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시작과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운 건 줄리엣 비노쉬의 풍만한 가슴이 드러난 남녀의 정사이다. 하지만 그 '나신'의 뒤엉킴이 자아내는 '므흣'한 감상에 빠져들기도 전에 우리는 그 '남녀의 정사'가 마치 우리가 밥을 먹고 잠을 자듯 살아가는 일상사의 연장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마치 설탕을 넣어야 하는 음식에 잘못들어간 소금으로 인한 식사 자리의 고약함처럼, 그렇게 '정사'를 벌이는 두 남녀의 불협화음은 베드씬의 환상을 고르란히 깨어버리고, 그것이 지극히 평범한 우리네 일상의 한 부분이라는 걸 절감케 한다.
렛더 선샤인 인ⓒ 씨네룩스

장황한 언어 뒤의 진실
정사의 매료됨을 깨어버리는 주된 이유는 바로 줄리엣 비노쉬가 분한 이자벨의 만족스럽지 못함 때문이었다. 충분히 즐기고 있다는 그녀의 언어는 지금 당신이 전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처럼 전해지고, 그 역설의 언어는 파트너인 상대방을 더욱 고전케 만든다. 때로는 생수 한 병으로, 혹은 예정된 약속에 대한 간과나 무시에 대한 장황한 설전으로 번지는 두 사람의 대화, 그러나 '언어'는 솔직한 속내에 대한 예의바른 절차일 뿐, 그 '관례'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건 여전히 결혼 반지를 빼지 않는, 아니 빼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남자 빈센트(자비에 보부아 분)와 그런 남자가 야속한 여성 이자벨이다.

그리고 이자벨의 해프닝은 이어진다. 현대 미술관 관장이자 화가인 이자벨, 그녀와 일 관계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던 친구인 연극 배우(니콜라스 뒤보셸 분)와 대화 역시 엇물린다.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권태로운 친구는 그 삶의 권태로움을 이자벨을 통해 도피하려 하고, 그 친구의 알듯 말듯한 속내는 이자벨과의 장황한 대화를 통해 결국 하룻밤으로 이어지지만, 끝내 결혼을 파기할 수 없다는 친구와 이자벨은 관계를 이어가지 못한다.

그런 식이다. 그녀는 자신의 갤러리로 가지고 있으며 예술가로서 나름의 입지가 있는 듯하지만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 전 남편과 딸 한 명을 두고 이혼한 그녀, 아직도 그녀 아파트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남편은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열 살 먹은 딸 아이마저 불안스럽게 만드는 그녀의 방황에 짜증을 낸다. 영화 전편에 걸쳐 그녀는 자신의 삶을 채워줄 그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렛더 선샤인 인ⓒ 씨네룩스

때론 우연히 여행지에서 충동적으로 만난 남자에게 끌려 함께 지내기도 하지만, 그녀와 계층적 위치가 다른 그가 그녀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매번 거리 생선 가게에서 자신의 별장을 내밀며 그녀의 관심을 구하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결국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그녀가 해법을 찾아나선 '점쟁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그녀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자신 안의 태양을 찾으라 하지만, 그런 그에게 그녀가 구하는 건,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은 남자들의 구애이다.

결국 영화는 '자존'의 이야기였을까? 영화의 제목에서 등장하는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낸다. 그녀에게 남성적 관심을 보이면서 점쟁이로서 본연의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 줏어 삼킨 점쟁이(제라르 드 파르디외 분)의 '자신 안에서 스스로 빛을 찾으라'는 그 말이 이 영화의 주제였을까?

