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로 우리 영화의 신작 개봉이 주춤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대만과 일본의 작은 영화들이 오래된 고전 영화들의 리메이크작들 가운데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거의 매주 새로운 신작으로 찾아오는 일본 영화들은 스릴러, 로맨틱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져 있다. 그 중에서도 지난 3월 개봉한 <모리의 정원>에 이어, 4월 9일 개봉한 <선생님과 길고양이>, 그리고 23일 개봉할 <고양이와 할아버지>는 모두 '노년의 삶'에 촛점을 맞춘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의 현실을 반영한 장르일 터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라기엔 우리 역시 급격하게 고령화되어가는 현실에서 외면할 수만은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 중에서 <선생님과 길고양이>는 과연 어떤 노년의 삶을 그려내고 있을까. 

 

 

독고다이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은 오늘도 바쁘시다. 소일 삼아 모여 게이트볼을 하는 동네 노인들이 함께 하자 불러도 교장 선생님은 바쁜 일이 있어서라며 가던 걸음을 서두른다. 사실 이젠 교장 선생님도 아니다. 정년 퇴직을 하셨다. 다니는 직장도 없는데 뭐 그리 바쁜 일이 있을까.

서둘러 교장 선생님이 들른 곳은 다름 아닌 동네 빵집이다. 어제 사간 빵맛이 예전과 다르다고 한 입 베어물은 빵을 들고 오셨다. 그 말을 들은 빵집 주인은 좌절한다. 빵이 잘 팔리지 않아 버터를 조금 더 싼 것으로 바꾸었는데 매일 빵을 사가는 단골이 알아차렸으니 말이다. 결국 더는 빵집을 계속할 수 없겠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그런 빵집 주인의 '안타까운 상황'에도 교장 선생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그런 식이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물론 같은 마을에 사는 그 누구에게도 교장 선생님은 '소통'하지 않는다. 집으로 찾아와 교장 선생님이 찍은 '마을의 역사'가 될만한 사진을 정리하는 젊은이와의 대화에서도 교장 선생님은 동문서답, 젊은이 말처럼 '마이 페이스'일 뿐이다.

마을 사람들 상당수가 교장 선생님의 제자여서 반가이 인사를 하고, 교장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추억하고, 적어준 문구를 상기하지만 무반응으로 일관한다. '소통'하지 못하는, 아니 '소통'이라는 걸 아는가 싶은 교장 선생님의 모습은 어쩐지 익숙하다. 영화 후반 나오는  교장 선생님의 고백처럼 한때는 애도 많이 써봤지만 교장 선생님이 된 후 그 직책에 갇혀 세상을 향해 마음을 닫았던 그 습성이 이제 그 누구와도 접점을 찾기 힘든 사람으로 만들었다. 우리 사회에서 만난 상당수의 어르신들의 또 다른 모습과도 같다.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 속에 갇힌 채 현실과 마주하지 않는 모습이 말이다. 

 

 

그러면 교장 선생님의 일상은 무엇으로 바쁠까. 빵을 바꿔온 선생님은 아내의 영전에 빵을 놓는다. 그리고 빵 한 조각과 함께 한 식사 후 교장 선생님은 독서 삼매경에 빠져든다. 노년의 일상을 '헌신'한 러시아 작품의 번역, 그런데 알고보면 '꼭' 해야 할 것이 아니라 교장 선생님이 무료할까봐 출판사에서 심심풀이삼아 해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 일을 위해 분주하게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 하루를 보낸다. 

그런 교장 선생님의 정적을 깨뜨리는 방해꾼이 있다. 다름 아닌 고양이다. 그것도 길고양이. 이제는 세상에 없는 아내는 길고양이를 집고양이처럼 아꼈다. 그래서 늘 같은 시간이면 고양이는 찾아와 아내에게 밥을 얻어먹고 자기 집처럼 쉬다 갔다. 이제는 아내는 없지만 고양이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 찾아온다. 고양이를 위해 만들어 놓은 문을 통해 아내의 영전 앞에 앉아있는 길고양이. 

그런 고양이를 볼 때마다 교장 선생님은 자꾸만 아내와 함께 하던 시절이 떠올라 못견뎌 한다. 홀로 러시아 문학과 씨름하며 보내는 일상에서 길고양이는 유일한 방해꾼이자, 참견꾼이고, 그 마저도 교장 선생님은 거부한다. '추억'마저 고통이라 여기며. 몰두하지만 딱히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시간, 스스로 고립된 시간은 교장 선생님으로 하여금 자꾸 '과거'에 매몰되도록 만든다. 결국 견디다 못한 교장 선생님은 그 추억을 유일하게 길어오는 고양이를 내쫓는다. 

솔라, 치히로 혹은 미의 실종 사건  
솔라, 치히로, 혹은 미, 이건 고양이의 이름이다. 길고양이로 이 집 저 집, 혹은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붙여준 이름, 붙임성 좋은 고양이는 사람들이 자신을 무어라 부르건 상관없이 반경 500미터의 자기 영역을 날마다 '순시'하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영역 동물'인 고양이를 그 한 영역에서 교장 선생님이 쫓아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 댁에서 쫓겨난 고양이가 마을 전체에서 그만 사라졌다. 

안그래도 고양이를 수장시킨 사건에, 길고양이 밥을 주지 말라는 벽보까지 붙여서 걱정스러워 고양이 목에 방울 목걸이까지 달아주었는데 그 고양이가 사라졌으니 고양이 밥을 챙기던 사람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걱정스러워하는 건 뜻밖에도 교장 선생님이다. 그저 자신은 아내가 떠올라 고양이를 내쫓았을 뿐인데 고양이가 사라지자 교장 선생님은 '야옹~'하며 고양이를 찾아 온동네를 헤맨다. 

고양이가 들어올 까봐 작은 문에 테이프를 덕지덕지 바르고 부엌 문마저 막아놓았던 교장 선생님은 자신 때문에 고양이가 사라지자 그 '바쁘던 일상'을 놓고 고양이 찾기에 나선다. 심지어 애지중지하던 영전의 아내 사진마저 고양이를 찾기 위한 '미끼'가 된다. 죽은 아내와 번역, 그렇게 교장 선생님의 일상을 채웠던 중요한 일들은 살아있는 고양이 앞에 하찮은 것이다. 영화는 반문한다. 나이듦의 시간을 채우는,  '집착해마지 않는 나의 것'들이 정말 그토록 애지중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냐고. 

교장 선생님만이 아니다. 작은 바닷가 어촌 마을, 저마다 고양이와 접점을 이루며 살아가던 사람들은 고양이가 실종되자, 그 접점을 상실하며 뜻밖에도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학교를 중퇴하고 고양이 밥을 주던 세탁소 점원은 밥을 주던 그 시간이 쉴새없던 세탁소 일을 하던 자신에게 '휴식'과도 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밤마다 벤치 아래 고양이를 반기던 소녀에게는 왕따로 괴로워 죽으려 하던 그 순간 자신의 발밑에서 울었던 고양이가 생명의 은인이다. 이렇게 그저 '길고양이'였지만, 그 '길고양이'는 저마다의 삶에 짖눌렸던 사람들에게 '쉼표'와도 같은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 고양이 부양 인구가 늘듯이, 그 작은 마을 사람들도 '사람' 대신 고양이에게 위로를 의탁하며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고양이를 안고 부비며 유일하게 생기를 띠던 그 순간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고양이를 찾아나선다. 

 

 

그렇다면 고양이를 다시 찾았을까? <선생님과 길고양이>는 관객들마저 매료시킬 귀여운 고양이가 등장하지만 정작 영화를 통해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고양이를 찾아나선 사람들은 고양이와의 접점을 사람과 사람의 접점으로 치환시킨다. 그 누구에게라도 고개를 뻣뻣하게 세웠던 교장 선생님은 고양이를 잘 돌보지 않았다는 호통에 고개를 조아린다. 생전 드나들지도 않았던 미용실을 찾고 평소같으면 어울리지 않을 사람들과 고양이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밤거리를 헤매고 구르며 고양이를 찾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고양이를 찾는 짧은 시간 동안 교장 선생님의 표정이 변한다. 와이셔츠는 흙투성이가 되고 다리는 절름거리지만 고루하기 짝이 없고 무표정이던 그 얼굴에 어쩐지 생기가 돈다. 

알고보면 'I can do it'을 사자성어처럼 졸업하는 제자에게 남길 정도로 위트가 넘치던 교장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 일이 재미없었다지만 여전히 '선생님'으로서의 '촉'은 여전하신 분은, 고양이를 찾으며 그 문닫아 걸었던 자기 만의 공간에서 한 걸음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실종된 고양이를 매개로, 세탁소 점원과 미용실 주인 등 서로 다른 세대, 다른 삶을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접점을 가지게 된다. 교장 선생님이 어렵기만 하던 젊은 세탁소 점원이 교장 선생님과 빵을 나눠먹는 일은 여사처럼 이루어 지고 세대간 높았던 권위의 벽을 알고보면 별 게 아니다. 젊은 남녀는 쑥쓰럽게 인사를 하고, 주먹밥을 나눠먹고 다시 내일 만날 것을 기약한다. 매일 학교를 땡땡이 치던 어린 소년이 교장 선생님의 손에 온기를 남긴다. 

나이듦의 시간은 숙제와도 같다. 그리고 그건 비단 나이듦을 짊어진 사람만의 숙제만은 아니다. 그 나이든 사람으로 채워진 사회, 그리고 그 나이든 사람을 부양해야 하는 젊은이들까지 불가피하게 모두의 숙제가 된다. <선생님과 길고양이>는 '해프닝'으로 부터 해법을 도모한다. 꼭 나이가 들어서만이 아니다. 서로가 자신의 고민 속에 빠져살며 저마다의 별에서 고뇌하던 '어린 왕자'와도 같던 사람들이 실종 사건을 계기로 서로 다른 별과 다리를 놓는다. 고양이가 귀여워 찾아들어 사람들의 관계와  나이듦의 과제를 새로이 받아들고 나오는 영화, <선생님과 길고양이>다. 

by meditator 2020. 4. 16. 15:23

늘 소원했던 가족들이 함께 있으면 좋을 줄 알았다. 아마도 이건 이상적인 로망이었나 보다. 봉쇄된 2달 동안 중국 후베이성에서 가정 폭력이 2배나 늘었다고 한다. 중국뿐인가, 프랑스, 영국, 북아일랜드 등 가정 폭력 신고 건수가 몇 십 프로씩 증가 중이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신고 건수가 줄었다고 한다. 가정의 평화를 찾아서? 외려 전문가들은 '신고' 조차도 할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다며 우려를 표명한다.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하소연은 이어진다.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빠, 엄마들은 매끼 식사를 해결하느라 지쳐간다. 함께 있으면 좋을 줄 알았는데, 더 힘들다. 가족때문에 지쳐갈 때 박카스같은 영화 한 편? 바로 <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이다. 

