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보지 말자.' 
명절 덕담이랄까? 그래도 명절인데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지 하던 것이 웬만하면 보지 말자가 되었다. 격세지감이다. 부모님이 먼저 내려오지 말라고 하신단다. '아는 동생'은 벌써 햇수로만 2년 째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다고 한다. 직계 가족이 이 정도니 그래도 명절 때나 되어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던 한 다리 건너 사촌, 친척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본의 아니게 '이산 가족'을 만들어 버린 '코로나 팬데믹', 안그래도 적조해져가는 가족 관계의 '소원함'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과연 이렇게 만나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어가는 시절에도 서로가 가족으로서 '동질감'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지난 2월 4일 개봉한 <세상의 모든 디저트; 러브 사라>는 어떨까? 아마도 이 영화를 본다면 지금 우리가 함께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묶어주는 '관계'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함께 할 수 없어도 '가족', 혹은 '고향'을 떠올리면 동시에 떠올려지는 건 '음식'이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외려 어릴 때는 참 먹기 싫었던 음식이 문득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이 글을 쓰는 기자가 어릴 적만 해도 고기를 넣은 미역국은 생일날이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렇지 않고 평상시 미역국은 그저 국간장을 푼 물에 미역 건더기를 넣은 멀건 국이었다. 그래서 고기를 넣은 미역국과 구분해서 '소미역국'이라 불렸었다. 어렸을 때는 그 물같은 국이 참 싫었는데 이제는 가끔 그립다. 그런 식이다. 멸치 다싯물에 밀가루만 뚝뚝 떼어넣은 수제비라던가. 쇠젓가락에 끼워 밥 한 공기를 비워야 했던  땅 속에서 꺼낸 겨울철 알타리 무 김치라던가 지나간 시절은 그렇게 그 시절에만 먹을 수 있었던 음식들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식구(食口)'는 말 그대로 한 집에 살면서 끼니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렇게 '밥상'을 함께 받던 '식구'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이상 한 집에 살지도, 밥상을 함께 받지도 않는 사이가 되었다. 심지어 코로나는 명절 때만이라도 '식구'가 되었던 연례 행사마저 여의치 않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식구'가 더는 '식구'가 아니게 되는 것일까? 이제 더는 '밥상'을 함께 하지 못해도 함께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여전히 '식구'라고 <세상의 모든 디저트; 러브 사라>는 말한다. 

사라와 함께 할 수는 없지만 
하지만 더는 '밥상'을 함께 할 수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영화는 '이별'로 말문을 연다. 바로 영화 제목 속 그 '사라'와의 이별이다. 영국 런던의 노팅힐 거리 그곳을 향해 사라의 자전거는 질주한다. 친구 이사벨라(셸리 콘 분)와 함께 그 거리의 한 상점에서 두 사람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디저트 베이커리 까페'를 열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라는 꿈에 그리던 자신의 가게에 도착하지 못한다. 주인을 잃은 가게, 사라가 셰프였기에 이사벨라는 혼자서 가게를 열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렇게 주인을 잃은 채 집세만 날리던 가게를 더는 유지할 수 없었던 이사벨라는 다른 주인을 알아보려고 한다. 그때 엄마의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해 자신이 다니던 무용학교조차 포기해버린 딸 클라리사(새넌 타벳 분)가 나선다. 하지만 다시 가게를 열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자금, 클라리사는 오랫동안 엄마랑 '의절'하다시피 했던 외할머니 미미(셀리아 임리 분)를 찾는다. 한때는 공중곡예사로 전세계 공연을 다니던 미미, 자신을 플라잉 요가로 이끄는 손녀의 설득에 못이기는 척 수표책을 연다. 그리고 사라, 이사벨라와 함께 요리 학교를 다녔던 매튜(루퍼트 펜리 존스 분)가 합류한다. 

그렇게 '사라'는 세상에 없지만 사라를 사랑하던 이들이 사라를 기억하며 한 자리에 모였다. 사라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사라를 대신하여, 사라가 하고 싶던 곳에서, 사라를 사랑하던 이들이 시작한다. 그래서 가게 이름이 '러브 사라'이다. 저마다 사라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 중에서도 할머니 미미에게 '러브 사라'는 각별한 의미다. 죽기 전 딸이 찾아와 디저트 베이커리 까페를 연다며 도움을 청했었다. 하지만 그때 사라의 엄마 미미는 거절했었다. 자신을 찾아온 클라리사에게 대뜸 '돈 때문이냐?'고 선을 그은 것처럼 사라에게도 그랬었다.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는 엄마 미미에게 사라는 돈이 아니라 자신을 지지해주지 않는 서운함을 토로했었다.

그리고 엄마와 딸은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 코로나라던가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서로에 대한 서운함으로 두 사람은 멀어졌다. 그리고 뒤늦게 엄마인 미미가 딸 사라에게 엽서를 썼었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라며, 하지만 그 엽서는 딸에게 도착하지 못했다. 딸이 자신의 가게에 도착하지 못한 그 날 쓴 엽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 미미는 보내지 못한 엽서 대신, 그때 들어주지 못한 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녀의 수표 책은 얇아져 가지만 대신 딸이 그리던 까페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사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영업'은 별개였나 보다. 가까운 거리에 이미 까페가 여러 개인 거리에 새로 문을 연 까페는 첫 날부터 파리를 날렸다. 매튜의 매혹적인 디저트들만으로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부족했다. 새로 개업했다며 인심쓰듯 나누어준 마카롱을 낯설어했다.  답답한 마음에 거리를 나선 할머니 미미의 눈에 노팅힐 거리를 지나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민자들이 많은 영국, 그 중에서도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인 거리, 그곳에 자리잡은 '러브 사라', 이 까페가 잘 되기 위한 해법은 무엇일까?


 

고향이 된 까페 
할머니 미미가 딸 사라가 가장 좋아하던 책,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떠올렸다. '새로운 것을 원하거든 여행을 하라',는 책 속의 명대사처럼 사라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다. 그런 사라처럼 '러브 사라'는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상징과도 같은 열기구를 까페 앞에 단다. 그리고 80일 간의 세계 여행 대신, 세계 각국의 디저트를 만들어 낸다. 

딸기 프레지에는 몰라도 , '크링글'을 기억하는 라트비아 출신의 택배 기사를 위한 '크링글'처럼 이민온 사람들이 원하는 고향의 디저트를 만들어 주기로 한다. 까페에 온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고향 디저트를 만들어 준다면 꼭 다시 들러 그것을 먹겠다고 하고 그렇게 한다. 호주식 케이크, '레밍턴', 리스본에서 온 모자를 위한 '카넬스네일. 터키의 바클라바, 아랍의 전통 케이크 바스부사, 이스라엘의 오렌지 세몰리나 케이크 , 그리고 일본에서 온 여성이 부탁한 말차 밀 크레이크까지 까페의 디저트에 세계가 모였다.  까페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의 '고향'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디저트; 러브 사라>는 이렇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방식을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고향을 기억하는 '디저트'로 잇는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시절에 이 영화는 함께 할 수 없지만 함께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전해준다. 지금 여기서 함께 나눌 수는 없지만 따로 또 같이 할 수 있음을 말한다.

함께 할 수 없다고 해서 함께 나누었던 시간,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우리가 그 시간과 마음을 어떻게 소중하게 이어가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지속될 수 있다. 다가올 명절, 같은 곳에서 한데 어울려 밥상을 받을 수는 없지만 각자의 공간에서 이 영화 한 편을 통해 서로의 소중함을 더욱 진하게 나눌 수 있다면, 함께 나누었던 음식을 서로를 떠올리며 먹는다면 함께 할 수 없어도 함께 하는 따뜻한 명절이 되지 않을까 싶다. 

by meditator 2021. 2. 7. 11:30

얼마전 sns에 꽃을 통해 나를 확인하는 이벤트가 성황을 이루었다.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하면 나를 상징하는 꽃을 알려주고 그와 함께 내 성격을 말해주는 방식이었다. sns를 통해 지인들과 이 이벤트를 나누었는데 모두들 열심이었다. 새로운 화장품을 선전하기 위해 마련된 이 이벤트는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mbti의 또 다른 형태와도 같았다. 

코로나로 인해 대면 접촉이 한결 줄어든 2020년 인기를 끌었던 것이 mbti와 같은 '나를 찾아가는' 각종 '리트머스' 프로그램들이었다. 관계를 통해 나를 확인하던 사람들은 잦아든 관계 대신 프로그램을 통해 나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칼 융'의 심리 유형 이론을 기반으로 한다. 즉 사람들이 저마다 서로 다른 자아의 특징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아이디어가 <소울>의 영화 감독 피트 닥터 감독의 출발점이다. 

 

 

이미 지난 2015년 '머릿속 감정 컨트롤 본부' 속 기쁨, 슬픔 등 다섯 가지 감정을 캐릭터로 구현한 <인사이드 아웃>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작품화한 바 있는 피트 닥터 감독은 이제 '영혼'에 캐릭터를 입힌다. 이제는 23살 된 아들이 어릴 적부터 사람든 저마다 고유한 영혼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고유한 '자아 의식'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그런 의문이 <소울>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슬픔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조차도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주제를 통해 우리의 모든 감정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도록 도왔던 피트 닥터 감독은 <인사이드 아웃>에서 함께 했던 디즈니와 픽사의 협업을 통해 영혼들의 이야기를 통한 삶의 긍정성을 또 다른 각도에서 조망하고자 한다. 

