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가 다시 돌아왔다. '이상한 나라'로 갔던 앨리스는 이번엔 '시간' 속으로 여행을 한다. 2010년에 개봉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팀 버튼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 왜 진작에 만나지 않았을까란 반문이 들 정도로, 두 세계의 조우는 기대가 되었다. 그 어떤 작품을 만나도, 그만의 색채로 전혀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팀 버튼 감독이 동화라기엔 그 해석의 세계가 무궁무진한 환타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변주한다는 건, 그에게 새로운 날개를 선사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동화 속 '이상한 나라'는 팀 버튼에 의해 가장 화려하게 '시각'화 되었고, 동화가 가지는 가치 전복의 세계는 '팀버튼'월드를 통해, 그 '이상함'이 확장되었다. 물론, 그 팀버튼스러움을 더한 이상함이 잔뜩 분위기를 잡느라, 정작 서사는 '붉은 여왕'vs. '하얀 여왕'이라는 단선적 대결 구도로 뻔한 어드벤처물로 된 듯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상한 나라'의 '이상함'만으로도 뭐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그런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이제 '시간' 여행으로 돌아온다니, 과연 팀버튼이 빚어낸 '시간'은 또 어떤 이상함을 선사할까 기대가 되었다. 


물론 역시 팀 버튼이라는 '수식어'를 내세웠듯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곳곳에는 '팀버튼스러운' 분위기들이 여전히 물씬 풍긴다. 하지만, 정작 팀버튼이 제작을 했지만, 제임스 보빈이 감독한 이 영화는 해마다 우리 나라에서 열리는 '명화' 전시회처럼,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유명한 화가들을 들먹이며 호객을 하지만 정작 그 전시회에서 만나는 건, 알려진 작품 대신 습작이거나, 그도 아닌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로 채워진 기대와는 다른 전시회를 본 그런 아쉬움을 고스란히 되풀이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캐릭터의 활약이 아쉬운
영화는 여전히 화려하고, 거울 속에 빨려든 앨리스는 죽어가는 모자 장수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험에 자신을 내던진다. 앨리스가 돌아간 이상한 나라는 여전하고, 그녀가 뛰어든 시간의 성은 이상한 나라 못지않게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가 하면, 시간을 거스른 거기에는 또 다른 동화 속 세상이 열린다. 하지만 화려한 분위기도, 상상력의 경계를 넘어선 듯한 '시간'의 세상도 신기하지만, 그 뿐이다. 

화려한 색채와 박진감넘치는 언드벤처에도 불구하고 내내 싱겁게 느껴지는 그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결국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작품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팀 버튼의 해석으로 귀결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수학자였던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앨리스라는 소녀는 회중 시계를 든 토끼를 따라 토끼굴로 들어가며 '모험'의 세상에 빠져든다. 이 작품에서 앨리스가 하는 모험이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잣대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이다.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동물들이 사람처럼 움직이는 것은 물론, 그들의 행동 양식 자체도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것들이다. 제목에서 부터 이상한 세상에선 이상한 것들이 멀쩡한 듯 행동하고,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진다. 그 속에서 '상식'을 지닌 소녀 앨리스의 행보는 당연히 '모험'과 '위기'를 겪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언밸러스한 비상식의 세계는, 이미 해골들의 순애보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선사한 바 있는 팀 버튼이라는 비상식적인 감독을 통해 가장 적절하게 표현된다. 당연히 원작 속 토끼며 쌍둥이며, 사냥개들은 저마다 캐릭터를 가지고 활약하며, 팀버튼의 영혼의 단짝인 조니뎁에 의한 '모자 장수'는 감초 그 이상으로 앨리스의 혼을 쏙 빼놓으며 '이상한 나라'를 이상한 나라스럽게 만드는데 공헌을 한다. 