 

 

보드 게임 밖에 모르는 아버지
영화를 여는 사람은 바닷가를 서성이는 아버지 앨런이다. 이미 바닷가에 와서 서성이면서도 짐짓 아직 도착도 안한 듯 시치미를 떼보지만 갈매기 소리 때문에 거짓말이 들통나버리고 마는 속이 뻔히 보이는 늙수그레한 아버지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를 배우 빌 나이가 연기한다. 

빌 나이하면 생소할 지도 모르겠지만, <어바웃 타임>에서 이미 오래도록 옷장 속을 들락거리며 시간을 왔다갔다 했다던 노회한 선배 타임 슬리퍼 아버지를 떠올리면 이미지가 딱 떠올려질 것이다. 거기에 <러브 액츄얼리>에서 한물 두물 아니 세물도 더 간, 대놓고 자기가 막 살았다며, 크리스마스 이브에 1등의 기적이 생기면 옷을 벗겠다던, 그래서 기타 하나로만 몸을 가린 채 1위 퍼포먼스을 한  락스피릿 충만한 노년의 락스타라면 어떨까? 어떤 상황에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그런데 이상하게 그런 그의 연기를 통해 감정이 흔들리게되는 빌 나이야 말로, 할 줄 아는 거라곤 보드 게임 밖에 없는 아버지 역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그 보드 게임이 사단이었다. 피터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형과 피터는 보드 게임을 하다 형이 집을 뛰쳐나가 버렸다. 그리고 이제 피터가 결혼을 하고 아들이 청소년이 된 이 즈음까지도 아버지는 실종된 형을 찾는다. 그런데 연락이 왔다. 신원불명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아버지와 피터는 이제 이 바닷가에서 만나 그 신원불명의 시체가 형인지 확인하러 갈 예정이다. 

뜬금없이 아이스크림 트럭에 다가가서 아이스크림을 사는 대신 그림을 그리는 아들 피터의 그림 자랑을 하는 아버지, 당연히 돌아오는 건 아이스크림 트럭 주인의 냉랭한 응대다. 그렇듯 아버지는 어딘가 세상과 핀트가 좀 어긋나 보인다. 그런 와중에서도 여전히 열심히 형의 실종 전단지를 붙인다. 

 

 

그런데 아버지가 잘 하는 게 있다. 바로 보드 게임이다. 피터는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 아버지와 피터, 그곳 호텔 1층 바에서 아버지는 자신들처럼 혹시나 신원불명의 시체가 자신들의 아들일까 하고 온 부부를 상대로 보드 게임을 한다. 

분노조절장애 아들
하지만 피터는 그런 아버지를 '극혐'한다. 심지어 아버지로 인해 돈을 잃은 부부에게 대신 돈을 갚아주려고 까지 한다. 집으로 돌아온 후 밤길을 거닐 던 아버지가 다짜고짜 피터의 집을 찾은 후 들어 앉아 아내와 아들, 심지어 아들의 여자 친구와 조금씩 친밀해져 가지만 그런 상황의 매 순간마다 피터는 분노 조절 장애가 아닐까 싶을 만큼 아버지에게 반응한다.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방법>은 '인간적'이다. 그리고 '가족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적'이라는 단어는 우리는 흔히 말하는 그 인간미라던가, 휴머니즘의 그 '인간적'이 아니다. 

가족들끼리 자주 부대끼니 부부 사이의 스킨쉽도 많아지겠다는 너스레에 상대방은 '가족끼리는 그러는 거 아냐'라고 답한다. 그런 식이다. '가족'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무이한 단위이지만, 가족만큼 '데면데면'한 사이가 있을까. 바로 그 세상에 둘도 없이 '데면데면한 '사이인 그 가족의 '인간미', 그럼에도 '가족'이라서 서로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인간적'인 애증을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은 '은유법'처럼 풀어놓는다.

할 줄 아는 게 '보드 게임' 밖에 없는 아버지, 아들이 떠나간 그 날도 보드 게임을 했다. 여전히 그 시절 아들의 얼굴이 담긴 실종 전단지를 붙이고 다니지만, 막상 아들에 대한 기억이 없다. '보드 게임'으로 상징되었지만, 많은 아빠들이 그러지 않을까? 뜬금없이 자식 자랑을 하고, 어릴 적 집 나간 아들을 놓지 못하지만, 막상 그 아들들에 대해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한다. 여전히 눈치없는 소리만 하고. 자기 멋대로 이다. 

분노 조절 장애같은 아들은 다를까. 어릴 적 넉넉치 않은 형편으로 인해 늘 짝퉁만 사왔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켜켜이 쌓인 듯한 아들, 여전히 그럼에도 보드 게임만 하는 아버지를 참을 수 없는 아들, 그리고 아버지와 다르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형의 실종에 대한 '가족으로서의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애증의 공동체.

 

 

행복의 단추는 어떻게? 
이 평행선같은 아버지와 아들은 어떻게 다시 행복의 단추를 채우게 되었을까? 결국 그 해법은 서로가 그어놓은 선에서 한 발자국씩 들어서는 것이다. 큰 아들만 찾으러 다니던 아버지, 그래서 그 아들이 떠난 날부터 매일 밤 밤거리를 헤매일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오랜 배회 끝에 아들 집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그 해프닝은 뜻밖에 서먹서먹했던 아들 집 가정의 청신호로 작용한다.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온곳에 형의 전단지를 붙여놓은 채 칩거 한 아버지를 찾은 아들은 비로소 속내를 펼친다. 아버지도 안다. 그 불평불만만 늘어놓던 아들은 누구보다 아버지의 안타까움을 제일 잘, 오래 지켜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들이 바라는 건 별 거 아니다. 형이 떠난 그 날부터 아버지의 곁에 있었던, 그 옆에 있었던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바라던 '가족'으로서의 소박한 소망뿐이다. 그 별거 아닌 소망을 솔직하게 터놓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은 가족이라 서로 기대하고 그래서 실망하고, 이 풀기 어려운 난제를 다가가는 구비구비 오솔길같은 영화다. 

다시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을 들먹일 수 밖에 없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사연이 없는 집이 어디 있으랴. 오랫동안 양복점을 해왔던 할아버지는 이제 막 사랑에 눈뜬 손주에게 양복 한 벌을 선사하며, 멋쟁이의 팁을 전수한다. 양복 단추를 전부 잠그지 않는 것. 행복도 마찬가지 아닐까. 완벽한 방법은 행복의 단추 하나를 열어놓듯 서로에 대한 마음과 태도를 한 자락 열어놓는 것이다. 그래야 비슷하게나마 행복의 문이 열린다. 결국 단추를 채우는 게 아니라 열어놓는 것, 이게 영화가 제시한 해법이다. 

by meditator 2020. 4. 5. 14:47

<주디>를 보러 잠실에 위치한 영화관을 갔었다. 석촌 호수의 벚꽃들도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하고, 제법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바로 석촌 호수의 통금령이 내렸다. 올해 만개한 벚꽃은 조용히 홀로 피다 질 터이다.

꽃이야 사람들이 보러 와주건 말건 상관없이 철이 되어 피고 지는 일을 마다하지 않겠지만, 꽃과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애써 만든 영화가 시절을 잘못 만나 영화관에서 홀로 고생한다. 좌석을 퐁당퐁당 배치를 했어도, 같은 줄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저만치 비껴서 예매를 하고서도 마스크를 풀지 않은 채 관람해야하는 시절,  그 마저도 한 공간 안에 채 10 명이 안된다. 하지만, 그냥 10 명도 안되는 사람들만 보기에는 스타 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싶었던 주디 갈란드의 삶이 애닮다. 

 

 

인간이기 이전에 '스타'여야
2020년 아케데미 상 남우 주연상을 수상한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조커>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의 연기를 찬탄한다. 연기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작품의 호아킨 피닉스가 연상되지 않을 정도로 앙상하게 살을 뺀 그의 몸이 보여주는 '조커'의 분위기에 압도당한다.

오랜 약물 중독으로 인해 잠도, 먹는 것도 더는 그 무엇도 사람답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여배우, <조커> 속 호아킨 피닉스만큼 앙상하게 마른 몸, 도무지 몸에 에너지라고는 남아있지 않은 듯 어깨는 푹 꺽이고, 두 팔은 흐느적흐느적, 바람이 불면 금새 날아가버릴 것같은 걸음걸이로 르네 젤 위거의 주디는 등장한다. 세팅된 머리, 긴 속눈썹의 짙은 마스카라로 도배된 얼굴은 안타깝게도 숨길 수 없는 나이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하룻밤 잘 곳이 없어 전전하는 늙은 여배우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곳에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어리>의  그 여배우는 없다. 남우 주연상이 당연했듯,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의 몫이 당연해지는 순간이다. 

아이를 내 몸 밖에 있는 심장이라며 어떻게서든 내 아이들은 내가 키우고 싶다는 엄마, 하지만 당장 있던 호텔에서도 쫓겨나는 처지의 엄마는 결국 두 아이들을 전 남편에게 맡기고 그녀를 부르는 무대가 있는 영국으로 향한다. 

그녀가 원하는 건 평범한 삶이지만, 결국 그녀가 돌아갈 곳은 무대 밖에 없는 이 '씬'으로 영화는 주디 갈란드의 삶을 '정의'한다. 영화 <주디>는 죽기 6개월 전까지 섰던 마지막 영국에서의 무대 공연과, <오즈의 마법사>로 세상에 그녀의 이름을 알리던 그 시절의 주디를 교차하며 '엔터테이너'로서의 삶에 잠식당한 한 사람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잠을 자고 싶어요', '햄버거 한 입만이라도 먹고 싶어요', '휴식 시간을 지켜주세요'라던  10대의 주디에게 제작사 대표는 '선택'을 강요한다. 말이 선택이지, 너가 아니라도 너를 대체할 너 또래 아이들은 많다는 대표의 말에, 당장 스케줄에 따르기 싫으면 이 문으로 나가라는 대표의 말에 누가 어렵사리 얻은 주인공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갈 수 있었을까. 

