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미래의 사자상, 두 개의 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전세계 유수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었다. 19회 전주 국제영화제에서도 매진 사례를 이루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능가한다', '엄청나게 충격적인 감정적 경험', '현실적인 후려침과 충격' 이라는 평가가 잇달았다. 바로 자비에르 르그랑의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이룬 성취이자 찬사이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이길래? 이야기의 시작은 가정 법원의 일과로 부터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 판시네마
 

폭력의 공기 
하루에 20건을 처리한다는 가정 법원, 판사는 분주한 걸음으로 법정에 들어선다. 법정이라야,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남편이었던 앙투완(데니스 메노체트 분), 그의 아내였던 미리암(레아 드루케 분)과 그들의 변호사들이다.  집착과 폭력으로 인해 이혼한 부부, 현재 엄마와 함께 살고있는 아이들, 그 아이들의 면접권을 조정하기 위해 부부는 한 자리에 앉았다. 큰 딸 조세핀(마틸드 오드뵈 분)은 18세를 지나 더 이상 아버지를 만나야 할 의무가 없지만, 이제 열 살인 아들 줄리앙(토미 지오리아 분)이 문제이다. 

판사가 꺼내든 편지 한 장, 그곳엔 줄리앙의 친필로 아버지 앙투완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사연이 적혀있다.  엄마에게 폭력적이었던 아버지, 학원을 빼먹었다고 딸의 손목을 꺾어버린 아버지, 심지어 이혼 후 먼저 살던 곳을 떠나 외갓집으로 옮겨 왔는데,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그곳으로 옮겨와 그 주변에서 서성이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아들 줄리앙은 만나고 싶지 않다 구구절절 하소연한다. 

하지만 아들의 편지에 대해 남편 측 변호사는 목소리를 높인다. 엄마와 함께 사는 아들, 충분히 엄마나 그 주변 어른들에 의해 강요되거나 생각이 주입될 수 있다고. 그리고 아버지는 엄마에게 집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보고 싶어 직장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두 자녀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서툴렀을 뿐, 결코 폭력적이지 않으며, 아들을 몹시 보고 싶어한다고. 

이에 대해 엄마 측 변호사는 항변했지만, 두 변호사의 공방전만으로 판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결국 법적인 권리에 따라 아빠는 2주에 한번 아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아들을 데리러 외갓집으로 온 아버지, 아들은 그런 아빠를 따라가기 싫어 누워있고, 엄마는 아들이 배가 아프다며 전화를 한다. 하지만 결국 그럴 경우 법적인 불이익에 처해질 수도 있다는 아버지의 반 협박에,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아빠 차에 오른다. 그렇게 시작된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 

 
아직 끝나지 않았다 ⓒ 판시네마
아직 끝나지 않았다 ⓒ 판시네마
 

부부가 이혼을 하고, 아빠가 법으로 정해진 권리에 따라 아들을 만난다는 이 권리의 시간,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바로 이런 '평범한 만남' 자체가 '공포'이자 '스릴러'가 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들이 마지못해 아빠 차에 타고, 그렇게 아빠와 떠나가는 아들을 엄마와 딸은 숨죽이며 창문에 숨어 지켜보고, 아빠의 다그치는 질문에 마지못해 아들은 대답을 하고, 그 일상적인 이혼 부부와 그 아이들의 관계가 품은 함의, '폭력'이 공기처럼 온통 영화를 감싼다. 마치 단 한 대의 곤장만으로도 죄인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었다는 그 옛날 우화처럼. 실행된 폭력의 결과가 아니라, 폭력을 자아낼 수도 있는 그 상황이 이 가족을 휩싼다. 

그 어떤 공포 스릴러 못지 않게 그 '공기'가 주는 긴장감이 정말 관객들을 객석에 붙잡아 둔다. 그리고 그를 통해 관객이 깨닫게 된 것은 법정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어떤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저 일상을 짖누르는 '폭력의 공기', 그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분명하게 말한다. '폭력적 사건'이 폭력이 아니라, 바로 '폭력'을 예감하고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이 '공기' 자체가 폭력이라고. 바로 이것이 '가정 폭력'의 실체라고. 

가정, 사적이어서 위험한 관계 
사회의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 하지만 부부와 자녀들로 이루어진 관계는 하지만 '사적 영역'으로 취급된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위계와 관계들로 인해 빚어지는 문제들은 그 문제들이 '사건'이 되기 전에는 '법적'인 조치나 보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 '내', '나의'라는 소유격의 문제이다. 내 아내, 내 아이들이라는 '나의 영역'에 해당되는 인식들이 '폭력'의 원인이 된다. 거기서 문제를 발생하는 건, 대부분 지금까지 인류 사회에서 면면히 잔존해온 '가부장제'의 잔해들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서 아버지 앙투완은 이미 이혼을 한 사이임에도 여전히 아내와 아이들을 '나'의 영역 속에서 풀어놓지 않는다.  여전히 나의 아내이기에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관심을 놓지 못한다. 아들을 핑계댔지만 친정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긴 아내를 따라 자신 역시 직장을 옮겼다. 아내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그 주변을 서성인다. 아들을 사랑해서 만나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아들의 노트를 뒤지고, 아들을 윽박질러서 알아내려 하는 건 현재 아내의 거처요, 동정이다. 그의 분노는 바로 이런 '내 것'을 빼앗겼다는, '내 것'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상실'에서 비롯된다. 

아들은 그래서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다.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아빠는 우연히 부모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알게 된 친정이 아닌 이사간 동네를 알게 되면서 폭발한다. 아들을 윽박지르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폭력, 아니 폭력적 분위기의 강요로 인해 지금 살고있는 동네로 아버지를 인도한다. 하지만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한 아들의 기지는 잘못된 주소를 가르쳐 주는 것. 아들에게서 뺏은 열쇠로 다른 집의 벨를 누르는 순간, 아들은 도망친다. 그러나 도망치는 것도 잠시, 결국은 회유하는 아버지로 인해 다시 돌아온 아들, 결국 진짜 집 주소를 '토로'하고 만다. 자기 자신, 그리고 엄마를 어른인, 다른 사람도 아닌 아빠 앞에서 지키기에 얼마나 무기력한 지 영화는 고스란히 보여준다. 반면 아빠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폭력적 분위기의 조성에서부터, 회유와 협박, 보호자가 돌변한 가정이라는 위계 질서가 가진 '노골적인 폭력성'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 판시네마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판사의 상투적인 결정, 그것은 결국 모자를 생명의 위기에 빠지게 만든다. 아들을 보고싶다는 아버지의 읍소는 아들을 이용해 '나의 아내'에게 다가갈 빌미가 되고, 그런 상황에서 열 살 소년의 자기 방어적 '거짓말'은 역부족이다. 결국 아들을 통해 아내의 집을 알고, 그 집에 들이닥쳤던 남편은 일을 저질러 버리고 만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아내와 아들, 이 모자의 위기는 어디서 부터 해명되어야 할까? 판사의 안이한 결정? 폭력적인 가부장에 대한 사회적 제재의 미봉책? 가부장의 인식적 한계? 우리 사회에서 최근 드러나고 있는 가정 폭력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사건'이 나기 전까지는 '집안 문제'에 불과한 가정 폭력,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공포스럽고, 스릴러물보다도 보는 이를 경악스럽게 만드는 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상황', 그는 결코 '개인적 관계'의 문제로 치부될 수 없다는 것을 영화는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형'을 청원한 우리 사회 사건에서도 보여지듯이 관계가 존재하는 한 쉬이 마무리되기 힘들다는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잡혀간 엔딩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제목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이다. 

by meditator 2018. 11. 7. 04:14

4일 배우 신성일 씨가 폐암으로 별세했다. 1962년 첫 주연작 <아낌없이 주련다>를 시작으로 주연작만 506편, 그가 출연했던 작품들은 그대로 한국 영화사가 되었으며, 그와 함께한 감독과 배우들은 그대로 한국 영화사를 쓴 주인공들이었다. 즉, 신성일의 이력이 곧 한국 영화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족적을 남긴 배우, 그의 영전에는 같은 시대 활동했던 송해 선생을 비롯하여, 신영균, 최불암, 이순재, 안성기, 문희, 이창동, 조인성 등 다수의 영화계 동료, 후배들이 다녀갔고, 영화인장으로 엄수될 예정이다. 또한 한때 정치에 몸담았던 그의 경력답게 이회창, 김병준, 유승민 등 유력한 정치인들이 조문을 했다. 

하지만 한때 은막을, 아니 한국 영화사를 대표했던 배우였지만, 말년에 대중들에게 각인된 신성일 씨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아내인 엄앵란 씨의 아침 방송 가쉽거리였고, 그 가쉽을 본인의 인터뷰를 통해 확산시켜 노배우의 말년을 일그러뜨렸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영화에 대한 애착이 무색하게 덕분에 2013년 출연한 작품은 노년의 열정이 아니라 조롱거리가 되었다. 대중들에게 한때를 풍미했던 아티스트가 아니라 어느덧 '가쉽'이 되어버린 스타, 인터뷰어 지승호 씨가 신성일씨의 진솔한 목소리를 옮긴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를 통해 소모된 이미지가 아닌 진정한 영화인 신성일을 알아보자. 

 

 

호떡 장수 청년 라이징 스타로 떠오르다. 
대구시 중구 인교동 한옥 마을에서 태어났다. 공무원이던 홀어머니 밑에서 '애비없다는 소리듣지 말고 얼굴값 하라'는 소리를 들으며 당시 명문 경북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대로였다면 서울대를 갔었을 거라는 시절, 하지만 어머니가 계가 깨져 야반도주를 하고 대구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던 청년 신성일을 혈혈단신 서울로 상경했다. 

대학에도 떨어지고 호떡 장사를 하던 시절, 어머니는 부끄러워 하셨지만 노배우는 그 시절을 '주위 눈치보지 않고 나를 키워 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르던 시절이라 회고한다. 가수가 된 동향 친구가 자신을 무시한 채 지나가버리자 '자존심'이 센 청년은 '너보다 잘 난 내가'하며 눈 앞에 띈 '한국 배우 전문학원'을 다짜고짜 찾았다. 그곳에서 이제는 누렇게 빛바랜 그의 50년 보물 양광남 감독이 처음으로 번역한 스타니슬랍스키의 <배우수업>을 얻었고, 김기영, 김수용 등 당대 최고 감독들에게 배움을 얻었다. 꿈이 원대했던 청년은 엑스트라 배우를 전전하는 대신 당당하게 2640명이 몰린 신상옥 감독의 신필림 신인 배우 모집을 찾아갔고, 대번에 신감독에게 '나하고 함께 일해보자'는 소리를 듣고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신감독의 성까지 받아, 뉴스타 넘버원이라는 말을 풀어 새로울 신, 스타별 성, 넘버원 한 일이라는 예명까지 지어받은 신인 배우 신성일의 시작이 첨부터 떠오르지는 않았다. 30kg이 넘는 자동차 배터리를 들어나르며 현장을 전전했고, 감독님 책상 옆 전화 받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승마와 검도로 몸을 만들며 때를 기다렸고,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은희 배우 중심의 신필름의 시스템에서 젊은 배우 신성일의 자리는 드물었다. 그러던 중 이제 중년에 접어든 김진규, 최무룡을 대신할 젊은 배우를 찾던 극동 흥업의 대본을 보고, 그는 따귀 한 대를 맞고 기꺼이 군 입대전 마지막 배수진으로 이 작품을 택했다. 그리고 드디어  1962년 당시 인기있던 라디오 드라마를 영화화한 <아낌없이 주련다>를 통해 라이징 청춘 스타로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이어 일본판 <에덴의 동쪽>이라 할 수 있는 대중 소설의 한국판 <가정교사>에 출연했고, 64년 드디어 당시 6대 신문이 입을 모아 '새로운 배우'의 탄생을 알렸던 <맨발의 청춘>에 출연, 최고의 청춘 스타가 되었다. 

