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소중한 추억들이 되돌이켜 보면 많지만, 그 중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계몽사 소년소녀 명작 동화집이었다. 서울 구석진 동네에 살던 아이는 이 50권 속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향한 눈을 틔웠다. 물론 그 세상에는 주로 라플란드의 요정과 첨탑 위에서 물레를 빚는 마녀 등등이 살았지만. 그 중에 <의사 둘리틀 선생>이 있었다.

 

 

퉁퉁한 덩치에 작고 동그란 안경을 걸친 사람좋게 생긴 의사 선생님은 동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 큰 정원이 딸린 그의 작은 집에는 언제나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는 의사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동물들로 붐볐다. 사람들 치료하지 않기에 빈털털이가 되어 구멍난 양말을 신어야 하는 형편이지만 지하실 작은 굴에도 생쥐 손님들로 가득찬 둘리틀 선생, 아프리카에 원숭이들이 병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동물 친구들과 함께 먼 왕진 여행을 떠나는데...... 이렇게 시작되는 둘리틀 박사와 동물 친구들의 모험담이었다. 

닥터 두리틀이 된 로다주 
그 동물들의 말을 알아듣는 둘리틀 박사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하 로다주) 버전 두리틀 선생으로 돌아온다니 익히 아이언맨에서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보인 로다주였기에 '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적역' 답게 엠마 톰슨, 라미 말렉 등 유수한 헐리웃 배우들이 목소리로 출연한 동물 출연진들을 상대로 역시나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보였다. 그런데, 쉬지 않고 쏟아놓는듯한 두리틀 선생으로 분한 로다주의 달변, 그리고 허허실실한 연기는 <아이언맨>의 로다주와 그리 다를 바가 없는데 왜 <아이언맨>의 로다주가 그리워지는걸까? 왜 연기는 로다주가 하는데 자꾸 죠니 뎁에 대한 기시감이 떠오르게 되는 건지? 작품 때문일까? 연기 때문일까?

<닥터 두리틀>은 전형적인 헐리웃 가족 영화의 전통을 고수한다. 아마도 원숭이가 열병에 걸렸다고 해서 아프리카 까지 왕진을 떠나는 원작의 둘리틀 선생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다고 해서 인간의 치료도, 동물의 치료도 거부한 채 두문불출 칩거하는 두리틀 선생으로 영화는 막을 연다. 

 

 

그리고 언제나 헐리웃 가족 영화에서 그러했듯 두리틀 선생이 질색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소년과 소녀의 모습으로, 인간적으로 혹은 사업적으로 위기에 봉착한 두리틀 선생은 동물들과 대화하는 자신만의 장기를 살려 위기를 타개하고 목숨이 경각에 빠진 영국 여왕을 구해주기 위해 자신의 연인이 남긴 상상 속 장소라 여겨지는 미지의 세계 속 식물을 구하러 나선다. 

동물들과 대화하는 의사 선생님인 만큼 <닥터 두리틀>의 동물 캐릭터들 역시 화려하다. 원작에서 등장한 183살인가 하는 앵무새 폴리네시아는 예의 그 집사와 같은 노련한 포스로, 거기에 원숭이 치치, 개 지프, 오리 댑댑 외에 추위를 타는 북극 곰과 겁이 많은 고릴라와 타조, 기린 등과 조수가 된 토미가 데려온 다람쥐가 있다. 마치 어벤져스 군단과도 같은 동물들은 영화에서 정말 어벤져스처럼 각자 자신의 몫을 다해낸다. 

전형성을 넘어서지 못한 헐리웃 가족 영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방식이 역시나 매우 헐리웃 영화의 전형적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둘리틀 박사에게 동물의 말을 가르쳐 준 앵무새, 살림꾼 오리, 회계를 책임지는 올빼미, 런던의 모든 일을 꿰뚫는 참새는 이제 두려움에 떨다 결정적 실수를 하고 자책하다 위기 상황에서 닥터 두리틀의 목숨을 구하는 고릴라로, 서로 니가 잘하는 게 뭐냐며 아웅다웅거리던 추위 타는 북극곰과 타조는 위기를 겪으며 '브로'의 관계를 형성한다. 섬에 갇힌 닥터 두리틀의 목숨을 위협하던 호랑이의 마더 컴플렉스 역시 기시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여왕의 방에서 특파원 노릇을 톡톡히 한 문어라던가, 대벌레의 존재감은 색달랐지만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그저 한 편의 평범한 디즈니표  동물 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둘리틀 선생의 바다 여행> 속 내용을 참조한 듯 고래까지 찬조 출연하여 박진감을 더했지만 모험은 그럴 듯하지만 난파선 잔해에서 유리병 조각으로 면도를 했다는 원작 둘리틀 선생의 넉넉함은 로다주 표 액션 어드벤처가 대신하고 자칭 로다주의 동창이라지만 그에게 '열폭'하는 왕실 주치의의 도발은 치졸한 수준일 뿐이었고 사랑하는 딸을 로다주에게 빼앗긴 아버지의 보복은 어설픈 감동 스토리로 마무리되며 갈등의 예봉을 무디게 만든다. 제 아무리 가족 영화라 하더라도 어설픈 봉합이다. 몇 십년을 흘러도 여전히 명절만 되면 <나홀로 집에> 시리즈가 되풀이 방영되고 있는가를 되새겨 보면 가족 영화라 하더라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전개'가 능사가 아니라는 건 분명한데 <닥터 두리틀>의 전략은 안이하다. 

그렇다 바로 문제는 로다주가 분한 두리틀 선생에서 부터 동물들까지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던 디즈니 표 동물들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기대되어진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하가 아닌 게 어디냐며는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아이언맨>을 졸업한 로다주가 선택한 첫 번 째 영화라면 제 아무리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족 영화라 하더라도 기성품 이상의 감동을 기대하게 되지 않겠는가.

 

 

로다주는 <아이언맨>에서 보여준 때론 한없이 가볍다가도 어느 순간 훅 하고 감정을 울리며 들어오는 예의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연기의 폭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비슷한 캐릭터인데 두리틀은 <아이언맨>의 기성품같다. 로다주는 지금까지 <아이언맨>을 제외한 <셜록 홈즈 > 시리즈 등에서는 늘 예의 <아이언맨>에 미치지 못하는 틀에 박힌 캐릭터를 답습해 왔고, 아쉽게도 <닥터 두리틀>의 두리틀 캐릭터 역시 그렇다. 더욱이 아쉬운 것은 그런 그의 로다주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예측되는 연기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이래로 트레이드 마크를 넘어 박제가 되어가는 조니 뎁의 연기와 같은 잔상을 남긴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과 함께 가서 두어 시간 재밌게 보내기에 나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로다주가 나와 기대를 품고 간 사람이라면 어쩐지 이보다는 영화를 조금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인스턴트'의 향기를 느끼고 돌아설 것이다.

물론 모두가 '인스턴트'적인 것은 아니다. 뜻밖에도 로다주와 동물들이 평범한 캐릭터를 변주하는 가운데 사냥꾼 집안에 태어나 동물을 차마 죽일 수 없었던 아이 토미 스터빈스(해리 콜렛 분)가 스스로 닥터 두리틀의 조수가 되어가는 성장 스토리는 배우의 진솔한 연기 때문이었을까 평범한 이야기 속에 울림을 가지고 전해진다. 

by meditator 2020. 1. 21. 23:42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새 해같은 기분이 들던 들지 않던 우리는 또 새로운 여정에 첫 발을 내딛고 있다. 다르지 않았던 일상에 그래도 떠밀려 시작한 새로운 시간에 '삶의 의지'를 불어넣을 만한 뭔가가 없을까 라고 고민하신다면, <포드 v 페라리>를 권하고 싶다. 멧 데이먼과 크리스찬 베일의 치열한 152분을 함께 하고 나면 어쩐지 나도 2020년을 멋지게 살아내야 할 거같은 '의무감'? '용기'같은 것이 북돋아 오르니 말이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래도 레이싱 영화라 하면 '스티브 맥퀸의 르망'은 명불허전이다. 실제로도 오토바이와 자동차 경주를 즐겼던 스티브 맥퀸이 제작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많은 씬에서 스스로 운전을 하며, 지옥의 레이스라 불리는 '르망 24' 대회의 장면을 다큐처럼 실감나게 치열하게 그려냈던 영화. 이 영화에서 극중 스티브 맥퀸이 분한 '마이클 딜레이니'는 레이싱에 대해, '인생의 모든 것이며 레이싱을 하지 않는 시간은 경주를 기다리는 시간일 뿐'이라는 명대사를 남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또 다른 마이클 딜레이니들이 등장했다. 

캐롤 셸비와 켄 마이슬, 그들의 만남 
영화를 여는 건 가시 거리조차 확보되지 않는 르망 24 경주, 그 경주에 참가한 레이서는 캐롤 셸비(멧 데이먼 분)이다. 눈앞을 가로막는게 안개인지, 아니면 옆 트랙에서 사고난 자동찬의 검은 연기인지 모를 상황, 어둠은 깔리고 그 극한 상황을 헤쳐나가는 중이다. 그리고 등장하는 캐롤의 독백, ' 7000rpm에 다다르는 순간,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 이런 질문을 마주한다. 'who are you?'' 극한의 경지에서 마주하게 되는 순간, 마치 '물아일체'의 순간처럼, 경주라는 그 치열한 경쟁의 상황을 넘어 자기 자신에게 온전하게 집중하는 그 순간, 떠오르는 질문은 <포드 v 페라리>란 영화가 '레이싱'을 빙자해 '생'에 던지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캐롤 셰빌와 그의 '소울메이트' 켄 마일스(크리스찬 베일 분)가 답한다. 

안타깝게도 스스로 그 7000rpm의 극한을 넘나들고 싶었던 셸비는 더 이상 경주에 나설 수 없게 된다. 바로 그의 심장이 더 이상 그 극한의 속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레이서 대신 자동차 디자이너이자 스포츠카 판매상이 된 셸비, 그런 그를 '포드'가 호출한다. 

수제 고급차에 반발하여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통해 대량 양산하는 '싼 자동차'로 자동차 산업의 획기적 혁신을 물론, 미국의 대표적 자동차로 자리매김한 포드, 하지만 1960년에 이르자 자국 시장은 물론, 전세계 시장에서 판매에 고전을 겪게 된다. 활로를 찾기 위해 이탈리아 수제차 브랜드인 '페라리'와 '합병'을 추진하지만 그 조차도 수모만 겪으며 여의치 않게 된 상황이 되었다.

