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은 예년 겨울과 다르게 유난히 춥다. 그리고 눈도 많고. 날이 추워지면, 마음도 추워지고, 그래서일까? 올 겨울 뜨겁게, 혹은 잔잔하게 반응을 보이는 '연인'들의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중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건, 바로 주말 드라마 <황금빛 내인생>이다. 주말 드라마의 아성 kbs2의 토일 8시 자리야 높은 시청률이 따놓은 당상이지만, <황금빛 내인생>은 40%를 거뜬히 넘어선 소현경 작가의 전작 <내딸 서영이>의 시청률 기록과의 경쟁 이상,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전 세대에 걸친 뜨거운 반응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반응의 중심에 이른바 '도지 커플', 최도경(박시후 분)-서지안(신혜선 분) 두 주인공이 있다. 



황금 수저를 포기한 황태자의 사과 
극 초반 어려운 가정 형편에 대기업의 인턴 사원으로 갖은 수모를 겪던 서지안이 어머니의 한 순간 거짓말로 그룹 해성의 잃어버린 딸이 되어 재벌가의 신데렐라가 되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신분 상승의 서사를 다루었다. 짧고 고단했던 서지안의 빛나는 순간은 그 이후 참혹한 현실과 함께 추락해 버린다. 그러나 사고 차량 주인과 가해 차량 운전사로, 이어서 싸가지 갑과 을, 그리고 오빠와 동생으로 악연인지 운명인지를 이어가던 해성 그룹의 외아들 최도경과 서지안은 그 과정을 통해 '사랑'에 눈뜨게 되지만, '부'가 곧 신분인 세상을 절감한 서지안은 굳게 마음을 걸어 잠근다. 

그리고 이제 중반을 넘어선 <황금빛 내 인생>은 황금빛 수저를 내팽개친 채, 사랑을 찾아, 그 사랑의 용기로 자신을 찾아나선 최도경의 역 계급 경험이 극의 중심을 이룬다. 서지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 최도경, 그리고 서지안에 대한 자신의 사랑, 그 중심에 오로지 서지안만이 재벌 그룹의 후계자로 길들여져야 하는 자신의 수동적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깨달은 최도경은 사랑을 찾기 위해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그의 '독립'을 일회적 반항이라 생각한 그룹의 창시자 할아버지는 그를 빈털털이 신세로 거리로 내쫓고 마는데, 그런 할아버지의 결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도경은 '알바'를 전전하며 '쉐어 하우스'에 거쳐를 마련하고 '독립'에의 의지를 불태운다. 

34회 마지막 장면, 밤낮으로 알바를 전저하던 최도경, 알고보니 그가 알바를 했던 이유가 바로 크리스마스 당일이 생일이었던 서지안의 생일 선물을 마련하기 위했던 것. 꾸벅꾸벅 졸아가며 미역국을 끓여 생일 상을 차리고, 포장도 없이 다친 손으로 움켜 쥔 목걸이에 결국 서지안은 마음을 열고만다. 하지만, 눈물겨운 생일 상과 선물 때문만이었을까? 그건 그간 최도경이 꾸준하게 서지안을 향해 보인 성의있는 사랑의 '대미'를 장식한 것일 뿐이다. 오히려 최도경은 서지안을 찾아나선 이래, 서지안을 만날 때마다 꾸준하게 '사과'를 해왔다. 

집에서 쫓겨나던 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최도경을 찾았던 서지안, 그런 서지안을 최도경은 냉정하게 잘랐다. 혹시나 서지안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그리고 자신에게 향하는 서지안의 마음을. 그러나, 그런 최도경의 차가운 태도로 인해 서지안은 홀로 집으로 들어가 거리로 내쫓겼다. 그 사실이 두고두고 마음이 아팠던 최도경은 서지안을 만날 때마다 사과를 한다. 심지어, 서지안을 찾아헤맨 아버지에 대한 선의로 전했던 소식에 서지안이 폭풍같은 분노를 퍼부으며 최도경의 알량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비아냥거릴 때조차 최도경은 그 모든 걸 자신으로 인한 서지안의 상처로 감수한다. 가진 자로써 자신의 영역이 흐트러질까 걱정했던 노파심, 재벌 후계자로서 자신의 지위라 흔들릴까 두려웠던 그 마음을 서지안의 분노를 통해 반성하며 최도경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한다. '사랑' 이란 이름의 계급적 반성이자, 후회이고, 그에 대한 진솔한 사과, 그것이 다른 계급의 처지를 몸서리치도록 절감한 서지안을 봄눈 녹듯 녹여간 최도경의 '사랑'이다. 

최도경과 서지안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의 두 주인공이다. 재벌가의 황태자와 월세를 전전하는 집안의 비정규직조차 버거운 딸, 하지만 이 전형적인 서사를 소현경 작가는 2017년의 방식을 풀어간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삶의 모토로 삼았던 황태자 최도경은 자신의 그 신념이 사랑 앞에서 얼마나 자기 안위적인 계산이었던가를 통렬하게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유산으로서의 계급'대신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의 선택과, 그 온전한 최도경으로의 주체로서의 사랑으로 귀결된다.



비서를 존중한 보스의 사과 
다른 백마 탄 왕자도 있다. 꼴찌에서 시작하여 이제 당당하게 월화 드라마 1위를 거머쥔 <저글러스>의 남치원(최다니엘 분)이 그 주인공이다. 부사장의 특채로 yb 영상 사업팀의 상무로 등장한 그, 그리고 까칠한 그를 위해 공채 입사 5년, 그러나 전임 보스의 배신으로 기피 직원에서 겨우 자리를 얻은 좌윤이(백진희 분)가 그 사랑의 상대다. 

보스와 비서, 이 엄연한 직장 내의 서열이 분명한 관계로 만난 이들은, 하지만 뜻밖에도 좌윤이의 집 2층에 남치원이 세들어 오면서 직장 밖에서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뒤바뀐 관계가 되어 드라마의 역학 관계를 튼다. 독불장군 모든 것을 자신이 혼자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남치원은 당연히 '비서'의 존재가 필요없다 생각하고, 그래서 좌윤이의 존재를 무시했지만,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가 본의아니게 그로 하여금 '비서'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하지만 사사건건 수동적 비서로서의 좌윤이를 미더워하지 않았던 남치원은 보스를 위해 충정을 다하던 '본투비 비서'로서 사명감을 지닌 좌윤이를 '여성으로서 곁을 허용한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등 색안경을 끼고 본다. 그러나 제 아무리 비서로서의 존재를 무쓸모라 여겨도 비서라는 직업을 '하인' 다루듯하든 다른 '전통적 보스'와 달리 좌윤이를 존중하던 그는, 집주인의 배려, 그리고 비서로서의 헌신성을 차츰차츰 알아가며 자신이 끼고 있던 색안경을 벗어버리게 된되고, 비서라는 직업의 정체성을 혼돈했던 자기 자신을 진솔하게 사과한다. 그리고 나아가 전직 보스에 대한 수모를 '보스 어워드'를 통해 갚으려 했던 좌윤이의 심중을 헤아려 함께 보스 어워드에 출전하기 까지 한다. 

<황금빛 내 인생>과 <저글러스>를 통해 등장한 남녀 관계는 '과도적'이다. 여전히 '사회적 계급'의 측면에서는 '백마탄 왕자'와 같은 존재와의 사랑이라는 '로망'을 구현하는 한편, 그 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2017년에 대두된 '여성 존중'의 담론에 충실하다. 남자들은 여성들의 존재와 그들의 직업, 그리고 삶의 방식을 존중하며, 때로는 자신이 곡해했던 지점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한다. 그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황금빛 내 인생>의 최도경은 자신의 동생이나 해성 그룹의 딸인 서지안 이전에 사원 서지안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녀가 디자인한 도안을 공모에 내는가 하면, 해성 그룹에서 쫓겨난 그녀의 경력 단절을 안타까워 직업을 알아봐준다. <저글러스>의 남치원이 비서로서의 좌윤이를 존중하고, 다른 상사들 앞에서, 혹은 다른 직원들 앞에서 수모를 겪는 좌윤이의 손을 잡아 보호하듯 에스코트하며, '자신의 비서'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는 것도 같은 방식이다. 때로는 그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기심에 불온한 행동을 하거나, 남성적 편견에 불쾌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그들 '왕자'들은 곧 반성하고, 기꺼이 '사과'한다. 거기엔 내가 남잔데, 혹은 내가 '상사'인데 하는 치졸한 자존심 따위는 없다. 

이런 일련의 남녀 관계는 이들 드라마에 앞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화제를 불러 모았던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남세희(이민기 분)- 윤지호(정소민 분)의 관계 설정과 일련의 맥을 같이 한다. 2017년에 가장 어울리는 백마 탄 왕자였던 집주인 남세희, 그는 오갈데 없는 88만원 세대 윤지호를 자신의 집에 세입자로 거둔다. 그리고 젊은 남녀에게 편견의 통과 의례를 요구하는 세상을 편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위장 결혼'에 돌입한 이 집주인 세입자 커플. 그 결혼의 과정에서 남세희가 윤지호 모친에게 약속한 건 그 무엇도 아닌 윤지호의 꿈에 방해가 되지 않는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남세희의 약속은 윤지호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계약 결혼을 파기하기를 요구할 때 두말하지 않고 그 파기에 대한 동의로 이어졌고, 결국 꿈을 이룬 윤지호와 그런 그녀를 기꺼이 서포트하는 남세희의 진정한 결혼으로 드라마는 '로맨틱'하게 마무리되었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커플, 우수지(이솜 분)-마상구(박병은 분) 역시 여성의 꿈에 기꺼이 조력하는 파트너쉽이 사랑의 요건이다. 

