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남녀가 만나 가상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는 프로그램만 해도 벌써 몇 개째인가? mbc의 <우리 결혼 했어요>이 화제를 끌기 시작하더니, 케이블에서는 글로벌 편이라 하여, 일본과 대만의 연예인들과 우리 아이돌들이 신혼을 꾸린다. 그런가 하면, jtbc의 <님과 함께>에서는 돌싱과 상처를 한 사람에게까지 '재혼'의 혜택이 주어진다. 결혼의 혜택만 주어지는 게 아니다. jtbc의 <대단한 시집>에서는 젊은 여자 스타들에게 시집살이를 미리 시켜보기도 하고, 연예인들끼리 가족을 만드는 것도 모자라, 이제 일반인 가족에 뭍어 며칠을 사는 <우리집에 연예인이 산다(mbcevery1)>까지 있으니, 남남북녀의 결합에, 남한의 언니와 북한의 동생이란 조합이 새롭거나 신선하지 않다. 오히려 하다하다 이젠 '탈북자'까지 예능에 끌어들이나 싶어 색안경까지 끼고 보게 되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막상, 추석 특집으로 마련된 <한솥밥>은 남북한 화합 프로젝트 까지는 아니더라도,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연예인들의 말처럼, '탈북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진 새터민들에 대한 편견과 오해의 장막을 한 겹 들어내는 것에는 영향을 미친 듯하다. 


'탈북자'는 공식 명칭이 아니다. 1997년 제정된 법률은 북한을 탈출한 주민들에게 '북한 이탈 주민'이라는 공식 명칭을 부여했고, 다시 2005년 보다 긍정적 의미를 강조한 '새터민'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렇게 공식 명칭이 된 새터민을 아직도, 관슶화된 단어 '탈북자'로 방송 내내 지칭하는 것처럼, 추석 특집 <한솥밥>의 경우, 프로그램에 대한 제작진의 마련이 깊어 보이지는 않는다. 출연하는 새터민도 그렇다. 김정일 앞에서 가무를 선보이던 소품조 출신의 아기 엄마 한서희와, 평양 영화 음악 방송단 가수 출신 명성희는 말이 새터민이지, 외모며 출중한 노래실력이 우리나라 연예인 저리 가라다. 일반적인 새터민이라기 보다는 북한의 연예인과 남한의 연예인이 만나, 가상 가족을 이루고, 가상 결혼을 하는 프로그램이라는게 맞아보인다. 

하지만, 언제나, '가족'과 '연인'을 다루는 프로그램의 정서가 그러하듯, 그들이 북한의 연예인이건, 남한의 연예인이건, 사람과 사람이 만나 빚어내는 화학적 작용은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그런 선입관의 장벽을 스르르 무너지게 만든다. 의지가지없는 남한에서, 여전히 북한의 육아 방식을 고집하는 엄마와 사사건건 부딪치는,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데 도움을 줄 '언니'가 절실한 한서희의 슈네 1박2일과,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홀홀단시 남으로 내려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명성희의 장동민네 시집살이는 남과 북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주는 감동을 만끽하게 한다.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아이에게 주고, 간식으로 문어 다리를 쥐어주는 엄마에게 질색하는 한서희에게, 요즘 귀염둥이 딸들로 인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는 슈네 집 방문의 기회가 주어졌다. 남한식 육아에 대한 기대로 부푼 마음을 안고 슈네 집을 방문한 한서희, 하지만, 쌍둥이에, 유치원생 남자 아이를 둔, 자유방임형의 슈식의 육아법이 문화 충격이다. 
세 아이를 둔 슈는 그녀의 '말대로' 일일이 먹여줄 수 없어서 비닐을 쫘악 깔고, 음식을 늘어 놓은 채 아이들이 스스로 손을 이용해 먹을 수 있도록 한다. 또 송편 만드는 과정 등에, 아직 어린 아이들이지만 맘껏 참여하게 만든다. 당연히 아이들이 음식을 먹는 과정은 먹는 거 반, 흘리는 거 반, 심지어 밟고 깔고 앉기까지 한다. 말이 송편이지, 그야말로 쌀가루 범벅이다. 하지만 이것을 슈는 오감 체험법 육아라 주장한다. 

(사진; 마이데일리)

그에 반해 한서희는, 집에서 그랬듯이 직접 수저를 들고 떠서 아이에게 먹여준다. 남과 북의 이질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한서희가 이전의 우리네 엄마들의 육아법에 가깝고, 슈가 이른바 요즘 최신식 육아법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와중에, 먹을 것이 부족한 북한에서는 밥알 한 톨이라도 흘리는 것을 아까워한다는 한 마디가 새삼스럽다.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음식을 흘리는 것이 큰 흉이 되어, 아이들이 먹다 흘리면, 그것을 엄마가 주워먹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새, 세월이 풍족해 져서, 지천에 음식을 흘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한서희의 그 지적은 여전히 북한에서는 물론 아프리카에서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아이가 있는 세상에서 뼈저리다. 

그런 식이다. 이제는 대놓고 우리보다 못사는 북한에서 온 한서희가 문화 충격인듯 받아들이는 슈네 최신 육아법에는 변화된 '남한'의 문화가 정서를 발견하게 된다. 아깝지 않은 먹을 거리도 그렇고, 예절보다는 자유분방함이 먼저인 육아의 정서가 바로 그것이다. 대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기 주도성과 긍정성을 얻는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예전에 비해 얼마나 잘 살게 되었으며, 얼마나 아이들을 때로는 자유로움이라는 미명 하에, 아이들 중심의 세상을 꾸리고 있는가를 증명한다. 그런 '슈'네 집 최신 육아 방식이, 남한의 문화가 갈급했던 한서희에는 오아시스같아 보인다. 아마도 집에 돌아간 한서희는 북한식, 아니 어찌보면 우리네 전통의 육아 문화를 고집하는 엄마와 더 치열하게 전쟁을 벌일 것이다. 

문화적 충격으로서의 육아 전쟁과 달리, 명성희가 찾아 들어간 장동민의 대가족은 시종일관 훈훈함을 놓치지 않는다. 이상형으로 현빈과 송승헌을 꼽은 명성희가 장동민을 보고 받은 정신적 충격도 잠시, 이제는 이방의 신부가 하는 게 더 어울릴 북한의 명성희를 품은 장동민의 가족은 넉넉한 품을 보여준다. 북한 축구대표팀 감독을 지낸 아버지였지만 이제는 돌아가시고 안계신, 북한식의 꾀고리 발성법으로 주체사상만을 노래하는 그곳이 싫어 평양 상류층의 생활을 마다하고 엄마와 둘이 남한으로 넘어온 명성희에게 부모님은 물론, 누나와 조카, 심지어 아는 동생들까지 함께 사는 그 기묘한 가족구조가 신의 한수로 작용한다. 

만나자마자 2세를 계획하는 섣부른 마음을 전혀 숨기지 않았던 것과 달리, 우리가 예능을 통해 알던 막말을 마다하지 않는 '무뢰배' 였던 그의 캐릭터와 달리,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장동민은 명성희에게는 푸근한 보호자같았다. 그리고, 상견례 자리에서 시집살이, 시누이 살이의 걱정을 자아내던 대가족은 오히려 그녀가 머무는 1박2일동안, 그녀에게 잊었던 가족의 정서를 한껏 발산한다. 시아버님은 그녀의 손을 잡고 산을 오르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할테니 마음 놓고 기대라 하고, 어린 조카들은 이쁜 숙모에게 사랑이 담긴 스케치북 공세를 마다하지 않는다. 성격좋은 하숙생들은 마음 넉넉한 시동생들같다. 

화려한 화장을 하고 등장했던 명성희의 다소곳한 반전도 흥미롭다. 장동민의 외모에 충격을 숨기지 않고, 결혼을 해도 자기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던 강단있는 의사 표현과 달리,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자기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새벽 잠을 포기하기를 마다치 않는다. 

'탈북자'라는 말하기도 어색했던 어감의 젊은 엄마 한서희나, 새신부 명성희의 1박2일은, 가장 이질적인 그들이 아닐까 라는 우려와 달리, 그 어떤 외국인보다도 친근한 그저 우리와 다르지 않는 같은 민족임을 깨닫게 해준다. 오히려 '금강산'을 노래한 가곡을 부르며 이슬이 맺히는 한서희의 눈가와, 생일 파티를 준비한 가족들에게 감동한 명성희의 촉촉한 눈빛에서, 고향을 잃은 또 다른 실향민의 아픔이 전해져 온다. 훈훈하고, 그래서 생각해 보면 가슴아픈 추석 특집 프로그램이다.


by meditator 2014. 9. 6. 13:25

9월 4일 <조선 총잡이> 마지막 회,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겨우 목숨을 건진 박윤강(이준기 분)과 정수인(남상미 분)은 산채를 꾸려 사람들과 생활을 한다. 고부에서 탐관오리 군수가 백성을 괴롭힌다는 소식을 들은 윤강은 부하들을 이끌고 출동하고, 고부 군수 조병갑은 '총잡이'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혼비백산 하는 걸로, 드라마는 마무리된다. 

