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은 후 홍상수 감독과 관련된 기사는 '가쉽성'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그의 영화에 대해 별무관심이었던 매체들이 그의 '스캔들'에는 유독 열성이었고 성실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하여 감독은 말을 아꼈다. 여전히 묵묵히 자기의 자리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극장에 걸었다. 그 중 하나가 <클레어의 카메라>이다. 하지만 변해진 세상 인심 때문이었을까? 모처럼 혼자 오붓하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만끽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가쉽'으로 자신을 재단했던 세상에 대해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입을 열었다. 그 '일'에 대해? 아니, 그 '일'을 다루는 세상 사람들의 '말'과 '태도'에 대해. 


물론 이번에도 영화의 중심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들은 사랑인지, 바람인지, 모를 관계를 맺었고, 그 '관계'로 인해 주변 관계들조차 복잡해 졌다. 더구나, 한국도 아닌 영화를 홍보하러 간 '칸'에서. 



솔직하지 못해서 짤린 전만희 
영화의 축제로 북적이는 칸, 하지만 골목으로 들어서면 한적하다. 그곳 카페에 홀로 오도카니 앉아있는 전만희(김민희 분), 다가온 지인은 바쁜 영화제 기간 중에 영화사 직원으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그녀를 의아해한다. 그런 지인에게 자신이 어제 그 자리에서 대표 남양혜(장미희 분)에게 해고되었다고 전하는 만희. 

홀로 남은 그녀는 자신이 겪은 '해고'를 복기한다. 하루 전날 그 까페의 그 자리에 마주 앉은 남양혜와 전만희, 남양혜는 말을 꺼낸다. 자신이 만희를 고용한 이유에 대해, 솔직하고 진솔한 그녀의 면모가 고용 이유였다고 운을 띄운 남대표, 하지만 언제나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했듯, 그녀를 고용했던 그 이유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만희를 해고하는 이유로 돌변한다. 알고보니 솔직하지 않다는 밑도 끝도 없는 '평가'로 단칼에 만희를 해고하는 남대표. 하지만 도무지, 제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솔직하지 않음'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만희는 그간 함께 했던 정으로 사진까지 찍고 헤어졌지만, 고스란히 그녀에게 '상처'로 남는다.

만희에 대한 이유을 알 수 없는 해고는 다음 장면 남대표와 소완수(정진영 분) 감독의 만남을 통해 짚어진다. 단번에 일자리에서 짤려야 할 만큼 솔직하지 않았던 만희의 해고 사유에는 소완수 감독과의 '스캔들'이 있었던 것이다. 술에 취해서라고 변명을 하지만, 결국 남양혜와의 사업 이상의 밀월 관계를 정리하려는 소완수의 태도로 보건데, 그와 만희와의 관계는 하룻밤 술로 인한 실수 이상인 듯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건, 그간 흔히 홍상수의 영화에서 늘상 등장해 왔던 남자와 여자의 관계와 그 속내가 아니다. 물론 여전히 소완수라는 남자는 예의 홍상수 영화 속 캐릭터를 연기한다. 남양혜와 사업 이상의 관계를 지니면서, 그녀의 부하 직원인 젊은 만희와 스캔들을 벌인 '찌질한 남자'이다. 심지어 그의 옆자리에 앉은 이방인 클레어에게 수작인지 관심인지 모를 소완수의 행동거지는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다. 



'언어의 폭력'
그런데 홍상수 감독은 늘상 그가 해왔던 그 이야기를 조금 비튼다. 홍상수 영화 속 남자와 여자의 대화들은, 그간 '사랑하고 싶다',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자고 싶다'의 장황하고도 구차스러운 은유의 난무였다. 그런데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그 노골적인 추파는 생략되었다. 대신, 다른 장황한 은유들이 난무한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전만희와 남양혜 사이의 대화이다. 결국 이후의 장면으로 보건대, 그간 소완수와의 사업 이상의 파트너 쉽을 가져왔던 남양혜는 소완수와 전만희의 해프닝을 눈치채고 그걸로 전만희를 해고한다. 결국 '사적'인 스캔들로 전만희의 밥줄을 자르는 '갑질'의 횡포를 부린 것이다. 물론 소완수와 밀월 관계를 가져온 남양혜 입장에서 전만희가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간 자신의 사업체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던 전만희를 하루 아침에 해고하는 건 '폭거'다. 그리고 영화는 그 '과정'으로 가장 추상적인 '솔직하지 못하다'는 식의 남양혜의 '언어적 폭력'에 주목한다. 

즉, '사적'인 문제를 '공적'으로 처리하는 그 공정하지 못한 방식,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속보이는 이유를 포장하는 추상적이고도 도덕적인 평가의 언어들, 그것은 그간 우리 사회가 홍상수 감독의 사생활을 대하는 방식의 '치환'이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남양혜는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소완수 감독에게, 은근 슬쩍 자신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갑'임을 흘린다. 사적인 관계를 정리해도 사업은 잘 해보자는 감독의 말에, 글쎄라며 여지를 흘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남양혜의 태도에, 소완수는 자신이 던졌던 '관계의 정리'를 '이쁘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그런 소완수에게 '남양혜'는 자신을 예전처럼 이뻐해 달라며 여전한 밀월 관계의 지속'을 '요구'한다. 

이렇게 <클레어의 카메라> 속 남녀 관계는 그간 '찌질한 속물 남자와 여자'라는 본능의 관계에서, 남녀의 외피를 쓰지만, '갑을'이라는 권력의 관계로 변화되어 나타난다. 그건, 이후에 우연히 건물 옥상에서 만난 소완수와 만희의 관계에서도 연속적으로 드러난다. 영화 관련 모임이 열리는 건물 옥상, 아직 칸을 떠나지 못한 만희가 정장 느낌의 '직원룩'을 벗어난 핫팬츠 차림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으로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영화 홍보를 하다 등장한 소완수, 그는 만희의 옷차림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펼쳐 보인다. 

말이야 왜 그렇게 자신을 헐하게 내던지려는가 라는 만희를 아끼는 듯한 어르신의 훈계지만, 결국 이른바 우리 사회에서 흔히 등장하는 '쉬운 여자론'의 연장일  뿐이다. 아직도 만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어쩌지 못한 소완수으 찌질한 감정의 배설이지만, 그 '배설'이 '감독님'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만희'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때 그건 '언어'의 외피를 지닌 '감정의 폭력'이다. 

이렇게 <클레어의 카메라>는 여전한 남녀 관계를 가지고, 그 '남녀 관계'를 소비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해석으로 전환된다. 남녀라는 본능적 관계조차도, 그게 영화사 대표와 직원, 영화사 대표와 감독, 나이든 감독과 젊은 홍보사 여직원이라는 사회적 관계로 맞물리게 되면, 그들 사이의 관계는 그저 얽혀진 남녀 사이을 넘어선 '위계'가 되고, 그들 사이의 언어는 '본능'의 포장을 넘어선 '권위'의 억압적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다. 즉 이전의 홍상수 감독이 다루었던 언어가 개인적인 '파롤(parole)'에 치중되어 있었다면, <클레어의 카메라> 속 언어들은 사회적인 랑그(langue)'에 집중한다. 소완수가 클레어가 구사하는 이방의 언어에 무조건적인 감탄과 찬사를 더하며 접근하는 그 '방식'도 예외는 아니다.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이렇게 달라진 관계들 사이에서 그녀의 발걸음처럼 통통 튀며 이야기를 환기시키는 건 영화의 제목인 그녀, 이자벨 위페르가 분한 클레어이다. 그녀는 마치 카메라를 든 철학자처럼, 자신의 사진 한 장의 '마법'을 설파한다. 그녀의 카메라를 통해 '솔직하지 못했다'던 만희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칸까지 초청받는 명감독이라던 소완수는 '알콜릭'이 의심되는 칠칠맞은 남자로, 도도한 남양혜는 '이상하고 우스운 여성'이라는 '뜻밖의 진실'을 드러내고야 만다. 그리고 그 '진실'은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누군가에겐 '깨달음'을 준다. 어쩌면 '현학적인 세상의 말'에 현혹되었던 관객에게도. 

<클레어의 카메라>를 여전한 홍상수의 구구절절한 자기 변명으로 볼 지, 그게 아니면 세상에 던진 감독의 일갈로 볼 것인지, 그도 아니면 여전한 해프닝으로 볼 것인지, 그건 '클레어의 카메라' 속 스냅 사진 한 장의 의미와도 같다. 그건 홍상수 감독의 '사적'인 일을 어떻게 '소비'라는가에 대한 , '소비'해왔는가에 대한 각자의 감회에도 잇닿아진다. 적어도 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 <클레어의 카메라>는 홍상수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다릴 만한 가치를 준 작품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세상을 맴돌며 하나의 화두에 천착하던 감독이 본의 아니게 세상 밖으로 한 발을 내딛은 작품처럼 여겨졌다. 과연 다음엔 그가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건넬지 궁금하다. 거기에 덧붙여, 김민희만큼, 아니 김민희보다도, 이자벨 위페르보다도 아름다웠던 장미희라는 여배우를 다시 발견하게 해준 홍상수 감독의 다음 뮤즈가 궁금하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8. 5. 3. 21:28

역대의 마블 영웅들이 한데 모여 절대 악 타노스를 대항한 전쟁을 벌인다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티니 워)>의 개봉 소식을 듣고 가장 관심이 갔던 건, 이들 걸출한 영웅들의 집합체인 '어벤져스'를 소모하지 않고 제 몫을 다하여 전쟁을 수행할 것인가였다. 아이언맨에서 토르, 헐크,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 등 기존의 어벤져스 팀은 물론, 새로이 합류한 닥터 스트레인지에 블랙 펜서, 스파이더맨, 심지어 <가디언즈 갤럭시> 시리즈의 스타로드, 로켓, 그루트 등까지 이미 한 시리즈를 이끌었던 내노라하는 신진 영웅 그룹까지 이제는 '방만'하다고 할 이들 '히어로'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속담이 절로 생각나는 면면들이다. 다들 얼굴 한번씩만 비춰주고 나면 영화 반이 훌쩍 지나갈 것같고, 그들이 제 각기 활약을 한다치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것만 같은 이 장황한 히어로들의 서사를 과연 <인피니티 워>는 제대로 꿰어낼 것인가, 아마도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때론 그들의 활약이 아쉬울 망정, 적어도 구슬 서말이 저마다 나동그라져 가지는 않았다는 소감이 들 것이다. 




'나쁜 정의' 타노스
그리고 그들을 '구슬 서말의 보배'로 만든 중심에는 최강 빌런, 절대 악 '타노스(조쉬 브롤린 분)'가 자리한다. 이미 2012년 <어벤져스>를 통해 그 존재를 알렸던 그는 '소문'답게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겨우 생존한 '아스가르드'의 우주선을 파괴하면서 '진정한 종말'의 서막을 연다. '북유럽 신화' 속 '신들의 황혼', 세계의 종말이 절묘한 '우주'로의 '항해'를 통해 새로운 희망이 되었는가 싶더니, 그것을 압도하는 '타노스의 심판'이 등장해 버린다. 

타노스, 그 이름에서는 '죽음과 파괴의 본능' 타나토스'가 연상된다. 그리고 그 이름답게, 자신의 출신 별 타이탄에서부터 '자원의 고갈, 인구의 과밀'에 대한 해법으로 무차별적인 '인구 절반의 절멸'을 주장한 이래 '행성' 곳곳을 다니며 자신의 신념을 '과감하게, 과격하게'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의 행보는 이미 예고된 대로 '지구별'을 향하고 있었다. 