2살 때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던 주디 갈란드는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전횡에 가까운 양육을 통해 아역 배우, 그리고 <오즈의 마법사> 등을 통해 '아이돌'과 같은 청춘 스타로 발돋음했다. 하지만, '스타'의 대가는 가혹했다. 스크린에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제작사는 음식 대신, 잠 대신, 휴식 대신 약을 먹였다. 결국 자고 싶어도 잘 수 없게 될 정도로. 청소년 시절 성장에 필요한 음식물도, '멘탈'도 챙기지 못한 주디는 '스타'가 되었지만, 자살 시도와 약물 중독, 그리고 불성실한 태도로 인해 점점 입지가 좁아져 간다. 헐리우드 산업 시스템의 그늘은 온전히 주디의 정신과 육체를 갉아먹어갔지만, 그녀를 책임져야 할 사람은 그녀 자신 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만 미국 그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그녀를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가게 된 영국, 여전히 잠도 자지 못한 채 불안정한 몸짓으로 흐르적거리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살기 위해서 주디는 무대에 선다. '다음엔 잘 해 낼 수 있을까'라는 무대 공포증으로 첫 무대조차 설 수 없을 뻔한 해프닝을 만들지만, 떠밀리듯 나선 무대에서 여전히 '주디'는 '주디'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엔터테이너로서의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성공적인 영국 데뷔 무대, 분장실에는 꽃다발이 넘치고, 기사는 호평 일색이지만, 정작 무대를 내려온 분장실의 주디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이다. 그 무엇도 그녀를 위로해 줄것이 없는 것같은. 

멋진 노래 뒤에 우뢰와 같이 쏟아지는 관객석의 박수와 찬사, 하지만 그런 인사를 받고 주디는 말한다. 저는 무대에서만 주디 갈란드라고. 남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그늘로서 처연하게 스러져 간 '스타'의 삶 
하지만, 세상은 주디를 '인간' 이기 이전에 '스타'로 소비한다. 부모도, 제작사도, 그리고 네 번의 결혼으로 만난 '남자'들 조차도. 자신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행복의 길이 눈 앞에 당장이라도 보이는 듯',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며 '결혼'하자는 주디, 늘 내편인 되는 누군가를 갈구하지만  결국 그녀는 늘 '혼자' 남는다. 다시 외로움과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고 약과 술에 의지하는 악순환, 그런 스스로 견뎌내지 못하는 삶의 무게는 그녀에게 유일하게 남은 기회마저 앗아간다.  비록 '무대'를, 그 무대에서 노래부르는 것을 여전히 좋아했지만, 그녀의 자존감 낮은 '멘탈'과 술과 약물에 지친 육체는 더 이상 무대를 감당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우리 시대의 '청춘 스타'였던 아이돌들의 추레한 내리막길을 '기사'로 접하게 된다. 영화 속 주디나, 우리 시대의 그 '사건 사고' 속 아이돌 들이나, 미처 자신들의 '인격'과 '정체성'이 형성되기도 전에,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스타'로서 '소비'되어 마모되고 만 존대들이다. 늘 자신을 빼앗기며 살아왔던 그들은 '모든 걱정이 레몬 사탕처럼 녹아버리'는 달콤한 그 무엇을 꿈꾸지만, 영화 속 주디의 말처럼, 저 산 머너에 있는 무지개를 쫓아 걸어가는 게 전부인 것이 어쩌면 인생인 것처럼, 제 아무리 그들의 삶이 '희생'의 결과물이었을지라도, 결국 삶의 무게는 온전히 그 '스타' 당사자에게 짊어지워진다. 

영화 <주디>는 어린 시절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희생자가 된 주디, 그 가혹한 대가를 전 생애에 걸쳐 짊어진 주디 갈란드의 모습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그려낸다. 무대 위의 스타가 아니라, 인간으로  행복하고 싶지만 행복을 얻는 법을 배우지 못한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사랑받고 싶었지만 끝내 내 편을 얻기 어려웠던 한 여성의 모습이 만인의 스타였던 무대 위의 주디와 대비되며 펼쳐진다. 




by meditator 2020. 4. 1. 01:47

세간의 씁쓸한 우스개가 있다. '앞으로 2주가 분수령'이라는 소리를 지난 주에도, 지지난 주에도, 한 달 전에도 들었다는 것이다. 마스크 쓰고 조심하면 되겠지 했는데 '신천지'가 터지고, 이제 좀 나아지려나 했는데 또 다른 '교회'에서 확진자가 대거 쏟아졌다. 이제 예배도 자제한다니 좀 줄어들려나 했는데 해외에서 확진자들이 속속 입국하고 있다.

'사회적 격리' 시책에 적극 협조했던 사람들은 '허탈'할 수 밖에 없는 시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실하게 해왔던 '격리'를 이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장기화되면 '심장병', '치매', '우울증' 등의 발병이 늘어나는 등 개개인의 정신 및 신체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의학적 보고마저 등장하고 있지만 '답'이 없다.  이럴 때일 수록 결국 챙길 건 '멘탈', 바로 그런 '멘탈'을 '건강'하게 지켜낼 수 있는데 '특효약'인 영화가 있다면? 바로 <모리의 정원>이다. 

 

 

은둔?, 아니 정원이 너무 넓을 뿐
일본의 정원하면 곱게 다듬은 나무, 정갈한 바위, 수풀과 붉은 잉어가 한 폭의 그림처럼 조화를 이루는 연못을 떠올릴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옮겨 온 듯하지만 알고보면 자연을 뺨칠 만큼 자연스럽게 만들기위해 인간의 지대한 노력이 경주된 곳. 그래서 곳곳의 정원들은 그 자체로 유명 관광 명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모리의 정원>에 등장하는 정원은 그렇게 인간의 손길이 더해진 '풍광'좋은 정원이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조감'으로 비춰지는 모리의 정원은 다닥다닥 붙어있는 주택가 조금 넓은 수풀이 우거진 '마당'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싶은 그런 곳이다.

물론 모리의 정원에도 '연못'도 있다. 심지어 '모리'가 30년이나 가꾼, 하지만 그곳도 특별하게 다듬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94살이 되어버린 모리 옹이 홀로 구덩이를 파서 연못을 만드느라 오래 걸린 연못이다. 구덩이를 파서 빗물이 고여 저절로 연못이 된 곳, 그곳에 강가에서 옮겨온 송사리가 사는, 좋게 말해 연못이지, 물 구덩이에 가까운 그곳이 날마다 모리가 시간을 보내는 연못이다. 

딱히 인간의 '인공적'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 그 무성한 마당에 오늘도 94살 모리 옹은 '출근'을 하신다. 집 앞에서 빨래를 널던 아내는 머리 숙여 다녀오시라 한다. 옷을 여미고, 허리춤에 주머니를 찬 채 나막신을 신고 지팡이 두 개를 짚으며 마치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호기롭게 길을 떠난 모리 옹, 그 기세에 길을 가던 도마뱀이 혼비백산 수풀로 몸을 피한다. 

그런데 길을 따라 방향을 튼 모리 옹이 자신의 길을 막은 여리여리한 나뭇가지 하나에 그만 시선을 빼앗긴다. 눈이 휘둥그레해진 모리옹, '여태 자라고 있었는가?'라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겨우 나뭇가지와 헤어지니 이번에는 흰 고양이 한 마리, '이보게' 하고 인사를 청한다. 나풀나풀 나비에게 '어디에서 날아오셨나?'며 매료된다. 마치 나비에 시선을 빼앗겨 무릉도원으로 찾아간 옛날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이리저리 시선을 빼앗긴 모리 옹이 정신을 차려보니 아까 아내가 배웅하던 그 집 앞이다. 여전히 빨래를 널고 있던 아내와 눈이 마주친 모리 옹은 한탄하듯 말한다. '연못이 멀구만'.

이런 식이니 연못까지 가는데 만도 오래 걸릴 수 밖에 없다. 겨우 연못에 도달하면 눈 앞에서 오락가락하는 송사리 몇 마리에 시선을 빼앗겨 한 나절이다. 그게 아니라면 개미는 어떨까? 바닥에 머리를 대고 개미를 바라보기만 하는 게 얼마 동안이었는지. 모리 옹을 기록으로 남기려 찾아온 포토그라퍼에게 모리 옹은 자신의 발견을 전한다. '요즘 알게 된건데 개미는 왼쪽 두번 째 다리부터 움직인다네', 그 모리 옹의 발견을 공감하기 위해 그날 하루 종일 개미와 눈높이를 맞추던 포토그라퍼와 그 제자, 하지만 결국 눈을 비비며 내일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난 30년 세월이라지만, 그 30년의 세월 동안 헤매인 정원이 결코 '좁지 않다'. 그를 찾아온 '외계인'이 자신과 함께 우주로 가자 하지만(?) 당당하게 모리는 자신에게 우주보다는 정원이 넓다며 거절할 이유가 된다. 나무통, 휘어진 나무, 뒤집힌 화분, 그루터기 14군데 자신만의 쉼터를 전전하며 하루를 보내기에 충분히 넓은 정원에서 매일 매일이 새로우니, 그런 자신을 두고 '신선'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평가를 모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아내와 조카와 함께 한 밥상 머리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괴팍하게 펜치까지 동원해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뿌려대며 반찬들을 절단내는 괴팍한 노인네라 치면 하루 종일 개미를 보느라 바닥에 누워있는 모리 옹은 정말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회적 격리 시대라지만, 밖은 꽃이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계절, 하루가 아니, 아침 저녁이 다르게 피어가는 꽃들, 그리고 우리 역시 해마다 피는 꽃이건만 올해도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들에 대해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렇게  보면, 새로 뻗어난 가지에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모리 옹과 우리가 무에 그리 다를까 싶다. 

도대체 어느 만큼 '마이크로'한 시선을 견지하면 개미가 움직일 때 왼쪽 두 번째 다리부터 움직이는 걸 발견할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코로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몇 수 십번 마음 속에 새기는 참을 인자가 아니라, 좁은 마당도 우주보다 넓게 볼 수 있는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바로 그런 모리 옹의 사고 방식이 아닐까. 30년 만에 개미의 왼쪽 두 번째 뒷다리의 움직임을 깨달은 모리 옹다운, 아이처럼 순수한 그의 그림이 영화 속 당대 사람들을 매료시킨다는 건, 우리 역시 마음 속에 그런 '모리 옹'과 같은 지향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감독의 '메시지'일 것이다. 

