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최강 빌런 타노스의 등장으로 지구의 반이 사라졌다. 어벤져스의 전사들 역시 반이 사라졌다. 모두가 힘을 합쳤지만 인피니티 스톤을 끌어 모은 그의 막강한 힘 앞에 무릎을 끓었다. 과연, 지구의 운명은, 아니 전 우주의 운명은 이대로 타노스의 손아귀로 넘어갈 것인가? 사라지기 전 닉 퓨리는 누군가에게 연락을 보낸다. 그 누군가가 바로 캡틴 마블, <캡틴 마블>은 바로 왜 지구의 가장 긴급한 위기에 캡틴 마블에게 연락을 보내게 되었는가 그 '이유의 역사'를 그린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외계인? 
크리족의 전사로 살아가는 비어스(브릿 라슨 분), 때때로 그녀를 괴롭히는 기억이 그녀를 잠못이루게 하지만 크리족 최강 부대 스타포스의 일원으로 나서기를 주저치 않는다. 수백만 년 째 크리 족과 전투를 벌여왔던 스크럴 족들 가운데 암약했던 스파이를 구출하기 위해 나선 작전, 리더인 욘 로그(쥬드 로 분)의 지침과 다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비어스는 자신의 본능적 판단에 따라 스크럴과 대치하다 그만 뜻밖의 행성에 불시착하게 된다. 

그렇게 영화의 시작은 우주 최강 크리족의 전사가 되기에는 '감정 조절'에 문제가 있는 존재, 하지만 전투에 있어 그 누구보다 열혈적인 전사 비어스로 부터 시작된다. 과연 비어스는 문제가 있는 것일까? 

외계인으로 도착한 행성, 알고보면 지구에서 그녀는 스크럴을 쫓는 과정에서, 아니 늘 자신을 괴롭히던 기억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1995년의 닉 퓨리를 만나게 된다. 최강 크리족의 전사, 하지만 영화가 시작한 이래 비어스라는 크리족의 전사를 '충동'하는 건 그녀의 기억과 즉각적인 판단이다. 이런 그녀의 행동에 대해 크리족은 전사로서의 능력이 미흡하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그녀가 자신의 귀 뒤에 붙여진 크리족의 낙인을 떼어버리듯 그 '미흡'한 그녀의 특징은 바로 행성 지구에 사는 '인간'의 특성이다.

크리족은 그녀를 판단할 때 그녀가 여자이냐, 남자이냐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저 '전사'로서의 적절함 여부뿐이다. 선배이자 리더인 욘 역시 마찬가지다. 즉, 충동적인 듯하지만 알고보면 우리가 흔히 '인간적'이라 하는 그 '특성'으로 비어스는 자신을 괴롭혔던 기억을 찾아가고 미 공군 기지에 먼지 쌓인 기록물 속에서 공군 장교 캐럴 댄버스를 찾아낸다. 

 

 

비행은 평등하다, 하지만 
비어스가 찾아낸 과거의 자신은 바로 미 공군 소속의 전투기 조종사이다. 하지만 그녀가 공군에 소속되어 있던 1989년 아직 미 공군에는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없었다. 이제는 준장이 된 지니 레빗, 그녀가 온갖 차별과 편견과 제약을 뚫고 첫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된 것이 1993년이니 당연히 1989년 캐럴에게 그런 기회가 있을 리가 없다. 

여성이 전투기를 몰았던 것이 지니가 처음은 아니다. 우리의 여성 독립 운동가 권기옥 열사는 조선 총독부와 천황궁을 폭격하겠다며 김구 선생께 비행기를 달라던 최초의 여류 비행사였다. 2차 대전 당시 소련의 여성 전투 비행사들은 목재로 만들어진 동체 위에 캔버스 천을 두른 비행기를 몰고 전장에 나섰다. 미국 역시 여성 조종사들이 활약했다. 

그러나 여성 조종사들이 한 몫을 했다고 해서 제대로 대접을 받았던 건 아니다.  그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던 소련의 여 조종사들은 그녀들이 꼼꼼하고 철저하게 일에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이 정비한 비행기에 대해 남성들은 탐탁치 않아했다. 심지어 그녀들이 폭탄을 싣고 나선 비행기는 연습용, 낮이라면 결코 불가능했을 이 비행을 성공시키기 위해 그녀들은 '밤의 마녀들'이 되어야 했고, '마녀들'은 쉬이 돌아오지 못했다. 참전한 전쟁에서 자신의 몫을 찾으려 했던 미국의 여성 조종사들에게 주어진 건 보다 많은 남성들이 전장에 나설 수 있도록 후방에서 전투기 이동을 돕는 정도였다. 

2차 대전 당시 열악했던 여성 조종사의 지위는 시간이 흘러 달라졌을까? 1993년에서야 지니 레빗이 사상 최초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는 사실, 아니 1993년만이 안다. 우리나라에 도입한 f-35기종에서는 2015년에서야 첫 여성 조종사가 탄생했다. f-35의 첫 여성 조종사가 된 크리스틴 마우 중령의  '비행은 평등하다. 비행기는 조종사의 성을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던 소회는 몇 십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은 '기회의 평등', 그 멀고도 멀었던 길을 설명한다.  우리나라 역시 2002년에야 첫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탄생했다.

<캡틴 마블>은 바로 이런 아직까지도 기회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건 특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흑인의 신화적 서사를 그린 <블랙 팬서>처럼, 또 하나의 '인간 종족'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시작은 '인간'이다. 크리 족에 비해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이었던 비어스, 하지만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 속 1989년의 캐럴 댄버스는 같은 '인간 종족' 내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그녀의 꿈조차 살리지 못한 채 웃음거리가 되고, 배척 당했다.

가장 가난한 대륙의 흑인 국가가 세계 최강의 지하 자원을 활용하여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되듯이, 1989년의 비행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캐롤은 크리족 '마벨'이었던 로슨 박사의 위험한 비행에 조종간을 잡게 됨으로써 우주 최강의 전사로 거듭난다. 더 이상 전투기가 필요없는 전사, 그녀를 제약했던 크리 족의 딱지마저 떼어버린 그녀는 자신의 힘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크리족 전사를 넘어 우주 최강의 '캡틴 마블'이 된다. 마치 흑인 부족들의 와인 블랙 팬서가 어벤제스 중 최강 전사가 되는 것과 같은 마블 환타지의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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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막강 전사 캡틴 마블 
동시에 그렇게 지구에서 기회를 잃었던 여성 캐롤이 크리족 마벨 로슨 박사를 통해 체득한 우주의 힘을 통해 캡틴 마블의 시작이 되고 동시에 우주의 공격에 맞선 쉴드의 시초가 된다. 그렇게 <캡틴 마블>은 마치 <스타워즈>4,5,6 편 이후에 <에피소드1>을 통해 별들의 전쟁과 그 속에 얽힌 인연, 혹은 악연이 시작을 다루듯, 이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통해 마치 노아의 홍수처럼 세계의 반과, 영웅들의 반을 휩쓸어 버리고 나서야 에덴 동산의 전설을 이야기하듯, 젊은 날의 퓨리가 만난 캡틴 마블을 통해 <어벤져스> 그 유래의 실마리를 풀어낸다. 

동등한 인간으로 자신의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했던 한 여성, 그 여성의 '인간적인 노력'의 성향이 외계의 힘을 얻어 극강의 전사로 거듭한 <캡틴 마블>의 이야기는 그간 마블 시리즈의 히어로들처럼 전형적 성장 서사의 원형을 가진다. 그녀를 인정했던 로슨 박사의 죽음, 또한 그녀를 품었던 크리 족의 정체를 알고 거침없이 크리족을 배척하며, 자신의 사부인 욘과의 대결을 마다하지 않는 전사로서의 캡틴 마블은 거침없다.

하지만, 그런 거침없음은 동시에 캡틴 마블의 '인간적 매력'을 반감시킨다. 그간 대부분의 마블의 히어로들이 지난한 개인적 서사를 통해 고통받고 단련받으며 하나의 전설적 존재로 성장해 왔던 것과 달리, 캡틴 마블의 서사는 당대의 '페미니즘'이라는 추세의 무게 때문일까, 거침없는 용감함에 방점을 찍는다. 그녀의 과거 동료로 등장하는 마리아 램보와 그녀의 딸 캐릭터 역시 전형적이다. 그런 것이 최강의 히어로의 장점임과 동시에, 매력적인 캐릭터로서의 단점이 되고 만다. 또한 그녀의 거침없는 질주 과정에서 정작 그녀와 애증의 갈등을 일으켜야 할 욘의 캐릭터를 결국 '찌질하다 싶을'만한 결론으로 이끌면서 <캡틴 마블> 자체의 갈등의 깊이를 얕게 만들어 버리는 것, 이건 캡틴의 막강한 힘으로 인해 싱겁게 끝나버린 전투와 함께 역시 마블 시리즈로서 <캡틴 마블>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일 것이다. 

by meditator 2019. 3. 12. 23:54

2019년 아카데미 상의 결과가 드러났다. 아카데미가 선택한 작품상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꾸준한 인기를 모았던 피터 패러리 감독의 <그린 북>에 돌아갔다. 또한 이 영화에서 돈 셜리 역을 맡았던 마허살랴 알리에게 2017년 <문 라이트>에 이어 두 번째 남우 조연상을 안겼으며 각본상까지 거머쥐며 3관왕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이미 지난 6일 열린 76회 골든 그로브 상 시상식에서 뮤지컬 코미디 부문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며 수상 가능성을 점칠 수 있었던 <그린 북>, 하지만 올해 <블랙 팬서>, <로마> 등 인종 차별과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여러 편 노미네이트 된 가운데 특히 다수의 매체와 평론가들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의 수상을 점쳤기에 <그린북>의 수상을 '이변'으로 보기도 한다. 

참가자들 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고 하거나, 수상 과정에 박수를 치지 않는 등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 <그린북>의 수상, 거기엔 그저 '이변'을 넘어 논란이 되는 지점 또한 담겨 있다. 

사실 왜곡인가, 영화적 상상력인가 
1956년 하나의 버스에 흑인과 백인의 좌석이 나뉘어져 있고 흑인은 뒷문을 이용해서만 버스를 타야하던 시절, 26세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런 차별에 반기를 들었고 '버스 보이콧운동'이 벌어졌다. 그해 5월 미 연방 법원은 '버스에서의 인종 분리는 불법이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로부터 6년여, 하지만 세상은 법의 판결을 그리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특히나 미국 남부는 여전히 해가 저물어 흑인이 돌아다니는 것이 '불법'이라 여겨지는 지역이 있을 정도로 1962년 미국 사회는 아직까지도 인종 차별이라는 구습에 젖어 있었다.

