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명절이 그렇듯, 민족의 대명절 추석을 맞이하여 떠들썩한 잔치 한 마당이 벌어졌다. 저마다 '추석 특집'이라는 이름표를 하나 더 붙이고, 다른 때보다 더 화려하게, 더 시끌벅적하게 판을 벌인 각종 프로그램들이 그것이요, 명절을 빌미로 슬쩍 끼어들여 시청자의 구미를 한번 당겨보는 새롭게 런칭해보려는 프로그램들이 그것이다. 2015년의 트렌들에 맞게 누군가는 '노래'를 가지고, 또 누군가는 '음식'을 가지고 명절로 인해 들뜬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명절이 들썩거리고 시끌벅적하기만 한 건가, 누군가 한데 어울려 놀면, 그 무리에 끼지 못한 채 외로움이 깊어지는 사람들이 있을 터이고, 누군가 가족을 만나면,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서러움은 깊어질 것이다. 굳이 어떤 사건을 떠올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보름달이 휘엉청 밝은 이 초가을의 명절은 누군가에게 기쁨과 번접함이라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슬픔과 사무침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잔치판에 몰두하는 미디어는 화려한 특집을 마련하기에 골몰하는데, 그런 와중에 독특한 드라마 한 편이 찾아왔다. '추석 특집극'이라는 명패를 달았는데, 제목이 무려,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이다. 추석에 장례식이라니! 허긴, 추석이 뭔가, 돌아가신 조상을 햇 곡식으로 기리는 날인데, '판타스틱한 장례식'이 굳이 안 어울릴 건 없는 거다. 




죽기 전에 치뤄보는 장례식
생로병사, 이 평범한 네 글자의 문구가 '자본주의'라는 제도화된 사회에 진입하면 복잡해 진다. 일전에 친지의 장례식을 겪으며 느낀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죽음에도 돈이 필요하구나 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돈이 있는데 가족이 없다면, 그 또한 죽는 자에겐 난감한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 어느 곳엔 가족이 찾아가지 않은, 혹은 가족이 돈이 없어 버려진 이른마 '무연고자'들의 무덤이 있다.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의 주인공은 바로 그렇게 무연고자의 처지에 몰린 장미수(경수진 분)이다. 뇌종양 판정을 받은 장미수, 병실 동기의 붉은색 드레스 코드가 있는 깜찍한(?) 장례식에 참석한 그녀는 그녀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죽음 걱정에 눌린다. 그도 그럴 것이 산업 현장에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 어릴 적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보호자연했지만 남보다 못한 고모로 인해,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장례식 걱정이나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심지어 모처럼 만난 첫 애인조차도 그녀가 조만간 죽을 것을 알고 그녀의 돈을 노리며 달려드니, 장미수가 그 누구를 믿고 세상을 떠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은 흔히 드라마가 다루는 시한부 생명을 가진 환자의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한다. 그리고 '추석'이라는 혹은 '명절'이라는 이름 만으로 마치 모두가 가족과 함께 어우러져 지낼 것만 같은 이 시기에,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의 장미수처럼 세상에는 아빠는 돌아가시고, 엄마는 집을 나가고, 친척은 그저 내 돈만 관심이 있는, 외로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명절'은 커녕, '죽음'이라는 통과 의례 조차도 '가족'이 없으면 외로움을 배가시키고,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다는 것을 '추석 특집' 드라마는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즉, 이 지극히 '가족 중심', 그리고 '가족'이 아니고서는 걷어주는 그 누구도 없는 매정한 사회 속, 홀로 죽어가는 이의 죽음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드라마는 젊은 남녀가 등장하는 드라마답게, 무연고 죽음에 몰릴 장미수에게, 첫사랑이었던 박동수(최우식 분)이 등장하는 환타지가 일어난다. 고등학교 때 전교 1등 장미수를 좋아한다며 무작정 전학까지 왔던 박동수, 하지만 어느 날 사라졌던 그가, 기적처럼 장미수 네 아파트 벽 페이트공으로 장미수네 창문 밖에 대롱대롱 매달려 등장한다. 그리고, 청소년 시절처럼 '너만 보면 염통이 아파'라며 다시 장미수에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죽음을 알고 나서도, 죽을 때가지 나랑 놀다 가라며.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에 등장한 백마 탄 왕자는 '염통이 아픈' 순진남 박동수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드라마의 잘 나가는 실장님보다도 더 멋지다. 이제 죽음을 앞둔 장미수에겐 돈도, 그 어느 것도 필요 없고, 마지막 순간을 맞을 그녀의 보호자가 필요할 뿐인데, 그가 바로 딱 그 역할인 것이다. 그렇게 죽음의 순간에 걸맞은 백마 탄 왕자를 만난 장미수는 덕분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쫓기지 않고, 죽음의 통과 의례를 순탄하게 맞이한다. 

죽을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냉소적으로 말하던 그녀는 박동수 덕분에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그래서 죽음을 서러워하고, 아쉬워하며 갈 여유(?)를 가진다. 그리고 그 누구도 돌아봐조지 않을 죽음에 두려워하는 대신에, 사랑하는 이의 마중을 받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미리 작별을 고하는 '판타스틱한 장례식'까지 참석하기에 이른다. 



죽을 사람이 미리 참석하는 '판타스틱한 장례식', 이 아이러니한 드라마의 설정은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명절'이라는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가족 중심'적인가를, '가족'의 아웃 사이들에 대해 얼마나 무방비하고, 매정한 가를, 그리고, '판타스틱한 장례식'을 통해 그래도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고 그렇게 보낼 수 있는 친지들은 얼마나 행복한가를 역설적으로 깨닫게 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준비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내는 그래서 명절이 더 서러운 사람들이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것이다. 

마치 강요라도 하듯이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강요하는 듯한 추석 명절에, <나의 판타스틱한 장례식>은 신선한 볼거리였다. 모두가 들썩일 때 더 외로워지는 사람은, 이게 아닌데, 이렇게 웃고 떠들 때가 아닌데 라며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볼만한, 물론 죽음의 순간에도 왕자님이 찾아온 이야기는 환타지이지만, 그 행간을 넘어 여러 생각해 볼 거리를 남겨준 작품이다. 다만 죽음을 앞둔 장미수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기에 심장 이식을 거부한 순애보 왕자 박동수의 숨겨진 이야기가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by meditator 2015. 9. 27. 1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