'타노스'의 이런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역사적, 철학적 근원을 가진다. 이미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략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인구론을 주장한 바 있는 '멜서스'로 부터 한정된 지구 자원을 압박하는 인구 증가에 대한 해결적 입장들이 등장한 바 있다. 가난한 이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어 인구 증가를 막아야 한다는 멜서스 이래, 나찌의 합목적적 '열등 인자'의 제거를 핑계로 '인종 청소'를 거쳐, 20세기 미국의 '강제적 피임' 사례까지 '역사'는 '의도적이며 합목적적인 인구 조절'의 역사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런 '과밀한 인구의 청소'에 대한 과격한 사상은 <킹스맨1>과 소설과 영화< 인페리노>를 통해 '실행'된 바 있다. 그리고 바로 그 '합목적적 의도'를 가진 '인종 청소'의 정의를 '타노스'가 들고 나온다. <킹스맨>에서 화학 무기 대신 타노스는 우주의 힘을 지닌 '인피니티 스톤'으로, 심지어, 그는 그저 '인피니티 스톤'을 향한 욕망으로만 여겨졌던 그의 행보가, 비록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그녀의 죽음에 '악어의 눈물'이 아닌 눈물을 흘리며 '진정성'을 보이며 그저 파괴의 폭군이 아닌, '나쁜 정의'의 수호자로 영화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렇게 '사공이 많은 배'의 대항마로 '확고한 철학과 세계관'을 설정하며, 어김없이 '마블'은 '히어로의 활약' 이전의 '정립된 세계관'이라는 자신의 '장기'를 통해 다시 한번 마블 월드을 확장해 나간다. 

히어로들의 무차별적 연대
그리고 이런 자신만의 분명하고도 심지어 타당해 보이기까지 한 이유를 지닌 타노스의 광폭한 절멸의 행보에 지구의 위기, 나아가 전 우주의 위기을 막기위한 그 '급박한 목적'만으로, 그리고 멸망을 막아서려는 '순수한 마음'만으로 '히어로'들이 '어벤져스' 군단으로 거듭난다. 

타노스의 합리적, 하지만 그래서 더 위험한 나쁜 정의와, 그에 대항한 '절멸을 막기 위한 열정'의 히어로 군단을 보면 문든, 예전 미드이 한 장면이 떠오른다. 지난 1977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아들과 딸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미드 <eight is enough>는 제목처럼 8명의 아이들 둔 가정의 에피소드를 다룬다. 그 중 한 장면, 1977년이라지만 당시도 '인구 증가'가 심각하게 여겨지는 상황, 인구 증가에 우려를 나타내는 학자와 피치 못하게 한 엘리베이터를 타게 된 아빠는 그곳에서 학자와 논쟁이 벌어진다. 폭발 직전의 지구에서 '몰상식하게' 아이를 8명이나 낳았다는 학자의 비난에, 아버지는 '현답'으로 그 자리를 모면한다. '아버지의 '현답'이란 다름아닌, '생명'의 강제적 '단종' 대신, 혹시나 미래 자신들의 아이 중 하나가 그 '인구 폭발'에 대한 해법을 가지 '희망'일 수도 있지 않을까란 막연한 긍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도대체 합리적 이유나, 타당한 설명도 없이, 그저 막연한 '긍정'과 '희망'은 꽤나 설득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8명의 자식을 둔 아버지의 긍정적 세계관'은 언제나 '미국'에서 만들어 지는 다수의 '히어로물'에서 관통한 세계관이기도 한다. 청소년의 영웅 심리도, 자기 가족에 대한 복수심도, 그리고 시대를 거스른 국가적 사명감도 혹은 반항심도, 그리고 신화에서 튀어나오거나, 연구실에서 튀어나온 이종의 영웅도, 심지어 '돈' 앞에서 이합집산하던 떠돌이들마저도 자신들이 기반한 존재의 위기 속에서는 언제나 힘을 합쳐 하나가 됨은, 서부 영화, 전쟁 영화를 통해 관통되던  51개의 별이 모인 '성조기'로 상징되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위기 앞에서는 하나가 되자는 '아메리카니즘'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 방만한 캐릭터 군단들이, 서로의 이질감을 접어두고 절반의 절멸을 향해 거침없는 행보를 선보이는 타노스에 대항하여, '시간'의 지배하는 영적인 닥터 스트레인지와, 과학을 지배하는 아이언맨이, 아버지와 같은 아이언맨과 아들과 같은 스파이더맨이, 재벌인 아이언맨과 도적떼인 갤럭시 패거리가 그리고 이전 시리즈에서 서로 배척했던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와 토르가, 그 손을 맞잡아 타노스를 대적해 나가는 그 순간, 영화를 보는 관객의 '카타르시스'는 충족된다. 외려, 그들이 마치 거인 골리앗에 대항하여 돌 하나를 든 채 나선 '다윗'처럼 그 '맹목적 열정'만으로 관객들을 감동시킨다. 비록 이번 시리즈에서 그들이 '성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8명의 아버지처럼 '희망'을 접지 않는다. 왜? 그들은 '정의'로우니까. 그리고 '인간을 희생하지 않는, 지키려는 정의는 이길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는 긍정적 세계관의 확신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무엇보다 이들 히어로들의 장황한 '연대'와 '연합'에는 이미 '관객'들에게는 '배경지식'이 된 그들의 '전사'가 있다는 것을. 즉,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압도적 흥행은 마치 영화 속 그들 히어로들의 연대처럼, <토르>, <아이언맨>, <어벤져스>, 그리고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 시리즈을 모두, 혹은 개별의 시리즈로 보았던 '과정'의 질적 확산이다. 이미 그들의 '전사'에 대한 이해가, 비록 영화 속 등장과 함께 죽은 '로키'나, 무엇하나도 해보지 못한 채 스러지는 '윈터 솔져'등을 아쉽지만 용인할 수 있는 것이다. 와탄다의 들판에서 조우한 블랙 팬서와 캡틴 아메리카의 이질성에 이의을 제기하지 않는다. 한때 적이었던 이들의 어색한 만남에 미소마저 지어진다. 

즉 이미 그간의 시리즈를 통해 '마블'의 세계관의 전파가 이미 일정 정도의 수준을 넘어, '필독서'가 되어 기꺼이 관객들이 '타노스'의 침공에 마음을 합쳐 지켜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 어쩌면 파죽지세의 관객 증가세가 말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는 그간 우리의 영화계를 공습했던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그리고 오랜 시간을 거쳐서 빛났던 <스타 워즈>의 콘텐츠적 영향력을 압도한다. 마치 타노스가 하나 하나 끌어모으며 그 힘을 질적으로 승화시킨 인티니티 스톤을 장악한 타노스처럼, 그간 매번 '흥행'을 해왔던 '마블'의 시리즈들이, 그들의 연합군 앞에 우리 관객들을 투항시켜 버린다. 물론 거기엔, 아예 싸울 기세도 없이 손을 들어버린 우리 영화계의 무기력함도 한 몫을 한다. 
by meditator 2018. 5. 1. 17:53

이전에도 썼지만 프랑스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다름'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우리 나라 사회에서 익숙한 화법과 전혀 다른 '이방의 언어'는 그래서 매혹적이지만, 그래서 종종 '난독'을 불러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론 모호하고 때론 기괴한 언어들이 도달하는 곳이 결국은 인류 보편의 감성과 주제 의식이라는 걸, 영화 <맨 오브 마스크>는 일깨워 준다. 






영화 <맨 오브 마스크>는 형사 베르호벤 시리즈로 인기를 얻었던 추리 소설가 피에르 르메트르에게 영광의 콩쿠르 상을 안긴 <오르부와르>를 원작으로 한다. 오르부아르au revoir은 영어의 good bye와 같은 프랑스의 또 보자는 뜻의 인삿말이다. 하지만 소설의 제목 '오르부아'에는 보다 처절한 역사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오르부아'로 번역된 소설에는 là-haut가 생략되어 있다. au revoir  là-haut는 '천국에서 만나요'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1차 대전 당시 국가 반역죄로 총살을 당한 장 블랑사르라는 군인이 죽기 전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문구에서 인용한 말이다. 

전쟁의 볼모가 된 병사들 
프랑스는 1차 대전 당시 명령 불복종, 자해, 탈주, 비겁 행위, 반란 등의 명목으로 2천 4백 여명의 변사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 중 6백 여 명이 실제로 총살되고, 나머지는 강제 노역형을 치뤘다. 과연 사형이 선고된 2천 4백 여명의 병사들은 죄가 있었을까? 아내에게 천국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남기고 총살을 당한 장 블랑사르의 그 유언과 같은 문구를 100년 뒤 피에르 르메트르는 자신의 책 제목으로 삼으며, 전쟁터에서 명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병사들을 '볼모'로 '희생'시킨 국가, 전쟁에 대한 회의적 반문을 한다. 

그리고 그 '반문'을 위해 영화는 1차 대전의 종전을 앞둔 113고지의 전선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 당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장훈 감독의 2011년 영화 <고지전>과 같은 아군의 시체에 난 총상에 대한 의문스런 상황이 벌어진다. 전쟁이 이제 더는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감지한 병사들은 더는 총을 들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가 전쟁의 종식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전쟁'을 통해 획득한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잃고 싶지 않은 중위 프라델(로랭 라피테 분)은 가장 나이많은 병사와 가장 어린 병사 두 사람을 척후병으로 내보내고,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사라진 두 사람의 생명은 종식된 전쟁을 아수라장의 전장으로 복귀시킨다. 

명령에 따라 총검을 들고 참호 밖으로 나와 전진해야 하는 병사들, 그리고 하늘을 뒤덮는 포탄의 세례 속에서 알베르(알베르 뒤퐁텔 분)는 말과 함께 매몰되는 처지에 빠졌고, 말 때문에 겨우 숨을 쉴 수 있어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그를 동료 병사였던 에두아르(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분)가 끌어당겨 구한다. 하지만 동료의 생명을 구명하는 그 에두아르의 행위는 곧 그를 포탄의 저격 대상으로 만들고, 한 발의 포탄과 함께 그는 날라가 버린다. 다시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얼굴의 반을 가린 두건이 피로 흥건한 병원의 침상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몰핀을 훔쳐가며 죽어가는, 아니 죽고 싶어하는 그를 간곡하게 간호하는 알베르가 있었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파리로 돌아오지만 결코 그들은 전쟁 전의 그들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은행 출납원이었던 알베르에게는 다시 은행의 안정적인 일자리는 보장되지 않았고, 전 애인 마저 외면한 엘리베이터맨에서, 광고 샌드위치 맨으로 신분이 하락세를 탄다. 그래도 알베르에겐 멀쩡한 신체가 있었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조잡한 가면과, 보장할 수 없는 재건 수술마저 거부한 에두아르는 알베르가 훔쳐오다시피한 몰핀에 의존하여 버텨가는 절망의 나날만이 있었다. 

세 남자의 끝나지 않는 전쟁
영화는 '전쟁터에서 돌아왔지만 각자의 의미에서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 세 남자'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전쟁과 전쟁의 상흔을 '소비'하는 프랑스 사회에 대한 통찰이 있다. 전쟁을 도발하면서까지 자신의 명예와 지위에 집착했던 프라델은 '전쟁'의 상흔에 감성팔이하는 사회를 이용하여, 병사들의 이장과 매장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하고자 한다. 그렇게 '전쟁'을 통해 '입신양명'을 꿈꾸는 프라델의 맞은 편에는 전쟁터에서 부터 그의 '반국가적, 반인권적 행위'의 목격자가 된, 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처지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알베르가 있다. 그리고 '상이용사'로 자신의 삶을 자포자기하거나, 자신을 그런 처지로 만든 국가와 사회에 대해, 자신의 재능을 기꺼이 재물로 삼으려는 에두아르가 있다. 

결국 이들 세 사람을 국가를, 그리고 '전쟁'을 감성적으로 소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를 벌인다. 그들의 의도야 어떻든 그들은 '사기'의 주범이 되고, 하지만 프랑스 사회와 사람들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이런 사기극에 기꺼이 마음과 돈을 내어준다. 그리고 그 중에는 자신의 사업을 이어받을 재목이 아니라며 어릴 적부터 외면해오다, 뒤늦게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들에 대한 회한으로 거금의 기념비 사업 자금을 낸 에두아르의 아버지 페리쿠르도 있다. 