고부 군수 조병갑이라? 다름아닌 동학 농민 전쟁의 도화선이 된 바로 그 고부 민란의 그 문제적 인물 아닌가? 그렇다면, 그 조병갑을 혼내주러 온다는 박윤강은? 전봉준이 되는 것인가? 아니, 말을 타고 총을 쏘며 나타나는 의적 전봉준이라니? 
이렇게 우리가 너무나 익히 아는 역사적 사실에, 의인 박윤강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 <조선 총잡이>는 마지막으로 무리수를 둔다. 하지만, 어쩌면, 이 마지막 회의 무리수는, <조선 총잡이>란 드라마를 내내 지탱해 왔던 딜레마의 한 증표일 뿐일 지도.

가장 전근대적인 국가 '조선'과, 근대적인 무기 '총잡이'를 역설적으로 합침으로써, <조선 총잡이>는  근대의 물결에 휘말린 조선 말기 인물의 드라마틱한 삶을 그리고자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조선 제일의 무관인 아버지를 둔 아들이,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려고 나서지만, 그 또한 아버지를 저격했던 자들에 의해 죽음의 문턱에 이르고 만다. 바로 그때, 운명적으로 그의 목숨을 구해준 인물이 바로 김옥균! 그렇게 박윤강은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본에 보내지고, 근대적 인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에 반해, 어찌보면 운명적으로 개화를 선택하게 된 박윤강과 달리, 일찌기 통역관으로 외래의 문물에 일찌기 눈을 뜬 아버지 덕분에, 조선 말기 '신지식인'으로 활약하는 박윤강의 사랑 정수인의 경우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개화파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권신의 서자로서 태생적 한계를 개화 사상과 일본 유학을 통해 풀어보려 했던 김호경(한주완 분)이야말로 어찌보면 가장 개화파의 전형적 인물에 가까운 모습이다. 

뜻하지 않게 김옥균의 도움으로 일본을 가게 되어 운명적으로 개화적 인물이 된 박윤강과, 철학적 세계관으로 자기 확신이 확고했던 정수인, 하지만, 정작 드라마에서 그들의 활약은,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의 조선을 살아낸 현실적 인물이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사극의 주인공으로서 정의로운 의인과 그가 사랑한 강단있는 여인의 캐릭터를 벗어나지 못한다. 

티브이데일리 포토
(사진; tv데일리)

그리고 이렇게 전형적인 두 주인공 덕분에, 고생하는 것은 역사가 된다. 개화적 인물이 된 두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해, 드라마 중후반에 이르도록 드라마적 갈등의 구도는 마치 정조의 현신인 듯 개혁 군주로서의 포부를 지닌 고종과, 그에 대립되는 척신 세력으로 이어진다. 개화파에 속하는 주인공들, 심지어 신식 군대 별기군에 중요 직책을 맡은 김호경 덕분에, '임오군란'은 척신들의 손아귀에 놀아난 구식 군대의 해프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척신들의 전횡에 대항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개화파를 적극적으로 기용했던 고종 캐릭터는, 무기력한 그의 역사적 현실로 인해, 드라마의 중반 이후 방향을 잃는다. 오죽하면, 마지막 회, 갑신정변을 겪고 갑오개혁을 승인하는 과정에서, 그 승인의 이유가, 더는 자신의 주변 인물이 자기로 인해 죽기를 원하는 않는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상을 가진 초라한 인물로 귀결된다. 
명성황후 역시 마찬가지다.  개화 세력인 수인을 자신의 측근으로 들이는 등 개화 세력에 친근한 인물이었다가, 정작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권신 영의정을 활용해 청국군을 불러 들이는데 앞장서는 이율배반적인 결정을 하지만, 명성황후의 취약한 외세관은 드러나지 않은 채, 현명한 국모이거나, 지아비인 고종을 대신할 만한 강단있는 리더의 모습으로만 그려지기 십상이다. 
이런 고종의 모습이 옳다거나, 저런 명성황후의 모습이 맞았다가 아니라, 드라마가 스토리를 전개하기 위해, 주인공들의 활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역사적 인물을 일관성 없이 편의적으로 재해석해 냈다는데 <조선 총잡이>의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개화기의 문제적 인물 김옥균으로 가면 한술 더 뜬다. 우리 역사에서 실패한 혁명으로 규정된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그는, 박윤강을 구해 일본으로 보내준 의인이었다가, 드라마 후반 등장하여, 박윤강, 정수인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는가 싶더니, 갑신정변 과정에서, 느닷없이 주인공들을 배신한 채, 무모한 개혁을 시도하는가 싶더니, 그 마저도 주인공은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상황에서 비겁하게 일신의 안전만을 도모한 비겁한 인간으로 그려낸다. 

역사적으로 '갑신정변'은 일본 유학등을 거쳐 개화에 눈을 뜬 급진적인 신진 엘리트에 의해 주도된 하향식 개혁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이들의 급진적인 성향에 '정변'으로 불을 붙인 것은, 명성황후의 측근인 민영익과, 명성황후의 '변심'이다. 이들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자, 이들의 후원을 얻어 정권의 힘을 확장시켜 나갔던 이들이, 자신들의 권력의 편의에 따라, 급진 개화파인 김옥균 등을 소외시킨데서 '갑신정변'의 단초는 마련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 개혁 세력인 김옥균은, <조선 총잡이>에서 비겁한 권력욕을 가진 사람으로만 그려진다. 그럼으로써, 이들과 함께 한 박윤강, 정수인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윤강과 정수인은 김옥균등이 인지하지 못한 '신분제 타파' 등의 갑오개혁의 진정성을 실천하고자 한 혁명적 의식의 소유자이며, 김옥균등이 깨닫지 못한 외세의 개입으로 인한 위험성을 미리 간파한 현자들이다. 박윤강과, 정수인은 비록 갑신정변에 합류했지만, 당시 급진적 개혁 세력들이 가진 역사적 한계를 뛰어넘은 인물들로, 덕분에 그들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지만, 동시에 '피해자'가 되어, 그들이 도모한 정변의 책임을 모면해 갈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완벽한 역사적 인식을 가진 인물들로, 역사적 원죄를 뒤집어 쓸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기에, 앞장서 왕과 왕비를 궁궐 밖으로 유인하고, 그를 위해 폭약을 폭파하려던 시도를 하기까지 한 이들은, 김옥균 등의 오판으로 실패한 '개혁'에 대해 그 어떤 죄책감이나, 반성도 없이, 다시 한번 '백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방식이 전봉준같은 식이라니? 역사 교과서에도 나와 있지만, 개화파의 사상적 계보를 그나마 가지고 있는 조선 말기의 운동 방식이라면, 그나마 '애국 계몽 운동'이 어울릴 법도 하건만, 가장 이질적인, 동학 농민 운동이라니? 그것도 쾌걸 조로식으로 총을 들고 악인을 혼내주러 출동하다니 말이다. 역사적 패러디라 해도, 이건 '썩소'를 불러올 상상력이다. 

애초에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의 도움을 받아, 일본인으로 행세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박윤강이 어떻게 그리 현명한 일본관을 가질 수 있었으며, 고종의 청조차 마다한 채 아비의 원수를 갚는 것이 지상 최대의 목표였던 그가, 어떻게 갑자기 '민중의 대변자' 연 하며 갑신정변의 성격을 확대시키는지, 드라마는 타당한 설명을 부여하지 못한다. 아비의 죽음을 고민하는 과정에 척신들의 권력에 항거한 거까지는 맥락이 닿지만, 그것이, 이후의 개화파의 한계를 뛰어넘는 '의인'으로서 박윤강을 설명해 내기에 드라마의 전개는 역부족이었다.  

조선 말기, 가족적 상처를 입은 젊은이가 뜻하지 않게 개화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어 '갑신정변'에 이르게 된 젊은이를 그리고자 한 역사적 상상력은 그간 드라마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반가운 시도다. 하지만 친일과, 개화라는 우리 역사가 가졌던 딜레마를 소화해 내기에 <조선 총잡이>버거워 한다.  개화기의 지식인으로 그리자니, 그의 결말이 김옥균과 같은 친일파가 되어야 할 것같고, 그렇지 않은 인물로 표현하려니, 역사적 현실성을 상실한 뻔한 영웅이 되고 만다. 

역사를 극복하는 것과, 역사를 윤색하는 것은 다르다. 역사적 인물로서, 당대를 살아낸 인물로서의 현실감을 놓쳐서는 안된다. <조선 총잡이>의 박윤강은, 해석으로서의 역사보다는, 역사를 밑밥으로 한 영웅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차라리, 박윤강이 김옥균처럼, 한정된 역사 인식으로 인해, 몰락할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인물이었다면, <조선 총잡이>의 운명적 정취는 한결 배가되었을 것이다. 총알도 피해가는 고수 총잡이의 비현실성이 드라마의 전개 속에서까지 이어진듯한 드라마, <조선 총잡이>, 그래서 아쉽다. 


by meditator 2014. 9. 5. 10:31

추석이 다가왔다. 꼭 차례상을 준비하지 않더라도 연휴를 맞이하는 주부의 입장에선 며칠동안 먹거리의 준비를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기 십상이지만, 먹는 사람의 입장에선, '살'부터 걱정해야 할 만큼, 명절의 음식은 푸짐하다. 아마도 열의 아홉의 사람들이 추석하면 떠오르는 것에, 송편이니 하는 추석 먹거리가 들어가 있지 않을까. 한 해의 대표적 명절을 기억하는 것조차, 먹거리의 맛이다. 이렇게 우리네 삶은 '먹거리'와 그 '맛'에 좌우된다. 