이에 포드 2세는 싼 대중차라는 포드의 이미지 혁신을 위해, 그리고 페라리에 겪은 수모를 되갚아주기 위해 레이싱 대회, 그 중에서도 매년 페라리가 우승을 해왔던 세계 3대 레이싱 대회 중 하나인 지옥의 레이스 르망 24시에서 포드의 우승을 주문한다. 그리고 그 '승리'의 견인차로 '르망'의 우승을 거머쥔 바 있던 셸비를 호출한다. 포드의 부름에 답한 셸비는 조건을 내건다. 그 우승에 있어 중요한 건 스포츠카로 혁신한 포드만으로 되지 않는다며 르망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레이서로 켄 마일스와 함께 할 것이라는.

 

 

셸비의 추천을 받은 켄 마일스, 하지만 그는 그 자신이 아내에게 고백하듯 '관계'라던가, '사업'이라던가에는 젬병인 오로지 레이싱만을 생각하는 외골수이다. 그가 모는 차에 대해 규정을 들이대는 대회 관계자 앞에서 차 트렁크를 두드려 대고, 유연한 대처를 요구하는 셸비에게 거침없이 스패너를 집어던지는 식이다. 오는 손님에게 '너님은 스포츠카를 몰 깜냥이 안된다'는 식의 응대를 하니 돌아오는 건 '국세청 체납'딱지로 압류된 자신의 사업장이다. 

하지만 그런 고집불통은 레이싱에 있어서 치열한 열정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그에게서 날라오는 스패너를 기꺼이 자신의 사무실에 전시할 만큼 마일스의 열정과 능력을 알아본 셸비는 그야말로 포드를 르망에서 우승시켜줄 유일한 사람이라 장담한다. 그러나 아무리 셸비가 알아본들 마일스의 직설 화법에 마음이 상한 포드의 이사진은 호시탐탐 마일스의 제거를 요청한다. 

who are you? 
멧 데이먼, 크리스찬 베일이라는 걸출한 두 배우를 앞세운 만큼, 흔히 레이싱 영화가 차를 운전하는 레이서에 집중하고 주목하는 것과 달리, 외골수 레이서 켄 마이슬와 함께 그를 르망 24시 경주대회에서 레이싱 카로 나선 포드의 승리를 거머쥐는 견인차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셸비의 고뇌를 깊게 다루며 '레이싱 영화' 그 이상의 이야기를 건넨다. 

그렇다면 왜 셸비는 마일스였을까? 레이싱 대회에서 앞서나가는 차를 추월하는 순간, 그 간발의 차이는 때론 사고로 이어지거나,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 영화는 이제는 운전할 수 없는 셸비가, 그러나 그 누구보다 그 '포인트'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자신이 아니라면 마일스일 수 밖에 없는.  그 '정신적 교감'을 마일스가 실현해 내는 명확하고도 구체적진 지점으로 셸비의 선택, 집착을 영화는 설득한다. 

 

 

그렇다면 마일스는 어떨까? 사업장조차 압류된 시점에 그를 기꺼이 르망에 출전하는 포드의 운전자로 '간택'해줘서? 집 앞에서 아이들처럼 엎치락뒤치락하며 한바탕해대는 그들에게는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리면서도 서로를 믿게 된 역사가 있어서? 늘 튕겨져 나가려는 마일스를 셸비는 다독이고, 거기에 더하여 끊임없이 훼방을 놓으려는 포드 이사진에 맞서 마일스를 '수호'하는 셸비에 대해 어느덧 마일스는 단칼에 출전을 거절당하는 상황에서도 다시 그와 손을 잡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동반은 그저 '우정'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자신을 대신할 유일한 사람이라는 믿음, 그리고 세상 관계에 서툴기만한 자신을 기꺼이 믿어주는 사람이라는 추상적 명제가 포드의 르망 24출전이라는 상황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되며 셸비라는 인물과, 마일스라는 인물의 캐릭터와 함께 '관계'의 현실성이 영화적 감동의 수위를 더한다. 

제 아무리 노력해도 마일스는 안된다는 이사진의 결정에 앞서 담백하게 결과를 전달하는 셸비, 그렇게 낙담하는 셸비에게 담담하게 레이서이자 차량 제작진의 일원으로 '브레이크'를 주목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마일스, 그렇게 르망 24시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아니면 안된다는 마일스는 변화해 간다. 그리고 그 변화의 정점은 자신을 레이서로 나서게 하게 위해 기꺼이 자신이 가진 것을 '딜'하며,  그리고 마지막 구간에서 '포드'를 내세우기 위해 신기록을 세운 마일스에게 '포기'를 강요하는 이사진의 결정에 셸비가 기꺼이 '마일스'를 믿어주었을 때 그리고 그 '믿음'에 마일스가 너른 아량으로 화답하며 영화는 두 사람의 성장과 믿음에 정점을 찍는다. 진정한 영웅과 그 영웅을 만들어 가는 이의 '동반적 관계'에 주목하며 영화의 서사가 맛을 달리하는 순간이다. 

7000 rpm의 순간, 그 순간을 함께 공유한 두 사람, 두 사람은 자신이 도달하고자 했던 그 승리의 정점과 함께 각자 자기 삶의 화두에서 변화하고 성장한다. 물론 '레이싱' 자체만으로도 <포드 v 페라리>가 볼만한 값어치가 충분하지만, 거기에 얹혀진 '소울메이트' 셸비와 마일스의 선택과 관계는 영화 초반 던져진 독백, ' who are you?'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넉넉하다. 그리고 그 넉넉한 답은 영화를 본 관객들에 대한 또 다른 'who are you?'로 여운을 남긴다.

그리고 4차 산업 혁명이다 뭐다 갈수록 인간의 존재 가치가 희박해져 가는 이즈음, 혁신적인 포드가 르망에서 승리하기 위해 결국 필요한 건 '사람'이라는 셸비의 혜안은 또 다른 의미에서 희망적 선언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20. 1. 2. 17:16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이다. 이 문구는 집주인을 만나지 못한 택배 기사들이 집 앞에 남겨두고 오는 메모이다. 영화 속 택배 기사가 된 리키를 상징하는 문구이다.

하지만, 우리 말 '미안해요'라는 한 마디로 담을 수 없는 '처지의 유감, 난처함, 상황의 공교로움, 난감함, 그리고 삶의 처연함'을 저만큼 표현한 문구가 있을까라고 영화를 보고 나면 'sorry we missed you'라는 제목에 무릎을 치게 된다. 진퇴양난, 고립무원, 설상가상, 삶의 딜레마에 빠진 리키, 하지만 그건 그저 리키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노동'의 문제임을 영화는 명확하게 짚어준다. 1936년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기계 문명 앞에서 유린당한 노동자의 삶을 찰리 채플린이 형상화시킨 이래 한 세기가 흘렀지만 '노동'의 삶은 또 다른 '시스템'의 컨베이어 벨트 흐름 속에 빨려들어가고 있다고 켄 로치는 강변한다. 

 


거리에 패딩을 입고 주인과 산책하는 '개님'을 보며 어느새 '동물권'이 번듯하게 사람 사는 세상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시절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휴먼'이 '남자'였던 세상에서 여성이, 어린이가, 자신들의 권리와 존재를 증명하며 인간 세상은 그 존재의 범위를 확장해 오고, 이제는 함께 살아가는 동물에게까지 자리를 내어주는데, 과연 다음 세상에는 무엇이 인간과 어깨를 나란히 할까? 했는데, 생각해 볼 수 있는 답은 'AI'였다. 최고의 바둑기사였던 이세돌마저 좌절시킨 'AI', 어쩌면 이는 이미 우리가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훌쩍 이미 우리의 세상을 '덮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AI까지 갈 것도 없다. '시스템'이라는 말로 우리를 '겁박'하고 있는 첨단 자본주의 체제, 1936년의 컨베이어 벨트, 그 21세기 버전에 우리는 이미 너무 익숙하게 길들어져 있는 건 아닐지.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 
실제 배관공으로 20년째 일하고 있는 크리스 히친이 분하여 더욱 더 실감난 연기를 보여준 리키, 그는 2008년 금융 위기로 실직을 한 후 온갖 막노동 일을 전전했다. 영화는 그런 리키가 자신이 사라왔던 전력을 택배 회사 인터뷰에서 술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이제는 좀 그 누군가 자신을 찝적거리는 상사도 없고, 자기 자신이 책임질 일을 하고 싶다는 리키, 그런 리키에게 택배 회사 매니저는 이 일이야말로 바로 당신이 찾던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맡은 택배를 스스로 책임지는 '개인 소득자', 그 말에 솔깃한 리키는 이동 요양 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아내의 차를 팔아 덥석 택배 용 차까지 마련하고 택배 일에 뛰어든다. 출근 첫 날, 옆 차의 동료가 친절하게 빈 물병을 주며, 소변용이라며 유용하게 씌일 것라는 말에 욕을 하며 차 안으로 던져 넣은 리키, 그는 그렇게 의욕적으로 '자영업자'로서의 일을 시작한다. 

 



<미안해요 리키>가 다루고 있는 건 바로 '긱이코노미'이다. 여기서 gig은 일시적인 일을 뜻하며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정규직 프리랜서 근로 형태가 확산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한다. 2019년 영국, 미국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활성화되고 있는 긱 이코노미, 포브스에 따르면 2020년까지는 직업의 43%까지 확산될 예정이라는데. 장점이야 영화에서처럼 '자신이 책임지는 자신 만의 일'에 걸맞는 유연한 근무 시간과 한 직업에 억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직업 형태이지만, 정작 현실은 불안정한 수입에, 기업의 편의적인 고용으로 인한 일자리 축소이다. 멀리 갈 거 뭐 있나, 오늘도 우리 동네 골목골목을 동분서주하는 택배 기사 아저씨들의 영국 버전이 바로 리키이다. 

