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은 '영화'를 좋아하셨다. 지방 소도심에 딱 하나 있었던 극장, 그곳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한참이나 가야 했다. 나들이하는 기분으로 가던 '극장',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꽃피는 팔도강산>도 아마 그렇게 보게 된 영화였을 것이다. 왜 아니 안그랬겠는가. 1967년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팔도강산>은 당시로서는 32만 6000명이 관람한 히트작이었으니 돌고 돌아 우리가 살던 그 지방 소도시 유일한 영화관에서도 '개봉'의 혜택을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내가 본 영화가, <팔도강산>의 몇 번 째 편이었는지는 어린 나는 몰랐다. 김희갑, 황정순 배우가 나오고, 당대에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나왔다는 아스라한 기억뿐, 1967년부터 팔도강산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6편의 영화, 번외로 <팔도 며느리> 중 어느 한 편이었을 것이다. 

 

 


흔히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알려진 이 영화는 '근대화의 성취'를 빛나게 드러낸 시리즈 영화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제일 처음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두 노부부가 각지에 사는 자식들을 만나러 떠난다는 설정은 같았지만, 그 이유가 서울에 살던 기업체 사장이면서도 부모님을 나몰라라하는 큰 아들네와 여관을 운영할 정도로 잘 살지만 아내에게 꼭 잡혀사느라 부모님을 제대로 대접도 못하는 둘째 아들로 인해, 지방에 사는 다른 자식들을 찾아나서는 슬픈 이유에서이다. 이미 그 당시 축적된 '부'의 부조리를 '비판'적으로 다룬 '현실적 고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지방에 사는 아들네 학교 선생님이라지만 형편이 어려워 당시에 금지된 '미제' 물건을 팔다 경찰서에 잡혀가고 만다. 결국 거기서도 얼마 있지 못한 두 부부, 그런 부부를 가장 따뜻하게 맞아주는 건 가장 가난한 광부로 일하는 아들이다. 이렇게 영화는 60년대 산업화 이후 한국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빈부격차'와 '배금주의'의 속물성을 예리하게 꼬집는다. 

최초의 국책 영화 
하지만 이렇게 당대 이미 사회적 갈등이 되고 있는 계층의 문제를 다루었던 <팔도강산>은 공보부 산하 국립 영화 제작소로 주체가 바뀌며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1800만원이 투입되어 원작의 김희갑, 황정순 배우는 물론, 김승호, 최승희, 김진규, 이민자, 박노식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출연, 두 노부부가 자식들이 사는 경제 개발의 성과가 드러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몰라보게 발전한 조국에 감탄하는 한편, 자식들이 조국의 근대화에 솔선수범하고 있다는 거에 자부심을 느끼는 '정부 홍보 영화'인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팔도강산 좋을씨구 딸 찾아 백 리 길/ 팔도강산 얼싸안고 아들 찾아 천 리 길/ 에헤야 데헤에야 우리 강산 얼씨구/ 에헤야 데헤에야 우리 살림 절씨구/ 잘 살고 못 사는 게 팔자만은 아니더라/ 잘 살고 못 사는 게 마음먹기 달렸더라.”


전국 각지의 유명 명승지에서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최희준이 직접 <꽃피는 팔도강산>의 주제가를 부르는 것을 비롯하여, 현인, 최숙자, 은방울 자매 등이 <신라의 달밤>, <삼다도 소식>, <목포의 눈물> 등의 히트곡을 불러 영화적 재미에 '흥'을 더해준 이 영화는 1967년 국도극장에서 개봉, <미워도 다시 한번>< 성춘향>에 이어 60년대 세 번째로 관객을 많이 동원한 영화가 되었다. 

그런데 1967년에 <꽃피는 팔도강산>이 만들어진 계기에는 '선거'가 있었다. 5월의 대통령 선거, 6월의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박정희 정권은 경제적 발전 성과의 홍보 수단으로 <꽃피는 팔도강산>을 무료로 보여주는 등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렇게 국책 영화의 효시가 된 <꽃피는 팔도강산>,  이에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정부 업적을 소개하는 영화를 무료로 상영'하는 건 선거법 위반이라며 상영 중지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결국 선거 관리 위원회 위원들 9명이 직접 보고 '선거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무사히 상영하게 된 영화, 많은 관객 동원으로, 그리고 그를 통한 '경제 발전'이라는 국책 홍보의 성공적 사례로, 해외에 있는 사위들을 찾아가는 <속 팔도강산>을 비롯하여, <내일의 팔도강산(1971)>, <우리의 팔도강산(1972)>, <아름다운 팔도강산(1972) 등이 계속 만들어 졌고, <팔도 사나이>, <팔도 식모>, <팔도 며느리> 등 '팔도' 시리즈의 효시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74년에는 kbs 연속극으로 만들어져 75년까지 398회 방영, 시청률 40%의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며 스테디 셀러의 왕관을 유지했다. 

 

 
가족의 원형, 가족의 이상형 
1971년작 <내일의 팔도강산>에서 tv 좌담회에 참석한 김희갑 배우는 조국의 근대화를 예찬하는 일장 연설을 하는 등, 국책 영화로서 <팔도강산> 시리즈 곳곳에는 경제 발전에 대한 노골적 찬사가 빈번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계속 만들어 지고 , 드라마로 만들어 질 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은데에는 그저 잘 살아진 나라에 대한 성공적 홍보에만 그 이유가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낯뜨거운 홍보에도 불구하고, 당대 내로라 하는 배우들의 호연과 함께, 1남6녀의 대가족이 '아롱이 다롱이' 살아가는 모습과 전국에 서로 떨어져 있어도 결국 '한 가족'이라는 우리 사회를 지탱했던 '가족주의'에 대한 충실한 해석이 오랫동안 이 작품을 사랑받도록 한 결정적 이유가 아닐까.

코믹 배우 출신답게 아버지라지만 늘 말이 좀 앞서는, 하지만 결정적일 때 집안의 기둥으로써 아버지상을 강직하게 보여주시는 김희갑 배우,  그런 아버지의 그늘에서 조용히 계신 듯 하지만, 시련의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 의연하게 그리고 따스하게 자식들을 다독이며 어루만지는 어머니 황정순 배우, 두 분의 모습은 영화가 처음 만들어진 1960년대 이래 우리네의 '부모'님의 전형으로 오래도록 아로새겨졌다. 

 

 

그리고 영화 설정상 근대화의 역군으로 등장하는 전국의 자식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그들의 겉치레를 떨구고 보면, 서로 사랑하고 헤어지고, 심지어 사별하고, 그리고 장인 장모님의 주선으로 사위가 또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등,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사의 면면이 정겹게 잘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6,70년대 우리 사회를 지탱했던 '노력하면 성취'해 낼 수 있다는 '근대적 인간형'의 전형을 드라마 속 인물들이 각자 직업은 다르지만 충실히 수행해내며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적 메시지를 주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인기' 요인이다.  그리고 아직은 넉넉하지도 않고, 사업적 실패를 겪어도  결국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다시 힘을 얻고 살아가는, 서로가 전국에 아니 전세계에 떨어져 있어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가족'의 힘이야말로 이 영화를 오래도록 스테디셀러로 만든 요인이 아니었을까. 

 

영화의 엔딩, 이제는 쑥쓰러워서 하지도 않는 회갑연, (영화 속 노부부로 등장하는 김희갑, 황정순 부부가 겨우 '환갑'이다) 전국의 자식들이 부모님을 뵈러 고향인 '서울'로 이른바 '역귀성'을 한다. 물론 영화 속 엔딩은 '환갑'이지만, 이렇게 전국의 자식들이 부모님을 뵈러 찾아오는 그 '귀향'의 의식이 여전히 '추석'하면 부모님을 찾아 고향으로 떠나는 우리네 명절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추석이라는 의미가 예전같지 않다지만 여전히 '가족'들의 대표적 명절이 된 추석에 그 예전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서 봤던, '가족' 영화의 대표작인 <꽃피는 팔도강산>을 끄집어 내 보는 건 그 이유에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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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만약 2019년에 이 영화가 다시 리메이크된다면 어떨까? 환갑이라도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에 난색을 표하는 시대, 게다가 이 시대 환갑을 맞이한 부모님 세대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세대였으니 1남6녀나 자식들이 있다는 거 자체가 우리 시대엔 난센스다 싶다. 그래도 전국 방방곡곡에 1남6녀가 있다치고, 만들어 진다면 2019년발 <꽃피는 팔도강산>은 국책영화가 되기 이전 원작이 보여줬던 '빈부격차'의 페이소스가 듬뿍 담긴 '가족애사'에 가깝지 않을까. 저렇게 부모님이 다짜고짜 찾아든 다는 거 자체가 이제는 부모자식 사이에도 '실례'가 되는 세상, 불과 몇 십년이 되지 않은 시절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큰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변화를 겪어 왔는가를 역설적으로 <꽃피는 팔도강산>은 보여준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 다시는 만들어 질 수 없는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사족으로, 왜 '팔도강산'이었을까? 원래 남과 북을 다 합쳐 팔도강산이라 관례적으로 말하던 우리의 '언어 습관'에 굳이 딴지를 거는 대신, 북도와 남도로 나뉘어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각각으로 치는 '꿈보다 해몽'식의 해석으로 <팔도강산>이 되었다 한다. 

by meditator 2019. 9. 11. 00:00

요정 공주의 저주로 일곱 난쟁이가 되어버린 일곱 왕자에, 마법 구두를 신고 모습이 바뀐 공주라니, <백설 공주>와 <빨간 구두> 등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동화 속 이야기들이 '변주' 되었다. 그 설정만으로도 궁금해 지는 애니메이션 <레드 슈즈>이다.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만 보면 '디즈니'인가? 싶은 애니, 거기에 클로이 모레츠, 샘 클레플린 등이 목소리 연기를 했다 했는데 <라푼젤>, <겨울 왕국> 등의 캐릭터를 만드는데 참여한 김상진 디자이너와 이 이야기로 2010년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홍성호 감독이 힘을 모아 만든 '토종' 애니메이션이다. 