배우 신성일의 시대 60년대
60년대는 한 해 200여 편이 넘게 영화가 만들어지던 영화의 전성기였다. 해방, 6.25. 4.19, 5.16의 격동기를 거친 대중들, 라디오 말고는 이렇다할 오락 거리가 없던 그 시대에 잘 생기고 이쁜 남녀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는 열광할 만한 것이었다. 냉난방은 커녕, 화장실에선 악취가 나고, 찢어지지 않은 의자가 드물었고, 화면에서는 비가 오듯 줄이 죽죽 갔지만 사람들은 극장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대표적 언론이었던 조선일보는 1960년 태평로 사옥이 있던 옆에 아카데미 극장을 열었다. 당시 극장과는 차별된 분위기에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그런 젊은 관객들의 취향에 맞춰 개봉된 영화가 바로 <맨발의 청춘>이었다. 불과 18일만에 만들어졌던 이 영화로 인해 당시 조선일보가 제정한 청룡 영화상, 신문에 인쇄된 배우의 사진을 오려 엽서에 붙여 응모해야 했던 인기상에서 두 주연배우 신성일, 엄앵란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고, 그  10년 뒤인 1973년까지 인기상은 배우 신성일의 몫이었다. 그렇게 그 10년은 스타 신성일의 시대였다. 

 

 

1965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 단편 소설 당선작이었던 <흑맥>으로 이만희 감독을 만난다. 그리고 다음 해 <만추>를 하게 되는데, 신성일은 이만희 감독을 머릿 속에 콘티가 다 들어있는 훌륭한 감독이라 평하며, <만추>는 구성, 배우들의 연기, 작품의 짜임새, 영상, 연출 기법에 있어서 완벽에 가까운 그가 출연했던 작품 중 최고의 예술작품이었다 회고한다. 

1967년에  47편, 67년에 51편 등 다작을 하는 가운데 <안개>, 신춘 문예 당선작 <무진 기행> 등을 컷백(cut back) 기법 등 새로운 연출 기법을 도입한 김수용 감독과 함께 한다.  개정된 영화법으로 우수 작품을 제작하면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져 너도 나도 '문예 작품'을 영화화하던 시절, 신성일은 황순원, 김동인, 심훈 등 한국 문학 전집에 나오는 소설가들의 작품 모두의 주인공이 되었다. 

1970년대 '반공'이 국시가 되며 '반공 영화'의 의무 제작 등 사회적 분위기에 짖눌리고 거기에 더해 외국 영화 쿼터제와 엄격한 검열로 전체적인 질적 저하를 가져오며, 검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호스티스' 영화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67년 <별들의 고향>, 1977년 <겨울 여자>로 46만명, 58만명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지만,1976년 134편 제작 영화 중 7편, 77년 9편, 78년 4편 등으로 신성일이 출연한 영화는 급격하게 줄어들며 배우 신성일의 시대는 저물어 갔다. 

 

 

 


 출연할 영화도 마땅치 않았고, 영화 정책에 대한 그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풀려했지만, 아내 엄앵란의 만류로 제작, 감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1971년 3편을 72년 한 편을 감독했고, 그러나 결국 '강신성일'로 세 번 출마, 그중 한번 당선되었지만, 결국 뇌물 수수 혐의로 실형을 사는 '오욕'으로 끝나고 만다. 

배우 신성일, 그의 연기
배우 신성일이 말하는 연기론, 그가 든 자신의 첫 번 째 덕목은 '자기 관리'이다. 안타깝게도 말년의 그가 가쉽성 스캔들로 소비되었지만, 한참 활동할 당시에는 이렇다할 스캔들이 없었다. 아니, 스캔들이 날 시간이 없었다는 게 정확하달까. 한 해에 수십 편이 만들어 지던 시대,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작품이 동시에 진행되어야만 했다. 24시간을 4등분해서 어떤 날을 8편을 찍기도 하면서 10년 이상을 보냈다. 차에서 다음 촬영 현장까지 쪽잠을 자던 시간이 가장 달콤했다던, 그는 그 시대의 여느 아버지들처럼 '일'을 하며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건 일찌기 배우 학원 시절부터 단련했던 체력 관리. 몸 관리였다. 최무룡, 김진규 등 이미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형성되어 있던 60년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던 그의 경쟁력은 젊음, 그리고 단련된 몸이었다. 알랭 들롱이나, 제임스 딘같은 되고 싶었던 그는, 걸음걸이부터 고치는 등 그에 걸맞는 몸을 만들었고, 돋보이는 패션에 만들어 당대 최고의 '무비 스타'가 되었다. 젊은 시절뿐만이 아니었다. 82년 임권택 감독과 함께 한 <길소뜸> 촬영 당시에는 운동만으로 82kg에서 68kg으로 감량을 해냈다. 

 

 

대종상 연기상과는 인연이 없었던 것을 자신의 목소리로 연기한 <이상의 날개>로 남우 주연상을 타고, 이후 <길소뜸>, <위기의 여자>, <레테의 연가> 등에서 계속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을 하여 '더빙 시대'의 스타라는 한계를 넘어섰다. 

또한 청춘 스타로 출발했지만, 60년대 후반 문예 영화로, 다시 <내시> 등의 사극으로 액션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로의 변신을 거듭했다. 이에 대해 신성일 씨는 '나 대로 신성일을 가지고 있'되, 작품의 패턴이 바뀔 때마다 내 몸을 그 속에 던져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고 회고한다. 이를 위해 나이가 들어서도 당당한 모습이었듯 늘 긴장하며 사는 삶을 늦추지 않았다 자부했다. 

 

 

 



무엇보다 베스트 셀러이자, 스테디 셀러인 배우가 되었던 이유를 신성일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신뢰'에서 찾는다. 신상옥 감독의 68년작 <내시>, 영화 속 윤정희의 노출 장면으로 법정에 까지 서게 되었다. 이 영화의 출연자에는 남궁원, 박노식 등이 있었지만 신상옥 감독과 함께 법정에 출두한 사람은 신성일 씨가 유일했다. 또한 감독이 시켜서가 아니라 작품 해석에 따라 노출을 감행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소신있는 배우이기도 했다. 맹장 수술, 한여름 땡볕에 액션씬을 찍다 쓰러지고 며칠, 신인 시절 깁스를 한 때를 빼고 그는 폭탄이 터져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던 미련스레 성실한 배우였다.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일하는 것이 행복했던, 그리고 후시 녹음이라는 당시의 영화 현장의 특성으로 인해 몇 작품을 함께 촬영하며 다작의 전성기를 보냈던 신성일, 하지만 자신들과 같은 선배 영화인들의 전례가 '노예 문서'가 되어 후배들의 환경에 족쇄가 되는 모습을 보고,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다작을 하지는 않겠다 토로한다. 

호떡 장수를 하면서도 당당하던 청년, 스텝이나 다름없는 영화사 시절에도 미래의 배우를 준비하던 신인 배우는 그후로 6,7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가 되었다.  시대를 냉철히 분석하고, 그 시절의 영화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내리고, 감독과 배우들에 대해 애정을 놓치지 않던 배우, 하지만 치욕으로 남은 정치인 생활, 그는 후배 영화인들 중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며 아쉬워하는 노년을 보냈고 이제 유명을 달리했다. 박찬욱 감독 말처럼 프랑스의 알랭 들롱이나, 미국의 그레고리 펙, 이탈리아의 마스트로얀니 같다는 신성일, 하지만 우리는 고인을 과연 저들 외국의 배우들만큼 '스타'로, '배우'로, '아티스트'로 인정하고 대접했을까? 그의 인터뷰를 통해 진솔하고 성실했던 배우 신성일의 존재를 되살리는 것으로  '추모의 념'을 대신하는 건 어떨까. 

by meditator 2018. 11. 6. 05:08

이 영화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저 여느 모녀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모녀가 살아왔던 삶의 궤적이자, 동시에 모녀가 살아왔던 세상의 이야기이고, 활동가였던 모녀가 gmo에 대항하여 싸워왔던 투쟁의 기록이다. 

 

 

gmo 세상, 그 기록의 시작 
그 시작은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모습을 담은 홈비디오에서 시작된다. 엄마의 정원을 위태로운 걸음으로 누비는 아기, 갓 수확한 콩깍지의 콩을 맛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유독 먹을 것을 좋아하던 아기는 그렇게 '식료품점'이라는 뒤뜰 정원에서 엄마가 기른 맛난 재료들로 만든 풍성한 음식들을 먹으며 자라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음식을 좋아하고 그래서 만들기를 좋아하던 아이는 음식을 만드는 블로그를 꾸리고 그 영상을 만들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그 재료가 문제였다. 엄마는 수천년 동안 우리의 농부들이 그래왔듯이 뒤뜰 정원에서 한 해 동안 키워낸 농산물의 씨앗을 저장하여 다음 해 농사를 지어왔다. 하지만 도시로 나온 딸이 만난 재료들은 어머니가 키웠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에게로 왔다. 그 수상한 식재료의 의문이 어머니가 보내주신 gmo 관련 서적에서 풀려나갔다. 

1956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사회 정의에 앞장섰으며 환경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딸이 태어난 이후에는 유기농 농사일을 하셨다. 하지만 여전히 엄마의 레이더는 세상을 향해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 열려진 레이더에서 발사한 날카로운 비판의 전파는 고스란히 딸에게 전달되었고, 그 어머니의 그 딸은 그걸 기록했다. 