그런데 말이 자유이지, 영화 리키를 보듯 현실은 '택배 단말기'에 얽매인 쉴틈없는 노동이다. 노동자가 자리를 2분만 비워도 울려대는 단말기, 택배 물품을 단말기에 입력하는 순간에서 부터 배송 완료 사인이 이루어지기 까지 매 순간 노동자를 제어하는 시스템, 결국 '내 사업'이라는 말에 덥석 택배 사업을 떠앉은 리키, 거기에 어서 빨리 빚을 갚고 아이들과 지낼 집을 마련하겠다는 욕심에 껴앉은 리키의 현실은 하루 14시간 6일간 쉴틈없는 쳇바퀴같은 노동의 현장이다. 결국 동료가 쥐어준 물병이 얼마나 고마운 배려인가를 알게 하는.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 분)라고 다를게 없다. 이동 거리가 먼 그녀의 일때문에 이용했던 차마저 남편의 택배용 차를 위해 판 그녀는 버스를 타고 일하는 곳을 전전한다. 일하는 시간은 늘어 어린 딸의 저녁마저 챙겨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급여는 달라지지 않았다. 거기에 규정된 업무, 늘 빗나가는 상황, 그럼에도 자신의 어머니처럼 돌봐드리고 싶은 그녀의 정성된 마음은 언제나 엇물린다. 늦은 저녁 돌아온 부부, 이 부부에게 부부다움이란 겨우 왕왕거리는 tv 앞에서 겹쳐지듯 나란히 잠든 그 순간이다. 

 

 

리키 가족의 안타까운 현실 

<미안해요 리키>는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이어 영국 사회 시스템을 '저격'한 두 번 째 영화이다. 7순의 나이, 심장병으로 그동안 하던 목수일을 하지 못하고 실업 급여를 받고자 했던 다니엘 블레이크, 하지만 다니엘 블레이크의 그 '소박한 소망'은 기계적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영국 의료 보험 제도 앞에 무기력한 모습을 노정하고 만다. 

하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2016년 칸 영화제 황금 종료상을 거머쥔 것은 영국 의료 보험 제도 비판이라는 씨실만이 아니었다.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완고하지만 70평생 노동으로 삶을 일구어온 인간미 넘치는 노동자의 모습을 영상으로 설득력있게 구현해 냈기 때문이었다. 그저 한 70먹은 노인이 아니라, 평생을 노동으로 마디가 굵어온 한 사람이 시스템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하게 '전사'하는가를 영화는 호소력있게 보여주었다. 

그렇듯, <미안해요 리키> 역시 긱이코노미 시스템에서 택배 노동자가 된 리키와 그의 가족의 삶을 곡진하게 그려내며 영국 긱이코노미 시스템의 그늘을 설득력있게 그려낸다. 많은 빚, 하지만 어떻게든 가족과 함께 잘 살아보려는 가장 리키, 하지만 역시나 낯선 시스템 앞에서 리키는 무기력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쉬지 않고 일을 하며 그 시스템의 일원으로 최선을 다하려는 아버지 리키, 당연히 그런 리키와 아내의 소망이라면 아이들이 잘 커주는 것. 그러나 부모님은 대학을 가라고 하지만 엄청난 융자를 껴앉으며 대학을 나와 무엇을 하냐며 항변하며 그 반항심을  뜻이 맞는 친구들과 '그래피티' 예술 행위를 하는 것으로 풀어내려는 아들, 당연히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심지어 그래피티에 필요한 스프레이를 사기 위해 절도까지 한 아들에게 돌아온 건 정학, 그런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 아버지는 결국 손찌검까지 하며 이 가족의 갈등은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문제는 아들이 정학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심지어 자신의 단말기를 부수고 자신의 택배 물품을 도난당하고 린치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그 모든 것을 '자영업자'로서 리키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 그 하고 싶다던 '자신의 사업'이 외려 가족간의 갈등 상황 속에서 리키을 옭죄어 온다. 단 하루를 쉬어도 엄청난 벌금을 부담해야 하고, 도난당한 물건도, 파괴된 단말기도 다 책임져야 하는 상황, 할수록 빚만 늘어가는 상황에서 리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말리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택배 트럭을 몰고나가는 것뿐이다. 그래도 가장이기에, 아버지이기에. 긱이코노미 프레임 속의 노동자가 놓인 '한 끗'의 위기를 영화는 리키 가족의 상황을 통해 절박하게 표현한다. 리키는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의료보험 공단 사무소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마지막 장면 리키의 모습은 다니엘의 죽음못지 않게 처절하다. 

by meditator 2019. 12. 20. 16:41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제 그의 이름만으로 '영화'를 선택하게 만드는 세계적인 감독이다. 매번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그이지만 고레에다 감독만큼 '일본'의 이야기를, 일본의 정서를 풍성하게 그려내는 감독이 있을까 싶은데.

고레에다 감독의 이야기에는 1991년 <그러나....복지를 버리는 시대로> 등 그가 다큐로 담았던 시대 이래 일본의 그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그늘은 그곳에 드리워져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자발적으로 재현'되어 삶의 현실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복지 사회 일본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연금, 하지만 그와 달리 연금을 받지 못한 채 무능력한 자식 세대라는 전후 일본 복지 사회가 낳은 그늘은 때로는 <어느 가족(2018)>의 서늘한 동화가 되기도 하고, <태풍이 지나가고(2016)>의 페이소스가 되기도 한다. 복지 사각 지대에서 방치된 아이들의 처연한 삶을 그린 <아무도 모른다(2004)>의 충격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고레에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 세계를 삶의 자발적 재현이라 규정한다)

그렇게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현실에서 이야기를 길어내었던 고레에다 감독이 이방의 공간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번째 글로벌 프로젝트이다.  이방의 공간 '프랑스'가 감독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과연 프랑스에서 그가 만난 '삶의 자발적 재현'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까지 고레에다 감독이 해왔던 이야기들 중 상당한 부분이 '가족'에 대한 것이다. 그의 찬란한 데뷔작 <환상의 빛(1995)>은 아들과 함께 홀로 남겨진 유미코에 대한 이야기지만 결국 그건 자신을 남겨둔 채 세상을 저버린 남편 이쿠오와의 완성되지 못한 가족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 속 가족은 늘 이빠진 동그라미와도 같다. <걸어도 걸어도>의 가족은 10년 전 죽은 형이라는 빈틈을 두고 쉽사리 서로에게 다가서지 못한다. 반면, 진짜 가족이 서로에게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사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느 가족>은 사회가 그들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진짜 가족보다 가족같다, 나의 아들이 아닌 내 아들을 받아들이며 비로소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속 가족은 완성된다. 죽은 아버지가 남긴 의붓딸을 자신들의 품으로 안은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그렇다. 그렇게 고레에다 감독은 가장 가족적이면서도, 가장 가족에 대해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현실 속에서 가족을 길어내고 질문한다. 

 

 

회고록, 봉인을 열다. 
프랑스로 온 고레에다 감독은 이번에도 화두를 '가족'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엄마'가 있다. 하지만 엄마라는 호칭보다 여배우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전설적인 여배우 파비안느(까뜨린느 드뇌브 분), 이제 막 그녀는 그 전설의 결과물인 회고록을 완성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살던 딸 뤼미르(줄리엣 비노쉬 분)가 남편과 딸과 함께 그녀의 회고록 출간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찾아온다.   

하지만 '축하'의 시간을 길지 않다. 어쩐지 회고록을 읽어보고 싶다는 딸의 말에 자꾸만 말꼬리를 자르는 수상한 엄마의 태도, 그럼에도 결국 회고록을 읽게 된 딸은 폭발한다. "엄마, 이 책에는 진실이라고는 없네요."

회고록 속 엄마는 당대의 전설이 되어 온 바쁜 배우 생활 속에서도 딸의 학교로 마중을 나가는 자상하고 따뜻한 엄마로 그려진다. 하지만 딸 뤼미르는 반박한다. 언제 엄마가 내가 다니던 학교를 한번 찾아온 적이 있냐고. 그러게 오랫동안 꾹꾹 눌러왔던 부모 자식 관계의 봉인, 그 빗장이 엄마의 회고록을 통해 열려지는 상황,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랫동안 엄마의 일을 돌봐주던 뤼크(알랭 리볼트 분)가 역시나 회고록에 자신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며 당장에 일을 그만둬버리고 집을 나간다. 어쩔 수 없이 혼자서는 차 한 잔 타마시지 못하는 '천상 여배우' 엄마의 뒤치닥거리를 뤼미르가 맡게 되며 엄마의 촬영장에 따라 나서게 된다. 

 

 

엄마는 엄마다 
이제는 회고록을 쓰는 '전설'이 되었지만, 현장에서의 엄마는 세월을 거스르지 못한 채 젊은 여배우의 나이든 역을 맡아야 하는 처지, 그럼에도 여전히 배우로서의 자존심을 접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거나 흡연에 음주에 습이 되어버린 삶의 태도로 인해 촬영은 여의치 않다. 

돈이 떨어져 찾아온 뤼미르의 아버지 삐에르, 그런 삐에르가 영화 속 캐릭터처럼 마법을 걸어버린 거북이의 현신인 줄 아는 순진한 뤼미르의 딸 샤를로트(클레망틴 그르니에 분), 전설인 엄마 앞에서는 배우라 하기에도 겸연쩍은 얼마전까지 알콜릭 치료를 받았던 뤼미르의 남편 등등 영화는 뤼미르가 본의 아니게 함께 한 엄마의 촬영 현장과 파미안느의 집을 배경으로 한 편의 소동극처럼 그려진다. 

또한 영화는 '액자식'으로 파미안느가 노년의 딸로 분한 영화 속 이야기와 함께 파미안느와 뤼미의 모녀 관계를 대비시킨다. 불치병으로 지구에서 산다면 몇 년을 살 수 없었던 엄마는 어린 딸을 놔둔 채 7년마다 한번씩 지구를 방문하게 된다는 영화 속 영화의 이야기. 훌쩍 떠나갔듯이 다시 훌쩍 찾아오는 엄마, 그때마다 딸은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다른 연령의 사람이 되어있다. 손님처럼 찾아와 사춘기의 딸을, 어느덧 엄마의 나이가 되어버린 딸을, 그리고 나이가 들어 어느덧 엄마를 잊어버린 정도가 되어버린 노년의 딸을 '엄마'로 위무하는 엄마. 

단절적으로 그려지는 sf영화 속 엄마와 딸의 이야기는 질문을 던진다. 과연 저렇게 7년마다 한번씩 찾아오는 엄마도 엄말까? 라고. 그리고 이 질문은 파미안느와 뤼미르의 관계에도 등치된다. 

엄마의 회고록을 읽고 진실은 하나도 없다고 화를 내는 딸 뤼미르, 그녀가 자라는 동안 여배우 파미안느는 화려하게 세상의 조명을 받았지만 딸을 위한 여지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빈 자리를 채워준 건 두 모녀의 애증이었던 파비안느의 동료 여배우였다. 뤼미르는 그녀를 흠모했고 사랑했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랑만큼 엄마를 경원시해왔다. 

