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jtbc 뉴스룸>은 신년 특집으로 <100분 토론>을 준비했다. 손석희의 100분 토론이라니! 아마도 mbc 시절 손석희가 벼려냈던 100분간의 공정한 토론의 광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 이상의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논객이 <썰전>의 유시민, 전원책에, 냉철한 입담으로 이미 그 명성을 쌓은 개혁 보수 신당의 유승민, 이재명 성남 시장이라니, 더더욱 그 기대는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당일 <신년 특집 100분 토론>은 <100분 토론>이라는 mbc의 허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토론의 질을 담보해 낼 수 있는 진짜 주인이 누구인가를 말하기 조차 무색하게 만든 11.89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르랴, 기대감이 높았던 만큼 13년전 손석희의 풍성한 <100분 토론>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1월 2일의 100분은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내내 검색어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전원책이라는 이름처럼, 그 길지 않은 100분의 시간을 자신의 고집스런 입장으로 농단해버린 전원책 변호사의 장황한 언설때문에 손석희의 벼려진 날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안타깝게도 '전원책 변호사님~'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예능같은 화제성에 흥분할 일만은 아니다. 비록 많은 시간을 전원책 변호사가 잡아먹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의 <썰전>에서 처럼 사이다 성 발언도 몇 마디 했고, 무엇보다 전원책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2017년의 정국에서 '개혁'은 대세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시간이었으니까. 

탄핵, 법보다 중요한 것은 
탄핵 정국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 <100분 토론>, 유시민, 유승민, 이재명 세 사람의 논객이 순탄한 탄핵 과정을 예견한 것과 달리, 전원책 변호사는 변호사라는 전문가적 입장에서 '탄핵'이라는 과정의 법리적 적용이 쉽지 않음을 진단한다. 누적 참가자 1천만 명을 넘기며 그 차가운 12월의 겨울 거리를 매주 촛불로 메우며 겨우 탄핵을 이끌어 낸 민심, 하지만 그것이 헌법이라는 법률적 과정으로 들어서면 입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런 전원책의 입장에 유승민 가칭 개혁 보수 신당 의원 역시 뇌물죄의 입증의 난감함에 동조했다. 또한 세월호 7시간 역시 마찬가지의 논리로 풀어낸다. 역시나 전직 변호사였던 이재명 시장이 명쾌한 논리로 대응을 했지만, 토론의 상황은 '법리적 해석' vs. '법리적 해석'이라는 자중지난으로 빠지는 듯 했다. 이때, 유시민 작가가 일갈한다. 상식적으로 그날 시골의 밭 가는 할머니도 무엇을 했는지 다 기억하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발언 자체가, 그리고 보고도 받지 않은 것이 역력한 반응을 보이며 뒤늦게 나타난 자체가 그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냐의 규명과 상관없이 상식적 차원에서 탄핵감이라고 단언한다. 

'토론'은 말과 말의 전쟁이며, 입장과 입장의 부딪침이요, 논리와 논리의 싸움이다. 그러기에 토론 과정에서 설사 그가 옳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입장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 '질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그 논리와 논리가 용호상박으로 부딪쳐 버리면, 그것을 보는 사람은 자중지난에 빠져버리기도 한다. 탄핵 정국과 관련한 전원책 변호사나 유승민 의원의 입장이 바로 그 '법리'라는 논리를 이용하여 결국은 '탄핵'이 용의치 않거나, 빨리 이루어지기 힘들 수도 있다는, 하지만 결국은 '보수'적 바램을 피력한 것이라면, 그에 대해 이재명 변호사는 법리적 해석을 들어 방패가 되었고, 유시민 작가는 현재의 탄핵 과정의 본질을 새롭게 환기시키며 자중지난의 늪에 빠져들 탄핵을 구해냈다. 

1월 2일 <100분 토론>의 묘미와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전원책 변호사는 예의 <썰전>에서 하듯, 아니 그 이상 '보수 논객'으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탄핵' 등에 발을 걸려 애를 썼지만, 결국 결론은 현재의 '탄핵' 과정을 이끌어 가는 건, '법리' 이상의 민심이라는 결론을 드러내게 했을 뿐이다. 물론 이마저도 오독한 그 누군가가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탄핵으로 시작한 토론은 이날 참석자 중 다음 대선에 출마할 유승민, 이재명 두 사람에 집중된다. 아니, 그에 앞서 유승민이 소속된 가칭 개혁 보수 신당에 대한 검증이 앞선다. 



너도 나도 개혁, 호가호위와 실천을 구분할 수 있어야 
역시나 전원책 변호사의 전방위적인 불만 토로에도 불구하고, 유승민 의원의 입을 빌어 드러난 것은 현재 이 나라의 '보수'가 우리 사회의 '개혁'을 내세우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한 과정이었다. 촛불 민심을 통해 대통령 한 사람의 제거가 아니라, 그 물질적 배후가 되었던 재벌의 개혁과 그 재벌의 편중된 부로 인해 고통받는 대다수 국민의 보호받아야 할 노동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여야를 막론하고 대세가 되었음을 스스로 입증한다. 특히나 유승민 의원이 영국 노동당이 지난 세월 동안 성장해 온 예를 들어, 보수의 생존이 곧 일부 특권층에 의존이 아니라, 광범위한 복지에 대한 대중적 공감에 있음을 단언하는 장면은 현재 보수가 선택한 자명한 길, 아니 대한미국에서 '정치'가 나아갈 자명한 길에 대한 선포이다. 

하지만 1월 2일 <100분 토론>에서 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유승민 의원이 내세운 보수의 자기 탈피가 아니다. 오히려 시대가 밀어붙여 개혁을 당 앞에 걸어야 하는 보수의 처지를 두고 이재명 변호사는 그런 유승민 의원의 의견이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공감한다. 또한 지난 대선에서 현재 청와대에서 주인입네 하고 있는 사람이 모든 좋은 정책을 다 끌어다 모아 하겠노라고 대중의 눈을 현혹시켰던 과거를 불러온다. 그리고 무엇을 하겠다라는 입에 발린 정책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보수라 칭하는 사람들은 그래왔다며,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입으로는 국민을 위한다는 사람들이 '노동 개혁'이라는 것을 내세워 노동 악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 현실이라 진단한다. 

이재명 변호사가 내세운 수치를 들고 갑론을박을 벌이며, 심지어 목소리를 높여 윽박지르는 전원책 변호사에 대해 이재명 변호사가 남긴 한 마디는 인상적이다. 그간 대한민국에서 온갖 머리 좋다는 사람들이 나서서 경제에 좋다는 정책은 다 해봤지만 결국 나라가 이 모양 아니냐고, 문제는 어떤 정책이 문제가 아니라, 편중된 부를 사회 전체에 나누고자 하는 기본적 '윤리'가 우선해야 한다고 검증의 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다. 

돌아다니는 웃긴 영상 중에 지금 청와대에서 있는 사람이 상대였던 문재인 대선 후보에게 '제가 다 할 겁니다'하며 씨익 웃는 영상이 있다. 그 당시 대선 토론에서 그 사람은 온갖 개혁적 정책은 자신이 다 할 것처럼 의기양양했었다. 야당 후보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정도로. 그로 부터 불과 몇 년이 흐르지 않아, 이제 그 사람은 자신의 임기조차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의 처지에 놓여있다. 

1월 2일의 100분 토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세 치 혀를 통해 나온 논리와 말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의 행간 속에 숨어있는 그들의 실체다. 그간 <썰전>의 기가막힌 편집을 통해 사이다성 발언을 해왔던 전원책 변호사였지만, 결국 생방송 토론 과정에서 그가 보인 모습은 고집불통 보수 논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믿어주지 않을 실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개혁을 하겠다고 나선 보수 정당의 의원은 그 시절 최순실의 농단을 몰랐다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빨 센 사람들의 말싸움이 아니라 추운 날 시민들을 거리로 불러 모은 민심이요, 그 민심이 바라는 바, 빠른 탄핵과, 그들의 비호 세력이었던 재벌 개혁이라는 사실이다. 논리의 맞고 그름을 넘어선 진실, 그걸 눈밝게 찾아낼 수 있는, 바로 그것이 <jtbc 신년 특집 100분 토론>의 관전 포인트다. 
by meditator 2017. 1. 3. 14:40

kbs2의 <월계수 양복점>은 연일 상한가를 치고 있다. 이번 주에도 전국 수도권 가릴 것없이 34%로 자체 최고 시청률의 기염을 토했다.  2위인 mbc의 <불어라 미풍아>(18.9%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와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나는 수치이다. 그에 걸맞게 지난 2016 kbs연기 대상에서 <월계수 양복점> 팀은 우수상, 여자 조연상, 신인상, 베스트 커플상까지 다수의 상을 휩쓸었다. 


1월 1일 방송분에서 그간 재기의 설움을 겪던 성태평(최원영 분)이 동숙(오현경 분)-다정(표예진 분)모녀의 아낌없는 도움으로 드디어 <가요 무대>에서 트롯 가수로 재기에 성공하듯이 과거의 가수와 팬의 사랑이라던가, 월계수 양복점을 매개로 한 수제 맞춤 양복(belpoke handmade suit) 등 신선한 트렌드의 도입처럼 그간 주말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았던 이색적 소재와 '가족', '사랑'이라는 주제를 적절하게 버무려 주말 안방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제 중반을 넘겨 드라마 속 등장한 커플들의 이야기가 각각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즈음 <월계수 양복점>이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는 관점에 대해서는 한번쯤 짚어보아야만 한다. 아니 <월계수 양복점>만이 아니다. <월계수 양복점>을 비롯하여 우리네 안방 극장의 주인공이라 할 주말극, 일일극들의 관성적인 구성 방법 자체에 대해 새삼스럽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지점이기도 하다. 