삶의 절정에서 죽음의 세계에 빠져버린 조 
이야기의 시작은 '영혼'들의 세계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이다. 재즈 뮤지션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하는 조 가드너, 하지만 현실은 뉴욕의 고등학교에서 밴드를 가르치는 강사 신세이다. 가르치는 밴드의 불협화음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재능이 있는 학생 조차도 음악에 대한 열정의 싹수가 요원하다.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학생들에게 '재즈'의 묘미를 절묘하게 설득하고자 애쓰는 조 선생님, 그런 그의 진지한 열정에 하늘이 감복해서일까. 교장 선생님이 찾아와 그가 '정규직'이 되었음을 축하한다. 

하지만 정규직이라는 안정된 직장에도 그의 얼굴이 밝아지지 않는다. 그때 걸려온 전화 한 통 그토록 그의 제자였던 재즈 밴드 멤버가 갑작스럽게 빠진 멤버 대신 연주를 부탁한 것이다. 어쩌면 연주자로서 피아노를 연주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은 나이, 하지만 우려스러운 시선을 불식하고 멋들어진 연주로 첫 연주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그의 '농담 아닌 농담'이 현실이 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머나먼 저세상을 향하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오늘 밤 연주를 위해 어떻게든 다시 지구로 돌아가려 애쓰던 조는 엉뚱하게도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어린 영혼들을 멘토링 하는 '유세미나'에 가게 된다. 그리고 멘토로 착각되어 태어나기 싫다는 시니컬한 영혼 22를 맡게된다. 

 

 

조와 22의 동상이몽 
본의 아니게 멘토가 되어버린 조, 그런데 어떻게 해도 돌아갈 수 없는 지구의 통행증을 22를 통해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조는 22의 마음을 돌이키려 애쓴다. 
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조와 달리 그간 테레사 수녀, 아인슈타인 등 유명인 멘토들이 두 손을 들고 나가떨어진 22의 마음은 쉽사리 돌려지지 않는다. 그러다 길잃은 영혼을 구해주는 모험가 문윈드 등의 도움을 얻어 함께 지구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조의 기대와 달리 22가 조의 몸에 그리고 조는 고양이 미스터 미튼스가 되어버린다  조가 되어버린 22 영혼을 구슬러 어떻게든 오늘 밤 있을 연주를 준비하려 애쓰는 조의 한바탕 해프닝, 그 해프닝을 통해 <소울>은 삶의 의미를 되살려 낸다. 

안정적인 정규직의 일자리 따위 그에게 찾아온 재즈 밴드 연주에 목숨을 거는 조, 그렇게  음악적 열정으로 충만한 조의 몸에 들어간 22는 삶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느낄 수 없던 음식의 맛을 깨닫고, 그를 손들게 했던 멘토들의 교육을 통해 얻은 해박한 식견으로 조의 주변 사람들과 능숙하게 소통한다. 심지어 음악을 포기하겠다 찾아온 밴드부 학생의 마음을 돌려놓을 만큼 식견과 혜안이 밝다. 영화는 저세상의 골칫덩어리 22가 유세미나에서의 부적응 과정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지상의 소통왕이 되는 과정을 통해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처럼 저마다 영혼의 존재론적 가치가 있음을 역설한다. 

저마다 다른 '캐릭터'를 가진 어린 영혼이 지구에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불꽃을 획득해야 하는 통과 의례,  그걸 삶의 의미를 터득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조와 22는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정작 22 가슴에 불꽃이 빛나도록 한 순간은 삶의 아주 사소한 순간이었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바로 거리에 앉은 22에게 떨어지는 꽃잎 한 장이었다.  삶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살아갈 만한 것이 아니라 삶이 주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살아갈 준비가 된 것이라고 영화 속 삶의 불꽃이 반짝이며 전한다. 

하지만 그렇게 삶의 의지를 회복한 22의 불꽃은 조의 몫이 된다. 다시 지구로 돌아와 그토록 원하던 도로테아 윌리엄스 밴드와의 협연을 끝낸 조는 행복했을까?
<소울>은 조와 22의 엇박자 '멘토링'을 통해 각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 가도록 한다. 조가 되기 위해 애쓰다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은 22처럼, <소울>은 조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저세상에 와서도 멘토링을 하고, 기꺼이 자신에게 온 유일한 기회와 '저세상에서의 마지막 멘토링'을 맞바꾸는 조가 살아온, 살아갈 '캐릭터'는 무엇일까? 

 

 

당신이 어떤 모습이라도 
<소울>의 성격 파빌리온에서는 새로 태어날 영혼들에게 각양각색의 캐릭터를 부여한다. 모두가 좋은 것만 받을 것같지만 그건 아니다. 누군가는 매우 우울한 성격을, 또 다른 누군가는 시시콜콜 따지는 까다로운 성격을, 영화는 가장 까칠했던 22를 통해 세상 그 어떤 성격도 삶의 과정에 모두 저마다의 몫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공한 연주자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지만 인간 세계에서나 저 세상에 가서도 '멘토'의 숙명을 피할 수 없는 조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mbti로 돌아와서, 타인을 통해 자신을 확인할 수 없는 시절에 사람들이 mbti에 몰두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내가 이러이러하게 세상에 유용하다는 자기 확인이 아닐까 싶다. 타인을 통해 증명받아왔던 나의 가치를 그 소통이 적조해지는 시절에 검사지를 통해 당신을 이런 면에서 유용하며 의미가 있는 존재라는 삶의 확인 도장같은 거 말이다. 공교롭게도 mbti가 붐을 이루는 시절에 <소울>은 우리 영혼의 캐릭터를 논한다. 그리고 결국 그런 각양각색 생명의 캐릭터를 통해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세상을 살아갈 만하다고 어깨를 두드려준다. 그리고 그 당신이 살아갈 세상은 당신이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세상 자체로 살만 한 것이라도 덕담도 잊지 않는다. 


by meditator 2021. 1. 26. 00:50

인도 영화라고 하면 선입관이 있다. 실사 영화 <알라딘>에서 차용하였듯이 진지하거나 코믹하거나 이야기가 진행되다 어느 시점이 되면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할 것 같은 것이다. 이른바 '발리우드' 영화이다. 하지만 이런 인도 영화에 대한 선입관을 깨준 영화가 1월 15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찾아왔다. 바로 <인생은 트리방가처럼>이다. 

트리방가는 극중 여주인공 아누(카졸 분)이 추는 인도 전통 춤의 오디시 동작 중 하나이다.  주인공 아누는 그 트리방가라는 동작을 빌어 자신을 표현한다. 말끝마다 욕을 달고 사는 아누식 표현대로 하자면 '삐딱하다?' 몸을 한번 꺽는 것도 쉽지 않은데 무려 세 번이나 꺾는 고난이도의 동작, 그건 그녀 자신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살아왔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자신을 표현한 '트리방가'를 영화 속 세 모녀 나얀(탄비 아즈미 분), 나얀의 딸 아누, 그리고 나얀의 딸 마샤(미틸라 팔카르 분)의 삶을 상징하는 단어로 선택한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많은 딸들이 '난 엄마처럼 살지 않겠어'라고 외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그 닮고 싶지 않던 어머니와 가장 많이 닮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삶을 거부하고 살아온 딸, 그리고 딸이 낳은 딸은 다시 그 어머니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이렇게 3대의 여성이 서로를 부정하고 또 부정하며 살아왔던 모습이 나얀의 뇌졸증을 계기로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며 해묵은 '모녀'의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엄마이자 작가였던 나얀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글을 쓴다. 샘물이 솟아오르듯 쉴 사이 없이 떠오르는 그녀의 영감은 빠른 그녀의 손끝에서 작품화되었다. 그녀를 사랑하던 남자는 그녀의 '문재'를 아꼈고 결혼해서도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않았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시어머니는 하루종일 책상 앞에서 손을 놀리는 며느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식이 죽어나가도 글을 쓸 것이라며 막말을 서슴치 않았고 그녀를 찾아온 문학계 동료들 앞에서 수모를 안겼다. 그녀의 글을 사랑해서 결혼했다던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시키기는 커녕, 두 사람의 갈등 앞에 안락하지 않은 가정을 불평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떠나자했지만 외아들인 남편은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그녀가 떠났다. 

아이들을 돌보아주는 비말, 그리고 아이들, 새로운 사랑, 그리고 두번 째 작품의 출간, 그녀는 행복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생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그녀를 엄마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엄마 대신 '나얀'이라고 불리는 여성, 여성 3대의 어머니 나얀은 자신의 자서전을 쓰며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아이들이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비난해주기를 바란다. 

 

  ​​​​​​​

엄마를 부정하는 아이들 
왜 아이들은 엄마를 나얀이라 부르며 외면하게 되었을까? 나얀은 그녀가 활동하던 1980년대 인도 사회에서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 집을 나온 이후 남편이 더 이상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지 않자 남편 성 대신 자신의 성을 아이들에게 붙였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결정이었다. 케케묵은 가부장제에 대항하여 그녀의 결정을 관철시키기 위해 법정에서 10년간 싸웠다. 

가부장제에 대항하여 자신을 굽히지 않은 강인한 엄마이자 문필가, 하지만 그런 엄마의 결정을 감내해야 하는 건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었다. 이혼이 흔치 않았던 1980년대의 인도 사회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이혼이라는 이별을 맞닦뜨린데 더해, 자신들의 성을 엄마의 성으로 바꾼 상황에서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런데 딸 아누를 정작 고통에 빠뜨린 건 그런 주변의 놀림이 아니었다. 엄마의 두번 째 사랑인 사진가가 시시때때로 나얀을 성적으로 희롱했던 것이다. 아누에게 더 고통스러운 건 엄마가 이걸 알면서도 '묵인'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누에게 엄마는 딸인 자신보다 작가인 엄마 자신을, 그리고 주변의 시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이는 아누 자신이 미혼모로 고통을 받는 과정에서 갈등의 정점에 이른다. 

