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알라딘>은 어떤 것일까? 이제는 고인이 된 로빈 윌리암스가 더빙을 맡았던 지니가 원맨쇼를 벌였던  디즈니의 31번째 에니메이션 <알라딘>이 개봉된 해가 1992년, 그러니 이 시대의 젊은 세대에겐 에니메이션 속 수다쟁이 지니 조차도 생소할 터이다. 아마도 2019년에 <알라딘>을 본 많은 젊은이들은 윌 스미스의 '지니'의 떠들썩한 한 판 잔치로 <알라딘>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는 노년이 되어가는 세대에게 <알라딘>은 이른바 '전집류'가 유행하던 시대, 아이들을 위한 전세계 명작 선집 50권 중 흥미진진했던 중앙 아시아의 전래 동화였다. 첫 날 밤을 보낸 신부들을 죽이는 왕과 결혼한 세헤라자드가 왕의 맘을 돌리기까지 천일동안 들려준 재미있는 이야기들 중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유럽에 소개한 앙투앙 갈랑이 번역한 번역본에는 들어있지만, 아라비아 원전에는 들어있지 않은 그러나 <천일야화>의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린 <알라딘>.

 

 

신데렐라가 된 소년 알라딘 
전래 동화 속 <알라딘>은 장난끼많은 가난한 소년, 어느날 자칭 삼촌이라는 사람의 손에 이끌려 동굴 속에 램프를 가지러 가게 된다. 입구가 좁아서 '소년'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 하지만 기지 넘치는 소년 알라딘은 램프만 받고 자신을 동굴 속에 가두어 버리려는 '삼촌'의 명령을 어겨 그만 램프와 함께 다시 동굴 속에 가둬지게 되는데, 그때 우연한 '마찰'로 인해 '삼촌'이 준 반지 속 거인을 소환하여 빠져나오게 된다.

사실은 그 '삼촌'은 마법사였고, 그가 준 반지가 마법의 반지였던 것. 또한 집으로 돌아온 알라딘은 램프에서도 또 다른 마법의 거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부자가 되고 공주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물론 위기가 찾아온다. 변장을 하고 나타나 공주를 속여 램프를 빼앗은 마법사에게 램프는 물론 공주까지  빼앗기지만 '반지 거인'의 도움으로 다시 모든 것을 되찾아 행복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가난한 소년에게 찾아온 일확천금은 물론, 아리따운 공주에 미래의 술탄의 자리까지 얹어준 반지와 램프의 마법은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신데렐라'이야기의 남자 버전과도 같다.  에니메이션으로 이를 재연한 디즈니는 가난하고 장난꾸러기였던 소년 알라딘을 거리의 고아 좀도둑으로 변신시키고 소년만이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을 '진흙 속에 묻힌 진주 같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선택받은 자의 운명론'을 더한다.

하지만, 에니메이션으로 돌아온 <알라딘>의 신드롬에는 무엇보다 램프에서 나온 무시무시한 거인을 '지니'라는 애칭을 지닌 수다쟁이 '요정'으로 변화시킨 발상의 전환이 크다. 덩치는 '거인'이며 '푸른 색'이지만, 입만 열면 '모터'가 돌아가듯 쉴새없이 떠드는 친숙한 '요정'이라는 캐릭터는 개봉 당시 남녀노소 <알라딘>에 열광케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2019년에 어울리는 캐릭터들 
무엇보다 알라딘도, 정해진 결혼이 싫어 뛰쳐나온 자스민 공주도, 그리고 푸른 색의 요정 지니도, 천일야화 속 알라딘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주체성을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살려냈다. 그저 램프 속 거인의 도움을 받아 부자가 되고 공주랑 결혼하게 되는 '남자 신데렐라' 알라딘은 부자 알라딘과 거리의 좀도둑 사이에서 고뇌하는 햄릿형 인간이 되었고, 결정적인 순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소원 대신 지니의 자유를 선택하는 주체적인 인간형으로 거듭났다. 정해진 결혼이 거부하고 알라딘을 선택한 자스민 공주는 물론이며, 지니조차도 그저 행운을 가져다 주는 요정을 넘어 '자유'를 갈망하는 캐릭터로 거듭났다. 

2019년에 '실사화'된 <알라딘>은 원작 대신 이런 에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을 이어받는다. 고아로 태어나 거리의 좀도둑되었지만 자신보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이 훔친 것을 양보할 줄 아는 알라딘은 진정 진흙 속에 진주를 품은 사람처럼 가슴에 다른 삶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고, '페미니즘'의 시대에 걸맞게 쟈스민 공주는 정해진 결혼을 거부하는 건 물론, 여성으로서는 허락되지 않는 '술탄'의 계승을 갈망하는 '여성 리더'로서의 면모를 뽐낸다. 

원작에서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술탄이 되었던 알라딘의 이야기는 2019년에 오면 왜 공주는 술탄이 될 수 없느냐며 이의를 제기하고 나라의 운명을 향해 싸우는 적극적 술탄 계승자로서의 쟈스민 공주의 이야기를 주된 스토리로 끌어온다. 물론 거기에 자신을 램프에서 꺼내준 '주인님'에게 친구라 부르며 '자유'를 갈망하는 건 물론, 주인님의 명령을 '임의적'으로 해석 적극적으로 돕고자 하는 융통성있는 지니의 캐릭터는 한결 업그레이드되었다. 즉 그저 '실사'로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변화에 따라 캐릭터들의 적극성과 자기 주체성을 한층 더 살려냈다. 

이렇게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원작에서 다시 에니메이션으로, 그리고 이제 실사 영화를 통해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알라딘>, 하지만 시대에 따른 이야기의 변화만이 아니라, 실사 이야기는 에니메이션과 다른 영화적 장치를 더했다. 바로 '발리우드' 스타일이다. 

 

 

발리우드 양념에 윌 스미스란 화룡점정 
'발리우드'란 봄베이와 헐리우드의 합성어, 흔히 인도 영화 산업 전반을 의미하는 단어지만, 마치 화려한 파티를 보듯 영화의 줄거리보다도 더 메인인 듯한 호화로운 춤과 노래로 가득찬 뮤지컬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인도 영화 스타일을 통칭한다. 중동의 전설적인 이야기 <천일야화>의 <알라딘>을 실사로 옮긴 디즈니는 '발리우드' 스타일을 도입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뮤지컬 콘서트를 보는 듯한 장면을 자주 연출한다. 

공식적인 첫 번째 소원으로 '왕자'가 되어 왕궁에 나타난 알라딘, 하지만 어설픈 에티튜드로 인해 공주의 눈 밖에 났지만, 다행히 그를 맘에 들어한 왕의 초대로 다시 한번 왕궁의 행사에서 공주와 해후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미적거리는 알라딘을 '친구' 지니의 마법으로 단번에 '춤꾼'으로 거듭나게 만들고, 공주의 독무에 이은, 공중제비까지 곁들인 알라딘의 '춤신' 공연은 떠들썩한 참석자들의 군무로 이어진다. 주인공의 독무에 이은, 커플 댄스, 그리고 출연자들의 집단 군무와 합창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퍼포먼스는 '발리우드'의 전형적인 구성 요소고, <알라딘>은 이를 적재적소에 활용하여 영화적 재미를 더하며 '문화적'인 특색을 살리는 동시에 볼 재미를 배가시켜낸다. 

2019년의 시대적 흐름에 걸맞춘 서사, 거기에 '발리우드'적 연출, 그리고 이에 '화룡점정'이 된건 푸른 요정으로 돌아온 윌 스미스이다. 일찌기 로빈 윌리암스가 더빙했던 에니메이션의 스타 요정 지니를 잊을 만큼, 윌 스미스가 아니고서는 상상하기 힘든 춤과 노래, 랩, 개그, 그리고 감동까지 윌 스미스의 원맨 쇼가 상투적 고전 로맨스의 얼개를 가진 <알라딘>을 펄떡거리도록 만든다. 그렇게 '윌 스미스'라는 '신의 한수'로 디즈니는 '실사' 영화의 순조로운 그 이상의 성취를 거둔다. 거기에 이젠 '디즈니'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캐릭터들, 알라딘의 원숭이 아부와 날으는 양탄자의 콤비 플레이, 거기에 공주의 호랑이와 자파의 앵무새까지 이젠 오랜 내공으로 명불허전이 된 조연 캐릭터들이 두 주인공 못지않은 존재감을 뽐낸다. 

by meditator 2019. 6. 3. 19:59

시작은 미미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특별 근로 감독관 조장풍(이하 조장풍)>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경구가 있을까? 김이영 작가의 <해치>, <38사기동대>의 한정훈 작가의 <국민 여러분>이 이미 터를 잡고 있는 가운데 후발 주자로 첫 발을 내딛은 <특별 근로 감독관 조장풍>의 앞날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기에 첫 방 4.3% 동시간대 3위라는 결과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 것처럼 여겨졌다. 

 

 

더구나 영화 <신과 함께>,  ocn의 <손 the guest>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보였지만 단독 주연으로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건 처음이었던 김동욱,  거기에 tv 드라마에서는 생소한 '근로 감독관'이라는 직업과 환경이라는 소재, 2014년 mbc 극본 공모 당선작이었던 <앵그리맘>을 통해 신선한 이야기를 선보였지만 시청률의 혜택은 얻지 못했던 김반디 작가의 두번째 작품, 그리고 부진에 부진을 거듭하는 mbc 드라마의 상황 등이 겹쳐져 <특별 근로 감독관>에 대한 기대치는 높기보다는 우려가 앞선 상황이었다. 

시작은 미미했지만, 
하지만 그런 우려는 이미 첫 주를 지나 두번 째 주에 이르러 말끔히 사라졌다. 그리고 지난 5월 14일에는 자체 최고 시청률 8.75를 찍으며 첫 방의 두 배에 넘는 성과를 거두며 '창대한' 성공을 예고했다. 

