절대 충성을 바치는 조직의 2인자라는 캐릭터도 그렇지만, 보스의 유고 이후 오로지 자신의 아이만을 위해 치달리는 모성으로서의 그 향배가, 캐릭터의 입지를 축소시킨다. 



그럼에도 <미옥>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각자 자신의 욕망이 구체적인 세 인물들이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치킨 게임이다. 도대체 왜 이선균이 조폭을? 했지만, 왜 이선균이어야 했는지가 설명되는 이선균이 분한 상훈의 비극적 순애보라 쓰고 '소유욕'이라 해석되는 사랑. 그런 이선균의 사랑을 도발한 이희준이 분한 최대식의 폭력적인 자기 보신욕, 그리고 이런 이들의 욕망이 도화선이 된 나현정이 된 미옥의 '안락한 전향욕구'라 쓰고 위장된 모성이라 읽일 수 있는 이 세 욕망의 접점은 흥미롭다. 이들은 '조직'의 일원이지만, 막상 그들의 '행동'의 동인에 '조직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개인적 욕망으로 추돌한다. 당연히 그들의 욕망 앞에 조직은 소모적으로 소용될 뿐이다. 

그래서 차라리 어설픈 모성에의 헌사 대신, 이 최대식과 상훈을 그리듯이 나현정 역시 어설픈 모성에의 헌사 대신, 그녀의 액션만큼이나 그간 언더보스로 닦여온 범죄 조직의 2인자 다운 생존과 보존과 안위, 그 욕망의 발현이었다면 오히려 <미옥>은 좀 더 치열한 느와르로서의 성취를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남겨진 고민들. 
그간 김혜수의 전작이었던 <차이나타운>, 그리고 <악녀>, 그리고 <미옥>은 여성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었던 느와르 장르에서 여성을 앞세운 차별성으로 관객들을 공략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전면'에 내세웠다는 홍보성을 뛰어넘어, 여성의 자기 주도성을 내적으로 이해하는데 한계를 보인다. 저 정도를 '주체적'인 여성이라 생각하고 있었는 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그 누구 한 사람의 오류나 오인이라기 보다는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사는 여성'에 대한 시대적 이해가 부족한 지점의 소산이라 보는 게 맞을 듯싶다. 그런 면에서 이들 영화가 흥행에 부진을 겪는 지점 역시 과연 그런 전면에 내세운 여성의 캐릭터에 대한 일천한 이해때문인지, 아니면 어쩌면 아직도 사람들에게 여성이 전면에 나선 느와르에 대한 이질적임 때문인지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고민해볼 여지를 남긴다. 


by meditator 2017. 11. 12. 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