 

 
늦은 화해 
그렇게 엄마를 외면했던 두 남매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엄마의 병실에서 모인다. 그리고 엄마의 자서전을 써왔던 밀란을 통해 뒤늦은 엄마의 진심을 확인한다. 잘못한 걸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내보이고 아이들에게 비난받겠다는 엄마의 진심을 깨달으며 외면했던 마음이 돌아선다. 

아누는 엄마를 거부하고 외면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가부장제에 맞서 아이들에게 자신의 성으로 하기 위해 법정에서 싸웠던 엄마가 싫었던 아누 역시 정작 한 남자와 평생을 사는 걸 바보짓이라 일축한다. 결혼을 사회적 테러라고 여기며 당당한 삶의 태도를 일관한 아누는 결국 엄마 나얀의 딸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인 나얀에 반항하며 살아왔던 아누의 딸 역시 아누의 삶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학부모 상담일마다 매번 새 남자를 데리고 나타나는 엄마가 싫었던 딸은 평범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자 애쓴다. 영화의 제목처럼 세 번의 굴곡이 할머니, 어머니, 손녀 삼대를 통해 드러난다.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 그런 엄마처럼 살기 싫은 딸, 하지만 그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 서로 닮은 여성 3대이다. 아직 사회적으로 이혼이 수용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작가와 자유분방한 여배우라는 캐릭터를 통해 인도 사회 내 여성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영화는 그리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인도'라는 지역성을 넘어 엄마와 딸의 이야기로 보편적인 울림을 전해준다. 









by meditator 2021. 1. 18. 17:36

당신의 사랑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요?

2021년 벽두부터 던지기에는 좀 오글오글한 질문일까? 아마도 이 질문은 받아든 사람들이 머리에  떠올리는 사랑의 모습에 따라 질문도, 대답도 그 성질이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는 만남의 장소를 떠올릴 지도 모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무슨 얼어죽을 놈의 사랑이라고 넘겨짚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으로 삶의 물길이 다르게 흐르기 시작한 걸 경험했던 누군가라면 한번쯤 그 사랑의 시작에 대해 상념에 젖지 않을까. 

<가을의 마티네>는 1999년 약관 23살의 나이에  <일식>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로맨스 소설 <마티네의 끝에서>가  원작이다. 2015년부터 마이니치 신문에 연재되며 뜨거운 반응을 일으킨 이 소설을 <용의자 x의 헌신>의 니시타시 히로시 감독이 동작품을 함께 했던 배우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함께 영화화했다. 

소설의 제목처럼 주인공 마키노(후쿠야마 마사하루 분)와 요코(이시다 유리코 분)의 사랑은 마키노의 연주회가 끝난 곳에서 시작된다. 당신의 사랑이 어디에서 시작됐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첫 번 째 대답이 될 것이다. 

연주회를 마친 마키노는 자신의 대기실에서 공황 상태에 빠져든다. 무려 20주년 독주회, 하지만 연주를 거듭할 수록 그의 이마에 배어나오는 땀방울처럼 그에게는 이젠 날이 갈수록 자신의 기타 연주가 버겁다. 그럼에도 장사진을 이룬 팬들, 그들을 말리는 충복같은 매니저 미타니(사쿠라이 유키 분), 해프닝처럼 마키노의 앨범을 의논하려고 온 소부에, 친구인 요키가 마키노와 마주하게 된다. 

 

 

미래가 과거를 바꾼다. 
교감, 아마도 사랑의 시작은 이런 감정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서로 다른 삶의 궤도를 살아온 두 사람이 운명처럼 만나게 되는 지점,  마키노와 요키는 '미래가 과거를 바꾼다'는 역설적인 문구을 통해 교감한다. 마키노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좋아하는 미타니의 최측근 미타니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두 사람은 눈빛으로 나눈다. 

영화는 내내 '미래가 과거를 바꾼다'는 화두를 되풀이 한다. 마치 역사학자 E.H. 카의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역사에 대한 정의를 뒤집은 듯한 문구이다. 원작자 히라노 게이치로는 E.H. 카와 다른 말을 한 것일까? 아니 외려, 영화를 보고나면 히라노 게이치로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은 E.H. 카의 인생 버전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마키노와 유키가 첫 교감을 했던 이야기는 유키의 본가 마당에 있는 너른 바윗돌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릴 적 유키가 그곳에서 소꼽장난을 즐겨했던 곳, 그래서 좋은 추억으로 기억된 그곳에서 그만 할머니가 머리를 부딪치셔서 돌아가시게 되었다. 그래서 유키는 마음이 아프다고 하였다. 왜 마음이 아프냐는 마키노의 매니저 질문에 마키노가 '미래가 과거를 바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좋은 기억이었던 과거가 현재에 벌어진, 즉 '미래'의 사건으로 인해 이제는 아픈 추억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마음아픈 일을 많이 겪는다. 그리고 그 '상처'에 머물러 오랫동안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 원작자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천착'해 있는 상처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의해 얼마든지 다시 '각색되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E.H.카가 말한 역사도 결국 현재의 시선에서 과거의 역사를 재해석함으로써 미래를 지향한다는 뜻에서 히라노 게이치로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영화 속 마키노와 유키는 모두 '상실'을 겪는다. 기타리스트로서 더는 기타를 칠 수 없을 만큼 슬럼프에 빠진 마키노, 그런데 그가 고통 속에서 연주한 20주년 연주회에서 유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유키는 그가 유일하게 만족했던 마지막 앵콜 브라암스 곡의 진정성을 알아봐주며 마키노의 마음을 울린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로 돌아간 유키는 파리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의 와중에서 동료를 잃고 트라우마를 겪는다. 그런데 그런 유키를 위로해 준 것이 바로 마키노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상실'의 과정을 겪어가며 서로의 진심을 나누고, 사랑을 약속한다. 유키는 파혼을 하고 프랑스 생활을 접고 마키노가 있는 일본으로 온다. 

하지만 운명은 얄궃게도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한다. 그로 부터 다시 몇 년의 시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궤도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4년이라는 시간동안 두 사람은 각자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살아간다. 

오랫동안 기타를 연주할 수 없었던 마키노가 그를 13살에 발탁하여 가르쳐 준 스승님의 추모 앨범을 계기로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에야 두 사람의 멈췄던 인연의 시계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각자 겪은 개인적인 상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사랑을 시작하게 만든 '계기'가 된다. 각자 아픔은 겪었지만, 그 아픔 속에서 서로의 존재가 빛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키노가 슬럼프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연주 중 유일하게 스스로 만족한 브라암스에 감명한 유키에게 마음이 그렇게 쉽게 갔을까? 마찬가지로 동료를 잃고 슬픔에 잠긴 유키의 마음을 어떻게든지 달래보려 애쓴 마키노의 정성이 없었다면 유키가 마키노에게 마음을 온전히 줄 수 있었을까?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시련을 맞이한다. 이별이라는 '현재'는 아마도 그들이 함께 했던 '과거' 조차도 아픔으로 기억되게 했을 것이다. 마치 유키네 집 마당의 바위가 어린 시절 추억을 할머니의 죽음으로 덮었듯이. 심지어 그 이야기를 마키노와 나누었던 그 기억 때문에 더더욱 본가로 돌아간 유키에게 그 바위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픔 가운데에서도 마키노도, 유키도 서로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을 상처로만 덮지도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마키노는 스승의 추모 앨범에서 '미래가 과거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하며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의 그 이야기에 유키가 화답한다. 

영화는 어딘가로 바쁘게 가던 유키가 뒤돌아 고향 마을 집에 있는 것과 비슷한 거리의 바윗돌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키노에게 화답한 유키가 다시 바라본 그 바윗돌은 이제 어떤 의미였을까? 

2021년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지난 아픔을 접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처는 상처인 채 놔두면 그대로 아픔으로 기억될 뿐이다. 그 아픔에 천착하는 대신 그 아픔의 삶을 딛고 거기에 새로운 역사를 부여하는 순간, 아픔은 우리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상실과 상처, 우리를 고통받게 하는 것들이다. 영화는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각자의 삶과 사랑에 용기를 내보라 권한다. 바윗돌 하나에도 오고가는 다른 기억이 얹히듯이 우리가 살아오며 가지게 되는 아픔과 고통들에 대해, 그것들을 '승화'할 수 있는 삶을 살아보라 영화는 권한다. 영화 속 마키노가 자신의 슬럼프를 딛고 나아가며 사랑을 되찾듯이, 그리고 유키가 과거에 머무는 대신 성큼 자신의 삶에, 그리고 사랑에 용기를 내보듯이. 그래서 이제 유키가 밝은 표정으로 거리의 바윗돌을 보듯이 우리 역시 우리 삶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재해석할 수 있을 거라, 그래서 '미래가 과거를 만든다'고 영화는 거듭 말한다. <가을의 마티네>란 서정적인 제목 아래 숨겨진 영화 속 의미는 2021년 아름다움 삶과 사랑을 향한 덕담이다. 





by meditator 2021. 1. 9. 00:42

작년 10월 8일부터 롯데 뮤지엄에서는 장 미쉘 바스키아의 전시회가 진행 중이다. 장 미쉘 바스키아, 이제는 현대 미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이름을 듣게 되는 화가이다. 그것보다는 데이비드 호크니에 이어 그의 작품이 가장 비싸게 팔리는 유명 화가라고 하면 더 익숙할 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장벽 앞에 선 1980년대의 스타 작가 
스스로를 '영웅'이라 칭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장 미쉘 바스키아는 1980년대 초 뉴욕 화단에 등장하여 겨우 8년이라는 짦은 기간 동안 3000 여 점의 작품을 쉴틈없이 쏟아낸 스타 작가이다. 그리고 그 짧은 작품 활동 기간은 유색인종으로서 장 미쉘 바스키아가 여전히 인종 차별적 시선이 사라지지 않은 사회에 자신의 작품으로 저항한 기간이기도 하다. 

