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편 최고의 시청률를 기록하며 종영한 <무자식 상팔자>의 뒤를 이은 것은 <궁중 핏빛 잔혹사-꽃들의 전쟁>이라는 사극이다. 이전에 <인수대비>를 통해 종편 첫 드라마치고는 괜찮은 반응을 얻어냈던 정하연-노종찬 콤비가 다시 뭉쳐 만든 이 사극은, 그간 조선시대의 소재 중 터부시되어 오던 소현세자의 독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첫 회, CG를 활용한 인조의 삼전도 굴욕을 장대한 스케일로 다루다, 뜬금없이 여인의 상반신 노출까지 감행하는 선전성을 내보인 이 드라마는 비록 3%를 갓 넘었지만<무자식 상팔자>의 첫 방보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순조롭게 출발하고 있다.

 

 

<마의>를 연출하고 있는 이병훈 감독이 은퇴 전에 꼭 해보고 싶어하는 역사적 소재가 바로 인조 연간의 소현 세자 이야기이다. 하지만 소현 세자 이야기를 드라마의 소재로 쓰기엔 사도 세자 이상으로 아비에 의해 아들이 죽임을 당한 비극적 내용이기에 그간 역사를 소재로 했던 드라마들이 감히 이 제재를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소현 세자는 병자호란에 패배한 조선의 볼모로 청의 심양으로 잡혀갔지만 거기서 조우한 서양의 문물로 인해 개명(?)을 하고 그로 인해 조선으로 돌아와 아버지인 인조와 수구 권신들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역사의 희생양이 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중기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 다시 한번 역사의 수레바퀴를 발전적으로 되돌릴 몇 번의 기회 중 하나가, 바로 소현 세자의 등장이었는데, 그는 사대주의와 수구 권력의 이기심으로 성리학에 찌들지 않은, 당시에 변화하는 세계 정세까지 바라보는 시야를 가진 실용주의적 정책의 뜻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아내 세자빈 강씨는 물론, 세손들까지 일가족 몰살의 주인공으로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도 세자의 비극적 죽음이 번번히 사극의 소재로 쓰인 것과 달리 소현세자의 이야기가 사극에서 기피 소재가 되었던 것은, 사도 세자의 죽음에는 영조라는 걸출한 아비와, 그 뜻을 되살리려고 했던 똑똑한 아들 정조라는 긍정적 포장이라도 있는 반면, 인조 연간의 소현 세자 독살은 말 그대로 정쟁 속에 사라져 간 세자라는 비상식적인 역사적 학살만이 있기에 누구도 감히 그걸 꺼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중파 사극의 저조한 시청률에서 보듯이, <대장금> 이래 붐을 이루던 이른바 '퓨전 사극'이 이제는 그 인기가 한 풀 꺾이는 듯한 기세를 보이고, 로맨스 사극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궁중 암투를 벗어나지 못했던 <해를 품은 달>의 높은 시청률에서 보여지듯 여전히 <조선 왕조 오백년>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사람들의 취향은 소현 세자 독살 사건이라는 기피 소재를 드라마로 불러 올린다. <꽃들의 전쟁>에 이어, KBS2 TV <아이리스> 후속으로 방영될 예정인 <천명>도 소현 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낼 예정이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꽃들의 전쟁>은 소현 세자가 주인공이 아니다. 노골적으로 왕의 무소불위의 권력의 그늘에서 살아야 하는 본능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욕망의 덩어리로써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기획의도는 밝히고 있다. 즉, 그의 비극사를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세력, 그것도 왕의 후궁의 입장에서 풀어냄으로써, 비극적 역사를 뒤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사도 세자의 죽음을 그간 많은 드라마에서 영조 후궁들과 딸들의 음로로 그려내듯이.

여기서 우려가 되는 것은, 소현 세자 죽음에 숨겨져 있는 역사적 진실이 그저, 한낱 궁중 세력의 암투라는 흔하디 흔한 소재로 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1회에 벌써 굴욕을 겪고 돌아가는 길에도 아들 걱정에 앞서는 아비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그 자신보다 아내 강씨가 더 부각되어 보이는 설정에서, 소현 세자라는 인물은 드라마를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되, 그가 담보해 내었던 조선 역사에서의 진보성이나, 발전성은 그저 정쟁 속의 나약한 인물에 휘말려 연소될 가능성이 커보이기에 우려가 된다.

 

(사진 출처; jtbc)

by meditator 2013. 3. 24. 0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