1996년 캐나다에 처음으로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 변형 생물)가 도입되었을 때부터 어머니는 반대을 하셨다. 그 이유는 뒤뜰에서 수확한 씨앗과 달리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씨앗이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gmo, 유전자 조작의 책임질 수 없는 결과 
그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딸인 오브 지룩스 감독은 우선 gmo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전문가 들을 찾아 나선다. 대표적인 gmo 농산물에는 옥수수, 콩 등 가공 식품의 70 % 이상을 차지하는 식물군들이다. 이들은 곤충과 잡초에 잘 견디는 제초제에 내성이 있거나, 살충 물질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유전자를 변형시킨다. 즉 결국은 유전자를 변형한 이들 식물들로 인해 농사는 보다 용이해지고, 각종 병해로 부터 안전해지고, 많은 수확량을 낼 수 있다는 것이 gmo 농산물을 확산시키는 쪽의 입장이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건 바로 GMO의 다면 발현성 효과이다. 즉 우리의 과학 기술은 아직 GMO가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예측 불가능한 결과에 대해 정확한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실험실에서야 콩에 돼지 유전자를 결합하든 어떻게 하든 얼마든지 새로운 그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그걸 먹이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반대자들은 주장한다. 이런 무리한 유전자의 변형이 심각하게는 우리 인간 생명체 고유의 유전적 특징을 변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장기적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은 발암 물질로 판명된 글리포세이트처럼. 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낼 이 GMO에 대해 소비자들의 주장은 기본적이다. 자신들에게 GMO에 대한 선택권을 달라는 것이다. 즉 대부분 가공 식품의 재료가 되는 GMO, 자신들이 사는 물건들에 GMO가 들어있는지 알고 선택할 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GMO를 도입한 정부 등은 그런 '알 권리'가 대중들 사이에 외려 있지도 않은 공포를 조성한다며 GMO 사용 여부 공개를 반대해 왔다. 

GMO와 관련된 국제 기구의 53개 권고 사항 조차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않은 미국과 캐나다가 GMO 표시제에 대해 완고한 반대의 입장을 고수한 반면, 2000년대 광우병 사태를 겪은 유럽은 그 여파로 분위기가 달랐다.  프랑스에서는 발바리안 농부들의 시위를 기점으로 gmo 표시제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를 확산해 갔으며 그건 딸의 영상에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는다. 11살의 나이로 '아이들의 알권리'라는 단체를 만들어 자신들이 먹는 음식에 알 권리를 주장하는 사회 운동을 벌인 미국 소녀 레이첼이 어른이 될 때까지의 활동도 담겼다. 모유에서 검출된 글리포세이트(제초제의 한 종류)에 분노하여 EPA(미국 환경 보호청) 앞에서 시위하는 1만명의 엄마들도 취재했다. 오브 지룩스 감독의 <조작된 밥상>은  캐나다와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 벌어진 GMO 반대 운동의 10년을 꾸준히 담아낸다. 

오브 감독의 어머니처럼 해마다 자신이 기른 농산물 중에 씨앗을 저장하여 다음 해 농사를 짓던 농가들은 다국적 종자 기업과 그에 기반한 정책에 의거 대량 생산을 빌미로 gmo 씨앗을 '기술 사용 동의서' 등을 빌미 삼아 기르도록 강제된다. 이런 압박에 버티며 전래의 품종을 고수하려는 소규모 농가는 점점 발을 붙이기 힘들게 된다. 결국 수 마일에 걸친 옥수수 밭으로 상징되는 농촌 사회의 붕괴, 생물 다양성의 파괴만이 오늘날 대부분의 농촌의 모습이다.

오브 감독이 찾아나선 양봉 농가, 놀라운 것은  gmo 종자를 이용해 농사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키우던 벌이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수집한 꿀에서 gmo 성분이 발견된 것. 즉 유기농 농사를 짓는다 해도 주변 농장에서 gmo 작물을 키운다면 얼마든지 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벌의 활동을 통해 보여준다. 이런 오브 감독의 추측은 뜻밖에도 감독의 어머니에게서 '비극적' 결과로 도출된다. 평생 유기농 정원을 꾸려 그곳에서 난 건강한 식단만을 고집해오신 어머니,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뇌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었다. 감독은 안타까워한다. 어머니는 유기농을 고집하셨지만, 어머니의 주변 농장들로 부터 날아온 gmo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또한 암은 어머니가 유기농 농사를 시작하기 이전 2~30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발병의 원인을 가질 수도 있음을. 지룩스 감독 어머니의 비극은 결국 우리는 그 누구도 gmo의 영향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아이러니한 것은 이른바 '대량 생산'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종자라 선전해댔던 GMO 종자가 '자연의 위대한 저력'으로 인해 좌초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로 제초제 등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 저비용의 장점을 강조했던 GMO.  이른바 유전자 조작을 통한 잡초 제거 프로그램은 유전자 조작조차 저항해내는 잡초와 병충해들로 인해 오히려 그 전 보다 더 강력하고 많은 비료 등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고비용'의 농산물이 되었음을 <조작된 밥상>은 보여준다. 

거기에 더해 gmo 농산물을 고집하는 측에서는 gmo 농산물이 다수의 인구를 기아로 부터 구해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계 각국에서 지룩스 감독의 어머니처럼 뒤뜰 식품점을 통해 '먹거리'를 생산해 내는 '소농'이 세계적 생산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반전의 사실도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10년의 기록, 빛나는 성취는 아니지만 
영화 속 지룩스 감독은 영화가 진행되는 그 10년 동안 꾸준히 캐나다 정부와 통화를 시도한다. 그 내용은 캐나다 정부에서 공인한 GMO에 대해 과연 책임감있는 답변을 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한 이래, 끝날 때까지 그 10년 동안 일관되게 캐나다 정부는 대답을 회피한다. 

캐나다만이 아니다. 2016년 미국의 버몬트 주에서는 미국내 최초로 GMO 라벨을 붙이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시민들이 깨어가는 과정만큼이나 몬산토 등 거대 기업의 자본을 통한 로비는 치열하고 집요했다. 덕분에 우세하던 입장은 결국 거대 기업이 장악한 미디어의 광고 등을 통해 매번 현혹되고 몇 년에 걸친 시도 끝에 어렵사리 민주주의적 성취를 이뤄냈다. 그러나 어둠의 힘은 결국 이 결정을 뒤집고 만다. 

<조작된 밥상>이 귀결되는 곳은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이다. 제인 구달은 결국 이런 gmo의 문제가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즉 거대 기업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정책, 돈의 논리에 따라 결정되는 국민의 생명권이 전혀 미래 세대를 고려치 않는 현실을 과연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거대 기업의 이익을 대표하는 이들이 과연 우리의 대표자인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10년을 경과하며 64개국에서 GMO 표시제가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버몬트 주의 결정이 뒤집혀 지듯이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아직 자신들이 먹는 먹거리의 실체를 알 수 없다.  

또한 문화의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것을 생산하자는 GMO 농산물의 수확이 과연 '인간적'이냐고 묻는다. 저비용도 아니고, 몇 가지의 획일적 품종 생산으로 다품종의 풍성한 농사 체계를 망가뜨리고, 나아가 농촌 사회를 해체시키고, 유기농조차 여의치않은 '금권'의 제국이 되어버린 전세계의 GMO 생산 체제, 그곳에  '인간'이 낄 여지는 없다는 것을 발로 뛰는 '취재'를 통해 밝혀낸다. 

감독이 영화를 완성하기 전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의 딸처럼 커다란 안경을 쓰고 어린 딸들과 함께 유쾌하게 정원을 가꾸시던 싱그러운 젊음의 어머니, 그 어머니는 결국 암으로 사랑하던 자신의 정원을 떠났다. 그러나 어머니의 정원에서 키운 노란 완두콩으로 엄마의 레시피에 따라 만들어진 스프를 통해 어머니의 존재는 되살아나고, 어머니와 딸은 이어진다. 누구든 음식에 대해 알 권리가 있으며 이를 위해 기꺼이 싸워야 한다던 어머니 잘리 지로, 그녀의 유지는 아직 미완의 투쟁이지만 중단없는 여정이었던 10년의 기록을 통해 '모전 여전'을 증명해 낸다. 그렇게 조작된 밥상은 어머니와 딸의 중단없는 싸움의 기록이자, 전세계 GMO 반대 투쟁의 기록이다. 지난한 싸움은 이렇게 같은 곳을 바라본 모녀로 부터 시작되었다. 



by meditator 2018. 11. 3. 06:23

미디어 콘텐츠 산업의 발전은 그 '정점'에 놓인 '스타'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한다. 1937년부터 만들어 지기 시작한 <스타 탄생>은 거듭된 리메이크 작을 통해 '그들의 영광과 그림자'를 반추한다. 1954년, 1976년, 그리고 드디어 2018년 명멸하는 한 쌍의 스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스타로써의 삶은 마치 축약된 인생과도 같다. 제 아무리 발버둥쳐도 인생이 '생로병사'의 그래프를 벗어나지 못하듯이, '스타'의 길 역시 길고 짧은 차이일 뿐 그 궤적을 벗어나지 못한다. 대중들은 '스타'를 상품으로 '소비'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로운 상품에 눈을 빼앗긴다. 정점에서 벗어난 길에 놓여진 스타는 그것이 그로 부터 비롯되었던지, 아니면 대중의 변덕이었던지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짊어진 채 나머지 길을 하산해야 한다. 

엇갈린 영광의 여정
1937년작 윌리엄 웰만 감독이 당대 최고 배우였던 자넷 제이슨, 프레데릭 마치와 함께 만든 <스타 탄생>이래 영화는 그 정점의 고갯마루를 달리 오르내리게 된 '비극의 연인'을 한 이야기 속에 담는다. 

 

 

한 편의 뮤지컬과도 같았던 1954년작 <스타 탄생>은 당대 최고의 뮤지컬 배우였던 주디 갈란드의 노래와 춤으로 충만한, 말 그대로 당대 최고 뮤지션의 빛나는 무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기억되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에버 그린' 등으로 추억되는 1976년작에서도 이어진다. 그리고 2018년 역시나 최고의 뮤지션인 레이디 가가가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화려하면서도 센세이셔널한 아이디어와 분장, 패션으로 늘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레이디 가가가 그녀를 가렸던 메이크업을 지운 채 외모에 자신이 없는 무명 가수 엘리를 연기한다. 

하지만 '탄생'되어지는 스타의 맞은 편엔 그녀를 '스타'로 만들며 져가는 또 다른 '스타'가 있다.  1대의 프레데릭 마치에 이어, 제임스 메이슨은 배우로, 그리고 70년대의 컨트리 스타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그 뒤를 이어 2018년 <스타 이즈 본>으로 감독 데뷔한 브래들리 쿠퍼의 잭슨 메인이 몰락해 가는 팝스타를 열연한다. 

열화와 같은 관중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무대를 장식한 톱가수 잭슨, 하지만 공연이 끝나자 마자 그를 '허기'를 채우듯 '술'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그러다 급하게 들어간 조그만 바, 그곳에서는 남장 여자들이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 유일한 여성이 한 명 무대에 올라 '장미빛 인생'을 부르고 잭슨은 그녀의 노래에 빠져든다.

그리고 함께 한 시간, 잭슨은 재능이 넘치는 엘리로 인해 마모되어 가던 열정이 되살아 나고 , 그리고 무대가 아닌 곳에서도 스타로 소비되는 잭슨에 대해 엘리는 연민을 가지며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엘리에게 자신과 함께 무대에 서줄 것을 청하는 잭슨, 엘리는 그런 잭슨의 청이 그저 스타의 농담처럼 여겼지만 결국 집요한 잭슨으로 인해 무대에 올라 그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스타 탄생'을 알린다. 