낙서와 같은 문구와 현대 문화의 아이콘 같은 이미지들로 가득한 그의 작품은 그런 그의 메시지를 반영한다. 전시회 작품 중 가장 가격이 비싸다는 작품은 해부도 속 인물과 같은 인간과 소가 그려져 있다. 바스키아가 그린 동물은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 유색인종 자신들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그가 그린 피흘리는 예수는 그와 같은 피부빛깔이고, 당대 최고의 야구 선수 행크 아론은 역시나 그와 같은 유색 인종의 영웅으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한다.

전시회에서 만난 한 장의 사진, 바스키아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한 자리에 모여 찍은 사진이 있다. 모두가 백인인 동료들 사이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바스키아, 이십대의 감수성 예민한 흑인 청년이 그 백인들 중심의 예술계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지레 짚어볼수 있는 지점이다. 그가 가장 믿고 따랐다던 앤디 워홀조차 그에게 너무 그렇게 인종적 차별에 민감한 그림에 천착하는 것을 말리기도 했다니, 그럴 수록 젊은 바스키아가 느끼는 사회적 고립감은 도를 더해갔을 것이다. 담배 한 갑을 사기 위해 그려준 그림이 단 일주일 만에 화랑에 비싼 가격에 전시되는 스타 화가였다. 전용비행기를 타고 다녀도 바스키아는 1980년대 미국에서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하는 유색인종이었다. 

 

 

1920년대의 흑인 청년의 좌절 
1980년대의 흑인 청년이 그럴진대. 1920년대를 살아가는 흑인 청년이 느끼는 사회적 좌절은 어땠을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선보인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는 또 한 명의  흑인 청년의 좌절을 그려낸다. 

영화를 여는 건 '블루스'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민요가 우리 고유의 '한'이라는 정서에 기반한 것처럼 음악 장르로서의 블루스는 노예로 살아가던 흑인들의 '한'을 음악적으로 승화시킨 장르이다. 그리고 '마 레이니(비올라 데이비스 분)'는 바로 그런 흑인들의 한을 구현하는 블루스 장르의 대표적 가수이다. 첫 장면에 선보인 그녀의 소울넘치는 음악에 흑인 관중들은 영혼의 '정화'를 느낀다. 

그런 블루스의 대표적 가수 마 레이니, 그녀가 음반 녹음을 위해 대표적인 북부의 도시 시카고에 등장한다. 트럼펫 연주자 레비(채드윅 보스먼 분)는 마 레이니의 연주를 위한 세션의 한 사람으로 동행한다. 

마 레이니를 비롯하여 세션들이 지나는 시카고 거리, 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백인들이다. 백인들은 그들을 마치 범법자 대하듯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본다. 먼저 도착한 세션들은 녹음이 예정된 공간이 아닌 창고같은 지하 공간으로 안내되어 음반에 필요한 음악을 맞춰보도록 요구된다. 그들의 동선만으로도 1920년대 흑인들이 처한 사회적 위치가 절감된다. 

오거스트 윌슨이 쓴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답게 영화는 지하의 세션 연습장과 마 레이니의 동선을 따라 오가며 소동극처럼 진행된다. 호텔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녹음실에 이르기까지 마 레이니는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자신의 유명세를 내세워 갖가지 해프닝을 벌인다. '몽니'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때로는 말이 되지 않는 요구들을 내세우며 녹음 작업을 지연시키지만, 그런 마 레이니의 '몽니' 저변에 깔린 건 저들 백인들이 자신을 블루스의 여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오로지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여긴다는 불편한 자의식이다. 

그렇게 마 레이니의 해프닝과 함께 지하 녹음실을 중심으로 피아노와 트럼펫,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세션들 사이에 말의 향연이 벌어진다. 그 중심에는 늙수그레한 다른 세션들과 달리 아직 젊은, 그래서 마치 하룻강아지 범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에 어울릴 법한 태도로 일관하는 청년 '레이'가 있다. 

자신의 곡을 음반사에 선보인 레이는 한 마디로 눈에 뵈는 것이 없다. 그의 악보가 마 레이니 저리 가라하게 잘 나갈 것같은 자신감으로 충만한 그는 선배 세션들을 깔보며 마 레이니의 세션이 아닌 자신만의 악단을 꾸려 승승장구할 것이라 장담한다. 마 레이니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자기 스타일의 음악으로 녹음을 할 것을 제안하는 등 자신감이 넘치는 레이와 선배 세션들은 사사건건 충돌하게 된다. 

드러난 건 마 레이니라는 여가수의 녹음실 해프닝이지만,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말의 성찬을 넘은 갈등을 드러내며 결국 1920년대 흑인들의 현실을 토로한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아웅다웅하던 선배 세션들과  레이, 선배들은 레이를 그저 철부지로 치부하지만 알고보니 레이에게 백인들로 인해 부모님을 잃게 된 슬픈 과거가 있었음을 알고 동지애를 느낀다. 나이도, 취향도, 다루는 악기도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차별받은 유색인종이라는 지점에서 '블루스'의 정서같은 깊은 '상실'의 상흔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영화 초반 그저 '나대는 것'처럼 보이던 레이의 '조증'이 영화가 진행될 수록  밟히고 싶지 않은 한 흑인 청년의 자기 방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의 동지애는 마 레이니의 녹음 현장에서 무력하다.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한껏 대접받고자 하는 마 레이니의 횡포에 가까운 녹음 작업에서 튀어나온 못과도 같던 레이는 결국 소외되고 주어진 기회마저 잃게 된다. 새 구두를 사고, 자신의 악보만 팔면 이제 고생 끝, 마 레이니 따위가 우습게 연주자로서 승승장구할 꺼라던 청년의 조급한 꿈은 단 한 순간에 나락으로 빠져버린다. 그의 조증만큼이나 순식간에 모든 걸 잃은 청년의 분노는 동료는 물론 자신을 자멸의 길로 이끈다.

녹음실의 해프닝으로 채운 영화은 그 안에서 1920년대 흑백 차별이 여전한 사회의 풍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리고 번듯한 듯 하지만 저 마다 차별과 상실의 아픔을 안은 채 살아가는 흑인들 내면의 풍경을 보여준다. 백인과 흑인, 그리고 흑인과 흑인 사이의 다시 갈라진 벽은 결국 한 청년의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의 후반부, 단돈 2달러 헐값에 팔라던 레이의 악보는 백인 뮤지션에 의해 녹음된다. 그 모습은 마치 8년의 생애 동안 어엿한 인류의 일원으로 흑인의 존재를 세우기 위해 자신을 던져 싸웠던 바스키아의 작품들이 세계적으로 가장 비싼 작품으로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풍미하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늘 흑인 인권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왔던 채드윅 보스먼의 유작인 <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는 여전히 신산했던 1920년대 추락한 흑인 이카루스의 삶을 그려낸다. 

영화 속 레이, 그리고 바스키아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흑인이라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에 그 누구보다도 '민감'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애 내내 그들이 몸으로 체감했던 차별적 삶에 날카롭게 반항하다 자신을 산화시킨다. 청년, 젊은 그들은 누구보다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하지만, 그들의 사회적 존재는 그런 그들의 열망을 불태워버린다. 

by meditator 2021. 1. 5. 20:19

1970년대 후반 서구 경제는 신자유주의 체계에 들어서며 호황을 누렸다. 그 경제적 호황은 최근 '레트로'붐을 일으키고 있는 1980년대의 문화적 융성기를 낳았다. <원더우먼 1984>는 바로 펑크와 파워숄더로 대변되는 1980대의 정점에 시선을 맞춘다. 

 

 

레트로붐을 타고 있는 최근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처럼 영화 속 여주인공 원더우먼(갤 가돗 분) 다이애나 프린스는 그녀의 직장인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출근하기 위해 어깨에 심이 잔뜩 들어간 상의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출근을 한다. 

영화 속 여주인공 원더우먼 만이 아니라, 빌런 맥스 로드(페트로 파스칼 분) 역시 어깨심을 넣어 각이 잡힌 스트라이프 정장으로 그 시대를 대변하지만 그런 그의 의상보다 한층 더 강조된 다이애나의 의상들은 70년대 후반 자신의 목소리를 높인 '페미니즘'의 영향을 통해 사회적으로 한층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한 여성들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욕망의 시대
그 존재만으로도 당당한 여전사 원더우먼, 그녀는 자신의 고향인 아마존 데미스키라 왕국을 떠나 조종사였던 트레버 대위(크리스 파인 분)와 함께 참전했던 인간들의 전쟁에 참전했었다. 그리고 그 세계 제 1차대전의 와중에서 사랑하게 된 연인 트레버 대위를 잃은 그녀는 1984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한다. 그런 그녀에게 기적처럼 죽었던 트레버 대위가 다른 남자의 몸을 빌어 그녀에게 돌아오게 된다. 다이애나가 오로지 바라던 일,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일이 바로 <원더우먼 1984>의 가장 큰 '딜레마'가 된다. 