영화에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질문하는 대사가 여러 번 등장한다. 자신이 살아왔던 그래서 믿었던 개인의 과거가 사실은 그 개인이 기억하고 싶은 '오류'일 수도 있지 않냐고 영화는 반문한다. 그리고 그 반문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걸어도 걸어도> 속 부모와 아들은 어쩌면 늦어버린 시간을 다시 걷는다. <세 번째 살인>은 뒤늦어 버린 관계의 상흔을 짚는다. 그렇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 속 가족들은 그들이 어긋나버린 '과거'를 현재로 부터 길어올린다. 그것이 때로는 늦고, 때로는 늦지 않게 현재의 관계 그 틈을 메운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어땠을까? 

때맞춰 사의를 표명하며 뤼미르에게 시간을 준 그 누구보다 어머니를 잘 아는 뤼크 덕분에 뤼미르는 본의 아니게 배우 파미안느의 시간을 함께 한다. 한때는 전설이었으되 이제는 나이 들어 조연의 자리에서 여전히 주연의 존재감을 욕심내는 천상 배우 파미안느, 이제는 나이들어 버린 어머니가 무사히 또 한 편의 영화를 마무리하는 걸 함께 하며 모녀간에도 이해를 할 수 있는 틈이 마련된다. 

돈이 필요하면 찾아드는 아버지를 거뜬히 감수하는 엄마, 엄마이자 가장인 파비안느는 동시에 동시대 최고의 여배우가 되기 위해 많은 것을 감수했다. 그리고 그 감수한 것에는 딸을 위한 자상한 어머니의 자리도 있다. 그리고 그건 고레에다 감독이 일관되게 그려왔던 '가족'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진다. 우리 사회이건, 일본이건, 이제 장소를 바꿔 프랑스 건 세계 각국 그 어느나라에서건 '가족'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면서 동시에 인간 개개인의 '갈등'을 유발하는 진원지였다. 많은 이들이 '가족'으로 부터 배태된 '갈등'을 짊어진 채 평생을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곤 한다.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이 추구하는 가족의 '화해'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치 않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 만나 또 다른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내 가족이라 부등켜 안는 <어느 가족>에서 보여지듯이 '가족다움'의 전제란 무색하다. 그래서 <파비안느에 대한 진실> 속 두 이야기 sf속 엄마와, 파비안느는 역설적으로 '엄마됨'을 묻는다. 가족됨을 사색한다. 

 

자신을 학교로 한번도 마중나오지 않았던 엄마, 자신의 학예회에 왔어도 그 예의 입바른 성정 때문에 딸에게 상처를 줄까 차라리 안온 걸로 오랜 시간 원망을 들을 것을 감수했던 엄마, 자신보다 더 딸이 따르는 동료 여배우를 기꺼이 감수해낸 엄마, 그 엄마를 오랫동안 엄마의 그늘에서 허우적거리던 딸이 비로소 안는다. 늦지 않게. 그리고 그건 내 자식이 아닌 아들을 품었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의 아버지, 의붓 동생을 기꺼이 받아들인 <바닷 마을 다이어리(2015)>의 세 자매, 철들지 않은 늙수구레한 아들을 품어주는 <폭풍이 지나가고(2016)>의 어머니 요시코의 그것과 통한다. 가족다워서 가족인 것이 아니라, 가족이어서 '가족'이 되는 '이해의 절정'이다. 딸을 안는 그 순간, 영화 속 자신이 놓친 캐릭터에 안타까워하는 그 엄마까지도 기꺼이 이젠 웃으며 이해하는 그 넉넉한 가족적 이해의 품말이다. 물론 거기에는 뤼미르가 다시 엄마가 되는, 파미안느가 사실은 뤼미르를 독접했던 자신의 동료 배우를 애증했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히 파미안느와 뤼미르는 더 늦지 않게 포옹한다. 

 

프랑스로 간 고레에다 감독은, 그가 줄기차게 천착해 온 이야기가 그저 '일본'이라는 사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화두'일 수 있음을 증명해 낸다. 파미안느라는 전설의 여배우라는 풍모에 딱이었던 카트린느 드뇌브, 그녀의 재발견이라 해도 좋을 법한 아름다웠던 줄리엣 비노쉬, 그리고 기꺼이 가교 역할을 감수한 에단 호크, 그리고 다른 프랑스 영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청량하게 아름다웠던 파비안느의 정원과 그곳에 어루러졌던 낭랑한 ost 속에 어우려저 고레에다 월드는 그 깊이를 더한다. 

by meditator 2019. 12. 15. 00:41

셜록 홈즈, 아가사 크리스티, 탐정 김전일 등등 추리 장르는 늘 '마니아'적인 일군의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다. 과거의 셜록이 영드 2부작 <셜록>으로 돌아왔을 때 추리 마니아들이 환호한 건 스타일리쉬한 구성만이 아니라, 과거의 서사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그 '신선한 퍼즐'에 있었다.

12월 4일 개봉한 <나이브스 아웃>은 모던한 아가사 크리스티라고 하면 어울릴까? 성과도 같은 외딴 저택에 사는 당대 최고의 미스터리 스릴러 작가의 죽음과 용의선상에 오른 많은 가족들은 등장인물 모두가 의심스러웠던 <쥐덫>,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삐뚤어진 집> 등의  저택을 배경으로 했던 작품들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심지어 007의 다니엘 크레이크, 캡틴 아메리카의 크리스 에반스에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돈 존슨, <할로윈>의 제이미 리 커티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아나 디 아르마스, <그것>의 제이든 마텔, <올 더 머니>의 크리스토퍼 플러머 등의 화려한 출연진이라면 더더욱 그 누가 범인일 지 예측불가다. 

 

 

모두에게 '살인'의 이유가 있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스스로 자신의 10대 걸작 중 하나라 칭한 <삐뚤어진 집>은 음산하면서도 기묘한 분위기의 저택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진 대부호의 죽음. 그렇게 <삐뚤어진 집>처럼 <나이브스 아웃> 역시 곳곳에 마치 공포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인형과 그림과 장식품들이 즐비한 저택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저택의 거실에 자리한 둥근 바퀴 모양으로 꼿혀진 그 자리에서 빼어들면 바로 무기가 될 것 같은 칼들이다. 

그리고 그곳에 1년에 2권씩 평생 동안 미스터리 스릴러를 써온 85세의 노익장 소설가가 할란(크리스토퍼 플러머 분)과 그의 자손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아가사 크리스티의 <스타일즈 저택>에서 용의자 모두가 죽은 노부인에게 금전적으로 의지해 왔듯이, 말이 대가의 자식들답게 저마다 제 앞가림을 하고 산다지만, 그 허울좋은 자녀들의 한 껍데기를 끄집어 내보면 아버지의 돈으로 부동산 사업을 한다지만 바람을 피는 남편 리처드(돈 존슨 분)에, 돈 한번 번 적이 없이 고급 차를 몰며 세월을 보내는 아들 랜섬(크리스 에반스 분)을 가진 큰 딸, 명색이 아버지 책을 내는 출판사 사장이라지만 아버지 작품 tv각색 사업의 권한조차 없는 둘째 아들 월트(마이클 새넌 분), 그리고 말이 좋아 '트렌드 세터'지 남편이 죽은 이후로 시아버지가 돈을 대준 딸의 학비마저 유용하여 자신의 사치스러운 삶을 투자하는 며느리, 그리고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 때문에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손주, 손녀가 있다. 

할란(크리스토퍼 플러머 분), 하지만 그는 85세 생일을 맞이하여 중대 결심을 한다. 자신이 평생 글을 써서 모은 돈으로 자식들을 뒷바라지한 것이 외려 자식들의 앞길을 망쳐온 것이 아닐까란 후회를 한 그는 생일을 기점으로 더는 아이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결심은 실행되지 않았다. 아니 실행될 수 없었다. 생일 다음 날 그는 칼로 목을 그은 채 발견되었고, 느닷없이 그 누군가의 촉탁으로 경찰과 함께 등장한 탐정 브누아 블랑(다니엘 크리에그 분)은 가족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타살'의 혐의를 좀처럼 거두지 않는다. 무엇보다 할란의 죽음을 두고 그에게 '촉탁'한 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부터가 의심스럽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늘에서 비껴선 반전 
가족들은 슬퍼하면서도 안도한다. 할란이 죽은 덕분에 사위는 아내 몰래 바람피는 걸 들킬 염려가 없어졌고, 하룻밤 사이에 출판사에서 쫓겨날 뻔 했던 둘째 아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당연히 할란의 어마어마한 유산이 자기들 몫이 되리라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이런 상류층 가족의 부도덕한 모습은 역시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삐뚤어진 집>의 설정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하지만 영화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고전적 설정'에서 한 발씩 비껴서며 새로운 추리의 퍼즐을 만들어 간다. 편지 한 장으로 저택에 등장한 탐정 브누아 블랑이 그러하고, 그와 함께 '왓슨' 역할을 하게된 거짓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토하는 '결벽증'을 지닌 할란의 전담 간호사였던 마르타(아나 드 아르마스 분)의 캐릭터가 추리 장르가 가진 전형성의 벽을 허문다

 

그리고 할란의 생전, 그리고 사후의 시간을 오가며 사건을 드러내 보이던 영화는 이민자 간호사인 마르타와 할란 사이의 '비밀'이 드러나며 지금까지의 전형적인 '추리' 장르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거짓을 하면 토하는, 하지만 지켜야 할 비밀이 있는 마르타와, 그런 마르타의 비밀을 알게된 랜섬(크리스 에반스 분), 그녀의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인간 거짓말탐지기 증상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말대로 '착한 사람'이라는 심성에 대한 믿음인지 마르타를 자신의 수사 보조로 함께 하고자 하는 브누아 블랑의 엇갈리는 관계가 <나이브스 아웃>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된다. 아가사 크리스티 추리 장르였던 영화는 문득 셜록 홈즈였다가, 마르타의 시점에서 전개되면서 서스펜스 스릴러가 되기도 한다. 