 

 

짧은 영광, 긴 그림자 
일취월장 잭슨과 함께 한 엘리에서, 이제 팝가수로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휘날리기 시작하는 엘리, 하지만 그런 엘리의 곁에서 잭슨은 허물어져 간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온 오디오의 소리에 매료되어 그 속에 머리를 집어 넣었던 것이 그만 치명적인 장애가 되어 청력의 이상을 느낀지 오래, 의사는 그에게 큰 소리를 멀리 하고 보조 장치를 장착할 것을 처방하지만, 섬세한 음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잭슨은 이를 거부한다. 환청처럼 그를 괴롭히는 이명을 벗어나기 위해 그가 의지한 건 술, 아니 비단 신체적 장애만이 아니다. 

자신을 낳고 죽은 엄마, 일찌기 술주정뱅이였던 무능력한 아버지, 심지어 자신의 자살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삶의 방관자였던 아버지,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음악적 인생을 접은 형, 그리고 그 어느 곳에서도 '잭슨'이라는 인간보다 스타로 소모되어져야 하는 일상 들이 그를 어느덧 술이 없으면 단 한 순간도 버틸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엘리의 등장은 잠시 그를 맑게 만들었지만, 허물어져 가는 그를 '사랑'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앞서의 <스타 탄생>, 그리고 2018년작 <스타 이즈 본>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 영화는 당대 최고의 여성 아티스트를 내세우며 한 무명의 여성 가수가 재능의 힘으로 정상의 자리에 등극하는 과정을 그러낸다. 그에 덧붙여 배우 브래들리 쿠퍼가 연출한 2018년작은 몰락하는 팝스타 잭슨 메인에 또 다른 방점이 찍힌다. 

 

 

29살 이후 '태업'이라며 금주를 실천하고 있지만, 쉽게 나아지지 않았던 초창기 시절 약물 중독과 우울증으로 자살 시도까지 했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 허물어져 내리는 잭슨 메인의 '자아 상실'의 과정이 절절하게 그려진다. 잭슨은 무대에 서면 수만 관중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스타이고, 홀로 거리의 술집에 들어서는 것조차 쉽지 않은 '개인'의 삶을 저당잡힌 인기인이다. 대중들은 그의 음악을 사랑하지만 무너져 가는 그에 대해서는 냉정하다. 

지난 일요일 sbs를 통해 방영된 <아이돌이 사는 세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무대를 내려온 '별'들을 기다리는 건 개인으로서의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삶일 뿐이다. 자신을 만났음에도, 아니 만난 이후로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져 간 잭슨에 대해, 그리고 결국은 엘리에게 부담만이 된 자신을 견딜 수 없어 최악의 선택을 한 잭슨으로 인해 엘리는 고통받는다. 그런 엘리를 찾아온 잭슨의 형은 덤덤하게 말한다. 잭슨이 가고 없는데도 잭슨을 추모하는 음악이 거리에 울려퍼질 때 화가 났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 그렇게라도 기억될 잭슨이라니 헛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지만 잭슨 개인으로 보자면 그의 삶은 사는 내내 그를 괴롭혔던 아버지, 그리고 부담이 되었던 형, 그리고 애증이었던 엘리 그 누구도 아닌 잭슨의 책임이라 위로한다. 결국 관객은 스스로 되묻게 된다. 음악으로만 남은 잭슨의 인생을. 

사실 브래들리 쿠퍼와 레이디 가가가 보여준 이른바 '케미'와 별개로, 두 사람이 연민처럼 시작한 사랑은 끄덕여졌지만, 끝끝내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는 잭슨에 대한 엘리의 사랑은 곡진했지만 헐거웠다. 외려 <스타 이즈 본>이 보여준 건, 영광의 자리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채 좌초한 잭슨이라는 스타와, 무명 가수에서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파고를 넘어서 스타로 거듭나는 엘리라는 캐릭터가 보여준 '인간'의 모습이다.  

by meditator 2018. 10. 31. 20:36

<웰컴 삼바>는 앎에 대한 영화다. 앎이라니 새삼스럽다고.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난민 문제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과연 우리는 그들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알고자 하는가에 질문, 그 기저에 있는 물음을 담고 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희노애락을 가진 '인간'일 뿐이라고 그리고 영화는 답한다. 

 

 

난민 문제를 접한 아들 녀석이 답답해 한다. 이 문제에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데올로기적 자신의 편을 넘어 진지하게 '그들'의 존재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라고.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그렇듯, 난민 문제 역시 문제의 대상이 된 '그들'에 대한 앎 이전에, 나의, 우리의 이데올로기가 앞서가버린 사안이 됐다. 그래서 '이해'의 실마리조차 놓쳐버린 상황, 이 즈음에 <웰컴 삼바>는 그 '이해'의 실타래를 풀기 위한 적절한 도움닫이가 될 듯하다. 

호모 사피엔스, 그 본연의 '난민성' 
인간은 척색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에 속하는 생물로 그 중에서도 200여 종에 이르는 영장목의 한 종인 호모 사피엔스 한 종에서 유래되었다. 대략 1만~ 160만년전 지구에 빙하가 출몰했던 홍적세, 평균 1300㎤의 뇌용적, 거의 수직인 이마 모양, 목근육이 붙은 면적이 비교적 작은 후두부, 작은 크기의 턱과 이빨, 주걱 모양의 작은 송곳니, 튀어나온 턱끝, 완전한 직립 자세와 보행 자세에 적응한 사지 등을 특징으로 한 유일한 동종의 동물이다. 

그런데 이 '호모 사피엔스'는 '난민'이다. 시작은 아프리카였지만, 그의 발길은 '지구'라는 땅덩이를 헤집고 다녔다. 가는 곳곳에서 동류의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등의 같은 영장목은 물론, 아메리카의 버팔로, 모리셔스의 도도새 등을 멸종으로 이끌며 지구별의 주인으로 거듭났다. 과연 호모 사피엔스의 거칠것없는 ''역마살'이 없었더라면 지금 인류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카누와 같은 나무배에 의지하여 인도양을 넘는 호모 사피엔스의 '도전 정신'은 그 시절에는 신대륙의 정복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에 이르러 대서양의 '보트 피플', 그리고 난민으로 이어진다. 같은 행위, 다른 결과, 거기엔 '근대의 산물'인 이른바 '국민 국가'가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신봉하는 이 '국가'라는 경계 역시 사실은 '역사'의 산물일 뿐이다. 천년의 역사를 가졌던 로마가 남하하는 게르만 족에게 역사의 자리를 내어주듯이 오늘날 우리가 신봉하는 국가, 국가의 경계라는 것이 결코 고정불변의 가치나 영역이 아니라는 전제를 통해 우리는 '난민 호모 사피엔스'의 종적 개념에 한 발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난민 삼바 
'난민'의 시작은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종교적, 혹은 지역 분쟁, 오랜 가뭄 등의 자연 재해, 하지만 위에서 구구절절 말한 것처럼 '인류의 역사'는 곧 '유동성'의 역사이다. 그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늘 자신이 보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난다. <웰컴 삼바>도 그랬다. 삼바(오마르 사이 분)의 꿈은 자신의 나라 세네갈 호숫가에 집을 지어 평안하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평안'을 위해 그는 지금 이국 프랑스에서 '난민'의 신세로 단속을 피해 10년의 세월을 살아왔다. 아직 집을 짓기엔 이르다. 여전히 고향에는 그에게 돈을 보내라는 독촉 전화를 하는 가족이 있다. 우리가 사는 여느 삶과 다르지 않다. 그게 세네갈에서 프랑스로 옮겨져 왔을 뿐이다. 

하지만 미처 집을 지을 돈을 마련하기도 전에, 아니 프랑스 영주권을 받기도 전에 아뿔사 그만 '단속'에 걸렸다. 10년이나 프랑스에 있었고, 셰프로 일했던 경력이 무색하게 그는 '추방' 위기에 놓인다. 더구나 10년이나 있었지만 삼촌 외에는 일가를 이루지 않았다는 것이 그에게 불리한 조건이 되었다. 억울하지만 이방인인 그에겐 항변의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내려진 결정뿐. 다니던 직장도 잃고, 프랑스인인척 하지만 그래서 더 주목을 받는, 다시 '리셋'된 그의 일상. 

어렵사리 난민 수용소를 나온 삼바는 각종 프랑스의 이방인들이 몰리는 일자리로 나선다. 건설 용역, 유리창 닦이, 쓰레기 분리, 백화점 야간 경비  등 그가 전전하는 일자리, 즉 삼바와 같은 이방의 난민들로 채운 일자리는 '프랑스' 산업의 가장 취약하고 열악한 부분. 삼바의 일자리 전전을 통해 뜻밖에도 우리는 선진 국가 프랑스를 지탱하고 있는 인적 자원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오늘날 서울 변두리와 경기도 지역의 영세 산업 단지를 채우고 있는 인력들이 누군인가와 같은 맥락의 질문이다. 과연 그들이 없는 프랑스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제대로 굴러갈까? 

어색한 정장과 손에 쥐어든 잡지, 그리고 불안한 눈빛, 하지만 그 불안정한 삶에서 그럼에도 일관된 건 삼바라는 사람의 진정성이다. 난민 수용소 동료의 연인에게 흔들린 그 잠시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북아프리카 출신의 국적을 브라질이라 속이는 동료에게 이질감을 느끼며, 고지식하게 일자리를 찾고 쫓기며 여전히 고향의 어머니에게 걱정마시라하고, 그에게 호감을 느낀 앨리스(샤를로뜨 갱스부르 분)의 '번아웃'을 따스하게 위로하는 삼바는 '난민'이라는 이름표를 떼어내고 나면 우리 이웃의 괜찮은 남자이다. 

 

 

<웰컴 삼바>의 백미는 '난민'과, 그들을 상담하는 난민 수용소의 상담원들이 함께 파티를 벌이며 어우러지는 장면이다. 이방인, 타자와,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자라는 격도 잠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 추고 웃고 떠들며 점차 한 무리의 사람으로 어우러진다. 거기엔 세네갈인도, 프랑스 인도 없다. 그저 밥 말리를 좋아하고, 춤을 사랑하고 그 순간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 이방인과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겠다던 앨리스의 동료 상담자 마누도, 삼바에 대한 호감을 가졌지만 '난민'이라는 선에 혼돈스러워 했던 앨리스도 '사랑'의 이해 앞에 스스로 선을 거뜬히 넘어선다. 

결국 평생을 프랑스인이 되고자 조심했던 삼바의 삼촌은 세네갈로 돌아간다. 그가 원하던 호숫가의 집을 지을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삼바는 앨리스의 도움(?)으로 프랑스에서 살 길을 얻는다. 결론은 쉬이 낼 수 없다. 교착 상태에 빠진 우리의 난민 문제처럼. 살고자 하는 곳을 향한 인간의 엑소더스를 과연 근대의 국민 국가라는 틀이 제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인간류 본연의 dna를 말이다. 하지만, 국가라는 금이 그어진 세상은 소란스럽다.  같은 dna를 가진 인간에게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 '편견'의 색안경은 씌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웰컴 삼바>는 좋은 길잡이다. 



by meditator 2018. 10. 20. 17:53

'직필'(直筆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적음)은 늘 위태롭다. 유래를 따질 것도 없이, '동호직필(권력 앞에 아부하거나 비굴하지 않고 원칙에 따라 소신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를 수행한다)이라는 고사성어로부터 조선의 역사 구비구비에서 '직필'로 간언했던 선비들은 그 붓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고래의 직필의 역사는 오늘날 기자 정신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언론 역사는 곧 정의로운 직필로 인해 거리로 내몰려야 했던 고달픈 저항의 역사였으며, 해외라고 다를 것이 없다. 사우디 정책와 왕실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의 날을 세웠던 언론인 자말 카슈크지, '아랍 세계에 필요한 건 언론과 표현의 자유'라는 호소를 담은 칼럼을 끝으로 사우디 왕실이 보낸 암살조에 의해 살해 및 신체 절단, 사체 훼손이라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2018년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직필'의 탄압, 펜으로 만들어낸 힘은 강고하지만, 그 펜을 쥔 인간은 한없이 무력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마블의 상상력을 통해 '히어로'로 승화된다. 