돈으로 자신들이 벌인 전쟁을 보상하고,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눈먼 돈'을 활용해 자신의 발판으로 삼거나, 궁극의 가난으로 부터 도피하고, 자신을 상이군으로 만든 사회를 징죄하고 도발하고자 하는 세 남자들, 그들이 사기친 돈을 그들을 구제했을까? 사기로 원하던 돈을 받아들고 기뻐하던 알베르, 그런 알베르에게 에두아르는 자기가 돈을 조금 써도 되겠냐고 묻는다. 당연히 네가 번 돈이니 얼마든지 쓰라는 알베르의 답, 조금 후 에두아르는 그의 기막힌 예술적 재능으로 돈다발을 갈기털이 휘날리는 멋들어진 사자 가면으로 둔갑시킨다. 그리고 에두아르에게 돈의 효용은 거기까지였다. 파리의 가장 화려한 호텔에서 벌인 파티도, 알베르가 권유한 돈을 갖고 식민지로의 도피도, 그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 무엇으로도 회복될 수 없는 트라우마 
한 판의 사기극 이후에 화려한 새의 가면을 쓴 채 공허한 눈빛으로 앉아있는 에두아르. 그의 심정은 결국 물질적 대가로는 회복되어질 수 없는 '사회적 트라우마'의 명징한 상징이다. 최근 4주기를 맞이한 세월호를 둘러싸고 다시 한번 재연되고 있는 '지겹다'는 돌림 노래에 대한 삼풍 백화점 참사 피해자의 호소문 속 심정과도 같다. 

나는 이런 종류의 불행과 맞바꿀만한 보상금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나 역시 당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그 돈이 그 후의 인생에 도움이 됐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일을 피하고 그 돈을 안 받을 수 있다면, 아니 내가 받은 보상금의 열배를 주고라도 그 일을 피할 수만 있다면 나는 열 번이고 천 번이고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당신들은 모른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 잘 모른다. 이런 사건 사고가, 개인의 서사를 어떻게 틀어놓는지. 사고 이후로 나는 세 번이나 자살 기도를 했다. 한순간 모든 것이 눈앞에서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을 본 후로 나는 세상에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고 언제나 죽음은 생의 불안을 잠재울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그깟 돈이 삶의 이유가 되어 줄 수 있을까.-산만언니, 딴지 일보 

어린 소녀의 공감어린 위로도, 알베르의 우정도, 사기를 통해 획득한 일확천금도, 그리고 그 사기의 목적이었던 사회와 국가, 그리고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조소와 복수도 에두아르의 삶을 회복하지는 못한다. 원작과 달리, 하지만 원작자인 피에르 르메트르가 감탄할 만큼 외려 뒤늦은 아버지의 참회는 그의 남은 생을 재촉하는 것으로 영화는 전쟁의 트라우마의 강렬함을 극대화시킨다. 알베르의 오랜 숙원이었던 죽어간 전우에 대한 숙제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했던 '흙의 매몰'이 대신해 준다. 그리고 뒤늦게 완수한 그의 임무가 식민지에서의 그의 체포에 대한 면죄부가 된다. 



뒤늦은 아버지의 참회를 불러온 에두아르의 재능은 아름답고, 절묘하고, 때론 기괴하기 까지 한 그의 가면으로 빛난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재능과 삶을 빼앗아 간 프랑스 사회에 대한 대국민 사기극의 수단이 된다. 아름답고 처연한 가면극과 미술적 재능을 군불 삼아 피어난 사기극의 여정이 향하는 건, 결국 '전쟁'에 대한 질문이다. '전쟁'이, 전쟁과 같은 사회적 트라우마를 낳는 사건들이 인간을, 사회를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한, 그럼에도 여전히 그에 대해 무신경한 사회에 대한 냉소이다. 1920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전쟁 후 그 전쟁을 잊어버리고자 요동쳤던 프랑스 사회를 관통한 갖가지 사기극이 도달하는 건, 1차 대전으로 상징된 사회적 참사에 대한 도덕적 질문이다. 전쟁으로 인해 왜곡된 세 남자의 생애가 벌인 때론 우스꽝스럽고, 슬프며, 기괴했던 여정이 도달하는 건 가장 원론적인 '인간 사회'의 문제이자, 도덕적 결론이다. 


by meditator 2018. 4. 21. 19:19

프랑스 영화를 본다는 건 어떤 것일까? 2015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처럼>이란 영화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한 관객들 중 여러 명이 결국엔 다음과 같은 자충수에 도달하고 만다. 그래서 도대체 '프랑스 영화'란 것이 무엇이냐고? 미적인 화면, 모호한 줄거리, 거기서 난해한 수학 공식보다 더 어렵게 찾아야 하는 철학적 명제? 아마, 1895년 이래 가장 일찌기 뤼미에르 형제 이래 영화라는 문화적 장르를 구축한 프랑스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내린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 듯 싶다. 하지만, 적어도 2018년에 '프랑스'의 영화를 본다는 건, 지금, 우리가 여기서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 이야기를 만난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그 확실한 '다른' 이야기를 선보인 작품이 지난 4월 5일 개봉했다. 바로 브루노 뒤몽 감독의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이하 슬랙 베이)>이다.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보는 바와 같이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이다. 하지만, 이 제목에 낚여서 혹은 이 제목에서 연상되는 '스릴러'의 장르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 영화를 접한다면 아마도 십중팔구 난감할 듯하다. 영화가 열리면서 벌어진 살인 사건, 혹은 연쇄 실종 사건에 집중하고 싶지만, 정작 영화는 한 눈을 너무 많이 판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브루노 뒤몽 감독의 장기와도 같은 것이다. 



살인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이 브루노 감독의 작품에서는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14년 <릴퀸퀸>이란 선례가 있다. <릴 퀸퀸>에서도 <슬랙 베이>에서 처럼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사건을 두 형사가 추격한다. 단지 차이라면 1910년의 바닷가 마을, 그리고 현재 어느 시골 마을, 하지만 그곳에서는 똑같이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두 명의 형사가 그 사건을 조사한다. 그런데, <릴 퀸퀸>에서나, <슬랙 베이>에서나, 살인 사건을 조사하려 하지만, 형사의 시선 안에 드는 건, 그리고 영화가 주목하는 건 '사건'이 아니다. 외려 사건은 곁등으로 제쳐지며,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 군상들을 통해, '사건' 보다 더 '심각한 상징적 현실'과 관객들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제목이 아닌 원제 <Ma loute>이다. loute는 속어로 loulou, 젊은 처녀라는 뜻이다. 하지만 <슬랙 베이> 속 뱃사공 네 큰 아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이중적 의미는 영화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해안을 지닌 바닷가 마을, 그곳은 척박한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어부들의 마을인 동시에, 1910년 한참 부를 누리는 프랑스 중상층들의 여름 휴가지이다. 그곳 바닷가 절경이 보이는 언덕 위에는 매년 그곳에서 여름을 지내는 앙드레(파브리스 루치니 분)의 저택이 있다. 여름을 보내기 위해 찾은 앙드레와 그의 아내 이사벨, 그리고 그의 두 딸과 조카가 그곳에서 지내고 있다. 아직 활동적인 아이들은 연쇄 살인이 벌어진 상황에서도 마을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고, 그러다 한때는 마을에서 가장 유능한 어부였지만, 이제는 바닷가를 건네주는 나룻배 뱃사공으로 20센트씩을 받으며 살아가는 가난한 어부와 그의 아들 마루트를 만나게 된다. 

한 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앙드레의 조카 빌리와 어부의 아들 마루트, 영화는 '살인 사건'은 차치하고, 이 '소나기'처럼 사랑에 빠져버린 두 청춘과 두 사람의 가족들의 이야기로 눈을 돌린다. 그리고 결국은 '비극'이 되어버린, 되어버릴 수 밖에 없는 두 청춘 남녀의 사랑의 '아이러니함'이야말로 바로 브루노 뒤몽 감독이 주목하는 바이다. 



마루트 혹은 나의 그녀, 빌리, 그들의 엇갈린 만남 
마루트와 빌리의 사랑은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만큼이나 어우러지지 않는다. 우선 자신을 찾아온 형사들에게 한껏 무슨 무슨 양식을 읊조리며 자신들의 여름 별장의 고급스러움을 거들먹거리지만, 결국 시멘트를 쳐바른 구조물에 불과한 저택에 사는 전통있다는(?) 부르조아 가문의 빌리와, 썰물이 빠진 바닷가를 단 돈 20센트에 손님을 날라주는 제 아무리 정성들여 써봐도 꼬질꼬질한 선원 모자를 쓴 마루트의 환경은 이질적이다. 

엄마 오드(앙드레의 누나, 줄리엣 비노쉬 분)에게서 야단을 맞고 뛰쳐나와 마루트와 함께 바다로 나갔다 죽을 뻔한 빌리를 구해준 마루트네에게 오드와 앙드레 가족이 감사를 표명하지만, 정작 빌리가 마루트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자 대번에 어처구니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생명의 은인이라며 빌리의 친구라며 마루트를 식사에 초대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거친 말 한 마디에 가족들은 대놓고 조롱한다. 

운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마을 사람들의 생업의 터 앞에서 잔뜩 겉멋을 부린 채 외식을 즐기는 앙드레 부부가 날리는 진심이라고 1도 없는 허세 가득한 삶의 찬가는 바로, 이들 '시멘트 덧칠하듯 '돈'으로 떡칠한 졸부, 그러나 자신들은 전통깊은 가문이라는 '부르조아지'의 실상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그들의 가식과 허세와 자비는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가 유지될 때뿐, 빌리의 사랑 고백처럼 그곳에 금이라도 갈 양이면 언제든 태세 전환을 하며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돌변하며, 성모상 앞의 오드의 장광설 하소연처럼 오로지 자신들 중심의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살인 사건으로 시작하여, 정작 두 형사의 범죄 수사보다, 빌리의 가족들은 주의깊게 살펴보기 시작하는 영화는, '고어'한 살인 사건의 전모보다도 어쩌면 외양에서부터 기괴한 앙드레네 가족을 샅샅이 관찰하는 데 더 집중한다. 

앙드레 가족의 외양은 이른바 '정상적'이지 않다. 두 팔을 휘적이며 하지만 자신의 몸을 제대로 못가누는 앙드레와, 자전거 하나 제대로 타기 힘든 그의 처남이자, 매제인 크리스티앙의 신체도 정상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두 집안의 갈등을 초래한 주인공, 빌리의 비정상 역시 만만치 않다. 마루트가 한 눈에 반해버린 빌리, 그러나 형사들은 그녀(?)의 정체성에 헷갈려한다. 빌리라는 남자 아이의 이름, 짧은 머리의 소년의 복식으로 나타나는 싶던 빌리는 마루트 앞에서는 가발까지 쓴 천상 소녀의 모습이다. 당연히 이 곱디 고운, 심지어 계급적 선입견없이 자신에게 빠져든 상류 계급의 소녀에게 마루트 역시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그녀를 안아, 그 몸을 확인할 때까지. 

그리고 이들의 '비정상적'인 신체는 그들의 위선적 도덕의 상징이자 결과이다. 영화는 <릴 퀸퀸>이 살인 사건을 매개로 여전히 프랑스에서 지속되는 종교적 갈등, 그리고 거기서 드러나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완고한 사람들의 아이러니함을 다루었듯이, 역시나 살인 사건을 매개로 아니 어쩌면 불가피했을 살인이라는 생존 행위,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부르조아 계급의 '부도덕'을 '블랙 코미디'의 형식으로 신랄하게 꼬집는다. 