사랑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는 여주인공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하고 드디어 공중파 음악 프로까지 나선 성태평의 무대가 1일 <월계수 양복점>의 화려한 눈요기였다면, 정작 시청자들의 관심이 모아진 것은 바로 남녀 주인공 이동진(이동건 분)과 나연실(조윤희 분)의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이별이었다. 

그 과정은 우리나라 드라마의 전형적인 관례에 따른다. 잘못꿰어진 첫 만남으로 인해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던 이동진-나연실 커플, 심지어 아버지가 사라진 월계수 양복점에 사장으로 취임한 이동진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나연실의 해고였을 정도로 이 커플의 사이는 나빴다. 하지만 드라마가 그렇듯이 그럴 수록 사사건건 얽히게 된 이 커플,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드디어 결국 당연하게도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하지만 나연실은 비록 형식적인 식이나마 올리다 잡혀간 명색이 남편 홍기표(지승현 분)가 조만간 감옥에서 출소할 예정이고, 이동진은 한때 미사 어패럴의 사위였다, 비록 지금은 이혼했지만. 엄연히 법적으로 싱글인 두 사람, 하지만 막상 두 사람이 사랑을 하고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자 두 사람의 앞길을 막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처음부터 나연실을 데리고 안성에 데려가 시집살이를 시키려 했던 홍기표의 어머니는 이제 아예 대놓고 연실의 집을 점거하기에 이른다. 소용이 다했다고 내칠 땐 가방 하나 싸서 짐짝 버리듯 내버릴 땐 언제고 이제와 잊지 못하겠다며 미사 어패럴의 큰딸 민효주(구재이 분)는 미련이 한 보따리다. 하지만 문제는 이 둘이 아니다. 정작 가장 큰 두 사람의 복병은 연실이 부모님처럼 믿고 따랐던 이동진의 어머니(김영애 분)다. 극중에서 꼬장꼬장하고 잔걱정이 많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따뜻했던 동진의 어머니가 정작 연실이 동진의 배필이 된다고 하자, '시'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미사 어패럴의 큰딸인 옛 며느리 민효주를 불러들이는가 하면 대놓고 연실에게 떠나달라 요구하는 식이다. 드라마는 아내에게 말도 없이 집을 나갔던 동진의 아버지는 묵묵히 사랑을 후원하는 마음 넓은 아버지로 그리는 반면, 어머니는 제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했어도 자식의 결혼 앞에서는 이해가 앞서는 이기적인 캐릭터로 그린다. 이 역시 우리 드라마에서는 익숙한 설정이다. 극단적 모성으로 희화화된 민씨 일가의 고은숙(박준금 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2017년에도 여전한 가족 이데올로기 
2016년, 그리고 17년, 무려 21세기에도 여전히 '시어머니'의 반대가 결혼의 주요한 장애가 되는 드라마, 그리고 그런 장애를 넘지 못하고, 테일러의 기술자가 되겠다며 의욕을 냈던 나연실은 자신이 그간 쌓아왔던 커리어를 다 버린 채 야반도주하듯 월계수 양복점을 떠나 딸기 농장의 일용직 노동자가 된다. 물론 극중에서 연실은 이미 앞서도 마트 직원과 야쿠르트 아줌마를 전전했다. 하지만 그건 월계수 양복점에서 해고가 되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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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젠 경우가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커리어를 단박에 포기하고 떠나는 '순애보적'인 여인을 드라마는 눈물겨운 사랑이라 칭송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사랑에 목매는 여성은 연실만이 아니다. 이미 성태평과 동숙의 결혼 과정도 '스타'와 '팬'이라는 관계로 설정되었을 뿐 처음부터 동숙이 태평을 거둬먹이다시피한 사랑이었다. 

어디 태평과 동숙 뿐인가. 요즘 '아추' 커플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민효원(이세영 분)-강태양(현우 분) 커플 역시 성태평-동숙 커플의 판박이다. 비록 낙하산이었지만 미사 어패럴 실장이었던 민효원은 모든 것을 제친 채 드라마 속에서 오로지 강태양 바라기만을 한다. 그녀의 배움, 그녀의 학력 따위는 모두 소용이 없다. 한때 닭집을 하며 시장을 호령하고, 양복점을 하다 망한 남편까지 거두었던 복선녀(라미란 분)는 그래도 한때는 아르바이트라도 열심히 하더니 요즘은 오로지 잘 생긴 남편 배삼도(차인표 분) 스토커에 가까운 행보를 보인다. 

드라마는 이런 여성들의 '사랑 밖에 난 몰라'를 요즘식의 적극적인 여성의 구애 방식이라 그린다. 사랑에 있어 적극적인 것은 좋다. 하지만 적극적인 것과 사랑밖에 몰라서 자신의 일상 생활을 온통 사랑에 몸바치는 것과는 별개의 차원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주말, 일일 드라마는 쉽게 여성을 사랑을 위해 자신이 그간 쌓아왔던 것들을 포기하고, 사랑으로 인해 분노하여 복수에 헌신하는 캐릭터로 그려낸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이 삶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사랑과 그 결실인 '가정'이다. 그 결과물이 가정이건대, 당연히 그 가정의 위계를 이루는 '시어머니'의 입김 또한 절대적이다. 가정과 사랑에 목매는 여성, 드라마가 강요하고 있는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다. 
by meditator 2017. 1. 2. 16:25

12월 31일은 참 이름다웠던 '병신'년의 마지막 날이다. 하지만 그 이름같았던 '병신'년은 역설적으로 '민주'의 목소리를 올곧이 세웠던 해이기도 하다. 토요일, 변함없이 광장에는 10번째 촛불 집회가 열렸고, 110만 명이 참석하여 누적 참가인수가 1천만 명을 넘겼다. 그렇게 한 해의 마지막을 광장의 촛불이 불타오르는데, 그런데 '따뜻한 위로'의 가장 손쉬운 매체인 tv가 한 해를 보내는 방식은 어땠을까? 촛불과 함께 좀 달라졌을까? 아쉽게도, 연일 '블랙리스트'를 지시한 이와 그 조력자들이 드러나고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이 즈음, tv를 시청하며 한 해를 보내는 시청자들은 그저  '암흑이 없다면 별이 빛날 수 없고, 어둠과 빛은 한 몸이라는(한석규)' 추상적 메타포의 속뜻을 헤아릴 수 밖에 없거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거나, '참이 거짓을 이기는' 개념 한 마디에 통쾌해 할 수 밖에 없었다. 




개념 소감으로 만족하기엔 아쉬운 
몇몇 수상자, 혹은 시상자의 개념 발언을 제외하고는 작년이나, 혹은 그 이전이나 그저 등장하는 스타의 면면만 달라졌을 뿐, 하등 달라지지 않았던 시상식과 가요 제전, 아니 달라진 것은 있었다. 흔히 12월 31일 밤 12시가 다가오면 거리로 카메라를 옮겨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그 흥겨운 카운트 다운의 현장을 중계하던 공중파 방송 3사가 약속이나 한 듯 그 현장음을 소거해 버린 것이다. mbc와 kbs는 자체 스튜디오에서 팡파레를 울렸고, sbs는 보신각을 비춰졌지만 원경으로 잠시 스쳐지나가듯 했을 뿐이다. 왜? 혹시나 보신각으로 행렬을 진행하겠다는 촛불 집회측의 발표에 제 발이 저리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혹시나 제야의 종소리 현장에 끼어든 촛불 집회 행렬이 행여나 방송국의 집안 잔치에 '누'가 될까 저어했던 것일까? 아니, 애초에 세월호 부모님에서부터 위안부 할머니분이 함께 하는 보신각 타종 행사가 못마땅했던 것일까? 그 어느때보다도 격동적이었던 2016년이었건만 여전히 연말 시상식 무대는 마치 그런 세상의 흐름과는 별개의 유흥 파티장같았다. 과연 이런 변화되지 않는 방송 환경에서 sbs 시상식 말미 <그것이 알고 싶다> 출신의 박정훈 사장의 '변화하는 환경에 걸맞는 방송을 만들겠다'는 출사표는 생소하다. 내년을 기약해야 할까?

특히 kbs의 경우 시상식에 앞서 고두심과 최수종을 등장시켜 31일의 시상식이 kbs 연기 대상 30주년이었음을 자축하는 자리를 가진다. 하지만, 30년의 축하는 최수종이 전성기를 열었던 대하 드라마에 대한 소개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한류 붐을 일으켰던 <겨울 연가>의 주제 음악과 방송 영상으로 이어지며 30년의 관록이 무색해져 버린다. 30년의 기념답게, 아니 언제나 kbs는 공영 방송의 권위를 세워 다수의 조연 연기자들을 시상식에 배석시키지만 언제나 그렇듯 관록의 중견 연기자들을 들러리로 세우고 만다. 오죽했으면 중견 연기자 김영철씨가 그분들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을까. 입으로는 30주년을 칭송했지만, 정작 시상식은 올 한 해 시청률로 kbs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태양의 후예>와 <구르미 그린 달빛>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이었다. 결국 대상을 받은 송혜교, 송중기 커플은 등장부터 방송 중간, 중간 몇 번의 인터뷰를 통해 대상 수상에 대해 무안하리만큼의 소감을 집요하게 질문받았고, tv 카메라는 이들의 동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 어느 곳에서도 청와대의 그분이 즐겨 시청했다는 그 드라마에 대한 일고의 반성은 없다. 오로지 화려한 성과급의 잔치뿐. 그나마 kbs 다운 면피라면 '단막극'에 대한 시상 정도랄까. 