바로 그 시절 입담과 주먹 하나로 살아가던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분)는 자신이 다니던 클럽이 그의 주먹 해프닝으로 영업 정지를 먹는 바람에 당장의 호구지책이 급한 처지가 된다. 그런 그에게 들어온 임시 일자리,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분)의 남부 순회 공연에 운전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까짓 운전 쯤이야 하고 찾아간 면접장, 뜻밖에도 그를 고용한 사람은 '흑인'이었다. 토니에게 흑인이라니 청천벽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신의 집에 잠시 전기를 고치러 온 흑인 기사가 잠시 사용했던 컵을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로 '인종 차별적 편견'이 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흑인의, 그것도 인종 차별이 심한 남부 순회 공연 동안 그를 에스코트할 운전수를 해야 하다니. 하지만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매달 내야 하는 집세 등 '목구멍이 포도청'인 처지가 그에게 기꺼이 그 일을 맡긴다.

당연히 순탄하지 않은 여행, 흑인을 차별하는 남부를 무사히 여행하는 지침서 '그린북'을 가지고, 그를 고용한 사람은 돈 셜리지만, 흑인을 위해 편안한 안식처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아 때로는 운전사인 그가 더 좋은 호텔에 머물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겪어가며 그는 맡은 바 임무를 넘어, 그리고 흑과 백 차별적인 그의 편견을 넘어 돈과의 진실한 우정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토니 발레롱가의 시점에서 그려진 이 남부 순회 공연 그 시작이 된 건 바로 토니 발레롱가의 아들 닉 발레롱가의 시나리오이다. 자신의 아버지와 돈 셜리가 이 여행을 계기로 흑과 백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물고 평생의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 하지만 돈 셜리의 유족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자메이카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일찌기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 음악 재능을 드러낸 돈 셜리, 이미 10대 때 보스턴 팝스와 런던 필하모닉과 함께 협연을 했으며 1961년 발표한 '워터보이'로 빌보드 차트에 오를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음악을 섭렵했던 음악가, 유족들은 <그린북>이 그리고 있는 백인들에게는 어릿광대이며, 그렇다고 흑인들 사회에도 융합하지 못하는 고독한 천재라던가, 게이로 표현되는 등 확인되지 않는 사생활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엔딩 크레딧 자막에 표기된 돈과 토니의 50여 년간의 우정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며 반발하며 영화적 감동의 기반이 된 '사실'에 문제 제기를 했다. 

돈 셜리의 유가족들이 문제제기한 '사실'으로 인해 흠집이 난 <그린북>, 감독은 유족과의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함에 사과를 하면서 그럼에도 자신이 '흑인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는 백인'이 아니며 이 영화가 그런 돈벌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점진적 변화를 위한 작품이라며 영화적 가치를 항변했다. 

결국 아카데미는 피터 패럴리 감독이 '세상의 변화를 향한'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아마도 그건 <그린북>이 가진 차별을 넘어 화합해 가는 과정이 오늘날 다민족 사회 미국에 있어 가장 '모범 답안'이라 생각해서가 아닐까.

 

 

차별의 다양한 층위, 그 해결을 향한 모색
영화의 배경은 흑과 백의 인종적 갈등이 여전한 미국 사회이지만, 거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토니라는 인물이다. 그는 백인이다. 하지만 그는 클럽에서 '기도'일이나 하거나, 그도 마땅치 않을 때는 먹기 시합이라도 해서 벌이를 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가장이다. 이탈리아 이민계, 말투는 그가 머무는 거리의 세계를 반영하듯 거칠고 단절적이며, 오랫동안 떨어져 지낼 아내의 간청으로 편지를 써보지만 맞춤법은 젬병이다. 

말이 백인이지, 백인 사회 내의 계층에서 최하위층에 속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결핍을 백인 남성이라는 허울로 포장하여 흑인에 대한 사회적 적개심으로 자신을 무장한다.  영화 속 토니라는 인물로 표현된 하층 백인 남성이 가지는 차별적 시선은 결국 자기 방어 기제로 부터 출발한다. 즉 그 자신 역시 한 사회의 계층적 스펙트럼에서 결코 고지를 점할 수 없는 계층이 그 차별적 분노를 또 다른 편견과 차별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유럽과 미국 등 백인 중심 사회에서 표출되고 있는 차별적 움직임과 궤를 같이하는 심리적 기제이다. 

이러한 토니와 그가 만난 천재 뮤지션이지만 사회적으로는 고립된 흑인 돈 셜리의 만남을 통해, <그린 북>은 흑과 백으로만 규정지을 수 없는 우리 사회 속 다양한 차별과 구분의 층위를 드러낸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적 구분으로 인한 갈등을 겪고 있지만, 사실은 그 성적인 구분의 스펙트럼만큼 한 젠더 내의 스펙트럼이 폭넓게 존재하고 있다는 학문적 조사처럼, 사회적으로 우리는 다양한 구획을 나누지만, 구획의 층위는 실제 사회 내에서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영화는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토니와 돈 셜리를 통해 접근해 들어가는 차별의 해법은 흑과 백 그 이상 다양한 민족과 계층의 용광로라 할 수 있는 미국 사회의 뿌리깊은 고민에 대한 접근이기도 하다. 제 아무리 자신을 고용한 사람이며, 많은 이의 박수를 받는 이라 하더라도 '흑인'이라는 자신이 구분지어놓은 편견에서 쉬이 나가지 못했던 토니, 심지어 그가 음악 외의 학문에서도 조예가 깊은, 심지어 자신을 고용할 만큼의 부가지 가진 우리로 치면 '양반입네' 하는 듯한 행세가 못마땅했던 토니, 그랬던 그가 우연히 듣게 된 돈 셜리의 연주에서 마음이 움직여진다. 그리고 굳이 남부를 여행하면서 연주를 하지 않아도 될 그가 여전히 강고한 흑과 백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위험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형식적인 보디 가드의 경계를 넘어선다. 

돈 셜리도 다르지 않다. 백인, 자신을 경원시하는 세계의 사람이라고만 밀쳐 두었던 토니에 대해, 쉬지 않고 떠들어 대는 그의 너스레, 자신의 정체성 등으로 인한  위기의 순간 의협심인지, 정의감인지 모호하지만 그의 의지가 되어주는 토니의 모습에 어느덧 돈 셜리의 경계도 흐트러진다. 그리고 그 흐트러진 경계는 위험한 순회 여행의 든든한 동반자를 넘어 우정의 세계로 두 사람을 인도한다. 흑인과 백인,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배운 자와 덜 배운 자, 위태로운 음악의  여정 속에 이 다양한 층위의 모순들이 다르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인정으로 승화되어 간다. 그리고 그 승화된 우정의 해법에 아카데미가 작품상으로 화답했다. 

by meditator 2019. 2. 26. 04:20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속 내용을 두고 '웃음은 우리에게 해악인가?'라고 논쟁하고 살인 사건까지 벌어졌던 <장미의 이름> 속 14세기 중세처럼 엄숙주의 시대도 아닌데 이 시대 참 웃을 일이 없다. 대표적인 개그 프로그램이었던 <개그콘서트>의 뚝뚝 떨어지는 시청률처럼, 우리는 호쾌하게 웃는 대신 각종 토크 프로그램의 비야냥거리고 이기죽거리며 조롱하는 것을 웃음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위트' 와 '촌철살인' 대신 직설적인 언어로 상대방에 대한 거침없는 송곳의 한 마디가 '유머'가 된 세상이라 그랬을까, <극한직업>을 보며 한없이 웃다 나오니 이렇게 실컷 웃어본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기 까지 한다. '유머'코드가 없는 프로그램이나 작품이 없는데, 왜 그랬을까? 어쩌면 우리가 <극한직업>을 통해 만난 웃음이 오랜만이라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극한직업> 그 웃음의 시작은 무엇일까? 그걸 위해 우리는 어떤 때 웃게 되는 걸까란 질문부터 시작해 보자. 크게 두 가지가 아닐까? 속된 말로 우리보다 잘난 놈이 별 거 아님을 스스로 '자폭'하며 드러낼 때,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역시 그와 반대로 상대방에 대한 굳이 경계를 가질 필요가 없을 만큼 만만하다 여겨질만큼 모자르다 느꼈을 때일 것이다. 영화 <극한직업>은 바로 이 우리가 웃을 수 있는 이 두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우리의 경계를 해제시킨다. 

웃다가 정든 마약반 
우선 해체 위기의 마약반, 말이 마약반이지 자신의 기수보다 몇 기수 아래인 동료들이 앞서 진급을 하고, 심지어 마약반의 업무조차 다른 부서에게 빼앗기는 형편, 그래서 대놓고 동료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반장(류승룡 분)을 위시하여, 장형사(이하늬 분), 마형사(진선규 분), 영호(이동휘 분), 지훈(공명 분)이 그들이다. 

대놓고 자신들을 조롱하며 마주한 이웃 수사반에게 자존심대신 그들이 농처럼 던진 '한우 회식'에 기꺼이 끼어드는 자존심 저리 던진 생활인의 모습을 보여준 마약반의 첫 씬으로 이미 관객들은 그들의 동료들이 그들에게 경계심을 늦춘 것처럼 찌질한 그들에게 웃음의 여유를 허락한다. 

 

 

한우 한 점에 자존심을 버렸지만, 그래도 마약반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이들은 동료에게 읍소하여 얻어낸 정보로 이무배(신하균 분)를 잡기 위해 그들의 아지트로 예상되는 건물 맞은 편 치킨 집에 잠복을 한다. 하지만 '잠복'이 무색하게 맞은 편 건물의 진입조차 녹록치 않은 형편, 치킨 배달부로 위장하려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 안타깝게도 치킨집이 폐업을 선언하고, 그 폐점 선언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을 치킨집 점주로 들어앉힌다.  그리고 잠복을 위해 선택한 치킨집이 뜻하지 않은 마형사의 아이템 '수원 왕갈비 통닭'으로 인해 대박이 나게 되는데. 

무엇보다 <극한직업> 속 마약반이 주는 웃음의 시작은 캐릭터와 서사로 부터 비롯된다.  한우 한 점이 아니라도 언제든 무릎끓고 자존심을 헌납할 준비가 되어있는, 아내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며 딸에게는 호구인 전형적인 소시민 마약반 고반장, 얼굴이 자존심이지만 누구도 그의 그 자존심을 알아주지 않는 수원 왕갈비집 아들 마약반 사고뭉치 마형사, 알고보니 유일하게 마형사의 얼굴을 쳐주었던 이게  진짜 걸크러쉬지 할 수 있는 마약반의 대들보 장형사, 잠복 전문가로서 자신의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어쩐지 까칠하지만 그래도 원팀 영호, 범인 검거 한번 못해본 의지 발랄의 지훈까지. 영화 속 그들이 보여주는 웃음은 바로 이 세상사에서 늘 치이거나 밀릴 것만 같은 이 캐릭터들 자체로부터 비롯된다.

