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곧 '부정(否定)'의 역사이다. 아비들이 저질러 놓은 '역사적 과오'들을 부정하며 딛고, 극복하는 것이 언제나 '자식'들의 가장 큰 과제였었다.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 6.25, 5.16, 80년 광주 사태 등등은 곧, '부정'의 과제가 되었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에서 '자식'들에게 아비들은 언제나 '오욕'의 대상이었고, 자신의 발목을 잡는 '암초'였으며, 자신들에게 '무거운 짐'만을 남겨준 '부채'들이었다. 그러기에 젊은이들에게 '아비'들은 언제나 소통불가해한'꼰대'였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88만원 세대에, 오포, 구포 세대인 젊은이들은 꿈조차 꾸기 힘든 세상에서, 어줍잖게 '포기하지 말라'고 훈계를 하는 아비들에게 냉소를 보낸다. 그렇게 여전히 '화해'하기 힘든 부모와 자식 세대의 시대, 거기에 이젠 '노장'이 되어가는 이준익 감독이 조심스럽게 '이해'와 '화해'를 청한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 꿈조차 버거운 젊은이 
쇼미더머니 6년 개근의 무명 래퍼 a.k.a  심뻑(박정민 분), 하지만 그의 일상을 채우는 건 편의점에, 발렛 파킹 알바다. 그 틈틈이 좁은 공간에서 랩 만들기에 여념없지만, 래퍼로서 세상의 문은 그에게 쉽게 열리지 않는다. 6년째 또 왔냐며 익숙하게 그래서 멋쩍게 그를 만드는 공개 오디션 현장에서 그는 여전히 날선 랩을 날리며 예선을 통과하는데, 정작 3차 예선에서 그의 발목을 잡는 건 고향, 그리고 아버지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제목의 두 작품이 있다. 하나는 1920~3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 토마스 울프의 1940년 작품과 또 하나는 1986년 출간된 이문열 작가의 작품이다. 두 작품은 모두, 극중 인물을 빌어 작가들이 떠나온 고향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고향은 두 작가 개인의 고향이라기 보다는 '장엄한 낙조조차 이제는 영원한 어둠 속으로 침몰하'는 과거를 뜻한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를 떠나 이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젊은이에게 '추억'이 된 고향은 더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고향을 떠나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서울 출신이라 살아온 래퍼 심뻑, 아니 학수를 '아버지'의 와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 불러들인 그곳에는 래퍼 심뻑이 아닌 학수가 잊고싶은, 그래서 애써 지우려했던 '역사'가 있다. 



누구든지 고향에 돌아갔을 때, 그걸 대하면 "아,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구나" 싶은 사물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이십 리 밖에서도 보이는 고향의 가장 높은 봉우리일 수도 있고, 협곡의 거친 암벽 또는 동구 밖 노송일 수도 있다. 그리워하던 이들의 무심한 얼굴, 지서 뒤 미류나무 위의 까치집이나 솔잎 때는 연기의 매캐한 내음일 수도.

- 이문열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中



'폐항, 오로지 기억될 것이라고는 '노을'밖에 없는' 그곳은 고통의 기억이다. 지역을 주름잡던 양아치였던 아버지는 어깨들 사이에서는 '형님' 대접을 받았을지는 몰라도, 학수에겐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간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되는 '부재'와 '부채'의 대상이었다. 어머니의 '미워하지 말라'던 유언조차 지킬 수 없게 만드는, '인간 말종'이 아버지였으며,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부정만이 그가 그 고통의 시간을 벗어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공교롭게도 <변산>의 이준익 감독과 얼마전 개봉한 <버닝>의 이창동 감독은 2018년의 청춘을 '고향'으로 불러들인다. 두 감독이 그려낸 청춘은 모두 '고향'을 떠나, 다시는 고향에 가지 않겠다던 이들이었다. 그곳은 '어머니'를 상실한 곳이고, '아버지'을 '부정'하게 만든 곳이다. 하지만 부정하고 상실한 청춘은 고향을 떠나와 잘 살지 못한다. 그들은 이제 현실에 짖눌려 '꿈'조차 모호하다. 두 거장이자, 노장이 된 감독들의 눈에 비친 이 시대의 청춘은 현실에 짖눌려 꿈조차 버거운 이들이다. 그런 동시대의 청춘에 대해 두 감독이 던진 해법은 그들을 '고향'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늙은 양아치가 던진 화두
상실된 '어머니'와 달리, 그곳엔 아직 '아버지'가 있다. 한번도 제대로 아버지다운 적이 없었던 사람, 심지어 '부재'했을 때 가장 행복감을 주었던 사람, 그런 그 사람이 많이 아프단다. 학수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조차 콧배기도 비추지 않았던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프다던 아버지는 병실에서도 그 '가오'를 놓지 않은 채 꾸역꾸역 쌈밥을 먹고 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무대의 순간조차 망쳐버린 인간, 아니 길지 않은 내 인생 내내 내 발목을 잡은 물귀신, 군대에 간다고 고향을 떠나온 내내 학수는 그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왔다. 

그런데 아버지때문에 버린 그 고향에 다시 소환되어 돌아가니, 마치 어제인듯 그 시절이 '재연'된다. 관계도, 상처도, 추억도. 그곳엔 어린 시절 동네를 주름잡던 '짱'이었던 학수가 있고, 고등학교 시절 풋 사랑이 있고, 그리고 빛나던 문재와 그 '상실'의 아픔이 있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것들은 마치 '그대로 멈춰라'했던 것처럼 다시 그의 삶으로 들어와 그를 흔들어 놓고, 학수는 '아버지'때문에, 그리고 '고향'의 관계들때문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스펙쌓기'에 시달리며 88만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대, 결혼도, 사랑도, 집도, 꿈도 포기해야 하는 세대,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젊은 세대는 안다. 그들이 '고도 성장'을 꿈꾸며, 무한 경쟁으로 세상을 몰아넣은 '아버지' 세대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능력'과 '실력'을 제일로 치는 사회를 만들어 놓은 아버지 세대로 인해, 그 휴유증을 옴팍 뒤집어 쓴 자신들은 '저성장'의 시대를 미래에 대한 기약도 없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아버지 세대는 영화 속 동네 좀 주무르던 '늙은 양아치'와 같다. 한때 좀 날리면 뭐하나, 제 멋에 겨워 살아놓고, 자식을 위해서는 해놓은 거 하나 없이, 여전히 큰 소리만 떵떵치며, 고스란히 부끄러움만을 남겨준 것을. 심지어 이제 병실에 누워있는 신세. 

그런데 감독은 되묻는다. 그런 아버지를, 고향을 너는 잊지 못하지 않았냐고. 어찌됐든 '부정'조차 결국 네 삶의 일부분 아니겠냐고. 그러니 그저 지워지지 않는 걸 애써 지우려 하지도 말고, 덮여지지 않는 걸 우격다짐으로 가리지도 말고, 꼭꼭 씹어 먹으라고. 차라리 아버지의 빰을 한 대 갈길 지언정,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척 하지 말라고. 풋사랑이었던 선미(김고은 분)의 첫사랑이 학수를 강제 소환하는 것으로 완성되듯이. 아버지같다는 말 한마디에 만사를 제쳐놓고 돌아올 고향이라면, 그 고향을, 아버지를 꼭꼭 씹어 삼키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래서 홍대를 주름잡고(?), 쇼미더머니를 향해 도전장을 날리던 최신 콘텐츠의 래퍼를 후진 기억의 고향으로 소환한다. 그리고 '단절'의 트라우마 대신, 흐드러진 한 판 추억의 굿을 펼쳐보인다. 



결국 느티나무 울창한 옛마을은, 장미꽃처럼 화사했던 시절은, 그리고 그때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마음 속에 남아있을 것이고, 고향은 언제나 새롭게, 새로이 만들어 지는 것이니까. 
                                        - 토마스 울프,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중


토마스 울프에게도, 이문열에게도 고향은 결국은 떠나온 젊은이가 다시 돌아갈 수 없던 상실과 단절의 시간이었다. 젊은이는 그렇게 아버지의 공간을, 시간을 떠나와, 그 상실을 껴안은 채 자신의 삶을 다시 써나간다. 그게 인생이라, 장엄한 낙조조차 기릴 수 없는 것이 역사라 두 작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그 손을 놓지 못한다. 노을을 가난해서 가진 게 없는 곳의 유일한 사실의 흔적이 아니라, '마니아'가 될만한 '충만'의 대상이다. 지는 순간조차,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아직 이곳에 아버지가 있으니, 그래서 그 아버지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여전히 '아버지'로 남고 싶다. 나처럼 살지 말라고,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 말하면서까지, 아들에게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 노을이 펼쳐지는 한 아직 하루가 끝난 건 아니라고.  기꺼이 뺨을 대줄테니, 외면하지 말고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아픔조차 잘 소화시키고 가라는 아버지 세대의 '노파심'이다. 

외롭고 고달픈 랩으로 시작하여, 떠들썩한 뮤지컬의 난장으로 마무리지은 <변산>은 2018년의 젊음을 '고향'으로 소환한다. 변산이라는 시골 동네에서 펼쳐지는 에피소드들은 젊은이들이지만, 그들의 짦은 생 속에 또 하나의 역사를 논한다. 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지 않다며 버둥댔지만 그들은 그들도 어느 틈에 자신만의 역사를 지닌 어른이 되었다고 감독은 말한다. 그러니 더는 아이처럼 응석부리지 말고, 도망치지도 말고, 아버지와 다른 어른으로 잘 살길 바란다고 당부한다. 

by meditator 2018. 7. 6. 16:53

혼밥'이란 단어가 어느 덧 특별할 것없는 문화가 되었다. 지난 2016년 한 이동통신 회사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9.6%가 '혼밥'을 경험했다고 할 정도로 더 이상 '혼밥'이 생소한 것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이 응답자 중 66.8%가 1주일에 10회 이상 홀로 밥을 먹는다고 응답했다고 했다. '한국 사회 동향 2015'에 따르면 15세 이상 응답자의 55.8%가 홀로 여가 시간을 보낸다고 답을 했다. 지난 2007년에 비해 12%가 증가한 추세다. 홀로 밥을 먹고, 홀로 시간을 보내고, 네 가구 중 한 가구가 '나홀로 족'인 사회에서 어쩌면 더는 이상할 것이 없는 현상이다. (2015 기준) 하지만 그저 사회적인 현상뿐일까? 자발적이거나, 불가피한 '나홀로 족'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사회에서 '격리'한 '자폐 나홀로 족이라면? 6월 28일 개봉한 <오 루시>는 사회 관계망에서 방출된 '히도리모노'의 이야기를 다룬다. 




히도리모노, 사회인이지만 히키코모리
중년의 여성 세츠코는 오늘도 변함없이 출근을 하기 위해 지하철 역에 섰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지하철, 그 순간 그의 뒤 편에 있던 남자가 그녀의 귀에 이별 인사를 남긴 채 달려오는 지하철에 뛰어든다. 당연한 참사, 놀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그런데 정작 가장 충격을 받았어야 할 세츠코는 요동이 없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출근을 하여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워 문다. 