당신의 태양은 당신이 빛내라 
이자벨은 '관계'에서 평안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관계는 생각보다 까다롭다. 그녀를 만나는 남자들은 푹 파진 티에, 긴 부츠,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짙은 화장을 한 그녀의 섹시한 외양만을 보고, 'enjoy'의 대상으로 '간주'하지만, 정작 그녀가 원하는 건, '결혼'마저 파기하며 그녀와 '영속적'이며, '안정적'인, 그리고 심지어 계층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족감을 줄 대상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듯 그건 수많은 남자들과의 '편린'과도 같은 관계로 그녀에게 '공허함'을 짙게 만들 뿐이다. 뜻밖에도 은행가든, 연극배우든 결혼을 한 남자들은 그들이 이미 맺은 사회적 관계인 결혼을 깨뜨릴 의지가 없고, 그녀의 마음과 기대는 늘 상대방과 보조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결국 영화는 '관계'를 통해 '자존'의 완성을 구하려는 그녀를 역설적으로 '자존'의 결핍으로 귀결되게 한다. 이는 흔히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자존감'에 대한 질문에 도달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건 이미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 정의이다. 하지만 '집단성'이 해체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각자의 삶을 '각자가 책임져야 하는' 주체가 된다. 각자가 나면서 부터 소속된 집단에 의탁해서 그 삶이 해결되고 진행되는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 현대를 경유하며, 인간은 '삶의 주체성'을 얻은 대신, 그 '주체'의 무게를 고스란히 개인 짊어져야 하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집단성'을 상실한 개체의 불안마저 자신이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사회이다. 스스로는 빛도 내지 못하는 행성인에게 감히 태양의 정체성을 입힌다.

렛더 선샤인 인ⓒ 씨네 룩스

이자벨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런 '현대인의 짊어져야 하는 '주체의 무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이혼까지 해서 완벽한 개체로 독립적이다. '남자'로 상징될 뿐 가족도, 친지도 이렇다할 '영속'적인 관계도 없이 그녀의 삶은 온전히 그녀의 자존에 달려있다. 심지어 예술가로서 자신의 일조차 그녀를 독립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관계'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군집적'인 본능은 그녀로 하여금 끊임없이 남자로 상징되는 '소속감'에 대한 갈망으로 표현된다. 이는 이자벨이라는 '헤픈 여자', 혹은 '자존감'이 떨어지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자존감'이라는 방패를 무기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겪는 대부분의 딜레마이다. 과연, 인간이 온전히 자신의 자존으로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현대의 관계론은 이런 개인의 문제를 영화에서 처럼 '당신 안의 태양을 찾으라'는 식의 '자존감'의 문제로 귀결시킨다. 내가 '레벨업된 완전체'가 되어야 사랑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얼마전만 해도 다수의 문학 작품은 '사랑'을 통해서 완성되는 '인간' 군상을 그려왔었다. 오늘날의 해석에 따르면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러브 스토리>는 얼척없는 해프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전 47%라는 경이적 시청률을 보이며 화제 속에 종영한 <황금빛 내 인생> 역시 50부가 넘는 대장정의 과정 속에서, 여주인공의 주체적 사랑을 그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드라마는 사랑 조차도 자신의 자존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고 시간이 걸려서라도 그녀를 해바라기처럼 기다려 주는 환타지적인 사랑을 그려내는 이 드라마는 오늘날의 입맛에 맞는 현대판 신데렐라 환타지로 대중을 위로했다. 이자벨이 불행하다면 우리의 tv를 장악하고 있는 그런 그녀의 불안한 자존마저 끌어안을 환타지적 대상이 없는 현실이다. 안타깝게도 그녀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로 만들어줄, 그녀의 모든 불행을 끌어안아줄 수 있는 스펙 좋은 연하남이 없었다.

드라마는 '양수겹장'의 환타지로 자신의 자존감도 챙기고, 관계에서도 성공하는 여주인공을 그리지만, <렛더 선샤인인>은 결국은 쉽지 않은 현대적 인간의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자벨은 남자를 통해 '자존'을 구하는 헤픈 여자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 행복의 본능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태양마저 스스로 작동시켜야 하는 현대인의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by meditator 2018. 5. 5. 1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