 

   

 

신선한 이야기 
스토리 공모 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답게 이야기의 시작은 신선하다. 동화 속 캐릭터들이 모여사는 동화의 섬, '페어리테일 아일랜드', 그곳에 마법에 빠진 공주를 구하는데 앞장 선 일곱 왕자들이 있다. 마법의 멀린, 힘의 아더, 심지어 투명망토까지 패션니스타 잭, 후라이팬이 무기로 셰프 한스, 그리고 무엇이든 뚝딱뚝탁 천재 발명가 삼형제 피노, 노키, 키오. 어벤져스급 동화 속 캐릭터들이 일곱 명의 왕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힘을 합쳐 괴물에 대항하여 '공주'를 구해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공주'는 젊고 아름다운 공주가 아니라 마귀 할멈같은 요정? 이에 실망을 하자 요정은 그들을 그만 '일곱 명의 난쟁이'로 만들어 버린다. <개구리 왕자>의 이야기처럼 아름다운 공주의 입맞춤을 받아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단다. 

당연히 아름다운 공주님을 찾는 이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의 집에 아름다운 공주님이 나타났다. 바로 <백설공주>의 그 '스노우 화이트' 공주님, 그런데 난쟁이가 되어버린 왕자님처럼 공주님에게도 사연이 있다. <백설공주> 속 이야기처럼 왕국에 나타난 아름다운 마녀에게 '혼'이 나가버린 아버지, 그 아버지가 실종됐다. 왕국의 사람들은 사라져버렸고 공주는 겨우 도망을 쳤다. 그런데 여기서 왕국을 빼앗긴 스노우 화이트 공주님은 <백설공주>에 나오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공주가 아니라 건강하고 튼튼한 공주라는 거. 

세상에서 누가 젤 이쁘니에 대답해 주던 거울은 건재하지만, 독이 든 빨간 사과는 이제 레드 슈즈가 열린다. 아니 열려야 하는데 그래서 그 마법 슈즈를 신고 마녀가 영생을 누려야 하는데 그게 영 시원찮다. 그런데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몰래 궁에 들어온 공주, 때마침 나무에서 열린 빨간 사과, 아니 레드 슈즈, 공주는 독이든 사과를 먹고 정신을 잃는 대신 레드 슈즈를 신고 늘씬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공격하는 마녀를 피해 도망을 치다 도착한 곳이 바로 일곱 남쟁이, 아니 일곱 왕자들의 집.

 

   

 

아름다움을 묻다 
<레드 슈즈>의 주제 의식은 선명하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과 진짜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걸 풀기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 속 이야기들이 자유자재로 '변신'한다. 

아름다운 공주인 줄 알고 마법에 걸린 요정을 구하려던 '자칭 아이돌급' 왕자들은 자신들이 구했던 공주가 공주가 아니라 요정이라는 걸 실망한 순간 마법에 걸리고 만다. 그리고 다시 '아름다운 공주'를 찾아 헤매는데, 그들은 여전히 '아이돌급'이었던 자신들의 인기, 그 바탕이었던 잘생김, 힘셈, 멋짐의 '자부심, 더 나아가 '자뻑'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며 자신들 앞에 나타난 아름다운 공주의 마음을 얻고자 고심한다. 

반면 성문을 밧줄 하나로 거뜬히 넘나 들었던 튼튼하고 우람한 공주는 사과가 변신한 레드 슈즈를 신고 아름다운 공주로 변신한 후, 자신의 '아름다움'이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될 수 있음에 매료되어 간다. 난쟁이 집에 '무전취식'한 신세지만 일곱 왕자들은 그녀의 미모만으로 모든 걸 허용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아름다운 공주라 하자 서로 앞다투어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애쓴다. 아버지를 찾고자 들른 마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그녀의 미모에 홀려 모든 걸 용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그 새로운 아름다움에 빠져들수록 <빨간 구두>의 원작에서처럼 '레드 슈즈'는 그녀의 발에서 벗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보이는 아름다움'은 정작 '위기'를 가져온다. 그녀가 자신의 영생이 걸린 '레드 슈즈'를 가져갔다는 걸 알게된 마녀가, 그리고 그 마녀의 부추김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자신의 파티에 초대하고 싶은 에버리지 왕자가, 아니 무엇보다 그 '아름다움'에 천착하고 싶은 욕망이 공주에게, 그리고 어느덧 그녀가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 위기를 불러온다. 

결국 영화는 보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는 용감함과 그 용감함을 담보해 낼 수 있는 건강함을, 그리고 무엇보다 그걸 스스로 선택해 내는 원작과는 다른 스노우 화이트 공주의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캐릭터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잘록한 허리, 높은 굽의 레드 슈즈에 현혹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낼 수 있는 '의지'적 인간형으로서의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며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다. 

 

 

어쩐지 유치한 구성 
그렇게 <레드 슈즈>는 '동화의 섬'을 배경으로 우리가 익숙한 <백설 공주>, <빨간 구두>, <개구리 왕자> 등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변주하며 21세기 형 동화의 가능성을 연다. 난쟁이가 되어버린 왕자들의 사랑 찾기와 독사과가 '변신'한 레드 슈즈의 딜레마, 드러난 아름다움과 주체적인 건강함 사이의 선택 등의 주제 의식은 '고전적 캐릭터'들을 통해 풍성한 상징으로 영화를 채운다. 

하지만 기발한 변주와 신선한 캐릭터의 구성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가 진행되면서 아쉬움이 드러난다. 무엇보다, 목숨을 걸고 괴물 용에 맞서 요정 공주를 구할 만큼 용감했던 일곱 왕자들이 스노우 화이트 공주의 사랑을 얻기 위해 보이는 모습은 너무 찌질하지 않은가.  심지어 그들이 마법사 멀린, 아더 왕, 잭과 콩나무의 잭, 한스와 그레텔의 한스 등으로 부터 비롯된 캐릭터라는데 보여지는 모습은 그저 철들지 않은 자뻑남들 뿐이다. 아무리 동화의 나라니 다 가능하다 하지만 얼굴에 팩을 붙이고 나타나 미모 어쩌고 하는 잭 왕자에 이르면 한숨이 나온다. 

주인공 왕자 캐릭터들만이 아니다. 공주를 파티에 초대하기 위해 병력까지 동원해 일곱 난쟁이의 집을 공격하는 에버리지 왕자의 모습은 어느 개그 프로그램의 등장 인물같다. 자신을 찾아온 마녀의 한 마디에 넘어가 공주를 향해 무모한 전투를 벌이는 에버리지 왕자는 기발한 상상력과 잘 변주된 캐릭터들의 서사를 '유치'하게 만들어 버리고 만다.  심지어 마녀의 마법 한번에 나무 괴물로 변해버린 왕자와 신하들이라니. 

여성 캐릭터의 건강함과 주체적 설정에 비해, 남성 캐릭터들의 단선적인 표현들은 결국 영화 전체 구성을 엉성하게 만들고 만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와, 각자 자신들의 딜레마를 극복해가는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는 갈등을 위한 갈등, 위기를 위한 위기를 겪어내며 결국은  역발상의 로코로 귀결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자기 극복 과정을 거친 사랑의 성취와 달리, 그 과정에서 야심만만하게 포진시켰던 일곱 왕자의 캐릭터들은 주인공 멀린을 제외하고는 소모적으로 마무리된다.

클로이 모레츠가 참여했다는 홍보와 달리 대부분의 관이 '더빙'판으로 배정된 배급에서도 보여지듯이 아동용이라고 규정했기에 '쉽게' 가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었을까. 디즈니의 유려한 애니메이션이 아이들은 물론 성인들을 매료시키며 많은 관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는 상황에서, 기발한 설정과 신선한 캐릭터로 잘 다듬어진 <레드 슈즈>라면 조금 더 '진지'한 접근이었다면 더 많은 성인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by meditator 2019. 7. 31. 04:34

남자들의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수중 발레), 이 어울릴 것같지 않은 조합을 그린 영화가 뜻밖에도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이 처음은 아니다. 아직 쓰마부키 사토시가 꽃미남이던 시절, 해체 위기에 몰린 남고 수영부에 갖가지 사연으로 잔류하게 된 다섯 명이 돌고래 조련사를 선생님의 맞아 꼴찌들의 반란을 그려냈던 2002년작 <워터보이즈>를 유쾌했던 영화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얼'만한 감동이 있을까? 2010년 AFI 디스커버리 채널 실버닥스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고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한 편의 다큐가 있다. 바로 <맨 후 스윔>이다. 다큐는 평생 수중 발레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왔던 평범한 직장인들, 마흔 줄의 그들이 이제는 상관없을 것같은 성장과 도전이라는 화두를 안고 비공식 세계 남자 선수권 대회에 참여하는 과정을 그려냈었다. 

 

 

이 다큐는 2018년 이제는 <드립 투> 시리즈로 익숙해진 롭 브라이든이 자신보다 잘 나가는 아내의 바람을 의심이나 하는 공허함에 시달리다 우연히 수중 발레 팀을 만나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영국 영화 <스위밍 위드 맨>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리고 이제 2019년 <다이빙; 그녀에 빠지다>, <세라비, 이것이 인생>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배우 질 를르슈가 메가폰을 잡아 '프랑스 버전'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이 찾아왔다. 다큐에서 영국 영화로. 이제 다시 프랑스 버전으로 거듭 '리부팅'되고 있는 남자들의 수중 발레 도전기, 그 중에서도 프랑스 버전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뜻밖에도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을 여는 건 뜬금없는 동그라미와 네모론이다. '철학'의 나라답게 남자들이 수중 발레를 하게 되는 상황을 퍼즐 네모에 동그라미를 집어넣으려고 하는 '난센스'로 풀어낸다.  아이가 네모난 퍼즐에 동그라미를, 동그란 퍼즐에 네모를 집어넣으려고 애쓰다 신경질적으로 퍼즐을 집어던지고 자리를 떠나버리는 오프닝, 그 오프닝에 이어 등장하는 건 주인공 베르트랑(마티유 아말릭 분)과 그의 가족이다. 

백수 2년차 한 눈에 보기에도 제 정신이어 보이지 않는 베르트랑의 초췌한 몰골, 거기에 시리얼에 약을 말아먹어야 할 정도인 매우 건강하지 않은 상태, 가계를 책임지는 아내, 아버지라지만 도무지 아버지 대접을 해주지 않는 아이들, 그렇게 매우 건강하지 않은 그가 우연히 아이를 케어하기 위해 간 체육관에서 남성 수중 발레단 모집 광고를 본다. 

 

 

그 무엇에도 권태로워보이던 베르트랑은 홀리듯 수중 발레단에 신청을 한다. 마치 동그라미가 네모를 만나듯. 하지만 정작 그가 가서 만난 그 '수중 발레단'은 '오합지졸'이란 말로도 설명이 모자란 '루저남'들의 모임이었다. 아마도 원작 다큐, 영국 리메이크 <스위밍 위드 맨>,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중 가장 '루저'한 주인공들을 들라면 그건 아마도 프랑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일 것이다. 