그런 그녀를 유일하게 걱정해 주는 나이 지긋한 동료 여직원, 하지만 세츠코는 친절하게 그녀가 건넨 과자를 아랫 서랍에 던져 넣는다. 그곳에는 그녀가 준 것으로 보이는 과자 등 군것질 거리가 가득차 있다. 세츠코는 '히도리코모(싱글족)'이다. 언니는 있지만, 일찌기 그녀가 사랑했던 이와 결혼하는 바람에 '의절'한 거나 마찬가지고,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회사 내 그 누구와도 '친'하지 않다. 콜록거리는 그녀에게 '담배' 좀 끊으라고 상사가 잔소리를 하고, 앞 자리의 나이 지긋한 동료 여직원이 친절을 베풀어도 그녀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사회' 내에 속해있지만,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은 세츠코는 '히키코모리'의 사회적 유형에 가깝다. 그나마 집밖에서 그녀는 멀쩡해 보이지만, 쌓인 고지서를 발로 밀어넣고 들어선 그녀의 집은 발 디딜틈조차 없이 쌓인 옷가지며 물건들, 그녀의 삶이 제대로 순환되고 있지 않음을 한 눈에 알려준다. 

그런 그녀에게 곰살궂게 다가온 사람이 있다. 바로 언니의 딸인 조카 미카. 비싼 돈을 내고 등록한 학원에 대신 다녀달라는 그녀의 응석어린 청을 거절하지 냉정한 세츠코가 거절하지 못한다. 미카 대신 간 영어 학원, 하지만 '학원'이라기엔 '야시시한' 분위기 룸에서 진행되는 1;1 맞춤 수업에 세츠코가 당혹스러워 하는 것도 잠시, 그녀에게 '루시'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금발의 가발을 안기며 수업의 시작을 '찐한 포옹'으로 시작한 강사 '조~온'에게 그만 그녀는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하지만 다음 날 설레는 마음을 달려간 학원에서 이미 존이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세츠코, 더구나 실망해서 학원을 나오던 그녀가 목격한 건 조카 미카와 사랑에 빠져 함께 차를 타고 떠나는 존. 그러나 세츠코는 포기하지 않는다. 중년 여성 세츠코를 일본에 남기고, '존의 제자 루시'가 되어 선생님 존을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미카를 찾는 그녀의 언니와 함께. 

두 자매의 로드 무비인가 싶던 영화는 쉽게 선생 존, 하지만 이젠 미카도 떠나고, 돈도 없는 백수가 된 존을 만나고, 다시 미카를 찾아 길을 떠난다. '오지랖'이라는 언니의 지청구에도 아랑곳없이 존의 밀린 월세도 내주고, 자동차도 빌리고, 그를 위해 아낌없이 지갑을 여는 세츠코, 아니 루시가 바라는 건, 존이 해주었던 예의 포옹, 그리고 그가 미카를 위해 했듯 '사랑 애(愛)'자를 서슴없이 새기는 맹목적인 사랑이다. 

세츠코와 루시, 냉담과 맹목 사이
세츠코는 대번에 그녀의 나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꾸미지도 않고, 딱딱한 사무원의 복장이 박제라도 되는 양 입고 다니는 여성이다. 그녀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 벽을 두거나, 나이든 직원의 환송회에 그녀에 대한 동료 직원들의 험담을 폭로하며 위장된 사회 관계에 대한 '산통'을 깨는 식의 '일방적이고 악의적인 관계'밖에 맺지 못한다. 혈육이라고 다를까. 오랜만에 온 언니는 집에 발도 못들이게 하고, 실연의 상처를 입은 조카에게 역시나 '악담'을 퍼부어 사고를 유발하고야 만다. 

도대체 세상 그 누구와도 '상종'하기 힘든 그녀, 그런데 그런 그녀가 수업인지 치근거림인지 알 길이 모호한 존의 수업 중 '포옹' 한번에 달라진다. 그를 찾아 미국으로 달려가고, 그에게 맹목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다 못해 추근거릴 정도로 변했다. 존이 준 노란 가발을 쓰고, 그가 발음 교정을 위해 물려준 노란 탁구공을 입에 물고, 길게 끄는 발음으로 느끼하게 '조~온'하며 변신하기 시작한 세츠코, 거기엔 '히키코모리'에 가까운 그녀의 고독이 몸부림치는 삶이 있다. 

지난 2009년 일본의 명문 대학 화장실에는 '화장실 내에서의 식사를 금지한다'는 경고문이 붙었다.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된 화장실 청소 용역 분들의 문제가 아니다. 혼자서 식사하는 걸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 학생들이 홀로 화장실에서 식사를 해서 문제가 된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등장하기 시작한 양 옆으로 칸막이가 쳐진 일본의 일인 밥집. 이 '나홀로 족'의 문화에는 '나 홀로 식사를 하는 건 친구가 없기 때문이고, 친구가 없는 건 내가 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식사를 하면, 내가 매력이 없다 주변에서 평가할 것이 두렵다'는 '런치 메이트 증후군'이라는 사회적 현상이 담겨져 있다. 

80년대 중반 이후 서구 사회로 부터 시작된 '개인화 현상'은 2000년대 들어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도 사회적 현상으로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나홀로 족' 즉 '개인화'의 현상은 아시아 지역에 오면서 지역적 특징이 더해진다. 즉,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일본이나 한국에서 그런 집단주의 문화에 반발하여 '나홀로 문화'를 선택한 '선택적 나홀로 족'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세츠코는 사실은 동료 직원들이 '관종'이라거나, 눈치가 없다고 손가락질 했지만, 그래도 퇴직을 앞두고 한껏 칭송해 마지않던 나이든 동료 직원에게 그런 집단의 진실을 폭로하면서, 집단주의의 위선을 한껏 까발린다. 언니나 미카에게도 마찬가지다. '자매'라는 혹은 '이모와 조카'라는 혈연으로 그녀를 얽어맸던 위선을 내던지며, 그녀들이 자신에게 가한 '사랑'이름의 폭력을 거침없이 폭로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거칠 것없는 솔직함'에 대해 돌아오는 건 동료의 외면과 결국 암묵적인 사표의 강요다. 그리고 늘 이용하기만 했던 언니와 미카의 '피해자 코스프레'이고. 

선택적 나홀로 족은 '치열한 경쟁 관계로 점철된 사회적 관계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고립시키는 선택'이자, 자기 방어의 수단이라 진단된다. 즉, 현대인은 '관계'로 부터 상처를 받아 차라리 '고독이 몸부림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바로 이 '관계로 부터 상처를 입거나, '관계가 스트레스가 된'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을 단 한번의 포옹으로 맹목적으로 돌변하는 루시를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토록 자신을 닫아걸었던 세츠코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으며, 얼마나 진심어린 관계에 목말라했는가를 그녀의 외사랑은 대변한다.

'관계'로 부터 상처를 받아 자신을 닫아 건 채, 사회에 속했지만 히키코모리와 같은 삶을 살던 세츠코는 단 한 번의 포옹으로 '루시'로 거듭나고자 한다. 하지만, 그 '루시'는 그저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편의적으로 그녀에게 붙여진 이름인 것처럼, 그녀의 선택에 대가는 공허하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쌓아두었던 그녀의 성은 단 한 번의 포옹으로 무너질 만큼 위태로웠던 것이다. 한 사람의 자살로 시작하여, 맹목적인 루시로 삶에 도전을 했던 세츠코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위기. 다행히도 영화는 '진심어린 포옹'의 슬픈 위로로 끝을 맺는다. 다행히도 영화는 위기에 빠진 그녀를 그렇게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었던 '톰'이었던, 그녀만큼 그 '포옹'을 목말라했던 타케시를 통해, 그의 '포옹'을 통해 구원의 희망을 얻는다. 하지만, 그래서 더 그동안 얼마나 세츠코가 외로웠는가를, 사회로 부터 스스로 단절된 이의 고립된 삶이 고단했던가를 보여줘 슬프다. 

더 이상 1인 가구, 나홀로 족이 특별한 것이 아닌 게 된 세상은, 그래서 '소통이나 인간 관계가 취약해지면서 세상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비자발적으로 집단에서 방출되어 '나홀로'가 된 이들조차 그저 '나홀로 족'이란 보편적 트렌드에 묻혀져 갈 수도 있다. 바로 그 '보편' 속에 숨겨진 '특별한 이야기'를 영화 <오 루시!>는 테라지마 시노부의 실감나는 연기와 뜻밖의 조쉬 하트넷의 조화로, 그리고 촌철살인같은 야쿠쇼 코지의 등장으로 설득한다. 

by meditator 2018. 6. 30. 15:14

영화의 시작과 함께 스크린을 뒤덮는 '일본어'의 난, 분명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의 웨스 엔더슨 감독 작품이라 했는데 라면 제작자까지 확인하게 되는 영화, 일본에 대해, 그리고 노골적인 일본 풍의 문화에 대해 선입관없이 대하는 게 쉽지 않은 우리의 역사적 경험 상, <개들의 섬>은 우선 당혹감을 안겨주는 영화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고민하게 된다. 과연 이 영화는 일본, 혹은 일본의 문화에 대한 '찬사'인가, 아니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군국주의적 경향성'에 대한 편견인가 라고. 그렇게 <개들의 섬(Isle of Dogs)>은 '일본'이라는 지역과 지역적 정서를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영화 속 일본은 우리가 가진 역사적 불편함을 차치하고서라도 모호한 경계에 서있다. 




흠모인가, 편견인가
센코쿠 시대 이래 서양과 교류해왔던 일본, 일본의 도자기와 우키요에(에도 시대 세속화)등에 서양의 예술가들이 열광했고, 모네, 고흐 등은 적극적으로 이를 자신의 작품에 활용하며 인상파 미술 등,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프랑스 영화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런 당시의 '일본 문화에 대한 열광'을 '자포니즘'이라 정의한다. '자포니즘'은 이후 헐리우드 영화에서 '오마주'된다. <킬빌>, <라스트 사무라이> 그리고 <매트릭스> 등은 일본 무도를 자신의 철학으로 승화시키고자 했으며, 최근 2014년작 <빅 히어로>까지 일본의 문화와 이른바 '일본의 전통적 정신'은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향성의 연장 선상에 <개들의 섬>이 있다. 

동물들을 활용한 <판타스틱 MR 폭스>이후 9년만의 스톱모션 에니메이션으로 돌아온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웨스 엔더슨 감독. 영화를 여는 건 일본의 전통 설화이다. 영웅적인 소년 장수가 폭군이었던 고바야시의 머리를 잘랐다는 전설이 일본의 신사를 배경으로 소개된 후, 영화는 지금으로 부터 20년 후 일본의 메가사키 시로 배경을 옮긴다. '애완견'이 일상이 된 도시, 하지만 갑자기 '개독감'이 퍼져나가고 그 '독감'이 인간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고, 치료약 개발은 요원한 상황, 시장인 고바야시는 '개'들을 '쓰레기 섬'에 모두 추방할 것을 제의한다. 