거기에 배우들이 애써 웃기는게 아니라, 어쩐지 옆 집에 살 거 같이 어디선가 본 듯한데, 굉장히 신선한 이들 캐릭터 그 자체가 삶의 궤적 속에서 빚어내는 불협화음, 즉 '배수진'의 각오로 퇴직금까지 들여가며 마지 못해 시작한 닭집, 거기에 마지못해 맞이한 손님에게 고육지책으로 대접한 '수원왕갈비 통닭'이 대박을 난다던가, 그래서 '범인을 잡을 것인가, 닭을 잡을 것인가'딜레마에 빠지고,  그럼에도 범인을 잡겠다며 '대박'을 포기하고 들이닥쳤지만 맞닦뜨린 허무한 결과라던가, 이제 정말 포기하고 닭집이나 하려고 했더니 제 발로 들어가게 된 사건이라던가, 인생의 아이러니함 속에 던져진 캐릭터들의 충실한 변주가 어거지가 아닌 웃음을 끝없이 자아낸다. 

그저 웃기기만 하는 게 아니다. 처음엔 자존심은 길 바닥에 내어던져 놓은 거 같은 이들이 좀 많이 모자라 보였는데, 그럼에도 퇴직금까지 던지며 해체 위기에 놓인 자신들의 팀을 위해 '헌신'하는 그들의 면면에 정이 들어 간다. 그들의 잔꾀나 계략은 늘 어설프거나, 운이 나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늘 자신의 삶에 우직할 정도로 충실하다는, 그게 형사일 때나, 닭을 튀기거나, 양파를 썰거나, 닭집 테이블 세팅을 하거나, 심지어 잠복하다 달려가 파를 사올 때에도 달라지지 않는 그 '태도'가 그저 우습게만 보이던 그들을 응원하게 만든다.

 

 

재밌는 이야기, 더 재밌는 배우들의 연기 
심지어, 알고보니 이들이 그저 골칫덩어리 찌질 군단이 아니라, 팀장이 애써 모아놓은 '어벤저스(?)이라는 반전마저도 그저 여느 히어로 물과 달리 이들답게 몸을 던져 처절해지면서 일관성있는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어쩌면 <극한직업>을 보고 나왔을 때 흐뭇하게 재밌었다 라는 감정은 바로 이런 조금은 부족한 듯한 이들이 말 그대로 '고진감래'했다는 소박한 성취가 주는 공감에 기반한 것일 것이다. 물론 우직하지만 늘 치였던 마약반 답게 이들의 '고진감래'는 처절하다. 그 처절함의 정수는 물론 당연히 마지막 길다싶은 선과 악의 결투로 정점을 찍으며 수사물로써의 '서비스'를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심지어 이대로 끝나고 싶지 않다. 되는 일보다 안되는 일이 더 많은 마약반을 한번 더 보고 싶다는 맘이 들 정도로. 마치 6,70년대 인기를 끌었던 구봉서 선생 등이 출연한 휴먼 코미디 영화처럼, 이른바 '서민', 혹은 '소시민'이라 지칭되는 이들의 삶에 근거한 <극한 직업>은  우리 역시 일상의 삶에선 늘 이들처럼 좀 모자르고 치이며 살아간다는 공감의 웃음으로 호응을 얻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최근 딜레마에 빠진 한국 영화계가 주목해야 할 방향이 아닐지. 

이렇게 공감어린 서사와 캐릭터를 통해 관객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배우들이 몫이 크다. 반가운 류승룡의 힘뺀 열연, 그리고 이제는 대세다 싶은 진선규의 마형사,  섹시할 때보다 훨씬 더 빛난 이하늬, 동룡이의 그림자를 벗어난 이동휘,  존재감을 인정받은 공명까지, 이 신선한 조합과 이들의 새로운 열연이 이병헌 감독이 풀어놓은 그물 속에서 펄떡인다. 전작에서 가끔은 뜬금없다 느껴졌던 감독의 엉뚱한 유머조차 살려낸 공은 전적으로 배우들의 몫이다. 

 

 

물론 이들만이 아니다. 앞서 말했던 웃음의 또 다른 포인트인 잘난 놈이 별 거 아님을 자폭하는 캐릭터로 이무배 역의 신하균과 테드 창 역의 오정세는 감초라기엔 그 역할의 진폭이 크다.  전작 <바람바람바람>에서 이미 이병헌 감독과 함께 했던 신하균이었지만, <바람바람바람>의 봉수보다 <극한직업>의 이무배가 더 맞춤옷인 듯 럭셔리한 싸가지 마약업자 이무배의 캐릭터는 신하균의 것이었다. 또한 초반부터 활약했던 신하균과 달리 불과 몇 씬이 아니었지만, 스타일에서 부터 시작하여 무식한 테드 창의 오정세는 발군이다. 이 두 사람의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의 코믹한 포스가 <극한직업> 속 선과 악, 그 웃음의 균형추를 잡아낸다. 








by meditator 2019. 1. 26. 23:47

하늘을 나는 슈퍼맨도 아니고, 밤 하늘을 가르는 배트맨도 아니고, 시대를 가로지르는 원더우먼도 아니고, 물을 가지고 어쩌는 아쿠아 맨이라니, 인지도도, 활용도도 떨어지는 히어로라 했다. 더구나 디시의 2017년작 <저스티스 리그>의 만듦새를 보면 더욱 기대가 되지 않았다.  그간 디시의 작품들, DCEU가(DCextended universe; DC코믹스에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 영화 세계) 최근 <원더우먼>을 빼놓고는 이렇다 하게 주목받지 못하며 마블에 '완패'가 아닌가라는 섣부른 판단이 난무하는 가운데 더구나 저스티스 리그의 주연도 아닌 아쿠마맨의 성공을 점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아쿠아맨이란 캐릭터 자체가 낯설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런데 드라마는 작가 놀음, 영화는 감독 놀음이라더니, made by 제임스 완이란 이름표가 붙은 <아쿠아 맨>은 달랐다. 제임스 완 감독은 이런 예단들을 '기우'로 돌려버렸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스윙키즈>와 <마약왕> 등의 우리 영화의 부진을 뚫고 예매율은 물론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간 DC는 재미없다라는 관객들의 인식을 개선했다는 점에서 <아쿠아맨>의 공이 크다. 

수중 세계의 화려한 복원 
<아쿠아 맨>이 당당히 1위를 차지하게 된 가장 대표적인 원인이라면 무엇보다 DC코믹스 속 수중 세계의 현란한 복원이라 할 수 있겠다. 사라진 고대 도시 아틀란티스를 최첨단 과학 도시로 재연한 것에서 부터, 7왕국의 정경, 문어 토포, 괴수 카라텐 등등의 크리처에 대한 구현 등 시각적 볼거리에서 압도한다. 

시작은 동화였다. 외로운 등대 지기, 폭풍의 밤 그에게 찾아온 아틀라나 여왕(니콜 키드만 분), 그렇게 땅과 바다가 만나 두 세계를 아우를 아서가 태어난다. 물고기 소년이라 놀림을 받던 어린 시절, 수족관에서 수중 생물과 교감하던 그를 지키기 위해 수족관의 수많은 어류들이 도열(?)하는 장면은 아쿠아 맨 탄생의 서막으로 손색이 없다. 

 

 

거기에 <분노의 질주; 더 세븐>에서 인정받은 액션의 장기로, 성장한 아쿠아맨(제임스 모모아 분)아서이 수중 지뢰는 물론, 잠수함까지 너끈히 움직이는 괴력의 향연과 거기에 빌런 블랙 만타의 의미심장한 등장을 통해 슈퍼 히어로 영화의 요건을 갖추어 나간다. 수중 세계 속 옴을 비롯한 7왕국 각 인물들과 크리쳐들의 등장과 그들간의 쟁투는 물 속이라서 한정적인 것이 아니라, 물 속이라 무궁무진해진, 마치 물 속판 '반지의 제왕'을 보는 듯 시선을 빼앗기도록 만든다.

뿐만 아니라 빌런 블랙 만타의 붉은 레이저를 내뿜는 슈트에서 보여지듯 지상 세계에서 불리한 수중인들과, 수중에서 마찬가지로 불리한 지상인들의 액션적 설정과,그래서 더 돋보이는 수륙 양용 아쿠만 맨을 비롯한 능력자들의 설정은 지상과 수중을 오가는 <아쿠아맨>만의 볼거리가 된다. 

신화와 동화로서의 아쿠아 맨
화려한 볼거리와 달리 영화는 전형적인 영웅의 성장 서사를 그대로 답습하는 듯 보여진다. 

아마도 마블이었다면 어땠을까? 마블이었다면 수족관에서 물고기와 교감했던 소년이 잠수함을 들었다 놨다 하는 아쿠마맨으로서의 활약을 선보이기까지 영웅적 정체성을 받아들이기까지 고뇌의 시간을 공들여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즉, 왜 아서가 땅과 수중 세계를 아우르는 '왕'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개연성에 고심했을 터이다. 하지만 영화는 벌코를 통한 아서의 훈련 과정을 아서의 활약 사이에 끼워넣으며 아쿠아맨으로서의 성장 과정에서의 갈등과 서사를 스킵한다. 

 

 

대신 <아쿠아맨>은 수중판 아서왕의 서사적 틀을 가져다 아서의 영웅 등극을 설득하고자 한다.  전설의 아서왕이 마법사 멀린의 도움으로 왕재를 연마하고 그 누구도 뽑지 못한 왕의 상징인 바위 속에 꼿힌 칼을 뽑아내어 왕이 되듯, 그 자신 조차도 등대지기의 아들로서 잠수함을 구하는 등 영웅적 면모를 보이지만 수중 세계의 권좌에는 관심도 없던 '아서'가, 아버지가 다른 동생 옴의 도발로 싸움에 뛰어들고 사지와 마찬가지인 괴물들의 나라에 뛰어들어 아틀란티스 왕의 상징인 삼지창을 쟁취하며 '신화적 설득력'을 선택한다. 바위 속 칼을 뽑은 소년 아서에게 모든 이들이 무릎을 끓고 경배하듯, 삼지창을 가진 아서는 그 누가 뭐라하든 아틀란티스의 왕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아틀란티스 자체가 '신화'적 세계인 한에서 삼지창으로 인하 왕권의 정통성이 무엇이 문제랴. 

거기에 마치 수중 세계의 원더우먼과도 같은 메라와의 만남을 수중판 '피노키오' 등 에피소드를 통해 이어가고 거기에 다짜고짜 키쓰씬까지 애교로 넘겨줄 두 영웅의 격한 액션씬으로 지상 세계를 넘보는 대신 지상 세계와의 평화주의를 내세운 전우애적 사랑을 완결시킨다. 