 

 

정의로운 기자 에디 브룩
영화는 외계 생명체 심비오트가 인간 숙주와 결합하며, 인간 따위는 거침없이 먹어치우며 지구를 넘보는 '빌런'이, 선인 인간의 정체성과 결합하며 그 경계선의 빌런 히어로로 거듭나는 걸 홍보의 촛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여기서 '선'의 주체로서 프리랜서 기자인 에디 브룩(톰 하디 분)을 내세운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에디 브룩에게는 '전과(?)'가 있다. 1986년, 88년 코믹스에 그 등장을 연 에디 브룩은 그때나 지금이나 열혈 기자였다. 근데 문제가 좀 있는. 그의 문제라는 건. 보도해야 할 기사라고 여겨지는 사건에 있어 브레이크가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믹스 시절 에디 브룩도 마찬가지다. 데일리 글로브 지 기자였던 에디 브룩은, 그렇다 바로 스파이더 맨의 피터 파커가 일하던 그곳이다. 그 데일리 글로브 지에서 범죄자에 대한 특집 기사를 썼는데 그만 그 과정에서 잘못된 인물을 선정하여 그 이유로 퇴사를 하게 된다. 

<스파이더맨3>에서 퇴사한 에디 브룩은 자신이 실패한 기사를 성공시킨 피터 파커에게 앙심을 품고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심비오트를 받아들여 '베놈'이 되어 '빌런'의 캐릭터에 충실한다. 

 

 

하지만, <베놈>은 <스파이던 맨>에서 찌질했던 기자 에디 브룩을 '정의'의 사도로 리뉴얼한다. 역시나 데일리 글로브에서 쫓겨난 걸로 설정되지만 그건 <스파이더 맨>과는 다른 뉘앙스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의 보도 태도로 둔화된다. 그런 그의 '정의로운 성향'은  현재 기사를 다뤄주고 있는 언론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문의 생체 실험을 하는 혐의가 있는 거대 기업 라이프 파운데이션에 대한 의문을 쉬이 접지 못한다. 그러다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변호사로 고용된 연인 앤 웨잉(미쉘 윌리암스 분)의 노트북에서 석연치않은 자료를 발견하고 '기자 정신'에 입각하여 보도하지만 그와 연인의 실직와 이별로 그의 정의로움은 마감된다.

역시나 <스파이더 맨3>에서 대상 인물에 대한 잘못된 설정에 이어, 연인의 노트북 내용을 도용한 '도덕적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있지만, <스파이더 맨3>에 비하면 애교로 그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식으로 캐릭터적 설정의 완화로 표현된다. 하지만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 뭐하나 바위에 부딪친 계란처럼 에디와 에디의 그녀는 무참히 깨진다. 

그로부터 6개월,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압박으로 에디 브룩은 그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기사를 쓸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여전히 연인을 잊지 못하지만 그녀에게는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 그러던 차, 라이프 파운데이션이 노숙자들을 마구잡이 생체 실험으로 그 생명을 앗아가는 걸 목도하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도라 스커스(제니 슬레이트 분) 박사가 이전에 에디를 찾아온다. 이젠 더 이상 '정의롭지'않겠다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에디는 스커스 박사와 함께 라이프 파운데이션 실험실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외계에서 온 심비오트의 숙주가 되고 만다. 

기자의 정의가 실현되는 길은 숙주?
대부분의 숙주가 심비오트에게 먹혀버리고 마는 것과 달리, 에디의 몸에 기생한 심비오트는 그의 몸을 매우 만족한다. 살아있는 것들을 마구 먹어치우려고 하는 이 외계의 빌런은 심지어 에디와 '합체'하며 변화되기 시작한다. 아마도 무난한 재미의 히어로물로 찾아온 <베놈>에서 안타까운 지점이 있다면 바로 이 외계 심비오트가 에디를 숙주로 삼아 선과 악의 경계에 서게 된 이 지점이 아닐까. 

 

 

물론 영화는 전반부에 정의로운 기자 에디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풀었고, 거기에 더해 혹자의 평처럼 '버디'무비처럼 정의로운 에디와 막강 빌런 외계 심비오트의 결합을 티격태격 액션씬으로 표현해 냈지만, 에디의 몸를 숙주로 삼은 외계 심비오트가 자신의 동료를 배신하고 지구 별을 지키기로 변심하기 까지의 세계관의 변화라를 극적인 포인트에서 어쩐지 행간이 넓다. 그저 빌딩 꼭대기에서 바라본 지구 별의 아름다움으로 퉁치기엔. 

결국 에디 브룩의 거침없는 정의, 자신의 밥그릇과 연인의 밥줄까지 걷어찰 정도의 그 호기로운 정의가 식인 외계 심비오트마저 변화시킨 동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펜으로 실현하려 했던 에디의 정의 그 좌절의 과정이기도 하다. 들통나면 이별은 당연한 연인의 노트북 정보마저 포기못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라이프 파운데이션 실험실에 결국 잠입한 에디의 기자 정신은 그러나 결국 외계 심비오트와 결합이라는 '히어로'적 방식이 아니고서는 해결이 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아이러니한  '승화'인 것이다. 즉 성체와도 같던 거대 기업 라이프 파운데이션은 역시 에디 브룩이라는 기자의 펜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걸 어쩌면 영화는 말해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여전히 지구촌 어딘가에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기사를 쓴 기자가 살해당하고 있는 현실처럼. 그래서 빌런이자 히어로인 베놈의 활약은 통쾌했지만 뒷맛은 어쩐지 쌉싸름하다. 

by meditator 2018. 10. 19. 16:05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이하 곰돌이 푸)>의 영화 후기, '가족이 함께 봤다. 같은 영화를 봤는데, 재미있었다는 공통평 더하기 각자의 감동 포인트와 받아들이는 깊이가 따로 있었다 ', 란 장고님의 후기가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한 가장 적확한 후기일 것이다. 이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 언제나 아이들이 함께 한 영화관이 그렇듯 시끌벅적하고 영화 상영 도중 화장실 다녀오는 아이에서 부터 아이들의 재잘거림까지 어수선한 분위기와 함께 였다. 곰돌이 푸를 만나서 반가워 까르르 웃어대는 아이들과 함께, 한때 곰돌이 푸를 봤던 이젠 다 자란 아들과, 그 곰돌이 푸를 보던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보다 더 그 세계에 빠져들었던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온 지금의 부모들과 함께 '추억'을, '감동'을 공유했다. 

 

 

추억의 곰돌이 푸, 힐링의 전도사 
<짱구>는 야하다고 못보게 하던 엄마가 그래도 그나마 우량 만화라 보게 하던 게 곰돌이 푸였다고 한다. 그랬던 시절의 곰돌이 푸는 이제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라는 '베스트 셀러'로 새삼 인기를 끌고 있다. 영화 속에서도 그렇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느림보 곰돌이가 바쁘게 살아가는 속에서 자신을 자꾸 놓치고 사는 것같은 젊은이들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힐링 지도사'가 되어 복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어린 시절 힐끔거리며 아이들과 함께 곰돌이 푸를 시청하던 부모 세대에게 '곰돌이 푸'는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곰돌이 푸보다는 어른이 되어버린 로빈, '책임감으로 사는 어른'의 이야기가 마음을 건드리지 않았을까?

추억의 만화를 실사로 구현한 디즈니의 라이브 액션 작품인 <곰돌이 푸>는 이전의 <미녀와 야수>보다는 외려 영국, 프랑스 합작 작품인 <패딩턴> 시리즈와 더 동질성을 느끼게 한다. 도시로 온 곰돌이 인형 패딩턴이 도시적 삶에 길들여진, 그래서 가족간의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한 가정에 들어와 본의 아니게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도록 하여 결국은 가정을 다시 '평화롭게' 만들어 준다는 해프닝의 구조에 있어 동일하다. 또한 이는 지금처럼 거대 스튜디오 디즈니 이전 초창기 디즈니 이래 줄곧 구현하고자 해온 '스위트 홈'의 신화의 연장 선상에 놓여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매우 '디즈니'적이기도 하다. 

 

  ​​​​​​​

어른이 되어버린 소년, 로빈의 책임감 
그 '스위트 홈'의 신화을 재현하기 위해 <곰돌이 푸>는 이젠 어른이 되어 버린 로빈을 내세운다. 헌드레드 에이커 숲에서 봉제 인형 곰돌이 푸와 피그렛, 티거, 이요리, 올빼미, 토끼 등과 함께 '소꿉놀이'를 하던 로빈. 하지만 소년의 '동화'는 '성장'과 함께 멈춰버린다. 

성장의 계기가 된 건 우선 그를 시류에 따라 기숙학교로 보내버린 부모들이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곰돌이 푸를 끄적거리던 소년에게 '동화'의 세계는 유효했다. 그런 그에게 닥친 가장인 아버지의 죽음. 친척 할머니의 '이젠 네가 이 집안의 가장이야'라는 말 한 마디는 급격히 소년을 '철'들게 만들어 버린다. 어줍잖게 어른의 세계를 엿본 우리의 청소년들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자신들을 내모는 것처럼.

에블린을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잠시 전쟁터에 참전하고, 다시 돌아와 그 시대의 여느 남자처럼 가방 회사 '윈슬로'를 다니게 된다. 영화 <모던 타임즈>의 또 다른 버전처럼 돌아가는 직장, 하지만 일벌처럼 열심히 일하지만 직장 내 책임자의 자리를 맡은 로빈에게는 자신의 수하에 있는 직원들의 자리를 건 '경비 절감'을 앞세운 경영 합리화의 위기가 닥친다.  동료들의 밥줄을 쥔 그가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고심하는 시간은 곧 그의 가족에게는 '소외'의 시간이 된다. 그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돈을 잘 벌어 좋은 기숙학교에 아이를 보내면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힌 아빠 때문에 아내도, 아이도 지쳐가게 된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친구들을 잃어버렸다고 찾아온 어린 시절의 친구 곰돌이 푸도 나타나는데.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어른 로빈을 다시 동화의 세계로 내모는 게 또 다른 '책임'이다. 곰돌이 푸는 로빈을 채근한다. 네가, 헌드레드 에이커 숲에서 우리와 함께 하던 시절의 로빈이 언제나 우리들의 해결사였다고. 이젠 그런건 없다고 외치던 로빈이 그 시절 괴물 헤팔럼을 무서워 하던 친구들을 위해 갖가지 묘수를 짜내던 그시절 부터 '로빈'은 든든한 친구였다고. 그러고 보면 <곰돌이 푸>은 재밌게 보던 시절부터 늘 로빈은 당연히 '해결사'였다. 너무도 봉제 인형 친구들의 호들갑을 처리해 주는게 당연했는데, 봉제 인형 친구들을 위해 헤팔럼 용 함정이나 파주던 '책임'은 이제 어른이 된 소년에게는 헤팔럼이 아닌 동료들의 목을 쳐야 할 위기로 변해버린 것이다. 