지금으로부터 20년 후라지만 마치 2차대전 시기 일본을 보듯, 시장의 제안에 과학자의 반대 제안이 무색하게 절대적인 '찬성'으로 몰아가지는 여론, 그리고 그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진행되는 개들의 추방은 '군국주의 일본'을 연상케 한다. '범람'하는 개들을 '절멸'시키려는 '고양이 애호가'인 시장을 비롯한 일부 집단의 음모, 그러나 그런 음모에서 비롯된 개 추방 작전은 개를 그저 애완견이 아닌 자신의 친구로 사랑했던 고바야시 조카, 그리고 청소년들의 반발, 그리고 무엇보다 개들의 저항으로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일본의 소년답게 '게다'를 신고 경비행기를 타고 온 소년, 역시나 군국주의 시대 일본의 청소년들을 연상케 하는 '까까머리'의 교복을 입은 소년, 소년들, 광분하는 고바야시 시장의 맹목적인 수하들의 배경에서 드러난 '전범기', 마치 '킬빌'의 사무라이 정신처럼, <개들의 섬>에서 드러나는 '전체주의'는 고스란히 일본 군국주의의 기억을 소환한다. 




'군국주의 일본'을 통해 설명하는 '파시즘'
'파시즘'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199년대 초반 '부다페스트'라는 지역적 공간과 문화적 정서를 차용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처럼, <개들의 섬>은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경험을 소환하여 다시 한번 '파시즘'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행간을 메우는 건 일본풍의 그림과 같은 화면들, 스모 등의 일본풍의 문화 콘텐츠들, 그리고 결론은 '암살'이지만 그 과정에서 돋보이는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들이 영화를 꽉 메운다. 이는 '오리엔탈리즘'이 가진 '찬사'와 '야만'의 양 극단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의 담론에 맞춰' 의도적으로 '고안된' 동양이 <개들의 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이 영화에서 주요 서사를 이끌어 가는 개들은 지극히 '서양적'이라는 것이다. 시민들에게 시장의 '휴머니즘'을 포장하기 위해 입양된 소년 아타리가 소년을 지키기 위해 경호견으로 스파츠와 교감을 나누고, 그를 찾아 홀로 쓰레기 섬으로 온다든가, 떠돌이개 치프와 애완견 출신의 나머니 4마리 개들과의 관계, 그리고 아타리와 치프 사이의 우정의 성장기는 일찌기 디즈니, 혹은 서부극을 통해 익숙한 '관계적 서사'들이다. 더구나, 청소년들 사이에서 가장 진취적으로 고바야시 시장에게 반기를 든 사람이 다름아닌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온 노란 머리의 서양 소녀라는 사실은 '관계 중심적'인 동양과, '목표지향적'인 서양에 대한 선입관을 고스란히 이입시킨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또한 영화 속 인간들의 대사는 번역하지 않는데, 그 대부분의 인간들의 대사는 '일본어'라는 것이다. 그에 반해 개들은 '영어'로 대사를 하고, 그건 자막으로 번역되는데, 그저 우화적 대비라고 하기엔 이방의 언어에 대한 앙금을 남긴다. 즉 <개들의 섬>은 찬사와 숭배, 그리고 편견이라는 서양인이 가진 동양에 대한 '관념'을 다시 한번 고스란히 드러낸다. 

하지만 이런 '인식적 한계'를 차치하고 보면, '파시즘'의 융성에 대한 가장 절묘한 '우화'이다. 그저 '개'가 싫었던, 그래서 개들의 번성을 저지하고 싶었던 '엘리트' 그룹이 한 사회의 의식과 의견을 어떻게 조장하고 집단적 결정으로 몰아가는가에 대해 이보다 명쾌하게 설명해 낼 수 있을까. 결국 애초에 '독감'에 대한 위험도 자체에 대한 검증도 없이, '나',와 '우리'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들'이 '우리'외의 그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맹목적'으로 잔혹해 질 수 있는가에 가장 친숙한 애완동물인 '개'라는 대상을 통해 설명해 낸다. 





by meditator 2018. 6. 26. 20:39

<오션스 11(2001)>과 <오션스 12(2004)>, <오션스 13(2007)>이 그랬다. 대니 오션이라는 사기꾼을 중심으로 범죄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라스베거스를 터는 이 영화들은 시리즈를 거듭하며 시리즈의 서사도, 재미도 반감되었지만, 그럼에도 조지 클루니를 비롯하여 브래드 피트, 멧 데이먼, 앤디 가르지아 등의 배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흡족했던 영화들이다. 그로부터 다시 십여 년 <오션스> 시리즈를 만들었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다시 시리즈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앞선 시리즈의 주역이었던 대니 오션(조지 클루니 분)을 납골당에 모셔둔 채, 그의 여동생을 소환했다. 그 오빠의 그 여동생 아니랄까봐, 가석방된 데비 오션(산드라 블록 분)은 출소하자 마자 동지들을 규합한다. 단, 규합하는 동지들에게는 조건이 있다. 오로지 '여성'이어야 한다는 것. 2018년의 <오션스8>은 그렇게 '아마조네스' 군단으로 돌아왔다., 




아마조네스 오션스 8
<오션스> 시리즈 대니에게 참모 러스티 라이언(브래드 피트 분)이 있듯이, 가석방되어 예의 실력(?)으로 쇼핑을 하고, 하룻밤을 호텔에서 보낸 데비를 맞이한 건 '반지'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청혼을 할 수도 있다는 동료 루(케이트 블란쳇 분)이다. 가짜 위스키 제조로 살아가던 루에게 데비는 그의 오빠가 그랬듯 5년간 감옥에서 '시뮬레이션' 해본 1천 5백억원 짜리 목걸이 절도의 공모를 제의한다. 그리고 의기투합한 이들은 자신의 작전에 가장 걸맞는 동지들을 규합하는데, '살상은 금물, 평민들의 재산에 눈독들이지 말 것, 그리고 게임처럼 즐길 것'이라는 대니의 원칙과 달리, '남자'가 섞이면 '관계'와 '상황'이 복잡해진다는 이유로 '오로지 여성들'만의 규합을 단 하나의 원칙으로 삼는다. 

그 원칙에 따라, 2000년대 초반에 라스베이거스에서 1억 5천만 달러를 훔치기 위해 오빠가 '카드의 달인 러스티(브래드 피트 분), 소매치기 라이너스(맷 데이먼 분), 폭파 전문가 배셔(돈 치들 분), 중국인 곡예사 등을 불러들였다면, 2018년의 동생은 수장고 안에 모셔져있던 그 천 배나 되는 1천5백억 짜리 목걸이를 뉴욕 메트로폴리탄 패션 갈라 행사에서 '납치'하기 위해 3d 프린터를 동원해 짝퉁을 만들어 내는 전업 주부(?) 태미(사라 폴슨 분), 천재 해커 나인 벨(리한나 분), 보석 전문가 아미타 (민디 캘링 분), 그리고 소매치기 콘스탄스(이콰피나 분), 디자이너 로즈(헬레나 본햄 카터 분)를 불러 모은다. 그렇게 영화는 2001년에도, 그리고 2004년에도, 그리고 2007년에도 남성들, 혹은 한 명 정도의 조력자 여성으로 꾸려졌던 '남성 중심'의 작전을 온전히 '여성'들만의 힘으로 이루어 낸다. 

그들이 한 팀이 되는 이유는 제 각각이다. 오랜 동지와 벗으로, 혹은 연인으로, 여전히 가족의 그늘과 어려운 형편을 벗어나기 위해, 남편에게 이베이에서 샀다 거짓을 할 수 밖에 없는 '범죄에의 숨길 수 없는 욕망'때문에, 그리고 어린 동생이 필요로 하는 게 가짜 신분증인 어려운 처지 때문에, 그리고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디자이너지만 조만간 감옥에 갈 지도 모를 경제적 위기때문에, 혹은 외로움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감옥으로 보낸 사랑에 대한 복수 때문에. 하지만 저마다 제 각각의 이유로 모인 그녀들은 한 팀이 된 순간, 일고의 의심도 없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헌신한다. 그 흔한 작전 가운데의 흔들림이나, 회유, 배신은 2018년판 <오션스> 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영화는 '여성들'이 모이면 흔히 벌어지는 '시기'와 질투'의 관행이 여성들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었다고 이의를 제기하듯 영화 전편에서 그녀들의 동지애는 진득하게 유지된다. 심지어, 영화 후반, 그들의 '이용 대상'이었던 데프네(앤 해서웨이 분) 조차 그들이 자신을 이용한 줄 알았음에도 그들을 '고발'하는 대신, '우정'의 대상으로 삼는다. 



여자들이 모이면~?
기존의 오션스 시리즈가 당대의 대표적 배우들의 '멋짐'을 한껏 소비하는데 주력했듯이, 2018년 여성 버전으로 돌아온 오션 시리즈 역시 '비싼 목걸이'을 훔치는 과정에서의 박진감이나 스릴 대신 각각의 캐릭터로 등장한 여성들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작전에 주력한다. <오션스 11> 시리즈에서 조지 클루니가 26번, 브래드 피트가 24번의 의상을 갈아입으며 '눈호강'을 시켰듯이, 데비가 감옥을 출소하는 그 장면에서 부터 시작하여, 케이티 홈즈, 킴 카사디안, 다코타 패닝 등의 까메오 군단이 등장하는 갈라 파티와 베르사이유 궁전을 연상케하는 메트로 폴리탄 박물관의 배경, 그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데비, 다프네의 화려한 드레스 의상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하지만 화려한 드레스만이 여성을 돋보이게 하는 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보러 간 이유가 바로 루 역의 케이트 블란쳇의 출연이었듯, 이미 <토르; 라그나로크>를 통해 압도적 존재감을 선보인 케리트 블란쳇이 빚어낸 기획자 루의 보이시한 캐릭터와 해커다움을 발휘한 리한나의 자유로운 스타일, 그리고 팀 버튼 감독의 영화에 출연 중인 그녀를 잠시 빌려온 듯한 분위기의 헬레나 본 햄 카터의 독특한 분위기가 그녀들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낸다. 

시작은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대비의 실연이자, 사기 사건이었다. 사기를 쳐야 할 그녀가 외려 사기를 당하여 감옥에 가고, 그 동안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 그 '억울한 사연'이 '작전'의 시작이자, 마무리이다. 하지만, 그런 대비의 '보복 작전'만으로 <오션스>를 제껴버리기엔 그녀들의 엔딩이 무색하다. 원래 함께 하려 했던 목걸이 외에, 어부지리, 혹은 애초에 그림자 작전으로 계획된 성과로 인해 약속된 이상의 보상을 얻게 된 그녀들은 백인 명사들이나 활보하는 그 메트로폴리탄 레드 카펫을 당당하게 우아한 블랙 드레스로 활보한 그 당당함으로 <오션스8>을 정의내린다. 감독의 선택을 받는 대신, 스스로 감독이 되어 영화를 만들고, 다시 한번 디자이너로 재기를 하며, 남편의 눈치따위 보지 않는 사업가가 되고, 사랑을 찾고, 가족과의 화목을 찾고, 여유를 누린다. 비록 '목걸이 납치 사건'의 범죄 행위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의 '전문적 능력'을 통해 당당하게 자신들의 주체적인 삶을 누리는 것으로 아마조네스 작전을 영화는 마무리한다. 