영화의 포스터에서도 등장하듯, 신의 계시에 의해 공중 부양을 하듯, '그들'은 허공에 둥둥 떠있다. 그들의 세상은 시멘트로 덧칠했지만 우아한 양식의 저택이며, 갖은 미사여구를 붙이지만 사실은 속물들의 세상이고, 심지어 그들의 기괴한 신체는 그들이 지난 날 행했던 도덕적 파탄의 증거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아한 척, 심지어 신의 계시라 칭송하지만 현실에 발 붙이지 않은 채 바람처럼 바닷가 마을을 부유하다 바람처럼 떠날 것이다. 



빈부 격차가 심했던 1910년 프랑스, 그곳 슬랙베이에선 
그리고 그런 그들의 맞은 편에 그들을 오로지 먹고사니즘의 대상으로 여기는 '마루트'네가 있다. 영화는 살인 사건을 논외로 제쳤지만, 본 관객들은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벌인 '사건'에 대한 개운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한다. 부도덕과 범죄?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10년대이다. 

산업 혁명이 일어나고, 우리가 배운 서양사에서 서구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그 산업적 발전이 곧 모든 이들의 부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영화 속 전통있는 부르조아 가문이라는 앙드레네 가문 같은 집안은 여름 휴가를 한적하고 아름다운 해변에서 하녀를 두며 지낼 정도가 되었겠지만, 마루트네와 같은 하층민들에겐 여전히 먹고 사는 것이 요원한 과제인 시기였다. 19세기 중반 까지도 서구인의 수명이 45세에서 50세 정도였다. 아일랜드에서 감자 파동으로 인해 1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 19세기 중반이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여전히 잘 산다고 하는 유럽은 '기근'과 싸웠다. 그리고 <슬랙 베이> 속 마루트 네의 범죄는 바로 이런 '기근' 속에서 한때는 잘 나갔지만 이제는 20센트(지금으로 250원)를 받으며 손님을 실어나르며 살아가는 가난한 가족의 현실이다. 우리에게는 이젠 그저 '고어'할 뿐이지만, 당시에는 어쩌면 '선택 여지가 없는 현실'이었던. 

<소나기>처럼 만났던 부르조아 가문의 빌리와 가난한 어부네 마루트의 풋사랑은, 정작 마루트 네의 숨겨진 비밀 때문이 아니라, 빌리의 숨겨진 진실 때문에 파탄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핏물이 든 옷을 입고 묻어달라던 소녀처럼, 배반당했다고 분노했던 마루트의 순정은 빌리를 구한다. 바람처럼 빌리네는 바닷가 마을을 떠돌아 떠날 것이고, 마루트는 남겨질 것이다. 해프닝이 된 사건, 사건보다 더한 부르조아 가문의 부도덕, 그것이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이 도달한 결론이다. 
by meditator 2018. 4. 9. 16:09

대낮에 잘 차려입고 손 꼭 잡고 등산하는 중년의 남녀들이 있다면 십중팔구 '바람'이라는 속설이 있다. 이런 '어불성설'이 난무하는 만큼 이미 우리 사회에서 '바람', 혹은 '불륜'은 사실 보편적이다. 멀리 갈 꺼 뭐 있겠는가? '바람'과 '불륜'이 없다면 대부분의 아침 드라마가 소재 고갈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 '보편적'인 현상은 말 그대로 '윤리'를 벗어난 문제 이기에 언제나 '도덕적 논란'의 기준이 되곤 한다. 이 '현실'과 '이데올로기'의 사이에서 이 소재를 이야기한다는 건 그래서 언제나 조심스러운 줄타기와도 같다. 바로 그런 줄타기를 절묘하게 하려 애쓴 작품이 개봉했다, 바로 <스물>의 이십대 청년들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다루었다 평가받았던 이병헌 감독의 신작 <바람바람바람>이다. 




'동(動)'하였느냐? 
<바람바람바람>은 프롤로그와도 같은 씬으로 시작된다. 모범 택시를 모는 석근(이성민 분)의 차에 중년의 여성이 승차해 앞의 자가용을 미행할 것을 요구한다. '미행'을 거부하는 석근에게 그녀는 그 자가용에 바람을 피는 남편과 내연녀가 타고 있다며 다시 부탁을 한다. 기꺼이 그녀의 청을 들어 그 자가용을 미행한 석근의 차는 어느 호텔 앞에 이르고, 차에서 내린 중년의 여성은 호텔로 향하던 두 남녀의 사이에 끼어들어 여성의 머리채를 잡는다. 그리고 뒤늦게 차에서 내린 석근이 그런 그녀를 '잡으려면 남편을 잡지 왜 여자를 잡느냐'는 궁시렁거림과 함께 적극적으로 말리는데, 그때부터 상황이 묘해진다. 바로 내연녀의 머리채를 잡던 중년의 여성이 자신을 백허그하다시피 말리는 석근때문에 애초에 하려던 행동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을 머뭇거리던 여성은 결국 잡았던 머리채를 놓고 휭 하니 돌아서서 석근의 차로 향한다. 그녀와 함께 사라진 석근의 모범 택시, 그들이 떠난 자리에 그녀의 남편과 내연녀가 망연자실 서있다. 

뜻밖에도 영화 <바람바람바람>을 보고 난 후 기억에 남는 장면은 봉수(신하균 분)와 제니(이엘 분)의 바람도, 반전의 미영(송지효 분)과 효봉(고준 분)도 아닌 이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장면이야말로 이병헌 감독이 <바람바람바람(이하 바람)>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두 시간 여의 이야기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남편의 바람을 단죄해야 하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몸에 밀착한 석근에게 '동(動)'하는 여성의 변화야 말로 '바람'을 가장 잘 '정의'내린다. 그리고 그 '정의'에 따라 노골적인 추파에도 흔들림없었던, 바람같이 택시를 타고 이 여자, 저 여자를 자유롭게 떠도는 석근을 비웃던 봉수가 '바람'이 나며 영화 <바람>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영화의 초반을 장악한 남자, 남편들, 봉수와 석근의 바람은 초반 프롤로그에서처럼, 그들의 아내 미영과 석근의 아내(장영남 분)의 바람으로 바톤 터치되며 결혼의 행간을 메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결혼에 대한 불온한 '농담'으로 채워간 이병헌 감독의 <바람>을 보다보면 2000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만교의 작품을 유하 감독이 영화화 한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떠오른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제목에서 지적하듯, '결혼'이라는 이미 사회적으로 유효기간이 지난, 그럼에도 그 제도적 편의에 타협하는 젊은 세대의 아이러니함을 대학 강사인 준영과 연희의 적나라한 만남을 통해 그려간다. 그리고 그들의 편의가 자초한 딜레마를 통해, 과연 2001년, 혹은 2002년이라는 시대에 사랑을 담아낼 수 없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부실함을 질문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야한 영화로 소문났던 영화 속 결혼할 수 없는 애잔한 연인이 풀어낸 그 직설적인 담론에 친구와 함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아직 '결혼'에 대한 로망이 남았던 시절의 '이불킥'같은 추억이다. 

그리고 10년하고도 훌쩍 시간이 흐른 2018년 이병헌 감독은 마치 2018년판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도 같은 <바람바람바람>을 들고 왔다. 이제 결혼에 대한 '로망' 따위 없어진 나이에 <바람>이 그려내는 바람, 혹은 불륜은 새삼스럽지 조차 않다. 이 영화를 가지고 왜 불륜을 들고 나오냐고 한다는 자체가 사실 '비현실적'인 세상인 것이다. 그런데 '바람'이 현실적이면 일 수록 세상은 그 바람에 대한 '불륜'으로의 재단은 엄격해졌다. 

'불륜'에 대한 부담때문이었을까? 2018년의 이병헌 감독은 유하 감독처럼 노골적이지 않다. '코믹'하게 철부지 어른들의 이야기라 내세운 영화는 설사 그들이 바람을 피지만, 2002년의 준영과 연희 처럼 결혼이란 제도를 '개떡'같이 여기지 않는다. 바람처럼 떠돌며 수많은 여자를 만나도, 제니에게 영감과 자신감을 얻어 자신의 중국집을 열게 되어도, 그들에게는 '인륜지대사' 결혼이란 제도는 고정 불변의 진리값이다. 2002년에 이미 사회적 안정을 위한 안이한 타협처라 낙인찍혔던 결혼, 하지만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지나고, 다시 또 한번 변해가려는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봉수, 미영, 석만에게는 지켜야할 그 무엇이다. 심지어 아이의 아버지를 속이더라도. 세월은 흘렀지만, 외려 결혼이란 제도는 공고해 졌다. 

그리고 영화 <바람>의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결혼 8년차 각자 자신의 레고와 sns에 빠져살던 봉수와 미영이, 각자의 바람 파트너에게서 삶의 활력소를 얻었음에도, 그럼에도 그들을 결혼으로 묶어내는 결정적 그 무엇이, 무엇일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 궁금해 진다. 제니의 앞에서도 여전한 아내와의 추억을 애틋하게 말하는 봉수의 변치않는 연정일까? 그러기엔 8년차 그들 부부의 행간은 헐겁다. 그건 바람처럼 여자들에게 떠도는 석근으로 인해 상처받아 그녀 스스로도 탈출구를 찾았음에도 여전히 석근을 애증처럼 놓지 못했던 그녀의 아내가 놓지 못한 '인륜지대사' 혹은 '부부의 정'이었을까. 아내가 좋아하는 게 꽃인지, 가방인지조차 모르는 석근이 그리워하는 조강지처 아내가 끓여주는 보말 칼국수 같은 것일까? 집 밖에 나가면 '남의 편'이라 태연하게 말하는 경지에 이른 중년의 주부들의 '득도'함일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강고한 결혼이란 제도에 갖가지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동의한 <바람>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결혼'이란 제도에 의문을 남긴다. 바람으로 행간을 메워하고, 헛헛함을 달래준 결혼은 과연 무엇일까 라고. 과연 저들 철부지 중년이라 포장된 이들에게는 '바람'이 본질일까? 결혼이 본질일까?

그렇게 결혼에 대한 아이러니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지은 <바람>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결혼이란 제도를 모호하게 한다. 문득 미친 짓인 줄 알면서도, 멀쩡한 척 사는 우리네 삶이 씁쓸해지지만 그런 게 사는 건가 싶다. 그래서 그 모호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이 영화가 반갑다. 무엇을 말해서가 아니라, 이런 것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여유가 편하다. 어쩌면 우리는 조금 더 이런 이야기들을 영화관에서 조금 더 솔직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프롤로그의 그녀를 욕할 수만 없었던 <바람>, 그리고 철부지라 포장된 봉수, 석근, 그리고 석근의 아내, 미영, 그리고 제니의 해프닝을 타박할 수 만은 없었던 <바람>, 조금 더 솔직했으면 싶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 이야기를 할 수 있어도 어딘가 싶었던 <바람>, 그저 '도덕'으로 치장하며 살다 가끔은 한숨 한번 쉬듯, 우리 삶의 그림자를 들여다 볼 여유를 준 <바람바람바람> 같은 영화가 또 기대된다. 
by meditator 2018. 4. 7. 23:51

몇 년 전 어린이 위인전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당시 공교롭게도 내가 맡아서 하던 인물이 이번에 <레디 플레이어 원>으로 돌아온 스피븐 스필버그 감독이다. 당시 어린이 위인전으로는 획기적인 시리즈로 기획된 그 작업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나폴레옹', '이이' 등 고전적 위인을 대체할 새 시대의 '위인'이었다. 