마치 추석 특집이라도 되는 듯, 9월 1일부터  3일까지, <다큐 프라임>은 <맛이란 무엇인가>를 3부작으로 방영했다. 

그 시작은 1부 <맛의 비밀>이다. 맛에 대한 과학적, 인문학적인 접근이다.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인기 쉐프 박찬일이 등장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맛의 본원을 탐색해 간다. 
우리가 학교 과학 시간에 배웠듯이 혀를 통해 인간이 느끼는 맛은 맵고, 쓰고, 달고, 짜고, 신 다섯 가지의 맛이다. 다큐는, 과연 인간이 이 맛을 언제부터 느끼게 되었는지부터 시작된다. 어린 아기에게 달고 짜고 신 맛을 맛보여 주었을 때, 아기는 이미 맛을 분명하게 인지한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임신 6개월차 주부에게 다양한 맛을 보여주었을 때, 뱃 속의 아기는, 엄마가 맛본 음식에 따라 다른 반응을 느낀다. 즉, 인간은 이미 탄생 이전부터, '맛'을 느낀다. 


물론 맛에 대한 반응도 다 다르다. 아기들이 단 맛에 입맛까지 다시며 좋아하는 것과 달리, 쓴 맛에는 진저리를 친다. 아기들만이 아니다. 어린 시절 쓴 약에 대해 울고불고 했던 기억을 누구나 가지듯이, 대부분의 어린 아이들은 쓴 맛에 질색이다. 물론 이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 가능하다. 인류에게 있어 쓴맛은, 독이 들어 있는 음식에 대한 경고이다. 신맛 역시 상한 음식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본능적 반응이 강한 어린 연령의 아이들일 수록, 쓰고 신 맛에 대해 거부감이 강하다. 

하지만, 인류는, 그 역사를 거듭하며 맛을 발전시켜 왔다. 오늘날 쓴맛의 커피가 대중적인 기호품으로 등극한 것을 보면, 맛의 진화는 획기적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지노모도'라는, 이른바 조미료의 감칠맛은 인간이 다시마 등을 통해 개발해낸 맛이다. 우유가 발효되어 치즈가 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풍미 가득한 향 역시, 감칠맛의 본산이다. 이렇게, 과학 시간에 배운 다섯 가지 맛을 넘어선 수만가지의 맛을 인간은 느낀다. 음식 문화가 발달한 나라일 수록, 맛에 대한 표현이 풍부한 것처럼. 

하지만 정작 맛의 실체는 따로 있다. 눈과 코를 가리고 사과와 양파를 구분하지 못하는 실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이 느끼는 맛은 그 '향'에서 비롯된다. 음식을 이루는 98%의 물질은 무색, 무취, 무미이며, 그 나머지 2%만이 맛을 좌우하는데, 바로 거기에, 극소량의 '향'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향'은 바로 인간의 추억과 연관된다. 급격하게 변화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은 대부분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다. 즉, 인간의 입맛은 보수적이다. 그런데, 이 보수적인 입맛의 시작은, '향'이다. 미각을 잃은 말기암 환자에게 어린 시절 엄마가 즐겨 해주시던 시레기 볶음을 주자, 그 구수한 향에 눈물이 흐른다. 놓았던 수저를 들 힘이 생기게 한다.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향'으로 부터 비롯된 맛은, 어린 시절 자신의 추억과 연관이 있다. 노인이 되어서도 쉽게 식성을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어린 시절 길들여진 맛에 평생 노예이기가 쉽다. 집 문앞에서부터 코를 자극하는 김치찌개 냄새에 마음이 푹 놓인 기억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으리라. 

그래서, 역설적으로 추억의 맛은 위험하다. 엄마가 직장을 다니는 바람에, 인스턴트 음식과 육류 등에 익숙해진 유치원 아이의 입맛은 벌써, 변화되어 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 등에 거부감을 느낀다. 바로 여기서, 교육적 관점에서 '맛'의 훈련이 필요로 된다. 

실제 슬로푸드 운동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미 뱃속에서 부터 엄마가 즐겨 하는 음식에 길들여지기 시작한 아이들의 평생 건강을 위해, '밥상머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공적으로 조미한 가공된 맛에 쉽게 중독되는 인간의 특성을 고려할 때, 어린 시절부터, 건강한 입맛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스턴트식 조리 등으로 인해 상실된 맛을 찾기 위한 노력도 경주된다. 마크로 바이오틱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재료 본연의 맛을 넘어, 흙 맛을 강조한다. 우리가 잃었던, 음식 본연의 맛을 되찾는 것이, 곧 우리의 건강을 되찾는 것이요,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3부작의 <맛이란 무엇인가>는, 맛에 대한 다수의 다큐가 그러하듯, 과학적, 인문학적 접근으로 평이하게 시작된다. 그러던 것이, 맛을 분석하다, 추억으로 넘어가며, 변주가 시작된다. 하지만, 다큐의 변주는, 그저 추억을 그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추억을 잊지 못하듯, 우리의 아이들에게 건강한 맛의 추억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는 강고한 목소리로 마무리된다. 

실제 아이들과 함께 1주일간의 맛의 훈련에 들어간다. 처음 채소를 맛보는 것만으로도 질색을 하던 아이들은, 스스로 수확하고 만들어보며 낯선 그 음식들에 친근해져 간다. 심지어, 게임을 하다보니, 구역질까지 하던 처음의 반응이, 그저 무심히 집어 먹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슬로푸드 운동의 주창자는, 각 학교 별로, 텃밭을 만드는 것이 필수라고 강조한다. 식물이 자라는 것을 직접 보고, 키우고, 수확한 기쁨을 누린 것을 맛으로 연결하는 것이, 어린 시절 맛 교육의 필수 코스라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종종 함께 하는 밥상을 받은 아이들은 요즘 아이들답지 않게, 어른들의 먹거리에 거부감이 없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달리 먹일 것이 아니라, 어른들과 함께 하는 먹거리 문화가, 건강한 입맛의 시작이라는 것도, 추석을 앞둔 <다큐 프라임>이 강조한 평범 속의 진리이다. 결국 맛에 대한 과학적 접근에서 시작된 <맛이란 무엇인가>는 <다큐 프라임>만이 할 수 있는 추석 특집이 되었다. 

물론 아쉬운 점은 남는다. 엄마가 바뻐 인스턴트 음식에 길들여진 아이를 위해, 엄마는 바쁜 시간을 쪼개서 제대로 된 밥상을 준비한다. 엄마와 함께 하니, 알록달록 채소도 먹기 시작한다. 맛에 대한 교육적 원론은 원칙적이다. 하지만, 바쁜 시간을 쪼개서 밥상을 준비해야 하는 엄마의 사정은 안중에 없다. 맛벌이를 하느라, 늦은 밤까지 학원을 돌려야 하는 고달픈 서민들의 생활에 대한 배려 역시 없다. 유기농 채소를 사먹을 형편이 안되는 가난한 엄마의 주머니 사정은 고려치 않는다. 마치 명절 준비를 온전히 해내야 하는 주부가 빠져버린 추석 선물이 된 것이다. 


by meditator 2014. 9. 4. 11:49

어제 아침부터 검색어 순위에 오르내린 이름이 있다. 오늘은 또 다른 이름이 검색어 1위를 달린다. 모두 같은 걸그룹의 멤버 이름이다. 어제 이름이 올라갔던 여자 아이돌은 이미 유명을 달리했고, 오늘 아침 또 다른 멤버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린다. 일찌기 그녀들의 선배였던 아이돌 그룹의 생명을 담보로 했던 죽음의 질주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이제 막 이름을 알리던 그녀들의 생명과 육체를 다시 한번 담보로 삼았다. 어제 음원차트에는 그녀들의 노래가, 데뷔 후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걸 기뻐할 그녀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거나, 병실에 있다. 여전히 당대 젊은이들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는 '아이돌'이지만, 그들의 삶은, 이번 사고에서 드러나듯이, 언제나 척박하다. 이름을 알기기 위해 사선을 넘는 밤길 폭주를 마다하지 않고, 겨우 얻어진 이름값은 하지만 세월 속에 무상하다. 하물며,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전직 아이돌'임에랴.