그렇다면 이런 첫 방의 두 배에 넘는 성취의 이유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무엇보다 전직 유도선수, 한때 고등학교 선생님, 그러나 지금은 '복지부동'의 근로 감독관으로 애써 노력하고 있지만 예의 '정의로운 기질'을 숨기지 못해 '근로 감독관'이라는 직분에 충실할 수 밖에 없는 조진갑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시청자들에게 선사한 '적폐 청산'의 카타르시스가 크다. 그리고 이는 <조장풍>에 앞서 sbs의 첫 금토 드라마였던 <열혈 사제>의 신드롬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여전히 답답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막힌 속을 확 뚤어주었던 다혈질 사제 김해일과 조력자들의 화끈한 한 판 승을 이제 근로 감독관 조진갑과 그의 '갑벤져스 동지'들이 받아낸 것이다. 

 

 

두 드라마의 구도는 비슷하다. 정의로운 주인공 김해일과 조장풍, 그가 '독고다이'처럼 부조리한 사회에 홀로 독야청청 도전하며 드라마는 시작된다. 그리고 회를 거듭하며 <조장풍>의 엔딩에 나왔던 그림자들의 실체가 하나씩 드러나며 조력자들이 늘어난다. 김해일의 곁에 구대영 형사가, 박경선 검사가, 외노자 쏭삭이 한 편이 되어가며 불가능해 보였던 구담구의 카르텔이 궤멸되어가듯 , 조장풍이 홀로 자신의 맷집으로 덤벼들었던 구원시의 상도 여객 임금 체불 문제로 부터 시작된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티에스 하청 문제', 그리고 거기서 명성 그룹 비리, 나아가 장래 대통령까지 넘보는 도지사 양인태(전국환 분)의 선강 그 실체를 밝히며 결국 '도지사 당선 무효'를 이끄는 쾌거를 이루어 낸다. 

각본, 연출, 연기의 삼 박자 
전작 <앵그리맘>에서 사회적 문제를 드라마적 장치로 설득해 내는데 장기를 보인 김반디 작가는 '소포모어 징크스'는 커녕 전작에 비해 업그레이드된 필력으로 돌아왔으며 때론 코믹한 만화처럼 때론 거친 액션 영화처럼 박원국 연출이 장르물의 강약을 절묘하게 살려냈다. 특히 실화라서 더 마음이 아팠던 단돈 3000원 때문에 해고된 버스 운전사의 부당 해고 사건에서 부터, 티에스 명성의 부당 하도급 계약, 명성 최서라와 그의 아들 티에스 사장의 온갖 불법과 탈법을 일삼던 갑질에,  '선강은 누구의 것입니까?'에서도 대번에 연상되듯 이명박 전 대통령의 bbk 사건에 이르기까지 <조장풍>은 매 회 우리가 현실에서 목도했던 '실화'를 근로 감독관 조장풍이 마주한 현실의 '날실'로 촘촘하게 엮어놓고, 거기에 정의로운 조장풍과 그의 제자들, 동료들의 '선한 의지'로 그 '난관'을 집요하고 타파하여 결국은 통쾌한 승리에 이르는 과정을 매주 선사함으로써 답답한 세상의 카타르시스를 한껏 선사했다. 

이런 카타르시스의 정점에서 활약을 보인 건 무엇보다 배우들이었다. <신과 함께>, <손 the guest>를 통해 연기 잘하는 배우였지만 작품 운이 따라주지 못했던 김동욱에게 <조장풍>은 날개를 달아주었다. 몸무게를 불려 전직 유도선수로서의 무게감을 한껏 실어 일당 백의 근로 감독관 조장풍의 캐릭터를 살려낸 김동욱은 캐릭터의 외면만이 아니라, '민원인'들에게는 한없이 마음 여린 공무원이지만, 부조리한 세력들 앞에서는 눈 하나 끔쩍하지 않는 배포를 지닌 '정의의 히어로'로서의 면모를 한껏 살려내며 '원톱' 주인공으로서의 존재감을 뽐냈다. 

 

 

이런 김동욱과 함께, 중견 송옥숙 씨와 전국환 씨가 악의 축으로, 거기에 명불허전  <신의 퀴즈>의 류덕환과 오대환이 악의 수레바퀴를 이끄는 견인차로서 자기 몫을 톡톡히 해냈고, 거기에 티에스 사장 이상이, 갑을 기획 사장 김경남에 후배 근로 감독관 강서준, 갑을 기획 직원 유수빈, 김시은 등의 신선한 얼굴들이 물만난듯 뛰어놀았다. 

이렇듯 <조장풍>은 드라마의 시작에서 '부담'이 되었던 그 모든 것들을 '성공'의 요소로 이끌어 내며 새로운 소재와 이야기, 거기에 신선한 얼굴들의 열연, 맛깔나는 연출까지 삼 박자가 제대로 호흡을 맞추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이야기를 멋들어 지게 해냈다. 

by meditator 2019. 5. 29. 05:42

이제는 멸망하고 없는 행성 크립톤에서 아기가 지구로 보내졌다. 스몰빌에 도착한 외계인 아기는 마사와 조나단 부부의 품에서 클라크 켄트가 되어 성장한다. 성장하며 인간들과 다른 자신의 숨겨진 힘을 깨닫게 된 클라크는 지구의 '보이스카우스'가 되어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지구를 괴롭히는 악당을 잡은 건 물론, 지진, 폭풍, 비행기 사고 등 각종 재난 재해에서 인명을 구하는데 앞장서고, 심지어 나무 위에 올라간 고양이까지 구할 정도로 따스하고 성실한 히어로로 오랫동안 사랑받는다. 바로 슈퍼 히어로의 대명사 '슈퍼맨'의 이야기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외계에서 온 정의로운 슈퍼 히어로의 탄생이다. 인간형 에어리언이라면 이렇게 '인간 친화'적이며, 마땅히 '인간 세상'의 도덕을 스스로 내재화함은 물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슈퍼 히어로로서 자신을 보호해주고 키워준 지구에 '은혜'을 갚기 위해서라도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지구를 수호하는데 자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기대하는 바이다. 

 

 

외계인에 대한 편견 아닌 편견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게 한 끗 차이다.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은 에어리언, 외계인들은 그동안 어떠했나, 1979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어리언>이래 <인디펜던스 데이>, <화성침공>, <우주전쟁>, 실체가 드러나지 않거나, 기괴하게 생긴 외계인들이 호시탐탐 지구를 노려왔던가 말이다. 우리 안의 '타자'에 대하 배타적인 상상력으로 품어낸 외계인 침공 영화는 손가락으로 꼽기가 힘들 정도다. 가장 최근으로는 인간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다른 외계에서 온 '타노스'는 손가락을 튕겨, 지구는 물론 우주 절반, 나아가 전체를 재조정하려 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모습을 한 외계인이 당연히 인간 친화적이며, 심지어 그의 슈퍼 히어로적인 힘이 '친인간적'이며 심지어 '초도덕(super-ethics)'일 것이라는 우리의 편견은 흡사 예수에 대한 문명적 시각의 변화와도 일맥 상통한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예수가 대륙을 가로질러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가자 가장 유러피안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되듯이, 그간 '인간의 모습', 그 중에서도 백인의 푸른 눈을 가진 에어리언에 대한 '호의적' 편견 아닌 편견에 대해 현상금 사냥꾼들이 히어로로 거듭나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제작진이 이이를 제기한다. 

<슈퍼맨>의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찾아온 외계의 소년이 영웅이 된다'라는 전제를 뒤튼 <더 보이>, 시작은 역시나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찾아온 외계인의 아기이다. 그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들에게 '아기'를 달라며 소망했던 부부, 한밤중 그들 농장에 외계의 물체가 떨어지고 그곳에는 아기가 있었다. 당연히 '하늘'이 자신들에게 내려준 선물이라 생각한 부부는 여느 부모처럼 아이를 키웠다. 

하지만 12살의 생일을 맞이한, 이제 청소년기에 들어선 브랜든에게 뜻모를 환청이 시작되고 평범하고 똑똑한 소년이었던 브랜든(잭, A, 던)게 변화가 시작된다. 그저 아기였던 시절 여느 아기들은 몇 번이나 다쳤던 것과 달리 다치지도 베이지도 않고 '기특'하게 자랐던 브랜든은 그런 수준을 넘어 창문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건 물론, 잔디밭 깍는 기계를 저 멀리 던져버리고 그 돌아가는 칼같은 날을 대번에 구부려버리는, 말 그대로 포크도 씹어먹는 강철같은 소년이 되어간다. 심지어 눈에서 '레이저 광선'도 쏜다. 

 

 

사이코패스 외계인 브랜든 
슈퍼맨이었으면 축복이자 행운이 되었을 이런 '수퍼 히어로'의 능력이 하지만, '인간의 도덕'을 내재화하지 못한 브랜든에게는, 아니 브랜든 주변 사람들과 브라이트번 마을에는 '재앙'이 된다. 

너가 어떻든 내 아기라 하며 키웠지만 인간의 아이가 될 수 없었던 외계인 브랜든, 이는 마치 뇌의 이상으로 도덕심이나 사회적 자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처럼, 자신보다 한참 낮은 능력을 가진 부모와 주변 사람들, 동물들에 대해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일찌기 맹자께서 인간의 선의 발원을 우물가로 기어가는 아기를 차마 두고보지 못하는 '측은지심'에서 찾으신 그것처럼, 브랜든은 바로 그런 '선의'가 부재한 외계인이었다. 파란 눈의 흰 피부, 딴 짓을 해도 선생님 물음에는 꿀떡처럼 정답, 그 이상을 대답하는 똑똑한 소년이지만,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기 위해 기르던 닭들을 무참히 죽이고, 끌리는 소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방식이란게 스토커와 다르지 않고, 그런 마음이 적의로 받아들여지자 잔인하게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에게 보복을 가하는 '탈도덕'적인 행태를 보인다. 

이런 '비인간적 외계인 브랜든'이 드러나는 시기가 '청소년기'라는 점도 절묘하다. 이른바 우리나라에섣 '중2병'이라는 용어가 있듯이 브랜든의 '탈도덕적이며 비인간적인 행태'은 어른들이 보기에는 또래의 반항처럼 해석될 여지를 제공한다. 이제 '머리'가 좀 커서 어른들의 말씀에 수긍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더구나 '말썽'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소년의 반항기는 외계 소년의 잔인한 능력과 결부되어 이모부를 잔인한 죽음에 이르게 하고, 뒤늦게 밝혀진 출생의 비밀에 대한 반항은 사이코패스가 되어버린 아들을 뒤늦게 책임지려한 인간 부몽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으로 마무리된다. 말이야 '거짓말'이었지만, 부모의 착한 거짓말과 거짓말을, 어른들의 우려섞인 걱정과 꾸중을 청소년기의 어른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와 혼돈하는 사춘기의 외계인의 아노미적 혼돈은 이제서야 체득된 그의 무한한 능력과 맞물리며 브랜든 주변은 물론 남부의 평화로운 마을 브라이트번을 재앙에 빠뜨린다. 