사랑하는 이를 다시 만나고자 하는 '희망', 하지만 그 '희망'이 불가능한 욕망이라면? 영화는 원더우먼의 사랑을 통해 1980년대의 시대 정신, '욕망'을 조망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88년 올림픽 당시 정부 시책에 의해 여러 건전 가요가 만들어졌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아, 대한민국'이다.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자유로운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라는 가사, 하지만 그 시절 무엇이든 될 수가 있다던 그 시절의 거리에서 젊은이들은 민주적인 국가를 쟁취하고자 최류탄을 마시며 시위를 했고, 고층 아파트를 짖기위해 가난한 동네의 주민들은 철거민이 되었다. <원더우먼 1984>는 미국의 '아, 대한민국'같은 시대를 '욕망'이란 화두를 통해 들여다본다. 

다이애나가 걸어가는 거리 상점 속 tv에서는 맥스 로드가 나와 자신이 개발 중인 유전에 투자하라는 홍보성 광고를 한다. 구구절절한 홍보성 멘트 뒤에 맥스 로드는 '아, 대한민국'의 가사같은 명쾌한 한 마디로 대 '아메리칸 드림'을 부추긴다.  

'무엇을 원하고 꿈꾸던지 그것을 가질 수 있어요.'


하지만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거액의 후원금을 내며 너스레를 떨던 맥스 로드를 반긴건 성처럼 거대한 '블랙 골드 인터네셔널' 건물 안에 텅빈 사무실과 체불과 체납의 영수증 더미이다. 그리고 그의 가장 유력했던 투자자 한 명이 찾아와 그가 후원하라는 유전이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은 '사기극'이었다며 빚을 독촉한다. 그가 대중을 현혹했던 말은 '신기루'였다. 

 

 

1980년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영화배우 출신의 훤칠한 외모로 인기몰이를 하여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은 그 이전의 카터 대통령과 달리 '강한 미국의 전성기'를 주창했다. 하지만 그 강한 미국의 전성기를 위해 미국이 가장 열을 올렸던 던 바로 '무기 산업'이었다. 그들이 판 무기는 1980년 이란 이라크 전쟁을 위시하여 이스라엘과 아랍, 레바논 내 종교적 분쟁,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전세계 곳곳에서 지역간 분쟁과 갈등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소련과 신냉전주의 체제를 구축, 긴장을 격화하며 다시금 군비 경쟁에 나선다. 무기를 팔고 석유로 받는 새롭게 구축되어가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영화 속 되돌아온 트레버 대위가 신은 '나이키'로 대변되는 문화 산업으로 거리를 휩쓴다. 

영화 속 '빌런'이 되는 맥스 로드의 욕망처럼 원하고 꿈꾸는 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미국의 시대였다. 맥스는 가난한 이방인이었다. 그는 새 신발을 살 돈조차 없어 낡고 구멍난 신발을 신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지고 싶은 것은 그에게 너무도 요원했다. 그가 꿈꾸던 일은 외면받았다.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는 풍요로웠고, 그 풍요로운 성장의 시대에서 맥스의 욕망은 제어되지 않았다. 결국 나지도 않은 석유를 볼모로 대중들의 욕망에 걸터앉는다. 그리고 그 제어되지 않는 욕망에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굴러다니던 신비의 금속이 불을 지핀다. 

그리고 그런 맥스에게 결정적 조력자가 되는 건 다이애나의 동료이자, 당당한 그녀를 가장 부러워하는 바바라 미네르바(크리스틴 위그 분)이다. 알고보면 능력있는 고고학자였지만 펑퍼짐한 옷차림으로 가려진 그녀의 외모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두툼한 맨투맨티와 헐렁한 치마 속에 바바라는 주목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숨겼다. 그녀의 욕망은 그녀 앞에 등장한 바바라를 통해 구체화되었고, 신비의 돌이다. 

신비의 돌이 발견된 문명마다 결국은 '멸망'으로 이끌었던 그 돌이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등장했고, 그 돌의 쓰임새를 알아본 맥스가 바바라를 유혹하여 손에 넣는다. 그리고 맥스는 그 돌에 자신의 욕망을 동일시시킨다. 망해가던 블랙 골드 인터네셔널을 다시 일으켜세우려 했던 욕망은 그가 만난 사람들의 욕망과 함께 상승하며 대통령, 나아가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 그렇게 그저 한탄 사기꾼에 불과했던 맥스의 욕망이 세계의 멸망으로 치달을 수 있는건 바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고 싶은 모든 이들의 '열망'이다. 

원더우먼 다이애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오랜 세월 오로지 바래왔던 '사랑', 그 하나만을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욕망의 가속화된 엘리베이터를 멈출 수는 없다. 

 

  ​​​​​​​

코로나 시대의 '반면교사'
욕망이 자연스러웠던 시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산업이 되고 문화가 되었던 시대, 그 시대의 정점 1984년, 그 중심에 있는 미국에서 <원더우먼 1984>는 여전히 그칠 줄 모르는 욕망의 열차를 추동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의 욕망을 묻는다. 특히 대다수의 마블과 dc 코믹스의 히어로 영화들이 '코로나'로 인해 개봉을 미루고 있는 시점에 개봉한 <원더우먼 1984>는 코로나 시대 우리의 반성과 궤를 같이 한다. 결국 빌런이 되어버린 맥스를 진정시킬 수 있었던 것이 가장 소박한 가장으로서의 소망이었음을 상기시킨 영화는 그칠 줄 모르고 달려오다 멈추어버린 코로나 시대, 진정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되새겨보게 한다. 

화끈한 히어로물을 기대하고 모처럼 극장을 향했다면 초반 쇼핑몰에서의 활약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영웅적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사랑'에 발목 묶여버린 원더우먼의 모습은 아쉬울 지 모르겠다. 더구나, 절정의 장면에서조차 그녀는 여전사로서의 씩씩한 모습 대신 설득과 애원을 했으니. 그렇게 영웅담으로서의 <원더우먼 1984>의 면모는 아쉬웠지만 대신 시대적 욕망을 통한 반성의 담론으로서 <원더우먼 1984>는 코로나 시대 '반면교사'로서의 메시지는 충실하게 전한다. 

by meditator 2020. 12. 26. 17:27

메릴 스트립, 제임스 코든, 니콜 키드먼, 출연 배우들의 면면으로만 봐도 흥미로운 뮤지컬 영화 한 편이 상영관과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했다. <더 프롬(The Prom)>이다 .

우리에게는 낯선 프롬(prom)은 미국 청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졸업 파티이다. 졸업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소녀, 아니 그 소녀로 인해 졸업 파티 자체가 무산되어버린 사건을 다룬 <더 프롬>은 이미 2018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동명의 뮤지컬 넘버이다. 흥행은 미진했지만 토니상 7개 부문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작품이다. 이 작품을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감독이자 뮤지컬 영화 <글리>의 제작자인 라이언 머피가 넷플릭스와 손잡고 선보인다. 

학부모위원회가 졸업 파티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오프닝, 그런데 이야기는 졸업 파티가 열리기도 했던 인디애나의 한 고등학교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 공연장으로 옮겨진다. 

무대에 올려진 뮤지컬이 끝나고 주연을 맡은 디디 앨런(메릴 스트립 분)과 배리 글릭먼(제임스 코든 분)은 공연에 대한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은 채 사람들과 어울려 여흥을 즐긴다. 하지만 그도 잠시 신문에 올려진 디디와 배리가 맡았던 앨리노어 루스벨트와 루스벨트에 대한 혹평은 그들은 차가운 현실로 던진다. 노익장을 과시했지만 이제 더 이상 '셀럽'이 아닌 디디와 루스벨트를 연기했지만 그 진지함이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배리, 그리고 그들만큼이나 저마다의 '딜레마'를 안고 있는 앤지(니콜 키드만 분)와 트렌트(앤드류 라넬스 분)는 자신들이 처한 '명망성'의 위기를 '사회적 이슈'를 통해 돌파하고자 한다. 바로 그때 그들의 눈에 띈 사건, 인디애나 고등학교의 프롬 좌초 사건이다. 

 

 

한 소녀의 커밍 아웃으로 무산된 프롬 
트럼프 대통령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대선의 여진이 쉽게 진화되지 않는 미국의 사태는 우리나라의 정서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듯하다. 그렇게 이미 결과가 뻔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상식적 시선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미국이라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상황이 <더 프롬>의 배경이 된다. 즉 동성애가 자유로운 나라라는 미국에 대한 선입관과 달리 보수적인 문화가 지배적인 미국 남부 인디애나주의 고등학교에서는 졸업 파티에 동성의 연인을 데려가겠다는 한 소녀의 선언이 졸업 파티 자체를 무산시키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브로드웨이의 아티스트들은 바로 그런 비상식적인 인디애나 주 고등학교의 '사건'을 자신들의 명망성을 활용해 이슈화시켜 돌파하고자 한다. 

영화는 그렇게 두 가지의 갈래를 가지고 진행된다. 고등학생 에마(조 엘런 펠먼 분)의 커밍아웃 선언으로 인한 졸업 파티 무산 사건을 한 축으로 하면서, 거기에 개입한 브로드웨이 스타들의 해프닝을 얹는다.