여전한 제 논에 물주기 식 수상 
그나마 kbs는 그래도 집안 잔치라도 제 논에 물주기라도 시상 과정에 구색은 갖추었지만, sbs로 가면 그 장르별 나뉜 수상 면모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정도로 남발하는 시상 과정이 스타 체면 치레용 생색내기처럼 보일 정도다. 무엇보다 매번 시상식이 끝나고 나면 구설수에 오르곤 하는 mc를 스스로 자부하듯 연 4년에 걸쳐 사회를 보게 하며, 시상식인지 지인들 모임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언급으로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연례 행사를 올해도 변함없이 재연했다. 허긴 대상은 투표에 따른 인기상으로 스스로 폄하한 mbc가 있음에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무엇보다 시청률에 목을 매는 방송국의 사정답게 결국 시상식은 학교에서 성적좋은 아이에게 주는 우등상처럼 시청률 그래프에 따라 그 결과가 점쳐지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대상'쯤 되면 관록과 내공있는 중견 연기자의 몫으로 기립 박수를 받으며 시상대에 오르던 시상식의 권위를 찾는 것이 무색했졌다. 덕분에 '대상'의 대상이 점점 젊은 연기자들의 몫이 되고, 그 대상을 받아든 당사자도 무안해지는 상황이 매년 연출되곤 한다. 그나마 올해 sbs의 대상이 <낭만 닥터 김사부>의 한석규에게 갔지만, 23.7%(15회 닐슨 코리아 기준)의 시청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과이리라. 한석규는 수상 소감을 통해 '가치가 죽고 아름다움이 천박해 지지 않기를,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환기를 했지만, 그 아름다움에 대한 소통과 공감조차 '시청률'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인정받을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거리의 촛불에 아랑곳없이 여전히 시청률 지상주의와 제 논에 물주기 식의, 그리고 아이돌 음악 위주의, 무엇이 무서운지 제야의 종소리 현장조차도 중계하지 못하는 연말 시상식과 방송 제전을 보고 있노라면 '자괴감'이 든다. 과연 우리는 달라질 수 있을까? 그 어느 곳보다도 강고한 방송 현장의 낱낱한 현실이다. 
by meditator 2017. 1. 1. 03:56

미자'라는 용어가 있다. 한국 가요 역사상 50년이 넘는 가수 활동을 하며 2000 곡이 넘는 곡을 발표하신 가수 이미자 씨의 그 '미자'가 아니다. 일제 시대의 잔재로 그 시대 흔했던 '자'자 돌림의 '미찌꼬'의 미자인 듯 보이는 이 용어는 '인터넷 공간'에서 미성년자의 줄임말이다. 지난 시대의 어느 여성의 이름같지만 실은 아직 '법적'으로 한 몫을 할 수 없는 한계적 인간형, 미자, 아니 미성년자. 하지만 공교롭게도 올 한 해 가장 화제가 되었던 케이블 tvn과 종편 jtbc가 한 해를 마감하며 방영하는 금토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이 바로 이 '미자'들이다.  




도깨비의 신부, 지은탁
성년이 되지 않은 여배우들의 활약 때문일까? 올 한 해 찾아보면 '미성년'이 여주인공으로 등장한 드라마들이 꽤 눈에 띤다. 김소현이 활약했던 tvn의 <싸우자 귀신아>, kbs2의 <페이지 터너>가 그랬고, 얼마전 화제가 되었던 <구르미 그린 달빛>의 김유정이 분했던 홍라온이 그랬다. <페이지 터너>야 일종의 '학교' 시리즈물로 그렇자 치고, <구르미 그린 달빛>은 시대극이라 그렇다 치지만, 어쨌든 돌아보면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미성년자' 주인공들이 꽤 많이, 그것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작품에 등장했던 것이다. 허긴 일찌기 김혜수는 15세의 나이에 <사모곡(1987)>의 여주인공이었으니 그걸 새삼스럽다 할 순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성년자 배우들의 활약과 따로 떼어놓을 순 없지만, <구르미 그린 달빛> 방영 중 불편하다는 반응이 등장했듯이 아직 미성년인 여주인공을 청소년물이 아닌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설정'한 지점에 대해서는 분명 한번쯤은 짚어보아야 할 지점이다.

그런 가운데 그런 짚어보아야 할 지점에 대한 방점을 찍은 드라마가 있다. 바로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tvn의 <도깨비>이다. <도깨비>는 900년을 넘게 살아온 도깨비 김신(공유 분)과, 그 도깨비가 죽을 운명의 모녀를 구해주며 '신부'의 연을 맺게 된 도깨비 신부 18세 지은탁의 사랑을 주된 서사로 삼고 있다. 

드라마 속 고등학생 지은탁은 '사고무친'의 존재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이모네 집에 얹혀 살지만, 말이 얹혀사는 거지, 법적 보호라는 이유만으로 아니 사실은 엄마가 남긴 보험금의 볼모로 갖은 구박과 학대를 받았다. 그런 그녀에게 나타난 운명의 도깨비는 그런 억압적 조건의 그녀를 구해 안락한 생활 환경과 사랑을 준다. 

드라마는 900 살이 넘은 도깨비와 그의 신부로 점지된 지은탁을 삼십대 중반의 아저씨와 소녀의 관계로 드러낸다. 지은탁은 첫 만남부터 도깨비 김신을 그의 900살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저씨'라 호칭한다. 그리고 도깨비 역시 지은탁을 첫사랑 소녀로 대접한다. 드라마는 미성년이라는 지은탁의 존재론적 한계를 이미 성년인 배우 김고은을 통해 피해간다. 하지만, 이것 또한 김고은이 <은교>라는 영화를 통해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절묘한 피해가기 내지는 연상 작용의 포석처럼 보여진다. 

드라마는 '도깨비'를 둘러싼 설화적 설정과 삶과 죽음 사이에 선 도깨비 신부 지은탁을 둘러싼 전설적 서사를 배경으로 삼으며, 하지만 결국은 보호받아야 할 소녀 지은탁과 그녀를 보호하는 도깨비와 그의 측근 저승사자(이동욱 분), 집사 유덕화(육성재 분)의 보호와 사랑을 주된 스토리로 이어간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사고무친'의 소녀는 '사랑'과 '운명'을 매개로 만난 아저씨에게 '보호'를 받는다는 이 '기막힌' 환타지. 

현실에서 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한 소녀들은 거리의 아저씨들에게서 뜻하지 않은 보호라는 명목의 범죄에 빠져들지만, 드라마 속 '사랑'의 세계에서 아저씨들은 소녀를 가로막는 가난과 재난, 심지어 사고에서까지 '슈퍼맨'이 되어 그녀를 보호한다. 그들은 번연한 서른 중반의 아저씨들이지만 그녀가 첫사랑이듯이 돈으로 소녀들을 유혹하는 거리의 아저씨들과 달리, 사랑에 있어서는 고등학생보다도 더 순진하고 천진하되, 재력과 능력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신적 경계'에 있으니 그 어느 누가 감히 이 사고무친의 소녀를 돌보고 사랑하는 그에게 '미성년자 보호법'을 들어 '부적절한 관계'라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더욱이 대번에 500만 빌려주세요라거나, 사랑해요라고 서슴없이 고백하는 이 당돌한 소녀 앞에. 그렇게 드라마는 '전설'과 '설화' 그리고 사랑의 환타지를 빌어, 현실을 윤색한다. 



솔로몬을 자처한 소녀, 고서연
tvn이 소녀와 아저씨의 만남을 통해 '김은숙'이라는 스타 작가의 힘을 빌어 '사랑'으로 2016년의 연말을 덮히려고 할 때, 올 한 해 <뉴스룸>을 통해 공신력있는 언론으로 우뚝 선 jtbc가 선택한 것은 일본의 사회파 작가 미야베 마유키 원작의 학원 추리 소설 <솔로몬의 위증>이다. 하지만 일본 원작이 무색하게 무소불위의 사학, 그리고 거기에 '부역'하는 어른들, 그런 어른들의 '보호'아래 입시 교육에 내몰린 채 '학교 폭력'을 외면했던 아이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친근하다. 

그 '친근한' 부조리한 교육 현실에서, 일본 원작의 드라마는 당돌하게도 학교에서 벌어진 한 학생의 죽음을 '교내 재판'이라는 해법을 통해 풀어가고자 한다. 하지만 재판에 도달하는 길은 쉽지 않음을 크리스마스를 앞둔 3,4회의 드라마는 그려낸다. 

생각지도 않은 한지훈(장동윤 분)의 등장으로 당혹스러워 한 것도 잠시 학생들 사이에서 남신으로 불리는 그의 인기에 힘입어 순탄하게 서명 작업을 마친 아이들은 교장 앞에 당당히 500부가 넘긴 교내 재판 동의서를 내보이며 재판을 허가받는다. 하지만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의 짧은 시간, 협조적이기는 커녕 적대적인 범인으로 추정되는 최우혁(백철민 분)과 그를 고발한 이주리(신세휘 분)의 태도로 재판은 그 시작부터 난항을 겪는다. 

하지만 드라마는 재판을 하게 되기 까지, 그리고 그 과정과정에서 보이는 고서연(김은수 분)의 태도에 주목한다. 처음에 그저 다른 학생들처럼 최우혁에 의한 이소우에 대한 학교 폭력에 눈을 질끈 감았던 서연, 하지만 그저 늘상 그랬듯이 지나갈 것 같던 그 외면한 폭력이 이소우의 죽음으로 이어지자 서연은 '너희는 공부만 하면 돼'라는 어른들의 말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한다. 이제 겨울 방학이 지나면 고 3이라는 지상 최대의 엄정한 과제, 하지만 이소우의 죽음을 목격한 그 순간부터 서연은 공부에만 매진한다며 진실을 외면해 왔던 자신의 태도가 결국 죽음의 방조자가 된 것이 아닌가 반성한다. 그런 서연에게 또 하나의 계기가 되어준 것은 주리의 고발장, 교장 선생님에게 그리고 아빠가 형사인 서연에게 배달된 두 장의 고발장. 하지만 이제 곧 고 3이니 알아보겠다는 아빠의 말에 주춤했던 서연, 하지만 결국 초롱이가 교통 사고를 당하고, 주리가 실어증에 빠지자 자신의 방관에 깊게 반성을 한다. 