9월 4일 방영된 <라디오 스타>의 게스트들은 '노목' 형제들이다. 나이든 나무의 노목이 아니라, 너무 살이 쪄서 목이 없어져 버린 한때 잘 나가던 가수들의 집합체를 이름이다. 신해철, 윤민수, 노유민. 이름만 딱 봐도, 그 중에서 노유민이 mc들의 만만한 장난감이라는게 한 눈에 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슬픈 표정 짓지 말아요~ 타이거'를 들먹이다가도 헤헤거리며 웃던 신해철이 정색을 하며, 이제 그만 하지 하면, 나머지 궁금한 점은 인터넷에 물어보는 걸로  하며 적당한 선에서 넘어가주는 예의(?)를 차리거나, 신해철, 노유민이라는 멤버 때문에, 별 재미가 없어 '타투'라도 해야하나 걱정하는 윤민수와 달리, 한 눈에 보기에도 너무나 달라진 외모로 등장한 노유민은 시종일관 mc들의 주요 타겟이 되었다. '전직 아이돌'인 그는, 이제 두 군데의 까페를 운영하며 그럭저럭 먹고살만하여 김구라가 솔깃할만한 부의 소유자도 아니요, 겨우 이제는 사라진 아이돌 그룹의 서브 보컬로 윤종신이 접어줄만한 음악적 역량의 소유자도 아니며, 규현이 그나마 껌뻑죽을 sm소속도 아니니, 이보다 더 만만한 게스트가 없다. 

게다가 속도 없다. 김구라를 비롯한 mc들이 사사건건 걸고 넘어지며 우스개를 만들어도, 허허거리며 웃다 결국 10년 후의 니 모습이라며 결국 선배 아이돌이 일침을 날리게 했던 규현의 깐죽거림에도, 노유민은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데뷔 때부터, 해맑았던 그 어린 왕자같던 그 모습이, 비록 외모는 세월을 이기지 못해 몇 배의 부피를 둘렀지만, 그 소년의 해맑음은, 여전히 노유민의 정서로 자리잡은 듯했다. 출연했던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았던 그의 '집착적' 부부 관계도, 정작 당사자가 해맑은 웃음을 거두지 않으니, 김구라마저, 사람살이는 다 저마다의 스타일이 있는 거라며 포장을 해준다. 과거 사진을 들이대며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느냐며 다그쳐도, 웃음이 거둬지지 않는다. 

(사진; 뉴스엔)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히 언제나 그렇듯, 광야의 하이에나들같은 mc들에게 가장 만만한 먹잇감같은 노유민인데, mc들이 무슨 말을 해도 노염을 타지 않으니, 어느순간인가 부터, 그런 노유민을 신기해 하기 시작한다. 오죽하면, 김구라가, 모든 사람을 까페 손님대하듯 한달까. 그런 노유민에 대해, 방송 말미,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신해철이 명쾌한 결론을 내린다. 바로 그의 끊이지 않는 미소의 원천이 그의 '행복감'이라고. 그런 신해철의 정의에, 노유민은 당연하다는 듯 답한다. 그렇다고, 지금 난 행복하다고. 

방송가에서 '전직 아이돌'이란 명칭은 그리 아름다운 대명사가 아니다. 한때는 누군가의 우상이었지만, 그보다 젊고 세련된 누군가가 등장함으로써, 한켠으로 밀려난, 그래서, 당시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하거나, 그게 아니라도, 그 이름값의 언저리에서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궁색함을 숨기지 않고, 그 무엇이라도 하거나, 여전히 당시의 명망에 기대어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거나 하기가 십상인 존재들로 기억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같은 아이돌임에도, 후배인, 지금 현존하는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에 속하는 규현같은 친구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도 발끈할 뿐, 딱히 이렇다할 자구책이 없어보이는 것 역시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전직 아이돌들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노유민의 모습이 달랐던 것은, 그렇게 여전히 전직 아이돌이라는 울타리를 이제는 벗어나 버린, 진짜 '파랑새'를 찾은 것 같은 그의 모습 때문이다. 과거 꽃미남 시절의 사진을 들이대도, 흘러간 영광을 조롱해도, 이제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에게는, 그저 무른 호박에 이빨 자국만도 못한 잡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그이다보니, <라디오 스타>의 약빨이 먹히지 않을 수 밖에, <라디오 스타>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연예인들의 목적이란게, mc들의 먹잇감이 되어도 좋으니, 자신의 존재감 한번 떨쳐보는 것인 경우가 대부분 아닌가. 그런 <라디오 스타>의 논리를 보기 좋게 벗어나 버린, 노유민의 행복감은, 묘하게도, '십년 후의 니 모습'이라던 또 다른 전직 아이돌의 일침보다, 통쾌하다. 아니, 언제나 대중의 관심에 연연하며 살아가야 하는 연예인의 생리를 교묘하게 웃음의 소재로 이용해 왔던 <라디오 스타> 조차도, 결국, 그래 '넌 행복해'라며 항복하게 만들어 버린 속시원함이다. 이제 대중의 호불호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노목'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생업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생활인의 당당함이다. 


by meditator 2014. 9. 4. 10:05

9월 2일 방영분에서, 야심차게 시도한 '야자 타임', 이효리가 김구라에게 말한다. 니가 들어와도 시청률은 그대로대?라고, 그러자, 김구라가 화색이 돌며 답한다. 그래도 전보다는 올랐다고. 그러자, 이번엔, 문소리가 던진다. 그게 너때문이라고 생각하냐고?

이전의 세 mc, 이효리, 문소리, 홍진경에게는 아쉽지만, 김구라가 함께 한 <매직 아이>는 그 이전의 <매직 아이> 보다 훨씬 나았다. '진부한 아이템' 김구라임에두 불구하고, 이전의 세 mc가 진행하던 <매직 아이>에 비해 한결 정돈된 느낌이었다. 심지어 mc는 김구라이고, 이효리, 문소리, 홍진경은 패널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종종 있을 정도였다. 

<매직 아이>의 김구라는, <썰전>의 김구라도, <라디오 스타>의 김구라도, <세바퀴>의 김구라와도 달랐다. 굳이 규정하자면, <썰전>과 <라디오 스타> 사이, <썰전>을 통해 그가 이철희, 강용석을 통해 얻은 세상에 대한 식견과(예능 심판자의 김구라는 아니다), <라디오 스타>에서 유지되던 여전히 독한 혀로써의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그에게는 원죄가 있는 이효리, 그보다 나이가 많은 문소리라는 문턱에 조심하는 노련함을 유지하고자 한다. 덕분에, 다른 프로에서보다, 한결 부드러우면서도, 풍부한 식견을 가진 김구라라는 캐릭터가 새롭게 드러난다. 

하지만, 정작 <매직 아이>의 문제점은 새로 합류한 김구라가 아니다. 종종 김구라로써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9회에 이르도록 조율되지 않는 세 여자 mc들사이의 불협화음이다. 
이 불협화음의 근원은, 세 사람의 친근함, 친숙함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그 어느 프로그램이 mc들의 사이좋음을 전제로 하겠는가. 심지어, <썰전>처럼 때로는 드러내놓고 서로의 다른 이견의 평행선을 달리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매직아이>의 세 mc의 문제점은, 퓨전이 될 수 없는 서로 다른 나라의 요리를 먹는 느낌과도 같다. 

9월2일 방영분에서,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는 밝히는 문제에 다루었다. 
이에 대해 김구라는 영화평을 예로 들며, 연예계에서 상대적으로 솔직하다는 축에 드는 자신 조차도 영화를 보고 나서 좋다 나쁘다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처지라고 자신의 입장을 토로한다. 그에 대해 문소리는 말한다. 왜 영화를 보고, 좋다, 혹은 더럽게 나쁘다. 양단간의 입장만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냐. 표현의 방식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김구라의 의견을 확장시킨다. 그런데, 그런 문소리의 의견에 대해, 이효리는, '드~럽게 재미없네'라고 부드럽게 말해야 한다고 받는다. 
김구라가 말한 바 표현의 어려움에 대해, 문소리는, 그걸 우리 사회가 모든 사안에 대해 호불호라는 이분법적 논리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며, 좀 다양한 의견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확장시킨다. 그런데 이걸 웃기자고 하는 것인지, 이효리는 '말 개그'로 받아친다. 이렇게 되버리면, 문소리가 한 문제제기는 사라지고, 다시, 원래 솔직하게 말하자, 말자의 이분법으로 돌아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문소리의 민주 노동당적에 대한 토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솔직한 토로에 대해, 김구라를 제외하고, 두 mc에게서, 우스개를 제외하고, 문소리의 의견을 확장시킬 그 어떤 리액션이 등장하지 않았다. 

