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일리까지 합류한 여섯 남녀들의 뉴욕 생활이 4회차에 접어들었다. 주변 탐색을 끝낸 이들 뉴욕팸은 이제 생활을 위해 뉴욕커들의 생활 전선에 뛰어 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은 김성수는 손짓 발짓까지 해가며 퀵서비스를 하고, 비련의 여주인공 백진희는 눈치를 보며 컬러스프레이를 뿌린다. 지각을 한 이천희는 그 감당을 하느라 그 어느때보다도 열심히 사포질을 하고, 정경호는 미드를 제작하는 공간에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해 한다. 


4회에 들어선 <도시의 법칙>, 뉴욕이라는 낯선 도시 허름한 건물에 떨궈진 채  지갑마저 빼앗긴 출연자들은 혼란스러워했던 것도 잠시 진짜 뉴요커로 거듭나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생활해 간다. 덕분에 먼지가 풀풀 날리던 건물은 조금씩 사람사는 냄새가 나고, 입도 뻥긋하기 힘들었던 언어는 '호구지책'이 '궁여지책'이 된 듯 능력을 발휘한다. 

난생 처음은 아니더라도, 뉴욕이라는 도시를 여행이 아닌 잠시나마 뉴요커가 되어 살아가야 하는 한국의 연예인들은 최선을 다해 도전한다. 일뿐만 아니다. 즉석에서 탄생한 에일리의 <도시의 법칙>로고송처럼 함께 하는 시간 역시 충만하다. 어디 그뿐인가,  4회 마지막을 장식한 마라톤 대회처럼 10초 이상 뛰어본 적이 없는 에일리마저 함께 그 시간을 충실히 완수해 냈다. 


<도시의 법칙>을 보고 있노라면, 뉴욕에 떨어진 연예인들이, 연예인이었던 특별한 위치에서 벗어져 나와, 이른바 '뉴욕팸'의 일원으로 충실히 미션들을 수행해 나간다는데 이의를 제기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뿐이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즐겁게 생활하는데, 거기서 그친다. 그들의 일, 그들의 놀이 속에서 시청자들까지 이어지는 공감은, 4회에 이르렀는데, 여전히 글쎄다. 아마도 나날이 떨어져 가는 <도시의 법칙> 시청률은 바로 그들의 뉴욕 체험기가 시청자들의 공감까지 이르지 못하는 '불통'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우선 <도시의 법칙>이 보여주는 뉴욕이라는 도시는 어떨까? 첫 회 주마간산 격으로 훑어내린 뉴욕은 우리가 몇 개의 다리로 연결된 지역에서 보여지듯이, 우리가 '뉴요커'라고 하면 떠올려지는  그 화려한 도시 이상의 여러 지역을 포함한다, 그 중 출연자들이 머무르게 된 맨하튼에서 한참 떨어진 거리는 뉴욕이지만 뉴욕이 아니다. 하지만 그뿐이다. <도시의 법칙>은 출연자들이 머무르는 그곳에 대해, 그렇게 뉴욕이다, 아니다, 뉴욕이 그것만은 아니다. 이런데도 있다 라는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맨하튼이 아니다. 뉴요커의 그곳이 아니다. 그 이상의 정취를, 시청자들로 하여금, 저런데서 한번 지내보고 싶은데? 라는 마음이 들 정도의 정취를 자아내지 못한다. 뉴욕이든, 맨하튼이든, 미국의 그 어떤 다른 도시이든, 크게 차별성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4회에 이르렀는데도, 그저 여전히 영어를 쓰는 이방의 도시 그 이상의 낯섬을 넘어서지 못한다. 

도시가 여전히 생경하듯, 출연자들도 마찬가지다. 각자 '호구지책'을 위해 여러가지 일들을 하는데, 미션이상, 뉴욕의 도시에서, 그들이 그런 일을 하는데, 한국의 연예인이 이런 일을! 하는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기 힘들다. 한국에서 이제 좀 알아준다는 이천희가 이국 목수 공방의 커다란 문짝을 사포질을 해도, 한국에서 좀 알아준다는 정경호가 '미드'가 만들어지는 스튜디오에서 고생하는 한국의 스탭들을 떠올리며 이국의 스탭들의 수발을 들어줘도, 김성수와 백진희가 허드렛일을 해도 그뿐, 그들이 왜 굳이 뉴욕까지 가서 '사서 고생을 하는' 공감이 딱히 전해져 오지 않는다, 그들은 힘들고, 즐겁고 한데, 그뿐이다. 