그래서 재판을 하겠다고 나서고, 고발장을 나 몰라라 했다는 친구들의 힐난에 솔직하게 자신의 외면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제 학교 재판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최우혁 할머니의 사고 앞에 서연은 우혁도 주리도 모두가 서로의 탓을 할 때 물벼락까지 맞으며 사죄를 한다. 미성년자라는 존재로 3자로 밀어제친 어른들 앞에서 당장하게 미성년이라도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겠다던 서연은, 나아가 문제의 주도적 해결만이 아니라, 사건을 방관했던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자임하고 나섬으로써 '어른'을 앞선다. 


두 미성년자의 선택, 스스로 도깨비의 신부라 자청하고 사랑을 선언한 지은탁과 학내에서 벌어진 죽음을 해결하겠다고 나선 고서연. 같은 미성년자이지만 두 사람의 선택을 둘러싼 두 드라마의 서사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그 어떤 성인 여성보다 당돌하게 말도 잘하고 자신의 선택에 똑부러지지만, 안타깝게도 그 지은탁의 존재는 두 보호자연하는 '사랑'하는 아저씨들이 없다면 무색하다. 안타깝게도 드라마는 사회적 문제를 사랑으로 희석 혹은 희화화하고 있다. 진정성있는 혹은 운명적 사랑이라 주장하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다. 그에 반해 때로는 자신들의 문제에 끼어드는 한지훈에게 자존심상해하고, 홀로 눈물짓지만 진실 앞에 물러서지 않으려 하고, 방관자의 부끄러움에 진솔한 고서연의 행보는 지은탁보다 어쩌면 훨씬 더 성숙할 수 있다. 

최근 이어지고 있는 촛불 집회에서 당당하게 그 목소리를 높이며 등장한 청소년들, 한편에서는 우리 사회의 투표 등을 통해 드러나는 민심의 보수성을 우려하며 정치적 연령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할 만큼 그들의 똑부러짐은 어른들을 부끄럽게 한다. 어느덧 드라마 속 청소년들은 사랑도 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재판'으로 풀어낼 만큼 당차졌다. 이 사랑과 이성의 두 청소년들의 행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12%가 넘는 <도깨비>와 0.97%의 <솔로몬의 위증>의 하늘과 땅같은 시청률의 차이가 의미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지 생각이 깊어지는 연말이다. 

by meditator 2016. 12. 25. 19:44

온 세상이 축복으로 가득해야 할 크리스마스, 드디어 서정(서현진 분)은 그토록 오랫동안 주저해왔던 동주(유연석 분)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처음 거대병원에서 선후배 사이로 만났던 그때 동주로 인해 흔들린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선배를 사고로 잃게 된 서정은 오래도록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응급실이 봉쇄되고 동주가 과로로 쓰러지게 되자, 서정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사선을 넘으며 자신을 간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서정에게서 자신에 대한 감정을 확신한 동주는 서슴없이 서정을 안는다. <낭만 닥터> 14회는 오래도록 줄다리기를 펴왔던 서정과 동주 두 남녀가 도달한 사랑의 결실을 크리스마스의 축복처럼 아름답게 그려낸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역시나 지난하게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서정이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된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두 젊은 남녀의 사랑만이 아니다. 오히려 토핑처럼 얹혀진 사랑 아래, <낭만 닥터>가 13, 4회를 통해 그려내고 있는 진짜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 AI로 방역의 허점이 허망하게시리 전국을 강타한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오버랩되는 응급 의료시스템에 대한 주장이다. 




메르스 응급실을 덥치다 
응급실을 담당했던 서정이 '오더리'의 치욕을 넘어 드디어 이사장 인공 심장 밧데리 교체 수술진으로 당당하게 입성하고, 거대병원에서 온 선배조차 내려온 장모님과 아내를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응급실은 온전히 며칠간 과도한 업무로 인해 잠조차 부족한 강동주의 어깨 위에 얹혔다. 애인의 자살 시도라 호들갑을 떨며 응급실로 들어온 가짜 환자로 인한 해프닝으로 한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들이닥친 한 가족, 고열에 기침까지 하는 청소년 자녀와 함께 온 부모들 역시 기침을 하며 심상치않은 증세를 보인다. 

이 환자를 진찰하던 강동주와 오명심 수간호사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는데, 얼마전 사우디로 출장까지 다녀왔다는 아버지까지 '메르스'가 의심되는 상황인 것이다. 

김사부와 통화를 하기가 무섭게 강동주와 오명심을 비롯한 응급실 인원들은 신속하게 움직인다. 우선 메르스가 의심되는 환자와 가족들을 최대한 격리가 가능한 곳으로 이동시키고, 혹시나 그들로 인한 바이러스 감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응급실을 격리시킨다. 응급실 환자들에게 마스크가 공급되고, 의료진 역시 방진 마스크를 구비한다. 

2015년 메르스 사태의 결론은 이후 문형표 장관의 사과문에서도 드러나듯이 '전파력 판단의 미흡'이 가장 컸다. 처음 발병한 병원에서, 그리고 이후 발병자를 옮기는 과정에서도, 병원 측은 안이한 대응으로 메르스에 대한 초동 대처에 실패했고, 그 결과는 가공할 만한 전염성 질환으로 우리 사회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이후 늘 그랬듯이 이와같은 사태의 재연을 방지하겠다는 관계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최근 AI로 인한 상상초월의 가금류 살육 사태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이런 질병 방제 시스템이 얼마나 부실하게 작동되고 있는가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현실에서 '혹시나 메르스일까?'라는 의심만으로 신속하게 환자들을 격리하고, 응급실을 폐쇄하는 <낭만 닥터> 속 사태는 그저 결국 게장을 잘못먹어 파라고니미아시스로 인한 해프닝이 아니라 해프닝일 지라도 만반에 사태에 신속정확하게 대비할 수 있는 빛나는 돌담 병원의 시스템에 대한 경의이자, 선언이다. 

메르스일 지로 모른다는 우려가 들자, 돌담병원 의료진은 신속하게 움직인다. 환자를 격리시키고 응급실을 폐쇄하고, 이에 반발하는 환자 보호자를 무력으로 제압하면서 까지, 이런 돌담 병원의 대응 양식은 혹시나 있을 지도 모를 비상시에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은 방제복을 가진 보건소의 모습이나, 탁상공론 식의 대응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이른바 '관계자'의 무능한 방식과 대비를 보인다. 아마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무능한 질병 방제 시스템은 저렇게 책상에서 서류로 만들어진 양식에 따라, 허왕된 메뉴얼에 따라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처리된 방식들일 것이다. 그러기에 메르스 의심 환자가 자신의 발로 시내를 돌아다니고, 보호 장구 없이 환자를 이송하는 그런 사태를 만들었었을 테니까. 


시스템과 소명 의식 
또한 드라마에서 돋보이는 것은 책임자의 소명 의식이다. 강동주는 과로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응급실 폐쇄에 대한 책임을 지려한다. 그리고 강동주가 쓰러졌을 때, 컨트롤 타워인 김사부는 어쩌면 생명에 위협이 있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솔선수범하여 응급실로 들어가려한다. 이제는 우리 가슴에 맺힌 그 단어, '컨트롤 타워', 김사부가 말이다. 송현철은 젊은 의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지도 모른다고 비아냥거리기만 하고 저 살 궁리를 하는 그 순간, 김사부는 담담하게 자신을 내놓는다. 물론 김사부 대신 응급실에 들어간 것은 윤서정이다. 이후 김사부와 오명심의 대화에서 동주에 대한 연심으로 말릴 수 없었다고 했지만, 과연 윤서정이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아니었다면 김사부가 허용했을까? 

<낭만 닥터>가 보여지고 있는 의학 드라마는 그저 감동과 헌신의 순애보가 아니다. 강원도 외곽의 쓰러져 가는 듯 보였던 돌담병원, 하지만 그곳은 주변에 카지노가 있고, 도로가 서로 병목해 있는 '응급 환자'들의 양산지이다. 그리고 그저 김사부와 몇몇 의료진들의 '성의'로 다해 보였던 병원은 회를 거듭할 수록, 알고보면 비록 기기는 낡았지만 그 어떤 대학 병원 저리가라할 '시스템'을 갖춘 병원으로 드러난다. 아직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진 않지만, 김사부가 그리고 있는 원대한 꿈이라는 것도 바로 이런 돌담 병원의 지형적 위치와 시스템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드라마는 '낭만'을 내세우며,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기본적 제도와 그를 움직이는 공정한 인간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던진다. 우리가 AI로 가금류를 2000만 마리를 넘게 살육하지만 여전히 그 확산을 막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에 반해 일본은 던 60만 마리의 살처분, 아니 그것보다도 방역보다, 사전 확산을 막기 위한 시스템 가동에 힘쓴다는 소식이 주는 교훈을 복기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아직도 그날의 컨트롤 타워인 푸른 집의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를 놓고 갑론을박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기본적 물음과 답을 드라마가 하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6. 12. 21. 16:43

대기업의 독점적 과두 지배로 인한 '갑을 관계'등 제반 사회적 문제가 우리 사회를 짖누르다 못해 권력형 비리의 형태로 터져나오고 있는 이 즈음, 12월 5일에서 19일까지 3부작으로 찾아온 MBC 창사 특집 다큐 <미래인간 AI>는 시절을 모르는 한가로운 환타지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촛불 광장에서 회사 마크를 떼어냐 하는 처지의 MBC지만 창사 특집 <미래인간 AI>만큼은 '혜안'에 속한다. 우리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 성큼 진행되고 있는 4차 산업 혁명의 현실과 미래를 촉빠르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AI로 대변되는 4차 산업 혁명의 도래
AI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우선 최근 변화되고 있는 산업 환경이란 전제 조건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듯하다. 최근 변화되는 산업 환경이란 한 마디로 요약하면 4차 산업 혁명을 말한다. 18세기 '증기 기관'으로 상징되는 기계 공업과 공장제 노동 분업을 통한 대량 생산을 가능케한  1차 산업 혁명은 세계를 '근대'로 이끌었다. 이후 1870년을 기점으로 헨리 포드가 도입한 '컨베이어 벨트' 생산 체제로 상징되는 2차 산업 혁명은 영국을 중심으로 했던 산업 혁명을 미국 등 전세계로 그 영향력과 생산 능력을 확산시키며 자본주의를 업그레이드시켰다. 다시 1965년 컴퓨터와 로봇의 등장을 통한 IT 산업의 발전은 공장을 '기계화'시키며 더 많이, 더 빨리, 그리고 사람으로 인한 오류를 제거하며 3차 산업 혁명을 선도했다. 그리고 이제 <모던 타임즈> 속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다, 기계에 밀려나기 시작한 노동자들은 인간의 지능을 위협하거나, 혹은 뛰어넘을 지도 모를 인공 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AI로 상징되는 4차 산업 혁명을 맞이하고 있다. 

