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서재에 들어간 오초림(신세경 분), 쉐프 권재희가 가져오라는 책을 꺼내려다 책장의 다른 책들을 쏟는다. 그 중 하나의 책 사이에서 떨어져 나온 편지, 초림은 그 편지를 꺼내 읽는다. '지금은 오초림이 된 최은설 양에게'로 시작되는 천원장이 남긴 편지, 자신이 최은설이라는 편지 내용에 놀라 눈물을 흘리는 초림, 그 뒤로 권재희(남궁 민분)가 등장하고.


#둘
집에 온다는 아버지에게서 메시지, 그 내용은 모처에 있으니 데리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걱정된 초림은 무작정 메시지의 그곳으로 가고, 초림이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쉐프 권의 집, 열려진 문 사이로 권재희의 집으로 들어가 애타게 아버지를 찾는 초림, 그런 초림을 권재희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 등장한다. 

#셋
지갑을 잃어 버렸다는 핑계를 대고 권재희 서재에 숨겨놓은 비밀 카메라를 찾으러 들어간 초림, 하지만 그 시간 이미 권재희는 흥신소 직원의 귀뜸을 받고 서재로 돌아와 경찰이 숨겨놓은 비밀 카메라를 찾은 후. 그것도 모르고 카메라가 있는 서재로 내려오는 초림, 서재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초림과 마주 선 권재희.



이 세 장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극중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인 권재희와, 권재희가 찾아 없애고자 하는 목격자 오초림이 마주서게 되는 장면이다. 첫 번째는 초림이 목격자라는 증거가 되는 편지를 사이에 두고, 두번 째는 최은설을 딸로 숨기고 있는 아버지를 볼모로, 그리고 마지막은 몰래 설치된 경찰 카메라를 들키고. 권재희가 마음먹기에 따라 다음 장면 오초림이 그의 숨겨진 하얀방으로 직행하기에 충분할 조건을 가진 장면이다. 

그런데 이 세 장면의 공통점이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냄새를 보는 소녀>10,11,12회의 엔딩 장면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상황, 흡사한 스릴러적 긴장감, 거기에 유사한 위기, 이게 세 번 연속 드라마의 엔딩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시청자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



뻔하고 어설픈 스릴러 
우선은 '무섭다'이겠다.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며 '만담'까지 해가며 흥미롭게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끈 <냄새를 보는 소녀>, 스릴러와 로코의 복합 장르를 추구했다지만, 이제 중후반에 들어 매회 이렇게 시청자의 가슴을 '스릴러'적으로 옭아매며 끝을 맺는 이런 엔딩은 최근 시청률 추세에서도 보여지듯이(10회 8.0, 11회 7.5. 12회 6.9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제작진의 기대와 달리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게다가, 첫 번째 장면에서 권재희 책에서 떨어진 편지를 무신경하게 꺼내 읽는 설정이라던가, 두번째 아버지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권재희의 집인줄 알면서도 역시나 무신경하게 아버지를 찾아헤맨다던가, 심지어 세번 째는 내둥 잘 가지고 다니던 핸드폰을 권재희 집에 들어가기에 앞서 굳이 레스토랑에 놓고, 경찰이 장착해준 이어폰도 착용하지 않은 채 용의자의 집에 들어가는 어설픈 설정에 이르면 무섭다기 보다는, 위기를 위한 위기의 웃픈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렇게 <냄새를 보는 소녀>가 연 3회 극적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드라마의 절대 악인 권재희와, 그의 타겟인 오초림을 마주선 장면으로 드라마의 엔딩을 조성하며, 시청자의 시선을 잡아 끌려고 하지만, 정작 달달한 로코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은 '무섭다'며 리모컨을 찾고, 어설픈 설정에 또 채널을 돌려버린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일찌감치 정체가 드러난 악인, 그에 비해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는 주인공을 비롯한 경찰 측, 그런 경찰 측을 희롱하며, 12회에 이르기까지 <냄새를 보는 소녀>는 극적 갈등을 전적으로 권재희의 악행에 의존해 간다. 마침 아침 드라마의 악녀들처럼, 권재희는 갖가지 기기묘묘한 방식으로 주인공과 그 주변을 희롱하고,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은, 이래도 저래도 결국 당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점찍고' 돌아오는  클라이막스의 시점까지 말이다. 그리고 '바코드 연쇄 살인 사건'이라는 부제에서도 보여지듯이, 단일한 사건을 16부작으로 끌고 가야하는 단선적 이야기 구조를 가진 <냄새를 보는 소녀>의 '근원적' 한계일 것이다. 악의 축은 극명하고, 그 악을 극복하는 16부에 이르기까지, 악은 끊임없이 악행을 저지르고, 반대 측은 연신 당하다 마지막에 카운터 펀치를 날려야 하는 단선적 이야기 구조의 숙명인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작 <냄새를 보는 소녀>가 권재희의 사이코패스적 악행으로 시청자의 시선을 끌려 엔딩을 장식하는 동안 정작 이 드라마가 애초에 추구하고자 했던 '힐링' 러브 스토리가 짖눌려 버리고 만다. 정작 하고자 하는 바는, 바코드 연쇄 살인 사건의 피해자 최무각과 오초림의 상처 치유지만, 드라마는 '연쇄 살인'을 설명하느라 골몰하다 보니 '치유'가 하위 범주로 밀려나는 듯 보인다.  