홍진경은 한 술 더 뜬다. 방송가에서 나름 똑부러진다고 평가받는 홍진경은, 2일 방송분에서 회식 자리의 의견을 내는 경우를 두고 이야기를 할 때, 자신은, 내가 돈 내고, 먹고 싶은 걸 시킨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서, 오히려 게스트들의 원성을 들었다. 홍진경 개인으로는 개성이 강하지만, 그녀의 개성은, 2일 방송분에서도 보여지듯이, 게스트들 조차 그건 아니지 할 만큼, 외람된 입장(?)인 경우가 있는데, 문제는, 홍진경 자신이, 그런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 전혀 무지하건, 심지어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 방송을 보다보면, 문소리는 종종, 틀에 박히지 않은 다양한 문제 제기를 하지만, 그것들이, 이효리나, 홍진경에게 제대로 이해나 되나 싶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나마 김구라가 등장하면서 부터, 이야기의 물꼬가 터져서, 문소리의 생각이 조금 더 펼쳐지게 되는 경우가 생긴 것이지, 그 이전에는, 늘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로 흐르고, 결국, 이효리나 홍진경의 들은 적 있는 자기 경험으로 흘러들어가 또 그 이야기냐는 논란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2일 방송분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효리와 김구라 사이에는 원죄가 있다지만, 함께 방송을 하는 입장에서 새삼스레 그걸 다시 끌고 들어오는 이효리는 토크쇼를 과거로 회귀시키는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불행한 과거는 사실이지만, 그걸 다시 끄집어 내서, 토크의 주제로 삼는 것은, 신선한 시도를 지향하는 <매직 아이>에 어울리는 방식은 아닌 것이다. 아니 가끔은 그녀가 이야기할 꺼리가 없어, 과거 경험을 끄집어 내나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효리의 삶은 결혼과 함께 달라졌다지만, 그녀가 프로그램을 이끄는 방식은, 여전히 과거 예능 프로그램을 하던 방식이다. 이효리가 방송에서 반짝 빛나는 순간은, 2일 방송분처럼 대놓고 욕을 하거나, 광희의 무지를 콕 찝어 알아맞추는 감각적인 지점이다. 하지만, 토크의 흐름을 끌어가거나, 확장시키는 지점에서 여전히 이효리는 어려움에 처해있다. 안타깝게도 이효리의 건강한 삶과, 토크쇼를 이끄는 진행자로써의 능력은 별개라는 걸 회를 거듭할 수록 증명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순 있지만,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홍진경은, 그녀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펼쳐놓던 자부심 넘치는 홍진경's 월드의 옹벽 안에 여전히 있다. 홍진경의 이야기는 그저 여전히 어느 똑부러지는 사람의 목소리일 뿐이다. 문소리의 생각은 트여있지만, 역시나 그걸 다른 두 사람과 조율해갈 능력도 의지도  없다. 

(사진; tv리포트)

김구라가 와도, 이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세계를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그저 그의 생각과 사안에 따라, 제휴, 협력, 혹은 반목을 할뿐이다. 당연히 세 mc가 게스트들과의 토크를 이끌어 가지는 못한다. 사안에 따라 산만하게 반응할 뿐. 그러다 보니,토크쇼가, 게스트들과의 자유로운 토론이 아니라, 김구라 vs 다수의 패널 토크쇼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아쉬운 건, 김구라 역시 각자 한 자부심 하는 세 mc를 다잡으며 자신이 휘어잡고 가기엔 힘이 부치던가, 휘어잡을 의지가 없어 보이니, 여전히 <매직 아이>는 어수선하다. 이효리는 이효리대로, 종종 상대방을 당황시키는 예의 솔직함을 무기로, 자신의 경험을 펼쳐놓고, 문소리는 사안에 따라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펼친다. 홍진경은 뜬금없이, 이래야 하는 게 아니냐며, 토크를 붕 띄운다. 김구라는 나름 식견을 펼치며 토론의 맥을 잡아보려 하지만, 늘 토크는 한 치쯤 공중에 떠있다. <매직 아이>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들은 건강하지만, 토크는 진부함과, 뻔함의 갈피를 벗어나, 신천지를 향해 가다 늘 좌초한다. 장작을 던지며 불을 때본들, 젖은 아궁이에서 매캐한 연기만 피어오늘 뿐이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두고 토론을 벌이는 것으로만 보면, <비정상회담>이나, <매직아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매직아이>가 여전히 궤도에 오르려다, 힘에 부쳐 미끄러져 내려가는 느낌을 주는 건, <비정상 회담>이 선보이는 치열한 토크의 질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치열할 수 없는 근원은, 안타깝게도  여전히 이질적인, 혹은, 그런 주제를 담보해낼 능력이 부족하건, 펼쳐도 호응을 얻을 수 없는 세 mc로 부터 기인한다. 기센 캐릭터만으로 솔직한 토크쇼가 구성될 수 없다는 걸 여전히 <매직 아이>는 증명한다. 


by meditator 2014. 9. 3. 07:48

더 이상 소매치기를 하지 말라는 창만(이희준 분)의 설득에 유나(김옥빈 분)는 무 자르듯 답한다. 더 큰 도둑놈들은 잡히지 않는 세상에, 나같은 사람이 남의 지갑 좀 훔치는 게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이 되냐고. 

당당한 유나의 소매치기 론에 창만은 안타까워하면서도, 더는 그녀를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그렇게, 더러운 세상, 소매치기로 먹고 사는 것에 당당해 하던 유나가 달라졌다. 언제부터인가, 소매치기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 소매치기한 할머니의 지갑을 돌려주는 바람에, 같은 업계 동료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지청구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무엇이 그녀를 달라지게 했을까?

처음 감옥에서 출소를 하고, 미선의 방에 얹혀 살 때만 해도, 유나는 아픈 아버지를 만나러 감옥에 갈 돈이 없어 동동거리는 처지였다. 그런 유나의 자구책은 남의 지갑을 슬쩍하는 것이고, 그 일조차 같은 업계 사람들이 눈독들인 사람을 먼저 털어 오히려 그들에게 쫓기는 처지가 되기도 할 정도로' 독고다이'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달라졌다. 같은 업계에서 일하던 청소년 아이를 교정하여 스스로 소년원에 자수하게 만들고, 손을 다쳐 강도로 돌변할 뻔 했던 동료의 새로운 직장을 알아봐 주느라 노심초사한다. 후배들은 그녀를 따르고, 그녀 주변엔 사람들이 넘친다. 누구랑 같이 일도 못한다던 그녀가 말이다. 

(사진; tv리포트)

그녀를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는 창만에게 그녀는 말한다. '니가 오지랖이 넓어서 싫다고', 그도 그럴 것이, 오직 그녀가 좋아서, 다세대 주택에 세들어 온 창만은, 그 특유의 사람 좋음으로 인해, 주인집 콜라텍에 들이닥친 조폭을 해결해 주는 바람에, 콜라텍에 취직하는가 하면, 다세대 주택에 세든 사람들의 온갖 뒤치닥거리를 도맡아 한다.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하던 개삼촌도, 야반도주를 했던 옆방의 부부도, 왕년의 조폭 할아버지도, 창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 창만을 유나는 어이없어 한다. 남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는 창만을 이해할 수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어느 틈에 유나도 창만을 닮아간다. 

소년원에 간 동종업계 아이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소년원 입구를 자꾸 바라보던 유나가 결국 차 안에서 울음을 터트린다. 그 누가 칼을 빼들고 들이닥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녀가, 창만이 자신의 엄마를 찾았다는 이유만으로 며칠 동안 그와 말도 섞지 않던 그녀가, 자신의 소년원 시절을 떠올리며 통곡을 한다. 처음 소년원에 갔던 그 시절, 엄마가 너무 그리워서 눈물을 흘렸다던 그 아이가 바로 지금의 유나이다. 그리고, 창만은 유나가 그토록 완고하게 소매치기의 삶을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어린 시절 엄마와의 이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창만의 분석이 틀리지 않은 이유를, 고아원에서 만난, 다영(신소율 분)을 통해 설명한다. 어린 시절 엄마와 헤어진 다영이, 엄마의 빈 자리를, 고아원 고아들과의 동일시에서 찾아내듯, 그런 다영과 공감하는 유나를 통해, 유나의 결핍을 이해시킨다. 감옥에 간 아버지, 이유야 어떻던 자신을 버린 엄마, 그런 외로움 속에서, 유나가 자기 자신을 방어할 유일한 수단은 '소매치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소매치기'를 통해 세상에 대해 자신을 방어해왔던 유나는 창만을 통해 세상을 조금씩 달리보기 시작한다. 창만 역시 유나와 다르지 않다. 가족이 없던 그를 보살펴 주던 작은 아버지가 그를 도둑으로 몰았던 그 상황이 너무 억울해 고향을 떠나왔던 그는, 유나와 전혀 반대의 삶을 산다. 여전히 틈틈히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그들과 어우러져 사는 것으로 그의 외로움을 치유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세상에 의지가지 없는 창만이지만, 그는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달래주느라 바뻐 자신의 외로움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 그리고 그런 창만을 바보같다며 비웃던 유나도 어느 틈에, 그의 '이타적' 사랑에 전염된 듯, 주변을 챙긴다. 그러자, 어느 틈에 유나 주변에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그녀는 소매치기하는 거 조차 잊은 듯 살아가게 되었다. 

20만에 돌아온 '서울의 달'이라는 표제를 내걸었던 <유나의 거리> 속 서울은, 이십년 전 그때와 묘하게 닮은 듯 다르다. 여전히 달동네 같은 동네, 바글바글한 셋집에 모여 사는 건 다르지 않다. 사실 세상은, 오히려 그때보다도 더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들간의 격차는 심해졌고, 삶은 각박해 졌는데, 그 시절 아둥바둥 살아보겠다고 삶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다 뒤엉켜 버렸던 주인공들의 삶은 한결 온순해 졌다. 
작가의 연배가 그 세월만큼 깊어진 탓일까. 야망을 위해 자신을 던지다 스러져 버린 주인공 대신, <유나의 거리> 속 주인공들은, 서로 전염된 듯, 유하게 삶의 고비를 넘긴다. 제비에게 걸려 돈도 뜯기고, 맞기도 하던 미선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살 방도가 없다 강도를 계획하던 남수는 역시나 그 바닥 일이지만 새로운 삶의 활로를 찾는다. 쓸쓸한 왕년의 조폭 할아버지는 이제 삼각 관계에 빠질 정도로 노년의 삶에 새록새록 재미를 찾아가고, 전남편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칠복 부부 역시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겨 가고 있다. 이십년 전, 이웃이란 이름으로 등을 쳐먹고 날르던 이웃들은, 오히려 각박해진 세상에 서로의 등을 빌려준다. 유나도, 창만도, 그리고 다세대 주택에 사는 모든 이들이, 가족은 없지만, 더 가족처럼 서로에게 등을 부비며 어우러져 살아간다. 