 

 

외계에서 온 파란 눈의 흰 얼굴을 한 아이가 우리가 생각했던 그 '착한 아이'가 아니라면? 이라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된 영화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자신이 전제한 명제에 맞춰 '공포'의 서사로 직진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아이', ' 내 사랑'이라던 부모의 아낌없는 사랑은 되돌릴길 없는 처참한 대가를 치루고야 만다. 그렇게 <더 보이>는 그간 우리가 의지해 왔던 '슈퍼맨'의 서사가 사실은 얼마나 안이한 '편견 아닌 편견'으로 부터 비롯되었든가를 묻는다. <더 보이>의 공포는 중2병 사이코패스 외계 소년이 벌이는 잔혹한 피의 살육도 살육이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의지해 왔던 사랑과 도덕의 선입관들을 한 점도 남기지 않도 도려내어 버리는 서사의 군더더기없음에서 비롯되는바가 더 클 것이다. 과연 이 '재앙'의 소년을 지구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 해결은 '속편'에 기대해 볼 수 밖에. 

by meditator 2019. 5. 27. 15:13

히가시노 게이고는 오사카 부립대학교 전기 공학과를 나왔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에서도 영화로 만들어진 <용의자 X의 헌신> 속 물리학자 유카와 마나부가 일찌기 <탐정 갈릴레오>에서 부터 그의 전문적인 과학 지식을 활용하여 사건을 풀어가는 시에피소드가 종종 등장해 왔다. 그 중에서도 <라플라스의 마녀>는 작가 자신이 30주년 기념작이라 한 만큼,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기인 '과학'과 '스릴러'의 절묘한 결합으로 찬사를 받는 작품이었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라이프니츠의 이 한 마디에서부터 시작된다. 

'모든 것은 수학적으로 진행된다. 만약 누군가가 사물들의 내부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닌다면 그리고 더욱이 모든 상황을 생각하고 고려할 수 있는 충분한 기억력과 지식을 가진다면 그는 예언가가 되고 거울에서처럼 현재에서 미래를 볼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30년의 역작 <라플라스의 마녀> 
프랑스의 철학자 시몽 라플라스는 이런 라이프니츠의 결정론을 확장한다.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뉴턴의 운동 법칙을 이용해 과거,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 주고, 미래까지 예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현재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미래를 유추할 수 있는 존재'로서 '라플라스의 악마'가 등장한다. 

늘 과학자들은 갈망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세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진다면, 조금 더 정확한 수치로 계산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정확한 공식을 얻는다면, 궁극에는 이 세계에 대한 '진리의 값'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런 과학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명적 진보를 추동했고, 그 과정에서 한 발 더 나아간 '환타지적 소망'이 '라플라스의 악마'로 나타난다. '악마'라지만, 이는 우리가 그간 sf를 통해 접했던 '시간 여행'이나, '평행우주론'의 또 다른 버전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공대 출신의 히가시노 게이고는 30주년 역작으로 바로 그런 과학적 모티브를 끌어와 자신만의 새로운 과학적 스릴러를 탄생시키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소설들을 산산조각내니 만들어 졌다는 작품', 그게 <라플라스의 마녀>이다. 

그렇다면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는 이런 작가의 30주년 역작으로서의 성과가 잘 드러났는가 여부를 놓고 살펴봐야 할 듯하다. 아니, 그런데 사실은 이게 애초에 어쩌면 불가능한 평가일 수도 있겠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어 리메이크된 <용의자 x의 헌신>을 봐도 그렇지만, 애초에 몇 백 페이지의 구구절절 장대한 원작을 두 시간 여의 영화로 콤팩트하게 만든다는게 쉽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물리적 법칙에 통달하여 뉴턴의 운동 법칙을 꿰뚫어 과거를 알고 그로 미루어 미래를 꿰뚫는 존재'만큼 영화적 상상력을 한껏 드러낼 수 있는 영역이 있을까? 

 

 

영화로 온 히가시노 게이고 
영화의 시작은 유명 온천 휴양지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이다. 영화 제작자가 죽은 채로 발견되고 그 사인은 황화수소 중독. 과학자로서 이 사건에 참고인이 된 과학 교수 아오에 슈스케(사쿠라이 쇼 분)는 온천지 주변의 지형으로 미루어 보건대 '살인'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단순 사고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온천 지대에서 '황화 수소 중독' 사고가 발생했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온천 지역의 존폐가 달린 심각한 문제가 된다. 거기에  나카오카 형사(타마키 히로시 분)는 죽은 사람 앞으로 들어놓은 보험금을 수상하게 여겨 죽은 제작자의 아내를 의심한다. 

그런데 발생한 또 하나의 온천 지역에서 벌어진 황화 수소 중독 사건, 이번에도 지형상으로 보면 사고사일 수 밖에 없지만, 같은 독극물에 의해 온천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거기에 나카오카 형사의 조사에 따르면 오래 전 아마카스 사이세이 감독(토요카와 에츠시 분)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사건은 점점 더 단순 사고사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영화는 의문의 살인 사건에서, 8년 전 벌어진 아마카스 사이세이 일가족에게 벌어진 황화수소 중독 사건으로 시점이 옮겨진다. 그리고 그 사건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아마카스 감독의 아들 아마카스 겐토(후쿠시 소타 분)가 등장하고, 점점 더 사건의 늪에 빠져들어가는 아오에 교수 주변에 의문의 소녀? 여성?이 얼쩡거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등장한 '라플라스의 악마'가 아닌, '마녀' 우하라 마도카(히로세 슈즈 분), 영화는 의문의 사고사에서 시작된 스릴러에서 이제 '라플라스의 마녀'의 등장과 함께 대두된 '아마카스 사이세이 감독의 일가족 몰살 사건'을 감독의 블로그를 배경으로 '설명'해 나가고, 거기에 다시 스스로 마녀가 된 '우하라'의 사연까지 얹는다. 

즉, 시작은 의문의 두 사건이지만, 그 사건에서 부터 과거로 들어가 거기서 아마카스 감독의 일가족 독극물 중독사, 혹은 미수 사건이 드러나고, 그로부터 비롯된 두 명의 '라플라스의 악마'와 '마녀'의 등장으로, 황화수소 중독으로 시작된 사건은 '라플라스의 정의'에 근거한 과학 환타지로서의 영역으로 확장되어간다. 

불가능한 독극물에 의한 살인 사건을 가능하게 만드는 '라플라스 과학 결정론', 그리고 그 '결정론'의 집합체가 되어버린 '실험실의 모르모트'같은 두 사람, 그 둘 사이의 미묘한 관계. 8년을 견디며 복수를 향해 달려온 청년과, 함께 하다 보니 어느덧 그 청년을 사랑하게 되어 그의 복수, 아니, 복수를 빙자한 자멸을 막기 위해 자신을 던진 소녀의 순애보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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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여의 런닝 타임으로 품어낼 수 없는 500여 페이지의 인간사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오랫동안 스테디 셀러로서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회적 스릴러, 과학적 스릴러, 때로는 킬링 타임용 탐정물에, 학원물, 연애물, 휴먼 스토리까지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작품을 양산해 내는 작가의 성실하고도 꾸준한 작품 성과가 제 일의 원인이겠지만, 그런 작품들을 씨실로 하여 그 속에서 드러난 '다양한 인간 군상'의 고뇌와 욕망 들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보는 이로 하여금 '만화경'처럼 인간사에 대한 천착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는 영화라는 장르가 가질 수 있는 특수 효과의 특성을 살려 이른바 히가시노 게이고가 책을 통해 주장하고 있는 '라플라스 이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득을 하고 있다. 물론 이 조차도 대뜸 냇물 사이에 아오에 교수를 몰아넣고 드라이 아이스로 감금하고, 이건 몰랐지 식인 면도 있지만, 클라이막스에서 아마카스 감독의 낡은 세트를 배경으로 한 '다운 버스트' 상황과 그 속에서의 우하라의 순애보적 기지는 영화가 아니고서는 그려낼 수 없는 영역이긴 하다. 

반면, 500여 페이지가 넘는 책의 행간을 채웠던 복합적인 사건, 그 사건의 결 속에서 각자의 욕망과 고뇌를 가지고 살아 숨쉬던 인간들과 그 관계의 미묘함에 대해 영화는 결국 시간의 제약이었던지, 연출의 불균형이었던지, 단편적이거나, 혹은 설명적으로 그려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아니 어쩌면 군더더기의 인간 군상에 대한 묘사와 설명을 접어두고 보면 영화가 그려내는 단편적인 설정이나 교훈이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소설 책을 단 몇 줄의 결론을 알기 위해서 읽는 건 아니지 않은가. 

결국 영화는 자신의 가족들마저도 완벽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아마카스 감독의 자기 위선과 완벽주의에 맞선,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기꺼이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내놓을 만큼, 순수한 마음을 가징 우하라의 순애보적인 사랑으로 귀결되어진다. 물론 이 조차도 이 영화가 소설의 궤도를 따라 사건을 설명해가던 아오에 교수의 시점에서 이런 모든 것들이 ''지켜보게' 됨으로써 아, 이 영화가 '사랑'을 말하고 싶은 거구나, 혹은 과학적 진리를 통해 알 수도 있게된 미래라는 게 꼭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건 아니구나 라고 이성적으로 이해해 줘야 하고 교훈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사건과 인물의 극적인 효과가 반감되는 점은 안타깝다. 