드디어 가족들이 기대하고 고대하던 할란의 유언이 발표되고, 오로지 할란에 기대어 살아왔던 가족들의 진짜 모습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동시에, 말끝마다 '가족'이라 했던 '이민자' 마르타에 대한 이중적인 속내도 가감없이 드러난다. 거기엔 정치적 입장이 무색하게 그저 자신들의 가진 것만이 '전부'였던 할란이 그토록 걱정했던 오로지 아버지의 '돈'으로 포장되어온, 그 돈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할란마저도 죽일 수 있는  부도덕하면서도 이기적인 한 가족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의 첫 등장처럼 뒤에 앉아 지켜보는 듯 하면서도 흔들림없이 도넛의 뚫린 구멍처럼 의문스러웠던 할란 죽음을 추적하던 브누아 블랑은 드디어 진실에 다가선다. 범인이 예리하게 겨눴던 할란의 목숨, 하지만 계획된 범죄가 뜻밖의 '오류'를 통해 전혀 다른 죽음의 진실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 즉 영화 제목인 '나이브스 아웃'이 곧 '스포'였던 결말, 그 과정에서 영화는 뜻밖에도 '권선징악'의 교훈으로 마무리된다. 마치 착한 사람은 자다가도 떡을 얻고, 뒤로 넘어도는 코가 깨지기는 커녕 두 손 가득 횡재를 한다는 동화같은, 하지만 할란네 가족의 입장에서는 '잔혹 동화'의 결말에 도달한다. 

by meditator 2019. 12. 10. 15:24

헬렌 미렌과 이안 맥켈런, 이 노익장 배우 두 사람이 주연으로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굿 라이어>는 봐야할 가치가 있다. 그런데 이 두 배우를 '조련'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빌 콘돈이라면?

빌 콘돈 감독과 함께 한 헬렌 미렌과 이안 맥켈런,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도무지 예측이 안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골든 라즈베리 최악의 작품상을 안긴 <브레이킹 던(2012)>에서부터 골든 글로부 작품상을 안긴 <드림걸즈(2007)>, 그리고 <미녀와 야수(2017)>까지 그의 작품 세계는 종횡무진하다. 그 중에는 이안 맥켈런과 함께 한 노년의 홈즈를 그려낸 <미스터 홈즈(2016)>도 있다. 아마도 <굿 라이어>의 실마리를 찾는다면 <미스터 홈즈> 속 30년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미궁 속 사건의 진실이 가장 근접하겠다. 바로 그 과거의 사건으로 부터 오늘의 '굿 라이어'는 탄생되었으니까. 

 

 
'라이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되는 건 어떤 일일까? 아니 그 반대로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포기할 수 없는 복수란? 80대 노익장 두 배우의 깊이있는 열연이 담긴 영화 <굿 라이어>를 보고 나면 도달하게 되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이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들이 아직 세상을 모르던 10대의 시절로 관객을 이끈다. 

<굿 라이어>가 주목할 만한 지점은 흔히 2차 대전 시기의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면 '나치'와 '홀로코스트'에 대하 '주제'를 길어내는 것과 달리, 전쟁에 휩쓸린 독일에서 살아갔던 10대의 소년과 소녀의 비극적 삶을 조명해 낸다. 

<폭풍의 언덕>으로 온 히드클리프는 그를 '모멸'하는 주인의 아들 힌들리에 대해 2대에 걸친 처절한 보복을 한다.  이제 막 '자아'를 형성해 가는 성장기의 청소년에게 '인격적 모욕'은 평생의 '트라우마'와도 같다. <폭풍의 언덕>만이 아니라 많은 소설들이 그런 '소년'의 엇나간 자존심을 문학적 주제로 삼았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명의 소년이 있다. 

한스, 겨우 15살 나이에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딸에게 영어를 가르칠 만큼 똑똑했지만 그는 가진 것이 없다. 전쟁 통에 이쁜 옷을 입어도 갈 무도회가 없는 사업가의 딸들은 자신들의 눈에 띈 한스를 상대하여 춤판을 벌이지만 '하인'같은 한스의 도발적인 키스는 감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상처받은 소년의 치기는 자신을 흠모하는 제자인 막내 딸 릴리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상흔를 결과한다. 그리고 그날로 소년의 밥줄은 끊겼다. 

그게 시작이었다. 자신의 영어 선생님이었던 소년을 흠모했지만, 그 흠모의 대가로 씻을 수 없는 성폭력과 그에 이은 상처입은 자존심을 끝내 참지못한 소년의 '밀고'로 인해 부유했던 가정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며 한 소녀의 삶이 땅바닥에 쳐박히게 된 것은. 그래서 온통 흰 머리가 된 2009년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을 용서할 수 없게 된 것이. 소녀는 내가 먼저 나가서 선생님을 맞이했다면 어땠을까 라고 오랜 시간동안 되물었지만, 더는 하얀 백합과 같은 소녀의 순결함도, 고결함도 지켜낼 수 없었다. 

동시에, 그건 흔히 영어에서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를 지칭하는 'liar'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는 지를 배운 소년은 다시 자라서, 이제는 부모조차 없는 처지의 자신을 영국인으로 거뜬히 '위조'했고, 15살 소년이 영국인 '로이'가 되어가며 살아왔던 방식은 해를 거듭할 수록 '업그레이드' 되어 이제 노년에 이르러서 30억이 넘는 재산을 모은 '프로페셔널한 라이어'가 되어 있었다. 영화는 명확하게 그려내지는 않았지만 한스라는 인물이 사기꾼 로이로 살아내기 위해 그의 고국 독일에서 '전범'의 역할 마다하지 않았음을 드러내 보인다. 굳이 '홀로코스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전쟁'을 통해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생존과 편의를 위해 '악'과 손을 잡게 되는가를 설득력있게 그려낸다.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15살 자신에게 '모멸감'을 안겨주었던 '릴리'네 집안을 '파멸'시키듯이 노인이 되어서도 자신이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 누구라도 손을 짖이겨 버리고, 머리통을 나꿔채 달려오는 지하철로 던져버리며 장애물을 없애며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우연히 데이트 상대를 만나기 위해 드나들던 데이트 사이트에서 만난 부유한 미망인 베티를 통해 겨우 1억 나부랭이나 사기치던 사업의 '40억 짜리 마지막 큰 한 판'을 용의주도하게 준비한다. 

 

   

 

누가 굿 라이어인가? 
노년의 사랑을 '로맨틱'하게 다뤘던 영화 <북클럽>에서 오랫동안 독신 생활을 해왔던 연방 판사 샤론(캔디스 버겐 분)이 뒤늦게 '연인'을 만나게 되는 창구였던 인터넷 만남 사이트는 이제 <굿 라이어>에서는 자신의 본명을 숨기는 등 조금은 거짓말을 했다는 '로이(이안 맥컬런 분)'와 '베티(헬렌 미렌 분)'가 만나는 계기가 된다. 같은 사이트가 매개하는 '사랑'과 '복수', 현대 문명의 아이러니한 몰가치성이다. 

영화를 내내 이끌어 가는 건 부유한 미망인에 전직 옥스포드 교수였다는 베티를 상대로 한 로이의 사기 한 판이다. 동시에 로이는 부동산 사기 한 판을 벌이고 있다. 베티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릎이 안좋다며 절둑이던 로이가 거의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급으로 멀쩡하다 못해 달리다시피 찾아간 바에서 만난 동료 사기꾼들, 로이와 함께 했던 베스트와 함께 새로이 합류한 2명, 이렇게 총 4명의 사기꾼들은  러시아 투자자를 상대로 한 '투자 사기'를 준비한다.

어수룩한 동료의 썰렁한 한 마디로 엎어져 버릴 뻔한 판이 우여곡절 끝에 로이 측의 투자금을 올려 겨우 러시아 측의 12억의 배팅이 순조롭게 끝난 순간, 반가워 덥석 안은 러시아 투자자 등에서 도청 장치가 발견된다. 그와 함께 들이닥친 경찰, 그때 로이는 심장마비가 온 듯 자리에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동료들은 우선 급한 마음에 로이를 놔둔 채 자리를 뜬다.

이렇게 주인공의 심장마비로 끝나버리는가 싶은데 그 상황을 깬건 뜻밖에도 쓰러진 줄 알았던 로이의 호쾌한 웃음이다. 알고보니 '사기'의 대상은 '러시아 투자자'가 아니라, 그를 속아넘기려 했던 '로이'와 짜고 쳤다 생각한 두 명의 동료였던 것던 것. 이 장황하게 전개된 로이의 사기극은 <굿 라이어>의 결정적 '스포'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속고 다시 속이는, 그래서 '사기'의 주체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알고보니 '사기'를 당하는 측이 되는 이 사건은 이후 로이와 베티의 관계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단지 그 '설계자'가 '로이'가 아니라는 것만 빼면. 

아니 애초에 가장 결정적인 '스포'는 제목 <굿 라이어>이다. '라이어'라는 말이 그냥 우리나라의 '거짓말쟁이' 정도가 아니라 queen의 노래 'liar' 가사  내용처럼 밥먹듯이 거짓말을 하는 욕에 가까운 명칭이다. 그런데 그런 'liar'가 Good하다니, 언뜻보면 노회한 사기꾼인 로이를 지칭하는 단어같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 여주인공인 '베티'의 평생에 걸친 숙원을 '상징적'으로 뜻하는 단어임을 알게 된다. 영화는 마치 게임처럼 두 주인공의 '거짓말'을 둘러싼 치명적인 스릴러같지만, 그 '거짓말' 게임의 궁극에서 만나게 되는 건 '전쟁' 속에서 피폐해지고 상흔에 너덜너덜해진 '인간성 말살'의 표상들이다. 두 배우의 무게감만큼 이야기가 전해주는 역사적 울림이 깊다. 

by meditator 2019. 12. 7. 05:19

'후회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에는 쌍생아처럼 '후회'란 단어가 수반된다. 사랑하기에 함께 하고자 했던 시간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기에 늘 생각지도 못한 '운명'의 복병들이 일찌기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수많은 사랑 이야기들의 발목을 잡는다. 그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 이들이 맞아야 하는 '이별'의 파국', 그래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 '후회'를 막기 위해,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신선한 '장치'들을 고안해 낸다. 

 

 
2004년 개봉하여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2017년 재개봉한 <이프 온리>는 죽은 줄 알았던 아내 사만다(제니퍼 러브 휴이트 분)가 잠을 깨보니 다시 남편인 이안(폴 니콜스 분) 옆에 있다는 '기적'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그런가 하면 많은 이들의 '인생 영화'가 된 <어바웃 타임>에서는 모태 솔로인 팀((도놀 글리슨 분)에게 알고보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가계'의 비밀이 있었다. 덕분에 그는 옷장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엇갈린 연인 메리(레이첼 맥아담스 분)와 인연의 끈을 이어갈 수 있었다. 