이렇게 2017년 겨울을 달군 이들 세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황금빛 내 인생>, <저글러스>는 2017년의 사랑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 사랑 이야기 속 남성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그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 캐릭터들이지만, 그들이 사랑을 구현하는 방식은 달라졌다. 더 이상 '남자'라서, 혹은 '가져서', 그게 매력인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남자'라서 몰라서, '가진 자'라서 무지해서 몰랐다 사과하고, 여성들의 입장에 서보고, 반성하고, 함께 하고자 노력하는 자만이 사랑을 쟁취한다. 그게 2017년 식 사랑이다. 


by meditator 2017. 12. 27. 14:04

2016년 주중 미니 시리즈 최고의 히트작은 두말할 나위없이 최고 시청률 38.8%를 달성한 <태양의 후예>이다. 그리고 불과 1년 이른바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수치상 성적은 초라하다. 그나마 '면피'를 한 것이 자신의 죄를 벗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검사의 이야기를 다룬 <피고인>의 28.8%정도이다. 그 뒤를 이어 kbs2의 <김과장>의 18.4%가 있다. 하지만, 이 두 드라마를 제외하고는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대부분이 10% 내외 혹은 10%에 못미치는 시청률 성적표를 받았다. 심지어, 공중파라는 말이 무색하게 <김과장>의 후속작으로 등장한 <맨홀; 이상한 나라의 필>은 1%대의 기록을 세웠고, 그 뒤를 mbc의 <로봇이 아니야>와 <20세기 소년소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역추격하는 이변을 기록했다. (닐슨 코리아 기준)


이렇게 공중파 미니 시리즈가 초라한 성적표를 받게된데에는 종편과 케이블 등으로 다각화된 채널 경쟁이 그 첫 번 째 원인으로 등장한다.  <아르곤>, <부암동복수자들>, <이번 생은 처음이라>, <슬기로운 감빵 생활> 등은 비록 다른 플랫폼으로 수치상으로 비교할 바가 못되지만, 그 화제성 면에서는 공중파 미니 시리즈를 제쳤다. 거기에, <나는 자연인이다>, <냉장고를 부탁해>, <뭉쳐야 뜬다> 등의 종편 예능 프로그램 역시 밤 10시에 미니 시리즈라는 '전통의 아성'을 깨뜨리는데 일조했다. 그렇게 주중 미니 시리즈가 위축되고 있는 사이, jtbc의 금토 드라마는 <힘센 여자 도봉순>에 이어, <품위있는 그녀>, <청춘시대2>를 성공시키며 금토 밤 11시대의 드라마를 안착시켰고, tvn 역시 공중파 보다 빠른 시간대인 9시 30분, 심지어 9시 10분에 주중 드라마를 편성함으로써 공격적인 태세를 구축했다. 거기에 <비밀의 숲> 등으로 화제를 일으켰던 토일 드라마를 가족 드라마로 개편하며 공중파 드라마에 대한 경쟁의 각을 가다듬었다. 그런 가운데 ocn은 독보적으로 <구해줘>, <보이스>, <터널> 등의 장르드라마로 자신만의 입지를 다졌다. 




'정의'의 시대, '정의'를 주역, 법조인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공중파라는 '고지'가 존재하는 않는 춘추전국의 시대가 된 2017년 드라마의 내용적 특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직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이 엿보이지 않던 2016년의 드라마들은 '기억'과 '국가의 존재'를 논했다. 가장 인기있는 사랑 이야기였던 <태양의 후예>조차 재난 현장 속에서 피어난 인간애와, 그곳에서 국가의 가치를 읊조렸다. 국가의 '부재'로 상처입은 사람들에 대한 인본주의적 도리와 원칙이 등장했으며, 잊지 말아야 기억과, 상흔을 드러내고자 저마다 애썼다. 그리고, 촛불이 광장을 메우고, 사람들의 힘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자, 드라마도 그런 시대에 부응하고자 했다. 2017년의 드라마 중 다수가 '정의'를 이루어 내기 위한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다루었고, 그 주인공으로 '정의'와 관련된 법조계나 언론계의 전문직들이 대두되었다. 

2017년의 법조계 인물들이 주인공이 된 작품의 첫 테이프를 끊은 건, 바로 죄인이 된 채 새해를 연 sbs의 <피고인>이다. 아내와 딸을 죽였다는 혐의로 감옥에 간 검사 박정우(지성 분), 심지어 그는 그날의 기억조차 불분명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상실된 기억을 이어가며 감옥에까지 이어진 악의 손길을 떨쳐내며, 재벌가의 차민호(엄기준 분)와 그를 둘러싼 정관계 커넥션을 대항하여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한국판 프리즌 브레이크라며 인기를 모았다. 그 뒤를 이어, 이보영이 형사에서 변호사 사무실 비서로 신출귀몰, 판사에서 변호사가 된 이동준 역의 이상윤과 함께, 법조계의 권력인 태백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 <파수꾼>에서 자신의 아이를 잃은 엄마 조수지 형사(이시영 분)는 자신의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검사가 된 장도한(김영광 분)과 손잡고 

<피고인>의 박정우도, <파수꾼>의 장도한 검사(김영광 분)나, 조수지 형사(이시영 분). 법조계로 부터 뻗어나간 구시대의 적폐를 들춰내기 위해 자신들을 던진다. 로맨스 드라마를 내걸었던 <수상한 파트너> 역시 결국 아버지의 죄라는 구원과 거기에 얽힌 검찰청장으로 대변되는 법조계의 커넥션 파헤치기로 귀결되었다. 신선한 여성 캐릭터로 화제를 모았던 <마녀의 법정> 역시 실종된 어머니를 둔 여성 검사 마이듬(정려원 분)의 종횡무진 활약은 결국 조갑수(전광렬 분)로 상징되는 구시대적 권력의 척결로 모아진다. 그 마지막 바턴을 이어받은 건, sbs의 <이판사판>으로 이번에는 오빠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법조인이 된 로스쿨 출신의 판사 이정주(박은빈 분)가 나선다. 

이렇게 공중파의 법조계 인물들은 검사, 혹은 판사 등 '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 '특권적' 성격을 마다하고, 직분의 본래적 의미에서의 활동을 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적 해원을 풀어가는 식이다. 즉, 그들의 개인적 원한의 근원은 대부분 유신 시대로 상징되는 고문 기술자, 시국 사건 조작 등을 통해 성공의 발판을 마련한 적폐의 인물과, 이제는 권력의 중심이 된 그를 중심으로 한 검경, 정관계의 카르텔이 존재한다. 이렇게 드라마는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의 권력의 실체를 정의내리고, 그 숱한 사람들을 짓밟고 탄생한 구 시대의 권력의 아성을 '희생자'의 가족들을 통해 통렬하게 고발하고 무너뜨리고자 한다. 



'피해자'에 의한 적폐 청산이란 공식은 바로 우리 사회에 지배적인 법조계 엘리트에 대한 선입견을 드라마가 내재화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럼에도 결국은 '법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정의 구현의 적임자가 바로 '법조계'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들 주인공들이 2017년을 채워간다. 하지만 이런 피해자에 의한 가해자에 대한 구원의 해결은 '즉자적'인 태세이기도 하다. 이런 방식의 서사를 넘어서, 과연 적폐 청산을 넘어, 새로운 시대의 '인간형'에 대한 화두를 다룬 드라마가 있다. 바로, 2017년 정의의 시대를 대표할 <비밀의 숲>이 그 주인공이다. 

공중파 드라마에서 주인공이었던 피해자의 직계 비속 역시 <비밀의 숲>에서 나온다. 바로 장관이었던 아버지가 하루 아침에 몰락한 영은수(신혜선 분)가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아버지의 죄를 밝히기 위해 검사가 되고 물불을 안가리고 뛰어다니던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주인공 롤 격인 이 인물을 13회에 가차없이 희생시켜 버린다. 대신, 그런 '원혼'의 피해자 대신 드라마를 채워가는 건, '직업적 사명감'을 가진 인물들이다. 뇌의 이상으로 수술을 해서 오로지 이성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는 주인공 황시목(조승우 분)을 주인공으로, '경찰 존심이 있지, 난 타협안해요'하는 무대포 형사 한여진(배두나 분)에, 처세술의 달인으로 재벌가의 사위까지 되었지만, 끝내 자신의 한 몸을 던져 법조계의 정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이창준(유제명 분)까지 그들의 실천, 그 동인이 되었던 건 오로지 직업적 사명감, 그 원칙 하나였다. 내 주변의 누가 당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사회가, 그리고 나의 일이 이러해야 한다는 원칙을 통해 일신의 안락과 나눠먹기 식, 우리가 남이가로 대변되는 구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청산을 설파하며 이 시대의 '정의'의 화두를 설득해 냈다. 



법조인만 있냐? 기자도 있고, 보험 조사원도 있다. 
하지만 검사, 판사 등 법조계 인사들만 활약한 건 아니다. 어벤져스 팀을 이뤄, 구악의 카르텔에 도전한 기자들도 있다. 대한일보 특종 보도팀 스플래쉬 팀의 이석민(유준상 분)과 한국판 타블로이드지 애국신문의 기레기 한무영(남궁민 분)이 그 주인공이다. 그들은 권소라 검사와 함께, 구태원(문성근 분)으로 상징되는 구태 언론과 그들에 의해 조작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뭉친다. 공중파에는 언론팀에 대응하는 건, 고 김주혁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억될 tvn의 <아르곤>이다. 손석희가 연상되는 이 시대의 목소리 김백진(김주혁 분)과 아르곤 팀이 '미드 타운 붕괴 사고'라는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기 까지의 고군분투를 자기 고백적으로 그려내며, 이 시대 언론의 사명을 드라마로 말한다. 감질나게 짧았던 8부작 아르곤 팀의 활약은 김백진의 추천으로 정규직이 된 이연화와 김백진, 그리고 아르곤 팀의 다음 탐사 보도를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더 이상 김백진 앵커의 활약을 볼 기회를 잃었다. 독특하게도 <매드독>에서는 보험회사 조사팀장이었던 최강우(유지태 분)와, 형이 대형 비행기 참사의 범인이 된 김민준(우도환 분)이 뭉친다. 그들의 상대는 돈을 위해 사람들이 탄 비행기를 참사로 이끈 보험회사와 비행사,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조력한 권력자들이다. 