영화는 남성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동지애적 동성의 사랑으로 치유하는 과정으로, 그리고 오로지 여성들만으로 능력으로 성공한 작전으로, 또한 무엇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작전 과정에서 다양한 인종의 융화, 이질적이며 차별적인 계급 사이의 조화를, 또한 그 결과로 신분과 인종을 상관없이 주체적 삶의 실현으로 전세계적으로 열기를 더해가지만 한편에서는 쉬이 해소되지 않는 각종 논쟁의 대상이 되는 '페미니즘' 흐름 내의  다양한 목소리를 무리없이 담아내고자 한다. 

앞서 <오션스> 시리즈가 그랬듯이, 이 작전에 개연성이나, 장르 영화로서의 스릴 등을 기대한다면 아마도 역시나 <오션스 8>도 '미흡'한 면이 많은 영화이다. 하지만, 산드라 블록, 케이트 블란쳇, 앤 해서웨이, 리한나 등 당대 그 존재감만으로 보고 싶어지는 이 배우들이 한 영화에서 큰 고생없이 행복해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션스8>는  어쩌면 그 값을 제법했다는 데 동의한다면 그리 아깝지 않은 영화가 될 것이다. 
by meditator 2018. 6. 17. 12:16

<탐정; 리턴즈>는 <탐정; 더 비기닝>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들어진 시리즈 영화다. 첫 번째 시리즈가 2015년이었으니 햇수로 3년 꽤난 적조했던 시리즈이다. 그런데 웬걸, <탐정;리턴즈> 속  주인공 권상우와 성동일이 한 열 번째 시리즈로 만난 것처럼 친숙하다. 그건 전작 '더 비기닝' 때문이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 비슷한 캐릭터를 맡아왔던 두 배우 덕분이다. 드라마에서 매번 '카리스마' 넘치던 김명민 배우가 영화 <조선 명탐정>으로 오면 코믹한 캐릭터로 변신하는 것과는 달리. 권상우는 '그' 권상우 같고, 성동일은 '그' 성동일인 게 적어도 '리턴즈'까지 <탐정> 시리즈엔 '친밀감'으로 작용한다. 물론 이 '친밀감'이 다음 시리즈까지 이어질 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두 번째 시리즈인 <탐정; 리턴즈>에서 권상우와 성동일은 친숙해서 반갑다. 




권상우와 성동일의 <탐정> 
<탐정; 리턴즈(이하 탐정)> 속 권상우는 그 권상우다. 관객들에게 '권상우'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던 시절 그가 연기했던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 <말죽거리 잔혹사(2004)>, <청춘 만화(2006)> 속 그 '권상우'말이다. 그리고 가깝게는 얼마전 역시나 두 번째 시리즈를 마친 <추리의 여왕 시즌2> 속의 하완승으로 분했던 그 '권상우'이기도 하다. 마치 고등학생이었던 권상우가 나이가 들어, ''김하늘'과 연애도 좀 하고, 나이가 좀 더 먹어서는 형사가 되어 '최강희'와 함께 탐정을 하다, '서영희'와 결혼을 해서 아이가 딿린 유부남이 되어 돌아온 듯하다. 그는 지나간 시간 동안 다른 역할 속 다른 연기를 했지만, 관객들이 기억하는 바, 껄렁껄렁하고, 시덥지않은 농담을 던지며, 소심하게 여자들을 비롯한 남들의 눈치를 보며, 그 무슨 일을 해도 그다지 누군가에게 해를 주지 않는, 어눌한 말투의 착한 남자, 그 '권상우'란 트레이드 마크로 '강대만'이란 옷을 입고 돌아왔다. 

똑같은 장르물이지만 <추리의 여왕> 속 권상우가 분한 하완승이란 캐릭터가 경찰대 출신 엘리트로 탁월한 추리 능력을 가진 여주인공 유설옥을 도와주며 로맨스로 엮이는 몸짱 얼짱에 격투력이 뛰어난 형사인 반면, <탐정>에서는 유설옥이 했던 역할인 '탁월한 추리 능력'을 강대만이 선보이며 하던 만화가게를 엎고 탐정 사무소를 차릴 만큼 추리 능력은 뛰어나지만 현장에서 싸움 능력은 젬병인 소시민이지만 두 작품을 공히 본 시청자, 혹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대사'나 '설정'의 차이 외에 <탐정>과 <추리의 여왕> 속 두 권상우에 대해 차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둘 다 '허허실실' 그 권상우가 나오는 작품이다. 그러기에 <메디컬 탑팀(2013)>이나 <야왕(2013)> 속 캐릭터에 대한 호평을 할 수 없듯이 이제 마흔 줄의 배우로서 권상우란 배우의 연기 변신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가질 수는 없지만 지나간 시간 속에 그가 쌓아왔던 예의 '권상우'란 캐릭터에 대한 시간의 내공은 여전히 시청자, 혹은 관객에게 익숙한 친밀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탐정; 리턴즈>는 그 익숙함을 능숙하게 활용한다. 

성동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함께 했던 이일화가 영화 속 아내로 등장했을 때 관객들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말투는 거칠고, 배려없어 보이지만 그 속에는 가족에 대한, 자신의 일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 그득한 아버지, 심지어 영화 속 그의 쌍둥이 딸들은 미처 자라지 않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개딸'들 같다. 거기에 더해 '형사' 성동일 또한 익숙하다. <라이브(2018)> 속 지구 대장이 승전하여, <청년 경찰(2017)>의 경찰대 교수가 되기도 하는 등 여러 보직을 거치다,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자신이 놓친 범인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해 치매가 걸린 상황에서도 그 추격의 끈을 놓지 않는 <반드시 잡는다> 퇴직 경찰의 지나온 한 시절이<탐정> 속 노태수로 찾아온 듯하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탐정;리턴즈>는 첫 시리즈 <탐정; 더 비기닝>에 대한 기억보다, 배우 권상우, 성동일에 대한 친숙한 기억을 가지고 관객을 소환한다. 거기에, 언제나 그가 '여치'였던 듯 역시나 제 몸에 맞는 캐릭터로 돌아온 이광수의 '조미료'같은 합류로 시리즈의 재미를 확장한다. 



가장이 된 권상우와 성동일, 그래서 인간미 넘치고, 그래서 아쉬운 
의기 투합하여 개업한 탐정 사무소, 하지만 우리 사회 '탐정'에 대한 생소한 인식처럼 사무소는 파리를 날린다. 결국 그로 인해 투닥거리던 두 사람은 각자 일거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다니고, 그러던 중 경찰서에 우연히 만나게 된 '약혼자 실종 사건'은 뜻밖에도 거대한 음모의 실마리가 되는데.....라는 영화 속 사건은 '신선'하지는 않다. 장르물을 조금만 본 사람이라면 한 눈에 약혼자의 출신 보육원이 문제가 있을 거란 걸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사건이지만, 전직 형사이지만 까칠한 새 팀장의 방해를 받는 노태수의 내공과 어설프지만 순간순간 빛나는 추리 능력을 가진 강대만 콤비에 여치 이광수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아들이었던 최성원 등이 분한 동료 형사의 '인간미' 넘치는 협업이 '뻔한' 서사를 채워간다. 

<탐정>을 엮어가는 건, 권상우와 성동일, 그리고 조력자들의 '인간미' 넘치는 활약과, 그들의 생활인으로서의 '애환'이다. 의논도 없이 만화 가게를 팔고 탐정 사무소를 차린 남편 때문에 아이를 내버려두고 나가버린 아내 때문에 아이를 띠로 메고 쩔쩔매는 아빠 권상우와, 서슬퍼런 아내의 칼질 앞에 입을 닫을 수 밖에 없는 워커홀릭 아빠 성동일의 고뇌가 시리즈의 행간을 메운다. 

그래서 아쉬운 장면들이 있다. <탐정> 속 뜻밖에도 빛나는 장면은 권상우, 성동일 콤비와 여치의 합이 맞는 활약상들 가운데에서도, 아이를 납치당할 뻔한 장면에서 빛의 속도로 등장하여 납치범을 제쳐버린 강대만의 아내 서영희의 존재감이다. 영화 속 서영희가 등장하는 장면은 마치 '스타카토'처럼 통통 튄다. <미씬; 사라진 여자(2016)> 로 여성의 이야기를 잘 그려냈던 이언희 감독에게 바란다면, 만약 다음 시리즈가 가능하다면, 이 '강대만의 아내'의 활약을 좀 더 늘려, 가장 탐정극의 확장 버전인 '가족 탐정극'으로 시리즈를 변주시켜 보면 어떨까 싶을 만큼 아내 서영희의 존재감은 빛났다. 그에 덧붙여 뜻밖의 복병이었던 손담비 캐릭터의 활용이 장르물의 전례를 넘어서지 못한 점이 역시나 아쉬움을 남긴다. 이처럼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의 활용은 '스테레오' 타입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은 그저 영화가 '남성중심적'이라는 점만이 아니라, 그래서 캐릭터의 해석과 서사의 측면에서 뻔하게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는 점에서 <탐정>이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으로 남는다. 
by meditator 2018. 6. 15. 16:04

인도 영화하면 불현듯 화려한 음악이 흐르고 영화 속 인물들이 뛰쳐나와 어울려 군무를 추며 노래를 부르는 '발리우드'가 떠오르기 십상이다. 하지만 영화 <바라나시>를 보면 그런 인도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한 나라의 문화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인가를 깨닫게 된다. '발리우드'와 <바라나시>라는 영화를 품은 인도는 마치 한 쪽에서 그 물을 떠마시고, 목욕을 하며, 다른 쪽에서 그 물에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갠지스 강'과도 같다. <바라나시>를 통해 그 갠지스 강처럼 유장한 인도 문화의 한 지류를 맛본다. 하지만 그 '누런' 흙탕물의 맛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건 '인간 보편 존재와 관계'에 대한 물음이다.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 
유대교와 기독교 심지어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일생에 한번은 꼭 가봐야 할 성지로 '예루살렘'을 든다. 밤 하늘에 붉게 수놓는 십자가만큼 기독교 문화가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그러기에 성지 예루살렘은 익숙한 곳이다. 하지만, 인도와 힌두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바라나시'는 생소한 지명이다. 갠지스 강이라면 그래도 사회나 지리를 통해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하지만. 우타르프라데시, 비하르, 서뱅골에 걸쳐있는 갠지스 평원을 가로질러 남동쪽으로 2,510km를 흐르는 갠지스 강은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에게는 성스러운 숭배의 대상이다. 그 중에서도 비슈바나타, 산카트모차나 사원 등이 있는 이 2010 km의 강 줄기 가운데에서도 인도인들은 굳이 바라나시를 '예루살렘'처럼 평생에 한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로망'한다. 매년 10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여전히 이곳을 방문한다. 