기적도 발생했고, 시간을 돌리는 기적도 써먹었고, 이제 더는 사랑의 기적을 위해 써먹을 것이 있는가 싶었는데 <러브 앳>이 '평행 세계 이론'을 들고 나왔다. SF물에서 흔한 설정이 된 '평행 세계'가 이제 '사랑'의 묘약으로 등장한다. 잠을 깬 주인공라파엘(프랑스와 시빌 분)은 하룻밤 사이에 평행 세계의 또 다른 공간에 와있다.

 

   

 

같지만 다른 공간 속으로 떨어진 남자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전혀 다른 공간, 어젯밤 그는 늦게 들어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자신의 일과 작업에만 몰두하다 아내 올리비아(조세핀 자피 분)와 싸웠다. 한때는 피아니스트의 꿈을 꿨지만 그 꿈을 접은 채 아이들에게 피아노 교습을 하고 있는, 그래서 싸우기만 하면 남편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고 하는 그 말을 오늘도 어김없이 끄집어 내는 아내의 말에 화를 내며 물건을 집어 던졌고, 집을 나와 홀로 술을 마셨었다. 그리고 자는 아내 곁에서 잠들었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아내가 없다. 하지만 아내의 부재 대신 오늘 있을 중학교 강연에 온통 신경이 쏠린 그는 학교로 향하고 그곳에서야 자신이 같지만 다른 공간에 와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있었던 세계에서 <졸탄과 새도우>라는 SF소설 한 편으로 잘 나가는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어  인터뷰와 강연으로 이어진 나날을 보내던 라파엘, 작가는 커녕 몰래 카메라인 줄 알았던 중학교가 이곳 세계에서 문학 교사로서 그가 일하는 직장이란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이곳의 그에게는 아내가 없다. 우연히 거리에서 발견한 아내는 저쪽 세계와 달리 꿈을 이뤄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어있다. 

라파엘은 긴가민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오랜 벗이자 같은 학교 선생님이 되어있는 펠빅스(프랑스와 시빌 분)의 도움을 받아 원래 그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고자 갖가지 해프닝을 벌인다. 그가 생각한 방법이란 이곳에서 다시 올리비아의 사랑을 얻는다면 그래서 그들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저쪽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인데, 아내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아니 우선 무엇보다 아내의 눈에 띄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라파엘의 갖가지 해프닝이 프랑스 영화다운 화법으로 <러브 앳>을 채운다. 

 



당신이 사랑하는 건?
최첨단 과학 이론을 들고 나온 작품답게 영화를 여는 건 가상의 세계 속 치열한 전투 장면이다. 적들의 숨막히는 추격전을 겨우 피하는가 싶은 주인공, 알고보니 그 장면은 아직 다 써지지 않은 라파엘의 습작 노트 속 내용이었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인 라파엘, 하지만 오로지 그를 사로잡고 있는 건 가상 세계 속 졸탄의 활약을 그린 SF물, 친구인 펠릭스가 걱정을 하건 말건 그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작품의 다음 장이 고민이다. 

그런 그가 우연히 들려온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학교 구석의 창고같은 방에 발을 들여놓은 라파엘은 그곳에 숨어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는 올리비아(조세핀 자피 분)에게 첫 눈에 반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연주를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는 올리비아의 수줍은 고백은 바로 습작을 들켜 왈칵 화를 내버리며 교실을 뛰쳐나왔던 라파엘의 심정, 그렇게 피아니스트와 작가의 꿈을 가진 소녀 올리비아와 소년 라파엘은 첫 만남의 긴장으로 '졸도'하며 사랑의 레이스에 돌입한다. 

영화는 소년과 소녀로 만났던 이들의 10년 후, 그리고 평행 세계 속 공간에서의 조우를 그린다. 로맨틱 코미디답게 그곳에 있던 아내가 지금은 없다는 이유만으로 다짜고짜 다시 아내와의 사랑 만들기가 이전의 공간으로 돌아가기 위한 해법이라 결론을 내린 라파엘의 구애는 맹목적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문득 의문이 생긴다. 과연 라파엘이 얻고 싶은 건 이곳에서 자신을 남처럼 여기는 아내의 사랑을 얻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저쪽 세계에서 베스트 셀러 작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 후 벽을 때려 부숴 집을 넓히고 TV에도 출연하고 여기저기 싸인을 하고 다녔던 그 '명망'의 시간이 그리운 것일까? 이곳에서 라파엘에게 인기란 학교 문학 교사로서의 그것뿐이고, 친구의 썰렁한 농담을 들으며 함께 탁구를 치며 벽을 넓히지 않은 좁은 집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못견디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러브 앳>은 같은 공간, 다른 차원의 설정을 통해 로맨틱 코미디의 설정을 풀어나가지만, 뜻밖에도 그 '사랑'의 해프닝을 통해 관객은 다른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건 맹목적인 라파엘만이 아니라, '사랑'의 이름으로 진통을 겪는 많은 남녀의 관계들 사이에 숨겨진 '퍼즐'일 지도. 우리 역시 사랑이라 쓰지만 다른 것들을 그 속에서 찾아 헤매다 갈등을 일으키니 말이다. 

하지만 라파엘은 자신이 '사랑'하는 게 아내인지, 과거의 삶인지에 대한 고민, 고뇌 없이 저쪽 공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올리비아에게 다시 저돌적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운명처럼 팬이었다가, 스토커였다가, 할머니를 도와드리는 자원봉사자였다가, 올리비아 전기의 유령작가로 신출귀몰한 라파엘은 드디어 그녀에게 '남자'로 다가서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을 얻기만 하면 되는 것같던 '평행 세계'의 퍼즐은 수업 시간 학생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진짜 실마리를 얻게 되고, 그녀의 연주회에 간 라파엘은 마지막 열쇠를 그녀에게 넘긴다. 그리고 그녀의 배려 덕분에 마지막 연주회라 생각하며 입장한 그곳에서 라파엘은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에 맞춰 비로소 자신이 놓쳤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뒤늦었지만 비로소 사랑을 깨닫게 된 라파엘은 <이프 온리>의 이안에 버금가는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라파엘의 결단은 훈훈한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영화가 엔딩을 맞이한 후 돌아가는 길의 관객에게 여운으로 남는다. 과연 사랑을 위해 나는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까라며. <러브 앳>은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화법에 충실한다. 하지만 그저 '사랑'의 기승전결만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영화는 외려 그 '사랑'의 질감을 묻는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꿈조차 사랑할 수 있습니까? 아니 그 사람의 꿈을, 삶을 존중하고 있나요?  그 사랑하는 이를 위해 당신의 꿈을, 당신의 명망을 포기할 수 있나요?라고. 

by meditator 2019. 12. 1. 20:46

이제는 노익장이 되었지만 굳이 그의 이름 앞에 작품을 들먹일 필요조차 없는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가 한 작품에서 만났다. <아이리시맨>은 어쩌면 이 두 사람의 배우 만으로도 '영화사'적 가치를 기록하고 있는 작품일 수도 있겠다. 하물며 그 두 사람을 한 화면에 잡은 감독이 마틴 스콜세지라면 더더욱. 

영화를 보고 나오면 문득 여러 작품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알 파치노의 이름을 알린 <대부>에서 부터, 로버트 드 니로의 역작 <원스어폰어 타임 인 어메리카>, 그리고 <갱스 오브 뉴욕> 등등, 프랜시스 코폴라, 세르지오 레오네, 마틴 스콜세지 등 만든 사람들은 서로 다르지만 이들 영화가 그려내는 건 '아메리카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이다. 역사 책에서 말해주지 않은 '아메리카'를 만든 사람들, 이제 2019년 넷플릭스판으로 만들어진 <아이리시 맨>은 그 완결판과도 같다. '지미 호파 실종 사건'으로 귀결되는 20세기 미국의 완성, 역시 마틴 스콜세지답게 영화는 웅장한 영웅적 서사나 장렬한 성장담 대신, 비감한 회고담에 도달한다. 당신 손에 묻힌 그 피는 무엇을 위해서였냐고. 

 

 

페인트공이 된 남자, 프랭크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실존의 그 누구를 떠올리게 하지만 딱히 그 누구랄 것도 없는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 남성, 영화는 그가 뉴욕 마피아의 거물 러셀(조 페시 분)을 만나게 된 이야기로 부터 시작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그가 어떻게 페인트공이 되었는가에 대한 것이다. 페인트공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남자, 하지만 영화는 자신에게 벽에 피칠겁을 하는 그 일이 맡겨졌을 때 소회에 대해 그저 그 일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이상의 감상을 덧붙이지 않는다. 전쟁 당시 상사의 다그치는 명령에 맞춰 포로들을 데리고 숲속에 가듯이, 그리고 미국으로 와서 정육 트럭을 몰다 재판에 까지 회부되는 그런 일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치웠듯이, 그냥 그렇게 그는 페인트공이 되었다. 미국이란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정을 꾸려 살아가기 위해. 아이가 태어나 돈이 더 필요하자 세탁산업의 이권 쟁투의 배후에서 다이나마이트 사용까지 마다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다. 

잡화점에서 '물의'를 빚은 딸을 이끌고 가서 '사과' 대신 잡화점 주인의 손모가지를 짖이겨 버리고 돌아온 아버지 프랭크의 사는 방식이었다. 그런 그가 살아온 방식은 마치 막부 시대 일본의 하급 사무라이처럼 철저히 자신의 '주군'에 충직한 '페인트공'이 되는 것이다. 하급 사무라이가 주군에 뜻에 따라 자신의 배를 가르거나 전쟁터에서 생을 마치기는 것으로 최후를 맞이하기 십상지만, 그와 함께 등장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어딘가에서 총을 맞아 죽은 것과 달리 운이 좋게도 그는 그를 '페인트공' 이상으로 '친구'로 대해줬던 그의 두번 째 '주군'이었던 '지미'의 '실종'을 책임지는 것으로 달라졌을 뿐이다. 그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노조는 내 것'이라는 지미를 설득했지만 자신이 처음 섬긴 주군의 뜻을 어기지 않는다.