엄밀하게 공감의 근거는 없다. 그저 <도시의 법칙>이란 프로그램이 기획되고, 그 첫 여행지로 뉴욕이 정해지고 거기에 김성수를 비롯한 다섯 명의 연예인들이 던져졌을 뿐, 하지만, 그것이 기왕에, 프로그램으로 주중 11시에 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 다섯 명의 이유없는 뉴욕 정착기가 이유있는 듯이, 무작정 뉴욕 거주기가 필연적인 운명처럼 느껴지게 하는 그 무엇을 부여해 주어야 하는데, 아직도 <도시의 법칙>에서는 그게 딱히 잡혀지지 않는다. 출연자들은 살기 위해 뉴욕의 생활을 이것저것 부닥쳐 보는데, 그들의 고생을 지켜보는 관음의 즐거움도, 고생 끝에 얻은 '낙'에 대한 공감도 아직 <도시의 법칙>에서는 미지수다. 출연자들만 부산스레 돈을 버느라 고생하고, 번잡스러운 상황처럼만 보인다. 

출연자들에 대한 감정 이입도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도시의 법칙>은 섣부르게 뉴욕 생활에 천착하겠다며 어설픈 외국 이름을 들먹인다. 그렇다면 혹시나 <도시의 법칙>이 계속 생존하여 일본이라도 가게 된다면, 거기선 미찌코며, 히로부미며 하는 이름들을 지을 것인가? 영어 유치원도 아니고 이방의 이름짓기가 <도시의 법칙>의 무리수인지, 개성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르기 편하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낯선 이방의 잭이며 스캇이, 이 프로그램의 정을 들이는데 방해가 되는건 사실이다.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도시의 법칙>은 요즘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 다 그렇듯 분주하게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잡기에 앞서 나간다. 마흔줄의 김성수는, 어느 틈에 어르신이 되었고, 백진희는 무한 긍정 막내이며, 정경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능 기대주다. 그런데, 이 발상 자체가 이젠 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나 또 다른 예능에서 한번쯤은 써먹었던 뻔한 캐릭터라는 거라는데 함정이 있다. 왜 나이가 좀 있으면 고리타분한 어르신이 되며, 막내는 언제나 무한 긍정이고, 신참은 신선한 캐릭터인지? 이렇게 앞서 나가며 지레 이름표 붙이듯이 지명한 캐릭터들이, 오히려, 김성수, 백진희, 이천희, 정경호 라는 인물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방해하는 건 아닐지 생각해 볼 일이다. 


앞서나가는 캐릭터 만들기에 한 술 더 떠서 <도시의 법칙>은 관계 만들기에도 앞장 선다. 2회에선 백진희의 이천희 앓이를 만들기에 골몰하더니, 4회에선 백진희와 문의 핑크빛 모드에 열중한다. 물론,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새로운 인간 관계가 빚어내는 분위기가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백미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시청자보다 앞서 나간다는데 있다. 시청자가 보기에, 이천희가 허당 천희인 줄 알았는데, 뚝딱뚝딱 못하는게 없고 멋진 남잔데? 라고 느끼기도 전에, 프로그램이 먼저 설레발을 친다. 이 남자 멋지다고, 정경호도 마찬가지다. 잘생긴 배우로만 알았는데 대뜸 수염부터 기르고 나와서, 이 사람 뭐지? 하는데, 자막이 먼저 예능 기대주라며 호들갑을 떤다. 유일한 여성 멤버 백진희는 제일 바쁘다. 이천희를 멋있다고 하다가, 어르신과 함께 낯선 뉴욕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하다, 이젠 문과 러브라인도 만들어야 한다. 시청자들이 둘이 좀 붙어있네 싶은데, 프로그램은 혼자 하트 뿅뿅이다. 이렇게 앞서 나가 관계를 설정해 버리니, 정작 할 말이 없다. 결론이 이미 났는데, 그 과정을 살펴보는 재미가 뭔 소용이란 말인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과정은 어쩌면 콜롬부스의 신대륙 못지 않은 발견의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콜롬부스는 신대륙을 발견했지만, 죽은 순간까지 자신이 갔던 곳이 인도인 줄만 알았다고 한다. <도시의 법칙>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책상 위의 기획안에서 생각했던 메뉴얼을 넘어,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뻔한 정석을 넘어, 진짜 그들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빚어냈던 진짜 이야기에 천착해야, 시청자들도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시의 법칙 in 뉴욕>의  in 뒤에 붙여질 지명들의 수가 점점 더 줄어들을 가능성이 높다. 


by meditator 2014. 7. 3. 1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