그렇게 메라와의 사랑이 지상 세계와의 평화주의적 정전 협정과도 같은 것이라면, 그 맞은 편에는 이부 형제 옴과는 마블 시리즈 속 라그나로크의 두 형제 토르와 로키의 생사를 내세운 질투와 경쟁을 벤치 마킹한다. 어머니가 같은 형제이지만 심지어 땅과의 혼혈임에도 형이라는 이유만으로 아틀란티스 왕위 승계에 우선권을 가진 아서의 등장은, 정통성과 순혈성이라는 요소를 혼합해 갈등을 부추긴다. 

 

 
제임스 완의 복선 
하지만 아서와 옴의 갈등은 그저 '신화'적이지만은 않다. 해양 오염의 주범인 지상 세계, 하지만 무책임한 태도에 옴이 내세운 수중 세계의 분노는 분노의 방식을 해일 등을 일으켜 지상 세계를 '진압'하겠다는 식으로 권력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은 문제가 있지만 오늘날 나날이 심해져 가는 해양 오염 문제로 볼 때 분명 설득력을 가진다.
또한 빌런 블랙 만타와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부 설정은 아쿠아맨과의 갈등에, 그리고 집요한 빌런으로서의 블랙 만타의 존재론적  개연성에 필여성을 부여하는 등 논리적 개연성 면에서도 놓치지 않으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렇게 마치 시각적 볼거리의 향연인 것처럼 보여진 <아쿠아맨>, 하지만 파고들면 영화는 수미일관되게 전통적 영웅 신화적 서사와 갈등의 요소를 짜임새있게 배치해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그 풀어가는 방식에 있어 마블이 보다 캐릭터 자체를 품은 세계관에 대한 설득력에 고심하는 것과 달리, 제임스 완은 '신화'적 설정의 치밀한 배치와 그걸 설득해 낼 시각적 배경와 액션에 방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파고들수록 겹겹의 퍼즐처럼 제임스 완의 <아쿠아맨>이 선사한 영화적 재미는 쏠쏠하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고심해서 9첩 반상처럼 차려낸 <아쿠아맨>조차 성기다고 느깨질 정도로 이제 히어로 영화, 아니 영화 자체에 대한 관객들의 시선이 높아졌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높아진 관객들의 시선이야말로 마블이냐, 디씨냐의 양자 대결의 귀추가 아니라 시끌벅적한 홍보와 달리 완성도 면에서 아쉬워 결국 관객들의 발길을 돌리게 만든 2018년의 한국 영화계가 정작 주목해야 할 문제다. 

by meditator 2018. 12. 25. 14:47

토비 맥과이어아니고서는 스파이더맨을 생각할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토비는 거미줄을 뽑아 벽을 타는 스파이더맨이기엔 중후해져갔다. 결국 우리가 영화로 만나던 유일한 스파이던맨같았던 토비 맥과이어는 <스파이더맨> 1,2,3 트릴로지 시리즈를 남긴 채 앤드류 가필드의 <어메이징 시리즈>에 바톤을 넘겼고, 다시 앤드류는 <아이언맨2>에 수다쟁이 까메오 소년으로 등장한 톰 홀랜드에게 스파이더맨을 계승시켰다.  그 뒤로 참여 수업 대신 벽을 타던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이언맨 아저씨의 지도 편달을 받아 어였한 어벤져스 군단의 일원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던졌다. 

 


그렇게 미소년 백인 배우들에 의해 계승되던 <스파이더맨>, 너드라 놀림받기도 하고, 서민형의 히어로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백인 미소년에 의해 승계되었던 스파이더맨의 전통을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이하 뉴 유니버스)>는 새롭게 열어젖힌다.  무엇보다 백인 미소년, 미청년에 의한 '독점'되던 젊은 청년 영웅은 그 누구라도 '방사능 피폭된 거미'에게 물린다면, 그리고 기꺼이 그 거미로 부터 받은 힘을 '사회'를 위해 쓰기를 원한다면 스파이더 맨이 될 수 있다고 정의내린다. 그가 흑인 소년이건, 차원을 달리하는 곳의 '스파이더맨 아저씨건 스파이더 소녀건, 느와르 버전 스파이더맨이건, 심지어 스파이더 로봇을 탄 어린이건 말이다. 그렇게 유일한 히어로였던 스파이더맨은 이제 새로운 세계에서 그 누구라도 가능한 다차원의 히어로로 거듭난다.

누구나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다. 
그동안 스파이더맨이 다른 시리즈, 다른 배우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영화 속 어떤 강력한 악당을 만나도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런 '히어로'의 영원불멸성에 대한 허를 찌르며 시작한다. 


 

경찰인 아버지, 간호사인 어머니를 둔 중산층의 흑인 가정의 아들 '마일스 모랄레스', 입신양명까지는 아니지만 자신들이 살던 동네에서 머물러서는 '성공'을 이루기 힘들 거라 생각한 부모님은 우연히 그에게 떨어진 기숙 사립하교의 취학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정들었던 동네, 정들었던 친구들과 떨어져 우리의 특목고 정도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학교로 전학간 마일스. 당연히 그 학교에서 그는 모래알처럼 섞여들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은 공부보다는 아빠와 견원지간인 삼촌과 함께 그래피티(graffiti)를 즐기는 것이 더 좋은 청소년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가난한 백인 가정에서 부모님없이 자란 너드(nerd) 피터 파커를 중산층의, 하지만 여전히 백인 중산층 사립학교에서는 '너드' 취급을 당하는 흑인 청소년 마일스를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그를 둘러싼 두 개의 세계, 한때는 삼촌과 함께 주먹도 좀 써봤지만,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 안정을 위해 경찰관이 된 아버지의 '신분 안정, 혹은 상승'의 세계, 그런 아버지와는 불화하며 벽에 그래피티를 하며 삶을 즐기는 듯한 삼촌의 불안정적이지만 자유로운 세계, 밤에 학교를 빠져나와 삼촌과 지하철을 따라 간 으슥한 폐건물 벽에 한껏 자신의 미적 재능을 뽐내는 마일스는 삼촌의 세계에 경도되어 있다. 

그런 마일스가 그곳에서 우연히 방사능 거미에 물리고, 뜻밖의 '스파이더'한 능력에 경악하며 다시 찾은 그곳에서 그는 다시 우연히 스파이더맨의 죽음을 목도한다. '거미줄'이 만능인 양 힘겹더라도 결국은 악당을 물리치던 스파이더맨이었는데 범죄 대부 킹핀의 공격 앞에 무기력하게 숨을 거두고 만다. 


 

죽음을 맞이한 스파이더 맨과, 아직 '스파이더'한 능력을 조정도 못하고, 그 능력으로 지구를 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마일스, 그런 그가 '히어로'의 길을 향한 유일한 연결 고리는 죽어가는 스파이더맨의 부탁이었다. 하지만, 부탁은 언감생심, 킹핀의 하수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은 커녕 벽을 타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던 스파이더맨마저 그의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 상황, 그런 혼란스런 고민을 믿고 의논할 삼촌은 행방이 묘연하고, 고민하는 그의 앞에, 킹핀의 실험으로 흐트러뜨려진 평행 우주 속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 맨(?)들이 등장한다. 

학교에서 마주친 동급생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다른 차원에서 마일스처럼 가장 친한 친구였던 스파이더맨을 잃고 방황하던 스파이더 그웬, 1930년대 사설 탐정으로 활약하던 버버리 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스파이더 느와르, 아버지가 남기고 간 스파이더 로봇 'sp//dr'을 조종하는 미래에서 온 페니 파커, 돼지인지 스파이더맨인지 헷갈리는 명랑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스파이더 햄, 거기에 마일스가 살던 곳과 똑같은 평행 세계에서 온 심지어 메리 제인과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한 중년의 배나온 루저가 되어가던 피터 B. 파커, 이들이 벌려진 세계의 틈 사이로 마일스의 세계로 와 '스파이더 군단'이 된다. 

3D 에니메이션으로 구현된 <뉴 유니버스>는 마일스의 현실에 삼촌의 세계인 그래피티한 영역을 더하고, 차원의 분열, 거기에 다시 다른 차원에서 온,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만화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들을 더하는 방식을 2D의 만화적 공간을 옮겨온 듯한 '효과'를 통해 구현해 낸다. 만화 속 효과음이 그래도 'BOOM'하는 글씨로, 효과 음향과 함께 등장하는가 하면, 만화 책처럼 화면을 여러 개의 다층적인 프레임으로 분할하여 다층 세계에서 온 스파이더 군상을 조합해 낸다.  거기에 종종 차원의 분열이 낳는 충격파 등의 다양한 특수 효과를 더하여 3D와 2D를 오가는 듯한 그래서 현실적이지 않은 차원 이동의 상황과 거기에 튀어나온 캐릭터들의 현실감을 생생하게 살려낸다. 마블 코믹스의 만화를 보는 것인지, 에니메이션을 보는 것인지 홀려서 두 시간 여를 보내고 나면 어느덧 마일스는 어엿한 스파이더맨이 되어있다. 


 

그간은  백인 청년들이었지만, 이제는 흑인 청소년이라도, 여성이라도, 중년의 아저씨라도, 아직 어린이라도, 심지어 동물이라도 그 누구라도 기꺼이 '책임감'을 가진다면 정의의 수호자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다는 명제를 구현해 내는데 가장 절묘하면서도 화려한 방식이 바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이다. 

여전한 성장 동화 
하고 싶은 것만 하고팠던 소년 마일스는 거미에게 물려, 그리고 죽어가는 스파이더맨의 부탁으로 엉겹결에 영웅의 세계에 발을 들이민다. 하지만 영웅은 커녕, 자기 자신조차 가누지 못하는 이 소년, 그런 그가 마일스 삼촌의 정체, 그리고 역시나 뜻하지 않은 그의 죽음을 마주하고, 다른 차원에서 온 '스파이더'들의 도움을 받아, 마치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을 성장시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이언맨처럼, 특히 다른 차원에서 온 또 한 명의 피터 스파이더 맨의 지도 편달 아래 '스파이더 맨'으로 성장해 나간다. 

에니메이션 <스파이더 맨 뉴 유니버스>는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스파이더맨의 세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한다. 하지만 그 새로운 영상적 실험을 채워가는 건 여전한 소년의 성장담이자, 영웅의 자기 정체성 수용 서사이다.  영화 속 피터는 삼촌의 죽음을 통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교훈을 얻어가며 스파이더맨이 되어 잠시 들떴던 자신을 정리하고 책임감있는 영웅으로 거듭났다. 그렇듯 또 다른 차원에서 온 피터의 도움을 받아 흑인 소년 마일스가 스파이더 맨의 정체성을 수용하고, 삼촌의 죽음을 통해 '정의'로운 영웅의 자리를 기꺼이 맡는다. 