당시 위인전 작업은 그의 영문판 평전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 졌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 시절 그리고 영화를 만들기 까지, 그 중에서도 그를 세상에 알리게 된 <죠스>를 만든 과정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죠스>라는 영화가 만들어 지기 이전에도 납럅 특집 용 상어가 등장하는 영화들은 있었다. 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뻔한 피칠겁의 섬머 스릴러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며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바로 우리가 기억하는 죠스의 첫 장면이다. <죠스>라 하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기억하는 그 존 윌리암스의 '빠밤, 빠밤~'하며 시작되는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죠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정작 '죠스'가 등장하는 건 영화가 시작하고서도 65분 여가 지나서이다. 대신, 죠스의 시선으로 바닷가에서 한갓지게 유영하는 '먹이들'을 제시하고 그를 향해 돌진하는 바다 괴물의 역동성과 먹이를 향한 집요함을 한껏 드러내 보이며 관객들의 공포심을 극단적으로 몰고간다. <죠스>에 여러 사람들의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아가리, jaws인 것처럼, 영화 <죠스>는 바로 그 '상어'가 주인공으로 맹활약한 영화이다. 즉 그 이전에 '무서운 대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공포'를 제공했던 방식의 새로운 해석이었던 것이다. 




스필버그의 창조적 방식 
하지만 당시 위인전 작업을 할 당시만 해도 저런 평전의 해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평전'이 평가한 스필버그의 가치를 깨닫게 만든건, 그로 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2018년 그의 최신작 <레디 플레이어 원>을 만나고서이다. 한 화면에서 날뛰는 킹콩과 티라노사우르스, 그리고 그 날뛰는 괴수들의 지면 아래로 차를 몰아 질주하는 주인공, 그 장면에서 왜 스티븐 스필버그가 80년대에도, 그리고 여전히 21세기에도 '명장'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해준다. 그가 여전히, 그리고 늘 명장인 이유는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랴, 어떻게 보여주느냐 라는데 선구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시간적 배경은 2045년 '디스토피아'이다. 발전한 과학 기술은 인간에게 가상 현실의 오아시스를 제공하지만, 그 오아시스를 벗어던진 현실은 기술의 독과점 기업과 그에 모든 것을 빼앗긴 빈민층들뿐이다. 기술과 자본에 주도권을 넘긴 세상에 대한 스필버그 식의 담론이다. 위태로운 그들의 컨테이너 탑을 벗어날 희망은 '오아이스'에 접속하는 것뿐인 암울한 미래이다. 마치 피씨방 스크린과 핸드폰의 액정 불빛에 위로받는 이 시대의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 암울한 미래를 지배하는 기술은 천재 과학자 제임스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 분)의 가상 현실 시스템. 

어느 틈에 블록버스타라 하면 이젠 dc와 마블이 아니고서는 발 붙이기 힘들어진 시대, 코믹스의 영웅이, 그들의 이합집산이 어떻게 구현되는가가 블록버스터의 성공 여부가 된 세상에서, 웬만한 '블록버스터' 환타지는 명함도 내밀기 힘든 처지가 되었다. 바로 그 독점된 블록버스터 환타지의 세계에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민건, 바로 '죠스'를 통해 영화 산업에  최초 흥행 1억 달러 돌파 '블록버스터'란 장르를 처음 연 스필버그 자신이다. 

그저 흔해빠진 여름철 납량 특집용 상어 영화를 보이지 않는 추적자를 통해 자아내는 서스펜스를 통해 새로운 장르로 업그레이드 시킨 스필버그의 방식은 <미지와의 조우(1977)>의 결정판 <ET(1982)>, <인디애나 존스>시리즈 , <쥐라기 공원(1993)>, <AI(2001)>까지 언제나 대중의 '허'를 찔렀다. 상어도, 모험가도, 공룡도, 인공 지능도 스필버그가 만들어 낸 건 아니지만, 스필버그의 손을 거치면 전혀 새로운 경지의 캐릭터로 관객들을 매료시키곤 했다. 

그랬던 그가 코믹스의 영웅들이 득세하는 블록버스터 시장에 들고 나온 건, 뜻밖에도 '응답하라 1980년대'였다. 2045년의 빈익빈 부익부의 기술 디스토피아를 벗어나기 위해 가상 현실 오아시스에서 사람들이 '조우'한 것이 스필버그란 이름을 세상에 가장 빛나게 했던 80년대의 복고라는 방식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어찌보면 그 '화려한 시절'을 살아온 스필버그에겐 '사필귀정'같은 선택이다 싶다. 

그렇다. 마치 어르신이 후손들에게 내가 한창 잘 나가던 그때가 좋았었지 하는 후일담의 재기발랄한 버전같은 <레디 플레이어 원>은 2045년의 디스토피아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오아시스 보물 찾기에 뛰어든 웨이드 와츠(타이 쉐리던 분)는 그가 숨겨놓은 열쇠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신화가 된 과학자의 삶을 복기한다. 전설이 되어 신봉되는 그의 삶을, 하지만 '천재'라는 신화를 걷어내면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매달려 한 평생을 보잰 괴짜 소년과도 같은 한 시대를 살아낸 이의 삶의 방식을 열쇠 찾기를 통해 반추하는 것이다. 마치 스티븐 스필버그란 천재가 자신의 삶을 후대에게 전해주듯. 



스필버그의 '응답하라 1980년대'
기존에 제시된 길을 거꾸로 가보고, 주저했던 그 순간에 다시 도전해 보고, 그리고 결과가 아니라, 마치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 처음을 '피시 통신'에 접속하던 그 시절에서 부터 시리즈의 서막을 열듯, 가장 결정적인 열쇠를 괴짜 과학자가 처음 매료되었던 게임을 통해 제시하는 그 '방식'은 그 열쇠를 찾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킹콩과, 티라노 사우르스의 캐릭터 들, 듀란듀란의 음악, 스티븐 킹의 소설과 그 소설을 영상으로 구현한 스탠리 큐브릭의 서스펜스적 방식과 절묘하게 맞물리며,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시대에 여전히 던지는 명장의 교훈이 된다. 

하지만 과거를 길어 새로운 블록버스터의 길을 열어내 보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여전히 이 시대에도 시대를 앞서가는 선지자가 된다. 그 이유는 그가 <레디 플레이어 원>를 통해 제시한 '콘텐츠'의 구현이 바로 우리 시대 문화적 담론으로 제시되는 '융합'과 '에디톨로지'의 방법론을 원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그의 책 <에디톨로지>에서 '창조는 편집(에디톨로지EDITOLOGY)이다'라 주장한다. 즉, 하늘 아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신의 영역'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창조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김정운 교수의 주장은 일찌기 에드워드 윌슨으로 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최재천 교수를 통해 대두된 '서로 다른 것을 묶어 새로운 것을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통섭(CONSILIENCE)와도 맥락이 닿는다. 

각각이 한 영화, 한 문화적 콘텐츠의 원형이었던 주인공들이 해체되고 <레디 플레이어 원>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된다. 어쩐지 가상 현실 레이스 속에서 거칠게 날뛰는 킹콩이 반갑기 까지 할 정도로, 고전이 되어버린 <샤이닝>이 활개를 치는 공간은 무섭기보다, 경이롭다. <토요일 밤의 열기>와 듀란듀란의 음악들은 정겹다. 2045년의 디스토피아에서 사람들을 위무하는 과거의 콘텐츠들이라니. 마치 지난 몇 년 우리 사회를 휩쓴 <응답하라>의 열풍처럼. 

마블과 디시 코믹스가 범람하는 세상을 보며, 즉 첨단 과학의 산물과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들이 뒤엉켜 현대 세계의 영웅으로 대두된 콘텐츠들을 보며 스필버그는 그렇다면 나도 내가 살아온, 혹은 내가 작업했던 시대들을 '에디톨로지', 혹은 '통섭'해볼까 라고 생각했을까? 이미 그 자신이 한 세대 이상의 '문화'를 창조해 온 주도자로써, 바로 그 자신이 만들어 낸, 혹은 그 자신이 활동했던 그 시대의 주인공들을 불러 모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는가란 '도발적 아이디어'를 유츄해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건 그가 <죠스>를 비롯하여, <인디애나 존스>, <AI> 등을 통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문화 콘텐츠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 방식적 전통의 활용이기도 했다. 덕분에 우리는 킹콩과 티라노사우르스가 가상 현실의 RPG 게임에서 다시 한번 맹활야을 하고, 스티븐 킹과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다시금 조우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그저 '대상화'된 콘텐츠로만 등장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창고 속의 그들이 다시금 '현역'으로 돌아온 반가움이 크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난 건,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노익장'이란 말이 무색하게 '현역'으로 펄펄한 '또 한 명의 괴짜 소년'이다. 여전한 소년은 말한다. 기술과 독점의 디스토피아를 극복할 구원은 결국 '인간' 그 자신일 뿐이라고. 물론 그의 담론과 주장은 소박하고 낭만적일 지로 모른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낭만이 2018년의 새로운 블록버스터로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을 보면, 그걸 그냥 어르신의 후일담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by meditator 2018. 4. 5. 16:45

제목만으로도 도무지 그 내용을 예측할 수 없는 3월 29일 개봉한 제페니메이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2017년 우리가 조우할 수 있는 '일본 문화'의 결정체, 혹은 집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이 희한한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 지기 위해서 일본 문단의 기대라 칭해지는 모리미 토미히코라는 작가의 동명의 소설이 전제된다. 2003년 <태양의 탑>으로 15회 일본 판타지 노벨 대상을 받으며 데뷔한 모리미 토미히코는 2006년 영화와 동명의 소설인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로 20회 야마고토슈고로 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나오키 상 후보에 오르는 등, 그해의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고 일본 문단의 기대주로 각광받고 있다. 



모리미 토미히코의 매직 리얼리즘 환타지로부터 비롯된
<밤을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청춘 판타지물이다. 짝사랑하는 후배 여학생의 사랑을 얻기 위한 선배의 '최눈알 작전', 이른바 '최대한 그녀의 눈 앞에서 알짱거리기' 작전을 다룬 이 소설은 하지만, 풋풋한 연애물을 연상하면 그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만다. 선배의 낭만적 연애 감성을 자극하는 아직 소녀티를 벗지 않은 검은 머리 아가씨는 태평양 바다가 럼주였으면 좋겠다는 두주불사에 어른들의 세계를 맛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교토 밤거리에서 벌어지는 환타지적 모험의 주인공이 된다. 반면, 그런 그녀를 짝사랑하면서도 그녀 앞에서는 늘 '어쩌다 지나가는 길이었어'라는 말 밖에 되뇌이지 못하는 선배는 그런 그녀를 따르기 위해 '팬티 실종 사건'에서부터 그녀의 헌책 사수 작전, 감기 광풍까지 본의 아니게 환타지에 휘말리게 된다. 

교토라는 특정한 지역을 배경으로 한 밤의 문화, 그 속에서 때론 음란하게, 때론 장광설을 펼치며 문화를 유영하는 사람들, 그리고 대학과 거리의 책과 각종 동아리 공연 문화를 기반으로 한 환상의 서사는 새로운 환타지의 영역이다. 그곳엔 '신화'도, '영웅'도 없지만, 교토라는 곳을 기반으로 한 갖가지 문화적 행사와 모임들이 가진 '리얼리즘'이 '매직'으로 승화되며 환타지의 새로운 세계를 연다. 그저 하룻밤, 하지만 영화 속 이백의 말처럼 사계절을 겪어 낸 듯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풍성한 환타지의 세계는 바로 이 '원저자' 모리미 토미히코의 문학으로 부터 시작된다. 



문화의 도시 교토가 진짜 주인공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매직'의 기반이 된 '교토'이다. 교토에서 태어나 교토에서 자라, 아직도 교토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교토의 천재라 칭해지는 모리키 토미히코의 작품은 단 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토를 배경으로 한다. 특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이하 밤은 짧아 )>는 교토의 문화적 거리를 배경으로 한다. 