모리 옹의 정원은 그저 모리 옹의 '출근'처만이 아니다. 94세 당대 최고의 화가조차도 '학교'라 하며 가기 싫어하지만 매일 밤 '등교'해서 그린 그림의 대상일 뿐도 아니다. 주변에 아파트가 생겨 마당에 그늘이 드리워지게 생긴 상황, 찾아온 아파트 건축 업자에게 모리 옹의 아내는 말한다. 이곳은 남편의 전부이기도 하지만, 벌레와 나무와 고양이와 새가 함께 사는 공간이라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그렇게 자연과 함께 하는 공간, 그리고 당대 최고 화가가 30년을 봐도봐도 지키지 않는 '정원'이 아파트로 인해 위기에 빠지자 젊은 예술가들은 모리 옹의 집 앞에 벽보를 붙이며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문패만 붙이면 못질을 제 아무리 철저하게 해도 도난을 당하고야 말 정도로 유명한 모리 옹의 글씨체, 그렇게 유명한 모리 옹이 쓴 글씨로 자신의 간판을 내세우면 장사가 잘 될 것이라 찾아온 여관업자에게 모리 옹은 그가 원하던 여관 이름 대신,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문구를 써주고 자리를 뜬다. 그리고 그렇게 남의 집 간판을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들어 버린 모리 옹 답게, 지난 30년을 당신 손으로 흙을 퍼서 만든 연못을 다시 메꿔달라며 다른 사람도 아닌 아파트 인부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30년을 들여 만든 연못을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들도록 '선택'한 모리 옹 덕분에 정원에 사는 생물들은 다시 햇빛이 비치는 땅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버리는 것 같지만 모두가 같이 살아가는 길. 

영화 속에서 모리 옹은 자신의 조용한 삶을 흐트러 뜨리는 사람들의 방문을 마땅찮아 한다. 하지만 웬걸, 모리 옹의 집에는 하루 종일 드나드는 사람들로 매양 분주하다.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볼일을 보겠다고 찾아온 인부에서 부터, 그의 그림을 얻겠다 찾아온 사람들,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를 사람들까지.

그의 집에 그림자를 드리울 아파트를 짖던 인부들은 반딧불이처럼 헬맷에 불을 밝히고 찾아와 하루 저녁을 거나하게 먹고 마시다 간다. 정원에 드리운 풀과 나무와 벌레처럼, 그렇게 사람들도 모리옹의 집에 머물다 간다. 우리 역시 '코로나 시대', '격리'의 공간에서, 본의 아니게 버려진 것들에 대해 아쉬워 하는 대신, 혹시나 그것들이 '모리 옹'처럼 이 '버려진 시간 속에서 새로이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떨지. 


<모리의 정원> 주인공인 화가 구마가이 모리카즈는 실제로 1932년에 집을 지어 1977년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영화 속 주인공으로 분한 야마자키 츠토무의 권유로 이 작품을 만들게 된 오키타 슈이치 감독은 소박하게 자연 속에서 살며 돌아가실 때까지 작품 활동을 했던 화가의 세계를 '자연을 향해 열린 세계관'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물질 문명'에 젖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삶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전한다.

2018년 상하이, 밴쿠버, 샌디에이고 등 다수의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 후보로 지정되기도 한 <모리의 정원>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키키 키린의 유작이기도 하다. 코로나 시대 그 어떤 작품보다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작품, 하지만 퐁당퐁당 좌석 배치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격리'가 요구되는 시대, 극장에 가서 햇빛이 가득찬 푸르른 정원과 그곳에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리 옹 부부를 꼭 보라 권유하기가 무색한 이 시간이 안타깝다. 


by meditator 2020. 3. 29. 02:40

사회적 격리의 시대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병리적 무기가 되어버린 시대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그 '인간'으로 인해, 그 인간을 숙주로 하는 '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고 죽었다는 사실을 새삼, 재삼 확인하게 되는 시절이다. 그래서 국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경고하고, 나아가 '처벌'의 대상으로까지 삼는다. 이 시대를 견뎌야 하는 짐은 '격리'된 개인에게 고스란히 얹혀진다. 

바로 이 '격리'에 대해 충격적으로 그려낸 대표적인 영화가 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을 영화화한 <눈먼 자들의 도시>이다. 올해 아카데미상 주요 후보에 올랐던 <두 교황>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2008년 만든 이 영화는 마치 2020년의 코로나 사태를 예견이라도 하듯 하루 아침에 온 도시를 덮친 정체모를 백색 실명의 사태를 묵시록적으로 그려낸다. 

 

 

격리, 아니 방치된 사람들
질병은 예고없이 찾아왔다. 어제와 다를 것없이 평범한 날 거리에서 운전을 하던 남자가 갑자기 눈이 멀었다. 다른 맹인들과 달리 눈 앞이 하얗게 변했다. 안과에서도 처음 보는 질병, 하지만 그 남자 한 사람 뿐이 아니었다. 그 남자를 시작으로 그 남자의 차를 훔쳐간 도둑, 그 남자를 치료한 의사 이런 식으로 '백색 실명'은 퍼져 나갔다. 

그리고 듣도보도 못한 질병에 대해 정부는 '환자'들을 '격리'하기로 결정했다. 정부 결정에 따라 격리될 장소로 떠나게 된 의사(마크 러팔로 분), 그 아내(줄이안 무어 분)는 이제 막 눈이 멀어 혼자서는 그 무엇도 해내기 힘든 남편을 돕기 위해 스스로 눈이 멀었음을 자처하고 '격리'된다. 

그러나 말이 격리지, 그건 백색 실명자들을 사회로 부터 '소거'한 것이었다. 덩그러니 허름한 건물, 군인들을 그들을 데리고 가 그곳에 '방치'했다.  깨끗한 물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불결한 환경, 이제 갓 눈이 먼 사람들은 스스로 화장실조차 가기 힘들 정도로 제 한 몸을 돌보기 힘든 상태다. 결국 안그래도 더러운 환경이 복도 곳곳에 사람들이 만들어 낸 오염물 천지가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의사의 아내는 그런 난제들 사이에서 '방치'된 실명자들의 인간다움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써보지만 그럴 수록 '가장 두려운 건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는 대사처럼 상황은 갈수록 극에 치닫는다. 

 

 

'우리의 눈은 내부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원작의 한 문장이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시각의 대한 의존도가 높다. 원작자 주제 사라마구는 바로 그 인간이 가장 의존하는 시각을 상실케 함으로써, '인간'을 묻는다. 즉 가장 인간다운 시각을 상실케 하여,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묻는다. 


인간다움에 대하여 
'우리가 쌓은 담이란 얼마나 허약한 것일까'(원작에서), '집단 격리', 그 상황은 곧 무정부 상태의 아노미를 불러온다. 떼거리로 건물에 갇힌 사람들이 그나마 제한된 조건에서 질서있게 생활하기 위해서는 합의된 룰과 원칙을 합의하고 지켜나가야 하는데 그것조차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먹는 것'의 평화마저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아니 결국 그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부메랑이 되어 '격리'된 사람들의 목을 조른다. 

상황을 더욱 극단으로 몰아가는 건 격리된 그들을 지키는 줄 알았는데 발포를 불사하며 '적대시'하는 군인들이다. 눈이 안보여 대열에서 빠져나온 사람, 썩어가는 발을 참지 못해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 모두 결국 총성의 희생자가 되었다. 어제는 국가의 '시민'이 하루 아침에 발포의 대상이 되는 공포스러운 '역전'은 그 누구라도 위협이 될 시에는 바로 '적'이 될 수 있는, 보호자를 자처해온 '권력'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민낯을 드러내 보인 건 국가라는 시스템만이 아니다. 시스템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부족한 식량을 어떻게 든지 공평하게 나눠가지려 애쓰던 사람들, 그런데 갑자기 3번 방에서 총을 든 한 사람이 그 총을 앞세워 식량을 독점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단지 총 한 자루라는 무력 앞에 무기력해진다. 순순히 가지고 있던 귀금속을 거둬서 바치고, 그것이 떨어지자 '여자'를 '공급'하라는 주문에 자신들이 머무는 방의 여자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보낸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격리된 그 순간부터 사람들이 시력을 되찾을 때까지 그들을 몰아가는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그들을 시험에 들게 만드는 인간다움이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시력을 잃은 사람들은 동시에 '인간다움'마저 잃은 듯 행동한다. 배고픔 앞에서, 겨우 한 자루의 권총 앞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갑자기 눈을 잃은 사람들 중에서 그간 눈이 안보여 왔던 '맹인'은 상대적 우위를 점한다. 영화 속 두 맹인이 등장한다. 그 중 한 명은 그의 보이지 않지만 보일 정도로 능숙해진 맹인의 생활을 총을 든 남자의 권력을 '보좌'하는데 이용한다. 그런 맹인에게 의사의 아내는 '인간'을 묻는다. '조금씩 양보하다보면 결국은 인간이기를 상실하게 되고 마는 존엄'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안다.'(원작에서) 도대체 눈도 안보이고, 정부마저 버리다 시피하여 격리된 사람들에게 '인간다움'을 '인간의 존엄'을 운운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겠다. 하지만,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그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인간 스스로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가를 참혹하게 그려낸다. 복도에 즐비한 배설물, 그걸 밟고 오가는 나신의 사람들, 그 한 구석에서 뒤엉킨 남녀, 그리고 배고픔 앞에서 한없이 비겁해지고 마는 남성들, 심지어 그 총 한 자루의 악이 제거된 상황에서 조차 사람들은 떨쳐 일어서기 보다 '협잡'을 먼저 떠올릴 정도로 '인간'의 경계는 무너진다. 

그리고 외국의 한 슈퍼마켓에서 휴지 한 롤을 가지고 두 여성이 머리끄댕이를 잡고 혈투를 벌였다는 외신은 그 참혹함이 우리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실감케 한다. 반면 비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환자들로 인해 전 사회가 '멘붕'에 빠졌지만, 마스크 한 장을 위해 몇 시간을 참으며 길게 줄을 늘어선 사람들, 부족한 병원 시스템에 자가격리를 하며 인내하는 대구 시민들, 희생과 봉사의 대명사가 된 의료진들, 그들을 보면 그래도 아직 우리 사회 인간 존엄의 경계는 건재하다는 '감사'를 역설적으로 느끼게 된다.

길고 지리한 사회적 격리에 지친 즈음, <눈먼 자들의 도시>는 경계가 풀려버린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게 만들어 준다. 드디어 모두가 시력을 되찾은 후, 그때서야 하늘을 바라본 주인공인 의사의 아내는 자신에게 묻는다. '계속 살고 싶은 이유가 있는지', 그리고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답은 필요하다고 해서 꼭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유일한 답은 답을 기다려 보는 것일 경우가 많다' 고 소설은 답한다. 코로나 시대를 견뎌가야 하는 우리 삶의 답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의사의 아내가 참을 수 없는 상황을 그럼에도 견뎌내며 자신과 남편, 그리고 주변의 삶을 인도했듯이, 눈밝은 그녀처럼 '존엄'의 정신을 놓치지 않고 서로 격려하며 이 시대를 건널 밖에. 