영화 <라플라스의 마녀>는 그 서사의 과학적 설정은 가장 영화적이었지만, 그 서사의 행간을 채운 서사는 영화로 감당하기엔 너무 복합적이고 복잡한 것이 아니었나란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다. 결국, 각 인물들의 면면을 좀 더 알기 위해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들어야 하는. 언제나 책을 뛰어넘는 영화가 나오기는 힘들다. 하지만, 책을 다시 꺼내들지 않도록 만드는 영화들은 있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by meditator 2019. 5. 11. 17:47

181분, 세 시간 여라기에 지레 걱정을 했다. 중간에 휴식 시간이라도 있어야 화장실이라도 다녀올 수 있지 않나? 뭐 이러고, 그런데 기우였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181분이라는 시간이 두 시간 정도의 길이로 밖에 안느껴졌다. 무엇보다 그 수많은 등장 인물,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어벤져스를 이끌어 왔던 쟁쟁한 히어로들의 들고 남을 산만하지 않게 하나의 '서사' 안에 꾸려넣은 '편집'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무엇보다 '엔드 게임'으로서 '어벤져스'가 빛을 발한 건 물량을 쏟아넣은 화려한 볼거리의 블록버스터 조차도 결국 승패를 가름하게 만드는 건 '철학적 세계관'과 그것을 풀어내는 '서사'로 부터 기인한다는 걸 '마블'이, 안소니 루소, 조 루소, 루소 형제가  다시 한번 증명해 냈다는 것이다. 

 

 

인피니티 워- 신이되고자 한 빌런
블록버스터 영화는 거개가 외계인의 침공이라던가, 지구를 뒤덮는 자연 재해라던가 지구에 대한 가공할만한 종말론적인 위협으로 시작된다.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궁극의 위협을 가져온 건 바로 '타노스', 외계 빌런이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우주의 힘이 담긴 인피니티 스톤 여섯 개를 담을 장갑, 인피니티 건틀렛을 차고 등장한 타노스, 그런데 이 외계 빌런은 뜻밖에도 스스로 '필연적인 존재(inevitable)'가 되고자 한다. 

일찌기 늘어나는 폭발적인 인구의 증가와 고정된 자원이 지구, 나아가 우주를 멸망으로 이끌것이라는 '혜안(?)'을 가지게 된 타노스는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키면서까지도 손에 넣은 우주의 힘을 가진 여섯 개의 인피니티 스톤으로 지구와 우주를 '구원'하고자 무차별적인 '심판'을 행했고 그 결과 지구는 물론, 우주의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이런 일련의 타노스가 '행한 일'은 흔히 '종말론'적인 신앙에서 그려지는 '전지전능'한 신의 모습과도 같다. 타락한 인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신이 40일 밤낮으로 비를 쏟아부었다던 '신'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은가.  그 일을 마친 타노스는 자신이 행한 '최후의 심판'을 거스를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다치면서까지 인피니티 스톤을 파괴했고, 그 모든 것이 끝난 뒤 마치 천지창조 뒤의 휴식을 취한 '신'처럼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 여유를 즐긴다. 그의 의도는 어쩌면 실현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만든 문명과 배들로 즐비했던 뉴욕의 바닷가는 이제 고래들이 뛰노는 곳이 되었으니. 그가 바랬던 지구와 우주의 균형이 이루어져 가는 거 같다. 

 

 

그런데 그가 없애버린 그 '인피니티 스톤'을 되찾기 위해 감히 '지구의 한 줌도 안되는 어벤져스' 무리가 '양자 물리학' 따위를 동원해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다시 '인피니티 스톤'을 모으고자 한다. 반을 살려놓았더니 사라진 자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역사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과거'의 오류를 다시 한번 되풀이 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 시간의 틈을 비집고 나온 타노스는 이번에는 다른 결정을 내린다. '라그나뢰크(신들의 몰락)처럼 아예 '기억'할 '존재'들을 싸그리 없애버리고 '천지창조'부터 시작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타노스 그 자신이 '필연적인 존재'이기에 바로 그런 일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정의내린 '필연적인 존재', 지구어로 번역하자면 '신'이다. 

인간의 역사 -어벤져스 
하지만 그런 '필연적인 존재'의 '전지전능한 작업'에 반기를 든 무리들이 있다. 바로 '어벤져스', 과학 기술의 성과를 자신의 몸으로 증명한 '아이언맨',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토르, 과거의 냉동인간이 해동된 '캡틴 아메리카', 과학적 돌연변이 '스파이더맨', 헐크',  영성의 히어로 '닥터 스트레인지' 등등 인간의 상상력이 도출해낸 다양한 캐릭터의 히어로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타노스'에 대항했던 건 아니다. 

에너지원 큐브를 이용한 적의 등장으로 지구가 위험에 처하자 국제 평화 유지기구 쉴드(S.H.I.E.L.D)의 국장 닉 퓨리(샤뮤엘 L 잭슨 분)가 어벤져스 작전을 개시,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를 위시하여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 분), 토르(크리스 햄스워스 분), 헐크(마크 러팔로 분),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분), 호크 아이(제레미 러너 분) 등을 호출하여 적들에 대항한 동맹을 결성한다. 

 

 

하지만 이들의 동맹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토니 스타크가 개발한 평화 유지 프로그램의 오류로 부터 탄생한 이 지구를 위험에 빠뜨린 적은 지금까지 지구 방위군으로 명망을 날렸던 어벤져스를 오히려 지구를 파괴하고 위험에 빠뜨리는 존재로 규정하며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지구 파괴와 인명의 피해를 양산하는 '어벤져스'의 존재는 어벤져스 팀 자체 내의 '철학적 이견'을 발생시키며 어벤져스의 갈등과 해산을 가져온다. 

이러한 '갈등'은 그저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의 서사적 갈등을 넘어, 지금까지 '인류 역사'의 씨줄과 날줄이 되었던 인류사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타노스가 인류의 반을 절멸시켜 인류와 지구를 구원하고자 했을 만큼, 인간의 문명, 그 발전은 또 다른 파괴와 폐해를 낳았고, '발전'과 '수호'라는 이름으로 인류는 지구 곳곳에서 또 다른 '점령'과 '파괴'를 일삼아 왔다는 반성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스스로가 만들어 낸 '괴물' 울트론과 맞서는 과정에서, '파괴'에 대한 반성으로 '통제'를 선택한 '아이언맨' 등의 그룹과 그에 맞서 통제를 벗어난 히어로들를 규합한 캡틴 아메리타의 그룹은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시리즈에서 갈등의 정점을 달하지만, 결국 타노스에 의한 인류, 및 우주 절멸의 순간을 맞이하며 동지들을 잃게 되면서 다시 한번 힘을 모으게 된다. 

인류가 사라진 곳에 숲은 무성해지고, 고래들이 뛰어놀게 되었지만, 인류는 자신들의 반을 잊지 못한 채 '상실의 나날'을 이어갔다. 결국 인간의 삶을, 인류를 지탱하고 유지해 가는 건, '관계, 그리고 그 '관계'들로 이루어졌던 '역사'였음을 증언하는<어벤져스; 엔드 게임>은  '필연적인 운명'에 대항하여 '인류의 동맹'으로 다시 한번, '과학'의 힘을 빌어 '전지전능한 파괴'에 도전하여 '연대'한다. 

 

 

'상실'로 부터 시작된 <어벤져스; 엔드 게임>은 그 상실의 아픔을 '필연'으로 수긍하는 대신, '양자 물리학'이라는 최첨단의 과학을 끌어안으며 '과거'를 복구하고자 한다. 비록 폐해를 남발하는 인류의 역사였지만, 필연적인 존재의 심판 대신, 그 불완전한 인간의 역사를 스스로 선택하고자 한 것이다. 

<어벤져스; 엔드 게임>의 절정을 이룬 대규모 물량의 타노스 대 어벤져스의 전투 씬이 감동적일 정도로 다가오는 건, 그 씬에 쏟아부은 블록버스터적 물량과 함께, 두 시간이 넘도록 그 최후의 전투를 위해 다져넣은 동지적 인류애에 대한 서사 때문이다. 뒤늦게 얻은 딸을 두고 나선 아이언맨의 결자해지, 그리고 기꺼이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을 던진 블랙 위도우 등 어벤져스들의 전우애를 바탕으로 하여 결정적인 순간 그간의 이견을 불식하고 '합체'한 어벤져스 팀, 그리고 그들의 헌신을 통해 돌아온 사라졌던 동지들의 복귀, 혹은 복구의 감격과 함께 대장정의 엔딩을 화려하게 빛낸다. 

 

 

결국 <어벤져스; 엔드 게임>의 결론은 숱한 오류와 폐해에도 불구하고 '인류애'와 '인류 역사', 그리고 '인류 발전'에 대한 긍정적 헌사이다. 신의 심판 대신, '인간'의 손으로 자신들이 벌려놓은 역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겠다는 주체적 의지의 '반신론적' 표명이기도 하다. 물론 그 중심에, 미국 문명의 정점인 '아이언맨'과, 아메리카니즘의 대변자인 캡틴 아메리카가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by meditator 2019. 4. 30. 06:04

배우 김윤석이 감독 김윤석이 되었다. 그 첫 작품이 <미성년>이다. 아마도 김윤석 배우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우가 오랫동안 감독에 대한 꿈을 꾸어 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성년>은 반가운 영화다. 누군가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현장이니까. 나이가 들어 퇴색되고 무뎌지지 않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쁘다.

하지만 <미성년>은 그저 그렇게 배우 김윤석의 첫 데뷔 영화라는 측면에서만 반가운 것이 아니다. 모처럼 우리, 인간에 대한 '넉넉한 시선'을 풀어놓은 영화라는 측면에서 반갑다. 마치 하루 종일 격식에 맞춰 정장을 입고 있다가 집에 돌아와 무릎 툭 튀어나온 낡은 츄리닝을 입고 퍼질러 앉아 기지개를 펴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렇게 편하게 나, 우리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보는게 참 오랜만이란 생각이 든다. 

 

 

어른의 딜레마 
'엄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흔히 부모님들이 하는 말씀이다. 그 떡이 생길 어른 말씀이라는 거의 전제는 어른 말씀은 옳다라는 것이다. 어른은 믿을만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성년>은 그 옳다는 어른에 대해 질문한다. 과연 그런가 라고. 