애마의 졸업 파티 사건을 계기로 만나게 된 브로드웨이 스타들, 그들은 자신들이 인디애나 고등학교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명망성으로 인해 어려운 문제가 쉽게 풀릴 것이라 기대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이슈화시켜 자신들의 위기도 해결될 것이라 믿는다. 그런 기대로 화려한 퍼포먼스로 인디애나에 등장한 '뮤지컬 스타'들 무산될 뻔한 졸업 파티가 다시 '승인'되며 서광이 비치는 듯하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함정'일 뿐이었다. 여전히 애마는 학부모와 친구들에게 외면당하고, 브로드웨이 스타들의 명망성은 그들의 공연 무대가 몬스터 트럭 대회 막간 공연에서 보여지듯이 그들의 기대와 다르다. 

여전히 당대 최고의 여배우인 메릴 스트립이 연기하는 디디가 호텔 프런트에 자신의 토니상 트로피를 올려 놓으며 자신을 과시하는 장면 등에서 보여지듯 <더 프롬> 곳곳에서 보여지는 '셀프 디스'의 여유가 양념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그런 디스가 무색하게 노익장의 메릴 스트립은 그녀가 등장했던 또 다른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 보다 훨씬 역동적인 뮤지컬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로맨스도 빼놓지 않고. 
외려 기대에 비해 아쉬웠던 건 <시카고>의 니콜 키드만을 기대했던 모습을 애마와의 단 한 씬으로 만족해야 했다는 점이다. 아쉬움을 차치하고 보면 <더 프롬>은 대번에 귀를 사로잡는 뮤지컬 넘버는 아쉽지만 대체적으로 흥겨운 뮤지컬 영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흥겨운 뮤지컬 영화에 얹힌 LGBQ 교과서 
영화는 전형적인 헐리웃 영화의 궤도를 따라간다. 명망성에 기대어 인디애나 고등학교로 납신 브로드웨이 스타들은 애마를 돕겠다는 허울좋은 해프닝을 통해 외려 각자가 가졌던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좋은 어른으로 애마의 '동지'가 되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애마는 어설픈 브로드웨이 스타들의 등장으로 고무되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모색하여 해결한다. 영화 내내 고뇌하는 애마의 주옥같은 테마는 결국 여전히 성적으로 자유로운 나라라는 미국이라는 사회에서도 '성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가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애마는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기 않겠다고 용기를 낸다. 그리고 이전 헐리웃 성장 영화에서 '성장의 모티브'가 <더 프롬>에서는 '성적 정체성'으로 변주되어 한 소녀의 내적, 외적 갈등으로 등장한다. 

전형적인 헐리웃 뮤지컬 영화의 궤도를 따르지만 그 과정에서 <더 프롬>이 일관되게 지향하고 있는 건 바로 '성적 다양성'에 대한 '계몽'이다. 줄리어드를 나왔다는 사실만 입에 달고 살던 트렌트(앤드류 라넬스 분)가 애마의 친구들을 상대로 보수적인 남부 사람들이 신앙처럼 믿고 있는 성경의 문구들이 얼마나 자의적인가, 결국 당신들이 신봉하는 성격이 말하고자 하는 단 한 가지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내용의 뮤지컬 넘버는 그런 계몽주의적 <더 프롬>의 성격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어 보여준다. 

왁자지껄했던 프롬의 소동은 결국 등장인물 각자가 가졌던 문제들을 직시하고 그것들을 과감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결된다. 여전히 '셀럽'이라는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디디 앨런은 그 '셀럽'의 허울좋은 명예와 재력을 내던지고 '사랑'을 얻는다. 16살 졸업파티에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부모도, 고향도 버려야 했던 베리는 뒤늦은 '화해'를 한다. 그렇게 애마를 빌어 자신들의 명성을 되찾으려던 한물 간 셀럽들은 애마를 통해 저마다의 고민을 풀어낸다. 애마 역시 자신처럼 용기를 내지 않는 연인의 소극적인 태도에 실망하지는 거기에 주저안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결단을 통해 사랑도 얻고 자신감도 회복한다. 모두가 한데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는 집단 군무의 휘날레를 통해 화해하고 행복해진다. 

 

 

네임드한 배우들의 다수 출연만큼 가지가 많았던 <더 프롬>, 여전히 편견과 차별의 횡행하는 미국 사회에 대해 메릴 스트립 등의 배우가 기꺼이 출연하여 소리 높여 '성적인 자유'를 주창하는 작품이 만들어 진다는 사실이 바로 이 작품의 의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세계적인 콘텐츠 플랫폼 넷플릭스를 통해 퍼져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어수선한 스토리 라인에도 불구하고 수려한 뮤지컬 넘버들은 여전히 보는 이의 흥을 돋는다. 학교 현장에서 이 <더 프롬>을 틀어준다면 어떨까? 구구절절 설득보다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에 용기를 낸 소녀 애마를 통해 LGBQ에 대한 인식의 담을 허무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될 듯하다. 

by meditator 2020. 12. 12. 16:03

2000 년에 제작된 영국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오래도록 회자된 명작이다. 영국 북부 탄광촌에 사는 소년 빌리는 권투를 배우러 가던 도중 우연히 발레 수업을 보고 따라하다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광부인 아버지는 당연히 '남자답지' 못한 빌리의 선택에 반대한다. 더구나 노동자였던 아버지에게 빌리의 선택은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빌리는 자신의 꿈을 접을 수 없었다.

<빌리 엘리어트>의 대미는 탄광촌에서 꿈을 접을 뻔했던 빌리가 어엿한 무용수가 되어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 장면이다. 여자 아이들 뒤편에서 토슈즈조차도 변변찮게 동작을 따라하던 꼬마가 우아한 백조가 되어 아버지와 형 앞에서 우아하면서도 절도있는 몸짓으로 '백조의 탄생'을 알렸을 때 관객들은 그들 자신이 아버지의 마음이 되어 함께 박수치고 감동했다. 

여기 또 한 명의 청년이 백조가 된 빌리처럼 한껏 자신을 드러내는 우아한 몸짓을 내보이고 있다. 그런데 온몸이 땀에 젖도록, 그리고 다친 발을 감싼 붕대에서 피가 배어나오도록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의 춤사위가 '공연'되는 건 관객을 마주한 무대가 아니다. 춤을 맞춰주는 차이콥스키의 웅장한 음악도 없다. 그저 장단을 맞추는 건 소박한 북소리 뿐이다. 당연히 관객도 없다. 혼연의 춤을 지켜보는 건 못마땅한 눈초리의 나이 지긋한 남자 둘 뿐이다. 심지어 그들 중 한 명은 청년의 한 마리 나비처럼 나긋나긋한 몸짓에 어이없어 하더니 자리를 떠버리고 만다. 하지만 청년은 춤을 멈추지 않는다.  

영국의 노동 계급 청년은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거듭났지만, 조지아의 청년은 자신이 원하는 춤을 추는 그 순간, 그가 목표로 삼고 달려왔던 '미래' 자체가 함께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청년의 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웠다. 자유와 미래를 맞바꾼 춤, 무엇이 청년으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또 한 명의 미운 오리 새끼
조지아의 청년 메라비(레반 겔바키아니 분), 그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형과 함께 조지아 국립 무용단의 견습 무용단의 일원이다. 정식 무용단이 되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승승장구할 날을 꿈꾸며 밤에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오늘도 열심히 온몸이 젖도록 춤을 춘다. 

하지만 강인하면서도 남성적인 몸짓을 지향하는 보수적인 무용단의 전통에서 메라비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동작은 늘 지적의 대상이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한때 국립무용단원이었지만 이제는 시장판에서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더욱 절박하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춤보다는 매일 사람들과 어울려 술에 취해 들어오는 '노답'인 형, 거기에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어머니에, 할머니까지, 돈이 없이 전기까지 수시로 나가는 메라비의 가정에서 돌파구는 그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 밖에 없다고 메라비는 믿는다. 

정식 단원이라는 돌파구, 하지만 아버지는 그가 열망하는 조지아 국립 무용단 자체가 '미래'가 없다며 그를 설득한다. 아니 조지아 국립 무용단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루지야'라는 지역명이 더 익숙한, 세계에서 '국호'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1/3에 불과한, 나라 크기가 아니라, 러시아와 터키 등 이웃 나라 틈바구니에서 국가의 존재 자체가 불투명한 조지아에서 살아가는 젊은 청년 메라비의 '미래' 자체가 불투명함 그 자체다. 더구나 '빌리 엘리어트' 속 탄광촌 소년 빌리처럼 메라비의 아버지도 뛰어넘을 수 없었던 춤에 전념할 수 없는 가난한 '출신'의 한계가 역시나 메라비의 발목을 잡는다. 

그럼에도 더욱 열심히 자신에게 유일한 동앗줄일 수도 있는 기회에 목을 매는 메라비, 그런 그의 앞에 이라클리(바치 발리시빌리 분)가 나타난다. 빠진 단원을 대신하여 등장한 이라클리, 그는 절도있고 완벽한 동작으로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시선을 사로잡고 메라비의 자리마저  빼앗아 버린다. 그런 이라클리에게 시기심을 느끼는 것도 잠시 어쩐지 자꾸 메라비의 시선이 그를 향한다. 하지만 정식 단원이었던 한 청년이 동성애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수도원에 유폐되는 처지가 되듯 보수적인 조지아, 그 중에서도 더욱 보수적인 국립 무용단에서 메라비가 느끼는 감정은 '터부'를 넘어 '매장'감이다. 