 

by meditator 2020. 3. 24. 16:25

코로나의 시대이다. 처음에는 그저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남의 나라에서 벌어진 사태를 관망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 도시에서 시작된 아니 정확하게는 한 종교 단체에서 벌인 '안이한 대처'로 인해 우리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신천지'라는 이름조차도 생소한 종교가 이토록 우리 곁에 가까이 그리고 심각할 정도로 깊게 다가와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21만이니 24만이니 하더니 이젠 31만까지 정부와 신도수를 실랑이를 벌이는 상황.아니 사실은 그 조차도 정확한 숫자가 아닐 수 있다는 추측이 나도는 가운데 이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단적으로 교주가 죽지않고 영생을 누린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당연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를 두고 벌어지는 가족 간의 갈등도 심심치 않게 전해진다. 그럴 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세간의 속설과 달리, 믿는 부모가 믿지않는 자식을 보지 않겠다고 한다는 '난센스'같은 이야기도 들린다. 내 가족보다 소중한 '종교',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맹목적'인 믿음으로 이끈 것일까. 

 

 

그런데 최근 압도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신천지만이 아니라, 세월호 때 구원파 등 시대에 따라서 다른 얼굴로 나타나는 이단의 교리와 맹목적인 믿음들이 우리 사회를 전염병처럼 한바탕씩 휩쓸고 간다. 그 믿음의 시작은 무엇일까? 종교와 인간 관계에 대한 매우 신랄하고도 직설적인,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의 <사이비(2013)>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 이 작품은 2019년 ocn을 통해 16부작의 드라마로 재탄생되었다)

영화 속 등장하는 종교는 정말 '사이비'다. 수몰 예정 지역인 마을, 그곳에 나타난 자칭 장로, 그러나 사실은 사기 전과자 최경석은 젊은 목사 성철우를 앞세워 개척 교회를 연다. 보상금을 챙겼어도 지금까지 살아오던 공동체가 해체될 것이라는 '사실' 앞에 흔들리는 주민 들에게 마을이 물에 잠기는 것이 '마귀의 계략'이라며 우리만의 '기도원'을 만들자며 마을 주민들을 현혹시킨다. 당연히 그가 노리는 건 마을 주민들이 받은 '보상금', 기도원 설립 자금에서 부터, 폐병도 고치는 생명수, 천국가는 티켓까지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마을 주민들의 주머니를 턴다. 

그런데, 오랜만에 마을에 돌아온 김민철의 눈에도 대번에 띈 그런 뻔한 사기 수법임에도 마을 사람들은 최경석의 '수법'에 빠져든다. 영화 <사이비>는 '사기'임에도 '사이비'에 하염없이 사람들이 빠져드는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마을에서 가장 '신실한 부부 '칠성이네', 칠성의 처는 폐병 진단을 받아 자리 보전하고 누워있던 처지, 남편 칠성이 밖으로 도는 동안에도 마을의 구멍 가게를 지키며 늙고 병들어 가던 아내, 뒤늦게 철들어 그 아내에게 미안했던 칠성. 그런 아내가 교회를 나가고 부터 웃는다. 심지어 교회에서 주는 '생명수'를 마시고 나니 폐병도 다 나은 듯이 다닌다. 칠성은 그냥 그것만으로도 교회가, 하느님이 좋았다. 아내가 천당갈 티켓을 놓친다며 그를 닥달하자 미적거리던 보상금을 기꺼이 내놓겠다고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사이비'
이런 식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약한 부분에 마치 '바이러스'처럼 '종교'란 이름으로 '사이비'는 기생한다. 공동체가 해체될 위기의 마을 사람들의 불안함, 병으로 인한 두려움 등등. 

더구나 안타까운 건 이 '약한 부분'이 대부분 당하는 개인에게 있어 불가항력적인 지점이라는 것이다. 폭군과도 같은 민철의 행동에 영선모는 말끝마다 '하느님 아버지'를 찾는다. 폭력적인 가장 아래서 그녀가 도망칠 곳은 그곳 밖에 없다. 

특히나 영선이 종교에 빠져드는 장면을 주목할 만하다. 김민철이 최장로를 찾아 개척 교회의 예배에 들이닥친 날, 그곳에 영선과 영선모가 있었다. 공장을 다니며 어렵게 모은 돈에, 보상금까지, 이제 그 돈으로 대학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영선, 하지만 바라던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무색하게 아버지는 그 통장을 들고 날랐다.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좌절한 영선을 칠성 처는 교회로 이끈다. 

그런데 바로 그 교회에 아버지 김민철이 나타나 최장로가 사기꾼이라며 깽판을 친다. 아버지를 말리던 영선은 아버지에게 맞고, 동네 사람들 모두 서슬퍼런 아버지 민철의 기세 주눅들어 누구 하나 말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성철우 목사가 아버지를 말린다. 차라리 자신을 치라며. 

살면서 그 누구하나 자신과 어머니에게 쏟아지는 아버지의 폭력에 대해 막아주기는 커녕 말려주지도 않았는데 목사님이 처음으로 자기를 때리는 아버지를 말린다. 심지어 대신 맞는다. 그런 상황만으로도 영선의 마음은 이미 교회에 기운다. 그런데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영선을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간 최장로는 영선에게 돈을 대줄테니 대학을 가라고 한다. 그러면서 영선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한다. 아버지에게는 폭력을, 어머니에게선 포기만을 강요당했던 영선이 처음으로 들은 그 말에 눈이 빛난다. 

그리고 그런 영선의 빛나던 눈빛은 영선을 맹목적인 믿음으로 이끈다. 최경석이 돈을 받고 팔아넘긴 술집에서 영선은 조금만 버티면 대학을 갈 수 있겠다는 믿음으로,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온기'로  버틴다. 아버지가 찾아와 영선을 구해주는 데도 외려 영선은 버틴다. 놔두라고. 심지어 아버지가 데리고 가는 택시에서 뛰어내린다.

그런가 하면 지능이 약간 떨어지는 성호 역시 아픈 할머니로 인해 종교적 사이비에 빠져든다. 목사님이 기도만 해주시면 나을 줄 알았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일반적이라면 당연히 실망을 해야 했을 상황에, 자신이 모자라서 할머니가 천당에 못가실 지도 모른다는 목사의 감언이설에 어수룩한 성호는 목사의 하수인이 되어 칼을 휘두른다. 오로지 믿고 의지해 왔던 할머니, 그를 대신하는 목사를 위해 그의 맹목적인 신념은 그를 범죄의 늪으로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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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 앞에서도 맹목적인 믿음 
'사기극'이었던 '반석 꽃동산'은 당연히 파국으로 끝난다. 폐병이 나을 거 같았던 칠성네는 목숨을 거두고, 성호의 할머니도 돌아가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죽은 아내의 얼굴이 편하다고, 할머니가 천당에 가셔야 한다고 자신들의 믿음을 거두지 않는다. 오히려, 영선의 경우, 그녀를 파멸로 몰아넣는건 아버지다. 자신이 최경석의 농간으로 술집에서 일하는 처지임에도 종교적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던 그녀는 아버지가 깨뜨린 그 믿음의 현실에 세상을 놓아버린다. '아편'과도 같던 '환타지'에서 깨어난 세상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화 <사이비>는  해체된 공동체에서 뿔뿔이 흩어져 나온 개인들,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희생자들을 그럴 듯한 감언이설을 통해 스스로 '사이비'의 늪에 빠져드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영화 속 '사이비'는 사기꾼에서 부터 비롯되었으니 '사기'임이 명확하다. 하지만, 정작 영화 속 그 '사기'를 통해 '종교적 맹목성'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모습은 '리얼'이다. 국가와 사회라는 시스템에서 방기된 사람들에게, 공동체라는 기반에서 떨궈져 나온 사람들에게 손을 내민 그 누군가는 '구제주'가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설사 '사기'라도. 그래서 칠성 처의 병색어린 웃음이, 삶의 마지막 동앗줄이라도 되는 듯 하느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영선이의 절규가 처연하다. '사이비'라도 그것에서라도 '위로'를 받아야 하는 그 막다른 삶의 막막함에 먹먹해진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존재, 사람 인이라는 한자의 유래가 서로 기대어 사는 모습이라는 어원으로 비롯된 '공동체'적 습성을 종적 특성으로 가진 인류에게 종교는 인류의 역사만큼 유구한 '위로와 구원의 장치'이다. 그리고 그런 인류의 특성은 늘 '사이비'라는 종교의 갓길을 배태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을 마련한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사이비'는 존재해 왔다. 자본주의 사회 이후 고립되고 원자화된 개인에게 '사이비'는 더더욱 달콤한 금단의 열매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경우 급격한 산업화, 근대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만큼 급격하게 붕괴되어가는 사회, 가정이라는 시스템에서 방출되어져 나온 개인들이 그들을 현혹시키는 '하느님'의, 혹은 그를 빙자한 그 누군가의 '복음'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여전히 집단주의적 문화가 잔존해 있는 우리 사회에서 대규모 사이비 단체의 등장은 어찌보면 필연적이다. 

차라리 영화 <사이비>에서 처럼 대놓고 '사기'라면 손가락질하기도 쉽다. 그러나, 그럴 듯한 종교적 외피를 지니고  몇 십만의 영향력을 지닌 집단이 되어버린 사이비 종교는 '영생'을 외치고, '장풍'을 쏘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혹세무민'의 민낯은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재산이 털리고, 내 가족과의 연을 끊어도 믿음은 버리지 않는, 하느님의 가호로 병까지 무시할 수 있는 지경이 되어버려 사회적 문제가 될 때서야 우리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마치 전염병처럼 한바탕 우리 사회를 휩쓸어버린 그 사이비는 또 다른 '사이비'에게 바톤을 넘긴 채 무대 뒤로 조금 물러선다. 교주의 영생을 믿듯 민낯이 드러난 상황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누군가가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by meditator 2020. 2. 28. 04:07

영화가 끝나면 전쟁의 경험담을 들려준 알프레드 H 멘더스에게 바치는 헌사의 자막이 올라간다. 바로 <1917>의 감독 샘 맨더스의 할아버지이다. 어린 시절 샘 맨더스가 본 할아버지는 몇 분에 한 번씩 손을 씻는 강박증을 가지고 계셨다고 한다. 왜 그러실까 의아해 하는 샘에게, 아버지는 전쟁 중 피가 스민 참호의 진흙이 닿았던 그 기억을 평생 씻어내지 못해 그러시는 거라고 전해준다. 19세의 이제 막 성년의 문턱에 들어선 청년이 늙어 할아버지가 되도록 평생 씻어내지 못한 '참호의 피묻은흙'으로 상징된 전쟁의 기억은 무엇이었을까?