 

 

실종된 노조 지도자, 지미 호퍼
그렇게 그에게 '실종' 당한 프랭크의 벗이자 또 다른 '주군', 지미 호파가 있다. 발전에 가속이 붙은 자본주의 미 대륙을 잇는 움직이는 가교였던 '트럭', 그 트럭 노동조합 운동에 일찌기 스물 살 무렵부터 헌신했던 지미 호파, 1957년 전미트럭 운송 노조의 위원장으로 선출된 이래 14년간 그만의 카리스마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그리고 그런 지미 호파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는 '근간' 중 하나는 자기 자신과 노조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었고, 그 '수단'과 '방법' 중 하나에 프랭크와 그의 뒷배들이 있었다.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소년이 어느덧 그가 재임하는 동안 10만 명에서 230만명으로 불어난 노조원들의 조합을 '내 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된 모습, 그리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프랭크'를 그림자처럼 '사용'하는 모습을 통해 20세기 자본주의 사회로 성장해온 '미국'의 그림자를 영화는 드러낸다. 이권 세력으로 성장한 노동조합, 그 정점에서 자신의 왕국처럼 노조를 생각하는 지미 호파, 감옥에 갔다온 그가 무리하게 자신의 권좌를 탐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의 철지난 '권력욕'을 '정리'시켜준 건 그와 '협잡'했던 프랭크 일당, 그의 최후는 미 최대의 장기 미제 사건이 되었지만, '내 노조'를 남발하던 그는 살아남아 역사의 발목을 잡지 않을 수 있었을까?

퇴락한 노조 위원장과, 기꺼이 그를 '정리'시키는 마피아 세력, 그리고 그들의 수족이 되어 자신을 벗이라 여기는 지미를 '실종'시킨 프랭크, 20세기 미국을 만들어간 사람들이다. 열렬한 조합원의 지지로 얻은 막대한 조합의 재산이 '카지노'와 같은 이권 사업이 되고, 그 이권 사업을 지키기 위해 마피아 세력이 노조의 지부장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시절, 그리고 그 '이권'을 위한 이합집산의 와중에 굳이 지미 호퍼가 아니더라도 시절을 주름잡겠다 하면 등장한 인물 중의 상당수가 뒷골목에서, 거리에서, 혹은 외딴 집에서 프랭크와 같은 페인트공들의 '작업' 대상으로 생을 마친다. 호구지책으로 트럭이나 몰던 아일랜드 이민자 프랭크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시절이다. 

 

 

미국의 20세기를 만든 사람들 
결국에 살아남은 프랭크와 러셀의 삶이 뭐 그리 다를까? <아이리시 맨>은 반문한다. 가장 든든했던 벗이었던 지미 마저 기꺼이 손털어 버린 러셀과 프랭크의 남은 생이라고 다를까. 아버지가 잡화점 주인의 손을 짖이겨 버린 이래 아버지와 거리를 두었던 프랭크의 딸 페기는 지미의 실종 이후로 아버지를 떠났다. 가족을 위해서라며 기꺼이 손에 피를 묻혔지만 결국 프랭크에게 남은 건 병든 몸과 홀로 떠들어야 하는 요양 병동뿐이다. 다른 이라고 다를까. 총맞아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그렇게 '미국'을 '전횡'했던 이들의 최후이다.

'이 풍진 세상'을 살아내 보니, 기꺼이 손에 피를 묻히고 '부귀'와 영화를 누려보니 무엇이 남느냐고 <아이리쉬맨>은 묻는다. 하지만 그저 '일장춘몽'이라 퉁칠 수 있을까? 스티븐 스필버그의 질문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6부작 다큐, <우리는 왜 증오하는가> 5부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하급 군인으로 일했던 사람을 등장시킨다. 지극히 평범한 남성, 그는 자신은 그 '참극'의 실체를 몰랐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큐는 냉엄하다. 과연 몰랐을까? 그가 보초를 섰던 그 초소에서 보여지던 엄연한 유대인 학살의 징후들을 과연 몰랐을까? 아니 알았다 하더라도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변명이 유효할까? 

흔히 역사의 참극, 혹은 역행의 현장에서 본의 아니게 함께 했던 평범한 이들은 신의 피치못한 상황을 핑계로 댄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그들 역시 그 역사의 책임에서 비껴설 수 없다 비판의 날을 세운다.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21세기의 미국을 만든 건 바로 <아이리쉬 맨> 속 20세기의 인물들이다. 노조를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었던 노조 지도자도, 그런 지도자의 실체에 무지한 채 단지 그의 세 치 혀에서 비롯된 카리스마에 열광했던 노조원들도, 자신의 가족을 위해 혹은 자신의 보스를 위해 꺼리낌없이 벽에 피칠겁을 한 페인트공도, 그리고 조직의 이권을 위해 노조 지도자도 실종시키듯 수많은 이들을 '정리'시킨 이면의 실세들과 그들의 조력자가 된 법률가, 행정가들이 만들어 낸 오늘이 바로 우리가 보는 미국이다. <아이리쉬맨>이 그린 20세기 미국사다. 

by meditator 2019. 11. 29. 00:38

헨리 5세는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왕이다. 마치 우리가 세종대왕이나 정조 대왕을 현명한 왕의 대명사로 여기는 것처럼. 

'우리는 전우다. 나와 함께 피흘리는 자는 나의 형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헨리 5세


 

 
국왕이 솔선수범 전장에 나서 함께 피흘리며 뛰면서 우리는 전우고, 형제라는데 이보다 더한 '독려'가 있을까. 물론 그 '독려'는 무수한 국민들의 피와 땀의 헌신을 요구하지만, 어쨌든 비겁하지 않은 이 왕의 행보는 그래서 윌림엄 셰익스피어 이래, 로렌스 올리비에, 케네스 브래너 등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국을 대표하는 왕으로서 '헨리 5세'를 그리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일찌기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가족 사이에 던져진 소년의 이야기 <동물의 왕국>을 통해 2010 선댄스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바 있는 데이비드 미쇼 감독이 역시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신하들 사이에 던져진 역대 가장 '젊은' 헨리 5세를 들고 출정했다. 

영화  <더 킹; 헨리 5세>는 아직 왕이 되기 이전 헨리 4세 치하에서 어떻게든 왕자의 자리를 벗어나 기사 존 폴스타프를 벗삼아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왕자 할(티모시 샬라메 분)로부터 시작된다. 그 자신이 랭카스터 공작의 아들로 귀족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 '헨리 3세'의 후손인 점에 내세워 '왕좌'를 차지했던 아버지 헨리 4세, 덕분에 그는 재위 기간 내내 귀족들의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영화는 바로 이러한 헨리 4세의 위기를 끊임없이 '내우외환'을 불러일으키는 '전쟁광'과도 같은 권력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 할은 반기를 든채 할은 저잣거리에 침잠한다. 

하지만 첫 번 째 왕자인 그를 '권력'은 그냥 놔두지 않았다. 아버지는 공공연하게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을 거라 공언하지만, 그를 대신해 핫스퍼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간 동생은 그가 나서서 아버지의 부질없는 '정쟁'에 제물이 되지 말라며 핫스퍼를 제거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진격을 거듭하다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를 찾아온 대법관 윌리엄이 아버지가 싫다는 이유만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수 없다며 간곡하지만, 젊은 청년의 영웅심과 의협심, 그리고 책임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설득을 하자 왕궁을 찾는다. 

그리고 왕이 된 청년, 그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정치적 사안에 보다 신중하려 하지만 아직 어린 왕을 둘러싼 정국은 그로 하여금 애초에 아버지와 다른 왕이 되고자 했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을 다시 전쟁터로 내몰지 않고자 했던 그의 신념을 자꾸만 시험에 들게 한다.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던, 그래서 그가 죽였던 핫스퍼가 반란을 일으켰던 원인이 된 그의 사촌이 풀려날 수 있도록 지불도 하는 등 가급적 국민적 부담을 덜려하지만 정작 복병은 오랫동안 '해원'의 관계였던 프랑스로부터 시작된다. 왕의 즉위식에서 부터 그에 대한 조롱을 일삼던 프랑스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암살'을 시도하는 등 끊임없이 그의 존재를 위협한다. 아니 시작은 프랑스지만 왕자 시절 방탕하다 하여 귀족들에게 일찌감치 눈 밖에 나버렸던 그의 행보, 즉 신하들의 지지와 지원을 얻지 못한 그의 불안한 '존재론적 정당성'이 그로 하여금 믿을 수 없는 프랑스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선전 포고'를 하기에 이르른다. 

 

 

권력은 죽음을 먹고 자란다
전쟁에 나서기 전 그는 두 가지 일을 한다. 굳이 멀리 덴마크로 시집을 간 동생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주변에, 그가 왕자 시절 그의 토한 오물까지 거둬준 오랜 벗 존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즉위식에서 어린 시절부터 친하다며 자신에게 온 선물까지 나눠줬던, 하지만 그가 자리를 비울 시 왕권에 위협이 되는 사촌 등을 '암살' 사건을 빌미로 처형한다. 측근과 숙청, 그렇게 젊은 왕은 조금씩 권력을 다져나간다. 

프랑스와의 전장에서도 시험을 계속된다. 전쟁이라는 공간에서 군사들이, 그리고 전쟁 비용을 낸 성직자와 귀족들이 바라는 전쟁, 그리고 항복은 커녕 나타나 조롱을 일삼는 적국의 왕자, 그런 유혹 가운데에서 어떻게든 군사적 피해를 줄이려 헨리 5세는 고뇌한다. 

비록 큰 싸움없이 첫 번째 격전지가 될 곳의 성문을 열었지만 그 이후의 원정은 길고 지리했으며 이렇다할 싸움 한번 없이 계속된 행군은 영국군을 지치게 만든다. 그리고 드디어 마주친 프랑스군, 긴 원정 끝에 수가 줄어든 영국군은 상대로 되지 않을 만큼 장비를 갖춘 대군이다. 당연히 장군들은 '항복'을 권하고, 하지만 여기서 항복은 그저 한번의  싸움을 지는 것이 아니라 헨리 5세라는 젊은 왕의 존재 자체를 흔들 위기다. 

결국 그 유명한 영국군을 승리로 이끈 '아쟁쿠르' 전투는 영화 속에서 할이던 시절의, 그리고 왕이 된 지금도 그의 유일한 벗 존의 기지로 진흙밭같은 전장에서 갑옷을 벗어던진 채 무거운 갑옷을 입고 말을 탄 프랑스 병사를 상대로 백병전을 벌여 승리를 쟁취한다. 

너희 한 명, 한 명이 잉글랜드고, 이 곳이 잉글랜드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잉글랜드를 위해서 싸워라.  너희의 것으로 만들어라. 잉글랜드로 만들어라. 


우리는 모두 전우다, 형제다 라는 셰익스피어의 명대사는 어쩌면 그 자신조차도 믿지 못하는 거짓일 지도 모를 '독려사'로 영국군 앞에서 포효한다. 그리고 그 왕의 말이 끝나자 군인들은 전장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승리를 얻는다. 왕의 벗 존을 비롯한 많은 군사들의 희생을 안고. 

