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의 김원석 감독과 <또 오해영>의 박해영 작가의 만남으로 화제가 되었던 <나의 아저씨>, 하지만 드라마를 열기도 전에 남자 주인공이 '아저씨'인 이선균과, 여자 주인공이 젊은 세대 아이유라는 점에서 <도깨비>에 이어 또 한번 아저씨-젊은 여자 커플의 등장이 아니나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설상가상 첫 회 여주인공 이지안(아이유 분)에게 사채를 받으러 온 이광일(장기용 분)의 무차별 폭행에 이어, 그런 이광일의 폭행에 대응한 이지안의 '너 나 좋아하지?'란 대응이 '왜곡된 성의식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논란을 불지피며 일부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까지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2회를 마친 <나의 아저씨>는 이런 세간의 '아저씨'와 젊은 여성에 대한 편견에 오히려 반문을 하는 듯하다. 극중 이지안은 나꿔챈 뇌물 5000만원을 다시 휴지통을 통해 돌려놓음으로써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박동훈(이선균 분)을 구해준다. 물론 애초에 이지안은 그 돈을 챙겨 자신의 사채 빛을 갚으려 했지만, 결국 다시 돌려놓는다. 의도야 어찌되었건 박동훈의 은인이 된 셈이다. 그런 이지안의 처사에 대해 영문을 몰라하는 박동훈, 그에 대해 그의 형 박상훈(박호산 분)과 동생 박기훈(송새벽 분)은 쉽게 이지안이 박동훈을 좋아해서라 단정한다. '얼래리 꼴래리'라며 놀리는 것까지 덧붙여. 



고정 관념을 뒤짚은 아저씨와 나 
바로 이 지점, 우리 사회가 '아저씨'와 이지안 또래의 젊은 여자에 대해 '상정'할 수 있는 관계다. 이지안이 돈봉투를 가져갔다는 의심을 가진 박동훈이 지안을 따라 지하철을 타고 그녀에게 내릴 것을 종용하다 옆 좌석의 승객에게 내밀려 지하철에 패대기쳐지는 장면 역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 잇닿을 수 없는 세대에 대한 고정 관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불편한 성적 관계'가 아니고서는 서로 관계할 수 없는 이 두 세대, 그저 두 세대의 남녀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이 많은 아저씨'와 '젊은 여자'의 불평등한 관계에 대한 불평이 새어져 나오는 현실, 이게 바로 우리 사회에서 이 두 세대가 가지고 있는 간극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지만, 2회를 마친 드라마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쉽게 생각했던 '아저씨'와 '젊은 여자'가 아닌 것이다. <도깨비>처럼 흔히 이 관계를 다룬 드라마에서 등장하던 '키다리 아저씨'따윈 없다. 키다리는 커녕, 회사 내 권력 투쟁에서 그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된 뇌물 봉투를 배달받아, 장기판의 '졸'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일개 '사원' 박동훈이 있다. 생긴거 부터 억울하게 생겼다는 그는, 정말 억울하게도 그 순간, 딸의 결혼식장에서 축의금을 동생과 함께 빼돌리던 형, 그 형에게 집값을 융자 받아 분식집이라도 내주자는 어머니의 간청을 떠올려, 평소답지 않게 주저했다. 그 '한순간의 주저'함이 그 봉투를 이지안에게 빼앗기는 빌미가 되었고, 회사내 권력 투쟁의 '말'로 한껏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거기엔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하느라 그를 밀어내고 싶은 대표의 사심까지 보태졌으니, '키다리 아저씨'는 커녕, 목구멍이 포도청 신세다. 기껏 그가 선심을 써서 산 '연시'조차 이지안에게 건네지지 못한 채.

반면, 우리가 흔히 고정관념으로 생각해 왔던, 그 '아저씨'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이지안은 '밟혀도 밟혀지지 않는 억새'와도 같다. 아마도 이광필의 폭력적 장면을 과하게 설정한 건, 그 상황에서도 포기는 커녕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이지안의 그 억새같은 내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했던 이광필'과의 장면만이 아니라도 '생존' 그 자체인 이지안의 삶은 1,2회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겨울 박동훈의 눈을 시리게 한 양말도 신지않은 발은 아랑곳없이, 그녀는 회사에서 한 움큼 가져온 커피를 몇 개씩 타서 마시며 도시를 버텨낸다. 요양원에서 밀린 입원비 대신 기꺼이 할머니를 침대 채 끌고 나오는 객기도, 주방 설겆이를 하며 비닐 봉지에 싸온 음식물로 연명하는 끼니의 궁상스러움도, 그녀의 일상이다. 그렇게 설명된 그녀의 일상에서 박동훈이 받은 뇌물 봉투 정도 슬쩍 해서 자신의 빛을 갚는 것 쯤이야 그녀에겐 그 일상의 연장처럼 여겨질 만큼. 그녀는 이 도시에서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릴라'같은 존재다. 그런 그녀 앞에 박동훈은 새장 속의 새와도 같이 보잘 것없다. 



도시 게릴라 이지안과 새장 속의 새 박동훈 
이지안은 5000만원으로 빚을 갚는 '편한' 길 대신 봉투를 돌려주며 외려 박동훈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었다. 박동훈이 사는 밥 한 끼 따위, 5000 만원에 댈 것도 아니다. 그를 그저 장기판의 말로만 써먹는 이 사회에서, 이지안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구원자'다. 물론, 대표와의 딜에 대한 결과는 미지수지만. 바로 이 전복된 '아저씨'와 '나'의 관계가 <나의 아저씨>가 도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담론'이다. 어설픈 아저씨와 '나'에 대한 로망은 사절이다. 그리고 흔히 생각하는 '키다리 아저씨'는 없다. 나이만 먹었지, 장기판의 말로 회사에서, 가정에서 굴려지는 박동훈은 그저 나이만 먹었지, 세상사 내공으로 보면 이지안의 뒤꿈치 정도이다. 

이런 역설적인 세대의 만남,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을'이다. 제 아무리 '생존'을 위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도 죽일 것'같은 이지안도, 생긴거 부터 억울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박동훈도, 나이가 많건, 적건, 혹은 세상 경험이 많건, 적건, 그들은 이 사회로부터 '억울'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연대'는 기껏해야 '불륜'의 눈길이나 받는 공감 제로의 관계들이다. <나의 아저씨>는 바로 이 공감 제로 관계의 공감과 연대를 위해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첫 발은 어설픈 '아저씨스런 호혜'가 아니라, '나'에 방점이 찍혀 있다. 물론 아직 알 수 없다. 나가 아저씨를 이용해 먹을 건지, 동지가 될 건지, 의지가 될 건지. 그러나 중요한 건 무한 경쟁, 이전 투구의 사회의 '게릴라'같은 이지안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왜 굳이 아저씨와 나냐고 발길을 걸면 할 말이 없다. 각자 도생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 공감과 화해를 해보자는 손길에 한번쯤은 손을 잡고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무엇보다 그 '연대'의 시작이 '나'라는 지점에서 우리는 긍정적으로 이 '아저씨'와 '나'의 향후를 지켜볼 만 하지 싶다. 
by meditator 2018. 3. 23. 1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