그리고 이 '옳지 않을 수도 있는 어른'에 대해 영화는 가장 흔하고도 속된 주제 '불륜'을 들고 나온다. 대원(김윤석 분)은 이 땅 어디에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아재'다. 그런데 이 '아재'에겐 비밀이 있다. 본인만 비밀이라고 생각하고 남들은 다 알아버린 비밀, 바로 미희(김소진 분)와 불륜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버린 딸 주리(김혜준 분)가 미희의 가게 주변에서 기웃거리다 미희와 미희의 딸 윤아(박세진 분)에게 틀키고, 그 바람에 아내 영주(염정아 분)까지 알아버렸다.

아니 그건 어쩌면 타이밍의 차이일 뿐일 지도 모른다.  이미 아내와 각 방을 쓴지 2년 여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져가는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대원의 바람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인 듯 보여진다. 아니 그것보다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미희의 배는 어떻고. 게다가 회식 장소를 두고 오리집으로 할까요 하며 빙글거리는 직원을 보니 정말 대원을 빼고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다. 

'혹' 해서는 안될 '미혹'의 나이에, '혹'하면 안되는 아내와 딸이 있는 가장의 바람인지, 불장난인지, 사랑인지는 동심원을 그리며 여파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세상에서 젤루 이쁜 딸도 알고, 아내도 알고, 미희는 아이를 '조산'하고 그 대책없는 상황에 대원은 그만 내빼버린다. 그가 '미희'와 시작했던 그 '사랑인지 바람인지'에서 고려치 않았던 결과들이다. 미희 말대로 '맘대로 되지 않는 바람'이라서 그런가, '책임'이란 단어와 동음이의어로 쓰이는 어른이 대원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듯하다. 

이 대책없는 대원의 불장난, 그 마주쳐야 소리를 낸 당사자, 어쩌자고 남의 집 남편의 아이까지 가졌냐며 다그치는 딸에게 외려 너라도 엄마를 좀 이해해 주면 안되겠냐며 울음을 터트리는 미희. 돈만 쥐면 도박판으로 달려가는 남편 대신 열 일곱에 '책임'을 진 딸을 키우며 오리집을 하며 살아가는 미희의 삶을 들여다 보니 그녀가 뒤늦게 매달린 '사랑'이 짠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른스럽지는 않다. 

 

 

이 대책없는 두 사람으로 인해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은 영주, 여전히 딸 주리 앞에서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만 그 허울은 얇다. 더구나 미희의 조산 앞에 그녀의 자존심마저 약해진다. 아니 그녀를 더욱 약하게 만드는 건 그녀가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하나 없이 지켜왔다고 생각하는 가정, 그리고 남편인지 웬수인지 모를 대원.

이렇게 <미성년> 속 어른들은 다 어쩌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다. 어른답지 못한 일을 '저지르고', 그 저지른 일에 대해 어쩌지 못한 채 '책임'지는 대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거나, 방임한다. 아니 '책임' 조차도 어쩌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는 '내 맘'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 와중에 '어른'이라며 아이들을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서 저만치 밀어낸다. 즉 <미성년> 속 어른들의 상태는 바로 '어른' 그 자체의 '딜레마'다. 책임질 수도, 책임 지지지도 못할 상황에 놓여버린 어른의 삶. 그건 어쩌면 '도덕'이라는 교집합으로는 쉬이 메꿀 수 없는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삶 자체일 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정의내린 어른이라는 깜냥 자체 미달인 '어른'들의 이야기. 이를 통해 '어른'이라는 우리의 고정 관념에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이 짊어지고 사는 그 '어른'이 정말 어른맞냐고. 아니 우리가 만들어 놓은 '어른'이라는 성채가 허상이 아니었냐고. 

 

 
어른스러우려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인 아이들 
그리고 이렇게 어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맞은 편에 정작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대략난감'인 어른들보다 어른스런 아이들을 내세운다. 공부의 세상 속에 밀어넣으며 아이들의 문제 조차도 해결해 주겠다는 어른들의 세계에 기꺼이 책임감을 가지고 발을 밀어넣는 아이들. 

어찌어찌해서 아빠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딸 주리는 흔히 드라마가 설정하듯 철부지 딸의 캐릭터 대신에 어른스레 그 사실을 알게되어 충격을 받을 엄마를 걱정하고 수습하려 애쓴다. 윤아는 어떻고. 대책없는 엄마를 다그치면서도 어떻게든 그 사태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자신의 주머니를 털고 파탄난 가정을 봉합해보려 아버지를 찾아나선다. 심지어 그 사태로 인해 등장한 '동생'을 들여다 보며 책임지려 까지 하며.

 

 

구멍난 '가족'의 틈을 메우려 애쓰는 아이들. 어른들이 방기한 책임의 세계에 자신을 기꺼이 들이미는 아이들. 그렇게 <미성년>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고정 관념, '철없고 대책없는 아이들'이란 세계에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이들이 책임지고자 하는 '어른'의 세계에 아이들은 아직 역부족이다. 아니 영화의 엔딩처럼 아이들은 어른스러우려 하지만 아직 '아이들'일 뿐이다. 아니 '아이들'이기에 어른들의 그 심각한 사태에 웃을 수 있고, 엉뚱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미성년>은 그렇게 어른스럽지 못한 어른들과 어른스러운 아이들을 통해 '어른'의 경계를 해체한다. 어른됨의 버거움을 피력하고, 어른됨의 난센스를 드러내며,  애초에 우리 사회가 불문율처럼 정의한 '어른'이라는 존재 자체에 의문을 표한다. 반면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철딱서니 없지도 않고 생각이 없지도 않다. 결국 <미성년>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어른과 어른다운 아이 그 흐트러진 경계를 통해 이 사회가 강력하게 선을 그어 놓은 '어른'과 아이'라는 선이 어쩌면 불분명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찌질하기 한량없는 대책없는 고딩같은 대원과 아우토반 중2병같은 미희의  깜냥에,  자신의 감정조차 추스리기 힘들어 보이는 영주의 흔들림에 엄격한 학칙의 잣대를 들이대다 한참 모자란 찌질이들을 마주하듯 실소가 흘러나온다. 미희와 대원이 해맑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던 낡은 놀이 공원을 찾은 아이들의 미소처럼. 결국 <미성년>이 도달한 곳은 그 모자람에 대한 인정이요, 이미 늘어진 고무줄같은 어른의 세계에 대한 '관용적 이해'다. 그리고 그건 지금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괴물같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여유'의 틈이다. 

by meditator 2019. 4. 15. 03:38

깡마른 몸, 창백한 피부, 이마에 칼자국같은 흉터까지 있는 11살 소년은 고아다. 위압적인 이모부와 냉정한 이모 슬하에서 짖궃은 사촌들에게 시달리며 계단 및 벽장에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그렇게 희망이 없던 소년에게 어느 날 찾아온 한 장의 초대장, 보잘 것없던 소년은 하루 아침에 '마법 학교'의 촉망받는 학생이 되어 '세계'를 구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가난한 소년, 그에게 찾아온 '마법'과도 같은 행운은 일찌기 <소공자>, <소공녀> 이래 고전적 클리셰이다. 이 '고전'적 서사는 시대에 따라 다른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왔다.  마술 지팡이와 함께 찾아왔던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물체를 공중에 띄우는 마법 주문)' 마법을 소환하여 한 시대를 호령하더니 이제 아예 '히어로'로 변신시킨다. 바로 <샤잠>이 그 주인공이다. 

 

 

그런데, 히어로가 된 소년이 어쩐지 새로운데 새롭지 않다. 바로 마블의 막강 소년 히어로 <스파이더 맨>이 있기 때문이다. 이모 할머니와 혹은 이모와 둘이 사는 고아 소년에, 그다지 넉넉치 않은 가정 형편까지 <샤잠>의 빌리와 <스파이더 맨>의 피터 파커는 비슷하다. 그렇게 비슷한 처지의 두 소년에게 찾아온 뜻하지 않은 '마법같은 기회'를 통해 히어로로 성장하는데 어째 버전과 장르가 달라진다. <스파이더맨>이 다양한 시리즈를 통해 성장 서사를 넘어 마블의 주인공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면, 덩치만 큰 어른이 되어버린 빌리와 그의 가족(?)들은 어쩐지 <파워레인져스>나, 디즈니 아동물인가 싶은 '동화의 세계'에 여전히 천착해 있는 듯하니, 그 세계에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파워 레인져스> 정도에 열광했던 시간으로의 역주행은 필수적일 듯싶다. 

히어로 간택의 바늘 구멍을 통과한 소년
<샤잠>의 시작은 뜻밖에도 '빌런'으로 부터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히어로의 선택, 그 멀고도 어려운 길에 대한 이야기로 부터다. 아빠와 형으로부터 사사건건 무시당하는 어린 소년, 형이 비웃던 소년의 장난감은 뜻밖에도 소년을 마법사의 동굴로 데려간다. 히어로가 될 기회를 얻은 소년, 하지만 소년은 뜻밖에도 히어로가 될 기회인 마법사의 지팡이 대신 악의 구슬에 현혹되는 바람에 기회를 잃는다. 그리고 그렇게 소년처럼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유행병처럼 마법사에게 소환당한다. 마법처럼 찾아올 행운에 자신을 걸고 싶었던 소년, 하지만 마법사에게도 팽당하고, 사고를 당한 아버지와 형이 그걸로 더 자신을 무시하자, 소년의 '자괴감'은 그를 '빌런'으로 성장케 한다. 이미 그 소년은 악의 구슬을 손에 넣기 이전에 '빌런'으로서의 필요 조건을 갖춘 것이다. 

 

 

물론 또 다른 '악'의 가능성을 가진 소년도 있다.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간 놀이 동산에서 엄마가 따서 준 나침반을 가지고서도 길을 잃었던 아이 빌리(애셔 엔젤 분), 그는 시간이 흘러 청소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나침반을 가지고 길을 잃은 어린 아이의 상태에서 성장하지 않은 채 '엄마'를 찾아 헤맨다. 덕분에 벌써 몇 번째나 위탁 가정에서 '파양'된 형편. 그런 그에게 새로운 위탁 부모가 나섰다. 하지만 빌리의 달아난 마음에 새 부모와 형제들이 들어올 틈은 없다. 심지어 같은 방을 쓰는 프레디(잭 딜런 그레이져 분)의 소중한 물건을 자신의 도망 비용으로 쓰기 위해 슬쩍할 정도다. 그래도 프레디가 친구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건 두고 보지 못했던 빌리, 아니 그 와중에 등장한 '엄마'란 단어가 빌리의 상흔을 건드렸다.  