이렇게 2017년의 드라마는 검사와, 판사, 변호사 등의 법조인, 기자들, 그리고 형사, 보험조사원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재난 사고로 상징되는 세월호 사건, 그리고 구 시대의 권력을 상징하는 정관계의 카르텔을 대항하여 싸우며 한 해를 채워갔다. 2016년 잊지 말자며, 국가란 무엇이냐며 묻던 그 '회의적 질문'은 보다 열정적이고 저돌적인 전투로 승화되었다. 

by meditator 2017. 12. 19. 20:59

후일담' 문학이란 장르가 있다. 한 세대 인물들이 공통으로 겪은 모종의 사회적 사건 등을 되새김하는 일종의 '반추' 장르이다. 아직도 종종 등장하는 '홀로코스트' 문학과 문화 콘텐츠가 그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최근으로는 2000년대 '운동권 후일담' 문학의 범람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리고 이제 또 우리는 '후일담'의 한 조류를 만나게 된다. 바로 '세월호' 이야기다. 


2014년 4월 16일로부터 몇 해가 흘렀다. 전국민이 촛불을 들고, 정권이 무너졌다. 그리고 드디어 물 속에 잠긴 세월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부는 지난 12일 내년 봄의 추가 수색 비용까지 지불하며 세월호 그 실체에 대한 조사를 계속할 의지를 보였다. 세월호 선체 영구 보존 논의까지 수면 위로 올라온 시점, 하지만 그런 정상적인 조사와 수사가 진행되는 만큼 대중들의 뇌리에서 세월호가 흐릿해져가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 그동안 '노란 리본'을 내걸고, '잊지말자'를 외치던 '문화'의 영역에선 무엇을 해야 할까? 



세월호 그 후 
그 첫 응답은 지난 12월 9일 jtbc <전체 관람가>에 등장한 독립영화계의 대표적 인물인 오멸 감독을 통해서 였다. 그의 작품 <파미르>를 통해서 돌아오지 않는 친구의 자전거를 타고 친구가 가고싶어 했던 파미르로 홀로 떠난 이제는 청년이 된 친구의 여정을 담았다. 세상은 무뎌지고 잊어가지만, 정작 그곳에 함께 있었던 당사자들, 부모들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시간들, 그 남은 이들의 '시간'에 대해 영화는 답한다. '간다고, 가지만 종종 오겠다고', 즉 '살아가겠지만 잊지 않겠노라'고 말한다. 이제서야 수면 위로 올라온 세월호처럼 아직은 2014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지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오멸 감독은 용감하게 소리내어 말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이도 있었다. 2015년 뜬금없이 홈쇼핑에서 귤과 함께 앨범을 판매하며 돌아온 루시드 폴의 정규 7집 속 노래들은 '세월호'의 아이들과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잠언'과도 같은 음악들이었다. 

친구들은 지금쯤/어디에 있을까/ 축 처진 어깨를 하고/교실에 있을까
따뜻한 집으로/ 나 대신 돌아가줘/ 돌아가는 길에/ 하늘만 한 번 봐줘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꽃들이 피던 날/ 난 지고 있었지만 
꽃은 지고 사라져도 /나는 아직 있어



재난 현장에 다시 선 주인공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10일 종영한 ocn 드라마 <블랙>의 이야기는 돌고 돌아 무진이라는 가상의 도시에 타임 마트라는 건물 붕괴 사고와 그 사고 현장의 아이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 미성년자 성접대를 받는 부도덕한 집권 세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상의 도시, 가상의 사건이지만 누구라도 이 드라마를 통해 '끝나지 않는 세월호'의 이야기를 그려내고자 하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또 한 편의 '재난' 드라마가 등장한다. 바로 11일 시작된 jtbc의 <그냥 사랑하는 사이>이다. 

드라마는 '스페이스 s몰'의 붕괴 사고로 시작된다. 동생 연수의 촬영 현장에 동생을 보살피기 위해 억지로 끌려갔다가 잠시 남자 친구와 만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문수(원진아 분), 동생은 그 사고로 죽고, 문수도 겨우 구조된 후 문수네 가정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고, 엄마는 동생을 잊지 않기 위해 술로 살며 동네에서 어거지로 분란을 일으키며 욕을 먹으며 산다.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의 접착제 노릇을 하며 하루 하루 자기 안의 자책과 슬픔을 꾹꾹 누르며 문수는 씩씩하게 살아간다. 

문수와 함께 건물 더미에 갇혔던 강두(이준호 분)의 처지는 '더 나빠질 게 없는' 처지이다.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사고와 함께 돌아가셨다. 3개월만에 깨어났지만 무능력한 엄마는 식당을 하다 날리고 덜컥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에 신용 불량자가 된 그는 나이트 클럽 해결사에 막노동으로 번 돈을 의대 다니는 여동생에게 보내며 진통제를 떨어넣으며 하루하루를 견딘다. 

붕괴 사고로 죽은 48명 외에 한 사람의 희생자가 더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잘못된 건물 설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거둔 설계사의 아들 서주원(이기우 분), 자신의 아버지를 믿었던 그는 건물 붕괴 사고가 아버지의 설계 잘못이 아니라 사업주 청유 건설의 잘못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건 잃어버린 사랑과 아버지의 오명 뿐이다. 

드라마는 이 세 명을 다시 현장에 불러 세운다. 청유 건설이 그 자리에 세우겠다는 '바이오 타운', 그 설계를 서주원은 기꺼이 맡았다. 그리고 그의 사무소에서 건축 모델러를 하던 문수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서주원의 말에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온다. 자신이 일하던 나이트 클럽 마담 빽으로 현장 야간 경비원으로 들어가 추모비를 부수며 그 사건을 잊어간느 세상에 울분을 토하던 강두 역시 제대로된 설계의 시공사의 입맛에 맞춰 바꿔 과거의 사건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서주원의 청을 받아들인다. 각자 자신이 짊어진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주인공들은 '과거'의 현장에서 상처를 마주하고,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뭉친다.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캔디같은 여주인공 문수 , 밑바닥을 전전하며 비극적 낭만주의의 전형같던 남자 주인공 강두, 그리고 엘리베이터조차 못타는 여주인공을 기꺼이 스타웃하고 그녀가 세상과 마주하도록 배려하는 전형적인 키다리 아저씨 서주원 등, 이 전형적인 삼각, 거기에 재벌가의 정유진까지 사각 관계는 '멜로 드라마'의 전형적 관계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스테이스 몰 붕괴라는 재난 사고의 '트라우마'를 얹으며 드라마는 현실에 발을 들이며, <눈길>로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는데 빛을 발한 유보라 작가는 '재난 후일담 장르'를 완성한다. 
by meditator 2017. 12. 13. 16:30

18부작이었던 <블랙>, 18회 드디어 4%의 고지를 넘기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4.181 % 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기준) 또한 거의 내내 동시간대 1위를 수성하며 화제성과 시청률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송승헌이라는 새로운 '인생' 캐릭터를 부여하며, 그간 오로지 잘 생긴 배우로만 '소비'되던 이 중견 배우의 지평을 열어보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성과를 차치하고 애초에 16부작에서 18부작으로 늘어났던 <블랙>의 완결성에 놓고서는 물음표를 제기할 수 밖에 없다. 444, 이름도 형체도 없이 오로지 번호로만 불리워지는 본투비 저승사자 블랙(송승헌 분)의 이승 세계 블로버스터급 모험담을 그린 이 드라마는, 그와 엮인 '죽음'을 보는 강하람(고아라 분)와의 에피소드를 통해 '시대성'을 담보하려 했지만 작가도 모르고, 그래서 시청자의 고개는 더욱 갸웃해질 수 밖에 없는 '과유불급'의 서사로 완성도에 오점을 남겼다. 




꼬리에 꼬리를 분 진범, 과유불급
장황했던 서사를 통해 결국 18회에야 드러나는 최종 보스 사고 당시 무진 시장 최근호가 드러냈다. 우병식- 오만호, 오만수 부자 - 김형석 의원 - 최근호로 이어진, 이 배후는 무진 타임 마트의 부실 공사 수주와 그 과정에서 미성년자 성접대, 더구나 붕괴 당일 최 시장의 성접대로 이어진 지배 엘리트의 부도덕 시스템을 밝히고자 한다. 

그런데, 여전히 오리무중인 세월호 당시 박 전 대통령의 행보를 연상시킨 이 최종 보스 최근호의 는 현직 대통령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시간에 쫓긴 드라마는 그 어마어마한 최종 보스의 존재감을 드러낼 시간이 없었다. 아니 설사 그가 대통령이었다 해도, 이미 우병식으로부터 이어진 꼬리에 꼬리를 문 보스 밝히기의 행렬은 새 보스가 드러난다 해도 시청자를 깜짝쇼에 빠뜨릴 동력을 잃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애초에 이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끈 계기는 송승헌이 분한 블랙, 저승사자 444의 캐릭터 때문이었다. 인간의 영혼을 수거하는, 그래서 늘 '인간 따위'라며 인간을 낮잡아 보던 이 오만한 본투비 저승 사자 블랙이 자신의 띨띨한 파트너 재수똥(제수동, 박두식 분)을 놓치면서 인간 세상에 내려오면서 벌이는 해프닝이 신선한 소재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 신선한 캐릭터 블랙, 하지만 그가 인간 세상에 오면서 잠시 머물기 위해 빌린 한무강이, 알고 보니 그의 동생이자, 알고보니 자신의 심장이 이식된 존재였다는 딜레마가 오만한 저승사자를 '운명적 사건'에 빠뜨린다. 거기에 어린 시절부터 준이 오빠를 스토커처럼 좋아했던 소녀 하람과 김선영이었던 자신을 숨긴채 살아가는 윤수완(이엘 분)이 엮여지게 되고. 