우리 나라의 '경주'와 같은 곳 이른바 일본판 '천년 고도'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곳이 바로 교토이다. 하지만 <밤은 짧아>에서  등장하는 교토는 유적지와 벚꽃의 풍경이 아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술을 마시기 위해 거리로 나온 검은 머리 아가씨와 선배가 활보하게 된 곳은 바로 교토의 중심지 '기온'으로 간주되는 동네이다.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 구획된 길들이 이어진 동네, 그곳의 밤은 낮보다 빛난다. 술을 위해 의기투합한 괴물이라 자칭하는 유카타를 입은 남자 히구치와 애주가 여성 하누키가 검은 머리 아가씨와 함께 이 술집 저 술집을 전전하는 거리는 늦은 시간까지 술을 파는 술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조명과 저마다의 간판을 뽐내는 명소이다. 이백의 배가 닿는, 그리고 잠시 숙취를 깨는 환기의 장소로, 그리고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등장하는 가모가와 강 또한 빠질 수 없다. 

한바탕 술판을 벌여 결국 술내기로 술의 신으로 칭해지는 '이백'까지 이겨낸 검은 머리 아가씨의 밤은 아직도 한참, 그 깊어진 밤만큼이나 계절도 무르익어 한 여름의 열기를 뿜어내고, 그 열기 속의 밤 거리엔 '책 축제'의 향연이 펼쳐진다. 시모가모 신사를 향하는 참배객의 넓은 길을 간이 서가가 채우고, 그곳에 오래된 책들이 켜켜이 쌓여 고서 매니아들의 방문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의 책을 찾기 위해 서가를 헤매는 검은 머리 아가씨, 그 아가씨의 책을 먼저 찾아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아이로 등장한 헌 책 시장의 신에게 이끌려 책 구하기 작전에 휘말리게 된 선배의 모험담은 바로 이 코토의 '책 축제'와 오래된 책을 사랑하는 문화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명소의 거리나, 책 축제와 같은 구체적인 장소나 무형의 유산만이 영화를 채우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환타지적 해프닝의 행간을 메우는 출연진들의 갖가지 문화적 행태들이다. 나이가 많으면 많은 대로, 혹은 젊으면 젊은대로, '괴변'을 비롯한 갖가지의 공통적 취미를 통해 만나지는 기온 거리의 각양각색의 술집 부터, '통제'된 암흑의 시대에 게릴라처럼 번지는 대학의 문화,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용납되기 힘든 '춘화 매니아', '팬티 패티쉬' 등등의 하위 문화가 버젓이 영화의 행간을 당당하게 채워간다. 다종다양한  b급의 문화적 정서들이 교토의 밤거리, 책 축제라는 도시의 문화와 함께 어우러져 <밤은 짧아>의 주인공으로 교토를 기억되게 한다. 그저 영화 한 편을 봤을 뿐인데, 교토라는 도시에 담뿍 빠져 여행을 하고 온 기분이 든다. 



나카무라 유스케의 일러스트를 통해 구현된 캐릭터 
교토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빚어지는 청춘들의 환타지적 모험담이 '에니메이션'이란 장르로 영화화 된건 영화를 보면 당연한 결과물이라 여겨진다. 그저 술을 마시고 싶어 밤 거리로 나선 검은 머리 아가씨가 그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혹은 괴물, 신들과 함께, 술과 책과 사랑의 모험을 겪어 가는 신비한 세계를 풀어가는데 에니메이션만큼 유효한 장르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모리미 토미히코의 원작이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영화가 되기 까지에는 일러스트레이터 나카무라 유스케라는 관문이 있다.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이 모리미 토미히코의 작품을 영화화한 건 <밤은 짧아>가 처음이 아니다. 

2010년 tv 시리즈로 소개된 <다다미 넉장 반 세계 일주>가 그 첫 시도로, <밤은 짧아>에서 등장한 대학 내 다양한 동아리들이 신입생의 고민으로 등장하며, 익숙한 캐릭터들이 선보여 졌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카무라 유스케는 모리미 토미히코 작품의 캐릭터 원안을 담당했다. <밤은 짧아>의 여주인공인 검은 머리 아가씨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카무라 유스케의 일러스트는 소녀와 동물이 어우러진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마치 일본의 옛 그림의 정취가 배어나는 화풍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우리나라에서도 매니아 층을 가지고 있다. 



긍정적 인간애에서 비롯된 러브 스토리 
이렇게 자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갖은 환타지적 고난을 겪어 내는 찌질한 선배와 그런 선배의 구애 작전은 아랑곳없이 어른의 세계에 용감하게 뛰어든 검은 머리 아가씨의 성장 환타지는 이렇게 교토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원작과, 그 원작을 절묘하게 구현한 일러스트 등 갖가지 문화적 콘텐츠들의 조합으로 탄생되었다. 하지만 아우성치듯 저마다의 개성으로 빛나던 문화적 콘텐츠들은 영화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결국 애초에 작가, 혹은 감독이 추구했던 청춘 서사로 절묘하게 모아진다. 

팬티를 갈아입지 않던 선배의 희한하다 못해 괴팍한 취향도, '최눈알 작전'이니 뭐니 소심했던 선배의 짝사랑도, 그리고 '어른'의 세계만을 탐닉하느라 정작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검은 머리 아가씨도, 결국은 하룻밤을 빙자한 교토 사계절의 환타지 모험을 겪어내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향한 용기를 내게 된다. 여전히 서툴고, 머뭇거리지만 더는 '알짱거리거나 기다리지만은 않는 그들의 사랑은 영화 초반 '찌질했던' 그들을 이해하게 될만큼 애틋한 러브 스토리로 마무리된다. 마치 한바탕의 난장을 겪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제 그들은 가슴 설레는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러브 스토리'를 가능하게 한건, 때론 찌질하고, 종종 변태스럽기도 하며, 심지어 위악적이기도 했던 등장 인물들의 군상을 여유롭게 '인간사'의 한 장으로 품어낸, 그래서 어쩐지 영화를 보고 나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이해할 마음의 여유가 느껴지는 <밤은 짧아>의 넉넉한 세계관이 있기에 가능했다. 
by meditator 2018. 3. 31. 05:08

'즐거운 나의 집'이 행복한 가정의 '로망'이던 시절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이른바 '세계 명작 50권' 한 질쯤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세계의 명작 중에 추려낸 겨우 50권의 작품 중에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작품이 무려 두세 권 들어 있기가 십상이었다. 바로 <소공녀> <소공자> <비밀의 화원> 등이다. 이제는 중년, 혹은 노년에 들어서는 사람들이라면 익숙할 제목의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과 서사는 달라도 주제는 일관된 편이다. 어려움에 빠진 소년, 혹은 소녀가 주변의 학대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심성과 의지를 굳히지 않고 지내다 결국은 '해피엔딩'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소년 세드릭이 완고한 영국 귀족 할아버지와 홀로 살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소녀가 아버지의 죽음과 파산으로 하루아침에 다락방으로 쫓겨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이야기들이다. 

소년과 소녀는 위기를 겪으며 '집' 혹은 즐거운 나의 집으로 상징되는 '행복한 가정'을 잃는다. <소공녀>의 새라는 비록 아버지뿐이었지만 인도에서 성공한 아버지 덕택에 기숙 학교에서 공주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실종으로 새라는 모든 것을 잃고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된다. 기숙 학교 공주에서 기숙 학교 '하녀'가 된 새라. 하지만 생전 겪어보지 못한 배고픔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힘든 시절을 '상상놀이'를 하며 견뎌낸다. 그리고 그녀의 상상은 하룻밤 판타지에서 현실로 변하는데, 그 '해피엔딩'에는 꼭 '그녀들이 놓친 어려움에 대한 경제적 보상'이 따른다.

 영화 <소공녀>의 포스터

영화 <소공녀>의 포스터ⓒ 광화문 시네마


'힘든 환경을 이겨내는 밝고 따뜻했던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는 시절의 변화와 함께, 신데렐라, 백설공주와 함께 세계 명작의 대열에서 사라져갔다.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돈을 번 아버지 덕택에 잠시 공주 대접을 받던 새라에게 닥친 우연한 해피엔딩은 더 이상 과거처럼 찬사를 받을 수 없었다. 더구나 '공녀'라는 시대착오적인 제목부터 거부감의 대상이 되었다. 더 이상 우연한 행운을 얻은 '소공녀'가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세상의 사람들은 '공주'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2018년 또 다른 소공녀가 찾아왔다. 그녀는 돈 잘 버는 아버지 덕택에 공주 대접을 받은 적도 없다. 하지만 새라가 기숙학교에서 방을 잃고 다락방으로 쫓겨나듯, 또 다른 소공녀는 알량한 월세방마저 잃고서 여전히 꿈을 꾼다.

당신은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미소(이솜 분)'라는 인물이 있다. 이십 대 후반, 혹은 삼십 대 초반 정도의 나이. 자칭 자신의 직업이 '가사 도우미'라 하는 <소공녀>의 여주인공 이름이 미소이다. 그녀는 건물 외벽 가파른 철계단을 올라 도달하는 방 한 칸에 산다. 집주인이 세를 놓은 곳에 다시 세입자가 세를 놓은 방이다. 방 안에서도 온기 하나 없어 껴입은 옷을 벗고 벗다, 너무 추워 애인과의 섹스를 다음 해 봄으로 미뤄야 할 정도로 추운 곳이다. 애인 한솔(안재홍 분)은 기업의 기숙사에 살며 대학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빠듯한 삶을 산다. 

미소는 '가족'의 그림자 하나 없이, 쉴 사이 없이 지낸다. 그녀의 머리색을 침범하는 '새치'를 막아내기 위한 한약을 꼬박 챙겨 먹는다. 그리고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 한 갑에 드는 돈을 벌기 위해 가사 도우미를 한다. 남들은 '가사 도우미?'하며 어색하게 억양을 올리며 물어보지만, 적어도 그 일을 하는 순간 그녀는 전문 전동기구까지 동원하며 청소하고, 집주인이 원하는 갖가지 반찬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프로다.

하지만 일을 하는 순간만 프로일 뿐,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도시의 '아마추어'처럼 보인다. 아니, 애초에 이 도시가 강요하는 편제된 삶에 자신을 맞출 의도가 없다. 담배값이 오르면 담배를 끊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싼 값의 담배를 구한다. 위스키 값이 오르고 방세가 오르자, 그녀의 선택은 위스키 한 잔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방을 포기한다. 그리고 방을 포기한 그녀는 과거 한 때 자신의 방을 자신의 집처럼 드나들던 밴드의 멤버를 찾아다니며 잠시 의탁을 구하는 여정을 떠난다.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 한 갑을 위해 방을 포기하고 짐 싸들고 거리에 나선 미소. 영화는 미소의 여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집'의 의미를 묻는다. 우리 사회에서 '집'은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 조건이다. 집이 있고, 거기에 머무는 기본적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집 한 칸 마련하기 힘든 청춘'의 시대의 퍽퍽함을 삼포 세대니 하는 세대 용어로 항변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 <소공녀>는 집을 가질 수 없는 청춘의 시대에 질문의 깊이를 보탠다. 누군가에게는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위스키 한 잔, 그리고 백해무익하다는 담배, 그 의미를 말이다. 미소가 찾아간 옛 밴드 멤버들은 그녀에게 당연하다는 듯 "아직도 담배를 안끊었니?"라거나 "넌 아직 철이 안들었구나"라고 말한다. 그녀의 사치스럽고 쓸 데 없어 보이는 '취존(취향존중)'을 통해, 영화는 '과연 우리에게 집은 왜 필요한가'를 묻는다.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광화문 시네마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광화문 시네마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을 위해 집을 포기하다니

그리고 이와 같은 질문을 두텁게 하기 위해 영화는 집이 있는 옛 동료들을 비교한다. 한때는 미소처럼 위스키 한 잔과 담배를 즐기고, 음악이 좋고 함께하는 게 좋아서 어울렸던 동료들. 하지만 이제 이들은 이 사회에 '철든 어른'들이 되어 살아간다. 그들은 모두 각자 자신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 

잘 나가는 직장인이 되어 사는 친구는 쉴 사이 없이 몰아치는 업무의 피로를 담배 한 대 대신 포도당 링거로 대신한다. 결혼을 위해 20년 동안 매달 100만 원의 월세 아닌 월세로 아파트를 마련한 후배는 이제 사랑하는 이 없이 '장기 이자'만을 짊어진 채 외려 미소의 위로를 받는다. 일찌감치 결혼했던 또 다른 동료는 집은 있지만, 미소를 하루 재워주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는 '층층시하'의 처지다. 그리고 동료가 선택한 집에는 한때 작곡을 잘 했던 그녀의 음악을 위한 자리는 없다. 