바로 이 지점,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스러움을 보여주었던 그 등장인물들이 거울 나라에서는 그저 '단역'처럼 스쳐지나가 버린다. 무엇보다, 그 이상스러움에 선봉장 역할을 하던 조니뎁의 무존재라니! 과연 이 사람이 조니 뎁 맞는가 싶게, 거울 나라에서 그는 죽어가는 역할 그 이상을 해내지 못한다. 조니 뎁만의 '미친 모자 장수'의 활약을 끝내 보지 못하고 나선 극장에선 과연 내가 이 영화를 본게 맞나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건 앤 헤서웨이의 하얀 여왕도 마찬가지다. 조니 뎁과 앤 헤서웨이라는 쌍두 마차를 제치고, 열렬한 활약을 보인 건 붉은 여왕의 헬레나 본 햄 카터와 '시간'의 사차 바론 코헨이지만, 두 사람이 제 아무리 발군의 노력을 한다 한들, 조니 뎁만 하겠는가. 

원작 속 앨리스는 본의 아니게 토끼 굴로 들어가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모든 사건에 끼어들게 된다. 앨리스의 의도와 무관하게 버젓이 '티파티'의 일원이 되는가 하면, 여왕의 재판에 끼어들어 위기에 빠지게 되는데, 그 '본의 아닌' 사건들에 꿰어져 들어가는 앨리스에 대해, 안타까움과 흥미진진함이 들지언정,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 생고생을 할까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거울 나라'로 가서 '시간 여행'까지 하는 앨리스를 보며, 왜?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앨리스는 죽어가는 모자 장수를 구하기 위한 '고운' 마음으로 '시간'을 멈추거나, 시간을 거스르는 모험을 서슴치 않는데, 물론 죽어가는 모자 장수를 구하기 위한 것인 줄 알면서도 어쩐지 그 모험의 위기에 앨리스의 타자성이 자꾸 눈에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앨리스가 알아주지 않아 죽어가는 모자 장수, 정말 자신의 가족이 살아있다는 걸 믿는 모자 장수라면, 그가 스스로 시간 여행에 뛰어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앨리스와 같이 시간 여행에 뛰어 들어야 하는게 아닌가란 생각을 영화를 보는 내내 지울 수 없다. 



조작된 가족애와 성장 담론
앨리스는 '시간'을 거르스는 금단의 모험으로 붉은 여왕과 하얀 여왕의 해원도 풀어냈을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모자 장수의 가족이 죽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낸다. 사건의 당사자는 하얀 여왕과 붉은 여왕, 그리고 모자 장수이지만, 자매, 그리고 모자 장수 가족 간의 난관을 해결해 주는 사람은 앨리스라는 서사의 딜레마가 생기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오래된 자매간의 질시와 그로 인한 세계의 불행도 해결해 내고, 모자 장수 아버지와 아들간의 오해도 풀어주며, 이별했던 가족 간의 해후까지 만들어 주며 '가족'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만, 마치 '선물'처럼 받은 이 '가족애'는 주제로 내걸기도 무색한 것이다. 진정한 '가족애'라면 내 가족은 내가 지켜내야 하고, 내 가족간의 오해는 내가 댓가를 치루더라도 해결해 내야 하는 것이다. '금단'의 시간을 어겼지만, 그 누구도 시간의 금을 넘은 댓가도 치루지 않은 해피엔딩은 무가치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 무색함을 덜어내기 위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랬듯,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의 모험 후에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약혼을 파했듯, 이제 거울 밖 세상에서 자신이 집착했던 아버지의 배를 포기한다. 하지만 그 조차도 그런 앨리스에 대한 어머니의 감동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앨리스는 모험 이후에 달라진 듯보이지만, 사실 앨리스는 모험을 하기 이전부터 세계를 누비던 용감한 모험가였고, 단지 잠깐 그 모험의 대상을 달리했을 뿐이다. '성장'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이미 이전부터 배를 호령하는 선장이었다는 환타지에서 시작된 영화는 '성장'조차도 궁색하다. 그저 성장을 위한 요식행위랄까.
by meditator 2016. 9. 10. 0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