 

그리고 이 방식은 그간 헐리우드 영화가 전통적으로 이어온 '청년 진보'와 '어른 보수'의 승계와 계승, 그리고 화해이라는 양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소년 마일스에게 아빠는 그저 고루했던 어른의 세계를 대변하는 인물일 뿐이었다. 그런 아빠 대신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삼촌, 심지어 그와 취미가 통했던 애런 삼촌의 세계에 경도되는 건 당연했다. 더구나 과중하면서도 숨막히는 학교 생활에 지친 마일스이기에. 

하지만 영화는 마일스가 경도되었던 애런 삼촌의 실체를 뜻밖의 존재로 맞닦뜨리게 하면서 그가 경도되었던 자유 분방한 세계의 무책임함을 '회의'하도록 만든다. 반면, 그저 고루하고 가부장적이기만 했던 아버지, 심지어 스파이더맨이 싫다던 그 아버지가 그럼에도 위기의 상황에서 '책임감'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게 함으로써, 스파이더 맨이 된다는 건 바로 그런 아버지의 세계로의 진입이란 메시지를 담아낸다. 물론, 그저 아들을 성공으로만 밀쳐넣었던 아버지가 마지막 아들의 그래피티를 경찰서 벽에 허용하는 '관용'의 너그러움을 보임으로써 두 세계의 '화해'도 놓치지 않는다. 

화해는 비단 이 세계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다른 평행 세계에서 온 피터 B파커는 자신의 과거, 즉 일만을 위해 달려오다 자신을 잃어버렸던 자신의 과거와 '화해'했고, 죽은 스파이더맨을 대신한 마일스의 본의아닌 교육과 이 세계 붕괴 과정에 대한 책임있는 역할을 통해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일이 가치있다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어른'의 성장을 그려내며 스파이더맨의 후일담까지 곁들인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의 정신과 교류하는 스파이던 로봇의 파괴로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의 세계와 이별을 할 수 있게 된 페니도,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도망쳤던 그웬도 저 세계에서건, 이 세계에서건 스파이더로서의 세상을 구하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가운데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하고 성장한다. 각자 자신이 도망쳤던 자기 삶이 던져준 숙제를 성공적으로 해내며 저마다의 성장을 이루어 낸다. 거기에 킹핀이 분열시킨 차원덕분에 외로운 영웅의 과중한 책임감 대신 동지애를 선사하며 스파이더 어벤져스의 가능성을 열어보인다. 

만화책을 보는 듯했다가, 들썩이는 음향에, 현란한 시각적 효과를 곁들여 마치 한 편의 실험적인 뮤직 비디오를 보는 듯했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하지만, 이 화려한 볼거리의 중심에는 지금까지 모든 마블의 영화 속에서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던 고전적인 영웅담의 서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에니메이션이 되었든, 지구의 재벌 철 인간이든, 유전자 변형을 이룬 괴물이든, 몇 십년 동결된 살인 병기이든, 심지어 외계에서 온 신화속 인물이거나, 다차원을 오가는 신비로운 인물이건, 마치 그 모든 영화에 까메로 등장했던 대부 스탠리처럼 다른 소재, 그럼에도 동일한 영웅 신화의 변주, 그 통일성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도 여전히 굳건하다. 

by meditator 2018. 12. 24. 04:55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가장 쉽고 위험한 방법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는 것이다. 
가장 쉽지만, 이것은 사실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않는 것보다 위험하다. 
                                       -이승우, <모르는 사람들> 중


'가짜 뉴스'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이다. 왜 '가짜 뉴스'가 만들어 지는 것일까? 그것을 맹목적으로 '소비'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어떤 '의도'를 가지고 가짜 뉴스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이들의 '불순한 음모'에 대한 의심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무엇때문에 '가짜'가 만들어지는가? 그에 대한 생각을 <안개속 소녀>를 통해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소녀가 사라졌다.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인 외딴 마을, 크리스마스를 앞둔 며칠 전 소녀 애나 루가 사라졌다. 흔한 10대들의 가출? 하지만 부모들은 '순종적이며 성실했던' 딸이 그럴 리가 없단다. 결국 돌아오지 않는 소녀, 마을 경찰들은 수사를 시작하는데 이곳에 형사 보겔(토니 세르빌로 분)과 젊은 형사가 합류한다. 

이른바 '큰' 사건에 대한 감이 남다른 보겔은 이 외딴 마을의 사건에서 '전국민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들 냄새를 맡는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자신을 이런 외딴 마을의 사건이나 맡도록 만들었던 기차역 폭파 사건의 오욕을 만회하기 위해 소녀 실종 사건의 '사이즈'를 키우려 '언론'을 부추긴다. 

찾아오는 관광객이 없이 조만간 문을 닫을 거라는 식당 주인에게 했던 보겔의 장담대로, 아니 그가 언론과 세상에 던져주는 '편집'된 사건에 맞춰 외딴 마을은 북적인다. 어머니의 슬픔은 전국민의 슬픔이 되어 애나의 집 앞에는 애나의 귀환을 비는 촛불들이 줄을 서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관심에 부응할 만한 또 다른 먹잇감, '용의자'가 필요하다 생각했던 보겔은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소년의 카메라에서 자신이 원하는 '인물'을 특정해내 은밀한 척 언론에 흘리고, 어느새 그의 집 창문 밖은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폭죽처럼 터진다. 그리고 언론은 우리 언론이 '가쉽'을 다는 예의 방식으로 용의자의 신변을 낱낱이 까발린다. 

 

 

무엇이 중한디? 사라진 소녀보다 각 자들의 욕망이 
안개에 뒤덮힌 마을, 그 스산한 배경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미스터리'했던 영화는 하지만 보겔의 등장과 함께 '미스터리'보다 더 '미스터리'한 욕망의 용광로로 변화된다. 

노회하면서도 예리한 형사 보겔, 그가 사건을 진두지휘하면서 소녀의 실종 사건은 전혀 다른 각도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사건의 진실이 궁금한 관객와 마치 실랑이를 벌이듯, 그는 과연 '수사'를 하는 것인지, 이 오지로 밀려난 자신의 한풀이를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문제는 보겔만이 아니다. 그의 '초빙'으로 달려온 베테랑 여기자를 비롯한 언론들도, 그런 보겔을 물먹였다는 변호사도 저마다의 '이해 관계'가 먼저이다. 심지어 영화 후반부에 결정적인 단서를 들고 나타난 나이든 여기자의 진심조차 의심스럽다. 그녀가 원하는 건 진실일까? 역시나 보겔과 같은 명예 회복일까? 그런 상황에서 외려 '용의자'로 특정된 가난한 가장의 처지가 안타까울 지경이고,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정신과 상담을 해온 플로레스(장 르노 분)가 '객관적'이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증오'가 중심이었던 과거의 사건가 달리, 오늘날의 사건들이 '돈, 욕망'이라는 마티니 교수(아레시오 보니 분)의 강의는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주제에 가장 가닿는다. 

결국 '사건의 수사', '소녀의 실종'보다 저마다의 이해 관계로 널뛰던 인물들의 욕망은 그것으로 인해 주인공들을 함정으로 밀어넣고, 사건의 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아니 그들의 욕망은 정확하게 또 다른 욕망의 낚시밥이 된다. '소녀'의 가방은 돌아왔지만, 결국 소녀는 딸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과연, 그녀를, 아니 그녀의 시신조차 돌아오지 못하게 만든 건 영리한 범인때문이었을까? 저마다의 욕망에 춤추던 한 편의 쇼와도 같았던 수사때문이었을까? 

 

   

 


<안개속 소녀>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범죄심리학자 도나코 카리시의 베스트 셀러 <속삭이는 자>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출간 즉시 이탈리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600만부가 팔린 이 작품으로 헤밍웨이, 움베르토 에코, 존 그리샴 등이 수상한 프레미오 반카렐라 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학상을 휩쓸었고, 그 여세를 몰아 이 작품의 감독으로 데뷔했다. 

덕분에 영화는 한 편의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듯 128분의 런닝 타임 동안 줄곧 모호한 안개속에서 그 보다 더 의뭉스러운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기 위해 고심한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스토리로 치자면 <너를 기억해>와 비교되며, 뜻밖의 반전은 거의 <유주얼 서스펙트>급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너를 기억해>나 <유주얼 서스펙트>와 달리 이 영화가 '헐리우드' 영화가 아닌 '이탈리아' 영화라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뜻밖의 아이러니한 결말에 이르기 까지 한 편의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끈기를 가지고 진득하게 128분에 집중해야 '노력'이 필요하단 의미이다. 애초에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처럼 썼다는 도나코 카리시 과연 그가 '베스트 셀러' 작가에 이어, 스타 감독이 될 수 있을까? '이탈리아 미스터리'에 대한 우리 관객의 선택이 궁금하다. 

by meditator 2018. 11. 26. 16:44

두터운 외국 장편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아마도 독자가 이 책을 읽고자 하는 그 '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위해서는 절반의 페이지가 넘어가야 하거나, 심지어 2/3정도 되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초반'의 장황한 설명들은 본격적인 '사건'을 위한 치밀하고도 필수적인 주춧돌이다. 1926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간을 2년마다 5편에 걸쳐 만들어질 <신비한 동물 사전> 시리즈에서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가 바로 그 '시리즈'를 위한 장황한 입문서의 역할을 한다.

 

 

돌아온 해리포터 월드
뉴톤 아르테미스 피도 스캐맨더, 줄여서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디메인 분)는 마법 동물학자로 무려 52판에 이르는 <신비한 동물사전>의 저자이다.  후에 그의 책이 마법학교 호그와트에서 교과서로 사용되며 일반 가정에서도 널리 씌이는 책을 쓴 사람답게 동물, 그 중에서도 '마법'의 동물들에 조애가 깊으며 '애호' 정신은 더 깊다. 그런 그가 애리조나 산 천둥새를 고향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미국으로 오면서 1편 <신비한 동물 사전>의 막이 열린다. 