최무각과 오초림의 '어른다운 사랑'
하지만 권재희의 사이코적 악행에 짖눌리기에는 <냄새를 보는 소녀>가 그려내는 사랑은 그간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그려왔던 사랑과 질적으로 다른 성취를 보인다. 

우선 늘 재벌이거나, 준 재벌가쯤 되는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고소득 직종이 판을 치는 사랑 이야기에서, '순경' 최무각과, '개그맨 지망생' 오초림의 존재는 평범해서 특별하다. 그들은 그래서 늘 차도 없이 버스를 타고 다니거나,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거나 헤어진다. 특별하게 경찰 관용차를 타거나, 택시를 탄는 보통 사람이다. 그래서 순경인 최무각(박유천 분)의 소원은 동생의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요즘은 경찰들도 기피한다는 강력반에 들어가고자 하고, 개그맨 지망생인 오초림은 개그 무대에 서는 것이 희망이다. 그래서 그들은, 강력반에 들어가기 위해 오초림의 냄새를 보는 능력이, 그리고 무대에 서기 위해 만담 파트너로서 최무각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연인의 러브 스토리의 전개 역시 그간 다른 드라마와 다르다. 누군가 제 3자가 끼어 질투도 하고, 삼각 관계를 일으키며 사랑의 전선을 구축해 가는 여느 사랑 이야기와 달리, 이 두 사람은 수사를 하고, 만담을 하며, 그 사이에 짬짬이 함께 '먹방'을 흐드러지게 선보이며 '썸'을 탄다. 수사와 만담 연습을 빼면 평범한 여느 연인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여느 연인들같던 이들의 '썸'은 그저 '썸'에 그치지 않는다. 최무각이 오초림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은 자신으로 인해 무대에 설 수 없어 되어 슬퍼하는 동생 또래 여자에 대한 연민으로, 그리고 오초림은 '동생'을 잃은 오빠의 상실감에 대한 헤아림으로 '썸'이 사랑으로 깊어진다. 그래서 감각을 상실한 최무각의 진통제 비용을 아까워하던 가해자 오초림은, 동생을 잃고 마음을 아파하는 최무각을 생각하여 자신이 하고싶은 만담을 포기하고, 최무각은 '아는 동생' 오초림을 생각하여 '지금이 그럴 때가 아닌'데도 만담도 하고, 수사도 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상대방을 생각하는 이들의 '이타적인 사랑'의 위기는 오초림인줄 알았던 최은설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냄새를 보는 소녀>가 표방한 '힐링 러브'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다. 11,12회에 걸쳐, 두 사람은 상대방이 동생 대신 죽은 또 한 사람의 최은설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 대신 최무각의 동생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당연히 자신 때문에 최무각의 동생이 죽었다며 죄책감에 빠진 오초림은 최무각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하지만, 최무각은 다르다. 자신의 동생과 이름이 같았던 또 한 사람 최은설에 대해, 그가 주저한 시간은 단 하루, 자신을 기다리는 오초림을 멀찍이 바라보고 자리를 떠난 후 동생과 함께 했던 아쿠아리움을 홀로 찾던 그는, 의연하게 슬픈 눈을 하면서도, 다정한 연인의 모습으로 초림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동생에게 하듯 '이쁘다'고 얼굴을 쓰다듬고, '자신에게 시집오려면'이라고 은근슬쩍 '청혼'의 운도 띄운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듯, 자신의 원망을 '너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다'고 쏟아붓는 대신, '어른답게' 또 한 사람의 희생자인 최은설을 보다듬는다.

최무각의 동생이 자신때문에 죽었다며 이별을 선언하는 오초림의 손을 잡고, 너 때문이 아니라고, 니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어른 남자' 최무각인 것이다. 그리고, 이 다음에 모든 사건이 해결되면 함께 제주도로 내려가자고 말한다. 역시나 제주도가 고향인 최은설에게. 

하지만 정작 드라마는 이런 최무각의 어른스런 사랑에 인색하다. 그의 동요는 짧고, 고민은 스쳐간다. 오초림의 고뇌도 마찬가지다. 최무각과, 오초림이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배려하며 사랑을 키우고, 위기의 순간에조차 어른스럽게 처신하는 성숙한 사랑을 그려가지만, 언제나, 그 사랑의 빛깔은 연쇄살인마의 스릴러에 희석되어 버린다. 극은 결국은 허무한 해프닝으로 어설프게 당해버리는 연쇄살인마의 악행에 치중하는 동안, 두 사람의 연민에서 비롯된 사랑은, 몇몇 투닥거리는 장면으로 대체된다. 

그렇게 성의없이 끼워넣듯 등장한 장면을 채워가는 건, 온전히 배우들이다. 권재희 난을 되풀이하는, 그리고 어이없는 설정들이 난무하는 어설픈 스릴러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을 설득하고, 인내하게 만드는 건, 재미처럼 끼워넣은 최무각, 오초림의 장면에서, 일렁이는 눈빛을 하고 만면에 미소를 띠며, 슬픈 운명을 극복해 나가는 박유천, 신세경의 연기이다. 방향을 종종 놓치거나, 뻔해 보이는 드라마 속에서, 섬세한 결로 '어른 남자' 최무각의 진심과 자신을 던져서라도 사랑하는 이를 돕고 싶어하는 순수한 여자 오초림을 배우들의 연기로 그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래도 <냄새를 보는 소녀>가 뻔하고 어설픈 스릴러를 넘어  아직은 포기될 수 없는 미덕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5. 5. 8.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