여전히 다수의 가족 드라마들이, 세상에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고 목놓아 외치는 세상에, <유나의 거리>속 세상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번듯한 가족으로 보이는 가족들도 들여다 보면 제대로 된 집구석이 없다. 조폭에 이혼 경력이 있던 한만복은 술집에 다니며 기둥 서방에게 시달림을 당하던 지금의 아내를 구해 지금의 일가를 이뤘다. 한만복의 전처에게서 낳은 딸 다영은 마더 컴플렉스는 있지만, 그래도 말 안통하는 아버지 보다는  새엄마랑 그럭저럭 잘 지내는 딸이다. 원앙같은 부부인줄 알았던 칠복-혜숙 커플은 알고보니, 마약 중독자 혜숙 남편을 피해, 딸조차 놔두고 야반도주한 불륜 커플이다. 어디 그뿐인가, 창만이 이상적 모델인 달호-양순 부부는 전직 형사와 소매치기의 조합이다. 들여다 보면 문제 투성이의 가족이라도, 여전히 한 지붕 아래, 한 이불을 덮으며 알콩달콩 서로 믿고 의지하고 살아간다.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유나를 내쫓으려 하거나, 잠시 잠깐 눈앞의 이익을 위해 서로에게 칼을 빼들었다가도, 서로의 사정을 알고 이해하고, 덮어주는, 유나네 동네의 삶이 아마도 김운경 작가가 우리 시대 전하고픈 메시지인 듯하다. 이십년 전보다도 한층 더 서로가 뿔뿔이 흩어져, 가족 조차도 멀어져 가는 세상에, 그러지 말고, 서로가 의지하며 살아가자고, 그러면 조금은 덜 외롭고, 덜 힘들 것이라고. 산타 클로스같은 창만의 존재를 통해, 그가 뿜어내는 온기에 조금씩 따스해져 가는 다세대 주택 사람들, 그리고 유나를 통해, 이렇게도 서로 기대며 살아갈 수 있다고, 김운경 작가는 설득한다. 


by meditator 2014. 9. 3. 06:44

소설 <삼총사>는 아직 절대왕권이 확고하게 자리잡지 않은 17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뒤마의 소설이다. 이 소설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루이 13세는, 실권은 쥐고 있는 리슐리외 추기경과 대립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소설 속 3총사와 달타냥은, 왕에 충성을 바치는 총사대원으로 리슐리외와 그의 근위대원들과 사사건건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왕을 흔들기 위해,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와 앙숙이던 영국과의 갈등을 부추겼으며, 결국 영국군이 프랑스로 침입해 오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다. 


바로 이 지점, 아직 왕권이 확립되지 않은 프랑스와, 그런 프랑스를 위협하는 영국이라는 외적의 위기가, 드라마 <삼총사>에서 명청 교체기의 풍전등화와 같은 17세기의 조선으로 절묘하게 되살아 난다. 
8월 31일 방영된 <삼총사>에서 소현 세자(이진욱 분)는 말한다. 자신은 세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왕이 되는 바람에 자기 역시 세자가 되어 버린 사람이라고. 그렇다. 소현 세자의 아버지 인조(김명수 분)는, 신하들의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으로 옹립되었다. 드라마에서 김자점은 이미 그런 인조를 왕이 될 깜냥이 아니라고 규정내린다. 왕이 될 깜냥이기 이전에, 인조는, 그 자신이 왕이었던 광해군을 밀어내고 신하들에 의해 옹립된 왕이기에, 평생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산 인물이다. (후에 그의 이런 불안감은 아들 소현 세자에 대한 질시와 의심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런 불안감은 그의 통치 능력으로 증명되지 못한 채 그의 치세에 두번의 호란을 겪게 된다. 그렇게 아직 절대왕권을 지니지 못한 루이 13세의 허약함은, 신하들에 옹립되어 그 위치가 불안한 인조로 대응된다. 


드라마 속 <삼총사>는 정묘 호란이 이후의 조선을 배경으로 한다. 1627년 아직 청이라는 국호를 내세우지 않은 후금은 조선을 침공한다. 아직 임진왜란의 상처에서 채 극복하지 못한 조선은 후금의 침략에 당황했고, 역시나 임진왜란 때처럼 각지의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그나마 황해도 까지 내려온 후금에 대항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당시 후금은 이제 막 중국 대륙에서 그 세력을 키워가던 중으로, 중원의 명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친명 사대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조선을 본보기삼아 치려했던 것이었기에, 조선과 후금 사이에 쉽게 화의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왜에 의한 상흔이 채 마르기도 전에, 오랑캐가 낮잡아 보던 후금에 의해 국토를 다시 한번 유린당한 상처는 조선에 깊게 드리워졌다. 드라마<삼총사>에서 매일 밤, 후금의 장수 용골대에 의해 시달리는 인조의 심약한 정서는 그런 조선의 트라우마를 반영한다. 하지만 정묘호란 이후, 여전히 왕권을 강화하지 못한 채 신하들의 눈치만 살피는 인조와 달리, 후금은 명을 밀어내고 중국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고 조선에게 형제의 나라가 아닌, 중국 대륙의 패자로서 군신 관계를 요구한다. 그리고, 드라마 속 김자점 등 시류에 민감한 무리들은, 벌써 그런 청의 강력한 세력을 감지하고, 청과 은밀하게 손을 잡을 것을 시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마치 소설 속 리슐리외 추기경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국과의 전쟁조차도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세자를 다치게 한 적을 뒤쫓다 사신으로 온 용골대 무리에게 쫓기게 된 박달향에게 최명길은 말한다. 하필 입신양명의 꿈을 안고 무과에 급제한 박달향이 맞닦뜨린 조선이, 조만간 전쟁을 다시 한번 치르게 될 지도 모를 풍전등화의 상황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런 최명길의 안타까운 정의에 대해, 이제 막 벼슬길에 들어선 박달향이 어떤 입장인가, 혹은 어떤 생각인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처음부터 세자 무리에 휩쓸려 불의를 제압했던 그 활약처럼, 소설 속 달타냥처럼 그저 의협심이 강한 인물 정도로 그려질 뿐이다. 아니, 아직 그를 휘말아 감싼 정치적 격변에 어리둥절해 있을 뿐이라고나 할까.

(사진; BNT뉴스)

오히려, 드라마 <삼총사>에서, 극을 이끌어 가고 있는 주된 캐릭터는 소현 세자이다. 그의 말처럼 애초에 세자로 태어나지 않아, 궁밖이 더 편한 그는 그의 익위사들과 함께 밤이슬을 맞으며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소현 세자와 그의 익위사 두 인물 들 역시, 이제는 강대해진 청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김자점등의 권신들의 전횡에 대해 왕권을 지키고자 하는 의로운 인물로 그려질 뿐이다. 

이제 3회를 맞이한 드라마 <삼총사>는 소설 속 17세기의 불안정한 왕권으로 인해 내분과 외환이 분분했던 프랑스 정가를 절묘하게, 허약한 왕권, 외침의 위협이 극대화 되어가는 17세기의 혼란기 조선으로 등치시킨다. 하지만, 등치의 절묘함을 넘어선, 극적 긴장감이 회를 거듭할 수록 배가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주 1회 방영의 모험을 하며,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사극을 지향코자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 1회의 시청자들을 만족시키기에는 한 회 분량의 내용이 흡족치 못하다. 만약 내일 또 방영되는  주2회라 해도, 조금은 처지는 템포의 극 진행을 보여주고 있다. 미령의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와, 용골대와 얽힌 사연은 궁금하지만, 이미 2회에서 그에 대한 궁금증을 충분히 시청자들에게 뿌려놓은 상황에서, 3회는, 다시 한 주를 기다려야 하는 인내심을 요구하는 회차였다. 제작진은 3부작에 이르는 시리즈라는 방대한 기획 하에 매주 방영을 하겠지만, 시청자의 조바심은 과연, 그걸 감내할 수 있을지, 갸웃해진다. 

아마도 그것은,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진정한 주인공인 소현세자임에도, 삼총사라는 고전의 틀을 빌려와서, 박달향이라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 설정됨으로 인한, 자중지난같아 보인다. 더구나, 많은 제작비를 고려한 듯한, 박달향의 급제례 같은 건, 주 2회 방영시에나 용인되는 애교가 아닐까 싶다. 주1회의 애청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소설 <삼총사>의 형식적 캐릭터 배분은 조금 과감하게 정리할 필요를 있을 듯하다. 이미, 시대적 배경의 절묘함만으로도, 드라마 <삼총사>의 터전은 풍성하다. 


by meditator 2014. 9. 1. 06:56

청춘(靑春), 수필가 민태원 선생은 그의 작품 <청춘 예찬>을 통해 말한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라고, 청춘의 피는 끓고, 그 피는 거선의 기관과 같은 힘을 가지고, 인류는 그것을 동력으로 삼아 역사를 꾸려왔다고. 