 

 

'책임감'의 변화 
영화 속 '로빈'은 일관되게 '책임'감이 있다. 어린 시절 로빈은 봉제 인형 친구들에게, 그리고 어른이 된 로빈은 가족과 회사에, 물론 그 방식의 문제다. 어린 시절 함정 정도 파주던 그 식으로 맞서기엔 세상이 너무 강팍해 진 것이다. 또한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물려준 자식을 책임지는 방식은 아빠의 사랑을 바라는 딸에겐 시대 착오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물론 영화 속 우리의 로빈은 더 늦기 전에 다시 곰돌이 푸를 만나, 곰돌이 푸와 함께 놀던 그 시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하'던 시절의 교훈으로 현명하게 늦지 않게 행복을 찾는다. 

로빈의 방식은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 방식을 변화시킨 것이다. 회사 일에 충실한 것이 곧 가정을 지키는 것이라 여겼던 지난 시대의 사고 방식을 어린 시절의 친구들와의 '회동'을 통해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 대한 책임으로 전환한다. 또한 고용주에 대한 책임을 동료에 대한 책임으로 '회사'에 대한 소속감의 질적 전환을 이룬다. 

영화 속 로빈의 변화는 역사적 배경을 더하며 풍성해 진다. 전후 급격한 산업의 발전과,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산업의 위기, 변화를 로빈이 다니는 '윈슬로'라는 가방 회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19세기 중엽 처음 등장했던 귀족들 전용의 여행용 가방을 '여행'의 대중화에 걸맞게 '루이비통'이 대중화 시킨 그 '콘텐츠의 혁신'을 영화 속 윈슬로에 도입한 로빈의 묘수로 절묘하게 흡인해 낸다. 거의 옷장 수준의 가방이었던 귀족들의 여행 가방이 루이 비통에 의해 기차 화물칸에 적재되기 쉬운 대중들의 가방으로 탄생된 그 순간을, 윈슬로의 경영 합리화를 돌파할 묘수로 배치시킨 것이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펼쳐친 해변 휴가를 받아 윈슬로의 가방을 들고 해변으로 놀러온 직원들,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행복'하다는 곰돌이 푸의 인생 철학이 시대의 트렌드로 변화되는 순간을 영화는 절묘하게 포착해 낸다. 

즉, 이전의 세대 아버지들이 그저 나가서 돈을 잘 벌어 오는 것이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을 다한 것이었다면, 윈슬로의 가방을 들고 여행을 다니게 되는 시대에 아버지의 책임감은 영화 속 로빈의 딸이 바라던 아버지의 상처럼, '가족'과 함께 일상의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책임'이다. 물론 윈슬로의 적자 경영을 타파한 신의 한 수라는 경영적 능력은 놓치지 말아야 할 아빠의 능력이다. 

그렇게 영화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행복'을 논하면서, 결국은 변화하는 시대, 변화하는 아버지의 자리, 아버지의 책임을 말한다. 다행히도 일찌기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놀던 그 시절부터 책임감있던 소년은 늦지 않게 다시 찾아온 친구들 덕에 강박처럼 자신을 휘몰아 쳤던 그의 아버지 세대가 짖누르던 맹목적 책임으로부터 한결 짐을 덜었다. 어른에게는 어른의 자리가 있다. 하지만 그 자리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아버지의 시대 기숙 학교에 보내는 것이 책임을 다한 것이었다면, 이제 로빈이 그의 딸과 옛친구인 곰돌이 친구들과 살아가야 할 시대의 책임은 '함께 행복하기'이다. 그리고 그건 2018년 이 시대에 우리 어른들이 <곰돌이 푸>를 보고 감동받듯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by meditator 2018. 10. 16. 16:53

천년을 두고 이어온 인연, 아니 악연의 대서사였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라 등장한 '쿠키 영상', 지금까지 보아온 영화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익숙하다. 그렇다면 지난 1편은 '어머니의 이름으로?', 그렇다. <신과 함께>  1편에 이은, 2편이 '무람없이' 우리의 정서에 깃들여 들어오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들 두 편의 영화가 연이어 말하고자 하는 '전통적 의식과 정서'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신과 함께>가 동양권에서 공감대를 얻으며 인기를 끌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웅장한 한 편의 <전설의 고향>을 보고 나온 듯하다. 이렇게 말하면 '조롱'이라고?, 아니다. 한반도 전지역에 걸쳐 전해지는 전설, 설화, 민담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전설의 고향>은 1977년이래 1989년까지 장장 12년 동안 이어진 스테디 셀러였다. 그리고 사라진듯했던 이 시리즈는 1996년부터 해마다 여름이면 찾아오는 반가운 납량 특집이 되었다. 올 여름도 어디 <전설의 고향>같은 드라마 안하나 기다리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한 시리즈가 이렇게 꾸준히 끈질기게 사랑받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시리즈의 저력이 입증된다. 

웅장한 전설의 고향? 
<전설의 고향>하면 '귀신'이라 연상되지만, 사실 여기서 방점이 찍혀야 하는 건 '귀신'이 아니라, 죽음이다.  <전설의 고향> 속 많은 이야기들이 '귀신'의 등장조차 불사할 만큼 죽음의 경계조차 허무는 '인연'에 대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사를 흔히 중생(衆生)이라고 한다. 물론 폭넓게는 인간을 포함한 뭇생명 전체를 가르키기도 한다. 이들 '중생'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자유 의지'가 없다니? 서양의 근대 철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반발할 말이지만, 불교에서의 '인간'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부처의 10가지, 다시 분륜하면 33가지, 거기서 다시 세밀하게 분류되면 3000가지의 세계 중에 '하치'에 속하는 세계이다. 이들은 아직 삶에 초연하지 못하고 자신의 업력, 이른바 '업보'에 휘둘려 '고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고해의 시작은 대부분 '탄생', 즉 어미와 아비와의 인연으로 부터 시작된다. 물론 <신과 함께 2-인과 연>에서 보여지듯이 그 보여지는 인연은 거슬러 전생의 업보로 이어지기도 한다.




<신과 함께1-죄와 벌>은 저승 세계의 귀인이 된 형 김자홍(차태현 분)의 저승 재판으로 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김자홍은 어쩌면 떡밥에 불과했다. 그의 재판이 진행되는 곳곳마다 등장하는 악귀인 동생 수홍(김동욱 분)의 억울한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지고, 결국 자홍도, 수홍도 불쌍한 중생이 될 수 밖에 없는 두 형제와 가난한 어미의 슬픈 사연으로 귀결된다. 말 못하는 장애를 가진 그래서 두 아이를 거두기엔 역부족이었던 어미가 없었다면 애닮게 가족을 부양하며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던 자홍의 삶도, 여덟 번의 재수 끝에 사시 1차를 패스했으나 결국 군 의문사한 수홍의 죽음도 그리 서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소방관이라는 직업의 희생 정신도, 군의문사의 억울한 죽음도 '모성'과 그 모성을 거스르지 못한, 아니 않는 두 형제의 '효'라는 전통적 관계의 블랙 홀 속으로 흡수해 버린다. 그리하여 결국 김자홍이라는 인물의 구구절절한 삶도, 김수홍이라는 인물의 선량함도 어머니의 눈물 앞에 곡하는 '신파'의 정서로 휘몰아쳐 버린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때론 귀신으로, 때론 억울한 죽음으로 저승조차 가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다 인간 세상의 일이 된 <전설의 고향> 속 서사 구조, 그리고  세계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고유의 전설, 설화, 민담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전승'한다. 즉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친숙하고 이물감없는 정서로 이것들이 받아들여진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들의 업
그렇다면 1편에 이어 2편 <인과 연>은 어떨까?  '눈물'로 흥건한 신파로 귀결됐던 1편과 달리, 2편의 서사는 장중하다. '환생'을 소망했던 세 명의 저승 차사, 이제 그들은 한 명만 더 '환생'을 시키면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자신들의 환생'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유독 세 명 중 강림(하정우 분)은 자신의 차사 직까지 걸며 1편에서 악귀였던 김수홍의 '환생'에 적극적이다. 




영화는 1편과 마찬가지로 저승에서의 재판 과정과, 그 과정에 기반이 되는 현생의 서사가 엇물리면서 이어진다. 아마도 이번에도 천만을 넘을 것이 당연하게도 예상되는 <신과 함께> 시리즈의 성공적 요인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지점이라면 바로 이 엇물리는 '저승'과 '현생'의 이물감없는 절묘한 콜라보이다. 강림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김수홍의 재판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과정과, 성주신의 훼방을 '거'하고 허춘삼 노인의 목숨을 거두고자 현생으로 간 해원맥(주지훈 분)과 덕춘(김향기 분)의 고전을 면치 못하는 해프닝이 이어진다. 그런 가운데 허춘삼 노인의 생명을 성주신이 원하는 시기까지 '연장'시키는 대신 해원맥과 덕춘은 자신들의 잃어버린 기억을 '딜'을 통해 한 줄기 씩 흘러나오는 과거와, 저승 재판 과정에서 영리한 수홍의 유도 심문을 통해 삐져나오는 강림의 탄식어린 상흔은 관객들로 하여금 '하나의 비극'을 꿰어맞추기에 충분했다.  영화 속 주지훈이 분한 해원맥의 비극적 서사는 관객들의 마음을 빼앗지만, 과연 해원맥의 비극에 강림의 인간적인 정서가 드리워져 있지 않다면 그토록 극적일 수 있었을까? 그렇게 영화는 두 남자의 운명을 씨실과 날실로 드라마틱하게 직조한다. 

분명 천년 전 악연으로 이어진 것이 분명한 이들이 과연 어느 곳, 어느 장소에서 '악연'으로 조우하여 그 인연의 끝을 다하게 할 것인가란 조바심이 관객을 롤러코스터와 같은 저승 재판의 속도감과 함께 몰아친다. 그리고 당연하게 예상했던 비극, 하지만 예상했음에도 여전히 그 세 사람의 물고 물리는 악연은 처절했다. 




하지만 영화는 영리했다. <전설의 고향> 속 '비극'으로 마무리 되었던 그 '악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업보'의 결자해지로 향한다. 전설과, 설화와, 민담, 그리고 그것을 관통했던 '불교적 세계관'의 '고갱이'는 바로 '결자해지'에 있다.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자신을 얽어매었던 '인', '연'의 사슬을 스스로 풀어내야만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승격'할 수 있는,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 귀신은 구천을 떠돌 수 밖에 없듯이, 천년 전의 악연의 사슬을 풀어내지 못한 세 차사는 내내 천년 동안 환생의 업을 쌓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영화는 설득해 낸다. 