백수 2년차 우유에 약말아 먹는 심각한 우울증 환자 베르트랑, 하지만 그런 베르트랑은 로랑(기욤 까네 분)에게 자기보다 더 우울증이 심각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로랑은 감정 조절이 안되는 듯 매사가 비관적이며 신경질적이다 못해 벌컥벌컥 화를 내곤 다 때려치우라며 사라지곤 한다. 하지만 외적으로 보면 직장도 있는 그의 형편이 제일 나은 편이니. 이 수중 발레단의 형편이 어떨지는 뻔하다. 

자칭 로커라지만 노인들 게임장 막간 공연이나 따라다니며 딸이 다니는 학교에서 식당일을 하며 불법 주차한 트레일러를 끌고 전전하는 시몽(장 위그 잉글란드 분), 수영장을 파는 사장님이라지만 도대체 수영장을 판 지가 언제적인지 자금에 쪼달리다 못해 보험을 타기 위해 자신의 차에 불을 지르는 해프닝을 벌이는 마퀴스(베누알 포엘부르데 분), 거기에 수영장 잡일을 하며 호구 취급을 받는 티에리(필리페 카테린는 분)까지 멀쩡한 사람이 없다. 심지어 스리랑카에서 온 아바니쉬(발라잘방 타밀셀방 분)는 프랑스어로 대화가 안된다. 그런 그들의 현재 유일한 미덕이라면? 제 아무리  싸우고 화를 내도 다음 시간에 다시 그곳 풀에 모여 수중 발레 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로 온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에는 남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들에게 수중 발레를 가르치는 강사 델핀(비르지니 에피라 분), 그녀의 캐릭터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읽힌다. 남자들이 물 속에 들어가 수중 발렌지 자맥질인지 모를 불분명한 연습을 하는 동안, 강사 델핀은 다이빙대에 앉아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읽는다. 한때 듀오 로 수중발레 메달리스트, 동료의 부상으로 인해 더 이상 현역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그녀는 알콜 의존증 치료 모임에 나가고 있다. 

스포츠 센터에서도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수중 발레 아저씨들에게 같은 센터의 수구 팀이라도 나타나면 한껏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며 독려하는 델핀, 그리고  ​​​​​​​알콜 의존증 치료 모임에 나간 그녀는 환희에 찬 얼굴로 자신의 알콜릭을 극복하게 된 계기는 바로 사랑이라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사랑이란 수영장에 나타나 너를 좋아해 본적도 없다며 더는 주변에서 얼쩡거리지 말라며 그녀를 '스토커' 취급을 하는 남자였다. 마치 초원의 빛 속 한 구절처럼 '빛의 영광'이여, 라며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 오합지졸 수중 발레단을 한껏 멋진 팀인양 포장하고, 자신의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를 관계를 아름답다 말하는 델핀의 '현실 부정',

하지만 그런 '현실 부정'은 그녀만의 인식이 아니라, 매주 열심히 수중 발레를 한다 모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로커가 아닌 자신의 현존재도, 가족의 아픈 과거도, 무능력한 현실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비껴서있는 수중 발레 팀 모두의 상태이다. 가라앉아가면서 여전히 스스로 헤엄치지는 못하고 있는.

 

 

이대로 가라앉거나, 헤엄치거나 sink or swim
그런 팀에게 사건이 생겼다. 그들의 강사이자, 위로였던 델핀이 수영장에 나타나 그녀를 스토커로 몬 남자 때문에 다시 알콜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급기야 강사직을 내팽개쳐 버렸다. 그때 '수호 천사'로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견원지간같았던 수구 팀의 감독, 휠체어에 앉은 아마도 한때 델핀의 파트너였던 아만다(레일라 벡티 분), 

하지만 수호천사인 줄알았던 아만다는 델핀과 딴판이었다. 그녀를 죽이고 싶다 할만큼 혹독한 훈련, 그저 시간을 때우던 그들을 몰아붙이며 제대로 해보라며 다그치던 그녀, 덕분에 본의 아니게 본격적으로 훈련을 하게 된 팀은 농담처럼 시작한 노르웨이 세계 선수권 대회를 향한 꿈에 구체적으로 다가간다. 

영화는 원작의 다큐처럼 배불뚝이 루저남들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여 기적처럼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는 '기적'을 그려낸다. 하지만 영화가 주목하고 있는 건, 자기 자신의 초라한 현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한 채 비껴서있던 이들이, 수영복마저 훔치는 해프닝을 벌이면서도 그 '도전'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수용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삶을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자존심만 내세우던 베르트랑은 동서의 가구점에 나가 '갑질'을 견디며 일을 하기 시작한다. 어릴 적 아버지를 닮아 어머니에게 외면당했던, 하지만 미워하며 닮듯이  어머니처럼 자기 자신도 감정 조절을 못하던 로랑은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수용한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노래가 없을 뿐 로커의 자존심을 내세우던 시몽은 더는 로커가 아닌 자신의 현존재를 수용한다. 그는 무대 대신 수중 발레의 독무에서 로커로서 만개했고, 그의 조명 동료 역시 가장 화려한 조명으로 그와 그의 팀을 빛냈다. 그렇게 가라앉는 대신 조금씩 삶이 물장구를 치던 이들은 그 삶의 도전처럼 버거웠던 수중 발레의 도전을 성공적으로 해낸다. 

남자인 그들이 수중 발레를 한다는 것 자체가 혹 '게이'가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받았던 시간,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시몽의 낡은 트레일러를 몰고 노르웨이를 향한 길을 떠났다. 그리고  1등을 했어도 다시 그 길을 따라 돌아온 그들, 주변 사람들은 반겼지만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던 그들에 대한 기사 한 줄 나지 않는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 '찰라'의 영광을 기억한 그들의 오늘, 발걸음은 가볍다. 그들은 저마다 이제 삶을 헤엄쳐 나갈 수 있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엔 그저 투닥거리기만 했던 이들이 어느 틈에 동트는 노르웨이의 언덕에서 함께 어깨를 겯고 환희를 나눌 수 있는 동지가 된 시간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한없이 찌질했던 그들의 울컥한 인간 승리, 거기엔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배우들의 협연이 빛난다. 

by meditator 2019. 7. 27. 22:14

결벽증있던 사춘기 소녀 브라이오니는 자신이 좋아하는 언니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 분)를 로비(제임스 맥어보이 분)가 성추행하는 거라 오해했다. 그 아직 사랑을 모르던 소녀의 오해는 사랑했던 연인, 하지만 제 아무리 캠브리지대 의대를 나왔어도 가정부 집안의 아들이었던 로비를 순간 범법자로 만들어 전쟁터로 끌려가게 만들고 만다. 소녀의 섣부른 예단, 그리고 어른들의 편견어린 판단은 두 청춘 남녀의 사랑과 삶을 송두리채 '산화'시키고 만다.  1930년대 영국, 그리고 이제는 영화로도 유명해진 덩케르크 해안을 배경으로 한 2차 대전의 전장 속에서 그래전 다하지 못한 순애보는 <로미오와 줄리엣>만큼의 여운으로 <어톤먼트(2007)>를 기억에 남긴다. 

그렇게 <어톤먼트>의 원작자 이언 매큐언은 제도와 규범, 그 틈바구니 속에서 비집고 나온 불완전한 '인간', 그 중에서도 특히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논한다.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지만 자신이 성장하며 쌓아온 고정관념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 두 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그려낸 <체실 비치에서>, 사회적으로 그럴듯한 지위를 가진 두 남자를 통해 드러난 '도덕적 자충수'를 통렬하게 그려낸 <암스테르담>, 우연히 맞닥뜨린 사건을 통해 우리가 믿는 사랑과 도덕, 그리고 신념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런 사랑> 등의 작품을 통해 유수한 문학상을 수상함은 물론 전세계 평론가와 독자들이 사랑하는 작가가 되었다. 

 

 

이언 매큐언 원작의 <칠드런 액트> 
바로 그 이언 매큐언의 13번째 장편 소설 <칠드런 액트>가 영화로 찾아왔다. 더구나 작가의 40년지기이자, <어톤먼트>의 기획을 맡았던 리처드 이어가 감독을 맡았고, 거기에 작가 자신이 ' 소설에 나왔던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 , 생각을 영화로 옮기는 지적, 감성적 도전'으로 각색을 맡았다. 그리고 그런 걸출한 제작진의 의도를 엠마톰슨이 연륜있는 내공으로 발화시켰다. 

엠마 톤슨이 분한 피오나는 헌신적인 판사다. 남편 잭(스탠리 투치 분)과 함께 하는 일상조차 그녀의 일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남편은 그녀와 함께 할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접어두고 뒤로 물러서야만 하고 피오나는 샴 쌍둥이 분리 수술 등그녀가 맡은 사회적 이슈가 되는 중대한 판결에 있어서 한 치도 법리적 빈틈을 만들지 않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집중한다.

그런 그녀에게 맡겨진 가정 법원의 또 하나의 사건이 배당됐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17살 9개월 여호와의 증인인 소년 '애덤'이 수혈을 거부하고 죽음에 이를 지도 모를 상황에 대해 그녀가 판단을 내려줘야 하는 것이다.  파탄 위기에 놓였던 가정을 '종교'를 통해 회복시켰던 부모들은 종교적 교리에 따라 수혈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하지만 소년을 치료하는 의료진은 더 이상 소년의 수혈을 지연시키면 이대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며 그녀를 설득한다. 과연, 피오나는 이 솔로몬의 재판과도 같은 상황에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앞서 샴 쌍둥이의 재판에서 두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대신 한 명의 생명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명 존중의 원칙을 선택한 피오나, 하지만 정작 부모들은 자신의 한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며 언론에 그녀를 비난한다. 거기에 더해 늘 그녀의 일 앞에서 돌아섰던 남편이 그녀에게 '바람'을 필 것이라며 최후 통첩까지 하는 상황, 이 혼란스러운 형편속에서 피오나는 여태 그녀가 해오던 관행을 깨고 당사자인 소년을 만나기 위해 소년이 입원한 병실을 찾는다. 