하지만, 막상 그 청춘이란 이름이 붙여진 세대들이, 청춘이란 말을 만끽한 적이 있을까? 오히려, 그 뜨거운 피에 짖눌려 허덕이기 십상이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청춘이란 말은, 그 시절을 지나쳐 회고하는 자에게,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단어이기가 십상이다. 
그렇게, 이제는 청춘이라는 말을 회고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더 어울릴, 흰 수염이 희끗희끗하게나는 나이의 윤상, 유희열, 이적이 <꽃보다 청춘>의 주인공이라고 했을 때, 고개가 갸웃해졌다. 그들이 흘러간 한때 '청춘의 상징'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마흔을 훌쩍 넘긴 그들이, 꽃보다 청춘이라고?

하지만 , 9부작을 마친 <꽃보다 청춘>을 보고 난 후, 이제는 기꺼이 그들에게 '청춘'이란 이름을 부여하고 싶다. 그들은, 여전히 청춘이다. 여전히 꿈을 꾸고, 젊어 꾸었던 꿈을 되찾고, 그리고 다시 꿈꾸기를 마다하지 않으니까. 
처음 마추픽추로 여행을 떠난다 할 때, 유희열은 말한다. 젊어 한 때, 자신의 꿈이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다 보는 것이었다고. 그리고 말을 잇는다. 그런 것이 자신의 꿈이었다는 것조차 잊고 살아왔었다고. 그리고, 김치찌개를 먹다 얼떨결에 끌려온 페루행을 통해, 자신이 그런 꿈을 꾸었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었다고. 
마추픽추를 꿈꾸었던 젊은 시절의 꿈을 상기한 것만이 아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이제는 자기 자신이 예전만 못하다는 걸 슬금슬금 실감하게 되면서, 자신감이 조금씩 떨어져 가던 시기, 오랜 벗들과 함께 힘들게 마친 여정을 뒤로 하고, 유희열은 이 경험을 지렛대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 경험은 무엇이었을까? 안개에 휩싸였던 마추픽추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자, 유희열은 눈물을 흘린다. 그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든 건, 바로 시간이었다. 처음 윤상과 이적을 만나던 그 시간으로부터, 이제는 음악보다는 중년의 가장인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더 익숙해진 지금까지의 시간이 안타까워 흘리는 눈물이었다. 하지만, 유희열의 눈물을, 그저 가는 시간이 아쉬운 회한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 시간이 아까웠다는 건, 곧 그 시간이 그만큼 소중했었다는 확인의 눈물이었다. 나이들어가는 자, 그 누구라도 가는 세월을 안타까워 하지만, 그 안타까움의 실체를 가늠하지 못하기가 십상인 반면, 마추픽추 정상에 오른, 유희열은, 자신이 벗들과 함께 살아왔던 그 시간의 소중함을 만끽하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바로 그러기에, 여전히 유희열은 '청춘'이다. 그와 그의 벗들의 청춘은, '물방아같은 심장의 고동'이 느껴지는 그 청춘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삶의 긍정성을 믿고, 벗들과 다시 한번 살아보리라는 의지를 가진 한에서 다르지 않다. 술을 끊고, 이제는 약도 끊어보겠다 말하는 윤상의 다짐도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면, 100세 시대에, 딱 반에 못미치는 중년을 '청년'이라 규정한, 나영석 피디를 비롯한 제작진의 혜안은 거의 우리 시대의 새로운 '청춘'에 대한 정의이다. 

(사진; 데일리안)

할배들의 노년의 여행은 애틋했고, 누나들의 여행이 숨겨진 비경같았다면, 이번 <꽃보다 청춘>의 20년지기 친구들의 우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겨웠다. 스무 살 무렵 까마득한 선배와 후배로 연을 텄던 친구들은, 이제 이십 여년이 흘러, 스물 다섯 살 선배가 어려웠던 후배의 말 한 마디에 나스카를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타기를 마다하지 않는 관계로 역전되었다. 그때도 애같고, 지금도 여전히 애같다지만, 여행 과정에서 그 누구보다도 든든했던 막내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다. 90년대의 대명사였던 이들, 그리고 윤종신이 표현하듯, 여전히 우리 문화의 '섬'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그들은, <꽃보다 청춘>을 통해, 마치 나이 들어가는 자신을 보듯, 친근하게 다가왔다. '감성 변태'라던 유희열은, 그 어느 프로에서보다 진심어린 카리스마가 돋보였으며, 그의 학력과, 아름다운 노래를 넘어선, 이적의 넉넉함도 빛이 났다. 

그렇다면 여행 내내 '민폐'였던 윤상은 어땠을까? 아마도 윤상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면, 이적과 유희열이 그만큼 빛났을까? 반문해 보아야 한다. 한때 하늘같던 선배였던 그가, 후배들과 함께 나이들어 가며, 나이를 들먹이는 '꼰대'가 되지 않고, 그들 앞에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할 줄 알고, 기꺼이 도움을 받을 줄 알고, 그들과의 여행을 통해 새롭게 시작할 힘을 얻는 그 모습이, 사실은 <꽃보다 청춘>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의 윤상 또래의 남자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들여다 본다면, 여정 속의 윤상이 더 빛날 것이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 저녁마도 술잔을 기울이고, 자신의 약함을 큰소리로 숨기는 우리 사회 중년의 익숙한 중년 남자들의 모습들 속에서, 윤상의 나약함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런 소탈한 형인 윤상이기에, 그는, 동생들과의 여행을 통해, 낼 모레 오십이 나이에도,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 <꽃보다 청춘>이 남긴 치유는, 리더 유희열이나, 능력있는 참모 이적이 아니라, 민폐였던 윤상을 통해 얻어진다. 삶에서 무기력했던 그가, 어렵게 동생들과 함께 하는 여행을 하고자 용기를 내고,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술을 끊고, 이제 술 대신 의존했던 약조차 끊으려는 용기를 내는 모습은, 자신의 나약함을 남자라는 이름으로 숨긴 채 고통받는 우리 사회 남자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시간이다. 아직은 '청춘'이니, 어렵더라도 다시 시작해 보자고, 윤상이 말은 건넨다. 

그렇게 어렵게 여행을 시작하여, 이제는 좋은 아빠로 다시 시작해 보겠다는 윤상도, 함께 해왔던 시간이 아름다원 그 시간이 아쉬운 유희열도, 덤덤한 듯 하면서도 끝내 눈물을 숨길 수 없었던 마흔의 나이에 흰 수염이 나기 시작한 이적도, 여전히 그들이 다시 함께 살아갈 의지를 가진 한에서, '청춘'이다. 인류의 역사를 바꿀 청춘의 이상은, 사실 그리 거창하지 않다. 자신의 자리가 어디서든, 꿈꾸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 모두 청춘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그들을 보며, 가슴 뜨뜻한 용기를 얻는다면, 그 역시 '청춘'의 전염이다. 


by meditator 2014. 8. 30. 07:19

이솝 우화 중 멋부리다 된통 당한 까마귀 이야기가 있다. 

시커먼 자신의 털이 보기 흉하다고 생각했던 까마귀는 다른 아름다운 새들의 털을 하나씩 모아 자신을 치장하고 자신도 빛깔이 아름다운 새인양 자랑하고 다녔다. 하지만, 몸에 꽂은 깃털이 자신의 털인 줄 알던 다른 새들이 그의 몸에서 자신의 깃털을 찾아내고, 결국 까마귀는 초라한 검은 깃털의 자신의 몰골로 돌아와 몹시 창피를 겪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진화동물학으로 가면 좀 달라진다. 새들의 경우, 무리 중 몸이 아프거나, 털 빛깔이 좋지 않은 동료가 있으면, 그로 인해 자신들이 적들에게 노출될까 하는 두려움에, 동료들이 앞장 서서 아픈 새를 쪼아, 심지어는 죽이기도 하는 잔인한 습성이 있다고 한다. 
인간 사회를 빗대어 설명한 이솝 우화 속 까마귀가 인간의 허세를 상징하고 있는 건 당연하지만, 과연 실제 아픈 동료를 앞장서서 쪼아대는 새들의 습성은 인간과 다를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착해빠져서'라던가, '착하기만 하면 손해본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다. 그리고, 어느 틈에,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어떤 불이익을 당했을 때, 자연스레 반문하곤 한다. 내가 너무 착했나? 라고. 아니, 나만 너무 착했나? 라고. 하지만,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람들'은 '착하면 손해보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왔을까? 바로 그 '착한 사람들'의 상처를 <괜찮아 사랑이야>는 논한다. 