그런데 이 엮여지는 세 사람은 각자 자신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블랙은 자신의 심장과 자신의 몸이 서로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블랙의 숨은 사연, 그리고 어릴 적 성폭행을 숨긴 채 한무강의 약혼녀가 된 윤수완, 그리고 불의에 죽은 아버지의 사연을 품은 강하람까지. 그리고 이들의 사연은 20년전 무진에서 벌어진 타임 마트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데. 

이렇게 인물 소개에서도 벌써 사연이 구구절절한 <블랙>이 풀어지기 시작한 것은 무진 폐공장에서 벌어진 클라라와 김선영의 대치, 그리고 백골 시체로 발견된 클라라의 발견에서 부터이다. 그런데 회차를 거듭하며, 과거의 사건이 벌어지며, 이 현장에 있었던 인물이 늘어난다. 클라라와 김선영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 자리에 김준(한무찬)과 동생 한무강이 있었고, 거기에 다시 왕영춘(우현 분)이 등장하고, 그를 쫓는 강하람의 아버지 강수혁과 다시 스토리가 전개되며 김형석이 등장한다. 그리고 쫓기다 사고를 당한 김준의 의붓 어머니이자 한무강의 엄마까지 등장하게 되고. 거기에 알고보니 그 자리에 강하람까지 있었다는데. 

결국 이 세 사람이 엮이게 된 이 결정적 사건이 회를 거듭하며 등장 인물들이 늘어난다. 시청자들이 예상한 프레임을 벗어나, 회를 거듭하면서 우병식의 배후로 뜬금없이 김형석이 등장하고, 최근호가 등장하듯, 사건 현장의 인물들이 늘어난다. 과연 이게 반전일까? 우병식인줄 알았더니 오만호 부자가 있었다까지는 시청자들의 예상할 수 있는 범주이다. 스릴러의 묘미라면, 시청자들이 한껏 두뇌를 부풀려 상상할 수 있는 그 범주 내에서 사건이 해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정해진 플레이어 외의 인물이 링 안으로 들어오면서 게임의 주도권을 잡아버린다면, 과연 시청자들의 기분은 어떨까? 아마도 최란 작가는 쓰면서 '이건 몰랐지?'라면 통쾌할 순간, 시청자들은 '이게 뭐지?'라며 '멘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최란 작가의 자충수, 시대의 비극을 소재주의로 만들다. 
<블랙>이 그랬다. 블랙의 몸에 들어간 한무강의 사연, 그리고 그와 엮어진 김선영이자 윤수완의 비극적 사건, 그리고 강하람의 고통스런 과거를 무진 타임 마트라는 시대적 사건과 엮어갈 때까지만 해도 이 드라마는 흥미진진했다. 최란 작가의 큰 그림에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그 흥미진진함이, 알고보니 진범은 따로 있었대라는 식이 되가면서 회를 거듭해가며 주인공을 시련에 빠뜨리며 드라마의 동인은 주저앉아 버린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시대적 비극은 회를 거듭하며 무한 루프처럼 되풀이 되는 진범은 따로 있지의 게임 플레이에 '소재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무엇보다, 인간의 몸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인간 따위'라고 본투비 저승사자의 마인드를 놓지 못하는 블랙이 어서 빨리 자신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죽음을 보는 강하람과 엮이며 벌이는 에피소드들이, 어느 순간엔가 두 사람의 사연 덕분에 짖눌려진다. 저승사자는 매번 킬러에게 밀리고,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며 인간의 운명에 개입한 강하람은 사고를 일으키기만 하는 '민폐'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거대한 배후 세력의 압도적인 존재를 밝히기 위해, 사건에 뛰어든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재물이 되거나, 희생되고 만다. 그나마 저승사자라서, 죽음을 봐서 주인공 두 사람만이 목숨을 건진 수준이다. 




그 과정에서 저승 사자의 룰과, 죽음을 보는 하람의 능력의 설정들은 회를 거듭할 수록 무색해 진다. 죽은 자를 보는 하람의 설정은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 되어갔고, 무로 돌아갔다는 블랙이 죽은 강하람의 영혼을 마중 나오는 엔딩에 이르면 그저 아름다운 러브 라인을 위한 애교라 눈을 질끈 감게 된다. 

그런데 익숙하다. 안타깝게도 최란 작가의 이 방식이 낯설지가 않다. 2014년 sbs 월화 드라마였던 <신의 선물- 14일(이하 신의 선물)> 의 궤적이 비슷했었다. 조승우의 첫 드라마 출연작이었던 <신의 선물>은 14일의 타임 슬립이라는 신선한 소재로 주목받았다. 거기에 흥신소를 운영하며 '법과 정의와는 담쌓은 초절정 양아치' 기동찬 캐릭터는 블랙 444 못지 않은 시청자들의 환호를 받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강하람처럼 잃은 딸을 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모정 김수현(이보영 분)이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민폐 여주가 되었고, <블랙>처럼 뒤얽히고 얽혀 여주인공에게 총을 들게 만들듯이, 돌고 돌아 사회악도 밝히지만, 주인공도 가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묘한 서사로 완성도의 아쉬움을 남긴 드라마로 회자되고 말았다.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과, 뜻밖의 가해자인 설정은 주인공을 극적으로 몰고간다는 점에서 맞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반전에 반전을 꾀하다 자충수가 되고만 <신의 선물>의 비극을 안타깝게도 <블랙>이 다시 되풀이 하고 만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의 선물>과 <블랙>의 설정은 빛난다. '소재주의'가 돼버렸지만, 개인의 비극과 시대적 아픔을 엮어내려는 시도는 묻히기에 안타깝다. 그리고 조승우에 이어, 송승헌의 캐릭터 역시 배우들에겐 '인생 캐릭터'이다. 어쩌면, 이런 장황한 반전의 자충수는 16부작, 혹은 18부작이라는 드라마 경영학의 폐해일 수도. 차라리 8부작의 드라마도 시도되고 있는 이즈음, 최란 작가의 다음 작품은 깔끔하고 선명한 플롯이 돋보일 수 있게 욕심을 좀 버린 회차로 돌아오길. 


by meditator 2017. 12. 11. 16:45

드라마 왕국 MBC를 만든 저력이 <MBC베스트 셀러 극장>이었으며, KBS 드라마의 안정적이고도 예술적인 연출력이 <드라마 스페셜>이 원천이라는 것에 이견이 없으면서도, 상업적인 이득이 보장되지 않는 단막극의 입지는 사라져갔다. 그나마 생존해있던 KBS조차 시즌제로 돌려 다음을 기약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도 tvn이 앞섰다. CJE&M 오펜 드라마 스토리텔러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단막극 공모전을 개최했고 그 중 뽑힌 20 작품 중 10 작품을 <드라마 스테이지>의 이름으로 2일부터 토요일 밤 12시에 방영하기 시작했다. 


tvn이 해냈다. 신인 작가의 등용문
올해 초 공모전에는 3000 여편의 작품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 중 20편, 그리고 다시 10편은 말 그대로 '바늘 구멍을 통과한 낙타'이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신선하고 새로운 작품을 선보인 작품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신인'들이었듯이, 신인 작가들은 이제 노쇄해가는 드라마 시장의 동앗줄과도 같은 해법이다. 하지만, tvn스테이지의 첫 작품 박대리의 은밀한 사생활의 최지훈 작가 말처럼, '미니'에 바로 입봉할 수 있는 기회가 '신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신인 작가들에게 '디딤돌'이 바로 단막극, 그러기에 단막극은 그저 한 프로그램의 편성을 넘어 '유일하고도 경이로운' 신인 작가들의 등용문이 되는 것이다. 



2017 KBS의 드라마 스페셜이 생존의 고심 끝에 '멜로'라는 가장 접근성이 쉬운 주제를 가지고 찾아왔다면, 새로인 선보이는 tvn이 내세운 주제는 '당대성'이다. '우리들'이라는 주제를 내세워 2017년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그 첫 작품은 앞서 언급된 <박대리의 은밀한 사생활>이다. 신예 최지훈 작가와 200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웹드라마를 연출해온 윤성호 감독의 만남이다. 

'우리들'이라는 주제답게, <박대리의 은밀한 사생활>은 imf 직후인 2004년 어렵사리 들어간 대기업에서 이제 막 대리를 단 박종혁(이주승 분)의 꿈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집안 경제를 책임지는 청년으로 대기업을 다녀야 하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은밀한 사생활'을 가진 그가 밤에 하는 일은 인터넷 로맨스 소설의 작가이다. 젊은 남자 로맨스 소설 작가라 자신을 내세울 수 없는, 그리고 기약할 수 없는 일의 성격 상 안정적인 낮의 직장을 놓을 수 없는 그는, 알고보니 자신의 팬인 여성 이유린(조수향 분)을 만나며 꿈과 현실 사이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2017년의 사랑과 결혼
대기업 대리와 로맨스 작가라는 가장 극단적 설정을 통해 이 시대 젊은이들의 꿈과 현실에 대해 짚어본 드라마가 다음에 선택한 건 고전 <b사감과 러브레터>의 2017년판, <b 주임과 러브레터>이다. 신수림 작가와 <기억>과 <비밀남녀>의 윤현기 피디가 뭉쳤다. 