2016년 다보스 포럼의 주제였던 AI, 과연 AI로 대변되는 4차 산업 혁명이 가져올 미래의 변화는 어떤 것일까? 천 억개의 신경 세포, 백 억개가 넘는 시냅스, 신이 만든 가장 완벽한 피조물이라는 자부심이 무색하게 인간을 추월하고 있는 AI, 그 현실은 어떨까? MBC 창사 특집 다큐 <미래 인간 AI>는 AI로 변신한 프리젠터 배우 김명민을 등장시키며 AI의 도래를 체감시키며 다큐를 연다. 

인간을 모방한 AI, 하지만 어느덧 AI의 발전은 인간의 능력을 앞지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 30여년간 암 사망율 1위였던 폐암, 무엇보다 조기 발견이 어려웠던 폐암의 조기 발견을 위해 1년간의 시스템 구축 끝에 영상 의학과 의사들도 판독하지 못한 폐암 병소를 AI는 발견해 낸다. 영국 마이크로 소프트의 프로그래머 사킵 사이머가 개발한 Seeing AI는 외양은 안경처럼 생겼지만, 누 눈 앞에 있는 사물, 글자의 판독 뿐만 아니라, 상대의 감정까지 알아맞추는 경지에 이른다. 

이처럼 인간을 빠르게 따라잡으며, 때로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기 시작한 AI, 과연 이런 '과학 기술적 발전'을 그저 '산업적 성과'라 기뻐만 할 수 있을까? 2부 노동의 미래에서는 AI의 발전이 가져올 노동의 종말을 진단한다. 



AI의 발전, 편리한 세상, 혹은 노동의 종말
AI의 발전은 인간 세상을 한결 더 편리하게 만든다. 연간 3천만개의 일회용품을 만드는 미국의 뱅가드 플라스틱 공장, 1년전 들여온 AI 덱스터가 일당 백의 능력치를 보이자, 다수 노동자들이 해고의 위협을 받게 된다. 2020년이면 일상화된 자동차의 자율 주행 기술 역시 운전직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해고를 수반한다. 

노동직만이 아니다. 1억원대의 가상 금액을 두고 한 주식 모의 투자에서 노련한 증권가의 이사급 중진을 AI는 거뜬히 제친다. 미국 대선 등 중요한 빅 이벤트 등에 있어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엄청난 데이터를 가진 AI가 인간을 압도한다. 올해 세계 경제 포럼에서는 2020년까지 행정, 법률, 사무 직종의 '화이트 칼라' 직종 2/3이 사라질 것을 예견하고 있다. 불과 몇 년 남지 않은 시간, 하지만 그 옛날 인클루저 운동으로 도시로 쫓겨난 농민들처럼 인간 사회는 막연히 인간이 낫겠지라며 AI 발전에 대해 무방비하다. 

혹자는 산업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고기술직 직종이 등장하듯, 엄청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한 AI의 발전은 그와 관련된 산업을 발전시키지 않겠냐고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자율 주행과 관련된 시스템의 발전 과정에서 등장한 것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도 모른 채 구글 지도의 앱 구성을 위해 단순 계약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등장이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미래의 사회에서 핵심적 산업의 중추가 AI가 되고, 인간이 그 보조적, 수단적 단순 업무로 밀려날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다. 



양 날의 검, AI
물론 AI로 인해 사람들이 늘 몰리기만 하는 건 아니다.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독거 노인의 고독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 가와하라 에이코 할머니를 찾아온 인형 크기의 말벗 로봇 파르미는 웃을 일이 없었던 할머니와 친구들에게 웃음을 찾아준다. 원자화된 인간 관계가 일상이 된 중국 청년들에게 찾아든 영화 <HER>의 현실판 챗봇 샤오빙은 어느덧 없어서는 안되는 여친이 되었다. 

문제는 바로 이렇게 끊어진 인간 들의 관계의 틈을 메워준 AI, 어느덧 핸드폰이 없이는 견디기 힘든 현실을 예로 들어 송길영 다음 소프트 부사장은, 문제는 AI에 의존도라 지적한다. 인간 대신 인간을 위로하는 AI, 옷까지 만들어 입히는 에이코 할머니, 식사 메뉴 하나까지도 공유하며 함께 영화 보기를 즐기는 짜오쑤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의존하는 AI가 방대한 데이테라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의존도가 심해지고 고삐풀린 말처럼 가속도를 내고 있는 AI 개발과 관련하여 대두되고 있는 AI의 윤리와 도덕 문제이다. 실제 미국 터프츠 대학에서는 무조건 YES 맨이 아닌 부적절한 상황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윤리적 판단을 AI에 가르치려 하고 있다.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을 위해 급성 바이러스에 걸린 환자를 죽인 간호 AI, 그런 AI를 질책하는 인간의 비효율적 판단 능력을 거부하고 스스로 인간을 통제하겠다고 나설 가능성을 보여주며, '폭주하는 인공 지능'의 불운한 미래 역시, 발전하는 AI 산업의 결과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3부작의 다큐는 AI로 대변되는 4차 산업 혁명이 도달한 성과를 기반으로 서둘러 우리가 고민해야 할 AI로 상징되는 미래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세대 갈등이 무색하게, 도래할 AI로 인한 여러 직종에서의 실직이 예견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현재와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과 문제들을 현실적으로 짚어본 <미래 인간 AI>는 어수선한 시국과 무관하게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려는 이 즈음 적절한 선택이었다. 

by meditator 2016. 12. 20. 15:02
어수선한 시국, 권력을 바라보는 자괴함이 깊을 수록, 그럼에도 그 불능의 권력을 결국 참아넘기지 않은 '민주적 저력'에 대한 감탄도 함께 높아만한다. 그리고 모두들 공감하는 한 가지, 사람들이 광장에 나선 것은 단지 저 푸른 집의 '일당'들을 쫓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이 '부조리한' 구조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는 것을. 그런데, 과연 그 부조리한 구조에 대한 대안은? 그리고 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방송이 해야하는 것들은? 뉴스와 시사 프로가 고군분투하며 방송사 별로 그 성과에 따라 희비가 오가는 가운데, 조용히 등장했단 사라진 인문학적 파일럿이 있다. 이렇듯 저렇든 결국 이들 인문학적 프로그램들의 궁극적 목적은 '생각 좀 하고 삽시다!'다. 청와대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과 똑같이 말랑말랑한 당위정의 드라마을 보며 하루의 고달픔을 잊는 대신, 좀 골치 아프더라도 함께 생각해보고, 고민해 보자는 이 프로그램들, 2부작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4부작 <서가식당>이 그 주인공이다. 시사와 인문학의 콜라보레이션 <표본실의 청개구리>, 음식과 독서의 콜라보레이션 <서가 식당>은 트렌디한 '인문학'과 '음식'이라는 토핑을 얹어, 시사와 독서의 깊이를 주려고 애쓴 고심의 결과물들이다. 



시사를 보는 다른 눈, 표본실의 청개구리
그간 드라마를 통해 악랄한 형사에서 대통령 저격범에서 국회의원, 검사 등 천의 얼굴을 연기했던 장현성을 mc로 팟캐스트와 종편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대의 전투적 키보드 워리어로 더욱 친근해진 진중권 교수를 필두로 정치, 사회, 학계, 문화 등 각 분야의 패널 들이 모여, '시사적' 주제를 표본으로 삼아, 각자의 '청개구리'와 같은 시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 '시사 인문학' 토크쇼가 바로 <표본실의 청개구리>이다. 
 
2부작이었던 프로그램은 11일 첫 회 '영화는 시사다'라는 꼭지를 통해 영화 <레미제라블>을 소개했고,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의 모습과 촛불 집회의 현장을 비교하며 당시 프랑스의 부패한 왕정 세력과 우리의 집권 계층이 다르지 않음을 진중권 교수의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김성곤 교수의 그 못지 않은 동양학적 비유를 통해 '레미제라블한' 한국 사회를 그려냈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의 정의를, 그리고 우리가 지켜내야 할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함께 했다. 

18일 두번 째 회차에서는 인물로 보는 시사 필리핀의 대통령 두테르테를 통해 '정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필리핀 국민들 95%의 지지를 받는 두테르테, 하지만 다수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 방식의 '정의로움'에 대해 변호사 박준형과 정치 전문가 김지윤 박사의 박학한 해석을 곁들인다. 또한 역사는 시사다를 통해 김성곤 교수의 해학넘치는 한나라 십상시에 대한 소개로 시작된 이야기는 환관에 둘러싸인 영제와 현실을 빗대며 신랄한 현실 비판으로 이어진다. 