강변의 들판에 내 사랑과 나는 서 있었지.
기울어진 내 어깨에 그녀가 눈처럼 흰 손을 얹었네.
강둑에 풀이 자라듯 인생을 편히 받아들이라고 그녀는 말했지.
하지만 나는 젊고 어리석었기에 이제야 눈물 흘리네


판사가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에 해맑게 반기는 소년, 그 소년의 순수한 마음에 피오나는 판사라는 자신의 처지를 잠시 잊은 채 소년의 기타 반주에 맞춰 예이츠의 '버드나무 정원을 지나'라는 노래를 부른다. '다가올 삶과 사랑을 생각해 보'라며 조금만 더 있으라며 만류하라는 소년을 두고 병실을 떠나온 피오나는 그 '소년'의 남겨진 사랑과 삶을 염두에 두며 '수혈'을 하도록 판결을 내린다. 

샴 쌍둥이의 판례에서 처럼 '생명존중의 원칙'에서 최선이었다 생각하며 내린 판결, 하지만 피오나가 내린 판결은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맞이한다. 18세가 된 이후의 무한하게 펼쳐진 미래를 향해 뻗어나가라 내린 결정, 하지만 소년이 맞닦뜨린 건 자신이 맹종했듯이, 종교적 결정에 순종했던 부모가 정작 소년의 수혈을 하는 순간 보여준 찰라의 '반색'이었다. 자신이 더 이상 죽지 않는다고 했을 때 행복해하는 부모의 모습으로 인해 자신이 믿어왔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소년은 반대 급부로 자신에게 '생명'을 준 피오나에게 집착하며 심지어 그녀와 함께 살겠다며 그녀의 뒤를 쫓는다. 

 

 

최선의 결정 이후에 남겨진 반전의 결말 
17살 9개월의 티없는 아름다움에 순간 매료되었던 피오나는 그가 자신에게 보내온 시를 읽고, 그가 남긴 전화 메시지를 들으며 미소를 짓지만 판사로서 재판의 당사자였던 소년의 접근을 완고하게 거부한다. 그녀의 이동 재판을 따라 비를 맞으며 찾아온 소년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도운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온정'이었다. 자신의 일에 헌신적이며 원칙적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믿으며. 

하지만, 그 '최선'의 선택은 생각지도 못한 결론에 이른다. 그녀의 크리스마스 연주회가 있던 날 그녀에게 도달한 전언은 충격적이다. 동료 변호사의 반주를 하다말고, 물기어린 목소리로 애덤과 함께 불렀던 '어리석었기에 이제야 눈물을 흘리네'를 부르고는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렇다면 피오나는 다른 선택을 해야 했을까? 샴 쌍둥이가 그냥 그대로 있다가 둘 다 목숨을 잃게 놔두고, 소년 역시 종교적 교리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게 하도록 해야 했을까? 피오나의 결정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리고 작가 이언 매큐언은 그런 제도와 법으로 다 책임질 수 없는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딜레마에 대해 고민을 해보자고 한다. 

영화 속 피오나 부부, 아내에게 바람을 핀다며 집을 나가 버린 사람은 남편이다. 다시 돌아온 남편에게 피오나는 분노한다. 그러자 남편은 나는 잠시 결혼을 방기했지만, 당신은?이라며 반문한다. 어떻게든 부부로써 화목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던 남편과 달리 피오나에게는 일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일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생명을 담보로 한 것이니 그녀로서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객관'을 넘어선 인간적으로 번민해야 할 지점에 작품은 시선을 둔다. 

 

 

한없이 싱그러운 미래가 열려있을 거 같은  애덤에 피오나는 남편 앞에서 '그저 멋진 소년이라구요' 절규하듯 매혹되었다. 하지만 판사로서의 도덕적 규범이 우선하는 피오나는 자신의 직분 이상을 넘어서지 않았다. 그녀는 비난받을 그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런 그녀의 결정 앞에 그가 믿었던 모든 것이 흔들려버린 소년 애덤은 그녀에게 새로운 기대를 걸었지만 좌절하고 만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오늘날 우리가 만능처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법'과 '제도'의 규범 속에 담을 수 없는 이면의 변수들에 대한 '헤아림'과 '관용'이다. 그건 곧 '단호한 지성'에 대한 반추이다. 그리고 그런 '행간'에 대한 반추는 오늘날 '옳음'의 이름으로 서로 선을 긋고 그 선 안에서 돌아보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여지를 내민다. 어리석어서 눈물을 흘리기 전에 한번쯤 돌아보는 시간, 바로 <칠드런 액트>이다. 

by meditator 2019. 7. 24. 17:35

크레인 가족의 5남매는 어린 시절 잠시 머물렀던 고택에서 저마다의 안좋은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이들은 결국 다시 그 '고택', 힐하우스로 돌아온다. 바로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힐하우스>의 내용이다. 오래된 집, 그곳에서 있었던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고통받지만 그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  <힐하우스>는 '오래된 그리고 기묘한 분위기의 집을 배경으로 한 '호러' 장르의 대표적 작가인 셜리 잭슨의 대표작이다. 심지어 미스테리 스릴러, 공포 환상 문학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딴 상이 제정됐을 정도다. 그런 셜리 잭슨의 또 다른 '고택'을 배경으로 한 작품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가 이번에는 영화가 되어 찾아왔다. 

 

 

마녀가 되어버린 언니 
셜리 잭슨의 또 다른 대표작 <제비뽑기>, 한 마을에서 77년의 전통을 이어온 제비뽑기, 그런데 이 '제비뽑기'는 다름아닌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을 뽑아 마을 아이들이 정성스레 쌓아올렸던 돌로 쳐죽이는 것, ' 우리 모두의 삶에 보편적인 몰인간성과 무의미한 폭력성이 있다는 것을 불쾌하게 각색해서 보여주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도는 이런 서사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마을이 있다.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고택, 그 곳에 고립된 채 살아가는 자매, 메리캣(테이사 파미가 분)과 콘스탄스(알렉산드라 다다리오 분). 몇 년전 그 고택에서는 살인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으로 두 자매의 부모가 독살당했다. 삼촌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하반신을 못쓰고, 정신적 충격으로 그 날의 시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살인 용의자가 된 건 바로 큰 딸 콘스탄스, 그녀는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언니 콘스탄스를 마녀 취급을 하고, 이들 자매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표시한다. 

 

 

언니 콘스탄스는 그때 이후로 '광장 공포증'을 겪어 집밖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 그래서 동생 메리캣이 일주일에 한번 장을 보러 마을에 간다. 홍해 바다 갈라지듯 그녀가 등장하면 피해서는 마을 사람들, 그것도 모자라 대놓고 욕을 하는 아이들,  물건은 파지만 벌레보듯하는 가게 주인과 손님들, 그리고 겨우 한 잔의 커피를 마시러 들어간 까페에서 만난 언니의 옛 연인은 대놓고 그녀와 언니를 조롱하고, 그곳의 노인들 역시 혐오감을 대놓고 드러낸다. 그러던 마을 사람들의 악의는 결국 블랙우드 저택에서 일어난 화재 현장에서 불붙으며 광란의 카니발을 벌인다. 

콘스탄스와 메리캣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흡사 중세 시대 마녀 사냥을 떠올리게 한다. 중세 시대 누가 마녀가 되었을까? 마녀 사냥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여자', 그 중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여자들이다. 가난한 과부, 병든 소녀, 그리고 버림받은 여인들이다. 사회로부터, 그리고 그 사회의 중심이 된 남자들로부터 외면받은 그들은, 그리고 그들의 처지는 '마녀'라는 이름 아래 잔혹한 '살해'의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블랙우드 가문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심지어 살해 용의자가 된 콘스탄스와 메리캣은 더할 나위없는 마을 사람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아마도 중세 시대부터 이 가난한 마을 사람들과 달리 '부'를 누려왔던 블랙우드 가문에 대한 계급적 적대감을 두 자매에 대한 '마타도어'로 치환시킨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 '비극'의 실체가 중요하지 않다. 77년된 <제비뽑기> 속 마을의 전통 그 유래가 중요하지 않듯, 마치 까마귀들이 병든 동료가 발견되자 마자 쪼아죽이듯 그렇게 쪼아대는 그 '악의적 관습'이 마을을 사로잡는다. 심지어 한때 언니와 사랑해서 야반도주를 하려다 아버지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소방대원조차 '진실'대신 동생 메리캣에 대한 극도의 혐오로 자신의 상처를 대신한다. 

 

 

보호받지 못한 자매 
그리고 그 맞은 편에 마법적 주술에 의존해서 자신을 지키려 안간 힘을 쓰는 메리캣과 블랙우드 성에 갇혀 박제된 인형처럼 살아가는 언니 콘스탄스가 있다. 그런데 그런 아슬아슬한 두 자매의 보호막이 사촌이라며 찾아온 찰스(세바스챤 스탠 분)를 통해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스테이시 패슨 감독이 2013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바 있는  <커피 한 잔이 섹스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풀어냈던 동성의 관계는 영화 속 언니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메리캣과 그런 메리캣에게 '사랑해'라며 보상해 주는 언니의 관계를 통해 긴장감있게 전환된다. 그리고 이 미묘한 자매애는 사촌이라며 등장하는 '남자' 찰스을 통해 '이방인'에 대한 긴장감 이상의 성적 긴장감을 낳으며 '블랙우드'가 파국의 또 새로운 단초가 된다. 

'남자', 아니, '남성'으로 인한 자매의 위기, 그리고 그건 그동안 본인들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비밀'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왜 콘스탄스가 사랑하는 이와 떠나려다가 떠나지 못했는지,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 날 밤 블랙우드가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니 그 이전에 '블랙우드'가의 비극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찰스'의 등장은 그의 얄팍한 잔꾀가 도발한 잔잔했던 자매의 일상을 궤멸시키는 것을 넘어 위기의 순간 그를 '아빠'라며 부르며 절규하는 두 자매를 통해 봉인되었던 진실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봉인된 진실에는 마을 사람들조차 부럽다 못해 질시하고, 저주했던 '부'의 상징 블랙우드 가가 무색하게 '가족' 내에서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 여성이 있다.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의 상처는 결국 '가문'의 비극을 낳고, 다시 '세상'의 보호마저 닫힌 그녀들은 안식처인지 감옥인지 모를 '블랙우드'로 침잠한다. 

