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에 의해 '탄핵'을 당한 전직 대통령의 구속 여부가 화제가 되는 시절이다. 청와대가 비워지자, 정국은 급속도로 다음 청와대 주인공이 될 사람을 향해 몰려간다. 그런데 과연 새로운 대통령을 잘 뽑으면 다 되는 것일까? 거리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그저 새로운 대통령이 아니다. 새로운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체제, 새로운 사회'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회의 시작은 어떻게 해야할까? 그 '시작'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런 고민의 시점에 박경수 작가가 <귓속말>을 들고 찾아왔다. 


<추적자 the chaser(2012)>, <황금의 제국(2013)>, <펀치(2014)>라는 그의 전작들만으로 더 이상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치 않은 작가다. 일찌기 아내와 딸을 형사 백홍석(손현주 분)을 통한 권력에 대한 복수를 시작으로, 그의 '부도덕한 권력'을 향한 '복수극'은 시작되었고, 매년 그 복수는 정치와 경제, 법의 '카르텔'을 저격해 왔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사법' 카르텔에 의해 아버지를 '영어의 몸'이 되게 만든 전직 형사 신영주(이보영 분)를 내세워 또 한 편의 '복수'의 시동을 건다. 



하지만 1,2회 아버지에게 '자유'를 안기기 위해 자신이 몸담았던 경찰직은 물론,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헌신하는 신영주보다 더 시선이 가는 건 뜻밖에도 요지부동의 늪에 빠진 판사 이동준(이동준 분)이다. 

위기에 빠진 '정의남' 이동준
서울 지방법원의 촉망받는 판시 이동준은 아버지의 청탁조차 외면한 채 대법원장의 사위를 구속시킬 만큼 법 앞의 정의를 실천하는데 추호의 흔들림이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바로 그 '정의로운 판결'로 인해 스스로 '재임용'의 늪에 빠지게 된다. 자신에게 앙심을 품은 대법원장이 그와 마찬가지로 이동준의 판결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동료 법관들과 함께 이동준을 재임용에서 탈락시키고자 한 것.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동준은 예의 '정의로움'으로 돌파해 보고자 한다. 하지만 어려움에 빠진 어머님을 돕기 위해 방문했던 건강보험 평가원행이 뜻밖에 '불법'의 이름으로 그를 옭죄어 오자 고민에 빠진다. 정의로웠던 판사가 하루 아침에 '피의자'의 신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 그가 '법비(法匪)'라 경멸해 마지 않았던 거대 로펌 태백의 최일환(김갑수 분)가 손을 내밀었던 것. 그의 요구 조건은 이동준의 마지막 재판이 될 신영주의 아버지 신창호(강신일 분) 재판에서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이다. 마지막 동앗줄이라며 그를 찾아온 신영주에게 법의 테두리 내에서 최선을 다하겠다 약속을 했던 이동준, 하지만 그 약속은 '구속'의 위기에 몰린 이동준에 의해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만다. 그리고 그 헌신짝처럼 버려진 약속으로 인해 이제 또 신영주라는 또 하나의 늪이 그의 발목을 잡아끈다. 

'정의'의 시대, 박경수 작가가 주목한 것은 뜻밖에도 '정의'의 시대를 사는 '지식인'들이다. 지식인이란 어쩌면 이 시대에 '고리타분'하게 들리는 이 단어의 주인공을 일찌기 <지식인을 위한 변명>의 샤르트르는 자신의 출신 계급과 무관하게 자신이 배움을 통해 선택한 사상에 따라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고, 비판하면서 소외 계층에 봉사하는 존재라 정의 내렸다. 하지만, 샤르트르의 이 말을 뒤집으면, 노엄 촘스키가 지적한 바, 부와 권력으로 장악된 이 사회에서 그의 하수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짜 지식인'의 정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운 것을 기반으로 자신이 살아갈 '존재'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 

일찌기 6.25전쟁 이후, 논과 땅과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을 교육시켜 '입신양명'을 이루고자 했던 한국의 열렬한 자식 사랑은 이 사회를 '학력 사회'로 만들었다. 학교의 교육을 통해 각종 자격증을 취득한 이들은 뷰로크라트(관료)와 테크노크라트(기술 관료)로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았고. '탄핵'이 된 시점에서도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없는 검찰 등의 권력의 '내부자들'로 권력 카르텔의 성실한 수행인이 되었다. 