손자 샘 맨더스는 <1917>를 통해 인간이 일으키고 인간이 희생자가 되어버린 '전쟁의 참상'을 단 8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의 경계 안에서 그 어떤 장대한 서사 못지 않게  풀어낸다. 비록 아카데미에서는 <기생충>에 밀려 촬영상과 시각효과상, 음향 믹싱상만을 받았지만 77회 골든 글로부 작품상, 감독상, 전미 비평가 협회 올해의 영화 top10, 73회 영국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등 7개 부문 수상, 31회 미국 프로듀서 조합상(PGA) 작품상 수상, , 제 72회 미국 감독 조합상(DGA) 감독상 수상을 받은 이유이다. 


 

시신으로 가득찬 전쟁터 
샘 맨더스 감독이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전쟁담에 크리스티 윌슨 케인즈가 살을 붙여 스코필드와 블레이크 두 병사의  '미션 임파서블'이 탄생한다. 그 시작은 나른하게 기대어 졸던 블레이크를 호출한 에린 무어 장군의 명령이다. 

세계 제 1차 대전은 전차, 전투 비행기, 심지어 염소 가스 등의 현대식 무기를 통해  대량의 인명 살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세계 대전이다.  '인명을 살상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효과적으로 발전한, 그러나 인명 손실을 최소화하기엔 미흡했던 과학 기술'(존 키건, 1차 대전사)은 NYT와 인터뷰한 샘 맨더스 감독의 말처럼 '기관총으로 1000야드(914M)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불과 20야드(18.288M)에 떨어진 군인과는 교신할 수 없었던 '아이러니한 기술적 진보의 상황을 배경으로 발발한다. 

그런 상황에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퇴각하는 적군이 그나마 존재하던 통신망을 끊어버렸다면? 적군은 퇴각했고 그 적군을 쫓은 아군의 부대는 이를 틈타 대규모 공습으로 적군의 섬멸을 노리지만, 그 퇴각이 '작전상' 의도된 퇴각이라면? 그런데 그걸 알릴 방법이 없다. 그 상황에 에린 무어 장군은 '지도를 잘 보고, 동시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적진을 돌파할 의지'를 가진 병사로 블레이크(딘 찰스 채프먼 분)를 선택한다. 장군의 비밀 메시지를 단 8시간 내에 2대대에 전달하지 않으면, 외려 독일군의 공습에 꼼짝없이 대대 전원이 '몰살'될 수도 있는 상황, 형이 그곳에 있는 블레이크는 당장 장군의 메시지를 들고 달린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블레이크의 동료라는 이유만으로 같이 차출된 스코필드(조지 맥케이 분)도 함께.

단 한 장면에서도 OST를 넣지 않음으로써 2차 대전 고립된 전장의 실감을 드러낸 <덩케르크>와 달리, 장중한 토마스 뉴먼의 오케스트라 OST와 음향이 독일군이 떠났다지만 그 정보의 진위조차 의심스러운 상황, 어디서 적의 총알이 날라올 지 모르는 '무지' 혹은 '미지'의 여건 속에서도 그저 목적지를 향해 달려야 하는 두 병사의 상황을 '스릴러' 혹은 '공포물' 못지 않은 긴박감으로 몰아넣는다. 또한 모든 씬을 따로 찍었지만 편집하여 하나의 여정으로 보이도록 하는 '원 컨티뉴어스 컷(one continuous shot )이란 기술적 도전이 단 하루 8시간 안에 목적지인 2대대에 도착해야 하는 시간적 제약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그런데 이런 '기술'적 '음향'적 성취를 통해 불가능한 작전의 실행에 내몰려진 두 병사의 여정을 통해 <1917>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바로 '전쟁' 그 자체이다. 

북해에서 부터 스위스까지 이어졌다던 1차 세계 대전의 상징인 '참호'로 시작된 영화는 블레이크처럼 신부가 되고 싶었지만 끼니 걱정은 없겠어서, 혹은 '국가의 부름'에 독려되어 '자원'한 병사들로 넘쳐났다. 1차 대전 당시 민족주의 등의 영향으로 자원군 열풍이 불었다. 심지어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린치를 당하기도 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젊은 청년들이라면 당연히 군대에 자원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렇게 자원한 병사들로 끊임없이 조달된 전장은 우리 영화 <고지전>에서 처럼 한 치의 땅을 빼앗기 위한 연합군과 독일군의 공방으로 이어졌고, '매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의 말처럼 마지막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만 같은 길고 지리한 교전과 상대측의 참호를 빼앗기 위한 일전일퇴가 지속됐다.

<덩케르크>가 마치 내가 전장의 군인이 되어 싸우는 듯한 '체감'을 통해 전쟁의 무시무시함을 알렸다면, <1917>은 제한 시간 내에 장군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고 달리는 두 병사들이 택한 길 위에서 만난 무수한 시신들과 전쟁의 상흔을 통해 이 전쟁이 얼마나 많은 '목숨'을 마구 '희생'하고 있는가, 많은 것을 파괴하고 있는가를 드러내 보인다. 한때는 싱그러웠을 그들이 철망에 걸리어, 길 곳곳에서 발에 치일 정도로 널브러져, 퉁퉁 불어 물에 둥둥 떠다니며 그곳이 '젊은 목숨'을 제물로 삼는 전쟁터임을 드러내 보인다.  아직도 어머니 농장의 체리를 기억하는 블레이크와 달리, 돌아갈 것조차 두려워하는 스코필드가 공을 세워 받은 훈장을 '엿바꿔' 먹은 듯한 태도에서 전장에서 세운 '공'의 허상을 엿보게 한다. 굳이 대사로 구사하지 않아도 '전쟁'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문명이 그 구성원인 인간을 '대의'라는 이름 하에  어떻게 '낭비'하고 '소모'하고 있는 가를 영화는 런닝 타임 내내 진득하게 화면 가득히 채운다. 


 

병사는 누구를 위하여 달리나
그 발에 채이는 시신들, 비록 퇴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부비 트랩, 혹은 함께 퇴각하지못한 패잔병들의 총구, 그리고 지도조차도 무력해져 버린 상황에서 막연한 도착지, 그곳을 병사들은, 그리고 병사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뛴다. 

왜? 시작은 명령이었고, 그 명령의 당위는 내 피붙이와 그 피붙이같은 1600 명(공교롭게도 1차 대전 전사자를 연상케 하는) 대대원들의 목숨이다. 그들이 이 길에 나뒹구는 시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병사들은 달린다. 보급품이나 받을 줄 알고, 동료가 불러서 아무 생각없이 시작된 행보는 목숨을 던진 고행길의 '영웅담'이 되어간다. 

하지만 <1917>은 그들의 헌신을 전쟁하면 빠질 수 없는 '영웅담' 대신 '휴머니즘'이라는 갈래로 끌어들인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 하는 행위의 그 '본원'을 짚는 것이다. 막연한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라는 추상적 명제 대신, 내 혈육, 그리고 그 혈육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손에 잡힐 듯한 구체적인 이유로 구현된다. 그리고 이는 절박하게 내달렸으나 완수하지 못한  동료의 '의지'마저 사명감으로 부여안으며 절박함에 박차를 가한다.

전쟁터의 '휴머니즘'이란 결국 죽지 않는 것이다. 병사들을 죽지 않도록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내 혈육'이, '우리 병사'들이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장군은 퇴각을 명령했고, 중령은 공습을 감행하고자 했고, 병사는 목숨을 던져 달려 내 혈육의, 동료 병사들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그 전쟁은 1600만 명 젊은이들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고서야 끝났다. 



by meditator 2020. 2. 23. 14:57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감독작 <내가 사는 피부(2011)>,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 <그녀에게(2002)>, <나쁜 교육(2004)>에서 부터 제작한 <클랜(2015)> 등에 이르기 까지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다양한 주제 의식을 독보적인 '컬트'적 방식을 통해 구현해 온 세계적인 감독이다. 늘 그의 작품은 그 해의 대표적인 화제작이 되었고 새로운 화두를 제시해 왔었다.

그러나 시간은 이 세계적인 명감독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나이가 들었고, 병마가 그를 찾아왔다. 2019년작 <페인 앤 글로리>는 바로 그 자신을 덮친 세월의 무게를 감독이 어떻게 극복해냈는가에 대한 '자전적인 고백록'이다. 

'한 손에 막대잡고 또 한 손에 가시 들고 오는 백발을 막으려니 세월이 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세월을 이겨낼 수 없음을 단호하게 그려낸 이 한시, 그런데 세월은 그저 백발만을 얹어 오는게 아니다. 머리만 하얗게 세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쇄락을 함께 한다. 세계적인 감독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페인 앤 글로리>는 극중 주인공인 감독 살바도르 말로가 얼마나 육신의 고통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의학적 설명으로 장황하게 서막을 연다. 

 

 

'영화를 못찍는다면 내 인생은 의미가 없어'
살바도르에게 세월의 무게를 얹은 육체적 고통은 그를 그로써 존재하게 하는 일 '영화 감독'이라는 직업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아니 그렇다고 감독은 생각했다. 육체적 강행군으로 이어지는 촬영장, 거기서 앉아있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된 감독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자포자기한 채 스스로를, 시간을 좀먹어가던 그에게 그의 영화가 손짓을 해왔다. 과거 그가 만들었던 작품이 리마스터링되어 재상영되며 그와 주연배우였던 알베르토를 초대한 것. 자신의 디렉팅대로 연기를 하지 않았다 하여 시사회에도 초대하지 않았던 알베르토, 살바도르는 재상영회를 위해 본의 아니게 그와의 '화해'를 청하러 간다. 

자신의 디렉팅대로 하지 않았다하여 주연 배우를 부르지도 않았을 정도로 괴팍했던, 아니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영화관에 철저했던 감독은 이제 그를 찾아온 '병'으로 인해 시간과 타협한다. 그리고 그 타협은 그저 주연 배우였던 알베르토와의 인간적 화해를 넘어 그가 오래도록 넘지 않았던 '선'을 넘도록 만든다.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으로는 두통과 불면에 이겨내지 못했던 그는 알베르토가 하던 헤로인에 취하게 된다. 

또한 약물로 인해 물러진 경계는  그로 하여금 저만치 밀쳐두었던 자신의 과거와 조우하게 된다. 가난했던 지지리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그리고 알베르토가 그의 컴퓨터 속 작품으로 환기시킨 그의 사랑, 그가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스멀스멀 연기처럼 그를 감싸고 돈다. 

 

 

무엇이 나를 만들었나? 
그곳에는 4년전 돌아가신, 그토록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셨으나 결국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신 어머니의 젊은 시절이 있다. 어린 그를 데리고 아버지에게 달려간 젊은 어머니는 동굴같은 집에 좌절하는 것도 잠시 그 집을 남편과 아들과 함께 살아갈 그럴 듯한 '스위트 홈'으로 만들어 보려 애쓰셨다. 그리고 거기엔 또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벌써 글을 떼서 동네 청년에게 글을 가르쳐 줄 정도로 똑똑했던 어린 날의 살바도르를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로 보내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던 악착같던 모성이 있었다. 