두 편의 프로그램은 '메스 토크'라는 코너를 통해 첫 회 '당신의 한 표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할 기회를 얻는다면, 얼마를 지불하겠는가?'란 질문을 통해 투표의 결정성과 오류에 대한 논점을 짚고, 566만원을 훔친 지강헌과 73억원을 횡령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의 엇갈린 행보를 통해, 그리고 최대 15년을 받을, 아니 그조차도 받지 않을 수도 있는 최순실과 울분으로 검찰청에 포크레인을 몰고 간 사람의 최고형 10년의 아이러니를 통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역사를 짚는다. 

프로그램은 영화나 인물 등 시사적 주제를 통해 철학, 역사, 정치, 법적인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다양하고 박학한 해석을 곁들여, 시사를 인문학적으로 짚어볼 수 있는 풍성한 시야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오늘에 되살려 내어, 현실에 닿은 예리한 분석을 놓치지 않는다. 첫 회 모델 이현이의 출연이 두번 째 재심 변호사로 이름을 떨친 박준형 변호사로 출연진이 변화되며, 김성곤 교수의 경극식의 재미있는 표현과 박준형 변호사의 풍성한 실례, 진중권, 김지윤 박사의 해박한 지식, 그리고 윤대현 교수의 사회학적 접근이 더해져 시사의 인문학적 해석은 그 깊이와 넓이를 더한다. 

하지만 과연 이 프로그램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른바 kbs 공영 노조는 12월 16일 대통령 탄핵 이후 kbs가 급격히 무너져 가고 있으며 그 대표적 실례로 <표본실의 청개구리> 출연진이 진보 진영 일색이며, 진중권 교수 등의 편향된(?) 발언을 문제 삼았다. 정의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2회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희망 고문'과 '실천'이라는 양 극단의 정의로 정의내려진 정의, '실천해야 정의는 구현된다'는 실천의 정의가 '희망 고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kbs의 지난한 실천이 요구된다. 



책....먹고 갈래요? 서가 식당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좀 더 현 시국에 직접적으로 가닿은 인문학적 해석을 풀어낸 프로그램이라면, 독서를 요리로 매개한 <서가식당>은 그간 kbs1이 꾸준하게 시도한 독서 프로그램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강승화 아나운서가 젊은 세대의 '편식'을 배우 권해효가 멋스러운 '별식', 그리고 평론가 김태훈이 잡식 등 출연한 각 패널들이 저마다의 식습관을 이름표로 불인 채 그 주 한 권의 책을 읽고, 책에 등장하는 요리와 책에 대한 거침없는 입담을 풀어내는 새로운 시도이다. 

무엇보다 이 프로그램의 포인트는 책이다. 첫 회 삼국지, 두번 째,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세번 째 돈키호테, 네번 째 성석제의 투명인간까지 네 권의 책이 메인 메뉴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책과 함께 삼국지의 만두, 밥 딜런의 브런치, 돈키호테의 가스파쵸, 그리고 투명인간 만수의 콩죽과 돼지 두루치기 등 책 속에 등장했던, 혹은 인물과 관련된 음식이 등장하여 오감을 자극한다. 

또한 프로그램은 기본 패널 외에 회차에 따라 삼국지 편에서는 만화로 삼국지를 풀어낸 김태권, 밥 딜런 편에서는 시인 원재훈과 포크 가수 양병집, 돈키호테에서는 멘사 회원으로 유명한 젊은 방송인 최정문, 그리고 투명인간 편에서는 철학자 탁석산 등 책의 성격에 맞는 패널들을 융통성있게 함께 하며 독서 프로그램의 풍성함을 더한다. 또한 <서가 식당>의 묘미는 패널들이 솔직하게 책에 대한 소감을 풀어내는 동안 4회에서 보여지듯 책의 저자가 한 편에서 이 장면을 보며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지는 '몰래 카메라'와 같은 설정이다. 결국 한 편의 작은 문으로 저자가 등장하고, 솔직했던 서평과 저자의 해석의 행간의 미묘한 긴장과 이해의 과정이 '예능'으로서의 독서 프로그램의 맛을 더한다. 

물론 아쉬운 점도 남는다. 음식와 책의 콜라보레이션이라 했지만, 책 속에 등장하는 음식이란 신선한 코드와 달리, 음식과 서평의 경계가 가진 형식적 틀에서 자유롭지 못한 점이다. 4회 <투명인간>에 등장한 콩죽과 돼지 두루치기 중 굳이 하나를 골라야 하는 지점은 예능적 요소라 그렇다 치고, 정작 말로 두루치기에 대한 장황한 설명과 달리, 음식과 함께 한 시간을 풀어내는 지점은 너무 관례적인 것이다. 추억이 없다던 소감처럼 음식 자체에 대한 접근이 아쉽다. 



음식이든, 영화든, 인물이든, <표본실의 청개구리>나, < 서가 식당>이 결국 도달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생각'이다. 베이비 부머 세대의 역사를 훑은 <투명 인간>을 함께 읽으니 성장 속에 인간 소외였던 한국의 현대사로 귀결될 수 밖에 없고, 밥 딜런의 음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필리핀의 두테르테도, 한나라의 십상시도, 그리고 영화 레미제라블도 결국 그 모든 것은 '현재', '우리가 사는 이곳'을 향한다. 그 잠깐의 시간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고, 조금은 되짚어 볼 수 있는 신선한 시도, 부디 이들 프로그램이 2회나, 4회 종영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16. 12. 19. 18:02

이사장의 권위가 '신' 저리가라할 사립학교, 그 사적 권위 아래 교장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들을 어깨을 움츠리며 '예스맨'으로서 제 할 일을 다하느라 분주하고, 학교 폭력 위원회는 가진 것이 많은 부모들이 장악한 채 정작 그 대상자가 되어야 할 자신의 아이의 죄를 가려주는 '관례'가 되어간다. 그렇다고 아이들이라고 다르랴. 지망자가 몰리는 사립학교의 이름값에 걸맞게 입시 준비에 불철주야 매진하고, 부당한 학교 폭력 정도는 눈 질끈 감는 것이 '관성'이 되어간다. 


'죽음'으로 결을 달리한 사학 비리의 클리셰
바로 이런 사학 교육의 비리 현장은 이제 '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설정이다. <솔로몬의 위증>에서 배경이 되고 있는 정국 고등학교 역시 그런 일반적인 '학교 '시리즈가 품었던 비리 사학 재단의 풍경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그런데 그 부당한 갑과 을의 권력 관계로 시작된 드라마는 희생양이 되어 학교 폭력 위원회에서 강제 전학을 당할 처지에 놓인 이소우(서영주 분)가 크리스마스 날 아침 교정에서 눈에 쌓인 시체로 발견되는 순간, 이 '권력'관계의 심각성은 궤를 달리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서둘러 사건을 우울증 증상이 있었던 학생의 자살 사건으로 서둘러 종결하려 하는 학교, 굳이 거기에 토를 달고 싶지 않은 경찰과 무심한 학생들 덕분에 사건은 유야무야 끝나려는 찰라, '고발장'이란 이름의 훼방꾼이 등장한다. 고발장은 모든 학생이 기억하는 이서우 폭력 사건의 주범 최우혁(백철민 분)과 친구들을 살해범이라 지명한다. 무엇보다 수신 거부 혹은 수신 난감의 고발장은 사건의 동심원을 고서연(김현수 분)에서 그의 아버지인 형사 고상중(안내상 분)으로, 교장에게서 뉴스 어드벤처 박기장(허정도 분 )로 확장시킨다. 

사건의 확장만이 아니다. 늘상 있었던 최우혁의 패악 정도로 넘어갔던 학교 폭력이 이소우라는 같은 반 학생의 죽음으로 이어졌을 때만 해도 놀랐던, 그리고 왜 죽었을까 라며 꺼림직했던 아이들, 그러나 이제 고발장과 관련하여 순진하기만 했던 박초롱(서신애 분)이 교통 사고를 당해 생사의 기로에 서있고, 이주리(신세휘 분)가 그로 인한 실어증으로 교실을 비우며 빈 자리가 늘어나자 아이들은 달리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미 방송 전에 알려졌듯이 <솔로몬의 위증>은 우리나라에서도 신간이 나올 때마다 베스트 셀러 반열에 오르는 일본 사회파 소설가 미야베 마유키의 소설이 원작이다. 그러나 저물어가는 2016년 이 다사다난했던 병신년의 12월에 일본 드라마, 영화로 만들어졌던 이 소설의 드라마화가 주목을 끄는 것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2014년 어린 죽음들을 연상케 한 '가만히 있으라'는 그 한 마디 때문일 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 vs.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아이들
이제 1,2회를 마친 <솔로몬의 위증> 속 한 아이의 죽은, 그리고 그 아이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또 다른 아이가 던진 고발장을 둘러싸고, 여러 이해 관계가 겹친다. 사학 재단과 학교 관계자들은 서둘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덮으려고 애를 쓰고, 경찰은 자살이 아니라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정확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눈치를 본다. 그런가 하면 탐사 보도 프로그램 관계자들은 윗선에 들어온 외압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애를 쓰고, 하지만 그 누구라도 '어른들'은 모두 정작 사건의 당사자가 되어버린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만 한다. 

이제 곧 한 달만 있으면 고3이니 그런데 신경 쓸 때가 아니라며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 너희들이 신경 쓸 일 이 아니니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 그리고 어린 너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겟냐며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 정작 자신들은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위해 첨예하게 각을 세우면서, 친구들을 잃은 아이들이 친구의 죽음에 의문을 갖는 거 조차 수험생의 사치인양 부추기며 외면할 것을 종용한다. 학교 선생님이든, 믿음직스런 부모든, 의심스런 부모든, 정의의 사도인 기자든. 