자신의 왕좌를 위협할 지도 모를 사촌 등을 죽이고 길을 떠난 왕은 이제 자신들의 군대보다도 훨씬 더 많은 프랑스군 포로들을 눈 하나 깜빡하지도 않고 죽인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죽은 자들의 무기를 들고 언제든 다시 영국군의 위협이 될 수도 있다란 명목으로.  그리고 그렇게 가장 아끼던 벗마저 잃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왕은 이제야 비로소 신료들을 비롯한 국민적 환호성을 받는다. 하지만 뒤늦게서야 안다. 그가 벌였던 저 환호성을 얻고자 벌인 전쟁이, 수많은 희생이, 애초에 '조작된 위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젊은 왕 헨리 5세의 고뇌 
영화 <더 킹; 헨리 5세> 속 왕이 된 소년은 흡사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며 고뇌하던 청년 <햄릿>과도 같다. 자신의 아비를 죽이고 권력을 찬탈했을 지도 모를 부정한 권력 숙부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자신의 영혼에 고뇌했던 청년은 이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왕궁에서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신념을 관철시키려, 그리고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고뇌한다. 

하지만 햄릿이 자신을 던져 '복수'와 '부정한 권력'을 징벌하려 했듯이, 헨리 5세의 왕좌는 '피'를 통해 권위를 얻는다. 영화 속에서는 아쟁쿠르 전투의 엄청난 프랑스인 포로를 다 죽인 걸로 나오지만,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헨리 5세는 프랑스 원정 시 가는 곳곳마다 마을을 불태우고 그곳 사람들을 '학살'한 무자비한 왕이었다. 그리고 백년전쟁의 서막이었던 아쟁쿠르의 영광은 그런 헨리 5세의 잔혹한 정벌은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영국에 대한 복수심을 불러일으켜 이후 '잔댜르크'의 등장을 낳는다. 

영화에서 헨리 5세는 가장 친한 벗 존을 프랑스 원정을 통해 잃는다. 이 '존'은 셰익스피어 원작의 <헨리 5세>에서는 피스톨이란 사내로 그려진다. 왕과 함께 방탕한 시절을 보내던 피스톨은 결혼한 아내를 두고 왕의 전장에 나선다. 전쟁은 승리를 얻었지만 남편이 전쟁에 나간 동안 그만 아내는 병을 얻어 죽고 만다. 승리한 전쟁, 그러나 정작 그 전쟁에 참여한 병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라고 피스톨을 통해 셰익스피어는 묻는 듯하다. 

<더 킹; 헨리 5세>를 통해 미소년 젊은 왕을 통해 '권력'의 쟁취가 의미하는가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상을 가졌지만 그의 이상은 권력의 놀음 앞에 순진했고, 그가 원하지 않았던 백성들의 피가 강을 이루고서야 신하와 백성들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 '권력' 말이다. 그렇게 소년은 아버지같은 벗을 잃고, 그리고 아버지같은 후견인이던 윌리엄을 그 스스로 죽이고, 기꺼이 손에 피를 묻히고서야 왕으로의 인정을 얻는다. 

by meditator 2019. 11. 17. 18:37

조커는 언제나 강렬했다.  광대의 입 그대로 찢어진 입, 하얗게 분장된 얼굴, 그리고 그의 악행이 극에 달할수록 미친듯이 웃어제치는 광기어린 웃음, 1940년 배트맨의 첫 호가 발간된 이래, 악당 조커는 언제나 배트맨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악당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위기에 빠진 고담시'의 평화와 안정을 찾기 위해 나선 배트맨, 하지만 조커는 바로 그 배트맨이 목적으로 하는 '평화와 안정'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장 잔혹하게 가리지 않는 범죄자였다. 마치 '배트맨'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너는 나를 완성시켜(you complete me)' <다크 나이트> 속 대사처럼, 정의의 사도 배트맨이 존재하기 위해 그와 반대인 속성을 가진 조커가 끊임없이 '도발'되었다. 1989년 팀 버튼의 <배트맨>에서도, 때로는 주인공보다도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2008년작 <다크 나이트>에서도, 조커는 마치 땅에서 솟아오르듯 불쑥 등장하여 배트맨이란 존재를 '히어로'로 완성시켜 주었다. 

 

 

하지만 토드 필립스 감독은 바로 이 '광기와 악행'의 범죄자 조커에게 '역사'를 만들어 주었다. 처음 조커란 캐릭터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무성 영화 <웃는 남자>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혁명과 전쟁, 폭동, 왕정복고 등 19세기 격변의 프랑스 역사를 살아냈던 <레미제라블>의 저자인 빅토르 위고는 <웃는 남자>를 통해 귀족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납치되어 기형적인 얼굴이 되어 정체성을 상실한  '웃는 남자'를  통해 도덕적인 '결핍'에 시달리는 귀족 사회와 경제적 신체적 '결핍'으로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대비시킨다. 그렇게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순을 자신의 찢어진 얼굴을 통해 고스란히 담아냈던 '웃는 남자'는 이제 현대 미국의 뉴욕이 모티브가 된 '고담'시의 '아서 플랙'을 통해 오늘에 되살아난다. 

아서 플랙, 끓어오르다 
지금까지 <배트맨> 시리즈 속 '조커'의 등장은 언제나 요란했다. 어린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보이는가 싶으면 어느새 이 기괴한 어릿광대는 기발한 각종 장치와 트릭을 통해 '고담시'를 뒤집고 배트맨의 허를 찌르곤 했다. 

그러나 아직 조커가 되지 못한 <조커> 속 아서 플랙의 등장은 처연한다. 일용직 품팔이와도 같은 어릿광대 아서 플랙, 정신병원에서 나온 그가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일이지만 그 마저도 동네 아이들의 조롱거리로, 동료의 협잡으로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우울증 환자로 지금 먹고 있는 7가지 약으로도 구제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듯한 그의 마음과 아랑곳없이 그가 '모셔야 할' 어머니는 그를 '해피'라 부른다. 어머니의 곁에서 모자가 함께 '머레이쇼'를 보며 자신의 꿈인 '코미디언'이 되는 순간을 상상할 때가 유일한 낙인 아서, 하지만 순간순간 튀어나오곤 하는 스스로 멈출 수 없는 웃음은 그의 꿈조차 세간의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비루한 삶, 그러나 책임져야 할 부양 가족, 그리고 오로지 '망상' 속에서만 가능할 것같은 꿈, 폭발을 향해 나아가는 초침처럼 그의 삶은 차곡차곡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른다. 그리고 그 '폭발'의 계기는 우연히 동료에 의해 쥐어진 총, 그리고 언제나와 같은 멈출 수 없는 웃음에 대한 폭력적 조롱이 빚어낸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저 참을 수 없어 총을 사용한 '범법자'였다. 

하지만, 그 '범죄'는 뜻밖에도 그의 툭 튀어나온 뼈 일그러진 몸 속에 숨겨두었던 '욕망'을 꺼내든다. 불안을 달래려는 듯 끊임없이 피워대는 담배, 참으려하면 숨이 막힐 정도로 다그치는 웃음, 그리고 순간순간 그를 몽롱하게 찾아드는 '망상', 그럼에도 그는 '멀쩡한' 척하며 살아가려 했다. 비극적인 순간순간이 이어져 그를 잠식해 갔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모시며' 살아가려 했던 그 내부에 있던 범죄적 욕망의 뇌관을 건드린 건 뜻밖에도 '어머니'이다. 

 

 

고담시 최고의 부호 토머스 웨인에게 끊임없이 보내지던 어머니의 편지는 그가 신체적, 정신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붙잡으려 했던 가정, 그 출생의 비밀을 폭로하는 계기가 된다. 어머니 말씀처럼 '해피'가 되려했던 아들 아서가 짊어지려 했던 그 비극적 운명은 그의 말처럼 '코미디'같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마는 가난한 집안의 입양아가 겪어낸 폭력의 결과물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사실'이 그가 버텨왔던 '정상적인 척 살아내려 했던 '삶'의 뇌관을 폭파해버린다. 그와 함께 두 발의 총성과 함께 날아간 그의 꿈도.  대신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견뎌왔던 그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롭게 '조커'로 거듭난다. 

고담시, 아서, 그리고 조커 
<조커>는 '아서'라는 고담시의 가장 밑바닥 삶을 버텨가던 신체적 정신적 문제아가 고담시의 '사회적 문제'와 맞물리며 '안티 히어로'로서 거듭나게 되는 지점을 설득력있게 그려낸다. 

아서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착각했던, 그래서 잠시 꿈에 부풀었던 토머스 웨인은 아서는 물론, 고담시 최고의 부호로써 고담시의 경제적 상황에 못견디며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을 그가 가진 '부'만큼의 자신감으로 멸시한다. 토머스를 아버지라 부른 아서의 해프닝은 그의 어머니의 '망상'에서 비롯되었지만, 아서 개인의 비참한 도발은 뜻밖에도 고담시 사회적 봉기의 도화선이 된다. 

 

 

그토록 꿈이었던 머레이 쇼에 출연한 날, 정성스레 광대 분장을 하고 그 자리에 나간 아서는 때로는 아버지라 '망상'했던 자신의 정신적 대부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그 시간 아서로부터 촉발된 거리의 광대들 중 한 명이 고담시의 '대부' 토머스를 '삭제'한다. 

그렇게 서로 다른 이에 의해 벌어진 참사로 조커가 된 아서와 토머스의 아들 브루스는 맺어진다. 바로 '너는 나늘 완성시켜'라는 조커의 대사가 성립되는 순간이다. 개인의 원한, 개인의 질곡이 궁극에서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갈등과 순치되는 순간, 바로 그 절정에서 아서는 두 팔 벌려 자신의 '조커'됨을 받아들이고, 이미 미치광이 아서에 몰두했던 관객들은 그 수많은 조커들 사이에서 '조커'로서 스스로 세례를 내리는 아서에게 묘한 '공감'과 '감동'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이것은 고담시가 가진 부조리와 갈등이 자아내는 '비극적 카타르시스'이기 때문이리라. 또한 '사회적 정체성'에 자신을 어떻게든 꿰어맞추고자 애쓰며 살아가는 '개인'들만이 가진 '고뇌'의 비등점을 조커가 된 아서가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지점, 그렇게 아서와 고담시의 '기층 민중'들은 '아버지'를 밟고 자신의 세상을 연다. 그저 디씨 코믹스의 광기어린 조력자였던 조커가 사회부조리극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by meditator 2019. 10. 5.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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