두 악동을 피해서  탄 지하철에서 빌리는 늙고 지친 위자드가 기다리는 히어로의 공간으로 순간 이동을 한다. 꼭 빌리여서라기 보다 이젠 더는 진짜 히어로가 될 인물을 기다릴 시간이 없어 허겁지겁 '솔로몬의 지혜, 헤라클레스의 힘, 아틀라스의 체력, 제우스의 권위, 아킬레스의 용기, 머큐리의 스피드까지 신들의 능력을 총망라한 '샤잠'의 능력을 빌리는 계승하고 빨간 쫄쫄이 의상의 어른 '샤잠'이 되어 돌아온다. 

 

 
소년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아마도 <샤잠>에서 가장 돋보이는 지점은 바로 어른이 되어버린 소년의 해프닝일 듯하다. 거미에 물렸다던가 본의 아니게 히어로가 된 주인공들은 저마다 과도기적 통과 의례를 겪는다. 자신에게 들이닥친 '힘'에 대한 경이, 천착을 넘어 자아 성찰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힘을 뽐내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 힘의 무게, 혹은 힘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깨닫게 되며 본격적으로 히어로로 거듭나게 된다. 

<샤잠> 역시 다르지 않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  <스파이더맨>과 같은 소년 영웅들보다 한 발 더 '치기'의 세계로 빠져든다. 이른바 '중2병'의 전형적 캐릭터로 등장했던 빌리는 그 거침없는 캐릭터답게 자신이 가진 힘을 청소년의 호기심을 만끽하는데 우선 소용하며 b급 코믹 버전으로 넘어선다. 성인의 몸을 얻은 효과를 누리기 위해 '어른'들만이 갈 수 있는 곳, 어른만이 살 수 있는 것을 해본다던가  등등, 그러다 자신의 힘을 온라인에 시리즈로 올리는 것에서 한 술 더 떠서 사진을 찍어주며 돈을 받는 등 '무리수'의 경지에 이른다.

그러다 엇나간 그의 힘이 고가도로를 달리던 버스의 추락 사고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히어로'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위기'를 모면한다. 이 장면은 흡사 <스파이더 맨>에서 히어로로서의 활약을 하려다 외려 카페리호를 두 동강 내고만 씬과 비교된다. 자신이 가진 힘의 사회적 여파에 대해 '자각'의 계기이지만 두 씬의 무게감은 다르다.  '아이언맨'같은 아저씨와  빌리 못지 않은 프레디라는 친구의 충고의 무게감의 차이를 차치하고서라도. 히어로라는 책임감을 애썼던 소년과 아직 자신의 힘 자랑에 천착한 소년의 자각의 무게는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빌리의 질풍노도와도 같은 히어로 입문식을 종식시키는 건 강력한 빌런의 등장이다. 몸은 샤잠이지만 여전히 청소년의 유아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빌리를 닥터 샤데우스는 성급하게 히어로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거기에 그가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본의 아니게 한 가족이 되어버린 위탁 가정에 들이닥친 위기가 '빌리'를 본격 히어로의 세계로 등을 떠민다. 

 

 

그런데 영화는 샤잠과 닥터 샤데우스라는 두 힘의 대결이지만, 그 안의 내용으로 치자면 '성장하는 소년'과 '퇴행한 소년'의 싸움이다. 엄마를 찾기 위해 그토록 여러 가정을 전전했던 소년 빌리는 버스를 추락시키고서도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를 엄마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돌아갈 곳을 찾는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가족들의 존재를. 반면 닥터 샤데우스는 이미 '닥터'가 될 정도로 부와 능력을 가진 '어른'이 되었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힘을 제일 먼저 '가족'을 제거하는데 쓰듯 '퇴행적이며 유아적인 자아'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해리 포터>나 <스파이더맨>이 마법이나 자신에게 들씌워진 마법같은 능력을 통해 '사회적 자아'로 성장해 가는 것과 달리, <샤잠>은 '가족'이란 구심점으로 회귀한다. <샤잠>은 히어로물이지만, 히어로물을 기대하고 간 사람들 중 다수가 기대를 내려놓게 된 이유가 바로 이런 훈훈한 '가족주의'적 구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엄마, 아니 엄마로 대변된 가족이 그리웠던 소년 빌리는 결국 '샤잠'이라는 마법과도 같은 능력을 통해 '가족'을 얻었다. 그의 히어로로서의 본격적인 도약은 다음 편을 기대해야 할 듯하다. 

빌리를 비롯한 모두가 히어로로 거듭난 서사는 한 편에서 보면 빌리가 그러했듯 온갖 그리스 영웅적 신들의 이름을 모아 만든 호칭이 무색하게 영웅 설화의 숭고함 따위를 벗어난 반영웅적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막상 스크린에 등장한 다수의 샤잠들은 본 관객에게 다가온 것은 그러한 '누구나 히어로가 될 수 있다'는 영화의 의도보다는 <파워 레인져스>의 재현같은 치기어린 설정으로 헛웃음을 짓게 만들고마는 히어로들의 탄생 역시 <샤잠>의 소박함에 한 몫을 하고 만다. 

그나저나 이 시대에 몸도 마음도 가난한 소년들을 위로하는 건 '판타지'밖에 없는 것일까? 

by meditator 2019. 4. 9. 04:30

2003년 개봉된 영화 <언더 월드>는 지상 세계를 차지한 뱀파이어와 그들에 의해 지하 세계로 밀려난 늑대 인간의 끝나지 않는 전쟁을 그리고 있다. 같은 선조 코르니누스로 부터 시작된 후손들,  하지만 박쥐와 늑대를 통한 유전학적 변이로 인해  그들은 서로 달라졌고, 그 다름은 곧 '전쟁'의 이유가 되었다. 이렇게 고전적 뱀파이어와 늑대 인간이라는 설화적 콘텐츠를 통해 지상과 지하로 이분화된 세계를 상징했던 <언더 월드>의 2019년 판은 '설화'에서 부터 '과학'으로 그 수단이 변경된다. <어스>는 자막으로 부터 시작된다. 미국 대륙 아래 수많은 땅굴들이 파헤쳐져 있는데 그 중에는 용도가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 있다고. 땅굴? 하는 의문도 잠시, 관객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시끌벅적한 놀이 공원을 지나 유령의 집에서 벌어지는 은밀하고도 숨막히는 서스펜스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공포 영화 그 자체만으로도
<어스>를 보고 나오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영화 속에서 풍성하게 제시되는 갖가지 상징 체계들로 인하여 조던 필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를 독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어스>가 영리한 영화인 것은 물론 더 풍성하게 영화를 보기 위해서라면 영화 후일담이 필요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저 공포 영화로서의 '스릴'과 서스펜스', 그 자체를 만끽할 수 있도록 영화가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릴'과 '서스펜스'의 출발점은 무엇일까? 개체로서의 나, 그리고 나아가 집단으로서의 나에 대한 위기와 전복의 불편함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삶 자체가 유동적임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정착하고 뿌리내리고 싶어하는 지속적인 갈망 위에서 '정착'을 지향한다. 그 정착의 갈망에 대해 '이반'의 삽질이 시작되는 지점에 바로 '스릴'과 '서스펜스'가 작동한다. 나에 대한 공격, 내 가족에 대한 공격, 그리고 내가 깃든 공간, 즉 집에 대한 공격은 곧, 삶에 대한 위기로 이어진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렵게 내가 일군 것들에 대한 공격은 그 어떤 공포보다 크게 다가온다. 최근 공포 영화들에서 '집'이란 공간이 배경으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관객들이 보기엔 어리석을 정도로 그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집착'으로 공포를 추동해 나가고 그런 '집착'에 지점에 대한 영리한 공격에서 바로 '공포'는 극대화되어간다. 

 

 

<어스> 역시 바로 그 지점에서 공포가 시작된다. 어린 시절 공포의 집에서 어떤 일로 인해 실어증을 겪었던 애들레이드(루피타 뇽오 분), 하지만 이제 사춘기의 딸과 장난꾸러기 아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여름 별장으로 휴가를 떠나는 어엿한 주부가 되었다. 남편이 산 낡은 보트, 딸이 포기한 육상, 아들의 어이없는 장난 등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넉넉한 중산층 가정의 여유로운 소음과도 같다. 어릴 적 '사건'이 났던 산타크루즈 해변에 대한 찜찜함을 지울 수 없지만 가족이 좋다면야 엄마는 자신의 불편함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상의 잡음, 소음들은 그 날 밤 이 가족을 찾아온 의문의 일가족들 앞에는 그야말로 새발의 피 수준이다. 저마다 가위를 들고 다짜고짜 애들레이드 가족의 별장에 쳐들어온 가족, 놀랍게도 그들은 스스로 주장하는바 애들레이드 가족의 그림자, 도플갱어들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화는 애들레이드 가족으로 말미암아(?) '지하 생활'을 했다는 그림자 애들레이드 가족의 '복수극', 탈환극에 대항한 애들레이드 가족의 처절한 생환기로 이어진다. 

 

 

일방적인 공격에서, 적들의 빈틈을 노린 기지로 회생하는 가족들, 그리고 자신들을 공격했기에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처절한 보복, 그리고 우역곡절 끝에 다시 한번 위기를 겪으며 끝내 가족의 완벽한 생환, 하지만 과연 '우리' 가족은 여행을 떠나던 그 '가족'이 맞을까 라는 의혹의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는 엔딩까지, <어스>는 잘 짜여진 가족 스릴러의 성공적인 전형을 따라간다. 즉 영화가 풍성하게 자아내고 있는 갖가지 상징적 기호들을 굳이 독해하지 않더라도 스릴러 영화로서의 '재미'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어스>는 조던 필 감독의 이전작 <겟 아웃>의 흥미롭고 신선한 구성의 계보를 따른다. <겟 아웃>이 순진한 흑인 청년에게 닥친 뜻밖의 위기라는 모티브를 충실하게 풀어내며 새로운 공포 영화로서 관객들에게 '호평'의 불을 지펴갔듯이, <어스> 역시 평화로운 휴가 길에 나선 한 가족에게 들이닥친 '도플갱어'들의 공격이라는 흥미로운 요소만으로도 충분히 '볼 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어스, 그 풍부한 상징
하지만 이미 <겟아웃>을 통해 미국 내 흑백 갈등을 절묘한 상징을 통해 풀어낸 조던 필 감독에게 열광한 바 있었던 관객들은 애들레이드 가족을 찾아온 지하 세계의 그림자 가족들에 대해 해석을 더한다. 