그러나 교실의 자리가 하나 둘씩 비워가는 걸 본 아이들 중 몇몇은 더 이상 고3을 핑계로 '가만히 있을'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애초에 이소우의 싸움을 못본 척 한 그 외면의 순간이 이소우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지로 모른다는 자책, 그리고 그의 죽음에서 혹시나 놓친 것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리고 이제 가만히 있으라며 저마다 자신의 이해 관계에만 혈안이 된 어른들을 보며, 먼지로 가려지지 않는 진실을 찾아 떠나려 한다. 드라마는 촘촘히 각 캐릭터에 대한 공들인 묘사와 함께, 그들로 인한 엇갈린 이해 관계의 설정으로 학원물 이상의 질문을 던지며 판을 벌인다. 

2회 비로소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운을 띄운 아이들, 그들이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의 첫 발이 시작되었다. 2회에서 엿보이듯이 고발장의 내용 자체가 의심이 되는 상황, 그리고 정국고 파수꾼이라는 의문의 존재의 복귀, 학생들 저마다가 마주친 실존적 관계적 고민들 사이이 엇갈리며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은 쉽지 않을 듯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찾아내는 진실이 뜻밖의 원치 않는 '헬 게이트'을 열 수도 있는 상황. 그 어느 것도 장당할 수 없는 학생들의 여정, 그래서 흥미진진한 <솔로몬의 위증>은 신선한 학원 드라마나, 장르물을 기대했던 시청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듯하다. 

by meditator 2016. 12. 18. 15:11

우리 말 감정의 영어 feeling은 '느끼다'는 동사의 행위를 나타내는 동명사이다. 즉 감정이란 거울처럼 우리 몸 혹은 우리 몸 밖의 것들을 '느껴'서 만들어 내는 마음의 형태들이라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의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상태이다. 대부분 우리 사회에서 아니 어느 사회에서나 '감정'은 개개인 고유의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한 집단 구성원들이 공통된 감정을 드러낸다면, 비슷한 정서의 상태를 공유하고 있다면? 그간 다큐 프라임을 만들어 온 제작진은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다수의 다큐를 만들면서 최근 대한민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불안'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현재의 대한민국을 '감정'을 통해 설명하는 <감정 시대> 5부작이 제작되었다. 

<감정 시대> 5부작의 관점은 개인의 감정은 사회와 맞닿아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개인의 사적, 주관적, 내면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온 감정,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그 개인은 물론, 그 개인의 감정조차 상품화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한다. 또한 여전히 권위적이고 집단적인 사회 체제는 그 속에서 개인을 품어주지 못한 채 개개인은 온전히 '감정'의 형태로 그 상흔을 부등켜 안고 살아가도록 만든다. '감정'을 통해 대한민국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본, 감정을 지배하다. 
5부작을 연 것은 '실직'이다. <을의 가족-가난의 대물림>은 원치않았던 실직에 봉착한 가장과 가장의 실직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IMF, 2016년 대규모 구조 조정을 겪고 있는 거제 조선소, 그리고 비정규직화 되어가는 서비스 직종의 종사자들을 통해 '실직'이 낳은 그리고 끝나지 않은 가족의 상흔을 들여다 본다. 

'어둠', '사망신고', '신기루', '무서움'이라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표현되는 실직, 하지만 문제는 사회적 안전판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가장의 실직이 이후 '을'로써 존재가 규정된 채 자식 세대에게 까지 대물림됨으로써, 그 실직의 상흔조차 대물림되고 있는 지점을 포작한다. 부모는 못나서 미안하다고 하고, 자식은 한 순간에 삶의 조건이 송두리채 빼앗겨 지는 공포로 부터 시작하여 미래가 불투명한 노력 세대가 되는 현실까지, 고스란히 그 공포와 불안을 대물림한다. 



실직이 상흔이라면, 2부는 감정조차도 상품이 된 자본주의 사회, 즉 감정 노동자들이다. 성희롱을 당하고, 욕설이 퍼부어지는 그 어떤 순간에도 '고객'이 우선이라는 '고객 만족'이 모토가 된 서비스 산업, 그 산업의 그늘에서 마트 노동자, 전화 상담원 들이 신음하고 있다. 사회면은 이런 문제를 '갑을 관계'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루고 있지만, 이런 감정 노동의 본질은 바로 서비스 산업의 핵심이 '인간 감정'이며, 그것을 자본이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소비자의 갑질이 아니라, 기업이 감정을 통제하고, 조직하고 조작하여 이윤을 확보하고자 하는 메뉴얼을 만든, 결국 드러나는 것은 '갑을 관계'이지만, 그 저변에는 기업이 진정한 갑이라는 본질을 다큐는 꼼꼼하게 짚는다. 1983년 앨리 러셀 혹실드의 <감정 노동 the managed heart>의 신노동주의 관점에서 이익을 위해 서비스 직종을 늘려 노동자의 자기 결정권조차 기계처럼 종속시키는 자본을 고발한다. 거리에서 사람들은 '노동자'라는 질문에 부정적이거나 블루 칼라 노동자만이 노동자라 대답하다 스스로 의구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트 노동자의 질문처럼,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대다수의 아이들은 '노동자'가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초중고 모두 노동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 5시간을 넘지 못하는 우리 교과서는 '노동' 대신, 경영과 경제에 시선을 고정시켜 왜곡된 시각을 양산한다. 

사회, 그리고 국가가 지배한 감정
3부가 들여다 보는 것은 '아저씨', 그 중에서도 아저씨의 마음이다. 2016년 어느덧 마흔줄을 훌쩍 넘어선 이들, 경제 성장의 호황기의 열매로 성장했지만, 정작 그들이 '가장'이 된 지금 불황을 짊어진 채 하우스 푸어로 살아가는 현실을 온전히 혼자 감내해야 하는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것이다. 

자영업자, 치과의사, 회사원 등 이른바 이 시대의 평범한 아저씨들, 그러나 감정 치유 전문가 앞에 내놓은 그들의 첫 마음은 놀랍게도 불안, 부담감, 자책에 공통적으로 귀결된다. 나는 어느덧 사라지고 가장으로서의 역할만이 그들의 전부가 된 이들, 그들은 스스로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내야 하는 것이란 중압감에, 그리고 정글같은 세상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곧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란 사회적 인식 속에 '슈드비(should be 해야만 하는) 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여유를 갖지 못한 채 가장으로 몰린 이들 중, 결국 그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스스로 세상을 버린 이들이 있다. 바로 4부 <너무 이른 작별>의 가장들이다. 김명자씨(51)와 김혜정(51)의 남편 두 사람은 1년, 혹은 7년전에 경제적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자살을 했다. 그리고 그 스스로 생명을 거두어 버린 남편의 뒤에 남겨진 아내와 가족은 그 '자살'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감정만큼이나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로 치부되고 있는 자살, 하지만 12년째 자살율 1위, 매일 37명이 자살을 하는 우리 사회 현실에서 자살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매일 자살하는 한 사람과 연결된 230여 명의 가족은 그 한 사람이 선택한 결과를 온전히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김혜정씨는 묻는다. 자살율 1위라는데, 도대체 주변에 그런 사람은 왜 없냐고? 즉 천주교 묘지에서 자살이유만으로 배척당하는 죽음, 사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을 죽은 후에조차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하물며 그 남은 가족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사람과의 제대로 된 이별은 커녕, 주변의 편견과 외면을 감당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하물며 자살도 이럴진대, 그 죽음이 사회적 죽음이라면 감정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이 시대의 트라우마, 세월호에서 남겨진 이들의 상처입은 감정이다. 아직도 아홉 명이 돌아오지 않은 세월호, 물 속에 잠긴 채 파면 팔 수록 의혹만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고, 친구들과 함께 그 배에 탑승했던 단원고 2학년 학생들 중 겨우 살아남은 학생들 중 네 친구의 현재를 통해 치유되지 않은 사회적 트라우마의 잔영을 들여다 본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우리 사회가 세월호를 두고 했던 말,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하지만 네 명의 학생들은 반문한다. 정말 잊지 않았냐고, 정말 기억하고 있냐고? 단원고에서 쫓겨난 열 한 개의 교실, 안산 교육 지청에 겨우 마련된 기억 교실, 대통령이 탄핵 심판대에 올라서야 겨우 도달할 수 있었던 청와대 앞, 과연 우리 사회는 그간 무엇을 했는지 다큐는 묻는다. 

뿐만 아니라, 생존한 아이들을 만나면 사고의 기억만을 되묻는 사람들, 아이들은 왜 친구들을, 친구들의 빈자리를 물어봐 주지 않느냐고 한다. 아직도 친구들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아이들, 하지만 어른보다 더 어른스런 아이들은 말한다. 살아남은 친구들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먼저 간 친구들만이라도 좋게 생각해 주고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박준혁 학생)



감정 시대, 상처입은 감정의 치유, 그 첫 걸음은?
시대가 억압하고, 자본이 조작하며, 사회가 짖눌러버린 감정, 그리고 그런 감정의 상흔에 불안에 떨며 고통받는 개인과 가족들, 이 낭자한 시대적 트라우마들 그 치유의 시발점은 어디가 되어야 할까?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수용하고,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 첫 걸음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귀한 사람인데 왜 그렇게 당하고 있을까? 라는 자괴감에 시달리던 마트 노동자 이효숙 씨는 감정 노동자가 아닌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자신을 세우기 위해 2016년 메이 데이에 마트를 끌고 거리로 나섰다.

감정 노동을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후기 산업 사회 일반적 노동의 한 현상으로 바라보듯, 자신의 상흔을 사회화, 객관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3명 중 1명이 비정규직인 세상에서 대기업 서비스 센터 직원은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급여를 위해 거리로 나선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 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실직으로 인해 가족까지 고통을 겪은 가장과 가족들은 이제서야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 본다. 마흔 줄의 슈드비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아저씨들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고, 자신 속에 또아리를 튼 자신도 몰랐던 감정을 터논다. 마음이 어떠세요? 라는 질문에 당혹스러워하던 아저씨들이, 비로소 감정의 고삐를 푼다. 