오랜 시간, 인간과 인간의 터전을 지켜보아왔던 성주신은 정의한다. '인간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쁜 상황이 있을 뿐이라고. 이 '현대적인 해석'이 고스란히 '인과 연'의 업의 결자해지로 돌아온다. 그래서, 서로의 악연은 '이해'로, 그리고 씻을 수 없는 육친의 죄를 저질렀던 강림의 죄는 49번 째 환생의 사슬을 풀어냄으로써 스스로 풀어낸다. 영화는 우리 장례 의식에 있어 49일간의 이승에서의 돌아봄을 세 저승 차사의 49명의 '환생 업무'로 기막히게 치환해 냄은 물론, 서로의 악연을 넘어선 '인간의 생명 살상'에 대한 대가로서의 '그들이 지난 천년간의 저승 차사'직을 이해시켜낸다. 제 아무리 나쁜 상황이라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는 전래의 '인간 중심 주의'에의 환기이다. 



아버지의 업
그런데, 그렇게 장대하게 마무리된 영화는 하지만 '쿠키 영상'을 통해 이 장고한 서사의 각도를 튼다. 이 모든 천년의 서사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새롭게 각인되는 것이다. 1편의 <죄와 벌>이 결국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 용해되었듯이, 2편의 세 차사의 천년에 얽힌 연원과 악연의 끝에서 만난 건 이번에는 아버지이다. 결국, 1편에 이어, 2편, <신과 함께>를 통해 영화는 우리의 많은 인과 연의 근원이 '가족'에 있음을 확인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달랐다. 어머니와, 1편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것은 '눈물'이었다. 아들들은 어머니의 '눈물'에 그들의 삶을 던졌다. 반면, 2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아버지의 아들로 거듭나기 위해 자신들을 던진다. 그래서 비겁했고, 비열했으며, 심지어 그래서 누군가의 목숨을 거두는데 거침이 없었다, '가부장'의 세계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역사의 속살을 그렇게 영화는 드러낸다. 어머니의 눈물이 화해와 평화로 귀결되었다면, 아버지의 존재는 '갈등'과 경쟁을 부추겼다. 영화는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관통하는, 아니 그 용서할 길 없는 피비린내 나는 피의 세계의 가능성은 ' 또 하나의 어머니' 덕춘이 연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는 만나고 엇갈리며, 결국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리고 어머니의 '희생'으로 해소된다.

그 방식은 눈물로써 바다를 이룬 1편의 어머니의 세계와는 다르다. 천년의 시간을 들여, 아들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업보를 풀어내기를 기다려주고, 기꺼이 지원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의 방식은 한편에서 보면, 마치 벼랑 아래로 사자 새끼를 내던져버리는 아비 사자와 같은 서늘함이 있다. 천년을 내내 기억을 잃지않고 고통스러워 하며 49번째의 환생을 향해 묵묵히 걸어왔을 아들을 지켜보는 아버지는 그날, 천년전 그날 자신의 부대를 잃지 않기 위해 기꺼이 큰 아들을 전쟁터의 선봉에 세우지 않았던 그 아비와 그리 다르지 않다.  아비의 세계, 아비의 업, 그리고 아이러니한 아비의 사랑이다. 


by meditator 2018. 8. 4. 17:17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예년에 덥다라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격'이 다른 더위가 한반도 상공을 밥공기처럼 뒤엎은 '열돔' 현상 때문이라니. '평균 해발 고도가 4500m에 달하는 티벳 고원이 올해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예년보다 더 뜨겁게 달구어 졌고, 이 티벳 고원으로부터의 열기(고기압)가 여름철 우리나라를 달구는 북태평양 고기압과 만나 반구형 지붕처럼 뜨거운  공기를 한반도 상공에 정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만이 아니다. 가까이 일본은 폭우와 폭염의 폭격을 맞아 신음하고, 아프리카의 기온은 50도에 육박하고, 미국, 유럽 등 전세계가 기상 이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전세계적인 폭염에 대해 미 항공우주국은 이런 기상 이변이 지구 온난화의 결과물이며 온실 가스 배출이 그 주된 원인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여전히 '지구 온난화'나, '온실 가스'를 귓등으로 흘려 들었던 우리에게 강력 경고라도 하듯 찾아온 올 여름의 '폭염', 말 그대로 '찜통 더위'를 낳은 '지구 온난화'에 대해 일찌기 2006년 엘 고어 전 미국의 부통령은 경고한 바 있다. 그 어떤 전문가 보다 열렬하고 헌신적인 이 '환경 선생님' 엘 고어'의 호소력있는 강의, <불편한 진실>을 통해 '지구 온난화 개론'부터 다시 들춰보자. 

왜 부통령까지 한 엘 고어는 '지구 온난화를 방지 운동'의 전도사가 되었을까? 그의 여섯 살 난 아들은 아버지인 그의 손을 놓고 길 건너 편에 있는 친구를 향해 달려가다 교통사고를 당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섰다. 어렵사리 아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가치관'이 달라졌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소중한 아이를 잃을 수 있듯이, 소중한 지구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고정관념이 문제다. 무지가 아닌 잘못된 확신에서 문제는 시작된다. 
                                                                                   -마크 트웨인




온난화에 대한 고정 관념
영화의 시작은 바로 사람들이 가진 지구 온난화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너무 커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하지만, 칼 세이건은 '대기는 광택제를 바른 공에서 바로 그 공과 광택제 사이의 아주 '얇은 공간'이라며 '취약'하고 '파괴'되기 쉬운 대기를 정의내린다. 

태양열은 지구를 데운 후 다시 대기에 반사되는데, 그 중 일부가 대기에 갇히게 되고, 그것이 생물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온도'로 지구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공해 물질로 지구를 감싼 막이 점점 두터워지면 갇히는 열이 점점 많아지고 당연히 지구는 '더워'진다. 지난 수십년간 인류의 소비 행태가 급격하게 변화되며 대기 중 co2(이산화탄소)가 증가하며 더불어 지구의 온도도 상승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히말라야, 킬리만자로,남미 파타고니아,  북극, 남극 등의 빙하가 사라지며 지구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빙하가 녹는 게 어때서?라고 사람들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구인의 40%의 식수원이 되는 빙하가 녹는다는 건 향후 50년 안에 인류가 식수난에 시달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혹자는 말한다. 중세 시대의 기후 변화처럼 지구 온난화는 지구가 그동안 겪어왔던 기후의 주기일 뿐이라고. 하지만 지난 시대 지구가 겪었던 기후 변화는 최근 온난화에 비하면 미미한 정도이다. 마치 나이테처럼 새겨진 얼음 속 정보에 따르면 지난 650000년 동안 지구의 co2 농도는 300ppm을 넘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래 그래프에서 보여지듯 최근의 co2 증가량은 이전과 다르게 많고 급격하다.  당연히 co2가 늘어나면 기후는 상승한다. 


가장 더웠던 기록은 올해 우리나라에서 보여지듯 해마다 갱신될 가능성이 크다. 2003년 유럽에서는 더위로 3만5천면이 사망했다. 인도는 50도의 기록을 세웠다. 미국 서부도, 동부도 신기록을 세웠다. 기온 상승은 세계적 추세이다. 

해수의 온도가 올라가면, 그로부터 비롯되는열대성 저기압의 발달해서 만들어지는 폭풍이나 허리케인 역시 빈번해지고 강력해 진다. 지난 2004년 일본에서만 10회의 태풍이 찾아왔다. 440명의 사망자를 내고 뉴올리언즈 시를 초토화시킨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그 실례다. 

태풍이나 허리케인만이 아니다. 몸바이는 37인치의 폭우로 물에 잠겼다. 중국은 홍수에 시달린다. 그런가 하면 사하라 사막 주변은 가뭄에 시달린다. 세계 최대의 호수였던 채드호는 이제 물에 나갈 수 없는 빈 배들이 쓰러져 있다. 이런 가뭄은 아프리카 인종 분규의 원인이 된다. 해수가 덥혀지며 한쪽에선 구름이 만들어지며 폭우가 쏘아지는데, 다른 쪽 토양에서는 수분이 증발하여 가뭄에 시달린다. 온난화의 역설이다. 





그까잇거 빙하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온난화'로 인한 재앙을 먼 미래의 일로 여긴다. 과연 그럴까? 북극해의 만년빙이 녹아 북극곰이 익사한다. 그린란드의 우드헌트 빙봉이 두 동강났다. 영구 동결층에 세워졌던 건물이 붕괴되고, 천연 가스를 나르던 파이프 라인이 틀어졌다. 지난 40년간 40%의 얼음 두께가 감소했고, 이런 식이라면 50~70년사이 만년빙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얼음은 태양빛의 90%를 반사한다. 북극과 남극 등의 빙하와 얼음이 지구의 적정 온도를 지켜주는 수문장 같은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런데, 빙하가 녹아버리면 태양열은 고스란히 해수면에 흡수되고, 따뜻해진 바닷물은 다시 빙하를 녹이며, 지구의 온도는 더욱 상승되고 갖가지 기상 이변이 발생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 문제는 불연속 시스템을 가진 지구의 기후의 엔진이 '점진적'이지 않고, 극적인 변화를 보일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 생물의 순환은 절묘하다. 철새가 알을 깨는 시기는 애벌레가 활동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하지만, 기후 변화로 인해 애벌레가 그보다 일찍 활동한다면 철새의 새끼들은 먹이를 잃는다. 변화된 기후에 따른 외래 동식물의 개체수와 활동 기간이 늘어난다. 모기가 늘고, 나무들을 고사시키는 좀이 많아진다. 전염병을 퍼뜨리는 매개체들의 서식지가 넓어지고, 해수면 온도에 적응하지 못한 산호초는 말라죽고, 그곳에 깃들여 사는 물고기들은 떼죽음을 당할 수 있다. 지구 온난화는 생묻들의 멸종 속도를 1000배 가속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멸종'에 인간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남극 대륙에 있는 700피트의 빙붕이 35일 만에 사라졌다. 빙하가 녹아 생기는 담수는 다시 기존 빙하를 침식해 녹이는 악순환을 계속한다. 또한 해수면을 상승시킨다. 남극해의 빙하가 녹으면 태평양 주변의 섬들이 범람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해안가에 모여살아왔다. 해수면의 상승은 수많은 섬들은 물론, 캘리포니아, 샹하이, 네덜란드 등 우리가 아는 많은 해안 도시를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수십만, 수억의 이재민이 발생할 수 있다. 

지난 9.11사태 이후 미국민은 다시는 이런 사태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테러만이 위협이 되는 건 아니다. 해수면이 지금처럼 급격하게 상승해 간다면, 9.11추모비는 물에 잠겨 사라질 수 있다. 




온난화의 주범?
그렇다면 이런 온난화를 일으키는 원인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 안타깝게도 그 '주범'은 인류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시기에 10억을 넘은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여 2018년 현재 세계 인구는 76억명이다. 지금으로 부터 4만년에서 1만년 전 문명의 이기를 미처 사용하지 않던 시절 인류의 수는 400만 명, 겨우 부산시민 수준이었다. 포화 상태의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각종  석유 채굴 등문명적 수단은 물론, 삼림 방화 같은 비문명적 수단들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다. 