힌두교를 믿지 않은 일반인들이 보기엔 그저 누런 흙탕물의 냄새나는 강일 뿐이지만, 인도인들은 그 강으로 '순례'를 떠나 그곳에 몸을 담고, 그 물을 떠마시며, 꽃불인 '디아'를 띄워 소원을 빌고, 화장을 하고 그를 띠워 보낸다. 결국은 하나로 흐르는 강물에 어우러지는 삶과 죽음, 이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혼돈', 그러나 인도인의 종교적 소망의 집결체가 바로 '바라나시'이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인도에서도 이 '종교적 로망'이 예전같지 않다. 영화 <바라나시>에서 아들 라지브(아딜 후세인 분)가 일하는 직장의 사장은 아버지의 순례 길에 동반하려는 라지브가 못마땅하다. 2510km 그 갠지스가 그 갠지스일 텐데 굳이 바라나시일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고, 그 질문에 아들 라지브는 대답을 찾지 못한다. 그저 '아버지'가 가시니 어쩔 수 없다할 뿐. 그런 아들이기에 라지브가 바라보는 바라니시의 갠지스 강은 이방인의 눈에 비친 냄새나는 모순 덩어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바로 여전히 바라나시를 종교적 성지로 바라보는 세대와 그걸 받아들이기 힘든 세대 간의 간극, 그곳에 영화 <바라나시>가 자리잡는다. 영화 속 70대의 아버지 다야(랄리트 벨 분), 그의 아들이자 딸의 아버지인 끼인 세대의 52세 가장 라지브, 그리고 그의 딸 25살의 수니타(팔로미 고시 분), 이 세 세대의 갈등과 화해가 바라나시라는 공간을 통해 흘러간다. 



아버지의 죽음맞이를 따라온 아들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가장 라지브, 그런데 건강이 좋지 않은 그의 70대 아버지가 바라나시로 순례 여행을 떠나시겠단다. 아니 아버지의 표현대로라면 그곳으로 죽으러 가시겠단다. 힌두교도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번은 가보고 싶은 그곳에 대한 로망을 말릴 수는 없지만, 그곳에 건강도 안좋은 아버지가 죽으러 가겠다니, 입장이 난처한 아들 말려보지만 아버지는 완강하다. 결국 혼자라도 길을 떠나겠다는 아버지로 인해 아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죽음에의 순례 여행에 동행자가 된다. 

15일을 예정하고 떠난 바라나시 행, 하지만 택시를 타고 다시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바라나시의 골목을 인력거를 타고 내리며 도착한 호텔 샐베이션(영화의 원제), 그곳에는 라지브의 아버지처럼 죽음을 맞이하러 위해 온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동생에게 눈물의 이별까지 하고 온 죽음에의 여행이지만, 막상 호텔 샐베이션에서 맞이한 건 삶의 과정이다. 집안 일이라고는 해보지도 않은 아들이 만든 식사를 못먹겠다는 아버지, 혼자서 떠나오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손 하나 까닥않고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아버지는 말 그대로 휴가온 여행자이다. 덕분에 아버지는 잠시 건강 상의 위기를 넘기고 오랫동안 그곳에서 죽음을 기다린 할머니를 비롯한 주변 투숙객들이랑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반면 사장의 눈치를 받으며 아버지를 모시고 울며 겨자먹기로 떠나온 아들의 일상은 하루하루가 '고생길'이다. 아버지 음식 봉양에서부터, 낯선 호텔과 바라나시의 생활을 책임지는 한편,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을 통해 이어지는 직장 일은 그를 매순간 '시험'에 들게 만들어 아버지와의 이별을 슬퍼하면서도, 본의 아니게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는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든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딸, 그 인연의 '묵티(mukti 구원)'
하지만 그런 일상의 번거로운 잡음을 타고 드러나는 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쉬이 풀어내지 못하는 부자의 애증이다. 작가이자 선생님으로 존경받아왔던 아버지는 이제서야 '문재'가 있었던 아들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치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아들은 어릴 적부터 유독 자신에게만 엄격했던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다. 그러기에 아들은 뒤늦은 아버지의 칭찬에 부아를 낸다. 

반면 아들에게 그리 엄격했던 아버지는 정작 그 아들의 딸인 손녀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격려한다. 여전히 딸을 위해서라며 대학을 마치자 마자 좋은 남자와 결혼하기를 강제하는 그 아버지의 아들과 달리. 나의 자식이기에 나의 아버지이기에 접어지지 않는 마음들. 이렇게 영화는 죽음의 순례 장소에서 드러나는 세대간의 해묵은, 혹은 현재 진행형의 갈등과 애증을 드러낸다. 

'캥거루'가 되어 주머니에 안경도, 책도 뭐든지 넣고 싶다던 아버지, 이제는 삶이 거추장스러워 죽음의 여정에 올랐지만, 오래전 아들의 재능을 뒤늦게 안타까워하는 아버지가 홀로 죽음을 찾아가는 '코끼리'가 되기까지는 예정된 15일을 훨씬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건 아들도 마찬가지다. 책임감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왔던 아들은 바라나시라는 본의 아닌 유배의 장소에서 가장과 아들의 존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갈등한다. 그리고 유보된, 아닌 기약할 수 없는 아버지의 죽음이, 이런 이들 각자의 '화두'를 풀어낼 시간이 된다.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을 따라 바라나시의 죽음도 흘러가는 걸 보며, 아버지는 비로소 캥거루였던 자신의 존재를 놓는다. 그리고 비로소 '아버지'와 '아들', 그 본연의 관계로 아들을 품는다. 아버지로서의 욕심을 놓고 아들을 아들로서 받아들인 아버지는 그래서 자신의 자식이지만 누군가의 아버지인 아들을 풀어준다. 그리고 아들도 애증으로만 바라보았던 아버지와의 인연에서 풀려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돌아설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 역시 이제는 세속의 틀에서 한결 자유로워져 스쿠터를 타는 딸의 시동을 대신 걸어줄 여유를 찾는다. 

어쩌면 영화는 어느 사회에서나 벌어지는 세대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에서 순례의 길을 떠나온 사람들이 몸을 적시고, 다른 곳에서 그 물을 성수라 떠마시며, 그리고 그 물에 죽은 자들이 길을 떠나는 이 기묘한 '성지'의 공간은 '인연'의 번거러움을 덜어내고, 삶과 인연, 그리고 죽음에 대해 돌아볼 여유를 준다. 가족이기에 놓아버릴 수 없었떤 갈등과 애증은 바라나시라는 '죽음'이 전제된 특별한 공간을 통해 '묵티(구원)'에 이른다. 그리고 <바라나시>를 통해 관객들도 그 '인연의 묵티'라는 화두를 짊어지고 돌아온다.  
by meditator 2018. 6. 1. 17:26

사실 이 리뷰를 쓰는 것이 적잖이 부담스럽다. 글쓴 이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게 리뷰를 적었는데, 칸에서 황금빛 상이라도 타면, 나의 생각이 편협하거나 옹졸했다는 반증이 될 것 같아서, 하지만 세계성이 곧 지금 이곳을 사는 우리의 생각과 맞물릴 수만은 없다는 뻔뻔함으로, 이 글을 계속하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의 2018년작 영화 <버닝>은 이 시대를 사는 청춘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승화하고자 한다.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의 <헛간을 태우다>를 모티브로 하여 상징적 대사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산자'로 살아가야 하는 청춘의 슬픈 운명을 각인시킨다. 또한 영화 속 주인공 해미가 로망으로 여겼던 아프리카의 북소리를 연상케 하는 베이스의 퉁퉁 튕기는 모그(mowg)의 ost는 '파주'라는 지역적 공간을 젊음이 방황하는 세계 그 어느 곳으로 그 정서를 확장한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정작 이곳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아니 청춘의 당대성에 매몰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그 '상징성'이나 '존재론'이 분명하게 다가올 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대의 청춘들이 너무나 상징적이고 수려해서 우리의 문학적 언어에 귀기울이기 힘들 듯, <버닝>은 그렇게 대중과 교감하기 힘든 '순수 문학'으로 남겨질 가능성이 크다. 



<버닝>, 그리고 <초록 물고기>
영화의 런닝 타임이 흐른 지 어언 한 시간 여,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지금 이창동 감독이 이 만연체로 표현하고 있는 2018년을 살아가는 종수(유아인 분)와 해미(전종서 분)의 삶에 동시대 청춘들은 공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문득 이창동 감독을 문제적 감독으로 떠오르게 만든 작품 <초록 물고기>가 떠올랐다. 

느와르의 형식을 띤 영화 <초록 물고기>는 <버닝>과 유사한 관계 구성을 보인다.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한 청년 막동(한석규 분), 그는 우연히 만난 여인 미애(심혜진 분)을 만나게 되고, 그녀로 인해 그녀가 일하는 나이트 클럽을 중심으로 암약하는 암흑가의 보스 배태곤(문성근 분)과 조우하게 된다. 미애를 소유하고자 하는 배태곤과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막동, 이들의 엇갈린 삼각 관계는 결국 청부 살인의 비극적 결말로 끝맺는다. 

1997년 그 시대의 부도덕한 부의 상징이었던 암흑가의 보스, 그는 시간이 흘러 2018년에 직업조차 모호한 유한남 벤(스티븐 연 분)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1997년에도, 2018년에도 여전히 직업도 마땅치 않은, 심지어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내지 못하는 변변찮은 청춘의 모습은 이제는 50대가 된 한석규에서 서른 즈음의 유아인으로 변했지만, 그들의 존재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여전히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남자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성적인 희생양으로 대상화되는 여성의 존재도 대동소이하다. 

16만명으로 흥행 성적만 놓고 보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초록 물고기>는 1997년 올해의 좋은 영화로 선정되며, 평단과 관객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한석규는 그 시대의 젊음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시간이 흘렀지만, 이창동 감독의 다음 작품 <박하 사탕>의 영호와 함께 막동은 그 시대를 대변하는 젊은이라는 점에서 대중은 공감한다.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들였지만 세상 물정을 몰랐던 그, 여전히 일산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한 가족 공동체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그는, 배태곤으로 상징되는 '물신'의 세상에 무지했고, 그래서 그의 시도는 그의 생명을 담보한 무모한 실패로 되돌려 졌다. <초록 물고기>를 보지 못한 사람조차도 피흘리며 형에게 전화를 걸다 죽어가는 막동의 모습은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그리고 이십 여년, 군대를 제대하고 나이트 클럽에서 일 자리라고 구하려던 청년은 윌리엄 포크너에 자기 동일시는 하는 알바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역시나 온 몸을 드러내고 홍보를 하는 알바생이다. 나이트 클럽 일에 청부 살인도 마다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보려던 청년은 글을 쓰고 싶지만 무엇을 써야겠는지도 모르는, 알바로 돈을 벌고 싶지만 세상의 강제를 견뎌내지 못하는 무기력하지만, 자존심만은 여전한 청년이 되었다. 그가 사랑한 해미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그녀가 사랑한 아프리카만큼이나 그녀의 삶 역시 모호하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본 2018년의 청춘이 그렇다. 1997년에 그리도 구체적으로 손에 잡혔던 청춘은 2018년이 되서 무기력하고 모호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알바를 하기 위해 갔던 종수가 군대식 호명에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모호한 건 감독 자신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여에 걸쳐 장황하게 감독은 젊음을 설명하려 했지만, 설명하려 할 수록 그 젊음은 추상적이었고, 그 '추상'은 동시대의 실존과 어쩐지 '괴리'가 되는 느낌. 크로키로 그려내야 할 대상을 추상적 터치의 정물화로 그려낸 그런 느낌을 <버닝> 속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받는다. 그러기에 <초록 물고기>속 막동에게는 공감했지만, <버닝>의 종수는 2018년에 살지만, 어쩐지 이 시대의 젊은이라기엔 막연하다. 과연 종수가 자기 동일시 했던 윌리엄 포크너, 그 추상적이고 모호한 존재에 공감하는 젊음이 얼마나 될까? 감독은 이 시대의 젊음을 그리려 했지만, 정작 그 젊음들은 이창동 감독이 그려낸 젊은이에 공감할까? 