영화는 아름다움이 '호러'가 되는 색채감이 넘치는 미장센을 통해 '블랙우드'가의 비극을 상징해 낸다. 그 비극 속에서 주술에 자신을 맡긴 기괴한 소녀와, 인형처럼 박제되었던 언니의 이질적인 자매의 끈끈한 사랑 속에 숨겨진 블랙우드 가문의 비밀을 미스테리의 한 축으로 하며, 거기에 이 자매들을 '마녀 사냥'으로 몰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증오의 카니발을 끼얹으며 보호받지 못한 소녀들의 비극은 절정에 이른다. 

by meditator 2019. 7. 14. 01:24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이 쟁쟁한 DC코믹스의 캐릭터들을 제치고 이 시대의 대표적 액션 판타지 영화의 대표로 자리매김한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차별성을 손꼽으라 한다면 아마도 '세계관'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절정 아이언맨에서 부터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토르, 과거로 부터 소환된 캡틴 아메리카 등 이종의 히어로들이 마치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어온 식구들처럼 때로는 아웅다웅하지만 결국은 '우리가 남이가' 식의 일사분란한 지구 구하기 대장정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전의 대장이 '캡틴 아메리카'일 지언정 그 중심에 시리즈의 시작 '아이언맨'이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에는 아마도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마블 캐릭터들의 거대한 연합작전 '어벤져스'의 마무리는 '아이언맨'과의 작별이 되었다. 

 

 

아이언맨이 없는 세상 
그리고 다시 돌아온 스파이더맨의 시작은 바로 그 '아이언맨의 부재'로 부터 시작된다. 전설의 OST, <보디가드>의 I will always love you가 울려퍼지며 아이언맨을 추억하며 영화가 시작된다. 그저 영화 속 캐릭터였을 뿐인데, 아마도 <어벤져스> 시리즈와 함께 했던 관객들이라면, 아이언맨의 마지막 대사, 'I'm Iron man'을 떠올리며 뭉클한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이방의 관객들이 이럴진대 영화 속 아이언맨을 '아버지'처럼 따랐던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오죽할까. 그리고 '아이언맨'으로 대변되는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에 의지했던 사람들의 상실감은. 

영화는 바로 그 '혼돈'과 '혼란'에 촛점을 맞춘다. 인피니티 워 이후 절반만 남았던 지구인들, 타노스와의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사라진 사람들이 돌아왔다. 파커가 다니는 고등학교를 기준으로 그 '5년'의 공백은 웃자라버린 아이들과 미처 시간을 따르지 못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 두 '시간차'을 어떻게든 메꿔가고자 애쓰는 학제로 영화는 '혼란'을 극복하려 애쓰는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하지만 그저 시간을 달리 살아온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어려움만이 힘든 것은 아니다. 사랑했던 이를 잃은 사람들은 아직 그 상처에셔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피터 파커도. 부모님없이 '숙모'와 함께 살아왔던 피터에게 아이언맨은 '아버지'같은 존재였다. 그 '아버지'는 죽고, 아버지의 '과업'만 남았다. 하지만 아직 너는 어리다며 가서 고등학생의 신분에 충실하라던 아이언맨 앞에서 자기도 함께 싸우게 해달라며 '오버'액션하던 스파이더맨은 '아버지'라는 배경이 없어지자 문득 두려워졌다. 그 두려움을 피터는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또래 친구에게 사랑 고백도 하며 그렇게 '일상'에 침잠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풀고자 한다. '삶의 지체'다. 

 

 

누구라도 믿는다? 
반면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아이먼맨'이 지탱했던 세상, 타노스의 침략은 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누가 우릴 구해주지? 그런데 마치 그런 사람들의 우려를 알기라도 하듯 '엘리멘탈'이 등장한다. 멕시코에서 나타난 얼굴이 있는 토네이도, 그리고 베니스에서 등장한 물의 괴물, 공기, 물, 불, 흙이라는 자연의 4원소를 기반으로 한 '신종의 빌런'에 사람들은 다시 간절하게 새로운 '메시아'를 갈망한다. 그리고 '닉 퓨리'에게서 울리는 발신인을 알수 없는 전화를 받지 않는 스파이더맨 대신 '미스테리오'가 등장하여 '엘리멘탈'에 대치한다. 당연히 사람들은 새로운 히어로에 환호한다. 

스파이더맨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언맨 대신 자꾸 자신을 찾아대는 닉 퓨리가 부담스러워 슈트까지 안가지고 떠난 여행, 마치 자신을 쫓아오듯 가는 곳마다 나타나는 '엘리멘탈'을 안간힘을 써서 막아주는 '미스테리오', 심지어 아이언맨이 그랬듯이 '인생 상담'마저 마다하지 않는 이 '푸근한 아저씨'에게 자신의 '과업'을 냉큼 넘겨줘버리고 만다.  

그렇게 '현대의 신'이 사라진 세상, '아버지'가 사라진 세상의 혼돈과 혼란, 그리고 거기에 대한 책임에서 도망치고 싶은 아직은 채 성장하지 않은 히어로의 이야기를 풀어낸 <스파이더 맨; 파 프롬 홈>의 설정은 절묘하다. 

영화 속 '미스테리오'는 '평행 우주론'에 근거하여 다른 차원의 지구에서 온 '히어로'라 자칭한다. 그 차원의 지구에서 미스테리오의 가족은 물론, 지구를 파괴한 빌런 '엘리멘탈'이 또 다른 차원의 지구를 파멸로 빠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미스테리오의 주장은 또 다른 스파이더맨 에니메이션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를 본 관객들이라면 친근할 것이다. 

그 영화 역시 '평행 우주론'에 기반을 두고, 여러 '지구'가 존재하며 그곳마다 방사능에 오염된 거미에게 물려 '스파이더'한 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이 있다는 설정을 가지고 차원이 무너지면서 이 '지구'로 몰려오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 다른 차원에서 몰려온 배나온 스파이더맨 아저씨를 비롯하여, 여자 스파이더맨, 스파이더 돼지 등 6명의 스파이더맨은 이 차원의 지구는 물론 평행 우주 전체를 무너뜨리려는 위기에 '스파이더 어벤져스'가 되어 힘을 합친다.

두 스파이더맨의 공통점은 '히어로의 상실'이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가 피터 파커라는 히어로의 죽음으로 부터 시작됐다면,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아이언맨의 죽음으로 그걸 이어받아 내가 의지했던 대상의 상실이라는 공통의 설정을 가진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 
반면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설정을 뒤튼다. 다른 차원에서 온 동지, 미스테리오, 하지만 그 '섣부른 믿음'은 '재앙'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주목할것은 그 '미스테리오'의 태생이 바로 '신'이었던, '아버지'였던 아이언맨의 경솔한 행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가고 이제 '전설'이 되었지만 해피가 추억하듯 히어로이기 이전에 인간 토니 스타크는 경솔했고, 늘 저지르고 후회하던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신화'의 속살을 들여다 본다. 

전설이 되어버린 아버지가 했던 과업을 짊어지기 버거워 도망치려 했던 피터는 이제 그 '아버지가 저지레 해놓은 쓰레기'를 청소하는 것으로 히어로로써의 임무에 첫 발을 내딛는다. 

아이언맨의 유업까지 떠맡아야 할 지도 모를 '과업'이 버거웠던 피터는 고향인 뉴욕을 떠나 유럽으로 '놀러간다', 하지만 그를 따라오듯 등장한 '빌런', 도망치듯 유럽으로 떠났던 스파이더맨은 자신의 앞에 등장한 어마어마한 빌런이 '조작된 환상'이었음을 깨닫고 그곳을 향해 돌진한다. 그리고 그건, 자신을 짖눌렀던 어쩌면 또 하나의 조작된 환상일 수 있는 신화가 된 아버지 아이언맨을 향한 돌진이요, 그저 어리숙한 착한 소년에 불과했던 자신의 지난 날의 극복이다. 그렇게 소년 스파이더맨은 '아버지'을,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과거의 쓰레기를 밟고 '소년'의 시절을 경과한다. 그리고 그건 이제 더는 그가 '뉴욕'의 거리를 지키는 보이스카웃이란 존재에 머무를 수 없음을 뜻한다. 

 

 

과연 대장정의 막을 내린 <어벤져스> 시리즈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그 과제를 마블은 기댈 곳을 잃은 소년 스파이더맨을 통해 다시 한번 '신화'적 서사의 틀을 빌려 온다. 그리고 아버지를 극복해야만 스스로 히어로로 거듭날 수 있었던 신화 속 히어로들처럼 소년 스파이더맨은 '아버지'의 과오'가 잉태한 집단 '미스테리오'를 통해 자신의 어깨를 짖눌렀던 부담에서 한결 가볍게 첫 발을 내딛는다.

심지어 아이언맨이 만든 시스템 '이디스'를 자신의 손으로 넘겨주어 역으로 공격을 받게 되는 상황, 오늘날 문명의 이기로 등장한 '드론'이 공격무기가 되는 역발상의 아이디어는 결국 좋은 시스템이 문제가 아니라, 그걸 어떻게 누가 제어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통해 스파이더맨은 기꺼이 그 시스템 주체로서의 자리를 거머쥔다.  자신의 친구들을 지키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여 예의 뉴욕의 시절부터 그의 엔진이 되어왔던 '보이스카웃'정신의 이타심으로 그 발걸음은 도약한다. 그리고 거기에 발판이 되는 건 '아버지'의 동지였던 닉 퓨리와 해피이다. 그렇게 <어벤져스> 이후의 신화, 그 시작은 가장 인간적인 히어로 스파이더맨으로 부터이다. 

by meditator 2019. 7. 5. 16:23

은퇴 후 한적한 삶을 이어가던 조르주와 안느 부부, 그 평화로운 삶에 '도둑'처럼 아내 안느의 병이 찾아온다. 반신불수가 된 아내를 돌보는 일은 온전히 남편 조르주의 몫,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하는 게 수치스럽고, 남편은 이제 정신조차 온전해지지 못하는 아내를 감당해야 하는 게 버겁다. 그러나 정작 딸마저도 그런 두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들에게 닥친 잔인한 운명에 남편 조르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여기까지가 미카엘 하케네 감독의 2012년작 <아무르>의 이야기이다. '존엄'하고 싶지만 노년을 덮친 '병마'로 인해 '존엄'도, '관계'도 허물어져 가는 노부부, 그 중에서도 남편의 극단적 선택을 감독은 역설적인 제목 '아무르'로 설명해 냈다. 이 작품으로 미카엘 하케네 감독은 2013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비롯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전세계적 찬사를 받았다. 