돈이 없어 학교를 보낼 수 없자 학비가 면제되는 신학교에라도 보내려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신부가 되기 싫다며 뛰쳐나가던 어린 살바도르, 그러나 결국 신학교에 간 아이는 뛰어난 미성으로 학교 공부 대신 성가대의 솔로로 몇 년을 보냈다. 

영화는 살바도르가 취한 환각을 통해 단편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 올리며 감독의 지난 날을 편집해 간다. 늙고 병든 현재와는 전혀 달랐던 그 동굴같은 집을 밝히던 햇빛같던 어린 살바도르의 시간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가 환각에 취한 사이 그의 컴퓨터에서 알베르토가 발견한 그의 원고 '중독'을 통해 그의 또 다른 시절, 젊은 날의 사랑이 소환된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랑해서 놓아줄 수 밖에 없었던 동성의 연인, 그 사랑의 방해물은 바로 지금 늙은 감독이 천착해 있는 바로 약물, 헤로인이다. 그 약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젊은 연인을 위해 여행도 해보았지만 결국 그를 약물이 없는 곳으로 보내줄 수 밖에 없었던 젊은 날의 살바도르. 그런데 그는 그렇게 젊은 연인이 약물에 탐닉하는 그 시간, 단 한번도 그에 대한 유혹을 느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온전히 영화에 심취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만든 영화가 그를 오랜 시간이 흘러도 관객들이 잊지않는 명감독으로 만들었다. 

죽음의 체취를 맡으며 길어낸 삶 
태국 사람들은 '카핀 의식'을 통해 '간접적 임사 체험'을 한다. 하룻밤동안 관속에 들어가 죽음을 경험해 보는 것이다. 태국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에 '관속에 미리 들어가 보기, 유서 작성하기, 장례식 미리 체험해 보기'등을 통해 죽음에 대한 대비를 해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런데 태국의 카핀 의식을 하면 사람들을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외려 그 과정을 통해 병이 낫거나, 묵은 업보가 해소되어 희망차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고 한다. 죽음을 대비한다는 것은 결국 아직 남은 삶에 대한 '화두'를 끌어안는 것이다. 

첫 장면 물 속에서 죽은 사람처럼 시작된 <페인 앤 글로리>는 결국 알모도바르식의 '임사 체험'이다.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감독, 살아있어도 살아있음을 절감할 수 없었던 감독은 그가 한번도 미혹되지 않았던 약물에 까지 손을 대며 삶의 나락으로 자신을 끌어내린다. 그리고 마치 관에서의 하룻밤처럼 죽음과도 같은 약물의 나락에서 그는 가장 '사적인' 역사들을 마주한다. 그를 살아오게 만들었던 어머니, 연인, 그들은 이제 그의 곁에 없지만,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그에게 생생한 '이야기'로 남겨져 있다.

늙고 병들고 지친 육신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는 과거의 이야기들이 샘솟는다. 어떻게든 아들을 교육시키려 했던 어머니의 악다구니, 자신에게 존경을 바치며 자신을 한 편의 명작으로 남겨준 채 청년, 그리고 중독같은 사랑 속에서도 불태웠던 영화에 대한 열정 등등, 그 모든 것들이 그저 한 개인의 죽음으로 덮어버리기에는 아쉬운 찬란했던 시절들이다. 

바로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이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에게 헌사로 바쳤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그 명언을 역설적으로 알모바도르 감독은 죽음의 체취 곁에서 마주한다. 그리고 비로소 그를 살아있게 만드는 찬란한 과거가 존재함을, 그래서 그가 살아있음을 그는 비로소 수긍한다. 그리고 그 '수긍'이 병마에 짖눌렸던 그를 일으킨다.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 사적인 끄적거림이 알베르토의 연기를 덧입힌 1인극으로 되살아 나듯, 병과 마주할 용기를 얻은 그는 촬영장으로 돌아온다. 그런 알모바도르의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는 또 다른 삶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우리에게 위로를 전한다. 

by meditator 2020. 2. 14. 17:26

'히어로들이 할 수 없는 특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된 범죄자들의 특공대'라 이보다 더 매력적인 영화적 소재가 있을까. 거기에 명불허전 윌 스미스에, 조커 역의 자레드 레토, 그리고 할리 퀸의 마고 로비  등 출연진의 나열만으로도 이 영화는 이미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영화라 보여졌다. 그런데, 막상 개봉 후 매우 영화적인 소재와 스타급 출연진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혹평이 이어졌다. 결국 제 아무리 좋은 소재와 출연진을 데려다 놓아도 그것을 '영화적'으로 잘 꿰어내지 못한다면 망할 수 밖에 없다는 DC의 한계를 드러낸 또 한 편의 영화가 되었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은 이구동성 강렬했던 '할리퀸'에 대한 인상을 피력했다. 정신과 의사였던 여성이 조커라는 인물을 만난 조커 못지 않은 '이 동네 미친 년'으로 거듭나 감옥에서든 죽음이 코 앞에 다가온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당당한 '미친' 포스를 굽히지 않는 모습은 마고 로비의 연기와 함께 존재감을 한껏 드러냈기 때문이다. 

동시에 <수어사이드 스쿼드>라는 영화적으로 실패한 데는 바로 이 할리퀸이라는 캐릭터를 잘못해석했다는 점이 컸다.  경찰이건 또 다른 범죄자건 그 누구 앞에서도 이토록 당당한 '이 동네 미친 년'이 조커라는 한 남자에 그토록 절대적인 순애보를 바치는 순정녀라니! (심지어 그녀가 순정을 바치는 조커가 그 순정을 바칠 만큼 '매력적'인지도 의문스러웠다)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수용한 독립적인 할리퀸의 캐릭터의 자기 부정과도 같은 설정은 결국 서사의 개연성을 갉아먹었고 영화 자체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할리퀸, 사랑에서 해방되다 
그래서일까? 2월 5일 개봉한 <버즈 오브 플레이(할리퀸의 황홀한 해방)>은 바로 이 전작의 '딜레마'를 극복한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조커'에 대한 순정녀라는 할리퀸을 얽어매었던 딜레마를 '실연'이라는 인간사 관계의 결말로 자연스레 할리퀸을 풀어준다. 안 그래도 '이 동네 미친 년'인 할리퀸은 실연의 상처를 한껏 드러내며 더욱 미친년스러운 행태를 보이며 황홀한, 아니 지옥같은 해방의 서막을 연다. 

그런데 할리 퀸이 누구인가? 조커를 흠모하여 그와 같이 되기 위해 스스로 화학 공장 용광로같은 화약품 저장시설에 뛰어든 여성 아닌가. 그렇게 사랑도 제 정신이 아니게 시작했듯이 사랑의 마침표 역시 할리퀸스럽게 그 사랑을 시작했던 추억의 장소를 화끈하게 절단내면서 마무리한다. 

하지만 그 마침표는 동시에  조커의 연인이었던 할리퀸에 대한 방패막이 사라짐을 뜻했다. 지금까지 조커때문에 할리퀸의 만행을 참아주었던 그 동네 양아치들과 그녀로 인해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다같이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그렇게 할리퀸은 '사랑'으로 그녀를 한정짓고 보호하던 그 방패막으로부터 스스로 튀어나오면서 사랑을 주체적으로 극복해가게 된다. 

말이 주체적이지 결국 조커의 방패막이 사라진 할리퀸, '동네에서 제일 거추장스러운 년'이 되어버린 할리퀸은 동네 클럽 대표이자 나름 동네 짱을 먹으려는 로만 시오니스(이완 맥그리거 분)의 타깃이 되고 그 위기를 한때 정신과 의사 좀 했던 예의 기지로 '딜'을 하며 돌파한다.

 

 

그녀들 '연대'하다
로만과의 '딜'을 해결하기 위해 홀홀단신 경찰서로 들이닥친 할리퀸에서 부터 사랑에서 헤어나 본래의 매력을 되찾은 할리퀸의 활약이 시작된다. 그리고 '딜'의 대상인 카산드라(엘라 제이 바스코 분)와의 조우, 그러면서 '연대'의 싹이 튼다. 

할리퀸과 그녀들, 몬토야 형사(로지 페레즈 분), 블랙 카나리(저니 스몰렛 분), 헌트리스(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분)는 그렇게 그들의 공적인 로만과 그가 찾는 아직 미성년인 카산드라라는 공통 분모를 통해 만나진다. 

할리퀸, 그리고 할리퀸을 쫓던 형사, 로만이 운영하던 클럽의 전속 가수였다 숨겨진 재능으로 인해 로만의 전속 운전기사가 되어 할리퀸을 쫓게 된 블랙 카나리, 거기에 온 가문이 몰살당한 마피아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 헌트리스, 서로 엇갈린 이해 관계를 가진 생면부지의 이들이 아직 미성년인 카산드라를 보호하기 위해 즉각적인 제휴를 하고 그 '제휴'가 로만 일당에 대항한 '연대'로 성장해 가며 '실연'의 아픔은 한층 성숙한 여성들의 '동지애'를 낳는다. 

버즈 오브 플레이(birds of prey)는 육식을 하는 맹금류의 새를 뜻하고, 영화 속 남성들을 상대로 거침없이 싸우는 할리퀸과 그녀들을 상징하는 문구이다. 그런데 이 버즈 오브 플레이는 이번 영화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02년부터 2003년까지 tv드라마로 wb채널을 통해 13회에 걸쳐 방영된 바 있다. 

dc코믹스의 배트맨 스핀 오프 시리즈로 시작된 <버즈 오프 프레이>는 고든 총경의 딸이자 캣우먼이었던 바바라 고든이 조커의 총탄에 하반신 마비가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액션 대신 지적인 리더로 거듭난 바바라를 중심으로 원작에서는 배트맨과 캣우먼의 딸이었던 헌트리스가 마피아의 딸로 캐릭터 수정되며 드라마화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할리퀸이 빌런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조기종영 비슷하게 13부작으로 마무리되었던 드라마는  이제 <수어사이드 스쿠드>에서 홀로 살아남아 단독 시리즈로 돌아온 할리퀸의 '동지'들로 거듭났다. 원작의 바바라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든 공을 남성 동료들에게 빼앗긴 채 만년 형사를 전전하는 몬토야 형사로, 목소리 하나 만으로 사람들을 기절시킬 수도 있는 절대적 고성의 소유자 블랙 카나리는 로만의 기세 아래 전전긍긍하는 클럽 가수로, 그리고 가족들을 모두 잃은 채 홀로 살아남아 복수를 꿈꾸는 헌트리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들은 카산드라라는 어린 소녀를 구하는 과정에서 저마다의 한계를 돌파한다. 동네 그저 미친 년이던 할리퀸도, 무능하다 치부되던 여형사도, 로만의 똘마닝였던 블랙 카나리도, 복수 이후의 감정 조절 장애를 겪던 헌트리스도 함께 힘을 합쳐 싸우는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확신과 여성 동지들에 대한 연대에 대한 믿음과 쾌감을 얻는다. 각자 저 마다 이제는 이 동네 자타공인  '난' 년들이 되겠다고 선언한 그녀들의 서막, 그것이 바로 <버즈 오브 프레이>이다. 