방이 스무 개도 넘어 미소에게 거뜬히 방 하나 쯤은 내어줬던 선배 언니의 담장 높은 집에는 그녀가 두 손 모아 시중 들어야 할 남편의 그늘이 짙다. 보컬이었던 선배의 집에서는 식구들이 '즐거운 나의 집'을 합창하지만, 노래가 끝난 그곳엔 '미소'를 감금하려는 강박과 허울뿐이다. 과연 그들이 안주하는 집은 미소의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보다 가치 있는 걸까?

영화는 예전 멤버들의 집을 일주한 여행을 통해 '집'이라는 경제적 가치로 매겨지는 삶의 가치를 묻는다. 집이 당연하게 필요하다는 사회, 그런데 그 '집'은 무엇을 위한 집인가? 그래서 당신은 집을 위해서 무엇을 포기했는가? 어른이 되어 집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포기한 것들이 진정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 영화는 기꺼이 세상에 편재되어 살아가기 위해 애닳아 하는 이 시대 청춘들에게 '우문'을 던진다. 이는 최근 트렌드가 된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대한 또 다른 담론이다.

하지만 그 우문에 현답은 없다. 미소는 그저 위스키와 담배와 함께, 애인이 옆에만 있어주면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연인 한솔은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헌혈 센터에서 피를 뽑아야 하는 신세다. 한솔은 가난한 연인의 삶을 견디는 대신, 웹툰 작가로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한솔은 돈을 벌어 두 사람의 '스위트 홈'을 구하기 위해 세 배의 월급을 주는 사우디 아라비아로 떠난다. 그렇게 유보된 꿈, 혹은 포기된 꿈 대신 '집을 갈구하는 세상에서 이제 미소는 새치가 번지는 걸 막기 위해 먹던 한약 값마저 구하기 힘들다. 

미소는 흰 머리를 날리며 거리에 남는다. 어둠이 드리운 도시, 그 강변 둔치에 오도카니 불 켜진 미소의 텐트, 미소의 소확행은 그 '불법 점유물' 텐트처럼 불온하고 아득하다.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소공녀>지만, 영어 제목은 'microhabitat'이다. 동화 속 집을 잃은 소녀의 이야기인 듯 시작된 영화는 '미소 서식지'라는 신조어를 통해 반문을 한다.

정혜윤은 그의 책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마이크로헤비타트(미소 서식지)'에 대해 말한다. "비가 오면 잠시 피해갈 처마 같은 곳, 지렁이 수준의 숨어있을 만한 곳, 새 수준, 고양이 수준... 인간 한 명에게도 이 도시에서 잠시 쉬어갈 곳이 필요하답니다"라고. 미소한 미소가 서식할 만한 공간에 대한 질문. 더 이상 앞 세대처럼 집으로 재테크를 할 여력이 없는 세대에게 집은 최소한의 서식할 '여지'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변화한 서식지'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 <소공녀>는 이솜이라는 배우에 기대어 풀어놓고자 한다. <족구왕>의 기획자였던 전고운 감독의 '여성 버전 족구왕'이랄까.

by meditator 2018. 3. 26. 19:01

결혼을 하면, 사랑하는 이와 한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사는 기쁨도 잠시, 피말리는 전쟁이 시작되기가 십상이다. 보통 그걸 '신혼 초의 주도권 싸움'이라고 속되게 칭하기도 한다. 사랑해서 함께 사는데, 웬 주도권? 이라지만, 벌써 두 사람이 모인, 이 '단체'는 사회적 단위가 되어, 그 내부의 '권력'이 형성되고, 당연하게도 그 '서열'의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평등'하다는 오늘날의 부부 관계는 더더욱 그 '서열'의 문제에 있어 정해진 위계가 없기에 '혈투'가 불가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남존여비'라 알고 있는 조선시대에는 사회적으로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진 분야와 책임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어, 외려 오늘날 '평등 사회'에서 불지펴지는 '혈투'의 가능성이 사전에 '조정'되어 있다고 한다. 여성이 '안사람'으로 가정의 경제나 가정사의 주체로서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동반자'적 위치에서 '바깥 일'을 하는 남편과 동반자적 위치에서, 심지어 남편의 부재시에 집안 사의 결정권조차 가지는 '종부'라는 막강한 권한까지 지녔던 것이 우리네 '여성'의 위치라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사랑'이란 자체가 논외의 문제이지만, 근대 이후 사회에서 '사랑'은 남녀 관계의 주된 변수로 작동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여성에게 있어, 때론 남성에게 있어 '신분 상승'의 유효한 도구이기도 했다. '사랑'이란 이름의 '신분 상승'의 도구를 타고, 하루 아침에 '뮤즈'가 된 여성의 '치명적인 투쟁기', 바로 <팬텀 스레드>이다. 





오뜨꾸뛰르의 뮤즈가 된 여급 
이번 오스카 상 수상은 노동자 계급 출신의 게리 올드만이 연기한 처칠과 귀족 계급 출신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연기한 디자이너의 대결로 화제가 되었다. 무려 2018년에, 아직도 '계급'이라니, 하지만 2015년 노동자 계급 출신의 배우 제임스 맥어보이가 더욱 더 심해지는 노동 계급 차별 현상에 대해 밝히고 있듯이, '민주주의'의 시조 국가 영국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 '계급 차별'의 벽이 높다. <팬텀 스레드>의 시작은 2018년이 되서도 여전히 계급이 존재하는 바로 이런 영국 사회에 대한 기본적 이해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2차 대전도 마무리된 시절, 하지만 여전히 '계급'의 체제가 공고히 유지되는 영국 런던에서 '상류층'을 상대로 맞춤옷을 제작해오는 우드콕 가문이 있다. 내노라하는 명망가의 자제는 물론, 아직도 왕실을 유지하는 유럽의 각국의 공주들이 예복을 맞추기 위해 '친히' 방문하는 이곳에 디자이너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와 이 '샵'을 관장하는 그의 '늙은 누나' 시릴(레슬리 맨빌 분)이 그 주인공들이다. 

어머니에 이어 대를 이어 '우드콕' 의상실을 운영하는 레이놀즈에게  '여자'란그의 '창작력'의 땔감이 되어 타오르다, 때가 되면 '드레스' 하나 던져주며 누나가 '처리'해 주는 소모품이다. 누나 시릴과 동생 레이놀즈의 전 생애는 온전히 어머니에 이어, '장인' 정신으로 만들어 내는 '드레스'에 집중되어 있고,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그의 일상은 그 '옷'을 '만들어 내는' 것에 맞추어 편재되어 있다. 
  
온통 '창작'에 경주된 이런 긴장된 일상은 '예술가' 레이놀즈를 종종 지치게 만들고 그런 꽉 짜인 일상에서의 일탈을 레이놀즈는 한껏 속력을 높인 차를 타고 달려가는 고향 집의 여정에 놓는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그는 '누나'가 처리한 이전의 뮤즈 대신 새롭게 그의 눈에 든 '알마'를 만난다. 그렇게 알마는 시골 한 식당 여급에서 하루 아침에 레이놀즈가 만든 드레스를 입고 상류층의 시선을 끄는 그의 뮤즈가 되었다. 

'신데렐라'가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하지만 그 '환희'가 깨어나는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레이놀즈와 함께 할 수 없는 공간, 온통 '드레스 만들기'를 위해 짜여진 일상에서 알마에게 허용된 건, '뮤즈'라는 보기 좋은 '꽃'과 같은 자리였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그녀의 존재를 대놓고 무시하는 레이놀즈와 시릴의 대우는 그 '꽃'의 당연한 그림자로 따랐다. 그리고 결국 그녀에게 닥친 건, '드레스' 한벌로 사라진 그녀들처럼, '치워'라는 말고 함께 처분된 레이놀즈의 변덕스런 '사랑'이었다.

바로 그 '변덕스런 사랑'의 소모품이 될 알마,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달랐다. 그 이전의 뮤즈들이 기꺼이 소모품으로 사라져준 반면, 알마는 '뮤즈'에서 하루 아침에 '일개 직원'으로의 강등된 수모를 기꺼이 감수하며 레이놀즈의 곁을 지킨다. 하지만 그저 '지킨다'는 수동적 태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레이놀즈가 자신의 '귀족적'인 드레스가 그를 그 자리에 있도록 만들어준 졸부 후원자에 의해 '수모'를 당하는 현장에서 기꺼이 그의 드레스를 구하는 '동지애'를 보이는가 하면, 도발적이고도 치명적인 수단을 통해 '레이놀즈'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레이놀즈가 알마의 그늘 앞에 무릎끓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
남성'권력 속에 '실존'하는 여성들
영화는 '소모품'인 뮤즈의 도발적 사랑의 권력 투쟁을 그려낸다. 그런데 그 '투쟁'의 대상이 누군인가가 '관건'이 된다. 언뜻보기에는 보이는 권력은 '레이놀즈'라는 당대 최고의 오뜨꾸뒤르 디자이너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마'가 싸우는 대상은 '레이놀즈'라는 남성의 세계를 견고하게 '옹성'하고 있는 과거의 유령과 현재의 혈연이라는 또 다른 여성들이다. 영화의 절정에서 '알마'가 발견한 드레스 속 '팬첨 스레드'처럼 레이놀즈는 공고한 현실의 권력이지만, 죽은 '어머니'의 영혼에 억압받으며 현실적으로는 시릴에 의존하는 비주체적 존재이다. 오뜨꾸띠르 디자이너로서 이름을 날리지만 결국 여전히 죽은 어머니의 그늘에서 자신이 저주받았다 절규하며 누이에 의존한 채 살아가는 자존감  떨어지는 의존적 존재이다. 

영화는 레이놀즈의 사랑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발하는 알마를 통해, 바로 이 '현존의 실체없는 권력'으로서의 남성과 그 이면에 실재하는 '여성의 욕망'들의 엇갈린 관계를 조망한다. 아니 알마로 인해 도발되는 레이놀즈 주변만이 아니다. 알마의 시선에 잡힌 레이놀즈의 오뜨꾸띄르를 구성하는 여성의 실존들을 영화는 차분하게 담는다. 

레이놀즈라는 당대 최고의 오뜨꾸띠르 디자이너를 통해 상징되는 의상실, 하지만 그 레이놀즈가 알마의 지독한 사랑에 의해 쓰러졌을 때 그 의상실의 실체가 드러난다. 레이놀즈가 부재한 상황에서도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해가는 시릴과 전문적인 직원들의 손놀림. 결국 '남성'이라는 드러난 권력 이면에 실재하는 여성들', 또한 그의 의상실이 1950년대라는 '현대'에도 존재 가능하도록 만드는, 즉 레이놀즈를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로 존립하게 만드는 계급을 막론한 여성들의 '옷'에 대한 갈망 등,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며 실존하는 여성들' 이야말로 이 영화의 본질이다. 