하지만 메라비는 이라클리을 향한 설레임을 숨길 수 없다. 그가 벗어놓은 티셔츠의 냄새로 그의 체취를 느끼듯 메라비의 마음은 자꾸만 이라클리를 향하고 그런 메라비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이라클리 역시 '호의'를 넘어선 친근함을 표한다. 

<그리고 그들은 춤을 추었다>는 조지아 최초의 LGBTQ(성소수자) 영화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메라비와 이라클리의 '사랑'은 그저 성적인 지향만을 뜻하지 않는다. 조지아라는 미래가 불투명한 사회에 속한 불안정한 젊음에 닥친 '성장통'을 상징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불투명한 젊음의 도화선이 된 사랑 
주인공 메라비가 처한 상황은 그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그가 추고자 하는 전통 춤의 미래도, 그럼에도 그가 되고싶은 국립 무용단원도, 그리고 그의 가정도 그 무엇도 메라비에게는 녹록치 않다. 거기에 보수적인 조지아 사회와 더 보수적인 국립 무용단에서 '금기'시되는 이라클리의 사랑이 그의 불투명함을 가속시킨다. 

메라비는 가정 형편에서도, 그리고 국립 무용단이 지향하는 춤의 지향에서도 비껴가지만 어떻게든 자신이 '성공'이라고 목표한 그것에 자신을 꿰어맞추려고 한다. 선생님이 그의 섬세하고 우아한 춤사위를 지적하면 지적할 수록 그는 정식 단원이 되기 위해 남들 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이 노력한다. 아버지가 가능성이 없다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그 불가능을 돌파해 보고자 한다. 전기조차 나간 형편에 형이 '편법'으로 전기를 끌어오지만 메라비는 그런 형이 못마땅하다. 대신 아르바이트에서 팁으로 받은 돈을 고스란히 가져다 주고, 남은 음식을 싸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성실'하게 살아가려 한다. 

그렇게 현실에 저당잡혔던 메라비에게 '이라클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라클리를 향해 숨길 수 없는 마음은 결국 '금기'의 선을 넘게 만든다. 그리고 이라클리의 부재로 인한 방황이 동료의 눈에 띄게 되면서 그의 정체성이 무용단 내부에 '소문'이 되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 '부재'는 메라비의 부상으로 이어져 그토록 집착했다시피한 오디션의 기회마저 날려 버릴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얻고 싶었던 이라클리, 정작 그 이라클리는 메라비의 '순정'에 아랑곳없이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메라비의 형이 그랬듯이, 이라클리 역시 돌아가실 어머니, 부양해야 할 어머니를 위해 고향 마을로 돌아가 약혼자와의 삶을 선택한다. 그렇게 메라비의 사랑도, 형도 자신에게 닥친 현실에 '타협'하는 선택을 하고 만다.  그들은 조지아라는 지리적 공간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울타기에서 한 발짝도 나서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그렇게 살아가려 한다. 

 

  ​​​​​​​

조지아의 백조 
영화는 메라비의 '사랑'을 통해 조지아, 나아가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펼쳐진 두 개의 길, 두 가지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자 한다. 형, 그리고 이라클리보다 어쩌면 더 철저하게 현실에 자신을 꿰어맞추려 노력하던 메라비는 열정적인 순간을 뒤로 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해버린 이라클리의 결정 앞에서 좌절하고, 반항한다. 그리고 그 '반항'은 그를 자유롭게 한다. 그가 지금껏 꿰어맞추려 했던 '현실' 앞에서 그는 한껏 자신이 하고 싶었던 춤사위로 자신을 증명해 낸다. 가장 부드럽고, 가장 섬세하고, 섹시하기까지 한, 조지아의 전통적 춤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그런 몸짓으로 '그만하라'는 지시가 무색하게 자신이 추고 싶을 때까지  한껏 자신을 표현해 낸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백조의 호수가 '승리'의 순간이었다면, <그리고 그들은 춤을 추었다> 속 메라비의 독무는 처절한 '실패'의 순간이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성공'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순간이다. 그리고 터부시되어 온 자신의 정체성을 춤에 얹어 한껏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스스로 걷어찬 성공의 순간, 아니 성공이라고 스스로를 마취시켰던 마법에서 자신을 해방시킨 순간, 그래서 <그리고 그들은 춤을 추었다> 속 메라비의 독무가 <빌리 엘리어트> 속 백조가 된 빌리의 '춤사위' 못지 않게 '감동'을 준다. 열광해주는 관객이 있든 없든 그 춤사위들은 동일하게 자신을 극복해낸 '비상'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추고 싶었던 춤을 한껏 추고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간 메라비, 이제 더 이상 그는 국립 무용단에도, 조지아라는 사회에도, 그리고 그를 바닥으로 내리쳤던 사랑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젊음,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영화는 그걸 말해주고 있다. 



by meditator 2020. 11. 28. 03:50

아마도 다음 배우 김혜수의 인생작이 등장하기 전까지 <내가 죽던 날>은 오래도록 김혜수의 인생작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성숙한 자태에 앳된 목소리로 청소년 시절부터 이미 조선의 여인상을 연기했던 김혜수는 이후 세련된 헤어와 옷차림으로 대표적인 도시 여인의 대명사가 되었고 붉은 색 입술을 진하게 바른 채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섹시한 여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늘 '배우', 그 중에서도 '여배우'라는 호칭이 어울리던 사람, 그래서 유수의 영화제에서 화제가 되는 의상으로 사회를 보는 것이 잘 어울리는 스타, 그런데 <내가 죽던 날>에서 '배우'가 아닌 사람 김혜수의 냄새가 맡아진다. 


 

하지만 <내가 죽던 날>을 그저 배우 김혜수가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만 기억하는 건 아쉽다. 지난 2008년 서울 국제 여성 영화제 아시아 단편 경쟁 부문에서 <여고생이다>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박지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내가 죽던 날>은 21세기의 고립된 '관계'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닥칠 수 있는 삶의 위기에 대한 '위로'를 담아냈다는 점에서 2020년이 길어낸  '힐링' 영화가 아닐까 싶다. 

'관계'로 부터, 세상으로부터 방출된 사람들 
이야기의 시작은 형사 현수(김혜수 분)로 부터 시작된다. 병가를 내고 휴직 중이었던 현수는 복직을 하고자 한다. 그녀는 괜찮다지만 상관에서부터 친구이자 동료까지 그녀의 이른 복직을 우려한다. 

그도 그럴 것이 휴직 이전까지 변호사이던 남편을 두고 직무에 있어서도 승승장구하던 현수, 하지만 그녀가 가졌던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승진을 앞두고 임신을 미루자던 그녀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일 만큼 그녀의 지원군이었던 남편에게는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가 있었고 현수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그녀에게 이혼을 요청한 남편은 그 이유로 외려 그녀와 후배 형사와의 돈독한 관계를 '불륜'이라며 문제 삼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에게 닥친 일들, 그녀는 어떻게든 '의연'하게 버텨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날 유치원 하원 버스와 차량 충돌을 일으킨 현수, 그 이유는 감각을 잃어버린 그녀의 팔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닥친 충격이 신체적 증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무감각한 자기 팔의 감각을 견디지 못해 '자해'까지 하게 된 현수는 결국 '휴직'을 하게 되었고, 이제 다시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복직'을 하고자 한다. 

그렇게 아직은 이르다는 '복직'을 하려는 현수에게 맡겨진 사건은 몰아치던 날 절벽에서 사라진 소녀 세진에 대한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세진(노정의 분), 하지만 그저 부잔줄 알았던 아버지가 탈세 사건에 연루되었고, 스스로 묻혀질 뻔한 아버지가 저지른 범죄의 '증인'이 된 소녀, 그래서 경찰은 세진을 증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외딴 섬에 '안치'한다. 그런데 세진이 어느 날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건을 조사해가던 현수는 복직을 위한 형식적인 요식 행위에 걸맞는 사건인 세진의 사건에 집착하게 된다. 그건 바로 세진의 '보호'를 명목으로 설치한 cctv에 잡힌,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세진의 행적에서 바로 현수 자신의 현재가 자꾸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는, 아니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삶을 살다 하루 아침에 그 삶에서 방출된 세진이 처한 처지가, 그리고 그럼에도 어떻게든 섬에서 살아보고자 애쓰는 모습이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에 어떻게든 '잡혀먹지' 않고 버텨보려는, 그래서 남들이 말리는데도 이른 복직을 하며 현실의 삶에 자신을 끼워 넣으려는  현수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수의 사건을 놓치못할 수록 바로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세상의 모든 '관계'로 부터 방출된 듯한 세진의 절망감에 현수는 고통스러워한다. 

그렇게 현수가 세진의 사건을 통해 자신과 현수를 세상이 자꾸 밀어내는 듯한 절망감에 빠져드는 가운데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세진이 살았던 섬 사람이지만 섬 사람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천댁(이정은 분)이다. 

예전에는 다른 섬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던 순천댁, 하지만 동생이 죽고, 그 동생의 하나 밖에 없는 딸마저 '세상'을 멀리하려 하는 '사건'을 겪으며 스스로 세상과 자신을 단절한 채 살아왔다. 가족이었던 사람들을 잃어버릴 뻔한 과정에서 목소리마저 잃어버린 순천댁은 섬 사람이었지만 '그림자'처럼 살아간다. 