<버닝> 그리고 <파주>
파주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무기력한 젊음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나의 아저씨>를 통해 여운깊은 연기를 보여준 이선균 주연의 2009년작 <파주>를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도 의문에 쌓인 한 여인의 죽음이 있고, 무엇인가 하기 위해 파주를 찾았지만 무기력했던 한 남자 중식이 있다. 

박찬옥 감독의 2009년작 <파주>에서 파주는 이제 막 신도시 건설의 끝자락에서 파괴되어 가는 농촌을 그려낸다. 그곳에서 불륜의 관계로 엇물리는 세 남녀의 사랑은 결국 철거민 점거 농성장에서 '결자해지'의 연을 가지게 된다. 영화 <파주>는 흔들리는 청춘과 농촌에서 도시로의 변화되어가는 그 지점에서 해체된 관계를 통해 지역과 동시대의 청춘의 관계를 절묘하게 그려냈다.

그렇게 2009년에도 이미 도시로 진입되어 가던 파주는 하지만, 이제 늘 일산이라는 변두리를 통해 한국사의 그늘을 담아왔던 이창동 감독에 의해, 발전되어 가는 일산에 밀린 폐비닐하우스가 즐비한 쇄락한 농촌의 정경으로 다시금 찾아온다. 쇄락한 농촌, 그곳에서 폐쇄된 관계 속의 부자는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 속에 방치된 인간들을 담아내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본 이 시대의 청춘은 <초록 물고기>에서 어떻게든 자본주의 사회에 진입하려 안간힘을 쓰던 이도 아니요, <파주>에서 이제 막 도시로 진입되어 농촌처럼, 자본주의 사회 그늘에서 그 그림자를 직시하려 고군분투하던 이도 아니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본 2018년의 청춘은 아이러니하게도 시대는 한층 더 발전했지만, 그 시대의 발전에 방치된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들이다. 

영화의 제목 <버닝> '태우다'는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흔히 인터넷 상에서 열렬히 어떤 대상에 빠져있는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종수는 하던 알바도 놔둔 채, 문창과를 나와 하려던 창작 작업조차 딜레마에 빠진 지리멸렬한 상태다. 뜻밖에도 그런 그가 우연히 만난 고향의 옛 여자 친구에게, 그리고 그녀와 함께 나타난 그녀를 소유한 듯한 의문의 남자에게 빠져듦으로써 자신의 무의미한 삶을 반증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성'은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주제'를 매개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버닝> 역시 마찬가지다. 종수는 빠져들지만 벤은 빠져들지 못하는 그 '여성'이, 무기력했던 종수를 전사로 깨어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그의 선택은 폭발적이지만, 동시에 종수란 존재를 증명하기엔, 또한 그의 행동이 벤이라는 대상으로 상징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정죄로 보기엔 우발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단말마적 그의 버닝이 무기력했던 그의 존재와의 연관성에서 우연히 나타났던 벤만큼이나 피상적이다. 



<버닝>, 그리고 <리턴>
<초록 물고기>라는 작품을 오래도록 회자되도록 만든 건, 막동이란 청춘을 더욱 안타깝게 조폭 보스 배태곤의 존재다. 자신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거침없이 제거해 버리는 이 존재의 무참한 악이 그 맞은 편에 있는 선량한 막동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버닝>에서 그 역할을 하는 건 스티븐 연이 분한 벤이다. 그는 직업조차 알 수 없지만, 강남의 빌라에 살며,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대마초를 스스럼없이 피우고, 폐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를 가진, 이 시대 '부도덕, 혹은 탈도덕의 상징'. 그런데 어쩐지 벤으로 그려진 이 '악의 축'이 새삼스럽지 않다. 파괴적이지도 않다. 

얼마전 종영한 sbs의 <리턴>에서 벤 저리 가라할 재벌가 혹은 유력 명문가 자제들의 도덕적 아노미가 '진수성찬'으로 나열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리턴>을 들 것도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tv 드라마, 그리고 종수를 연기한 유아인이 영화 <베테랑>에서 연기했던 조태오를 대표로 하여 빈번하게 등장했던 캐릭터들의 '연장'이다. 그런 면에서 <버닝>은 우리 사회에서는 새롭지 않은 부도덕한 가진 자와, 그 가진 자에 의해 농락당하는 여자와, 그녀를 사랑했던 순진한 남성의 삼각 관계의 재연이라는 점에서 '서사'적 신선함을 접고 들어간다. 



<버닝>, 그리고 <시>
하지만 서사의 신선함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의 빼어남으로 얼마든지 상충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부도덕한 가진 자들을 악의 축으로 한 작품들이 계속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창동 감독은 어쩌면 뻔한 이 사회의 부조리한 관계를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과 청춘의 고뇌를 잘 구현해 냈을까?

그 지점에서 이창동 감독의 전작 <시>가 떠오른다. 노인의 처지에 버텨내기 힘든 일을 하면서도 손주를 키워가는 할머니 미자(윤정희 분)가 시를 배우게 느끼게 되는 '세상에 대한 자각'이 뜻밖에도 마주하게 된 현실을 영화는 담담하게, 그래서 더 처연하게 승화시켰다. 할머니의 현실, 손주의 상황은 구체적이었기에, 할머니가 만난 시를 통해 깨달은 자각의 세계는 더욱 처절했다. '안다', '깨닫다', '보다'라는 '인문학적 사고'가 만난 '자각'과 '책임'의 묵직함을 이보다 더 절묘하게 설명해 낼 수 있었을까. 

한 소도시에서 벌어진 청소년들의 부도덕한 사건으로 비롯된 할머니의 슬픈 결말은 할머니가 처한 상황의 구체성으로 인해 더욱 빛이 났다. 그러기에 2018년 <버닝>으로 돌아온 이창동 감독이 어쩐지 아쉽다. 이창동 감독이 영화를 통해 표현해 내고자 했던 상징을 이해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감독이 그려낸 그 상징이 미자 할머니가 살았던 그 현실에 가닿았던 <시>와 달리, 2018년의 청춘의 현실에서는 막연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문학적'인 우리 문학이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쉬이 회자되지 않는 것처럼 상징으로 점철된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낯설지 않은 이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치정극은 그 집요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쉬이 다가서지지 않는다. <시>의 상징이 대중과 잇닿지 못해 안타까웠다면, <버닝>의 상징은 대중을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여겨진다. 서른의 유아인이 연기한 종수는 우리 시대의 젊은이이지만, 마치 저기 90년대나, 80년대에서 시간 여행을 온 여행자 같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그들이 하루키처럼 사는 건 아니다. 본의 아니게 전투에 떠밀려온 몇 포의 젊은이들에게 종수의 전쟁은 사치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by meditator 2018. 5. 20. 02:23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있다. 아이를 재우려고 자장가를 불러주다, 어릴 적 아무 생각 없이 부르던 동요의 고운 가사에 애틋해지고, 아이의 '독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책을 읽어주다 그 작가의 글과 그림체에 매료되버린다. 레이먼드 브릭스가 그랬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년과 눈사람의 우정을 그린 <눈사람>의 작가로 알려진 레이먼드 브릭스는 <눈사람> 외에도 <산타 할아버지>, <곰> 등의 작품으로 아이들은 물론, 동화책 좀 읽어줬다는 엄마들에게도 친숙한 작가이다. 그 레이먼드 브릭스가 자신의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작화했던 <에델과 어니스트>가 영화화되어 찾아왔다. 마치 옛벗을 만나듯 레이먼드 브릭스의, 아니 레이먼드 브릭스 원작의 로저 메인우드 감독의 <에델과 어니스트>를 만나러 갔다. 




비판적인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의 'c'set la vie'
나와 가까운 사람, 하물며 나를 존재케 해준 부모가 살아온 삶에 대해 '회갑연 상찬'을 넘어선 '조명'이 쉽지 않다. 물론 그 '반대'의 '부정'의 경우도 있지만, '상찬'이던, '부정'이던, 나라는 존재의 감정적 찌거기를 거르고 부모 세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건 언제나 숙제이다. 그런 면에서, <에델과 어니스트>는 여운이 남는다. 극적이라서가 아니라, 마치 한 장, 한 장, 그림책을 넘기며 한 세대의 삶을 조감하는 심정으로, 그래서 결국에는 나 역시도 이 분들처럼 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사을 뛰어넘지 못한, 한 세대로 인생을 살아가겠구나 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한다. 

그런데 <에델과 어니스트>에 돌입하기 전에, 레이먼드 브릭스라는 작가에 대해 우선 '배경 지식'을 쌓을 필요가 있을 듯하다. 즉, 그가 자신의 부모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이다. 흔히 소년과 눈사람의 겨울 한 철에만 존재하는 조금은 쓸쓸한 우정에 대한, 그래서 아름다운 동화책의 작가로만 우리는 기억하지만, 그의 작가적 세계는 생각보다 비판적이다. 



1920년대 런던의 우유 배달부와 가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레이먼드 브릭스, 영화 속 그의 부모님들이 전쟁과 자본주의의 급격한 발전을 겪으면서도 그들이 마련한 집에서, 그들이 얻었던 직업을 유지하며 나름 평생을 순탄(?)하게 보냈지만, 정작 레이먼드 브릭스는 그 자신에 대해 다르게 설명한다. '세상에 대해 여러 고민을 해야 했던 가정 환경과 성장 과정을 통해 대체로 난 우울하고 비관적이고 부루퉁해 있다. 언제나 세상 살기 괴롭다고 느껴왔고 나이 들수록 더 그렇게 느껴진다. 언제나 뚱해왔고 지금은 더 불만투성이다. 난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

그렇게 불만이 많고 뚱한 그를 통해 표현된 세상은 그의 작품을 통해 드러난다. 전래 동요 모음집인 <마더 구스>는 흔히 동요를 낭만적으로 그려내는 대신, 현대적인 배경에 노동 계층을 주인공으로 한 해학적인 해석을, 어린이와 작은 사람의 짧은 3일 간의 만남을 그려낸 <작은 사람>은 보는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육아에서 인간의 만남에 대한 상징적 이해로, <바람이 불 때에>에서는 핵전쟁이라는 세기말적 상황과 그에 대해 순진하리만치 성실한 노부부를 통해 '세계사'와 불가항력인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통해 역설적으로 '핵'의 위험성을 절실하게 경고하며 세상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해 왔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 그의 시간이 자신의 부모 세대를 그려낸 <에델과 어니스트>에서도 고스란히 관철된다. 