'we are the world', 'amrica is beautiful'이란 슬로건 아래 굶주린 이들을 위한 기금 모금을 위해 이루어 졌던 산타모니카 해변을 비롯 미국 전역에서 이루어진 인간 사슬 만들기, 하지만 <어스>는 그 '우리'라는 미국이, 세계가, 아름답다는 아메리카가 사실은 차별적 구조로 이루어진 사회임을 드러낸다.  휴일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놀이공원에서 여유를 즐길 때, 그와 똑같은 모양을 한 지하의 사람들은 같은 모습, 다른 행태의 서글픈 삶을 보여준다. 그저 그들이 '복제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하지만 영화는 그 '복제 인간'의 구분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주인공에게 '트라우마'로 기억(?)되는 과거의 진실을 통해 고발한다. 마치 <겟아웃> 속 늙은 백인들이탐한 건강한 흑인들의 육체처럼 구획과 구분, 차별의 무의미함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여기서 조던 필 감독은 그러한 인간과 복제 인간이라는 차등적 구도를 낳은 이유로 '무차별적인 과학 실험'을 든다. 복제 인간이 지상으로 뛰쳐나간 지하의 공간에서 철장을 벗어나 산발적으로 널려진 토끼들, 그들이 복제 실험의 희생양이듯, 토끼로 부터 시작된 인간들의 무차별적 실험은 결국 같은 '인간'으로 귀결되었다는 '묵시록'적 세계를 감독은 펼쳐 보인다. 

이러한 감독의 인식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을 초래한 원인이 '과학 기술의 발달'에 있음에 대한 예리한 인식으로 부터 기인한다.  1차 산업 혁명, 2차 산업 혁명, 그리고 3차, 나아가 4차 까지 인간 사회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과학'의 발달을 추동하고, 그에 기반하여 자신의 문명들을 업그레이드 해왔다. 하지만 그런 문명이 안타깝게도 '인간 사회의 수평적 구조'에 이바지 하는 대신 되풀이 되는 수직적 위계 구조의 재생산으로 귀결되어 왔다는 감독의 인식이 영화 속 복제 인간과 인간의 차별적 구조로 나타난다. 

 

 

영화 속 복제 실험의 결과물로 등장한 '도플갱어들이 꾸린 장대한 해방의 대열은 <겟아웃>의 흑백 차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가진 자와 못 가진자에서부터 혹은 토착민과 외래인, 그리고 사회 내의 갖가지 차별화된 구조 속 인간들의 상징으로 풍성하게 읽어 낼 수 있다. 그러기에 <어스>의 어스는 우리 가족의 그 us에서 부터, 미국을 상징하는 united states를 넘어 우리가 사는 세계에까지 이르른다. 

<겟아웃>은 상대적으로 우리가 보기엔 편했다. 왜냐하면 바다 건너 아메리카가 품은 역사적 차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한 발 더 나선 <어스>는 과학 기술 문명에 기댄 인간 사회가 치달아 낸 결과물로서의 차별적 구조에 대한 묵시록적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여기의 우리 역시 그 구조의 일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겟아웃>이 저들의 이야기였다면, <어스>의 그 '우리'는 여기의 '우리'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어스>가 주는 본질적 공포는 바로 그 영화에서 드러난 묵시록적 세계의 일부분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점의 불편함으로 도달한다. 나를,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피치못해서를 넘어 거침없이 폭력과 살인을 자행하는 영화 속 애들레이드 가족에 '동일시'했던 시선이 나 역시 그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향할 때, 어쩌면 나 역시도 '나와 내 것'에 도전하는 그 누군가를 향해서는 '적개심'보다 더한 것을 휘두를 수도 있다는 서늘함이야말로 <어스>가 주는 가장 큰 공포가 아닐까. 

by meditator 2019. 4. 1. 20:42

1996년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홍상수의 영화를 봐온 건 아니지만  2000년대부터 거의 빠짐없이 홍상수의 영화와 함께 시간을 흘러왔다. 그런 그가 만든 2019년작 <강변 호텔>은 그렇게 홍상수의 영화와 함께 시간을 보내온 관객에겐 색다른 감회를 줄만한 영화일 것이다. 김상중과 이선균과 유준상 등에서  어느덧 권해효, 정진영, 기주봉으로 감독의 페르소나가 변화되어져 가는 시간조차 흘러 어느덧 그 '영원할 것 같던 치기'의 시절조차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는 시간의 엄정함에 말이다. 

 

 

호텔의 노시인, 아버지, 그리고 
영화의 시작은 겨울 풍경이 스산하기 이를데 없는 한강 주변의 호텔이다. '노인네'인 주인공은 아들의 전화를 받고 주섬주섬 자신이 벗어놓았던 양말과 바지를 추스려 입는다. 아버지의 방으로 찾아오겠다는 아들을 굳이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 할 만큼 아버지는 안다. 막상 그 방 안에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추레한 가를. 

모처럼의 호출, 호텔 커피숍에서 이루어진 부자들간의 해후는 쉽지 않다. 방에 핸드폰을 두고 나와 서로 다른 자리에 앉은 아버지와 두 아들은 같은 공간에서도 쉬이 조우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이 엇갈려온 시간처럼. 

아들을 기다리다 잠이 들었던 아버지는 밖으로 나와 호텔 주변을 거닐다 강변에 서있는 두 여성을 발견한다. 잠깐 사이에 내린 눈으로 다른 세상으로 변해버린 그 눈 속에 서있는 두 여성에게 다가간  '시인'이라는 노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찬사를 다하는데. 

그리고 다시 돌아와 발견한 두 아들에게 노시인은 뜬금없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두 아들을 불렀다는 생뚱맞은 유언의 현장 분위기를 조성한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사이라지만 새삼스레 이름을 풀어주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던 이 부자들의 사이의 속내는 얼른 보내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과 달리 늦은 시각 주변 음식점에서 이루어진 거나한 막걸리 잔의 순배 속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아내와 두 아이를 남겨두고 '바람'이 나서 집을 떠나버린 아버지, 그 아내의 정의로는 '인간적으로 가치가 1도 없다'는 아버지, 그래도 나이가 들어가는 아들들은 '아버지'라며 아버지의 호출에 응할 수 있는 넉넉함을 가지는 연배가 되었다. 물론 이혼을 했다는 소식도 전하지 않는 처지이며, 아버지 때문인지 본인의 경험때문인지 결혼에 대한 회의를 달리할 생각은 없지만.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아들들에 대한 미안함, 책임감 대신 자신이 살아왔던 삶에 대한 소신으로 대신한다. 결혼과 자식들에 대한 책임감 대신, 굴레 대신 '자유'를 택했다는, 그 소신으로 택했던 사람과의 시간 역시 결국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으로 족하다는 아버지. 

 

 

제 버릇 개 못준다는 홍상수의 인생론 
어쩐지 죽음을 예감하고 아들들을 불러 한번 보고 싶었던 아버지인 남자는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해묵은 회한 대신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예우로 찾아와준 아들들보다, 당장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두 여인에 '미혹'된다. 심지어 아들들을 빨리 보내고 싶을 만큼. 그리고 결국은 아들들을 내버려 두고 두 여인에게 다가가 시인지, 끄적거림인지, 묘사인지 모를 글자들을 늘어놓구 그녀들의 '환심'을 얻으며 함께 자리를 하는 목적을 달성한다. 그녀들이 강변 호텔을 서성이던 그때부터 내내 줄곧 그의 마음을 집요하게 사로잡았던 그 '욕망'의 성취이다. 

영화는 결국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르기는 커녕, 죽는 날까지 가장은 둘째치고, 아버지로서의 존재보다, 숫컷으로서의 욕망이 우선하고 열중했던 한 남자의 생애를 '관조'한다. 일찌기 아내의 정의처럼 사람 고쳐쓸 수 없다더니, 제 버릇 개 못주고 죽는 날까지 그가 평생 그래왔던 것처럼 '여자 주변을 추근거리다' 생을 마감한다. 그래도 사람이 죽는 순간에는 자기 삶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홍상수 감독은 그럴 여지의 싹을 잘라버린다. 자기 세대인지, 아니면 남성일반인지, 그도 아니면 '인간 일반'인지, 저렇게 살다 죽는 게 인간이란다.  묘하게도 바로 그런 죽음의 순간까지 '변하지않는', 아니 '변하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을 감독이 통쾌하게 '관철'하고 나니 뜻밖에 거기서 하나의 철학이 탄생한다. 