미안하고, 원망스럽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시달리던 자살 유족자들은 '심리 부검'을 통해 비로소 죽은 이의 마음을 헤아려 볼 여유를 가지게 된다. 버림받았단 고통, 남겨진 슬픔이란 자신의 무게 너머, 죽은 이를 이해할 여지가 생겨나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살이란 족쇄로 인해 세상에 없는 존재들처럼 살아던 유가족들, 전 생애가 자살이란 단어로 규정되어 버린 죽은 이, 그런 사회적 편견을 넘어, 자살이라는 사건을 넘어 죽은 이를 추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세상으로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이런 자살 유족자의 첫 발은, 조금 더 넓게 동심원을 그리며, 5부 세월호 살아남은 친구들의 속마음으로 이어진다. 죽은 자조차도 잊지 않겠습니다 하며 애써 잊고 폄하하려는 사회, 그 속에서 친구들조차 아직 보낼 수 없는 아이들, 그 누구에게도 쉽사리 마음을 열어보이지 않던 아이들의 상처가 비로소 봉인 해제된다. 

물론, <감정 시대>의 전제가 개인의 감정은 사회와 맞닿아 있다고 하듯이, 여러가지 사회적 이유로 상처입은 개인들의 치유 역시,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거리로 나선 마트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해서는 우리의 사회 교과서가 노동을 정당하게 대접해야 하고, 비정규직이 가족을 공포에 떨지 않고 돌보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인간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시스템으로 변화해야 한다. 아저씨들은 가장의 공포에서, 그리고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가족들이 그 고통속에 신음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가족이란 단위로 책임지우는 '경제적 부담'이 헐거워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탄핵이 발의되던 날 국회에서 통한의 눈물을 쏟던 세월호 가족들처럼 그날의 진실이 밝혀져야 제대로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결국 개인의 감정을 치유하는 건 사회요, 국가이다. 

by meditator 2016. 12. 14. 14:05

갱년기,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노년기 남녀의 내분비나 신체적, 정신적 변화 증후군'이라 정의내린다.(다음 백과) 혹은 좀더 구체적으로는 여성에게 있어 생리를 기준으로 생리가 없어지기 전후 '폐경기'의 1년간을 가르키기도 한다.(의학 용어 백과) 갱년기 쯤 여성의 몸에 어떤 문제가 생긴다. 찾아보면 십중팔구는 갱년기의 증상, 쉽게 말해 그 모든 게 다 '갱년기' 때문이다. 잠이 안오는 것도, 땀이 많이 나는 것도, 문득문득 우울해지는 것도, 심지어 발바닥이 아프거나, 온 몸이 쑤시는 것까지 갱년기 때문이니, 이쯤되면 만병통치? 아니 만병은 '갱년기'로 통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전에는 '생리'를 중심으로 여성만의 문제인 듯했지만, 최근들어서는 남성들에게도 '갱년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남녀 모두의 '증후군'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갱년기의 '갱'은 한자로 更, 다시 혹은 재차 , 고치다, 개선하다의 뜻을 가진다. 삶의 다시 살고, 고치거나 개선해서 살 수 있다는 뜻인데, 현실에서 갱년기를 맞이한 중년들은 마치 '삶'의 종착역에 도달한 듯 우울하다. 왜? 11일 밤 <sbs스페셜>이 그 이유와 해법에 주목한다. 

47세 박수홍, 눈물이 많아진 그를 보고 주변에선 '갱년기'란다.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발끈해보지만 그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 <sbs스페셜- 중년의 사생활, 갱년기>에 등장한 그와 동년배의 남자들, 어째 박수홍 판박이다. 

갱년기 증후군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중년들
박수홍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 다큐는 그와 동갑내기인 정은영-송무석 씨 가정으로 시선을 옮긴다. 은영씨가 하이 소프라노로 중학생 아들을 깨우는 이 집의 아침, 은영 씨의 목소리는 전쟁의 서막이다. 그렇게 힘들게 아들을 깨워놓은 은영 씨, 그 순간부터 매 순간 '사춘기' 아들과 '갱년기' 엄마의 갈등이 시작된다. 중학생이 되면서 부터 '욱'하며 반항하는 아들, 그런 아들을 예전과 달리 '울화통'을 터트리는 엄마, 그 둘 사이에서 아빠와 작은 아들은 눈치보느라 바쁘다. 남편과 두 아들 뒤치닥거리에 살림살이, 거기다 부업으로 신발 꿰매는 일까지 하는 은영 씨의 하루는 24시간이 부족하다. 그런데 그것도 부족해서 요즘 은영씨는 시도때도 없이 열이 오르고 땀을 뻘뻘 흘리는 갱년기에 시달린다. 몸으로 드러나는 증상만이라면 그나마 선풍기를 틀고 부채질을 하며 참을 수 있다. 아들과 싸우다, 잔소리하다 나도 모르게 불쑥 '이렇게 살려고 살아온 게 아닌데'하며 솟구쳐 오르는 서러움에 자기도 모르게 자꾸 눈물 바람을 한다. 그런데 눈물이 많아진 건 은영 씨 만이 아니다. 가장인 무석씨도 마찬가지다. 요즘 제일 재밌는 tv프로그램이 연속극이고, 그걸 보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설겆이를 하다말고 뜬금없이 '엄마가 보고싶'단다.



이 눈물이 흔해진 부부의 병명은 바로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갱년기', 다큐는 갱년기를 맞이한 정은영- 송무석, 윤정섭 부부와 그 친구들의 사연을 통해 갱년기의 증상에 접근한다. 윤정섭 씨 친구들의 모임, 흔히 중년 남자들의 모임에서 그러하듯 건강한 성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우스개로 편하게 시작된 이야기는 전과 같지 않은 몸과 마음의 상태, 그리고 갱년기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진다. 특히나 다큐는 갱년기의 남자들에 주목한다. '울면 안돼'는 수컷의 사회 속에서 '갱년기'를 맞이한 남자들은 더 이상 남성답지 않고, 심지어 여성스러워져 가는 자신들의 변화에 당혹스럽다. 

그리고 이어진 이들 중년에 들어선 남녀들의 호르몬 검사, 그들의 호르몬은 그들의 변화를 고스란히 설명해 준다. 사춘기 아들이 보이는 '질풍노도'의 모습이 그의 몸에서 열 배 이상 분비되는 '남성 호르몬'으로 설명되어지듯이, 붉으락 푸르락 화를 잘 내는 은영씨의 증상은 여성 호르몬 에르트로겐을 비롯하여, 행복을 느끼도록 해주는 세로토닌 등의 급격한 감소로 설명된다.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급격하게 줄어든 남성 호르몬의 감소가 바로 그들 자신도 당혹스러워 하는 변화의 원인인 것이다. 고등학생이 된 아들들의 이해를 받는 윤정섭 씨의 아내가 상대적으로 갱년기 증상이 덜한 것과 달리, 사사건건 사춘기의 아들과 충돌이 잦은 정은영 씨의 호르몬 수치는 더욱 심각한 것으로 드러난다. 

호르몬 수치로 드러난 갱년기의 상태, 이렇게 다큐는 중년들에게서 나타나는 당혹스러운 변화를 '호르몬'이라는 불가항력의 신체적 변화를 통해 설명한다. 즉 나만 이상한 것이 아니라, 여성중 14%만이 무사히 넘기는, 그리도 뜻밖에도 남성들 중 63.8% 경험하고 있는 증상의 원인을 짚는다. (이화여대 간호학부)

호르몬 만능주의를 넘어
하지만 '모든 게 다 호르몬 때문이었어'라는 식의 '모든 길은 호르몬'으로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갱년기 증상의 정도 차이가 '내재되어 있는 우울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크리스티안 노스럽 박사)이란 관점에서 접근한다. 은영 씨와 무석 씨 부부는 서로의 하루 생활을 지켜보며 그간 자신만 힘들게 살아왔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서로가 일상에 얼마나 지쳐가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24시간이 부족해 동동거리는 아내의 모습에 남편은 눈물을 흘릴 뻔했다고 토로할 정도로. 또한 중년의 남자들은 사회와 가정의 '가장'이란 짐을 내려놓고 편하게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 마치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바탕 울어보기 모임처럼. 



그렇게 호르몬으로 설명되었던 갱년기는 호르몬이 아닌 각자가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주어진 해법에 의해 점차 '호르몬' 수치조차 갱신되어져 가는 '기적'을 보인다. 인간의 노화를 결정하는 건 '호르몬'이지만 그 조차도 삶의 방식과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큐가 더욱 긍정적인 지점은 바로 '갱년기'의 '갱', 즉 새로 고쳐 사는 삶의 긍정성에 주목한 것이다. 실험에 통해 그저 나이듦, 그리고 더 이상 청춘이 아닌 갱년기의 우울한 면 뒤에 숨겨져 있는 장점을 찾아낸다. 젊은 청년들과의 실험에서 분명 갱년기의 중년들은 젊은이들보다 체력도, 순발력도 떨어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젊은이들보다 공간 지각력, 언어능력, 귀납적 추리 능력이 뛰어났다. 지난 60년간 미국 세로 연구소의 연구 결과이자, 짧은 시간이지만 다큐의 실험 결과이기도 하다. 즉, 청춘의 시대인 이 시대가 중년,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갱년기의 '더 이상 젊음이 아님'에만 주목하는 것과 달리, 그리고 의학적으로 호르몬의 부정적 수치라는 결과만이 아닌, 진짜로 그 옛날 마을을 이끌던 '어르신'의 존재 이유처럼, ;갱년기'는 그 각도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라고 다큐는 말한다. 그리고 실험을 통해 증명한다. 그간 집중했던 '성적 에너지' 대신, 새로이 쓸 수 있는 '지혜'에 주목한다면 갱년기 이후의 삶은 얼마든지 살만한 인생이 된다. 
by meditator 2016. 12. 12. 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