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내 영화를 지배했던 두 명의 엄마, 하지만 결국 한 명의 엄마를 우리 사회는 품지 못했다. 그 엄마가 '낙화'처럼 져버리고, 남은 또 한 명의 엄마, 힘겨운 걸음걸이를 재촉하여 아이를 만나러 간다. 혹시나 아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지? 라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아이 앞에서 '엄마야'라고 울먹이는 엄마, 다행히 아기는 엄마를 잊지 않았다. '엄마~'라며 달려오는 아이. 그런데 서비스 영상같은 장면을 보며 던져지는 물음, 저 엄마는 과연 이후 자신의 아이를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사건이 나기 전에도 '엄마의 무능력'을 들어 엄마로부터 아이를 뺏으려했던 법과 시집이 과연 저 애처로운 모녀를 이후에 용인할까? 보장할 수 없다. 영화에서 사라진 건 한 명의 엄마였지만, 남은 한 명의 엄마조차 그 '모성'을 보존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미씽; 사라진 여자>가 그리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출산 장려로 국가 경쟁력을 높이자', 한 지역신문 기사의 제목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에 '아이를 낳는 것 자체가 국가 경쟁력이 되는 현실, 그리고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예산을 짤 때마다 지하철의 임부 보호용 분홍빛 좌석처럼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출산과 관련된 정책들, 그리고 모모 시와 군이 '우수'한 정책을 펼쳤고, 출산율이 1위를 했다는 홍보성 기사 뒤로, 실제 대한민국 모성의 현실 <미씽; 사라진 여자>는 그려낸다. 




우리 아가, 
항상 고운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게 엄마가 지켜줄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가로 만들어 줄게.
엄마가 그렇게 할거야. -한매의 자장가 

엄마가 지켜줄게.
집에 뛰어들어와 허겁지겁 컴퓨터를 켜고 못다한 작업을 마저 하는 지선(엄지원 분), 이혼 후 아이 양육과 생계를 위한 그녀의 일때문에 정작 자신의 아이 다은이와 눈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아이를 돌보는 건 전적으로 조선족 유모 한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아이를 시댁으로 보내라는 법원의 명령.

법원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관객은 지선의 정신없는 생활을 보며, '얘가 니가 엄마인 줄은 아니?'라는 남편의 다그침이 아니더라도 지선의 모성 자격에 의문이 간다. 과연 저렇게 바쁜데 아이를 돌볼 수가 있어? 라고. 그리고 그런 관객의 의혹에 답이라도 하듯, 지선은 아이가 없어지고 난 그 밤이 지나서야 아이와 보모 한매의 부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관객은 냉정한 시선처럼 지선에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법과 사회를 상대로 엄마 지선의 아이찾기 추격전. 

지선이 다인과 한매를 찾아나선 그 순간부터 드러나는 한매의 진짜 모습, 이름부터 알 수 없는 조선족 여인, 아파트 단지에서 알게된 한매는 먼저 보모를 내쫓고, 아이에게 상해를 입힌 의문의 여인이며, 조선족 거리에서 찾아낸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희생한 어리숙한 조선족 여자, 그리고 충청도 시골에서 돈을 받고 팔려와 씨받이가 된 보호받지 못한 이주 여성이자, 결국은 아픈 자신의 아이를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써도 지켜내지 못한 엄마였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병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을 다 잠들 수 있는 자장가, 엄마가 지켜줄게를 끊임없이 불러대지만, 결국 자신의 아이 대신 남의 아이에게 그 노래를 불러줘야 하는 슬프고도 잔인한 모성. 또 한 명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범죄자가 되기를 서슴치 않고, 기꺼이 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를 거부치않는 지선의 물불가리지 않는 행보와 겹쳐지며, 영화는 적나라하게 우리 사회 '보호받지 못한 모성'의 실체를 드러낸다. 