딸만 셋인 집안의 둘째 딸로, 이제는 어엿한 구두 회사 주임에 비록 융자을 꼈지만 자신의 집을 가진 b주임 방가영(송지효 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모태 솔로 노처녀이다. 그러나 여전히 신데렐라의 왕자님처럼 자신에게 구두를 로맨틱하게 신겨주며 사랑 고백을 받는 로망을 접지 못하는 그녀에게 어느날 뜻밖의 '노란 러브레터'가 도착했다. 

드라마는 무뚝뚝한 노처녀에게 도착한 러브레터를 통해, 아니 담뿍 그녀를 사랑하는 말을 담은 그 '러브레터'의 내용으로 인해 자신을 잘 아는 누군가가 보냈을 것이란 그래서, 그 누군가를 찾는 해프닝을 주 내용으로 삼는다. 러브레터의 이니셜, s에 기반하여 주변의 s를 가진 사람들을 추적하기 시작한 그녀의 레이더에 처음 걸린 사람은 훤칠하고 잘생긴 연하의 직원 손재현(강윤제 분), 힘든 일을 솔선수범하고 살갑게 방주임에게 다가오는 그가 당연히 그 '러브레터의 s'라 방주임은 넘겨 짚는다. 당연히 이어지는 건, 그만 술 자리에서 마음이 앞서는 바람에 실수하고만 방주임의 해프닝. 

낯부끄러지밤 연하 직원이 아니라면? 그녀의 앞에 또 한 사람의 s가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상사 심규선 과정은 무려 이름에 이니셜 s가 두개 씩! 심지어 술자리에서도, 평소에도, 그리고 연하 직원과의 해프닝으로 힘들어 하는 그녀를 다정하게 위로한다. 더구나, 그 '러브레터'의 로맨틱한 글처럼 그의 책상 위에는 시집이 즐비하다. 

대부분 노처녀의 로맨스를 그린 드라마라면, 연하남 대신, 더벅머리에 눈치없는 노총각 상사가 그녀에게 일편단심 러브레터를 보낼만도 하건만, <b사감과 러브레터>의 번짓수는 달랐다. 이번에도 연하남이 아니라면 심과장이라며 설레발을 치며 두 사람만의 술자리에서 섣부르게 거절 멘트까지 날린 방가영. 하지만, 막상 거절을 하고 보니 보면 볼수록 심과장의 면면이 그녀의 마음 속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심과장과 함께 본 멋진 원피스가 그녀에게 배달되고, 심과장의 프로포즈가 사내에 소문이 쫘악 난 그날, 방가영은 이번에도 마음이 앞서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나서고 만다. 



결국 또 한번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 방가영의 러브레터 사건은 알고보니 그 러브레터가 다이어트 회사의 스팸이었다는데서 정점을 찍는다. 심지어 배달된 원피스는 동창 선배의 보험 촉탁용. 학생들이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목놓아 애절하게 러브레터를 읊어대던 b 사감 못지않은 두 번의 해프닝을 통해 드라마는 <b사감과 러브레터>처럼 시집 못간 노처녀의 비애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심규선 과장의 말처럼 알고보면 참 괜찮은 사람인 방가영이 왜 여전히 신데렐라의 구두에 연연하며 로맨틱한 사랑에 자신의 목을 매어야 하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래서, 자신의 찾아올 신데렐라의 구두에 연연하던 방가영은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이번엔, 당당하게 심규선을 찾아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른으로서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자신의 감정을 당당하게 밝히기 위해서.  그 과정을 통해 방가영은 결혼못한 노처녀가 아니라, 결혼을 아직 안했을 뿐인, 당당하고 주체적인 감정을 가진 한 사람으로 거듭난다. 물론 로맨틱 드라마로 자존을 찾으니 사랑도 찾아온다는 결말의 서비스까지 포함하여.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로맨스 드라마'의 외연을 가지고 있지만, 오히려 그 '로맨스의 해프닝'을 통해 사랑 이전에 자존을 말하고 있는 드라마이다. 때가 되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 하는 걸 강요하는 사회, 그래서 나이가 차서도 연애도 못하고, 결혼도 못하면 모자란 사람 취급을 하고, 그걸 당하는 본인 역시 한없이 어깨가 오그라지는 사회에서, 자신의 외사랑에 당당한 심규선, 그리고 그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하는 방가영을 통해, 사랑 이전에 자신의 자존 찾기가 우선 순서여야 하는 2017년의 인간상을 드라마는 조명한다. 사랑과 결혼이 인간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과 결혼이 아니라도, 한 인간 스스로 온전히 서고 당당하게 대접받을 수 있는 시대에 대한 바람을 드라마는 담뿍 담아낸다. 
by meditator 2017. 12. 10. 17:38

공중파라고 하기가 무색하게 공중파 수목 드라마들이 10%도 못되는 시청률로 고만고만하게 선두 다툼을 하고 있는 가운데, 비록 수치상으로는 이들 드라마보다 못하다지만 케이블이라는 한정된 플랫폼을 통해 6%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달성하고 있는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기세는 놀랍다. (<이판사판> 8.2%, <흑기사> 9.3%, <로봇이 아니야> 3.1%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슬기로운 감빵 생활> 5.847 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기준> 무엇보다 4%대로 시작한 시청률이 회마다 상승세에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이로써 '추억'을 팔아 가능했다는 <응답하라>의 신드롬을 그와 가장 반대의 상황, 감빵을 통해 스스로 무너뜨리면서 다시 한번 '신원호'란 이름 석자의 가치를 증명하게 되었다. 또한 <슬기로운 감빵 생활>은 '이우정'이라는 보증 수표 대신 신인 작가 정보훈과 함께였기에 그 가치는 더욱 증폭된다.



닫혀진 공감 감빵이 열린 서사의 공간으로

한 골목, 혹은 한 하숙집, 혹은 한 동네의 친구들이란 지역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 <응답하라> 시리즈는 물론 주인공이 설정되어 있지만, 그 '지리적 특성' 답게 주인공을 둘러싼 관계 전체가 시리즈의 주인공이 되어 각자의 삶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서사를 완성하여 갔다. 과연 그런 신원호의 특기가 감빵이라는 공간에서도 가능할 것인가? 어쩐지 어수선했던 첫 회,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하지만, 오히려 닫혀진 공간이라는 감빵은 신원호를 통해 오히려 <응답하라>보다 훨씬 열려진 서사의 가능성으로 풀려나간다.


형을 확정받지 않은 김제혁(박해수 분)가 구치소에서 형을 확정 받아 교도소로 이감되는 과정 자체가, 그 공간의 이동과 함께, 등장인물의 변화로 연결되며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 낸다. 또한 교도소라는 공간이 한 동네처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면서도, 법률적 제재로 인해 잠시(?) 머무르는 공간이기에 등장인물들의 변화를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만든다. 덕분에 이제 6회에 이른 <슬기로운 감빵 생활>에는 구치소의 법자, 건달, 똘마니에서부터, 서부 교도소의 장발짱, 목공 반장 등의 인물들이 저마다의 존재감을 뽐내며 명멸해 갔다.


하지만, 이런 여러 인물들의 등장만으로 이 드라마가 빛을 발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가지는 '반전'들이 바로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매력이다. 구치소, 교도소라는 공간이 무엇인가. '나쁜 놈'이라는 말로 단정지어도 무리가 없는, '죄'를 지어, 그 죄의 대가로 공간적 제재를 당하는 곳이다. 바로 그런 사회적 단정이 이미 이루어진 곳에서, 드라마는 그 '단정'의 반전을 빚어내며 시청자들을 흡인한다.



반전의 인간 군상들

1,2회 구치소에서 가장 '반전'이었던 건, 바로 <응답하라> 시리즈의 산 증인과도 같은 딸들의 아버지 성동일의 반전이었다.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아버지'연하던 교도관 조주임(성동일 분)은 알고보니 죄수들에게 협박과 돈을 갈취하는 나쁜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교도소로 와서 다수의 드라마에서 '악인'으로 등장했던 정웅인이 분한 팽부장은 그의 눈빛만으로 이미 나쁜 사람같았지만 알고보니 누구보다 재소자들의 입장을 배려하는 음악을 사랑하는 로맨티스트였다. 이런 식이다. 제 아무리 구치소고, 교도소고 인생의 막장인 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기에, 그곳에는 교도관과 재소자라는 이분법을 넘어선 저마다의 '인간의 향기'를 한껏 뿜어내도록 드라마는 그려진다. 매 회 자신의 여동생을 성폭행하려던 범인을 트로피로 가격하여 교도소에 온 국민 투수 김제혁을 중심으로 그와 엇물리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뜻밖의 이야기들이 '만인보'처럼 감빵 생활을 채워간다.


5회에서 중심에 선 인물은 장발장(강승윤 분)이었다. 평소 장기수(최무성 분)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던 갓 스물을 넘긴 청년, 하지만 그는 경상도 사투리의 서글서글한 태도와 달리, 외부 작업을 나간 곳에서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던 기사의 지갑을 슬쩍하는가 하면, 불시에 벌어진 방 점호 과정에서 들킨 개조한 시계를 아버지라 따르던 장기수의 것이라 밀어붙이며 무사히 만기 출소를 해 원성을 샀다. 겨우 스물 넘은 청년이 보인 철면피한 모습은 출소 임박의 절박감을 둘러대도 '인간적 회의'를 빚는다.