 

 

<아무르> 이후 
남겨진 남편은 어떻게 되었을까? 바로 이게 개봉한 <해피 엔드>를 여는 질문이다. <아무르>에서 음악가인 남편 역을 맡았던 배우 장 루이스 트레티냥이 전작에 이어 칼레 지역의 성공한 부르주아 '로랑' 가문의 아버지로 돌아왔다.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아내를 보낸 남편 조르주에게 점점 아내와 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명색이 로랑 가문의 수장이지만 이제 실질적인 일은 딸 앤의 몫이다.

그런데  <해피 엔드>의 이야기는 각도를 좀 튼다. 그리고 지평을 넓혔다. 로랑 가문에 새로운 일원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외과 의사로 일하는 아들 토마스(마티유 카소비츠 분)의 딸 '에브(팡틴 아후뒤엥 분)'이다. 전처와 함께 살던 딸은 그 전처가 약물 중독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면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다.

엄마가 아파서 아빠 집으로 온, 아니 사실은 딸인 자신을 방치하고 외면하는 엄마에게 약을 먹이며 그 과정을 자신의 sns에 중계한 '이상 심리'을 보이는 소녀 에브는 지금처럼 자신을 둘러싼 일상을 sns에 보고하는데 그러면서 로랑 가문의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병으로 무너진 개인의 존엄의 문제를 다뤘던 <아무르>, 하지만 노부부, 나아가 그 각자 개인의 존엄이라는 '실존적 문제'는 로랑 가문이라는 '가족의 관계'로 위상이 바뀌어져가면서 '관계'가 무색하게 흐트러져 버린 현대 '가족'의 민낯이 드러나보여진다. 

 

 

죽음만이 해피엔드? 
아내를 그렇게 보낸 아버지 조르주 로랑은 아내와 같은 그림자가 자신을 드리워가는 걸 절감하며 스스로 자신을 '처리'하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한밤중에 조용히 차를 몰고 나가 나무에 돌진한다거나, 그 사고로 인해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자신의 이발을 위해 찾아온 이발사에게 자신을 죽여줄 것을 문의한다거나, 그의 모든 촉각은 스스로 존엄할 수 없는 자신의 죽음으로 향해있다. 가족에게는 가문을 대표하는 어른이지만 그런 가족의 기대는 이제 조르주에게 번거로울 뿐이다. 

병든 아내의 말년을 책임진 아무르처럼, 손녀 에브도 엄마를 '책임'졌다. 일찌기 여름 캠프에서 친구에게 시험해 본 방식으로, 자신이 기르던 엄마가 싫어하는 애완 동물에게 실험해 본 그대로 엄마에게 실행한 것이다. 엄마와 딸의 관계라지만 에브가 아주 어릴 때 오빠의 죽음 이후로 무너져 버린 가정, 아버지는 집을 떠났고, 엄마는 딸을 방치하고 외면했으며 우울증에 허덕였다. 그리고 그 결말은 이제 막 소녀 티가 나기 시작한 '에브'로 하여금 할아버지와 같은 선택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소녀가 감당할 수 없었던 모녀 관계에 대해 소녀가 선택한 최선의 '해피엔드'였을까? 

할아버지와 손녀의 같은 선택, 그리고 이제 또 할아버지와 손녀는 같은 곳을 바라본다. 존엄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끝내기 위해 고심하는 할아버지와, 엄마와의 전쟁같은 생활을 끝내고 비로소 '가족'다운 가족을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한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 하는 에브.

로랑 가문으로 들어온 에브가 다시 한번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이다. 죽은 오빠 대신 새엄마가 낳은 동생도 생기고, 그 동생을 이젠 자신이 돌봐주겠다며 의지를 다졌던 에브, 하지만 아버지는 바람을 피며 모처럼 맞이한 에브의 평안에 위기를 드리운다. 더는 누구를 죽이며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에브'는 그래서 이번엔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이 위태로운 현실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다른 가족이라고 나을까. 아버지 대신 사업을 돌보는 딸 앤은 모든 촉각이 일로 수렴된다. 그리고 자신의 유일한 아들 피에르(프란츠 로고브스킨 분)을 승계자로 만들기 위해 다그친다. 하지만 사업을 위해 '사랑'도 기꺼이 이용할 줄 아는 앤과 달리 유약한 피에르는 사업에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알콜 의존적이다. 

사고를 내서 휠체어에 의지하는 처지이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성대하게 치뤄진 조르주의 생일 파티, 그리고 이어진 앤의 약혼 파티, 도시의 명사들이 초대된 남보기엔 부러울 것 없는 한 도시의 내로라하는 가문, 그러나 정작 자신을 내버려두라며 난리를 치다 어머니의 약혼에 이민자들을 초대하여 백인 부르주아 파티였던 약혼식장에 찬물을 끼얹은 피에르의 해프닝을 뒤로 하고, 조르주는 조용히 손녀 에브에게 자신의 휠체어를 밀게 한다. 바다를 향해서. 

 

 

개인적인 존엄과 실존의 문제였던 <아무르>의 죽음은 이제 그 파장이 가족으로 커지며 개인을 넘어선 관계에 대한 회의로 넘어간다. 한 지방의 명망있는 가문이라 일컬어지는 로랑 가문, 하지만 그 가문의 실상은 피폐하다. 스스로 아내를 죽인 할아버지, 엄마를 죽인 손녀, 가정이 있지만 변태적인 섹스에 탐닉하는 아버지, 부도덕한 방식도 마다하지 않는 워커 홀릭 딸, 그리고 약물 중독인 손자, 아니 더 심각한 문제는 저마다를 짖누르는 문제가 '가족'이라는 관계를 통해 전혀 소통되거나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손녀 에브는 가족으로 소통할 수 없는 걸 엄마에게 했던 행동을 중계하듯 sns에 중계하며 아이러니한 집착을 보인다. 

<아무르>에서 실존의 고민은 피폐한 결론이었지만 존엄을 향했다면 이제 시간이 흘러 <해피엔드>로 오면 개인의 존엄은 관계 속에서 더욱 피폐해지고 고립되어져 드러난다. '가족'은 존재하지만 소통하지 않고, 현대 사회의 sns는 소통하지만 치유하지는 못한다.   거장 미카엘 하케네가 그린  2019년의 현실이다. 

by meditator 2019. 6. 29. 17:54

공포 문학 장르로 연신 투고했지만 좋은 답을 얻지 못했던 작가 지망생은 자신이 아르바이트했던 고서당의 경험을 살려 '라이트 노벨'을 써보았다. 검은 색 긴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여주인공 시노카와 시오리코의 '순정 만화 풍' 삽화를 표지로 한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은 이 무명의 작가 미카미 앤을 680 부가 팔린 베스트 셀러로 만들어 주었고, 라이트 노벨로 시작된 작품은 7권에 이르러 명실상부한 '소설'로 인정을 받으며 드라마, 에니메이션으로 재탄생되었다.

2019년 지금까지의 리메이크 작 중 가장 시오리코답다는 평가를 받는 <일일시호일>, <립반윙클의 신부>의 쿠로키 하루를 여주인공으로 할머니에 이어 양장점을 통해 추억을 길어 올렸던 <미나미 양장점의 비밀> 미시마 유키코 감독이 다시 한번 세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고서당 바블리아를 통해 들고 왔다. 

 

 

난독증 청년 고서점을 찾다 
시작은 뜻밖에도 할머니때문에 '책 트라우마'를 가진 청년 다이스케(노무라 슈헤이분)로 부터 시작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분의 물건을 정리하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책을 만졌다가 뺨을 맞을 정도로 혼난 기억을 살려낸 다이스케. 그는 그 이후로 글만 있는 책을 읽지 못하게 되었다. 그 사건만 빼놓고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식당을 운영하시며 다이스케에게 언제나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셨던 할머니, 문득 그렇게 좋은 분이 왜 그때 그 책때문에 그토록 화를 내셨을까란 의문점에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를 들고 비블리아 고서당을 찾는다. 

고서당을 찾아온 난독증의 청년, 그런데 고서당의 주인은 시노카와 시오리코, 돌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다쳐 동생의 도움을 받아 서점을 운영하느라 쩔쩔매던 시오리코는 청년 다이스케를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하게 되고. 다이스케는 그 조건으로 자신은 혼자 읽지 못하는 '그후'를 함께 읽어주기를 내세우는데. 

나쓰메 소세키의 '그후'를 들고 찾아갔을 뿐인데, 그 책으로 부터 할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추론해 내고, 숨겨진 사연까지 예상해낸 고서당 주인 시오리코, 제목처럼  7권으로 마무리된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은 고서를 사고 파는 주요한 업무 외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줄어들고 있는 '고서'에 대한 수요를 주인 시오리코의 박학한 고서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추리'라는 '부업'으로 이끌어 간다. 

원래 서점의 주인인 할아버지가 사제가 되는 대신 차렸기에 성서(bible)의 라틴어 이름인 '비블리아'를 가게의 제목으로 삼았다지만 오타쿠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원조'국가 답게, '고서'라고 하기가 무색하게 나쓰메 소세키로 부터 시작하여 다자이 오사무, 에도가와 란포 등 일본 근대 작가들을 섭렵하여 셰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세계를 '고서'를 매개로 주유한다. 그리고 방대한 7권으로 이루어진 각 권마다 '고서' 들이 등장하고 그와 엮어진 '사람'들의 사연이 등장한다. 심지어 여주인공의 어머니는 '책'을 쫓아 집을 나갔다는 사연처럼 그 어머니를 닮은 여주인공 처럼 등장인물 등중에는 '취미' 그 이상으로 '고서'에 연연한다. 

 

 

책을 매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영화는 이렇게 씨줄과 날줄로 책과 엮어진 사람들의 사연을 다이스케가 가져간 '그후'로 부터 풀려나가기 시작한 다이스케 할머니의 '러브 스토리'로 압축시킨다. 과거의 젊은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가게를 찾아온 손님이었던 작가 지망생 다나카 요시오(히가시데 마사히루 분), 가게를 찾아온 첫날 실수로 정신을 잃은 다나카에게 친절했던 젊은 안주인 고우라(카호 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두 사람은 '다자이 오사무의 <판도라의 상자> 책을 통해  감정을 쌓아간다. 그러나 이미 남편이 있던 고우라와 작가라는 재능의 한계와 집안의 반대에 부딪친 청년 다나카의 사랑은 '비극'으로 마무리되고, 두 사람의 관계는 마지막 포옹을 한 각자의 손에 들려있던 '나쓰메 소세키'의 <그후>와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으로 상징된다. 