보호받지 못하는 모성, 그래서 무모해지는 모성
지선은 엘리트 여성이다. 방송국 외주업체에서 일하는 남보기에는 그럴 듯한 직업을 가진. 하지만 그녀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이혼'이라는 제도로 통과하는 순간, 그녀의 모성은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무관심한 남편과 핏줄에 집착하는 시어머니는 아이를 보살필 수 없는 그녀의 경제적 능력과 현실적 상황을 들어 아이를 빼앗아 오려고 할 뿐이다. 그녀가 하는 일 속에서 그녀는 '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존재일 뿐, 엄마인 존재는 거추장스럽고 무능력에 방점을 찍은 캐릭터로 작동할 뿐이다. 그런 무배려의 사회적 조건에서 맹목적으로 그래서 더더욱 모성으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궁색하게 만들면서 지선은 아이를 지키려 말 그래도 '애쓴다'.

한매도 마찬가지다. 돈값을 하라는 시어머니, 학대를 일삼는 남편, 아이를 지키려하지만 나지막한 자장가말고는 해줄것이 없다.,

끊일 듯 끊어지지 않는 한매의 자장가처럼, 사회 속 그럴싸한 직업군의 여성이든,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 들여지지 않는 이주 여성이든 그들이 '모성'으로만 존재할 때, 사회는 그녀들에게 냉혹하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상관없이, '모성'이라는 존재만으로 호모 사케르(인간 사회내에 있지만 인간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즉 사회는 '출산'을 위해 모성을 장려하지만, 정작 모성으로서의 그들의 존재나, 모성으로서 그들이 자신의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 전혀 배려하거나 보호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심지어 그 '모성'이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건. '가정'이라는 울타리조차 허울뿐인 것을 고발한다. 

결국 21세기의 대한민국, 국가 경쟁력을 위해 출산이 장려되고, 해마다 출산율이 늘었네 어쩧네 하며 홍보성 기사가 범람하는 사회에서 모성은 모성으로서의 자신의 숙명과 자신이 낳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법의 경계를 넘으며 무모해질 수 밖에 없음을 영화는 증명한다. 

물론 그럼에도 모성에 대한 서로 다른 두 여성의 사회적 위치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 보호받지 못한 한매와 달리, 맹목적으로 아이를 찾기 위해 달려들었던 지선의 모성은 법적 구조 속으로 포용된다. 하지만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그 구조가 끝내 지선의 모성을 보호할 지는 미지수다. 



모성 연대의 가능성
영화 내내 한매와 자신의 아이를 맹목적으로 찾아나섰던 지선은 한매의 행적 속에서 자신과 같은 모성을 발견하고 흔들린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고향으로 향하던 한매를 향해, 자신이 희생양이 되겠다 자처한다. 두 맹목적 모성이 맞부닥치는 장면, 그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사회를 향해 잔인해졌던 한매의 모성은 결국 또 다른 모성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그리고 지선은, 한매의 손을 잡지만 끝내 한매는 그 손을 뿌리치고 식탁보을 부여안고 스스로 사라져간다. 이 장면은 상징적이다. 한때 놀이터 그네에서 사이좋게 앉아서 한담을 나누었던 시절의 두 사람, 그래서 지선은 기꺼이 한매의 모성을 이해하지만, 이미 모성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 한매는 그걸 거부한다. 사회적 보호가 기능하지 않는 상황에서 모성의 연대가 취약할 수 밖에 없는 현실, 그들의 서로 다른 사회적 조건이 낳은 모성성의 결과를 그 한 장면은 처연하게 상징한다. 


여성 감독에 의한 맹목적 모성, 그리고 주연 배우의 헌신적 열연이라는 점에서 <미씽; 사라진 여자>는 올해 개봉한 손예진 주연의 <비밀은 없다>를 떠올리게 한다. 두 영화 모두 모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배려가 없는가를 적나라하게 그려내며, 그러기에 영화 속 모성들은 스스로 아이를 살려내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한다. 덕분에 두 영화 속 손예진, 엄지원, 공효진은 이 영화를 통해 모성을 열연하여 배우로서의 영역을 확장해 낸다. 다만 <비밀은 없다>가 감독의 스타일로 인해 주제 의식이 산화된 반면, <미씽; 사라진 여자>가 보다 익숙한 설정과 상황에의 집중으로 관객들이 주제에 익숙하게 공감하는 대중적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by meditator 2016. 12. 8. 1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