그런 인간적 회의 공간을 메꾸어 가는 건 김제혁이다. 구치소에서 부터 오랜 절친 준호(정경호 분)가 뜰어 말려도 늘 '인간적 호의'로 법자 등을 울려버리곤 하는 김제혁, 하지만 그런 영웅적 면모는 족구 시합에서 공을 손으로 잡는다던가, 미국의 수도를 뉴욕 양키스라고 답하는 어이없는 모습의 반전으로 인해, '인간적 훈기'로 내려앉는다. 김제혁만이 아니다. 사람을 죽인 죄로 무기 징역을 받은 장기수가 장발장에게 보인 선의 등 역시 사람사는 곳 교도소의 온기를 덥힌다.



그런가 하면 구치소에서 부터 줄곧 김제혁과 함께 하면서 '해롱'이란 별명을 얻었던 마약사범 한양의 반전은 이미 <비밀의 숲>에서 한 차례 반전을 선보인 그의 연기에 이어 또 한번 시청자들을 놀래키며 그의 이름 석자를 검색어에 올린다. 거의 두 시간에 가까운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시청 시간을 시간 가는 줄 모르로 채널을 돌리지 않도록 만든 건, 선과 악으로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인간사의 군상들이지만, 그 진지한 틈을 채워가는 건 해롱이나, 문래동 카이스트의 맛깔스러운 해프닝들이다. 카이스트와 늘상 아웅다웅하며  극중 '웃음'을 담당했던 한 축이었던 '해롱'이 알고보니 '뽕'을 하면 멀쩡해진다는 내용은 극적이다.


하지만, 이런 재소자의 인간적인 면은 사회적으로 이미 고정된 교도소에 대한 인식과 상충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알고보니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장기수 등의 캐릭터에 비해, 보신과 안위에 눈을 밝히는 교도소장을 비롯한 일부 교도관의 캐릭터는 교도소 혹은 범죄자 '미화'의 우려를 낳는다. 하지만, 비록 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갔지만, 교도소 내에서는 권력의 향배가 달라지며 갑을 관계가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권력을 가진 이들의 냉정한 잣대나, 때론 편협한 잣대는 '미화'라기보다는 '현실적'이라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오히려 그런 '현실적'인 관료로서의 교도관보다는, 6회에서 아쉬운 점은 김제혁의 재기 해프닝이다. 5회와 6회에 걸쳐 다루어 지고 있는 건 왼쪽 팔과 손에 마비가 온 김제혁의 에피소드이다. 팔에 무리가 온 김제혁, 이미 한 차례 왼쪽 어깨 수술을 받은 바 있어, 담당 의사조차도 회의적인 상황, 하지만 이미 한 차례 불굴의 의지로 왼쪽 어깨 부상을 극복한 바있는 김제혁이었기에 모두들 그를 응원한다. 하지만 이런 응원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사자 김제혁은 은퇴를 선언한다.



간과된 도덕적 딜레마

이젠 야구가 지겹다고 하는 그에게 그럴 수록 전국민적 서명 운동을 벌이고 서로 동참하며 그의 재기를 응원하고, 심지어 교도소장은 그의 전용 연습장까지 만들어 주는데, 그 전용 연습장 개장 날 그에게 자신이 트로피로 가격한 범인의 죽음이 전해진다. 그리고 김제혁은 자신이 얼마나 운이 지지리도 없는 놈인가를 사람들 앞에서 한껏 토로하고, 다시는 야구를 안한다며 그 자리를 떠난다. 이후 6회는 야구를 그만둔 김제혁에게 담배를 드여오기 위해 문래동 카이스트가 이것 저것 다른 운동 등을 시키는 해프닝을 그려낸다. 도대체 야구 말고는 쓸데가 없어보이는 김제혁, 결국 수면제까지 먹이며 꿈을 빙자해 다시 야구를 할 것을 종용하고, 김제혁은 어리숙하게 그걸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프닝은 끝이나는데.


정작 '인간적'인 반전을 그려내기에 골몰한 드라마는 김제혁의 상황을 두고, 야구를 하느냐 마느냐에 더 집중한다. 동생을 범하려던 나쁜 놈이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고야 만, 그 '도덕적 딜레마'는 가볍게 그의 재기 해프닝 속에 잠겨 버린다. 즉, <슬기로운 감빵 생활>은 '인간의 이면'을 다루고자 하지만, 그 '이면'의 지점이 '반전'과 '숨겨진 사연'을 넘어서지 못한다. 알고보니 좋은 놈은 있지만, 나쁜 놈이면 그냥 나쁜 놈이다. 묘하게 인간의 스펙트럼이 넓은 듯하면서도 상투적이며 이분법적이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던 스포츠 선수가 사람을 '과실'로 죽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어떻게 '언플'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슬기로운 감빵 생활>도 그와 같다. 김제혁이 겪어야 할 도덕적 딜레마 대신, 그의 재기 여부가 수면 위로 올라와 시청자들은 그에 골몰하며 짚어봐야 할 지점을 건너뛴다.


by meditator 2017. 12. 8. 14:32

그간 신원호 피디 앞에 붙었던 수식어였던 '응답하라'라는 수식어는 이제 그 주체가 분명한 새로운 수식어로 개명하는 게 맞을 듯하다. 그건 '응답하라'에 이은, '감빵' 생활이 아니라, '응답하라'라는 시간과 공간이란 영역을 통해서만 빛날 줄 알았던, 신원호표 휴머니즘이다. 


이제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 공중파의 여러 드라마로 그 영향력을 확장해 나간 '추억'을 밑거름으로 삼은 '응답하라'브렌드, 하지만 이번에는 또 어떤 시대로 갈까하고 궁금해 했던 호청자들의 기대가 무색하게 신원호 피디가 들고 나온 공간은 가장 인간적이지 않은 '감빵', 교도소다. 



추억 대신 극한의 감옥? 
여동생에게 성폭행을 시도한 범죄자를 트로피로 가격하여, 정당방위를 넘어선 과잉 방어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은 야구 선수 김제혁. 그는한국시리즈 2년 연속 MVP, 골든글러브 3연패, 세이브왕, 방어율왕을 차지한 넥센히어로즈 특급 마무리투수. 대한민국 세이브 기록을 죄다 보유한 괴물 클로저이며 미국행을 앞둔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는 존재, 하지만 법정 구속이 된 그는 하루 아침에 '감빵'행을 하게 되는 처지에 놓인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한 구치소, 하지만 그 짧은 기간을 보낸, 1,2회를 통해 그 공간에서 김제혁은 그의 감빵 동료 법자의 말처럼 볼 거 못볼거를 다 보게 된다. 

입소 과정, 항문 검사라는 뜻밖의 수치스러운 과정에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는 야구 선수의 비밀스러운 부위에 관심을 가지고 모여든 교도관들을 여유롭게 내쳐주며 그의 호감을 얻은 조주임(성동일 분), 하지만 같은 방 갈매기와의 육박전을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제혁에게 돈 3000만원을 요구한다. 

이번에도 역시 성동일과 함께! 라면서 그간 '응답하라'의 아버지로 그 역할을 이어왔던 성동일을 <슬기로운 감빵 생활>은 극 초반 그 캐릭터와 흡사한 너그럽고 넉넉한 조주임의 캐릭터로 등장시키며 시청자들의 긴장을 풀어낸다. 하지만, 그 긴장은 곧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혁에게 징벌방을 가는 대신 돈 3000을 요구하는 그의 돌변한 태도로 인해 배신감으로 급전환된다. 바로 이 지점이, <슬기로운 감빵 생활(이하 감빵 생활)>이 그간 시리즈로 이어왔던 응답하라의 그 '추억'처럼 호락호락한 시리즈가 아니라는 확실한 각인을 주는 장면이다. 더 이상 '추억'을 반찬 삼아 옹기종기 '남편 찾기'의 로망을 이루지는 않겠다는 선언문이다. 



그렇게 '응답하라'의 상징적 인물 성동일의 캐릭터로 반전과 환기를 주며 여기는 더 이상 추억의 그곳이 아니라며 마침표를 찍은 드라마, 하지만 '추억'은 없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그 '인간의 냄새'가 났다. 

극한의 장소에서 펼친 진검승부
이쯤에서 되돌아 보자. 과연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 이유가 과연 '추억'과 추억에 기반한 음악 등의 문화적 장치들 때문만이었을까? 오히려, 신원호 피디는 <슬기로운 감빵 생활>을 통해 그간 자신이 '응답하라' 시리즈를 통해 대중과 '손쉽게' 교감했던 그 장치들을 제거한 채 그간 정말 자신이 해왔던, 그리고 여전히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을 '감빵'이라는 극한의 무대를 통해 '진검승부'를 펼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진검승부'는 1회 도대체 왜 낯선 박해수를 주인공 김제혁으로 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국민 투수라지만 감빵 동료들조차 '어리버리'하고 늦다며 평가를 내린 그 인물로부터 비롯된다. 1회의 초반 눈길를 사로잡은 건 상습 마약 복용으로 정신을 못차리는 재벌 2세로 등장한 <비밀의 숲>에서 반전의 주인공이었던 윤과장 역할의 이규형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건, 허허실실 조주임이었고, 그리고 막판에 김제혁을 안타깝게 찾아다닌 팬인줄 알았는데 오랜 친구 준호(정경호 분)였다. 

이 늦된 캐릭터, 하지만 그 인물 설명에서도 드러나듯 교통 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 좌절 대신 할 게 이것밖에 없다며 묵묵히 치료받고 재기를 해낸 역전의 인물처럼, 1회를 넘어 2회에 이르러 김제혁은 그 '인간미'을 증명해 나간다. 감빵 안에서 부당하게 힘을 행사하는 갈매기를 제압하고, 조주임의 3천만원 대신 밥자 어머니의 수술을 전화 한 통화로 부탁하는 등 그의 친구 교도관 준호의 말처럼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한다. 