보수당 지지자 에델과 노동당 지지자 어니스트 부부의 삶 
1920년대 런던의 우유 배달부였던 어니스트는 날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길에 가정부였던 에델과 마주친다. 자신을 보며 씩씩하게 인사하는 청년 어니스트에게 호감이 갔지만, 늘 집주인의 닥달로 그와의 눈맞춤마저도 여의치 않았던 에델, 하지만 용감히 그녀가 일하던 집의 문을 두드린 어니스트로 인해 그들의 만남은 이어질 수 있었다. 

한참 젊은 두 연인의 만남, 하지만 우유 배달부와 가정부였던 그들의 존재가 그들의 만남과 결혼 마저도 규정한다. 당시 런던의 밤거리를 흥청이게 했던 파티 문화는 그들에게는 '사치'였으며, 결혼을 한 그들을 맞이한 건 흰 천으로 겨우 가림막을 가린 침대 하나 없는 20년 장기 융자의 텅빈 집이었다. 그래도 부부는 각자의 형제를 지난 1차 대전으로 잃은 그들이 살아남아 서로의 짝을 만난 건 다행이며 보장된 어니스트의 직업으로 가정을 꾸릴 수 있어 행복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성실함'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하다 뒤늦게 어니스트를 만나 결혼하게 된 에델은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고 싶다던 어니스트의 소망과 달리 레이먼드 단 한 명을 낳고 단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를 자른다는 사실 만으로도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아들을 귀히 여겼던 에델이었지만, 2차 대전 발발과 히틀러의 런던 공습은 이 부부로 하여금 소중한 아들을 전쟁을 피해 시골로 떨어뜨려 보내야만 하는 '이별'을 겪도록 만든다. 그들이 조금씩 꾸며 가꾸었던 집은 전쟁의 포화 속에 반공호가 되었고, 결국 전쟁의 참화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삶은 여전히 이어져 갔다. 하늘이 맺어준 그들의 인연이 다하는 날까지. 

이렇게 영화는 평범한 한 부부의 일생이라는 날실과 그 날실의 변화를 주도하는 역사적 사건,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을 통해 변화해 가는 부부의 삶을 관조적으로 그려낸다. 세계를 뒤흔든 전쟁은 그들의 일상을 변화시키지만, 그럼에도 우유 배달 조합의 성실한 직원이었던 어니스트와 알뜰한 에델은 전후 영국의 복지와 자본주의 발전의 혜택의 '수혜자'가 되어 '안정된' 삶을 구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저 격동의 세월 속 객체로서 부부를 그려내지만은 않는다. 가정부 계급 출신이지만 인생의 마지막 요양 병원에 병문안 온 장발의 아들에게 빗을 건넬 만큼 깔끔했던 어머니 에델은 우유 배달부인 남편에게 왜 당신이 노동 계급이냐며 반문을 할 정돌 처칠을 비롯한 보수당 정부의 일관된 지지를 보였다. 그녀에게 어니스트와의 결혼 생활은 '노동 계급'에서의 계층 상승을 보장해준 삶이었다. 

그에 반해 늘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에 귀를 기울아던 남편 어니스트는 최저 임금 결정안에 두 팔 벌려 환호할 정도로 노동 계급의 정체성에 충실했다. 때론 그가 지지했던 정책이 그의 신념을 당혹스럽게 할 지라도. 그래도 그는 자전거에서, 카트,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은퇴'할 때까지 '해직'의 위험없이 가정을 지킬 수 있었다. 

에델은 '럭비'를 하는 상류층 계급이 다니는 학교에 아들이 입학한 것에 자부심을 가졌고, 아들을 통해 그녀가 소망했던 계층 상승의 꿈을 이루는가 싶었지만, 그 아들은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미술 학교를 갔고, 손자를 안겨주는 대신 조현병의 아내와 아이도 없이 살아가야 했다. 부부는 하나뿐인 아들이 갸륵했지만, 그 아들은 금세 커서 부부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 건너가 부모를 낯설게 했다. 결국 성실하게 살아내며 침대와 소파를 마련하고, 선물로 받던 석탄 한 줌 대신, 보일러와 텔레비젼의 문명을 겪어낸 부부였지만,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채 병으로 이별을 맞이한다. 젊은 부부의 열의로 가득했던 집은 아들 레이먼드가 얻어온 배의 씨앗이 아름드리 나무가 되도록 그들의 스위트 홈으로 여전했지만, '부부의 인생'은 그 시간을 버텨내지 못한다. 그렇게 한 세대의 삶이 마무리되어간다. 



영화는 레이먼드 브룩스의 부모를 통해 1,2차 대전을 경과하고, 전후의 복지 국가 시대를 살아낸 세대의 삶을 조망한다. 그들은 부부였지만, 각자 자신의 삶에 대한 주관은 달랐고, 그 '주관'과 다르게 국가의 정책과 문명의 발전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냈다. 그런 그들의 '순응적'인 태도 그 어디에서도 레이먼드 브룩스가 느꼈던 우울하고 비관적이었던 정경은 쉬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건 부모 세대와 그 부모 세대에 대해 '비판적'일 수 밖에 없는 '자식 세대'의 간극일 터이다. 

영화를 보면서 감회가 묵직해진 건, 전쟁을 겪으면서 각자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임에도 '부부'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낸 그 시간에 대한 다른 공간을 살았던 부모 세대를 둔 자의 회한이다. 우리네 부모들은 에델과 어니스트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다른 '정치적 입장'이 그들의 생사를 갈랐으며, 그들이 '순응'의 대가로 누렸던 '안정된 삶'을 얻기 위해 처절한 자기 희생과노력을 겯들여야 했다. 이미 '선진국'인 국가의 국민과, '개도국'의 다른 운명이 다른 삶의 길을 걷게 했던 지난 시기에 대한 투영이 <에델과 어니스트>에 대한 감상을 묵직하게 한다. 




by meditator 2018. 5. 18. 04:24

가끔씩 우스개처럼 전해지는 해프닝들이 있다. 공시생 학원에 엄마가 전화해서 우리 아이 학원 왔냐든가, 혹은 대학 수강 신청 관련하여 나서는 모성이라던가, 이 '웃기지도 않는' 다 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 실화라는 점에서 우리는 실소한다. 실제 대학 학부모 방담 자리에서 우리 아이가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한다는 하소연을 하는 엄마를 목격하기도 했으니, 아마도 사실일 터이다. 대학에 가서도 여전히 '엄마'의 품에 있어야 하는 아이들, 그러니 초등생의 경우 오죽할까? 부모들의 지시에 따라 방과 후의 시간을 보내는 건 당연지사가 된 지 오래 되었다. 방과 후 공부를 하기 위해 만난 아이들은 대부분 지쳐 있다. 하루 종일 학교 생활을 했으니 당연, 하지만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도 다시 공부를 해야 하는 이런 삶에 '이견'이 없다. 힘들고 지쳐도 그러려니 한다. 그래서 더 '요즘 아이들'이 안타깝다. 그렇게 '부모'가 '스케줄 짜준'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아이들과 가정의 달 5월에 <원더스 트럭>을 한편 보는 건 어떨까?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성장과 부모의 자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의 영화다. 




'시궁창'에서 별을 찾아 떠난 아이들
<원더스 트럭>의 주인공은 소년 벤(오크스 페글리 분)과 소녀 로즈(밀리센트 시먼즈 분)이다. 그런데 이 두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는 시공간이 다르다. 하지만 시공간을 달리 하는 이 소년과 소녀를 잇는 공통점이 있다. 소녀가 물가에 띄워 보낸 종이배에 그녀가 쓴 단어 'help', 간절하게 도움이 필요했던 소년과 소녀, 하지만 그들은 그 '도움'을 찾아 스스로 길을 떠난다.  

미네소타 주 호숫가에 사는 소년 벤이 사는 시간은 1977년, 사서인 엄마 엘레인(미셸 윌리암스 분)와 단 둘이 사는 소년은 여전히 늑대에게 쫓기는 꿈을 꾼다. 꿈 속에서 '벤'을 불러 깨워주던 아빠의 목소리, 하지만 현실의 그를 깨워주는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나중에'라며 말하며 미루던 엄마, 그런 엄마에게 나중이라 말하다 기회를 잃을 지도 모른다며 투박하게 농담을 던지던 벤의 말은 교통사고로 진실이 되어버렸다. 엄마가 그리워 엄마의 방에서 옛날을 추억하던 벤은 <호기심의 방 원더스 트럭> 속 아빠가 보낸 카드에서 찾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다 그만 벼락을 맞아 청력을 잃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청력을 잃어버린 벤은 소녀 로즈와 또 하나의 공통점이 생긴다. 1927년 무성 영화와 같은 흑백의 공간 속 소녀 로즈, 그녀는 듣지 못한다. 그리고 듣지 못하는 그녀와 눈조차 마주치기 싫어하는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세상과도 분리시키려 한다. 그런 '답답한 삶'을 견디지 못한 소녀 로즈는 가정교사의 가르침 대신, 긴 머리를 끊어내며 아버지가 만들어준 새장과도 같은 삶을 뛰쳐 나온다. 소녀가 본 영화 속 무성 영화의 시대가 끝나듯, '무성영화'의 세상 속에서 살 수 없는 소녀는 '무성 영화'처럼 자신을 가두려는 '아버지'의 세상을 스스로 떨쳐나온다. 



그렇게 1977년과 1927년 흑백과 총천연색으로 색채마저 달리하는 50년의 시공간을 넘어, 도움이 필요했던 소년과 소녀는 스스로 그 '해답'을 찾아 길을 떠난다. 어머니가 남긴 책 <호기심의 방 원더스 트럭> 속 켄케이드 서점을 찾아 '아버지'의 향방을 찾으려는 소년과 이제는 자리를 잃은 무성 영화 속 주인공인 어머니를 그리워, 여배우인 어머니가 연극 배우로 공연하는 극장을 찾아 온 소녀는 '뉴욕'이라는 공통적 공간으로 향한다. 

순간의 선택이 만들어 낸 기적
길을 떠난 소년과 소녀의 여정은 당연히 순탄하지 않다. 1927년이든, 1977년이든 그 시대의 번화가였던 뉴욕의 번잡한 소음 속에서 여전히 '묵음'의 세계 속에 갇힌 소년과 소녀는 그 '소음'의 세계 속에서 이방인 일수 밖에 없다. 달려오는 마차의 소리는 위기가 되고, 친절한 소년의 한 마디는 무용지물이다. 