그 사실을 알리 없는 손자 다이스케가 <그후'를 통해 할머니의 과거를 따라 고서당의 주인 시오리코와 만나듯이, 자신의 감정을 토해놓듯 쓴 '사소설'이라는 장르의 선구자 다자이 오사무 <만년>은 새로운 등장인물 다나카 요시오를 통해 다이스케는 물론, 오타쿠를 넘어 책의 세계에 갇혀있다시피 했던 시오리코로 하여금 '사랑'에 눈뜨게 만드는 가교의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

한 청년의 슬픈 실연의 상처를 다룬 <그후>, 그리고 부잣집에서 태어났음에도 끊임없는 자기 혐오로 부터 비롯된 자살 시도를 되풀이 하며 자신의 감정을 토해놓은 작품을 썼던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 등 책을 통해 사랑을 읽고, 책을 통해 사랑과 자아를 살피게 하며 <비블리아 고서점 사건 수첩>은 50년전에 씌여진 러브레터를 찾아 과거 여행을 떠나 할머니의 첫사랑 찾기를 하는 <레터스 투 줄리엣>처럼 손자 세대의 사랑과 과거의 사랑이 씨줄 날줄로 교차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또한 어쩌면 상투적일 수 있는 청년과 유부녀의 불장난같은 사랑은 작가 지망생인 청년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읽어나가는 작품들을 통해  그리고 결국은 발표되지 못한 그의 '사소설'을 통해 로맨틱하고 아련한 러브 스토리로 승화된다. 긴 호흡의 소설을 짧은 시간의 영화 속에 녹여내느라 때로는 등장 인물들의 감정선에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그 조차도 고서점이라는 현실적이지 않은 공간, 거기에 모여드는 현실에서 한 발 비껴선 인물들, 그리고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희석되며 다하지 못한 과거의 사랑과 그로 인해 책에 집착하게 되는 인물들의 사연이 포장된다.

홋카이도의 시골 마을 소라지의 와이너리, 고베의 고즈넉한 골목 끝에 자리잡은 미나미 양장점을 통해 사랑과 안식을 이야기 했던 미시마 유키코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한 발 성큼 비껴서서 상상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 아름다운 이야기에 젖어들고 싶다면  볼만한  영화이다. 무엇보다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이라면 '일독'해볼만하다. 

by meditator 2019. 6. 26. 21:14

<평일 오후 3시의 연인>, <우리 가족 라멘샵>의 배우 사이토 타쿠미가 감독이 어 찾아왔다. 7월 4일 개봉 예정인 <13년의 공백>이다. 첫 작품이이라지만 이미 2017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대상, 20회 상하이 국제 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3회 시드니 인디 영화제 최우수 각본상 등 우수 영화제에서 연출력과 감독성을 인정받았다.  출연진도 화려하다. 이 영화로  2017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수상한 마스타 코지를 비롯, 우리에겐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으로 알려진 <어느 가족>의 릴리 프랭키 등 최근 일본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청춘 스타와 연기파 배우의 '협연'과 배우로 출연한 사이토 타쿠미, 칸노 미스노, 마츠오카 마유 등의 연기도 관전 포인트이다. 

 

 

'그사람'이 되어버린 '아버지'
어쩌면 이야기의 시작은 우리가 어디선가 보거나 들었던 '그런'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마츠다 마사토 씨, 가끔은 아들과 캐치볼도 해주는 평범한 아버지인 듯하지만, 사실 무능력한 가장이다. 학교에서 상을 받은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도박장을 찾아야 하는, 하지만 그 '도박'으로 생긴 빚을 갚지 못해 집으로 조폭들이 찾아와 가족들이 맘 편하게 밥 한끼 먹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아버지이다. 

카레 냄새를 숨기지 못해 빚쟁이들의 조롱을 받던 어느 저녁, 담뱃값을 놔두고 아버지는 담배를 사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13년, 아버지가 있어도 가난했던 가정의 형편이야 말해 무엇하랴. 아버지 대신 가장의 짐을 떠안은 어머니는 밤낮으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빈 자리는 남겨진 아이들의 몫이었다, 다친 어머니가 못한 일을 해야 했던 형제들, 책상 앞에만 매달리던 형의 눈빛은 한층 매서워졌고, 아버지가 있을 때도 물려받아 허름하고 어깨가 다 나올 정도였던 동생의 티셔츠는 여전히 더 낡은 채 더 마른 동생의 몸에 걸쳐져 있다. 

그렇게 코지와 요시유키 형제와 어머니는 13년의 세월을 견뎠다. 아버지는 '그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13년만에 찾아온 아버지, 아니 아버지의 소식, 13년이 무거웠던 세 모자는 그 누구도 '그 사람'을 찾고 싶지 않다. 
 

 

아버지가 싫습니다, 그런데
마츠다 가족의 비극사를 담담하게, 하지만 그래서 그 비극의 여운이 울렸던 1부, 하지만 영화는 오프닝을 열었던 마츠다의 장례식장 상황의 블랙 코미디를 통해 '반전'을 꾀한다. 똑같은 '마츠다' 씨의 장례식장이라지만 조문온 방문객이나 친지들의 구성만으로도 극과 극의 대비를 보여준 모습, 거기서 살아 생전이나 죽어서도 '초라하고 볼품없는' 그 사람 마츠다가 단적으로 보여진다. 

승려의 독경 등 장례식의 절차가 끝나고 통과 의례로 시작된 조문객들의 '조문사', 본의 아니게 몇 되지 않은 조문객으로 인해 요상한 면면의 조문객들이  '그사람'과 어떤 사연으로 엮이게 되었는가가 드러난다. 

'웃다 보니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블랙 코미디의 전형처럼 도박장의 동료, 직원, 경마 친구, 오갈데 없어 함께 살게된 동거인, 병실 이웃 등이 구구절절 때론 구차하고, 종종 어이없는, 심지어 막무가내인 에피소드들이 일본 영화 특유의 '코믹'한 해프닝으로 이어지며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두 아들 코지와 요시유키의 표정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집을 나간 아버지가 다르게 살지도 않았다.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가서도 여전히 마작을 하고, 경마를 하며 살던대로 살던 아버지, 하지만 여전히 무능력하고 세상 쓸모없어 보이던 아버지가 그의 '친구'인지 모를 조문객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조금씩 달라진다. 결국 마지막 가족 대표로 답사를 하게 된 코지, '아버지가 너무나 싫습니다, 그런데 조금은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며 울먹이고 만다. 

 

 

장례식은 그 자체로 영화의 좋은 소재다. '장례식' 자체가 영화가 된 영화로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1996), 그리고 같은 해 임권택 감독의 1996년작 <축제> 등이 있다.  일본 영화의 고전으로 치는 아타미 주조 감독의 <장례식(1984)>도 빼놓을 수 없다. 장례식은 말 그대로 죽은 사람를 보내는 의식이다. 그리고 그 의식은 각 나라와 지역의 풍습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보여진다. 죽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제 '이승'과 이별을 하는 통과 의례지만, 동시에 그것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이별'의 과정이다. 

임권택 감독은 <축제>를 통해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를 통해 가족간에 얽혀진 악연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같은 가족이라지만 처지가 달랐던 삼촌과 조카가, 할머니의 장례라는 공간을 통해 해후하고, 장례 과정의 해프닝을 통해 저 밑에 숨겨두었던 앙금들이 드러나며 한 판 굿처럼 풀어지며 결국 엔딩의 사진 한 장처럼 웃으며 '화해'하는 '해피엔딩',

죽은 자가 펼쳐놓은 마당에 산 자가 자신의 묵은 해원의 굿풀이라는 점에서 <축제>의 그것과 <13년의 공백>은 비슷하지만, 같은 '화장'이라지만, 다른 장례 풍습처럼 그 '해원'의 뉘앙스가 다르다. 

자신들을 버리고 간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자식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자신의 아이를 유괴해 죽인 범인을 어렵사리 용서하고 찾아간 신애(전도연 분)는 그만 그 범인이 이미 신께 귀의하여 용서를 받았다는 말에 그간 견뎌왔던 분노를 폭발하고 만다. '신'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해원, 그걸 용서할 수 있는 건 역시나 '사람의 몫'이고, 그럴 수 있는 건 결국 '용서받을 자'에 달려있다. 

자신들을, 어머니를 그토록 고생시킨 아버지, '그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아버지',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그 시절의 아버지가 필요했던 아들들, 그들이 13년만에 만난 아버지를 '수용'할 수 있게 만든 건, 그럼에도 '아버지'였던 아버지의 삶이다. 죽은 뒤에서야, 13년이 흘러서야 알게된. 그들이 필요로 할 때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버렸지만 버리지 않았던 '아버지'로 인해 코지와 요시유키는 자신들의 미움이 사실은 그리움이었음을 13년만에야 '시인'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뒤늦게 아내에게 도착한 통지서 한 장은 그녀를 고통 속에 밀어넣었던 13년을 '용서'하는 계기가 된다. 

 

 

근현대사의 가족사가, 혹은 개인사를 뒤틀어진 많은 문제들은 아픔의 왜곡으로 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아픔을 바로 볼 수 없도록 만드는 고통의 시간, 그 '트라우마'는 어느새 왜곡되어 '어깃장'을 넘어, 또 다른 '질곡'의 시작이 된다. 아버지가 싫어 돈을 벌기 위해 대기업에 들어간 아들, 아버지가 집을 떠나, 아니 사실은 아버지가 있어도 야구 선수가 될 수 있었을까 싶지만 야구 선수는 커녕 자기 몸에 맞는 티셔츠도 입고 자라지 못한 아들, 그들은 어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아버지의 상실'에 상처받은 아이의 그 상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 우스꽝스러운 장례식을 통해 비로소 그들은 '아버지'를 마주하고, 미움으로만 독해했던 그리움을 시인하고, 아버지를 상실했던 유년의 정체로 부터 자유로워진다. 장례식에 차마 가지 못한 아내 역시 비로소 미움에 봉인해둔 남편을 바라볼 여유를 가진다. 