신원호 피디의 말대로 '사소한 인간미'일 수도 있고, 교도관 준호의 말대로 '쓸데없는 오지랖'일 수도 있는 김제혁의 그 '인간미', 그런데 익숙하다. 수학 여행비가 없어 쩔쩔매는 아랫집 덕선네 처지를 모른 척 하다 슬쩍 남겨놓은 윗집 아줌마 미란의 여비처럼, <응답하라> 시리즈를 통해 다수의 시청자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던 그 '인간적인 정서'의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21세기의 혹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주었던 지난 20세기의 '인간미'가, 극한의 감빵 속 김제혁을 통해 슬그머니 등장하며 <감빵 생활>은 마치 눈을 맞은 상록수처럼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어렵고 힘든 시절에 콩 한쪽도 나누어 먹던 그 이웃, 혹은 친구들의 훈훈한 덕담이 있었기에 <응답하라> 시리즈가 빛났듯이, 가장 '인간적'일 수 없는 극한의 교도소라는 공간에서, 피디의 말대로, 검사나 형사 등 어떤 '직위'를 가지지 못한 죄수, 그럼에도 여전히 '성선설'의 주체인 김제혁을 통해 의지적 '휴머니즘'을 어렵지만 포기하지 않고 풀어가고자 하는 <감빵 생활>은 신원호 피디의 세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빛낸다. 

물론 준호와 제혁의 청소년 시절의 전사로 부터 시작된 준호와 제혁과 그리고 지호(정수정 분)의 '인연'은 '응답하라'의 외전과 같은 기시감을 준다. 하지만, 그 '기시감'이 <감빵 생활>의 정서를 지배하기에 구치소, 그리고 그에 이은 진짜 교도소 생활의 현실은 극한적이다. 이번엔 어느 시대일까? 하는 당연한 기대를 뒤엎고, 가장 자신이 해오던 시리즈와 반대의 상황에 '출사표'를 던진 것만으로 이미 이 작품의, 그리고 신원포 피디의 의의는 대단하다. 그리고 그럼에도 오히려 그래서 그 속에서 빛나는 신원호가 그리고자 하는 '인간적 세계'의 지향점을 고수하는 점은 그래서 또 기대가 된다. 새로워서 빛나고, 여전해서 더욱 가치있는 <감빵 생활>의 선전를 응원한다. 
by meditator 2017. 11. 24. 14:20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명구가 무색해진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그 잊혀진 독서의 계절을 뜻밖에도 부추키는 건,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라며 정현종의 시 '방문객'으로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이다. 그러나 <이번 생은 처음이라>를 '문학적'으로 만드는 건 작품 속 곳곳에서 인용되는 독서의 욕구를 부추기는 문학 작품들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문학이 무색하게도, 문학이 해야할 작품을 통해 자신을 투영하고 직시하며 반성할 수 있는 '문학적 역할'을 드라마가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문학'보다 더 '문학적'이다. 




사람이 온다, 그의 19호실과 함께 
계약 결혼을 통해 낯선 두 이방인이었던 남세희(이민기 분)와 윤지호(정소민 분)가 '사랑'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을 드라마는 정현종의 '방문객'으로 알렸다. 그저 월세 세입자가 필요했고, 몸 뉘일 방이 필요했던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한 공간에서 살며, '사랑'하지 않는다는 편의적 이유로 성큼성큼 서로의 삶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만 되도, 정현종의 '방문객'은 그저 사랑의 문학적 수사로 그칠 수 있었다. 가랑비에 옷적듯이, 그러나 때론 옷과 가방을 집어 던진 채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소중한 돈 대신 비싼 오토바이를 부수는 걸 감수하고, '갈음'이란 표현에 섭섭하고 상처주고 싶어하며 가까워지던 두 사람은 결국 진짜 '키쓰'를 통해 사랑의 통과 의례를 겪어간다. 그리고 사랑하며 그 사람의 세계에 성큼성큼 발을 들이니 거기엔 남세희의 집에 마주한 두 사람의 방처럼, 이십 여년, 혹은 삼십 팔년을 웅크리고 살아왔던 각자의 19호 실에 맞닦뜨리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이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들 해왔다. 이 이상한 수학 공식에는 홀로 맞서기 힘든 세상을 두 사람이 힘을 합쳐 하나가 되어 함께 헤쳐나간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 부부의 하나됨이 하나의 가족을 만들고, 그 가족이 이 사회의 '가족주의', 때로는 '전체주의'의 바탕이 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2017년의 젊은이들은 사회 경제적 이유로 그런 '가족'을 이룰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그런데,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그런 사회 경제적 이유를 넘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지금까지 '우리'라 정의 내려진 그 명제에 대해 새로운 이견을 제시한다. 



그 이견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건 바로 연애 7년차, 아니 전 연인인 양호랑(김가은 분)과 심원석(김민석 분)커플에게서이다. 한 통장에 미래의 꿈을 부으며 원석의 자수성가와, 그를 통한 성공적 결혼과 안락한 가정을 꿈꾸던 호랑-원석 커플은 7년차에 이르러서도 앱 개발에 성공하지 못해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원석의 사회 경제적 처지로 인해 흔들린다. 호랑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접고 선배 회사에까지 들어갔지만, 호랑이 원하는 결혼까지 하려면 5년을 더 기다려 달라는 원석의 요구에 호랑은 절망한다. 그리고 결국, 원석은 자신이 호랑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이유로 이별을 통보하고 호랑은 원석의 집에서 짐을 뺀다.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고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뭉뜨그려져온 두 사람, 하지만 7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두 사람의 이해는 쉽게 만나지지 않는다. 연애는 좋지만 결혼은 물음표라는 원석과 결혼이라는 골문을 향해 모든 과정을 감수했던 호랑의 이해 관계는 결국 매번 어긋나고 만다. 원석이 자신의 꿈을 포기해도 쉽사리 합의에 도달할 수 없는 이 커플은 결국 7년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각자 자신을 직시하기에 이르른다. 

19호실에서 나와 사랑의 광장에서 
호랑, 원석 커플의 파경은 결국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연애와 결혼이 그 옛날 단칸방에 함께라는 이유로 행복하던 그 시절의 결혼이 이 시대에 유효하지 않다는 걸 증명한다. 그건 시대가 달라져서도, 사회가 달라져서도 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달라져서인 것이다. 즉, 이 시대의 결혼은 분명 남과 여의 결합이지만, 그 남과 여는 각자의 삶과 주관이 분명한 개인들의 결합이라 드라마는 말한다. 

그래서 우수지(이솜 분)가 너무 좋아 그녀가 쏘아대는 화살마저도 내가 맞고 그녀가 조금 편해졌으면 하는 마상구(박병은 분)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우리가 함께하면 다 해결될 거야'라는 고백 대신, 세상에 상처받고 자신의 19호실에 갇혀있는 수지가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나와 싸우기를 독려하고, 자신이 그 응원군이 기꺼이 될 꺼라 말한다. 분명 '함께'이지만, 두루뭉수리한 집단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삶의 주체로써 서있는 개인으로서의 '결합'을 전제한 고백이다.

 

드라마 속 전직(?) 드라마 작가인 지호는 바로 이런 자신들의 처지를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를 통해 빗대어 설명한다. 가사 노동에 지친 한 여성이 자신만의 '공간'을 얻기 위해 기꺼이 '불륜'의 오해조차 감내한다는 이 파격적인 이야기는 이 시대 자신의 삶을 올곧이 살아내는 개인들의 현실을 절묘하게 상징해 낸다. 

자신의 집에 집착하는 세희, 자신이 머물 방이 필요했던 지호가 그 자신들의 '공간'이 필요해 전 시대의 유산이라 할 '결혼 제도'를 이용하는 장치는 그래서 더 상징적이다. 그런데 이제 그 공간을 공유한 그들은 서로로 인해 마음 속의 공간이 생겨,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생은 처음이라>가 '로코'의 형식을 띠지만 21세기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담보해 내고 있기에 그 '로코'의 과정조차 녹록치 않다. 

'사랑하다보면, 그 사람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엇인가 모르는 구석이 생긴다. 나의 세계 속에서 자라는 상대가 점점 울창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 이것은 내가 상대의 세계로 더 깊이 걸어들어왔다는 뜻이다. 사랑의 세계에서 공간은 늘 광장처럼 드넓다.'

그 흔한 삼각 관계의 등장, 12년전 세희와 동거를 하고, 아이까지 가졌던 고정민(이청하 분)의 대두는 남세희와 윤지호의 사랑 전선에 위기를 불러온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긴장을 통해 오히려 그간 두 사람 각자의 19호실의 방문을 열어젖힌다. 방문객이란 시집 속에 갈피처럼 끼워넣은 고정민의 영원히 사랑같은 건 하지 말라던 그 명제에서 세희는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했으며, 지호는 그간 묻어두었던 작가의 꿈을, 아니 작가를 하기 위해 겪었던 고통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이제 2회차를 남은 드라마는 그래서 뜻밖에도 '함께'하기 위해 각자 해결해야할 과제에 주인공들이 무거워진다. 그 각자 자신의 방 속에 묵혀둔 그 짐 보따리를 풀어내고 나서야, 이들은 자신의 19호실을 나와, 함께 할 '공간'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번 생은 처음이라>가 각자의 '자존'과 '실존'이 우선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권하는 '사랑'과 '결혼'이다. 
by meditator 2017. 11. 22. 14:25

극중 지호의 나레이션은 말한다. 대부분의 사랑 이야기의 해피엔딩은 키쓰로 마무리된다고. 하지만 진짜 사랑 이야기는 키쓰 이후부터 시작된다고. 그리고 그 나레이션답게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키쓰로 해피엔딩이 아니라 키쓰로 시작된 '진짜 사랑'의 결을 섬세하게 그려가고자 한다. 