창이나 총과 같은 기술들은 그 '위해'의 범위가 예측가능했다. 하지만 원자력과 같은 '신기술'은 '예측 불가능'하다.  지구 표면에 가하는 인간의 영향력은 변화되었다. 오늘날 인간이 만들어 낸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통제 한계를 벗어났다.  하지만 인간들은 미지근하게 데우는 물에 뛰어든 개구리처럼 온난화로 인해 전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기후 변화에 무감각하다. 

끓는 물처럼 100%가 아니면 믿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만이 아니다. 언론은 '온난화를 믿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는 식으로 '온난화'를 단순한 가설로 몰아간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학술지 논문에서 928개를 표본 조사를 한 결과, 단 1명의 학자도 '온난화'를 믿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석유, 자동차 등 온난화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는 산업들이 퍼부은 막대한 로비 자금은 '정말 심각한 문제인지 불확실하다'는 편견을 유포한다. 




하지만 그렇게 석유, 자동차 산업 산업의 후진적인 의식은 오늘날 자동차 연비에서 미국 자동차 산업의 뒤처진 기술을 결과한다. 높은 연비의 기술이 '첨단'이 되는 세상이다. 지구가 생존하지 않고서야 인류도 존재할 수 없음을 온난화로 인한 지구의 위기가 강변한다. 경제냐 지구냐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가 먼저가 환경이 나중이라는 의식은 이제  시대에 뒤처졌다. 더는 선택이나 정치적 입장의 문제가 아니다. 온난화는  '윤리적이며 도덕적 문제'라고 영화는 결론한다. 

대통령 선거에서 안타깝게 떨어진 엘 고어 대통령은 좌절하여 주저앉는 대신, 대통령이 되서 하려 했떤 환경의 문제를 1천번이 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강의를 통해 실현해 나가고자 한다. <불편한 진실>은 그가 했던 1천번의 강의 내용과 같다. 그는 강력하게 말한다. 온난화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바로 '당신', 우리들 각 개인이라고. 그건 구태의연한 삶의 방식을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민주주의가, 인종 문제가, 달 정복을 낳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 여성 참정권처럼 그 이전의 시대에선 불가능했던 것들을 오늘날 우리가 '역사적 진보'의 결과물로 찬사를 보내듯, 온난화로 부터 비롯된 지구의 문제는 그와 같은 '삶의 방식'과 태도의 '혁명적인 결단과 선택'을 요구한다고 영화는 결론내린다. 그리고 그 개인이 책임져야 할 아래의 내용들은 엔딩 크레딧과 함께 '노래'로 울려 퍼진다. 






지구 온난화를 위해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고효율 가전 제품과 전구를 사용하라.
단열재를 사용하고, 냉난방 기구의 온도계를 조절하라. 
하이브리드 카를 사고, 웬만하면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가급적 대중 교통 수단을 이용하라.
재활용 에너지를 사용하고, 정부에게 그린 에너지 사용을 촉구하라. 
나무를 심어라. 많이. 
환경 문제를 주변에 알리고 co2 방출량 규제를 촉구하라. 
온난화 방지 운동에 동참하라.
수입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대체 연료를 애용하라.연비 기준 강화와 배기 가스 규제를 촉구하라.

부모님께 건강한 지구를 물려달라 부탁하라. 
당신이 부모라면 환경 운동에 동참하라. 
그리고 환경을 지키는 정치인에게 투표하라. 
                       -<불편한 진실> 중


by meditator 2018. 7. 29. 01:25

'태어나서 가장 많이 참고, 일하고, 배우며, 해내고 있는데 엄마라는 경력은 왜 스펙 한 줄 되지 않는 걸까?' 모 드링크제 선전 속 엄마의 한숨 섞인 하소연이다. 이보다 '부모'의 자리에 대해 잘 정리한 말이 있을까? 그런데 이 '많이 참고, 일하고, 배우며, 해내는' 이 역할을 우리는 인간의 '본능'이자, '도리'라 '교육'받아 왔다. 정말 본능이고 당연한 도리일까? 그10달을 품고도 자기 앞에 나타난 , 아니 자신의 책임으로 던져진 생명체로 인해 '산후 우울증'을 앓는 엄마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니 '본능'과 '도리'가 역방향으로 작동한다면? 아니 외려, 그간 '많이 참고, 일하고, 배우며, 해냈던' 그 설움들이 에너지가 되어 '폭발'한다면? <맘&대드>는 바로 이 '인간의 본능과 도리'라 했던 부모의 내리 사랑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농담'이다. 



부모의 역습
시작은 떠들썩한 미국의 중산층 가정의 아침이다. 십대인 딸은 남친과 통화를 하며 어떻게든 부모의 잔소리와 간섭을 피해서 남친과의 데이트를 즐기려고 모색한다. 그를 위해 엄마의 지갑에서 돈까지 몰래 슬쩍하고. 그런가 하면 아직 철부지 아들 녀석은 아침부터 아버지와 '장난'삼매경.  전형적인 미국의 주택가, 중년의 가장 라이언(니콜라스 케이지 분)네 아침은 그렇게 시작된다.  아들의 장난감 트럭에 넘어지고 지나친 아들의 장난에 아버지는 화를 내는 건지, 농을 하는 건지 모를 경계에서 오가고,  딸을 데려다주는 엄마의 진심어린 설득은 결국 엄마 자신의 삶이 없어서라는 처참한 답변만을 얻는다. 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철부지 아들과 10대인 딸을 둔 가정의 평범한 모습이려니. 라이언과 그의 아내만이 아니라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의 일상은 다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수능 자격 시험을 치르는 고사장 아이들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저 시험치르는 자식을 걱정하는 눈빛이 아니다. 하교길의 아이들을 기다리는 부모들 역시 마중이라기엔 울타리에 매달려 아이들을 애타게(?) 부르는 그 절절함이 도를 넘는다. 결국 부모의 그 애타는 절규에 담을 넘은 아이, 그런데 엄마는 아이를 품에 안는 대신, 자동차 키를 거꾸로 세워 가격한다.  그리고 시작된 피의 질주. 부모들이 아이들을 향해 한껏 달겨든다. 그리고 손에 쥐어지는 건 그 무엇이든 그것으로 자신의 아이를 죽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자동차 키도, 삽도, 야구 방망이도, 당연히 부엌칼도, 잘린 맥주병도. 고기다지는 망치가 그리도 잔혹한 살육 도구였던가. 

지지직거리는 tv, 마치 전파 방해처럼 혼선이 되는 채널들의 시그널, 하지만 그 이상 영화는 부모들의 '변심'을 설명치 않는다. 그저 인간에게 '탑재'되어 있는 2세를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이 어떤 이유로 인해 '반대'로 작동하게 되었을 때, 그 '맹목성'이 '폭력성'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tv프로그램 속 전문가의 말이 피튀기는 부모들의 살육전 사이에 스쳐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라이언네의 평범하지만 짜증나는 일상으로 부터 시작된 '부모의 자식의 애증어린 관계는 부모들의 맹목적인 살육전에 대한 충분한 '전제' 조건이 된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그 '맹목적'인 사랑이 전복되었을 때 보여지는 '살육전'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맹목적'인 부모의 사랑에 기대어 있는지 설명한다. 




가족을 묻다 
현대 사회의 단위는 '개인'이다. 신분과 계급으로 부터 방출되어 나온 '근대' 이후의 개인은 '의지적 존재'이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살아간다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우리가 사는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 그런데 그 '개인'은 어디서 만들어 지는 걸까? 바로 그 '개인'의 인큐베이터가 '가족'이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고 않고 때에 맞추어 아이를 낳고 수모를 참아가며 양육하는 '부모'라는 존재가 '근대' 이후 개인을 품어낸 산실이다. 자유 의지의 개인과, '맹목적'인 도리를 가진 양육체로서의 부모, 이 조합의 아이러니를 <맘&대드>는 묻는다. 

그의 말썽꾸러기 아들처럼 아버지가 어렵사리 장만한 차를 몰고 나가 교통사고를 일으켰던 철부지였던 라이언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되었다. 집안 곳곳에는 지뢰처럼 아들의 장난감이 널부러져 있고, 모처럼 그가 자신의 공간으로 장만한 지하실조차 아내의 냉소에 맞닦뜨린다. 아내라고 다를까. 사춘기 딸과의 진정성어린 대화조차 엄마의 집착 혹은 자존감없는 엄마의 하소연으로 치부되어버리는 아내, 예전 상사의 말에 기대어 직장을 구하고자 하지만 돌아온 건 조롱 아닌 조롱. 중년의 부부는 어느덧 '나'를 잃은 채 '부모'로서의 기능으로 살아가며 지쳐간다. 영화는 바로 이 '선택'이라 생각했지만 어느덧 '굴레'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가족'을 '화두'로 던진다. 



​​​​​​​
거리를 붉게 물들였던 살육전은 라이언네 집이라고 예외가 없다. 집안의 행사로 기대되던 여동생의 출산은 피로 물들었고, 겨우 집으로 돌아오던 엄마 역시 그 살육의 전염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하실로 피신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우리가 범죄영화에서 흔히 보던 '드릴'과 '망치', 전기톱, 그리고 가스까지 동원된 엄마, 아빠의 혼신을 다한 작전. 그런데 여기서 반전, 이날은 두 사람의 부모님이 방문하기로 했던 날이었던 것이다. 

무심코 문을 연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드는 노익장의 부모님들. 이 세대를 이은  육탄전을 통해, 부모 자식의 '연원'이 그리 간단치 않았음을 반증한다. 누군가의 부모가, 한때는 누군가의 자식이었던, 부모의 '허랑방탕'한 자식이었음을 드러내는 '시간'의 역습이다. 

과연 이 살육의 딜레마에 빠진 공방전에 해법이 있을까? 삼대가 뒤엉켜 피바다를 만들던 라이언네의 살육전은 그럼에도 아이들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아이들에 의해 체포된 라이언과 아내, 두 사람은 애절하게 엄마, 아빠는 너희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건 살육전이 벌어지기 전이나, 처음 아이들을 죽이려 문을 두드릴 때나 똑같은 톤이다. 그런 부모들의 고백을 아이들은 마치 '빨간 모자'를 찾아온 늑대처럼 여긴다. 영화는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된 부모들의 역습처럼, 엔딩도 다르지 않다. 알고보니 긴 악몽이었다던가, 그 지지직거리던 tv의 소음과 함께 자신들의 범죄를 자각한 부모라던가(자각하면 어쩔텐가 허긴 ), 그 어떤 해결도 없이 이 '어처구니 없던 농담'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그리고 던져진 질문, 살의를 부르는 양육, 과연 우리가 이 맹목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가족'은 정말 가치있는 걸까? 개인의 자유를 포기할 만큼 부모됨은 의미가 있는 걸까? 어쩌면 '결혼'이 선택인 시대에 한번쯤은 던져봐야 할 질문이다. 

by meditator 2018. 7. 21. 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