아버지로 인해 그들을 속박했던 '카르마'로 부터 놓여나는 시간이 된 장례식. 아버지가 부재했던 13년의 시간, 그 시간은 '아버지'의 상실이지만, 동시에 코지와 요시유키가 잃었던 시간이다. 실제 있었던 사연을 1부와 2부로 나뉘어 전혀 다른 극적 구성으로 '실화'의 메시지를 자신만의 색채로 표현해낸 사이토 타쿠미 감독에게 첫 작품으로 '연출'상이 수여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던 작품. 특히 2부, 한 편의 블랙 코미디와도 같았던 장례식을 통해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을 변주하여 가족의 해원을 여운있게 풀어낸다. 

by meditator 2019. 6. 16. 02:59

우리 사회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성선설, 혹은 성악설, 착하거나, 혹은 나쁘거나, 하지만, 그런 '본성'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고 봉준호 감독은 말한다. 결국 '인간'을 규정짓는 건 그가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한 인간의 선함, 혹은 악함, 그러한 것은 그 인간이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해체'되고 '사회적'으로 규정될 뿐이라고 영화 <기생충>을 통해 말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시장 썩은 생선 속에 버려진 아이 '그루누이', 체취가 없는 그를 아이들은 두려워했다. 두려워하다 못해 죽이려고 까지 했다. '냄새'를 결핍하고 태어난 아이 그루누이, 그가 가진 평생의 소원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게, '냄새'는 그 사람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가장 '본원적인' 요소다. 그리고 바로 그 '인간'을 표현해 주는 가장 '본원적인' 요소, '냄새'로 부터 봉준호 감독은 '우리 사회의 경계'를 도출해 낸다. 즉, 어느덧 본원적이 되어버린 '사회적 존재'들에 대해 논한다. 

글쓴이가 학교 다니던 시절, 꼭 한 반에 한 명씩 정도 아이들이 짝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를 대변하는 건, '냄새', 당시만 해도 한 주에 한번 목욕탕을 가는게 꽤나 '문화적인 행사'였던 시절이었음에도, 유독 그 '아이'들에게선 옆 자리에 앉아있기 힘들 정도로 오래 씻지 않아 나는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냄새는 그 아이의 가난을 상징했다. 그렇게 가장 원초적인 '냄새'로 상징되는 사회적 계급, 그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낙인'으로 부터 '차이'는 시작된다. 체취로 부터 구분되는 계급이라 이보다 더 '계급'으로 고착된 사회를 절묘하게 상징해 내는 '수단'이 있을까. 

 

 


상하로 재편된 설국열차 
우리 사회에 많은 '사업'들이 스쳐지나갔다. 무슨무슨 체인점에서 부터, 갖가지 전문점까지, 다들 시작은 '대박'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제일 '수지'맞는 장사가 '폐점 물품 처리업'이라는 웃픈 현실처럼, 저 '대박' 아이템들은 '한 철 장사'도 채 넘기지 못한 채 무수한 가장들을 신용불량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비슷해 보이는 연배의 기택(송강호 분)과 근세(박명훈 분)가 공교롭게도 함께 '카스테라'집 사장님이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 사회에선 '우연'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 시작이 imf였든, 혹은 또 다른 '정리 해고'였든 우리 사회 평범했던 다수의 가정들이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져 왔다. 

그렇게 한때 사장이었지만 이제는 무기력한 가장들과 함께 '가정'도 무기력해진다. 아내는 돈을 벌어보지만 그 '푼돈'이 사업을 들어먹은 내리막길의 가정을 구하기는 역부족일 터이다. 충숙(장혜진 분)이 방안 한 가득 늘어놓은 수세미나, 박사장 집 안살림을 도맡하 했던 국문광(이정은 분)이나, 지하를 면치 못하는 충숙네 가정 형편이나, 박사장 집을 나서자 대번에 얼굴에 빛 쟁이들의 흔적을 남긴 국문광을 보면 알 수 있다. 

부모가 그럴 진대 아이들이라고. 우리 사회 '교육'이 곧 부모의 경제력에 비례한다는 건 이젠 새로운 발견이 아니다. 군대 까지 다녀온 아들이 여전히 대학 문턱도 밟지 못하고 있고, 딸내미가 그나마 다니던 학원조차 쉬어야 하는 건 아이들이 공부를 못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을 번듯하게 밀어부칠 부모의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은 '순박'하다. 아버지가 방구석에 등짝을 보이고 무사태평 누워있고, 엄마가 기껏 수세미나 짜고 있는데도, 여전히 '가족'이란 울타리가 무사하다. 그러나 그 '순박하고도 여전한 가족'이란 울타리가 얼마나 허망한 지 드러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봉준호 감독은 가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체되지 않는 가족을 통해 이후 그들이 뛰어든 범죄가 그들의 타고난 '범죄'적 성향으로 부터 비롯되지 않았음을 변명한다. 

 

 

가난한 지하 가족에게 찾아든 돌멩이, 아니 행운, 아들 기우(최우식 분)의 친구 민혁(박서준 분)은 자신이 교환 학생을 다녀오는 동안 가장 믿을만한(?) 친구로 대학도 가지 못한 기우를 점찍었다. 그렇게 해서 기우가 문지방을 넘은 박사장네, 어리숙한 박사장의 아내 연교(조여정 분)를 다혜(현승민 분)의 맥 한번 짚는 것으로 설득시킨 기우의 다음은 인터넷으로 아동 심리를 마스터한 딸 기정(박소담 분)이었고, 그 뒤를 이어 기택, 그리고 결국 충숙까지 온가족이 '완전 취업'의 행운을 얻었다. 덕분에 가족은 '필라이트'에서 '아사히'로 격이 달라진다. 모두가 실직이었던 가족이 그저 '직업'을 얻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얻은 일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의 실직이다. 기우로 부터 시작하여 드디어 충숙까지 박사장 네로 진입에 성공한 기택네, 그리고 그런 기택네로 인해 박사장 네서 밀려난 국문광네 부부의 비밀, 지상과 지하를 오르내리는 이 두 가족의 엇갈린 희비극, 그리고 그런 두 가족의 '사기'에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안락한 삶에 천착해 있는 박사장네, 단지 그들에게 경계를 넘나드는 저들의 냄새가 불편할 뿐인 그 지상과 지하의 위계는 흡사, 상하로 재편된 '설국열차'와도 같다. 계급에 따라 구분되었던 칸은 우리 사회 사람들을 볼모로 사로잡은  '집'이라는 '칸'을 통해 적나라하게 재편된다. 

 

 

계급이 존재를 만든다
하지만 기택네 가족의 행운은 안전하지 않았다. 지하에서 지상의 박사장네로 '안착'한듯한 가족의 흔적은 '냄새'로 남았고, 그들의 완전 범죄는 비오는 날 찾아든 국문광으로 인해 흔들린다. 

아니, 애초에 기택네도, 문광네도 시작이 '사기'였다. 행운의 돌때문이었을까, 기우의 학력 위조부터 몹시도 순탄했다. 서울대 문서 위조학과가 있으면 가야 겠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아버지, 범법 행위를 하는 자식들을 자랑스러이 말하는 이 가장의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아니 지하에 사는 그들의 궁상이 너무도 옹색해 이 가족의 범법 사실을 잊게 만든다. 아니, 사기를 치고도 너무도 천연덕스러운 그들의 철면피스러움이 그들의 '죄'를 눙친다. 

문광네라고 다를까. 기택처럼 '사업'을 한답시고 다 들어먹고 이전 주인이 만들고 숨긴 반공호 지하실에 숨어든 문광의 남편 근세, 빛을 등진 그 생활에 어느덧 삶의 총기마저 잃고, 지하의 생활에 만족하다 못해 모르스 부호로 박사장에게 헌사를 남기는 그는 자본주의의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가 되는 현상)이다. 

 

 

그들은 '박사장'네에 기생한다. 제 아무리 온 가족이 손가락을 빨 정도로 옹색해도, 빚쟁이에 시달려 갈 곳이 없어져도 기택네와 문광네가 저지른 짓은 사기다. 그런데 그 '사기'에 의탁하여 '박사장'네 가정의 평정은 유지된다. 가르치던 과외 선생이 어학 연수를 가도 딸 다혜의 과외는 순탄하게 이루어지고, 정신없는 아들의 돌출 행동은 잘 다스려졌다. 요리는 물론 살림이라고는 젬병인 아내의 살림살이 역시 사람이 바뀌어도 빈틈없이 메워졌다. 물 한 잔을 들어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만큼 박사장을 만족시키며 사장님을 모시는 수행기사 역시 냄새의 경계를 빼놓고는 무리가 없다. 백수 가족을 하루 아침에 온 가족 취업으로 만든 '문서 위조'라는 통과 의례만 빼놓는다면 '사기'의 실체는 애초에 논할 바가 못되고 만다. 

기생충 박사로 알려진 허민 박사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최대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게 바로 기생충의 마음이라 정의내린다. 인간을 숙주로 살아가는 기생충, 허민 박사는 길이 10m가 되도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 힘든 기생충을 예로 들었지만, 인간의 장 속에만 1000 종류가 넘는 균이 있다는 사실만 봐도, '공존'의 현실은 역력하다. 나아가, 인류 그 자체도 지구에 붙어 사는 기생충에 불과하다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영화 속 상하의 설국 열차는 적나라한 우리 사회 공존의 현실일 뿐이다. 다만 그 공존이 박사장네가 인간이고, '꼬리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사람'인 대신 '기생충'이 되어야 한다는, <설국 열차>처럼 뜨거운 '혁명'의 기치가 아니라, 웃게 되지만 어쩐지 돌아서니 먹먹해지는 '블랙 코미디'이다.

멀리서 보면 웃기지만, 가까이 들여다 보면 슬플 수 밖에 없는 현실은 경계를 타고넘나드는 냄새처럼, 결국 그 '경계'의 선을 타넘나들다 '파국'을 맞이한다. 경계라지만 기생충과 인간의 경계가 아니라, 결국은 사람과 사람의 경계인 것을, 인간과 기생충일 때 '익스큐즈'되던 것들이, '사람'으로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 사람과 사람으로 섞여지는 순간, '아비규환'의 결과를 낳는다. 결국은 사람과 사람으로는 '공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능했지만 순박했던, 그러나 자신과 가족의 '기생충' 됨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기택은 도피인지, 유배인지, 혹은 격리인지 모를 선택을 한다. 먼 훗날 자신이 돈을 벌어 그 집을 사서 아버지를 지하에서 올라오도록 하겠다고 기우는 여전히 그 지하방에서 마음을 먹는다. 잔혹 동화로 끝난 <기생충>, 혁명이 사라진 <설국열차>, 더 고착화된 빈익빈 부익부의 자본주의 사회의 만화경이다. 

by meditator 2019. 6. 7. 0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