9와 3/4 승강장을 통해 마법 세계로 들어서고 마법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며 지팡이로 갖가지 신비한 마술을 부리고, 벽에 걸린 그림이 살아 움직이고, 도비(집요정)와 유니콘과 불사조가 어우러지는 세계, 그렇게 상상 그 이상의 '마법'적 도구와 배경을 통해 '해리 포터'에 매료되듯이, 금붙이만 보면 정신못차리고 수집하려드는 오리 너구리 같은 '니플러', 피켓이라 불리는 귀여운 푸른 나뭇가지 보우트러클, 코뿔소 저리 가라인 에럼펀트 등의 '진기명기'를 통해 관객들은 대번에 '신비한 동물'의 세계에 매료되어 버린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마법적' 도구와 '마법의 세상'은 진짜 해리 포터의 세계로 낚는 '미끼'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마치 '인간 세상'의 복사본처럼, 이모네의 타박과 텃세를 피해 간 '마법 세계'에서 해리가 만난 마법 세상은 마법사와 '머글(인간), 그리고 학교를 세운 네 마법사의 성향에 따라 그리핀도르, 후플푸프, 레번클로, 슬리데린으로 나뉘어 지고, 이들은 다시 어둠의 마법과 그에 대항하는 '정의'의 세계로 갈라져 끝없이 '대치'하는 갈등과 쟁투의 세계이다. 즉 가장 신기한 마법이라는 관문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곳은 '인간'아니 마법사로서의 자신의 본성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고민, 선택, 그리고 투쟁의 지난한 과정인 것이다. 

 

 

마찬가지다. 그저 신비한 동물을 고향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미국으로 온 뉴트는 뜻밖에 '옵스큐러스(억압된 어린 마법사가 만들어 낸 검은 기운)'로 인해 미국의 마법부로 소환되고 '사형선고'의 위기를 겪게 된다. 그렇게 그저 마법의 동물학자일 뿐인 뉴트는 미국 마법부를 덮친 어둠의 그림자에 대항하며 마법의회 안보국 국장그레이브스(콜린 파렐 분)의 모습으로 암약하던 그린델왈드(조니 뎁 분)를 잡아낸다. 

그렇게 옵스큐러스의 주인공이었던 크레덴스(에즈라 밀러 분)가 마법부의 집중 공격을 받아 산화되고, 주범인 그린델왈드가 체포되며 1편이 마무리되었지만, 그건 그저 '맛보기'에 불과했다. 2편, 완벽무결하게 투옥되었던 그린델왈드는 의기양양하게 영국 마법부 이송 도중 자유로운 몸이 되어 어둠의 세력을 결집하고, 흩어져버린 줄 알았던 크레덴스 역시 영국 서커스단에서 숨어있었다. 그리고, 영국으로 돌아온 뉴트는 '오러'가 되어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데 합류할 것을 종용받는다. 

 

 
 

 

나는 누구인가?
뉴트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때론 그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할 수도 있는 마법부의 방식에 동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존경하는 마법학교 덤블도어 교장(주드 로 분)의 부탁으로 순수한 혈통을 중심으로 한 어둠의 마법 조직을 규합하는 그린델왈드를 저지하기 위해 프랑스로 향한다. 물론 거기엔 프랑스에 있다는 티나(캐서린 워터스턴 분)를 향한 그의 마음도 얹혀있다. 

즉, <신비한 동물사전>의 2편,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에는 이렇게 아직 자신의 길을 결정하지 못한 채 그린델왈드로 인한 마법 세계의 분열 책동에 휩쓸려 들어가는 마법사들의 갈등이 그려진다. 정의의 길을 추구하지만 1편에서 크레덴스를 죽음으로 모는 미국 마법부에 대항했고, 그렇게 거침없이 처단을 선택하는 '마법부'의 방식과는 다른 길을 택하려는 뉴트처럼. 

 

 

무엇보다 그런 고민의 중심에는 이미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그 이름이 등장한 마법사의 순수 혈통 가문인 '레스트랭' 가문이 있다.  가문의 아들들에게는 가계도에 얼굴과 이름이 올려져 있고, 딸은 그저 한 송이 꽃으로만 표현되는 가문, 하지만 그 '순혈'의 집안의 혈통은 부도덕한 아버지로 인해 서로 다른 핏줄의 형제들의 얽힌 인연이 드러난다. 

'동생을 죽이는 형'이란 예언을 신봉하는 첫째, 그 핏빛어린 혈육애에는  첫 번째 아내 이후 부도덕하게 취한 두 번째 아내가 낳은 두 아이, 딸과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와 엇갈린 운명의 가족사가 있다. 1편에서 산화되었던 크레덴스의 자기 핏줄 찾기와 뉴트의 첫사랑 레타(조 크라비츠 분)의 자기 정체성 찾기,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는 의문의 남자와 얽혀들며 이 '가문의 비극'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과 갈등, 그리고 선택은 <해리 포터> 시리즈 초반 마법 학교의 입학 이후 각자의 성향에 따라 그리핀도르 등으로 나뉘어졌던 그 시절 이래, 자신의 이마에 새겨진 표식 등으로 인해 어둠과 정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했던 해리의 여정에 대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어디 해리뿐인가, 때론 그의 적으로, 때론 그의 보호자로 끊임없이 그의 정체가 의심스러웠던 스네이프 교수의 비극적 생애 역시 다르지 않다. 또한 인간과 머글의 사이에서 태어나 '순혈' 마법사들 사이에서 늘 조롱과 놀림의 대상이었지만 그걸 자신의 노력으로 이겨내려했던 헤르미온느의 고뇌 등 <해리 포터>의 모든 이들이 각자 자기 앞의 생에 던져진 질문으로 인해 끊임없이 흔들리며 성장해 나간다. 심지어, 그 어둠의 볼드모트조차. 

 

 

그렇듯 해리 포터 시리즈는 덤블도어 교장의 호그와트 마법학교, 그리고 마법학교를 넘어서 마법 세계를 장악하려는 볼드모트의 어둠의 야욕을 배경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고민하는 청춘들의 대서사시이다. 그리고 이제 책이 아닌 극본으로 참여한 조앤 k 롤링의 <신비한 동물 사전> 시리즈는 예의 그 '마법' 세계 청년들의 자기 정체성 찾기를 2편에서 장황하게 펼쳐보인다.

그리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강력한 '오러'의 직책을 거부하던 뉴트는 자신의 눈 앞에서 사랑했던 레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린델왈드를 막아내기 위해 목숨을 잃어가는 걸 보고 결연히 그린델왈드에 대항 전선에 앞장설 것을 결심한다. 어두웠던 자신의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늘 갈등을 느꼈던 레타는 그러나 결국 그린델왈드의 손을 잡는 대신,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여 그의 야욕을 막아선다. 그리고 이미 '옵스큐러스'를 통해 자신이 '어둠'이라 확신했던 크레덴스에게는 뜻밖의 형제가 등장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코왈스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린델왈드에게 매료된 티나의 여동생 퀴니, 반면 아직은 어둠의 속으로 뛰어들지 않은 내기니(수현 분)그렇게 각자 자신의 길을 '선택'하게 된 이들, 그리고 이제 결연했던 불가침의 약속을 깨뜨린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 이 양 자와, 그들의 세력이 마법 세상, 그리고 인간 세상을 배경으로 본격적으로 싸움에 나설 것이다. 

by meditator 2018. 11. 22. 20:31

시부모님 두 분은 만주에서 만나셨다고 한다. 그곳에서 결혼을 하시고 일가를 이루시고, 해방과 이어진 전쟁의 격변기에서 두 분은 아이들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오셨는데,  시아버님의 형제분은 그곳에 머무르셨고, 시어머님의 동생분들은 고향인 북쪽에 머무르셨다. 그리고 몇 십년 후, 아버님의 동생분, 시숙부님과 그 식솔들은 '조선족'이 되었고, 시어머님은 '이산 가족'이 되었다. 아마도 시아버님이 내려오시지 않았다면, 남편의 일가도 '조선족'이란 이름으로 지칭되었을 것이다. 한반도의 비극적 역사가 품은 '지정학적' 탄생의 슬픈 설화와도 같은 이야기, 하지만 그 '비극'은 현재로 오면 '편견'과 '사회적 문제'로 귀결된다. 그 역사와 현실의 행간에 대해 재중동포인 장률 감독이 '페이소스'짙은 이야기를 건넨다. 


 

사랑, 그 무너져버린 아집의 노래여
시작은 그렇다. 마치 홍상수의 영화를 보는 듯 '사랑의 수작', 그 와중에 있는 남자와 여자다. 이른 아침 군산의 터미널, 윤영(박해일 분)과 송현(문소리 분)이 내린다. 이혼을 했다는 선배의 아내 송현에게 다짜고짜 윤영이 군산 행을 제안했던 것, 윤영 때문에 군산까지 왔다며 타박을 하지만 송현도 '이혼'의 잔영이 남은 서울을 떠난 것이 싫지 않은 눈치다. 윤영과 함께라 더더욱. 

그렇게 막 시작하는 연인인 듯한 두 사람은 허르스름한 칼국수 집에서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고, 송현이 먼저 쉬고 싶다며 '민박'을 수소문한다. 그렇게 찾은 민박집, 손님을 가려 받는다는 민박집에 다가선 두 사람을 cctv가 먼저 맞이하고 문이 열린다. 응대하는 건 늙수구레한 남자(정진영 분), 그 남자에게 송현은 대뜸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냐며 반색하고, 윤영은 어쩐지 그 집에 들어서는 뒤가 무겁다. 

아니나 다를까, 민박 집에 들어설 때만 해도 설레이던 커플이었던 두 사람은  민박집 주인 남자의 등장으로 삼각 관계, 아니 노골적인 엇갈림이 시작된다. 방을 하나 더 잡으며 대놓고 윤영에게 거리를 둔 송현은 남자로 인해 상처받은 자신을 치유해 줄 것같다며 민박집 남자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한다. 그런가 하면 송현과의 밀월을 꿈꾸다 상처받은 윤영에게는 cctv의 그림자가 다가서는데. 


 

이 엇갈린 사랑의 계기 중 하나는 '일본'이다. 전라북도 북서부의 중심지인 군산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평야지대의 관문으로 일찌기 고려 말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을 받은 이래, 일제 시대 미곡 반출을 위한 도시로 급성장한 곳이다. 군산에 내리자 마자, '일본같다'며 반색한 송현의 호감은 일본으로 부터 왔다는 교포 민박집 남자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호감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자폐증인 딸을 돌본다는 그의 미담은 '기댈 곳'을 희망하는 윤영의 의지가지할 데 없는 마음을 부풀게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송현의 기대에 대해 윤영이 윤동주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일본이었다는 지적과 함께, 일본스런 군산의 곳곳에 상흔처럼 남겨진 일본 침략의 증거들을 보여준다. 군산의 역사는 의구하지만, 그곳에 관광객처럼 내려온 송현에게 군산은 그녀를 매료시키는 '일본'같은 곳 그 이상이 아니다. 그런 그녀의 부푼 기대 뒤로 무거운 일본어로 고백하는 민박집 남자 아내가 죽음에 이른 사연과, cctv의 주인공이던 민박집 딸(박소담 분)의 외사랑은 결국 '밀월 여행'이던 송현과 윤영의 여행을 '파국'으로 이끈다. 역사로서의 일본과, 일본과 한국의 인연인 민박집 부녀, 그리고 그로 인한 오해의 장벽, 아니 어쩌면 대뜸 일본스럽다며 밑도 끝도 없는 설레임과 호감으로 시작한 섣부른 송현의 군산 여행이 자초한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 '파국'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얽혀있는 '현재형'인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상징한다. 