<귓속말> 속 아버지 세대들은 태백의 대표 최일환, 이동준의 아버지 이호범(김창완 분)처럼 지배 계급의 성공한 '지식인'들과 그런 그들에 대항해 싸웠지만 자신의 직위(기자)와 경제적 능력조차 잃고, 이제 영어의 몸이 된 신창호를 통해 우리 현대사 속 지식인의 서로 다른 길을 이분법적으로 제시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선택할 수 있었던 지식인의 명확하게 다른 모습이다. 

젊은 지식인의 선택
그리고 이동준이 빠진 '자중지난'을 통해 이제 그 자식 세대가 봉착한 '딜레마'를 드라마의 주제로 내세운다. 정의로웠던 판사 이동준은 불명예에는 맞서 싸워보려 하지만, 스스로 '법'의 심판을 받을 지도 모를 함정에는 무기력했다. 그래서 신영주의 아버지를 희생양으로 자신은 태백의 사위가 되는 선택을 했다. 

남들은 그가 국내 최고 로펌 태백의 사위가 됐음을 축하하지만 이동준의 미간은 풀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청탁마저 거절하며 그가 살고자 하지 않았던 길에 원치 않게 들었다고 생각한다. 신영주에게는 어떻게든 자신이 그녀를 돕기 위해 애를 써보겠다며 말한다. 

그런 그에게 두 사람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아버지는 '태백 최일환 대표'를 묻는 동준에게 되묻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최일환의 정체가 아니라, 바로 니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한다. 위기에 빠졌을 때 너는 거침없이 태백의 손을 잡았다고. 니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고. 

또 한 사람, 신영주는 신영주의 아버지를 나중에라도 꼭 구해주겠다고 말하는 이동준에게 '세월호'가 연상되는 답으로 돌려준다. '기다려라'라는 그 말이 누군가에게 목숨을 잃는 일이 될 수도 있다며. 또한 시험의 계절, 단 한번의 청탁을 거절하지 못한 교수가 결국 총장 취임을 앞두고 불법 비리 혐의로 구속된 사례를 들며, 시험의 계절은 매년 돌아온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이동준의 선택을 비웃는다. 

최순실 사건이 터지고, 그의 충실한 조력자이자 어쩌면 동반자인 우병우와 김기춘 등의 실체에 대해 샅샅이 밝혀졌다. 공부 잘하고 똑똑했던 소년은 그가 선택한 '권력'의 충실한 하수인이자, 스스로 권력의 내부자로 이제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라,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이 시점에도 여전히 잔존하고, 끊임없이 생성되는 '학력 사회'를 통해 합법적 권위와 권력이 된 다수의 '지식인'들의 카르텔이 진짜 문제라는 걸. 



그리고 바로 그 진짜 문제에 대해 <귓속말>은 한때는 정의로웠으나 어느덧 그 '카르텔'의 일원으로 허용된 이동준을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드라마 속 이동준은 태백의 사위이자, 거대 로펌 태백의 촉망받는 변호사가 되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린다. 여전히 그의 정체성은 '정의로운 판사'지만, 이미 그의 선택은 '부도덕'의 루비콘 강을 건넜다. 과연, 그 '저승'의 강에서 이동준이 어떤 선택을 할지. 또한 신영주를 비롯한 태백의 딸 최수연(박세영 분), 보국산업의 아들 강정일(권율 분) 들 또 다른 '지식인'들의 행보를 통해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선택을 묻고자 한다. 

덕분에 혼돈스러운 이동준을 그려내기 위해서였을까? 1,2회의 <귓속말>은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을 떠나, 꽤나 모호하고 혼돈스럽다.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듯한 대사들은 떠오르지만, 그 모든 것들이 궁지에 몰린 이동준마냥 뒤엉켜버린다. '선'가 '악'의 경계가 벌써 주인공 자신에게서 결정되지 않았다. 그 '경계'를 보며 어쩔 수 없이, 시청자들도 불편한 선택의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 불편함은 정의로운 주인공에게 닥친 시련과는 다른 거북스러움이다. 과연 이 거북스러운 질문에 시청자들의 인내심이 견뎌낼 지 그 쉽지않은 길의 여정이 궁금하다. 
by meditator 2017. 3. 29. 1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