소년 자신이 동일시했던 무성 영화 속 흠모했던 주인공인 줄 알았던 여배우는 알고보니 소녀의 어머니 릴리안(줄리안 무어 분)이었다. 하지만 힘들게 자신을 찾아온 딸에 대한 반응은 떠나온 집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혼자서 위험하게 돌아다니냐며 펄쩍 뛰기만 하는 어머니를 두고, 다시 자연사 박물관으로 '모험(?)'을 떠나는 소녀.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았던 뉴욕에서 친절하게 자신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했던 소년을 따라 역시 무작정 자연사 박물관으로 향한 소년, 그렇게 두 사람의 여정은 시간을 두고 다시 겹친다. 

하지만 박물관에서 두 사람의 여정은 쉽지 않다. 수상스런 그녀를 의심하는 박물관 경비원들의 추격, 잡힐듯이 잡히지 않는 친절했던 소년과의 숨바꼭질,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방을 박물관처럼 꾸몄던 벤과, 역시나 자신의 방을 '디오라마(작은 공간 안에 어떤 대상을 설치해놓고 틈을 통해 볼 수 있게 한 입체전시)'처럼 꾸몄던 로즈는 시대를 달리한 자연사 박물관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안식'을 느낀다. 박물관 중앙에 전시된 운석에서 시대를 달리하며 조우하는(?) 두 사람, 하지만 영화는 '환타지 같은 기적' 대신, 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선택의 기적을 선물한다. 



1927년에 스스로 부모가 만들어 놓은 새장 같은 세상에서 한 걸음을 내딛은 소녀는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서 오빠를 만나 자신이 살아갈 새로운 세상을 연다. 그곳에서 자신에게 맞는 공부와 사랑하는 이를 만나, 아들까지 얻으며 행복하게 살던 소녀는 이제 50여 년의 시간을 보내고, 오빠와 함게 하는 서점에서, 아빠를 찾아 그곳으로 온 손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1927년의 로즈와 1977년의 벤은 그렇게 시간을 뛰어넘은 인연으로 만나게 된다. 또한 벼락으로 청력을 잃은 상실감에 시달리던 벤은 그 상실감을 공감해줄 동변상련의 동지를 만나게 된다. 로즈가 부모가 만들어 준 새장 같은 집을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벤이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지 않았다면, 스스로 세상 속으로 한 발을 내딛은 소년과 소녀의 용기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인연'의 기적을 만든 것이다. 

1927년의 무성 영화와도 같은 뉴욕, 그리고 1977년 데이빗 보위의 '스페이스 오디티'와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ost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컬러'의 현란함으로 표현된 뉴욕, 동일한 공간이지만 다른 시간대가 가지는 문화적 느낌을 색채감으로 표현해낸 영화는 그 분리된 공간 속에 스스로 한 발을 내딛은 소년과 소녀의 인연을 1977 실제 벌어진 뉴욕 정전 사태를 배경으로 별빛 속의 조우로 기적처럼 그려낸다. 결국 '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선택, 그 선택의 중요성을 부각하며 영화는 스스로 빛나는 삶의 아름다움을 매우 '영화적인 형식'으로 풀어낸다. 그러기에 아이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이 시대의 부모, 부모가 정해준 울타리에서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어찌할 줄 모르는 이 시대의 가족에게 한번쯤 봐야 할 필독서 같은 영화이다. 




by meditator 2018. 5. 6. 17:10
영화의 시작과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운 건 줄리엣 비노쉬의 풍만한 가슴이 드러난 남녀의 정사이다. 하지만 그 '나신'의 뒤엉킴이 자아내는 '므흣'한 감상에 빠져들기도 전에 우리는 그 '남녀의 정사'가 마치 우리가 밥을 먹고 잠을 자듯 살아가는 일상사의 연장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마치 설탕을 넣어야 하는 음식에 잘못들어간 소금으로 인한 식사 자리의 고약함처럼, 그렇게 '정사'를 벌이는 두 남녀의 불협화음은 베드씬의 환상을 고르란히 깨어버리고, 그것이 지극히 평범한 우리네 일상의 한 부분이라는 걸 절감케 한다.
렛더 선샤인 인ⓒ 씨네룩스

장황한 언어 뒤의 진실
정사의 매료됨을 깨어버리는 주된 이유는 바로 줄리엣 비노쉬가 분한 이자벨의 만족스럽지 못함 때문이었다. 충분히 즐기고 있다는 그녀의 언어는 지금 당신이 전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처럼 전해지고, 그 역설의 언어는 파트너인 상대방을 더욱 고전케 만든다. 때로는 생수 한 병으로, 혹은 예정된 약속에 대한 간과나 무시에 대한 장황한 설전으로 번지는 두 사람의 대화, 그러나 '언어'는 솔직한 속내에 대한 예의바른 절차일 뿐, 그 '관례'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건 여전히 결혼 반지를 빼지 않는, 아니 빼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남자 빈센트(자비에 보부아 분)와 그런 남자가 야속한 여성 이자벨이다.

그리고 이자벨의 해프닝은 이어진다. 현대 미술관 관장이자 화가인 이자벨, 그녀와 일 관계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던 친구인 연극 배우(니콜라스 뒤보셸 분)와 대화 역시 엇물린다.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권태로운 친구는 그 삶의 권태로움을 이자벨을 통해 도피하려 하고, 그 친구의 알듯 말듯한 속내는 이자벨과의 장황한 대화를 통해 결국 하룻밤으로 이어지지만, 끝내 결혼을 파기할 수 없다는 친구와 이자벨은 관계를 이어가지 못한다.

그런 식이다. 그녀는 자신의 갤러리로 가지고 있으며 예술가로서 나름의 입지가 있는 듯하지만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 전 남편과 딸 한 명을 두고 이혼한 그녀, 아직도 그녀 아파트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남편은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열 살 먹은 딸 아이마저 불안스럽게 만드는 그녀의 방황에 짜증을 낸다. 영화 전편에 걸쳐 그녀는 자신의 삶을 채워줄 그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렛더 선샤인 인ⓒ 씨네룩스

때론 우연히 여행지에서 충동적으로 만난 남자에게 끌려 함께 지내기도 하지만, 그녀와 계층적 위치가 다른 그가 그녀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매번 거리 생선 가게에서 자신의 별장을 내밀며 그녀의 관심을 구하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결국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그녀가 해법을 찾아나선 '점쟁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그녀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자신 안의 태양을 찾으라 하지만, 그런 그에게 그녀가 구하는 건,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은 남자들의 구애이다.

결국 영화는 '자존'의 이야기였을까? 영화의 제목에서 등장하는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낸다. 그녀에게 남성적 관심을 보이면서 점쟁이로서 본연의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 줏어 삼킨 점쟁이(제라르 드 파르디외 분)의 '자신 안에서 스스로 빛을 찾으라'는 그 말이 이 영화의 주제였을까?

당신의 태양은 당신이 빛내라 
이자벨은 '관계'에서 평안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관계는 생각보다 까다롭다. 그녀를 만나는 남자들은 푹 파진 티에, 긴 부츠,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짙은 화장을 한 그녀의 섹시한 외양만을 보고, 'enjoy'의 대상으로 '간주'하지만, 정작 그녀가 원하는 건, '결혼'마저 파기하며 그녀와 '영속적'이며, '안정적'인, 그리고 심지어 계층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족감을 줄 대상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듯 그건 수많은 남자들과의 '편린'과도 같은 관계로 그녀에게 '공허함'을 짙게 만들 뿐이다. 뜻밖에도 은행가든, 연극배우든 결혼을 한 남자들은 그들이 이미 맺은 사회적 관계인 결혼을 깨뜨릴 의지가 없고, 그녀의 마음과 기대는 늘 상대방과 보조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결국 영화는 '관계'를 통해 '자존'의 완성을 구하려는 그녀를 역설적으로 '자존'의 결핍으로 귀결되게 한다. 이는 흔히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자존감'에 대한 질문에 도달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건 이미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 정의이다. 하지만 '집단성'이 해체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각자의 삶을 '각자가 책임져야 하는' 주체가 된다. 각자가 나면서 부터 소속된 집단에 의탁해서 그 삶이 해결되고 진행되는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 현대를 경유하며, 인간은 '삶의 주체성'을 얻은 대신, 그 '주체'의 무게를 고스란히 개인 짊어져야 하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집단성'을 상실한 개체의 불안마저 자신이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사회이다. 스스로는 빛도 내지 못하는 행성인에게 감히 태양의 정체성을 입힌다.

렛더 선샤인 인ⓒ 씨네 룩스

이자벨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런 '현대인의 짊어져야 하는 '주체의 무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이혼까지 해서 완벽한 개체로 독립적이다. '남자'로 상징될 뿐 가족도, 친지도 이렇다할 '영속'적인 관계도 없이 그녀의 삶은 온전히 그녀의 자존에 달려있다. 심지어 예술가로서 자신의 일조차 그녀를 독립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관계'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군집적'인 본능은 그녀로 하여금 끊임없이 남자로 상징되는 '소속감'에 대한 갈망으로 표현된다. 이는 이자벨이라는 '헤픈 여자', 혹은 '자존감'이 떨어지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자존감'이라는 방패를 무기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겪는 대부분의 딜레마이다. 과연, 인간이 온전히 자신의 자존으로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현대의 관계론은 이런 개인의 문제를 영화에서 처럼 '당신 안의 태양을 찾으라'는 식의 '자존감'의 문제로 귀결시킨다. 내가 '레벨업된 완전체'가 되어야 사랑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얼마전만 해도 다수의 문학 작품은 '사랑'을 통해서 완성되는 '인간' 군상을 그려왔었다. 오늘날의 해석에 따르면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러브 스토리>는 얼척없는 해프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전 47%라는 경이적 시청률을 보이며 화제 속에 종영한 <황금빛 내 인생> 역시 50부가 넘는 대장정의 과정 속에서, 여주인공의 주체적 사랑을 그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드라마는 사랑 조차도 자신의 자존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고 시간이 걸려서라도 그녀를 해바라기처럼 기다려 주는 환타지적인 사랑을 그려내는 이 드라마는 오늘날의 입맛에 맞는 현대판 신데렐라 환타지로 대중을 위로했다. 이자벨이 불행하다면 우리의 tv를 장악하고 있는 그런 그녀의 불안한 자존마저 끌어안을 환타지적 대상이 없는 현실이다. 안타깝게도 그녀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로 만들어줄, 그녀의 모든 불행을 끌어안아줄 수 있는 스펙 좋은 연하남이 없었다.

드라마는 '양수겹장'의 환타지로 자신의 자존감도 챙기고, 관계에서도 성공하는 여주인공을 그리지만, <렛더 선샤인인>은 결국은 쉽지 않은 현대적 인간의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자벨은 남자를 통해 '자존'을 구하는 헤픈 여자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 행복의 본능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태양마저 스스로 작동시켜야 하는 현대인의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by meditator 2018. 5. 5. 1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