(사진; 스포츠 월드)

1회, 형 장재범(양익준 분)이 파티를 벌이던 수영장으로 찾아와 다짜고짜 장재열(조인성 분)을 찌를 때, 그걸 보고 울부짖던 소년 한강우(디오 분)의 정체가 12회에 이르러서야 분명해 졌다. 장재범이 줄곧 동생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던 그 사건의 실체가, 코난같은 정신과 의사 조동민의 조사로 밝혀졌다. 결국, 의붓 아버지를 죽인 건, 형도, 동생도 아니었고, 죽지 않고 정신을 차린 남편을 두려워했던 어머니였던 것이라는 걸. 그리고, 형의 등에 업혀가던 동생은, 어머니가 불을 지르던 장면을 목격했고, 해리성 기억상실로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형을 범인으로 지목하였으며, 하지만, 그렇게 형을 감옥으로 보냈다는 죄책감에서 결코 놓여날 수 없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열 여섯의 나이에 이미 '방어기제'라는 단어를 알 정도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조숙한 소년은, 하지만, 의붓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그리고 그 사건의 충격으로 진실을 망각한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그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서 썩어야 했던 형에게 한없이 미안함을 느끼는 마음 약한 동생이었다. 그런 그의 '착한' 마음은, 그의 냉철한 이성을 넘어, 그에게, 자신과 같은 한강우를 보살펴 주는 환상을 통해자신을 보호하고자 한다. 즉, 그의 정신적 '방어기제'는 그에게 정신증을 선사한 것이다. 

그가 지해수를 사랑하면 할 수록, 즉, 그가 행복을 느끼면 느낄 수록, 한상우가 그에게 나타나는 빈도수가 늘어나는 것은, 그의 무의식이, 그가 행복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결코 침대에서 잘 수 없듯이, 무의식의 장재열은, 자신의 행복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의식의 그는 여전히 죄책감에서 놓여나지 못한다. 

열 여섯의 나이에 불가항력적인 가족 범죄를 목격한 소년에게 도움의 손길은 없었다. 그런 소년의 안타까움은 훗날 어른이 된 소년에게 나타난 한강우를 보살피는 것으로, 자신의 안타까움을 역설적으로 표명한다. 대신 그는 어머니의 죄를 형게게 넘기고, 형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넘기는 것으로 그 '일'을 해결하려 하지만, 여전히 '착한' 그에게 그것은 성에 차지 않는다. 
투렛 증후군의 박수광(이광수 분)도 마찬가지다. 그가 일하는 까페를 찾아온 아버지, 그를 여전히 가치없는 존재로 여기는 아버지에게, 수광은 말한다. 어릴 적 자신이 투렛 증후군을 보였을 때, 아버지가 자신을 보듬어 주었더라면, 자신의 병이 이토록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투렛 증후군을 보이는 그를 소녀(이성경 분)가 안아주자, 조동민 말처럼 오래된 감기같은 그의 증상이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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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스타 뉴스)

결국 12회에 이른 <괜찮아 사랑이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이제 만연하고 있는 각종 정신증의 증상이, 상당수가, 그들이 '착해서', 어찌하지 못해, 드러나는 '방어기제'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착해서 당하고, 착해서 아프다 말하지 못하던 그들이, 보이는, 최후의 자기 표현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 사회가, '착하면 안된다'라고 몇 십년 동안, 다짐하고, 윽박지르던 것들이, 오늘에 이르러 사회적 증후군처런, 정신병증의 범람으로 귀결되게 되었다는 것을, 12회에 이른 드라마는 말한다. 그리고 '오래된 감기'같은 수광의 투렛 증후군이,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소녀의 입맞춤으로 완화되듯이,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장재열은 왜 자신과 결혼하고 싶어하느냐는 지해수의 질문에 답한다. 자신의 어릴 적 상처를 알고, 그에 더해, 여전히 자신에게 짐과 같은 어머니와 형의 상황을 알고도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지해수같은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없어서 라고. 한강우의 잦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장재열은, 이해받고 싶고, 자신의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받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는 말한다. 상처입은 사람들의 고통을 들여다 보고 이해하자고. 착해서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착해도 이해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게 아니냐고, 나즉히 읊조린다. 


by meditator 2014. 8. 29. 06:22

'진짜가 나타났다!'

<달콤한 나의 도시>에 어울리는 한 마디라면, 이게 가장 적당하지 않을까? 연예인들의 뉴욕 체험기를 장황하게 다루었지만 세간의 관심을 얻지 못했던 수요일 밤 11시 예능의 자리에, 진짜 일반인들의 삶이 등장했다. 이름하여, <달콤한 나의 도시>, 2006년 발행되어,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정이현씨의 소설의 제목을 고스란히 옮겨왔다. 제목만이 아니다. 도시에 사는 미혼 여성의 일과 사랑을 다루었던 소설의 내용이 고스란히 예능의 한 장르가 되어 등장한 것 역시 다르지 않다. 소설에서도 그랬다. 달콤하다고 했지만, 사실은 전혀 달콤하지 않았던, 순도 100%의 다크 초콜릿처럼 쌉싸름하기 이를데 없던 도시 여성의 삶처럼, 첫 방송을 선보인, 예능 <달콤한 나의 도시> 역시 달콤하기 보다는 역시나 쌉싸름하다. 도시에서의 그녀들의 삶은 녹록치 않다. 


방송이 시작되자 마자, 매우 매운 것을 먹고 씩씩거리거나, 눈물이 쏙 빠지도록 후배를 야단치거나, 남자 친구에게 벌컥 화를 내는 모습으로 네 명의 출연진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루 고객 200명을 거느리는 이제는 중진급에 속하는 미용사 최송이, 스포츠 아나운서의 꿈은 접었지만, 여전히 인터넷에서 미모를 뽐내며 영어 강의를 하는 최정인, 번듯한 직장을 다니며 레지던츠 4년차의 남자와의 결혼을 앞둔 임현성, 항공대 출신 최초, 로스툴 출신 최초 라는 최초의 직함을 두 개나 단 3년차 변호사 오수진, 연예인이라 해도 믿을 만한 아름다운 미모에, 내로라 하는 직업을 가진 그녀들, 하지만, 프로그램은 그런 그녀들의 화려한 외면에 숨겨진 고충을 토로하며 새로운 프로그램의 성격을 드러낸다. 잘 나가는 미용사이지만, 여전히 고객의 관리와 성과가 그녀를 짖누르는 최송이,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변호사이지만, 다짜고짜 자신과의 연락을 두절한 전 남친과의 아픈 사연을 가진 오수진, 그리고 600일이나 사귄 남친이 있지만, 그에게선 결혼하자는 말을 들을 수 없어 답답한 최정인까지 다짜고짜 화를 내고, 매운 걸로 풀어야 하는 그녀들의 속사정은 복잡하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인터넷 강의라는 특수한 환경이,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미모의 최정인에게, '돼지'라던가, '살찌는 dna'라는 수모를 겪게 만들고,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을 강요한다. 3년차의 변호사인 오수진은 선배와 폭탄주를 곁들인 회식을 하고도 자기 뺨을 치며 사무실로 들어와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 하루 열 다섯 시간의 고된 업무에 시달리게 한다. 대학 1학년 때 친구로 만나,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된 임현성의 커플은, 연인이라기엔, 차라리 오래된 부부처럼 친근해도 너무 친근하다. 하지만, 친근한 건, 친근한 거고,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는, 뭐 하나 녹록한 것이 없다. 
아마도 <달콤한 나의 도시>가 가진 가장 최고의 장점은, 바로 2014년 현재 대한민국의 도시를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가장 '진짜'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일 것이다. 연예인들이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며 어디가서 살아보고, 어떤 직업을 체험하는 '가짜' 리얼리티가 아니라, 말 그대로 '리얼리티'로서의 대한민국 여성들을 사로잡고 있는 일과 사랑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진; nsp 통신)

물론 여전히 그것이 정말 진짜냐고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다큐'의 연출성 여부가 논란이 되는 세상에, 예능으로서 일반인 리얼리티의 연출성의 한계 역시, 한 때 수요일 시간대의 영광을 누렸던 <짝>처럼, <달콤한 나의 도시>가 가진 태생적 위험 요소이다. <짝>이 일반인 리얼리티의 요리 여부에 따라 영광과 몰락을 누린 것처럼, <달콤한 나의 도시> 역시 연출의 관점과 욕심에 따라, 진솔한 젊은이들의 속내를 다룬 프로그램을 기억되거나, 연예인처럼 가쉽에 시달리는 일반인의 흥망성쇠로 마무리될 수도 있다. 첫 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반인의 기준보다는, 연예인에 더 어울릴 듯한, 예전 <짝>으로 치자면 모든 남성들이 그녀 앞에 줄을 설 것같은 미모의 여성들이 동시대의 여성 표준처럼 등장한 그것 자체가 문제 발생의 소지가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창 리모컨을 쥔 여성들의 입맛에 따라,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리얼리티 예능이, 이제 여자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해보겠다는 취지 자체는 반길만 하다. 첫 회에서 보여지듯, 그저 그녀들의 일상임에도 골라먹는 재미가 있듯이, 다종다양한 동시대 여성들의 고민을 담는다. 로맨틱 코미디의 어느 한 장면에선가 만나본 듯한 이야기들임에도, 그들이 일반인인 한에서, <달콤한 나의 도시>가 풀어낸 이야기는 진솔하고 신선해 보인다. 그녀들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by meditator 2014. 8. 28. 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