 

 


군산으로 부터 온 거위 
그렇게 일본과 한국의 '경계'로 등장한 군산, 하지만 그곳은 또 다른 '인연'의 시작이다. 군산 터미널에 내려 익숙해 하던 윤영, 서울로 돌아와 다시 시작되는 '에필로그'이자 어쩌면 '주제'가 되는 이야기가 닿는 지점은 윤영은 왜 군산에 갔을까이다. 

말이 시인이지 시을 쓴 지가 어언 10년, 사업을 하던 아버지에게 용돈이나 타쓰는 허우대 멀쩡한 백수 신세인 윤영, 그러나 그와 아버지는 한 집에 살면서도 '남'이나 다름없는 관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연변에서 일하더 온 도우미에게 대놓고 빨갱이라 욕을 해대고 아직도 해병대 옷을 입고 전우회에 출근하며, 밤이면 그녀의 방 손잡이를 들썩이는 전형적인 '꼰대' 아버지에게 그 누구라고 정을 붙이겠나. 그런 윤영의 마음은 귀가 들리지 않는 아버지의 친구 분께 '돌아가셨다'라는 농 속에 진담처럼 깃든다. 


 

그런 그가 아버지가 마당에서 기르는 거위에게 '영아'라며 말을 건넸다며 '치매'를 걱정하는 도우미의 말을 듣고 아버지가 계시는 전우회에 수박과 참외를 사들고 찾아간다. 그리고 송현과의 밀월을 핑계로 군산을 찾아간다. 

윤영을 영아라고 부르던, 잘 웃으셨다던 어머니의 고향, 군산, 그런데 윤영은 어릴 적 중국인 친구를 둔 아버지 때문에 화교 학교를 다니고, 술이 취해 '거위를 노래하다(咏鹅)를 불러제끼며, 거리에서 연변 동포 시위자의 진위를 대번에 알아볼만큼 '연변'말에 해박하다. 그런가 하면 알고보니 도우미 아주머니의 고향이 윤동주 시인의 고향이었으며 윤동주 시인과 인척 관계라는 사실에 친척이라도 만난 양 반색을 하며 두 손을 잡고, 다니던 치과의 하룻밤을 빌어 저 멀리 윤동주 시비를 지켜본다. 과연 그에게 익숙한 연변어와 친숙한 중국어, 그리고 윤동주 시인에 대한 반가움 이상의 울컥함은 어디로 부터 비롯된 것일까? 군산이 고향이라던 그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을까? 송현이 말하던 윤영의 어중간함은 어디로 부터 비롯된 것일까? 

한중일 식민지 트라우마 
두 남녀의 '사랑의 수작'을 날실로 엮으며, 그로 인해 '주유'하게 되는 군산과 서울을 오가며, 장율 감독은 예의 전작 <춘몽>, <경주>, <이리>처럼 지정학적 공간을 배경으로 그곳에 머무는 인간들의 과거와 현재를 더듬는다. 그리고 그 궁극에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라는 지리적 공간을 배경으로 흩어진 '한민족'의 서로 다른 운명이 빚은 아이러니한 관계를 짚는다. 

윤동주가 작은 할아버지여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살아 오늘날 빨갱이 소리를 들어야 하는 도우미나, 연변 동포 시위에 적극 가담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중국 동포로 착각하는 아줌마에게 참을 길없는 불쾌감을 표명하는 한때 '운동권' 여성, 그리고 그 여성이 무한히 호감을 표명하는 일본스러움과 일본에서 돌아온 재일동포는 2018년에도 지속되는 한중일 관계의 비극성을 드러내 보인다. 


 

왜 우리는 우리를 식민지로 삼은 일본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의적인 반면, 중국이나 중국 동표에게는 '빨갱이'라며 낮잡아 보는 걸까? 6,25전쟁에 참전했떤 역사적 기억 때문일까? 거기엔 유선영 교수가 정의내린 '식민지 트라우마'의 깊은 상흔이 있다. (유선영 지음, <식민지 트라우마>, 2017) 일본이 '서구 열강'의 상징과도 같은 압도적 문명으로 조선을 강타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던 그 압도적 열패감은 이어 일본이 만주로, 중국으로 식민지 전쟁을 확대했을 때 거기서 빚어진 일본에 이은 이등 국민으로서 삼등 혹은 식민지민 중국인을 바라봤던 상대적 우월감, 혹은 민족주의적 히스테리가 유구하게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심지어 여전히 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중국을 호시탐탐 싸구려나 만드는 나라로 얕잡아 보는. 

하지만 그런 우리의 '허위 의식'은 지정학적 조건으로 규정된 얽힌 인연 모두를 '타자'로 만든다. 밤을 도와 비로소 백화의 칼국수 집을 찾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민박집 딸처럼, 혹은 어머니를, 아내를 대놓고 드러내어 그리워하지 못하는 윤영와 그의 아버지처럼, 일본이든, 한국이든, 혹은 중국이든 그 모든 인연을 정착하지 못한 이방인으로 만든다. 

어쩌면 정답은 일찌기 <삼포 가는 길>에서 술집에서 도망쳐 영달이 사준 삼립빵 2개와 달걀 2개를 받고 고향으로 떠났던 그 백화가 백발의 백화(문숙 분)로 어찌어찌 하여 군산 한 귀퉁이에서 일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하며 머무는 곳이 고향이라며 탁배기 잔을 기우는 그 쓸쓸한 정의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마치 유행가 가사의 한 구절처럼. 그러나 우리는 유행가도 아는 그 사실을 떨쳐내지 못한 채 여전히 각자의 가슴에 낙인처럼 떠나온 곳의 이름표를 다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by meditator 2018. 11. 16. 00:28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르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영화를 개봉한 줄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르는, 늘 그래왔지만, 점점 더 모르게 되는 홍상수의 신작 영화 <풀잎들>이 10월 25일 개봉했다. 

 

 

잔잔한 바람에도 열심히 흔들리는 카페 앞 고무 대야 안의 풀잎들, 그렇게 시작되는 영화는 대번에 시를 기억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김수영의 <풀>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골목 안 커피집이 있을 것같은 않은 곳에 자리잡은 커피집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 그리고 거기에 더해 그 근처 식당에서 마주한 사람들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우는 풀, 풀잎들 딱이다. 

홍상수도 늙고, 그의 페르소나도 늙고- 단풍
한참 때 통영에서 날리던 노배우(기주봉 분)는 이제 함께 극단을 하던 대표와도 틀어지고, 한 채 있던 집마저 팔아 써버리고 여자 후배에게 방 한 칸을 적선하는 처지이다. 말로는 월세는 내겠다지만 어째 그 말조차 미덥지 않다. 한때는 흠모했을 지 존경했을 지 모를 선배 앞에서 원칙이라 어쩔 수 없다며 나즈막하면서도 완강하게 거절하는 후배, 
그리고 역시나 후배인 듯한 소설가에게 함께 제주도에 내려가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고 청을 넣는 한때는 연극인이었으나 이젠 글을 쓰겠다는 늙수구레한 남자(정진영 분)의 추파인지 청탁인지 모를 말 역시. 글은 혼자 쓰는 거라는 거절에 부딪친다. 

 

 

유지태였고, 김태우였고, 유준상이었으며, 이선균이었던 홍상수의 페르소나들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이제 기주봉이고, 정진영이 되었다. 여자만 보면 어떻게 해보려는 그 예의 습관성 바람은 방식과 방법은 달라졌어도 여전히 그 본성을 놓치지 않는 듯 보이지만, 한때는 잘 나가는 대학 교수였고, 영화 감독이던 그들은 어느덧 현업에서 밀려나고 멀어진 본의아닌 '은퇴자'들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북촌인지 서촌인지, 늘 홍상수의 영화 속에서 배경이 되던 여전히 한옥이 배경이 되는 그곳은 <풀잎들>에서도 여전하다. 오가던 사람들이 얼마 되지 않는 인연으로 혹은 한 술집에서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합석을 하고, 술을 나누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방식 역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때는 그 밤새도록 '연애'를 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며 공회전을 해도 언젠가는 돌아갈 '현장'이 있던 그들과 달리, 이젠 굳이 불러주는 곳이 없는 감독의 페르소나들 때문일까, 어쩐지 동네조차도 삶의 현장에서 멀어진 '노인정'같다. 그 사이에서 미래를 기약하며 한복을 빌려입고 사진을 찍으며 낭랑하게 웃는 젊음들이 불협화음처럼.

그건 비단 홍 감독이 나이가 들어서, 그의 페르소나들이 나이가 든 사람들이어서만은 아니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기세 좋게 청룡 영화상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고, 이어 1998년 < 강원도의 힘>으로 감독상을 거머쥐며 90년대 문화의 대표 주자로 등장했을 그 시절, 홍상수라는 사람의 화법이 통하던 그 시절은 그 '바람'같은, 표리부동한 비도덕적인 인간들이나마 그래도 세상에 발 디밀어 살아갈 여지가 있던 시절이다. 그들이 밤 새워 논하고 어울리던 그 허황되고 공허하던 문화라던가, 인간이라던가, 사랑이던가 하는 것들이 그래도 감독의 비아냥을 받으며 삶의 한 자리로 '포용'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이십여년, 그 바람같던 주인공이 되어버린 감독 자신이 영화 개봉 소식조차 세상에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개인적 사정은 그렇다치고, 거기에 더해 어쩌면 그보다 더 그가 영화를 통해 말해왔던 것들이 '자본'의 세계가 되어버린 영화, 혹은 문화라는 이름의 '상품'의 세계에서 '별책 부록'은 커녕, '잡담꺼리'조차 되어지지 않는 처지 때문일까, 그 어느 때보다 <풀잎들>의 공간은 '멈춰진 세상', 혹은 '방기된 세상'처럼 '무위'롭다. 그런데 그 '무위'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기력하게 전해진다. 

 

 

그리고, 그럼에도 아직 살아가야 할 풀잎들 
그렇게 여전히 살던 근거지 통영을 떠나 서울 하늘 아래 한 몸 뉘일 곳을 찾으며 삶의 터전을 마련하려 한다던가, 무기력한 삶에 여자와 글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 한다던가 하는 풀잎이고 싶지만 어느덧 삶의 잎사귀가 말라가는 '단풍'들의 맞은 편에, 진짜 풀잎들이 있다. 

통영에서 온 노년의 배우와 후배의 대화를, 그리고 까페 밖에서의 글 좀 써보겠다는 한때 연극 배우 선후배를 대놓고 엿듯던 여성(김민희 분), 한때 연극배우인 신참 작가의 같이 제주도에 내려가 펜션을 빌려 글을 함께 쓰자는 노골적인 추파인지, 모호한 수작에 대번에 거절을 하고 애인인 듯한 남자를 따라 나선다. 