영화는 50년대 융성했던 오뜨꾸띠르 의상실의 영고성쇄를 함께 한다. 지지않을 꽃과 같았던 우드콕도 '기성복'의 융성과 함께 그 기세가 접어들고, 어머니와 누나의 그늘에서 기세 등등했던 레이놀즈도 알마의 지치지 않는 도발에 이제 그녀의 품으로 돌아온다. 아니 세상은 더 이상 어머니에게 저주받은 디자이너 우드콕을 원하지 않았다. 반면, '알마'가 원하는 건, 그 '권력'을 가진 남성 레이놀즈가 아니라, 그의 뮤즈인 자신이 아니라, 그녀의 품에서 안식을 취하는 '남자'였고, 그녀는 기꺼이 그를 품는다. 결국 또 다른 영혼, '알마'(스페인 어로 알마는 '영혼'이라는 뜻)에게로 '귀의'하며 디자이너 레이놀즈의 생애는 마무리될 것이다. 마치 요람에서 무덤에서 처럼 레이놀즈는 여성의 영혼에서 또 다른 여성의 영혼의 품에서 일생을 보낸다. 세상은 '남성'으로 대변되지만, 그 '남성'이 살아가게 만든 건 '여성'이라며 폴 토마스 앤더슨은 단언한다. 마치 우리가 '남성'의 시대로 생각했던 조선 시대가, 동반자 '여성'에 의해 공고해진 '가족'이라는 제도로 뒷받침된 사회였듯이 말이다. 아니 언제나 세상은 '남성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을 지도. 


by meditator 2018. 3. 20. 19:24

스릴러'는 영화나 드라마의 대표적 '장르'다. 가장 '인기있지'는 않지만 '꾸준'한 스테디 셀러인 이 '장르'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배상준 교수는 그의 책 <장르 영화>에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드러나게 하는 절묘한 장치로 설명해 낸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자본주의 사회가 기반한 생산 관계에서 비롯된 각종 사회 관계들, 그 '모순'을 터트려내는 가장 유효적절한 방식이 바로 '스릴러'라는 것이다. 우리가 맞부닥쳐 사는 삶의 곪아터진 부분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내고 꼬집어 주는 그 '시금석'으로서의 '스릴러'


그래서 대부분의 스릴러 장르들은 드러난 사건 이면에 숨겨진 '사회적 관계'들이 있고,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이 '숨겨진 관계'들이 '폭로'되고, '징죄'되면서, '장르'의 카타르시스가 최고치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등식이 있다. 바로 '사건'과 '폭로', 그리고 '징죄'로 이어지는 스릴러의 일관성이다. 대부분의 '스릴러' 영화들에는 사건 이면의 '관계'들이 '폭로'되어야 하기 때문에, '반전'이 중요한 극적 장치로 작용한다. 그러기에 이 '반전'의 정도와 '일관성'이 곧 '스릴러'의 질을 결정짓는 척도로 여겨질 정도다. 



'호러'적 공간이 품어낸 '스릴러의 정석' 
지난 3월 7일 개봉한 <사라진 밤>은 스릴러의 공식을 성실하게 따른다. 한밤중에 국과수에서 사라진 아내 윤설희(김희애 분)의 시체가 드러난 사건이라면, 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 이면에 있었던 또 다른 사건이 풀려가면서 드러난 사건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되게 되어진다. 그리고 그 '해석'에 있어서 결정적 '반전'이 중요한 장치로 작용하는 것도 충실하게 '스릴러'의 정석을 따른다. 

영화는 tv 속에 등장하는 심수봉의 노래마저 음산하게 울려퍼지는 국과수의 으스스한 공기를 배경으로 미스터리 호러처럼 시작된다. 뜻하지 않은 정전, 그리고 수상쩍은 인기척을 따라든 경비의 앞에 펼쳐진 '시체' 실종의 현장, 그리고 그의 눈앞에 착시처럼 나타난 사라진 '죽은 여인'. 

이렇게 공포스럽게 시작된 영화의 뒤를 잇는 건, 조사를 위해 국과수에 나타난 우중식(김상경 분)을 비롯한 형사들과, 그들에 의해 호출된 남편 박진한(김강우 분)의 숨막히는 공방전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공방전의 승패를 일찌감치 친절하게 관객들에게 설명한다. 즉, 우중식과 김강우의 '공방전'을 통해 김강우의 숨겨진 비밀을 폭로해가는 '스릴러'의 묘미의 각을 관객들에게 이미 알려진 김강우의 범죄를 통해, 쫓기는 범인과 그 범죄가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 풀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알리고자 하는 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신분상승을 꾀한 한 남자, 박진한이 빠지고 만 범죄와 사랑의 딜레마이다. 

거기에서 관건이 되는 건 뜻밖에 평소와 다른 행태를 보인 우중식의 행보다. 한때는 철두철미한 잘 나가던 경찰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폐인'이 되다시피하여 술에 절어 '업무 태만'이 트레이드 마크가 된 우중식, 그런 그가 어쩐 일인지 다른 때와 다르게 박진한에게 '집착'하다시피 시체 실종 사건에 매달린다. 반장의 추궁도, 그 윗선의 압박도 물리치며. 그저 이 사건이 흘리는 힌트와 박진한이 동원하는 권력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도 되는 듯 우중식은 사건에, 아니 사건보다 오히려 피해자일 수 있는 박진한에 집착한다.  

이렇게 영화는 애초에 이 영화가 홍보했던 '사라진 시체'보다, 저돌적인 우중식과 그런 우중식에 의해 하나씩 까발려지는 박진한의 알리바이로 스릴러의 묘미를 더해간다. 그리고 그런 묘미를 극대화시켜주는 건 죽은 시체가 다시 살아나도 하등 이상해 보이지 않는 '호러적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는 '국과수'라는 공간이다. 아니, <사라진 밤>의 초반을 담당하는 건, 어쩌면 박진한도, 우중식도 아니고, 바로 시체가 사라지고 그 시체가 살아나서 돌아다녀도 하등 이상해 보이지 않을 '공간적 장치'이다. 그저 박진한이 홀로 남겨지기만 해도 어디선가 죽은 윤설희(김희애 분)가 문을 열고 나타날 것 같은 공간의 공포.

그 '공간'이 주는 긴장감을 극대화하면서 평소와 다르게 집착하는 우중식에 의해 박진한의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지고, 그 비밀의 실체를 영화는 일찌감치 드러내 보이면서, 이제 관객은 박진한의 거짓말이 어떻게 '폭로'되는가, 그 귀추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 초반부터 박진한이 가장 집착했던 그의 내연녀 혜진(한지안 분)의 또 한 번의 실종과 함께 박진한은 스스로 무너져 내리며 우중식이 집착에 가깝게 추궁했던 그의 '범죄'는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영화의 '반전'은 그 이후부터이다. 지금껏 박진한을 추궁하는 '제 3자'의 입장에 서있던 우중식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영화는 지금까지 봐왔던 영화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한국적 스릴러의 안타까운 '사연풀이
<사라진 밤>은 원작이 있는 작품이다. 스릴러의 명작으로 회자되는 2014년작 오리올 파올로 감독의 스페인 영화 <더 바디>의 리메이크 작이다. 서사는 원작과 그리 다르지 않다. 사라진 아내의 시체, 그리고 그 시체의 실종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점점 드러나는 남편의 '음모', 그걸 집요하게 추적하는 형사. 그리고 '반전'을 통해 풀려지는 '관계의 이면'. 얼마전 호평을 받은 <인비저블 게스트>처럼 피해자였던 주인공이 영화가 진행되어 가면서, 그의 숨겨진 이면이 드러나고, 사건의 실체 자체가 전혀 다른 각도로 그리하여 결국은 '피해자'가 피해자가 아닌 것으로, 조력자여야 할 인물이 사건의 또 다른 주체로 부각되어지는, 캐릭터의 변주로 사건을 설명해 내는 방식의 영화이다.  한 개인이 저지르는 부도덕한 범죄가 마치 '토네이도' 처럼 범죄에 또 다른 범죄를 부르는 스페인의 스릴러는 우리의 상황에서도 그리 낯설지 않은 친숙할 수 있는 소재의 이야기다. 

한국으로 온 이 스페인 영화는 원작의 설정와 플롯에 변주를 주며 '한국적 스릴러'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호세 코로나도가 분한 형사 하이메 페냐의 속을 알길 없는 캐릭터는 김상경의 '허허실실'한 캐릭터로 재해석된다. 또한 이 영화의 키를 쥔 '혜진'의 캐릭터에 있어서도 변주를 가한다. 또한 원작의 서사에 '방점'을 달리 찍어 서사의 변화를 꾀한다. 

그런데 스릴러로서의 <사라진 밤>이란 영화에서 '관건'이 되는 건, 바로 그 제목에서부터 제시된 '사라진 아내의 시체'이다. 바로 그 지점을 풀어내고, 그 풀어내는 과정 속에 숨겨진 이면의 관계를 풀어가는 것이 '스릴러'로서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런데, 바로 이 애초에 관객에게 제시된 질문을 풀어가는 지점에 있어서 '한국적 스릴러'들은 자꾸만 방향을 흔든다. 특히 <사라진 밤>은 충실하게 스릴러의 정석을 따랐음에도 가장 '카타르시스'를 줘야 할 부분 이후 영화가 어쩐지 힘을 잃고 만다. 

영화 속에 숨겨진 '반전'의 퍼즐을 풀어내고, 그것에 전율하고, 그리고 영화가 제시하는 주제 의식에 이르러야 할 주체는 '관객'이다. 그런데 <사라진 밤>이나, 얼마 전 개봉한 또 한편의 한국적 스릴러 <기억의 밤>에서 제작진은 그걸 '인내'하지 못한다. 마치 관객이 혹시나 자신들이 숨겨놓은 퍼즐을 이해하지 못할까 하는 노파심에 섣부르게 가지고 있는 패를 드러내고, 그 패에 대한 부연 설명을 충실하게 '사연'을 풀어가며 구구절절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구구절절한 설명은 안타깝게도 애초에 '차가운 장르'로써의 '스릴러'의 묘미를 반감시킨다. 굳이 나서서 감정을 주입시키지 않아도, 스릴러는 '사건' 뒤에 숨겨진 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율'을 느낄 수 있는데, 조바심을 치며 모든 것을 구구절절 설명해 준다. 

가장 감동적이어야 할 '절정'에서 장르의 힘을 잃고마는 이런 '자가당착', 그 이유는 안타깝게도 '한국식 스릴러'의 맹점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안타깝다. 국과수라는 '미스터리한 공간', 거기서 펼쳐지는 우장식과 박진한의 공방전, 거기서 결판이 났어야 할 영화는 숨겨진 '퍼즐'이 아니라 '사연'을 통해 '전율' 따위 없는 자명한 결론으로 관객을 이끈다. 결국 '사라진 시체'에서 출발한 '스릴러'는 제작진이 마지막 퍼즐까지 알아서 맞추어 주며 박진한의 숨겨진 범죄의 잔혹사를 통해 꽉 닫힌 결말로 마무리된다. 영화가 애초에 던진 퍼즐은 신선했지만, 여운은 없다. 스릴러라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장르로 시작하여 절정에서 영화는 언제는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복받치는 슬픈 사연으로 마무리된다. 

거기에 더해 아쉬운 건 원작을 달리 해석하기 위해 변주시킨 주인공의 캐릭터들이 복선으로 파고들어 가기 위한 관객들의 퍼즐 고리를 방해한다. <사라진 밤>의 우장식 캐릭터는 마치 '이건 몰랐지'하며 관객에게 '반전'으로 다가오지만, 그래서 생뚱맞다. 반면, 어쩌면 주체가 되었어야 할 사라진 아내의 윤설희(김희애 분)나, 남편 박진한에 대해서는 불친절하다. 김희애라는 배우의 출연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던 영화에서 정작 윤설희는 소모적이다. 왜 그녀가 박진한에 대한 모든 것을 덮어줄 만큼 집착을 했는지, 사랑을 했는지, 영화는 스쳐지나가 버리며, 영화의 동력 한 가지를 놓치고 만다. 마찬가지로 윤설희를 선택할 만큼 '계산적'이었던 박진한의 뜻밖의 사랑도 일관성을 놓친다. 영화가 결국 말하고자 한 것이 우장식의 계산된 복수였는지, 박진한의 부도덕이었는지, 풋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거기에 숨겨진 우장식의 순애보였는지, 그래서 오히려 모호해진다. 


by meditator 2018. 3. 11. 2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