<버즈 오브 프레이>는 <저스티스 리그>의 여성판과도 같다.  아니 그보다는 영화의 마지막 여전히 그녀의 공을 가로챈 경찰을 기꺼이 때려치고 나온 후 버즈 오프 프레이를 결성한 몬타나 형사와 블랙 카나리, 헌트리스 의 조합을 보면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페미니즘 판이 더 어울릴까. 영화는  할리 퀸을 비롯하여 몬타나 형사, 블랙 카나리, 헌트리스 까지 등장 캐릭터들의 일관성을 수미일관하게 유지했다는 점에서 <버즈 오브 플레이>는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전절을 극복한 듯 보인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한때 정신과 의사까지 했던 할리 퀸의 캐릭터을 지나치게 동네 '미친 년'의 단선적인 캐릭터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드라마 <버즈 오브 프레이>에서는 헌트리스와 할리퀸은 마피아에게 온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환자와 의사로 만나게 된다. 드라마 속 빌런인 할리퀸과 그녀를 마주해 싸우게 되는 헌트리스라는 복잡 미묘한 캐릭터의 관계는 영화 속에서 그저 복수 후 분노 조절 장애를 보이는 헌트리스에 대한 할리 퀸은 지나가는 듯한 충고 한 마디로 퉁친다. 충분히 <어벤져스> 급의 깊이를 가질 수 있는 캐릭터들을 지나치게 오락 영화 속 단선적 캐릭터로 해석한 점들이 아쉽다.

이런 지적은 빌런으로 등장한 로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할리퀸 못지 않은 이 동네 미친 놈으로 등장한 로만은 그의 잔혹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이완 맥그리거의 존재가 아깝다 싶을 만큼 단순한 악역에 불과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하수인으로 등장하여 할리퀸을 비롯하여 버즈 오브 프레이들을 뒤쫓는 동네 양야치들은 그녀들의 타격 한 방에 나가 떨어지는 쾌감을 선사할 지언정, 제대로 된 '적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뚜드려 패고 나가 떨어지는 남성들만으로 '페미니즘' 영화의 쾌감을 완성할 수는 없다. 여성들의 진가를 드러내기 위한 좀 더 제대로된 악역의 구성, 이것 역시 남겨진 과제이다. 





by meditator 2020. 2. 7. 17:41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 <킹스맨>에서 이 말을 마친 해리는 음식점의 문을 잠근 후 자신들에게 무례했던 불량배들에게 혹독하게 다룬다. 물론 시작은 해리와 그 일행이 어떤 사람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대들었던 불량배들이었지만, 그들의 도발에 비해 열 배 혹은 백 배의 대가를 치르는 결과를 낳았다. 딱 떨어지는 정장, 그 정장에 걸맞는 폼나는 무기들, 그리고 그와 어우러지는 '우아한' 말투와 에티튜드, 그러면서 화룡점정으로 등장하는 '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혹시나 그런 의문들 드는 관객들은 없었는지, 그 '매너'라는게 막상 실전에 들어서면 참 '매너스럽지' 않은 처참하고도 잔인한 폭력을 수반하게 된다고. 

뭐 꼭 <킹스맨> 뿐인가. <007>의 여러 시리즈도 그렇고 주인공인 스파이는 멋들어진 옷 맵시에, 그 보다 더 매력적인 에티듀드를 자랑하며 등장하지만 막상 그가 '스파이'로서의 임무를 다할 때는 '매너' 무소용에, '자비'없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기에, 당연히 그가 '처단'의 대상은 언제나 '복수'를 각오하고 다음 시리즈를 기약하게 되는 것이다, 이 중단없는 폭력의 악순환은 시리즈를 거듭하며 더욱 폭력적인 악인의 등장으로 증폭되고 그에 대한 '정의'의 실현 역시 가차없어진다. 폭력과, 정의라는 이름의 폭력, 이 '순환'을 우리는 스파이물로서 소비하지만 그 '근원'은 회의적이다. 그런데, 이 '회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스파이물'이 등장했다.

 

 

폭력적이지 않은 스파이물?
바로 1월 22일 개봉한 <스파이 지니어스> 이다. 윌 스미스와 톰 홀랜드와 목소리로 분한 이 스파이물은 두 사람의 출연으로, 그리고 윌 스미스가 연기한 스파이 랜스 스털링이 '새'가 되는 해프닝을 겪으며 천재 월터와 만나 악당에 대적하는 액션 어드벤쳐 애니메이션으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이런 소개가 틀린 건 아니지만, 정말 <스파이 지니어스>의 장점은 어쩌면 실사 스파이 영화로써는 시도해 볼 수 없는 '스파이' 업계의 관점의 전환을, 아니 더 나아가 세계 평화에 대한 야무진 담론을 구현해 냈다는 점이다. 

그 시작은 엄마와 세상에 둘도 없는 콤비를 자랑하던 한 소년 월터 베캣으로 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나의 파트너라 다정하게 불러주던 엄마는 경찰로써 직분을 다하던 중 순직했다. 외톨이가 된 소년, 그러나 그 소년은 천재였다. 15살에 MIT를 졸업하고 스파이 에이전트 기술 연구소에 배치되지만 현실은 화장실 옆 한 귀퉁이에서 모두가 상대하고 싶어하지 않는 천덕꾸러기 과학자가 되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당대 최고의 스파이 랜스, 랜스는 다짜고짜 화를 낸다. 왜냐하면 불법 무기 거래 현장에서 자신을 둘러싼 무수한 일본 야쿠자들을 상대로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는데 그게 바로 월터가 만든 '고양이 홀로그램'이었던 것. 무지개 색 가루와 함께 등장한 고양이 홀로그램에 사람들이 넋을 놓은 사이 무사히 탈출을 했지만 언제나 '폭력'적인 방식을 써왔던 랜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전술'이었던 것. 결국 그 일로 월터는 해고당하게 된다. 

그런데, 고향 집에 돌아와 연구를 계속하는 월터 앞에 랜스가 찾아온다. 그가, 아니 그의 얼굴을 한채 불법 무기를 나꿔챈 악당 킬리언 덕분에 랜스가 쫓기는 신세가 된 것. 랜스임을 숨기기 위해, 아니 숨기고 싶어하다 해프닝으로 월터가 만든 액체를 마신 랜스는 그만 비둘기가 되고. 이제 혼자서는 차 문 조차 열 수 없는 랜스는 본의 아니게 월터의 도움을 받게 된다. 

스파이 에니전트 연구소에서 랜스를 쫓아 엘리베이터를 탄 월터는 자신의 발명품 '고무 인간'을 스스로 실현해 보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스파이 전술'을 피력한다.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이길 수 있는 자신의 생각을 펼쳐보이며, 하지만 그런 월터의 생각에 랜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이제 비둘기가 되어 킬리언을 쫓는 랜스는 본의 아니게 웥터가 발명한 고무인간처럼 만들어 버리는 멀티 펜에서 부터 허그 보호막, 고양이 홀로그램의 덕을 톡톡히 보게 된다. 아이들 장난같다고 웃어넘긴 그 월터의 발명품들이 적재적소에서 랜스와 월터를 구하는 묘수가 된 것이다. 다른 스파이 영화에서처럼 꼭 자신들을 쫓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다치지 않게 해도 얼마든지 '스파이' 작전을 수행할 수도 있다는 월터의 생각이 실현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월터의 도움을 받은 랜스가 고군분투해도 결국 킬리언은 전세계 스파이들의 신상 정보를 손에 넣었다. 그걸 되찾기 위해 북해의 연구소로 찾아간 랜스, 월터의 빠른 연구 덕에 비둘기에서 다시 원래 스파이의 모습을 되찾은 랜스, 그러나 이미 그의 도발을 예측한 킬리언에게 랜스는 붙잡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랜스에게 킬리언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랜스가 킬리언이 보는 앞에서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정의라는 이름의 폭력의 악순환, 그것이 '킬리언'이라는 악당을 '초래'했고, 이제 랜스 동료들의 목숨이 위험하게 된 것이다. 

세계 평화의 방법론을 모색하다 
<스파이 지이어스>는 세계 평화를 지킨다는 '스파이' 그 방법론의 문제, 결국은 사람과 사람이 '선'과 '악'으로 나뉘어 서로를 규정한 채 되풀이 되는 '폭력'의 문제를 짚는다.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수단'으로서의 '폭력' 조차, 그 누군가에게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는 '폭력'일 뿐, 그건 다시 중단없는 보복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뿐이라는 명확한,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결코 실천하지 못했던 명제를 짚는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한껏 살린 <스파이 지니어스>는 적에 대해 잔인하고도 가차없는 폭력 대신, '평화'를 사랑하는 천재 과학자 월터의 발명품을 빌어, 린치 대신 고무인간으로 만들어 자백하게 만들어 버리는 만능 펜에, 상대방을 공격하는 대신 허그해 버리는 보호막에, 공격 본능을 무력화시키는 고양이 홀로그램으로 그 대안을 모색한다. 

그저 재밌는 애니메이션이라 치부하기에 월터와 랜스가 벌이는 설전의 세계는 깊다. 킬리언의 수족인 드론이 각자 스파이 에이전트 연구소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이미 우리가 이미  '드론'의 폭력성을 경험했기에 더욱 실감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잃고 싶어하지 않기는 랜스도, 월터도, 킬리언도 모두 같다는 지점도 시사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방식이 다른 것도. 월터의 도움, 그리고 비둘기들의 도움으로 '개과천선'한 랜스는 그 이전과 다른 대사를 말한다.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없다고, 그저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도시의 무법자처럼 피해다니던 비둘기가 가장 사랑스러운 별동대처럼 여겨지도록 만들듯, <스파이 지니어스>는 우리가 생각해 오던 '스파이' 영화의 고정 관념을 변화시킨다. 아니 평화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력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질문과 함께. 그래서 월터와 랜스가 함께 세상을 구하는 방식이 더욱 의미가 깊다. 

by meditator 2020. 2. 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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