물론 그 맞은 편의 철학도 감독은 놓치지 않는다. 두 여성, 송선미와 김민희가 분한 관계에서 상흔을 입은 두 여성은 끊임없이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며 그 상흔을 보다듬고 부연 설명하고자 애쓴다. 아니 어쩌면 노시인의 뻔뻔한 자기 변명이나, 두 여성의 마치 상처입은 개가 자기 상처를 핥듯 애처로운 자기애나 결국은 '인간'이란 종족이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자존'의 다른 표현일 지도.  가장 본능적이고, 혹은 '관계 중심적'이라 하면서도 결국은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자기 포장적 속성까지 하얀 눈으로 포장된 세상과 달리 인간들의 모습을 나신처럼 드러낸다. 마치 원효가 해골의 물을 마시고 저잣거리로 나가 득도하듯, 홍상수는 충실하게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 그걸 변명하지 않고 줄기차게 말해오다 보니 어느 덧 '통찰력 넘치는 득도'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며 차세대 유망주 감독으로 등장하고, <극장전>, <오 , 수정>,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통해 당대성의 한 축을 대변하는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인간, 그 중에서도 남자의, 특히 지식인 남자의 위선을 까발리고 '도덕'의 포장을 벗겨낸 본능에서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던 모습을 그려내며 권위에 도전했던 젊은 감독은 25년을 바라보는 시간 동안 줄기차게 그 '가감없는 남자'의 모습에 천착해 왔다. 날카로운 비판자였다가, 집요한 스토리텔러였다가, 어느덧 달관한 담론자가 되어버린 홍상수와 그의 영화, 되돌아 보면 언제나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솔직했고, 언제나 주류인 적은 없었지만, 심지어 최근엔 그의 사생활과 겹쳐 더더욱 '아싸'를 넘어 '부도덕'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지만, 하지만 자신의 아들들 앞에서 뻔뻔하게 자신은 자유롭게 살아왔다고 강변하는 노시인처럼, 홍상수와 그의 영화는 '도덕'이 기승을 부릴 수록 '부도덕'이 범람하는 2019년이기에 더더욱 그 단단한 솔직함이 서늘하게까지 느껴지는 삶의 '촌철살인'이다. 

by meditator 2019. 3. 31. 14:03

1945년 해방, 1960년 6.25, 1980년 5.18 우리 현대사를 수놓은 비극적 역사들이다. 하지만 2019년에 이른 우리는 여전히 저 과거 사건들에서 놓여나지 못한 채 '과거사 해결'의 숙제를 안고 있다. 무엇때문일까? 역사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해석 이전에 , 그 해석에 따른 해결과 단죄 이전에, 상식적인 반성과 결자해지가 이루어 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80이 넘은 과거사의 짐을 안고 있는 전직 대통령은, 고령의 나이와 알츠하이머란 병명을 핑계로 여전히 '과거'를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그뿐인가. 우리 현대사를 이끌었던 주역들 중 상당수는 그들의 떳떳하지 못한 과거에 대해 저 전직 대통령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갖은 핑계를 대며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하거나, 심지어 '몽니'를 부리며 '아전인수'격으로 오리발을 내밀거나, 배짱을 부린다.

그런 '선대'들의 부도덕하고 비겁한 태도들이 줄곧 우리 사회가 과거를 딛고 앞으로 나서는데 걸림돌이 되고 우리를 과거에 묶어 두고 있다. 바로 그런 '선대'들에게 보여주고픈 영화가 있다. 90살을 먹은 크린트이스트우드가 굽은 등과 휘청휘청한 걸음걸이로 하지만 강단있게 보여준 그가 살아온 당대의 삶에 대한 단호한 마침표, <라스트 미션>이다. 

 

 

87세 노인의 라스트 미션
그의 나이 87세, 얼 스톤은 파산을 했다. 평생 집밖으로 떠돌며 말 그대로 꽃에 미쳐 살았다. 아니 꽃을 핑계로 가족 대신 자신의 명망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환호에 정신이 팔려 살았다. 하지만 변화하는 세상은 그가 무시했던 인터넷 거래를 융성하게 했고, 더 이상 그의 농장은 건재할 수 없었다. 압류된 농장에서 자신의 물건을 오래된 트럭에 싣고 이제야 가족들을 찾아나선 얼, 하지만 그가 찾아간 그 날이 손녀 딸의 약혼식 날이었다는 것조차 그는 몰랐다. 얼은 평생을 가족에게 그렇게 살았다. 딸의 결혼식도, 가족들에게 닥친 경제적인 어려움도, 그는 언제나 시기를 놓쳤다. 그에겐 그보다 더 그를 미혹시키는 일들이 있었으니까. 뒤늦게 짐을 싣고 돌아온 그를 아내와 딸은 외면한다. 

추레하게 뒤돌아 서는 그에게 다가선 남자, 그는 평생 신호 위반 딱지 한번 받은 적 없다는 얼에게 기묘한 제안을 한다. 바로 의문의 물건을 옮겨주기만 하면 되는 것. 오갈 곳조차 없던 그에게 단 한 번이었던 제안은, 곧 87세 그가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되찾게 해줄지도 모를 마법사 지니와 같은 것이 된다. 그만큼이나 오래된 트럭은 곧 최신식 사양의 트럭이 되었고, 그의 트럭 트렁크는 익숙하게 물건(?)을 실어나르기 시작한다.

 

 

그가 잠시 차를 비운 사이 두고 간 두툼한 봉투로, 그는 화재로 전소한 재향 군인회를 복원하고, 그곳에서 파티를 열고, 손녀 딸의 미용학원 비용을 대는 등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복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87세의 평생 동안 그랬듯 여자와, 술과 , 파티와, 사람들로 다시 그의 삶을 북적이게 만든다. 그에게 물건을 배달하도록 만들었던 마약 거래상의 우두머리의 파티도 그 중 하나다. 마약 카르텔의 우두머리에서 처음엔 총을 들이밀고 윽박지르던 조직원, 그리고 그가 다시 살려낸 재향 군인회 동료들, 그리고 그가 만난 여자들까지 얼을 다시 반긴다. 

그러던 그에게 위기가 닥쳐온다. 노익장의 마약 배달꾼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종종 그가 벌이는 일탈조차 저들의 눈을 피하기에 외려 적절한 파열음이라 생각했던 마약 조직의 보스가 처단되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그룹은 얼에게 오직 '복종'과 '규율'을 강요한다. 그렇게 그의 일이 그에게 가져온 위기의 순간 울린 전화, 평생 그로 인해 마음 고생을 했던 아내, 이제 조금만 더 그가 번 돈으로 환심을 사면 그에게 다시 마음을 열 것도 같던 아내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예정된 마약 배달이냐, 가족이냐의 기로에서 그는 지금처럼 그래왔듯이, '지금은 일이 있어서 안된다'는 말을 전하고, 그 말에 유일하게 그의 편이었던 손녀 딸마저 그에게 미처 못하고 가슴에 담아왔던 말을 퍼붓는다. 

조금 후 가족 앞에 나타난 얼, 이번에는 늦지 않고 아내의 마지막 길을 챙긴다. 그 덕에 딸도 마음을 연다. 그리고 뒤늦게 돌아가 잔뜩 얻어터진 그의 배달 길은 그만 마지막 미션이 되고 만다.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아버지 
재판정에 선 얼, 나이 많은 그를 애써 변호하려던 변호사의 말을 막고 'guilty'라 말한다. 체포되는 순간, 얼은 말한다. 자신이 돈으로 많은 것들 되돌리려 했지만, 시간만은 그럴 수 없었다고. 흡사 이 장면은 스티브 맥퀸의 명작 <빠삐용>을 연상케 한다. 이유도 없이 수용소에 갇혀 자유를 향해 수도 없이 탈옥을 감행하던 빠삐용이 영화 엔딩에서야 알게 된 죄, 바로 시간을 낭비한 죄. 그 장면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버전이랄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분한 얼은 마약 배달로 돈을 벌어 많은 것을 되돌렸다. 트럭을 사고, 압류된 농장두 풀고, 아마도 재판 후 손녀 딸의 말을 빌면 농장도 다시 예전 처럼 되살렸을 것이다. 그리고 집에도 돈을 보내주고, 하지만 그가 마약 배달 여정 중에 만난 수사관과 마약 카르텔 동료에게 충고를 하듯, 정작 그 자신이 잘못된 인생에서 다른 선택을 하거나, 가족의 소중함을 실천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돈이 그의 수중에 들어와서도 그가 돌려놓으려 했던 시간 속에 당장의 파티걸보다 여전히 가족은 먼 미래의 몫처럼 보인다. 그의 말처럼 그쪽 세대, 즉 얼의 세대 남자들이 살아왔던 방식에서 얼 역시 쉽게 벗어나질 못했던 것이다. 

얼이 스스로에게 내린 'guilty'는 바로 이런 자신의 세대에 대한 '판결'이다. 일에 정신이 팔려 한 평생 밖으로 떠돌던 아버지, 그리고 뒤늦게 그걸 '부당한 방법'으로 되돌려 놓으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을 달리하지 못한 책 아내의 부음 즈음에서야 가족에게 돌아간 아버지, 그 아버지, 아버지 세대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얼은 뒤늦었지만 용기를 낸다. 잘못된 것이라고. 

영화는 그가 돈으로 사서 복구한 농장의 아름드리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건 체포의 순간, 돈으로 시간을 다시 살 수 없다는 그의 회한과 일맥상통한다. 제 아무리 그 농장이 화려하다 한들 마약 배달로 산 농장이다.  그가 돈으로 그가 속했던 재향 군인회를 되살렸다 한들, 이제 그곳을 채울 동료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돌아가 마지막을 함께 한 아내는 그를 용서했다. 그렇게 뒤늦게서야 나타난 그였지만, 아내는, 딸의 소망은 그렇게 뒤늦게 돌아온 아버지마저 용서할 만큼 소박했다. 하지만 그는 그 소박한 가족의 꿈을 평생 외면했다. 

 

 

90세의 클린트 이스트 우드 감독이 그 자신이 등이 굽고 걸음걸이마저 휘처휘청한 노인이 되어 말하고자 한 <라스트 미션>은 마약 배달을 해서라도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려 했던 노인의 노력이었을까? 아니 그것보다는 마지막 재판정에서 단호하게 말했던 'guilty' 아니었을까. 노익장의 감독이 말한 건 자신의 세대가 살아왔던 방식에 대한 단정이자, 속죄이다. 뒤늦게 부도덕한 방식으로 라도 되돌릴 수 없었던 흘러버린 시간에 대한 반성이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가 자신의 동상을 만들려 노력한 대신에 클린스 이스트우드 감독처럼 기꺼이 자신이 살아온 세대적 삶에 대해 통한의 반성을 했다면 오늘의 우리 역사도 조금은 편안해 지지 않았을까. 

기꺼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들어간 감옥, 그는 거기서 편안하게 웃으며 꽃을 가꾼다. 마치 얼이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꽃은 어디든 핀다. 농장이든, 감옥 안이든, 어디든 무엇이 중요하랴, 꽃을 한평생 좋아했던 내가 꽃을 가꿀 수 있으면 된 거지. 마치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무엇이 중한디?'랄까. 

by meditator 2019. 3. 18. 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