하지만 그녀가 따라나선 것은 남동생(신석호 분), 한 식당에서 남동생과 미래를 함께 하고 싶은 여성(한재이 분)과 상견례 아닌 상견레로 함께 식사를 한다. 그런데, 미래의 동생댁이 될 지도 모를 그녀에게 대놓고 남동생을 믿냐, 사랑을 믿냐며 어깃장을 놓는다. 

그런가 하면 그런 그녀의 뒤편에서는 얼마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여성(이유영 분)이 그 사랑하는 이의 동료로 부터 애도와 추궁을 오가는 수모를 겪는다. 그녀를 폄하하는 그 남자 앞에서 하염없이 울며 '사랑'을 고백해야 하는 여성은 영화 속을 떠나, 실제로 홍상수의 영화 중 유일하게 해피엔딩이었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을 통해 만났던 김주혁과 이유영의 사랑을 '배려'해주는 자리와도 같았다. 저 세상으로 흩어져 버린 사랑, 떠나간 사람의 존재가 커서, 떠나보낸 사람은 설 자리조차 없는 세상에, 감독은 사랑했던 이들을 위한 '추모'의 한 씬을 보탠다. 

 

 

그리고 해가 저물어 다시 돌아온 까페, 역시나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두 남녀(안재홍, 공민정 분)가 그 절박한 감정을 지나 연민으로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을 조롱하고 엿듣기만 하던 여성은 커피 한 잔을 넘어 숨겨온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하는  '단풍'들과 그 후배들의 자리에 합석한다. 결국 우리 옛말처럼 간 사람은 간 거고, 삶은 여전히 다시 이어지는 것이다. 엿듣던 여성이 결국은 죽을 것이라고 비아냥대도, 살아가는 이들은 여전히 그 삶의, 인연의 끈을 이어가게 마련이다. 여전히 까페 앞엔 풀잎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따지고 보면, 단풍이래도, 내일 떨어진다 해도, 풀잎은 풀잎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어느덧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90년대의 파릇파릇하던 풀잎이 이제 단풍이 되어가도록 묵묵히 그 세대를 끈질기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고 찬사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사실화처럼 나이가 들어도 제 버릇 개 못주는, 그런데 심지어 이제는 삶의 굴레에서조차 밀려나버린 그 세대를 그대로 그려낸다. 그리고 때로는 얽히고, 때로는 엇갈리며 아직은 눕기에 이른 젊은 풀잎들 또한  놓치지 않는다. 김수영이 그렸던, 아니 '역사 속 민초'라 해석됐던 그의 시 속 풀잎은 아니지만, 여기 또 바람에 연신 나부대는 풀잎들이 있다.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만화경이다. 



by meditator 2018. 11. 12. 04:55

책받침이었다. 프레디 머큐리를 처음 만난 건 학창 시절, 그 시절에 '우상'들은 책받침에 도배되어 있었다. 국내의 아이돌이 아직 등장하기 전이던 그 시절에 '레이프 가렛'과 '숀 캐시디'에 소녀들은 열광했었고, 그들의 얼굴은 학교 앞 문구점에 이른바 '굿즈'같은 책받침 등으로 걸려 있었다.


 

그렇게 외국의 아이돌들이 도배한 사이에 이질적인 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프레디 머큐리, 그 친구는 자칭 '퀸'의 열성 팬이었고, 그의 말에 따르면 프레디 머큐리가 이끄는 퀸은 미국의 아이돌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뮤지션'이라는 것이다.  '포스 넘치는 태도로 마이크를 들고 대중을 내려보는 프레디 머큐리의 모습은 그렇게 책받침을 통해, 열성적인 한 소녀 팬을 통해 각인되었다. 하지만 아직 우리들이 주된 음악적 통로인 '라디오'를 통해 만나는 '퀸'의음악은 그저 one of them, 여러 좋은 음악 들 중 하나 일 뿐이었다. 

그리고 맞이한 프레디의 죽음, 언제나 많은 아티스트들을 소비하는 방식이 그러했듯, 그의 음악보다는 그의 병명이 우리를 더 솔깃하게 했다.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느덧 퀸은 예능과 스포츠 등 다양한 미디어의 배경음악으로 친숙한 존재가 되어갔다.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팬이 아니었던 많은 이들에게 퀸은 그렇게 몇 십년의 세월동안 조금씩 스며들었다. 그리고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했다. 두 말 않고 달려갔다. 1970년대 그들이 활동하던 시기부터 지금 2018년까지 몇 수십 년의 세월을 두고 내 귀에, 내 머릿 속에, 내 기억에 저장된 퀸이 나를 그곳으로 불려 들었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제대로 프레디 머큐리와 퀸을 만났다.  


 

   
보헤미안 프레디 머큐리
그저 영국의 록 밴드였기에, 당연히 영국인이라(?) 생각했던 프레디 머큐리, 하지만 영화 속에서 만난 프레디는 퀸의 무대를 장악한 카리스마 프레디가 아니라 비행기 수화물을 나르는 파로크 불사라(라미 말렉 분)였다. 8세기 경 무슬림에게 쫓겨 인도로 망명한 조로아스토 교를 믿는 페르시아인 집안, 영국령 탄자니아 잔지바르에서 공무원을 하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에 의해 인도 뭄바이에서 보낸 10년, 다시 1964년 벌어진 아랍인과 인도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운동으로 인한 영국 이주, 1969년 대학 졸업 무렵에야 얻은 영국 시민권, 이 장황한 프레디와 그의 가족의 여정은 그 자체로 '보헤미안'이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에 메리 오스틴(루시 보인턴 분)과 결혼 약속을 했으면서도 또 다른 성적 정체성으로 연인을 떠나보내야 하고, 성적인 혼돈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또 다른 프레디 머큐리의 '보헤미안'적 특성을 얹으며 폴, 그리고 짐 허튼에 이르기까지 방황하던 그의 사생활을 통해 프레디 머큐리의 삶에 방점을 찍는다. 


 

팀 스타펠이 탈퇴한 스마일 밴드, 그 밴드의 보컬로 자신을 자신만만하게 추천한 프레디는 변경된 보컬, 거기에 이방인의 외모를 지닌 그에게 호감을 보이지 않는 클럽 관객들을 4옥타브를 자유롭게 오가는 가창력에 화려한 무대 매너로 대번에 사로잡는다. 영국에 살지만 자신의 뿌리를 소중하게 지키고 싶었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거침없이 이름도, 성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택했듯 자신만의 특성을 가장 잘 살려 무대를 빛낸 프레디. 그때이 후로  그는 거침없었다. 존 디콘을 베이시스트로 영입한 스마일 밴드는 1973년 앨범 발매와 함께 퀸이 되었고. 프레디 머큐리와 퀸의 동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책받침에서 각인된 남성적이고 교주와 흡사했던 프레디 머큐리를 기억하고 있는 글쓴이에게 라미 말렉이 분한 프레디 머큐리는 처음에 흡사 '희화화'된 듯이 보였다.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를 횽내낸 게 아니라, 연기했다는 그의 말처럼 그 왜소하고 심하게 툭 튀어나온 치아 분장을 한 라미 말렉의 연기를 통해 영국인이 아니면서 영국인으로 살아야 하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헷갈리는, 그리고 수만 관중이 환호하는 무대를 내려오면 홀로 남겨진 외로움을 감당할 길이 없는 한 사람의 고독을, 무대에선 교주같았지만 마치 악마와 거래를 한 듯 무대 아래에서는 자신을 소진시켜 버리고 마는, 행운인 재능과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한 비애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프레디 머큐리만이 아닌 밴드 퀸
물론 프레디 머큐리, 그 중에서도 그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고독'에 방점이 찍힌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다른 퀸 멤버들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물론, 퀸이라는 밴드 자체가 프레디라는 압도적인 스타에 근거한 그룹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18세기의 나무로 만든 수제 기타를 피크 대신 동전으로 그만이 가능한 연주는 물론, 프레디와 함께 작사, 작곡을 했던 브라이언 메이(귈림 리 분)의 존재감이라던가, 영화 속에서는 그의 '갈릴레오'하는 고음만이 소개되었을 뿐이지만 일찌기 15살부터 드럼치는 보컬로 활동했던 로저 테일러(벤 하디 분), 그리고 2명의 베이시스트를 갈아치고 나서야 비로소 퀸다운 베이시스트로 낙점된 존 디콘(에이단 길렌 분)의 캐릭터에 대해서는 불친절했다. 

하지만 개별 캐릭터에 대한 불성실한 설명 대신, 왜 프레디 머큐리가 아닌 밴드 퀸이어야 했는가에 대해 영화는 명쾌하게 정의내린다. 눈밝게 프레디를 밴드의 보컬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오페라 형식'을 과감하게 도입하려는 프레디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그에 퀸다운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호응함은 물론, 자유분방한 사생활로 밴드가 정체되었을 때 관객과 호흡하는 신선한 시도로 돌파구를 마련하며, 불협화음이었으나 그게 결국은 외골수 프레디의 안전 장치이자, 보완책이었다는 결론, 거기에 병에 걸린 프레디를 기꺼이 품어 안는 동지애까지 왜 프레디가 아닌 밴드 퀸이었는가를 영화는 정의내린다.

또한 연기로 커버한 프레디와 달리, 실제 브라이언인지, 로저인지, 존인지 헷갈릴 만큼 싱크로율 100%의 캐스팅에, 캐스팅 못지 않은 브라이언의 독주나, 맥주를 튀기며 연주하는 로저, 그리고 결코 화려하지는 않지만 베이스다웠던 존 까지 배우들의 연주 장면은 퀸 멤버의 존재감을 구구절절 설명 없이도 드러내보인다.

무엇보다 락에서 부터 디스코, 그리고 술이 질펀하게 튕겨나가는 무대에서 선정적 뮤직 비디오까지, 몸에 딱 달라붙는 발레 의상에서부터 여장 등 음악적 장르에서 부터 엔터테이너적인 측면에서 선구적이며 독보적인 면에서만은 더할 나위없이 호흡이 좋았던 그룹 퀸의 눈 밝은 면면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세대가 달라 퀸이 낯설었던 함께 본 젊은 친구 역시 오래도록 퀸을 알았지만 정작 퀸을 겉핥기식으로 알았던 오래된 세대인 글쓴이와 함께 퀸을, 퀸의 음악을 공감하고 감동했다. 세기의 밴드 퀸, 그거면 되지 않을까. 세대를 막론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퀸은 현재형으로 다가온다는 그 존재감만으로. 



by meditator 2018. 11. 9. 1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