 

방출된 현수와 세진에게 내밀어진 '손'
<내가 죽던 날>은 이렇게 각자 벌어진 '사건'을 계기로 '세상'에서, 자신이 맺었던 관계에서 방출된 세 사람 현수, 세진, 순천댁의 이야기를 '세진'의 실종 사건을 매개로 풀어낸다. 

우리는 한 사람의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어 주는 건 점과 같은 존재인 우리를 엮어주고 이어주는 관계들이다. 하지만, 그 이어주는 매듭들은 견고했으면 하는 우리의 '갈망'과는 달리 헐겁다. 꽉 묶인 매듭인 줄알았는데 하염없이 풀어져버려 다시 내 존재를 '점'으로 만들어 버리는 관계들, 그렇게 관계에서 풀려난 존재는 '고립무원의 '점'이 되어 자신이 세상 밖으로 던져진 것처럼 상실감에 시달린다. 

영화는 그럼에도 어떻게든지 자신에게 닥친 운명에서 도망치지 않으려 애쓰는  현수와 세진, 그리고 순천댁의 삶을 그려낸다.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들에게 휘몰아친 여러 사건들 속에서 그들은 견디고 버티려 한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팔을 자해하면서까지 현수는 세상에 자신을 끼어넣으려 한다. 세진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게 애를 쓰면 쓸 수록 더 세상이 자신을 밀어내려 하는 것같다. 현수도, 세진도 그 막막함에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적이고 발버둥친다. 그리고 그 발버둥친 노력의 끝에서 '절벽 실종'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영화는 눈밝은 관객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 흘러간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지 않은 전개에도 불구하고 그 내밀어진 '손'이 주는 위로가 뭉클하다. 그건 <내가 죽던 날>이 전개 과정에서 드러난 이혼 등의 '사건'이 아니라, 현수와 세진, 그리고 순천댁이라는 주요 인물에 '천착'하여 집중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세 배우의 울림있는 연기를 통해 우리 시대의 증후군과도 같은 '존재의 상실감'을 진득하게 따라가게 된다. 그리하여 그 끝에서 '연대'의 실마리를 펼쳐낸다. 

다르지만 결국 같았던 세 사람, 거기에 세진의 사건을 포기할 수 없었던 현수의 집요함이, 자신의 팔을 짖이겨서라도 세상에 자신을 끼워넣어보려던 삶의 의지가, 그저 짓밟힐 풀 한 포기같은 세진을 돌아보아준 순천댁의 마음이,  아니 애초에 조카를 자신처럼 돌보던 순천댁의 측은지심이, 순천댁의 자식같은 조카에게 마음을 보여준 세진의 연민이 끈이 되어 '삶'을 나락에서 건진다. 나풀거리는 점같은 존재들이 세상에서 떨궈지는 것도 한 순간이지만, 동시에 그 점같은 존재를 세상에 다시 묶어주는 실낱같은 '인연'도 그렇게 다시 우리를 찾아온다.

by meditator 2020. 11. 18. 22:05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살며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구두닦이, 껌팔이, 아이스크림 장사 등 돈이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16살이 되던 1964년 평화시장 피복 제조업체에 시다가 되었다. 14시간 노동에 당시 커피 한 잔 값에 불과한 일당 50원, 햇빛보다 백열등이 익숙하던 십대의 청년은 자기 동생 또래 여공이 먼지가 가득한 공간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 열악한 현실에 분노했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를 외쳤다.

 

 
 
한 사람의 삶을 이끄는 건 무엇일까? 그의 사회적 존재? 그가 만나게 된 사람? 평화시장 시다가 된 노동자 청년 전태일은 자신과 자신보다 어린 여공들의 삶을 목도하고 현실에 자신을 던졌다. 그의 무기가 된 건 ‘근로 기준법’이었다. 하지만 영화 <마틴 에덴> 속 선박 노동자 마틴에게는 다른 삶의 ‘기회’가 온다.
 
노동자 마틴 사랑을 만나다  
배에서 일하는 노동자 마틴(루카 마리넬리 분), 그는 일을 하는 틈틈이 책을 놓지 않는 청년이다. 그런 그가 우연히 부두에서 부랑배에게 구타를 당하던 엘레나(제시카 크레시 분)의 동생을 구해주며 상류층인 엘레나의 집에 초대된다. 피아노를 우아하게 연주하며, 불어를 안다는 마틴의 엉성한 발음을 수정해 주고, 그가 관심을 보인 보들레르의 시집을 주는 엘레나에게 마틴은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마틴 에덴>은 실제 노동자 출신이었던 작가 잭 런던의 자전적인 작품이다. 주먹 패거리의 두목이자 일자무식이었던 뱃사람 마틴이 상류층 여인 루스를 만나 그녀의 인도 아래 문학과 학문의 세계로 인도되어 작가가 되고자 한다는 이야기는 스웨덴 노동자 모르덴 에딘을 모델로 했지만 잭 런던 자신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10대 시절부터 통조림 공장 노동자를 시작으로 여러 하층의 직업을 전전했던 잭 런던은 그가 살아왔던 삶의 모순적 모습을 <마틴 에덴>에 담아냈다.
 
영화 <마틴 에덴>에서 마틴에게 엘레나를 사랑하는 ‘방식’은 그녀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틴은 닥치는 대로 읽었고 쓰기 시작한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마틴은 그녀의 우아한 불어, 그녀가 치는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 그리고 그녀가 풍기는 지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녀처럼 ‘지적’인 인물이 되면 그녀와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가 헌책방에서 찾은 책들을 닥치고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된다. 특히, 그가 헌책방에서 찾은 스펜서의 책, 거기에 담겨있는 ‘사회 진화론’이 부두 노동자로, 주물 공장 노동자로 전전하며 살아온 마틴의 의식을 각성시키며 그로 하여금 노동자로서의 의식이 첨예한 글을 쓰도록 만든다.
 
사랑을 위해 ‘지적인 인물’이 되고 싶었지만, 그 ‘지식’이 그로 하여금 계급적 각성을 일깨우게 된 처지, 그래서 마틴은 자신이 깨닫게 된 것을 그의 ‘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글’이 세상에 발탁되면 그 ‘돈’으로 엘레나와 사랑을 이루겠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의 글은 엘레나를 그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 

 

 
 
엘레나와 루스 사이
그런 그에게 엘레나가 바라는 ‘지적인’ 영역은 달랐다. 마틴에게 보들레르의 시집을 빌려주며 그의 지적 각성에 문을 열어 주었지만 그저 평범한 상류층 여성이었던 엘레나는 마틴이 아버지의 지인처럼 ‘회계사’가 되어 자신을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길 원했다. 그래서 마틴이 자신의 생각에 확고해지면 질수록 엘레나는 마틴과의 사이에서 벽을 느끼게 되어간다.
 
엘레나를 사랑하지만 그녀와의 계급적 장벽에 한계를 느끼던 마틴, 그런 와중에 엘레나의 집에서 시인이자 사회주의자였던 루스 브리센덴(카를로 세키 분)와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통해 피에트로 마르셀로 감독이 원작의 배경이었던 뉴욕 대신 배경으로 삼은 이십세기 중반 이탈리아 사회 운동, 노동 운동의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엘레나 집에서 그에게 조롱과 냉소를 퍼붓는 이들에게 보들레르처럼 경멸과 냉소를 당당하게 퍼부을 수 있는 마틴, 하지만 오랫동안 헌책방에서 찾은 책을 통해 홀로 자신의 생각을 굳혀온 마틴은 스펜서 등을 통해 사회적 모순에 첨예한 의식은 지녔지만, 동시에 그에게 개안을 하게 해준 ‘사상’의 한계 역시 고스란히 받아들여 ‘개인주의’라는 한계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개인’의 주체성을 주장하며 외려 그들의 ‘조합 운동’을 논박할 정도로.

 

 
 
상류층의 여성 엘레나와 사회주의자 시인 루스, 두 사람은 책을 좋아하던 청년 마틴에게 세상을 향한 두 방향의 길을 열어 주었다. 마틴은 기꺼이 자신은 엘레나를 사랑하니 엘레나가 열어준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틴이 선택한 길은 엘레나가 서있는 ‘부르조아’적인 삶도 아니고, 그렇다고 루스가 그에게 펼쳐보인 계급적 각성을 실천으로 옮긴 노동자의 길도 아니었다. 자의식으로 그는 저들에게 복종하는 이들을 ‘개’라 일갈하는 투쟁적인 정신을 가졌지만, 그 정신은 그의 글 속에서만 분기탱천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랑이 아닌 ‘속물적 계급’의 얼굴을 드러내 보인 엘레나를 사랑할 수도, 그렇다고 루스가 열어 보인 계급적 실천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던 마틴, 그런데 운명은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의 수단으로 여겼던 글이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은 시점에 그에게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열어준다. 하지만 사랑했던 이들이 열어 준 두 길 사이에서 이미 마음의 방향을 잃은 마틴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세상의 찬사에 더는 환호할 수 없다. 
 
애초에 그가 글을 써 ‘명성’과 ‘부’를 얻으려는 이유가 ‘사랑’이었다. 하지만, 엘레나가 다시 그에게 찾아왔지만 마틴은 안다. 처음 책을 좋아하던 청년에게 보들레르를 건네던, 그가 그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던 그 ‘지적’인 여인은 없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던 청년은 유명 시인이 되었지만 자신 앞에 펼쳐졌던 두 갈래 길 사이에 자신의 길을 만들 의지도, 열의도 잃는다. 아니 세상에는 애초에 마틴이 가고자 했던 길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by meditator 2020. 11. 6. 23:26
| 1 2 3 4 5 ··· 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