모쏠 지호, 육체적 욕망에 눈뜨다. 
일반적인 로맨틱 멜로의 드라마에서 '환타지'로 이어가는 사랑이라면 훈훈한 남녀의 라고 쓰고, 15금에 어울리는 연애로 연결되리라. 하지만 늘 예상 밖의 서사를 이어가는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두 사람의 첫 키쓰를 모쏠에 달팽이가 부러운 작가 지망생 지호(정소민 분)가 앞으로도 키쓰 따위는 해볼 수 없을 것같아 다짜고짜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에게 솔직한 덕담을 해주었던 세희(이민기 분)의 입술에 박치기를 한 것으로 도발하는 것으로 관계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키쓰, 그리고 사실상 진짜 키쓰를 그런 지호의 키쓰가 사실은 키쓰가 아니라 일방적 입맞춤이었으며 진짜 키쓰는 이런 것이라며 세희의 도발로, 그리고 이어진 두 사람의 네버엔딩일 거 같은 키쓰신으로, 그리고 일방에서 쌍방으로의 관계 전환으로 극적으로 그려냈다. 



그리고, <이번 생은 처음이라(이하 이번 생)>는 거기서 한 발 더 '어른'의 연애로 이야기를 진전시킨다. 키쓰를 통해 모쏠 처음으로 연애에 입문하게 된 지호는, 키쓰 이후 진전된 스킨쉽의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며 혼돈스러워 한다. 자신도 모르게 한 침대에서 자고 싶다며 혼잣말을 하고는 '쓰레기'라 머리를 흔들고,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키쓰의 후유증에 정신을 못차린다. 심지어 귀걸이 착용 과정에서 낯선 여자의 손길에 얼굴이 붉어질 정도다. 

여중, 여고를 나와 작가가 되기 위해 정진하느라 연애에 한 눈 팔 사이가 없던 모쏠의 이 흥미로운 설정은 그래서 오히려 현실적이다. 성적 자유가 판치는 세상이라 하지만 상당수의 여성들이 tv의 동화적인 설정으로 연애를 배우고, 엄마의 지휘 아래 관계를 설정해 가는 세상에서, 키쓰 이후 자신에게서 용솟음치는 본능을 쓰레기나 변태로 취급하는 장면은 그래서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이제 막 사랑을 하게 된 상대방을 향해 끊임없이 바래지는 욕망을 솔직하게 그려내는 <이번 생>은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이다.

지호는 고양이를 찾아 세희의 방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시집에서 지난 사랑의 아픈 흔적을 발견한다. 흔한 사랑 이야기라면 그걸 오해와 질투의 복선으로 사용하겠지만, 비록 모쏠이지만 '어른'인 지호는 생각해 보니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자신보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세희의 아픔을 기꺼이 이해하는 것으로 그 '발견'을 풀어낸다. 그러기에 그녀에게 찾아온 욕망도, 다짜고짜 19금의 도발 대신, 주저함과 갈망의 밸런스로 드라마는 풀어간다. 키쓰를 더 해도 될까요? 라고 묻는 세희의 배려와 함께. '변태'가 아닌 자연스런 어른 연애의 한 과정으로. 


2017 여성들, 그 욕망의 향배는?
드라마는 그렇게 이제 모쏠 탈출을 눈 앞에 둔 지호와 함께 수지, 호랑, 세 여성의 욕망을 충실하게 그려낸다. 그간 세 친구 중 가장 자유분방했던 수지는, 그 자유분방함의 이면의 숨겨진 그녀의 사회적 욕구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맞춤 브래지어 사업에 그 어느 때보다도 흥미를 보이면서도 어렵게 들어간 연봉 높은 직장에 대한 연연함과 비혼주의는  우리 시대 젊은 여성의 또 다른 현실태이다. 

호랑은 다를까? 인간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유지되어 온 가장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호랑의 모성적 갈망이다. 안락한 환경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다는 그 욕망이야말로 시대와 사회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유지시켜온 본원적 기능이다. 단지 사회적 자아가 보다 부각되는 사회에서 안타깝게도 하랑의 욕망은 '전근대적 대접'을 받게 되지만 엄연히 '취집' 역시 여전히 우리 사회 여성들의 선택지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욕구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단지 안타까운 건, 그 욕망의 방점과 발화점이 자신이 아닌 '상대방의 조건'에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런 각자의 욕망을 가진 그녀들이 2017년이란 구체적인 현실에 몸담고 있다는 것이 드라마 속 각자의 상황을 다르게 빚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드라마가 시작되며, 일도 잃고, 갈 곳도 없이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은 터널 속을 헤매게 되었던 지호는, 뜻밖에도 집세도 깍아주는 집주인을 만나, 방도 얻고, 이제 마음의 공간도 함께 공유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정말 다행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녀보다 나이도 많고, 직장도 확실한 안정된 경제적 지위의 남성과 사랑을 시작하게 된 행운을 얻어서이다. 여전히 그녀의 직업은 알바이지만, 2년 계약 결혼의 위상은 어쩌면 달라질 지도 모른다. 

반면 어려움에 봉착한 지호를 위로하던 친구들의 현실은 오히려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 계약 연애에,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수지는 모처럼 두 눈이 반짝이는 일을 찾았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꿈을 도발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다. 모텔을 전전하는 연애는 그녀를 비혼주의자로 만들고. 

더 어려운 건 호랑이다. 서른 줄 7년의 연애, 자수성가한 사업가를 꿈꾸며 만난 연하 남친은 아직도 이십줄에, 자수성가의 꿈은 여전히 옥탑방에 머문다. 사랑을 한다지만, 결혼이라는 현실 속에서 호랑이 원하는 모성 욕구는 벽에 부딪치고 만다. 앱 개발이라는 일확천금의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그녀를 위해 포기한 꿈과 새로운 직장은 여전히 원하는 가정을 꾸리기엔 미흡하다. 새마을 운동 하던 시대를 지나 산업 역군의 시대에 가진 것 없이도 결혼하고 아이낳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이전 세대는 상상할 수 없는, 2017년 가진 것없는 젊은이들의 욕망과 꿈은 이렇게 옥탑방에서 좌절된다. 

by meditator 2017. 11. 15. 17:38

50부작의 대장정을 시작했던 <황금빛 내인생>이 이제 절반의 반환점을 눈앞에 두고 회마다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kbs2 주말 드라마의 아성을 공고히 하고 있다. (21회 32.3%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드라마 시작 초반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박시후와 관련된 잡음이 무색하게 한 회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빠르고 예측 불허의 전개는 역시 소현경! 이라는 감탄사를 절로 나오게 한다. 오히려 시청자들은 작가의 또 다른 화제작 <내딸 서영이>의 기록을 과연 <황금빛 시청률>이 언제 깰 것인지를 관전 포인트로 삼고 있을 정도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은석, 아니 지안
그간 가슴졸이며 벌여놨던 서태수(천호진 분)-양미정(김혜옥 분)의 가짜 딸 사기 사건은 20회를 기점으로 들통나고, 은석이었던 지안(신혜선 분)은 거리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당연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란 기대와 달리, 찜질방과 거리를 전전하던 은석이 아닌 지안은 가족들과 함께 놀러왔던 바닷가에서 홀로 추억에 잠기다 결국 숲속에서 약병을 입 속에 털어넣는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이 걷잡을 수 없어져 버린 '친딸 사기 사건'의 시작은 단순했다. 오래도록 딸을 찾았지만 그때마다 사기꾼들에게 농락만 당했던 재벌가 최재성(전노민 분)-노명희(나영희 분) 부부, 그래서 이제는 은석이라는 이름조차 집안에서 생소해질 즈음. 그들에게 친딸의 생존 소식이 바로 그 딸을 유괴했던 당사자들로부터 도착했다. 그리고 그 유괴범들을 닥달해 찾아간 서태수-양미정의 집, 다짜고짜 들이닥쳐 기세등등하게 자신의 딸을 내놓으라는 노명희에게 양미정은 순간 진실을 바꿔버리고 만다. 

남편의 사업 실패 이후 늘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려왔던 가족들, 그런 가운데에서도 재벌가의 잃어버린 딸이었던 지수가 가족들의 사랑 아래 부족함없이 자라온 반면, 쌍둥이지만 언니였던 지안은 그녀가 도전한 세상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갖은 허드렛일은 다하면서 정규직이 되고자 했던 해성 어패럴은 그녀 대신 낙하산인 그녀의 친구를 선택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도경과의 악연은 그녀에게 차 수리비 명목의 수모를 안긴다. 더는 버틸 수 없다며 좌절하는 딸 지안을 지켜봤던 엄마 양미정은 도도한 노명희의 요구에 순간 다른 선택을 한다. 

<황금빛 내인생>은 그렇게 엄마 양미정, 그리고 딸 지안의 궁핍으로 부터 비롯된 뒤틀린 선택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물신주의'를 짚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극 초반 양미정의 선택에 이은, 그녀의 앞에서 아버지가 차마 진실을 꺼낼 수조차 없게 만든 지안의 선택은 결국 진실이 밝혀졌지만 당신의 딸을 괴롭히겠다는 노명희의 선전 포고, 돌아오지 않는, 그리고 돌아갈 수 없는 딸, 그리고 자살이라는 결론을 통해 일단락된다. 

엄마와 딸의 '물신주의적 욕망'의 행보,
숟가락의 빛깔로 구분되는 세상, 우리는 쉽게 자신이 타고난 숟가락이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는 '운명론적 사고'에 매몰된다. 바로 이 오늘날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 '운명론적 사고'에 소현격 작가는 마치 복권처럼, 하지만 사실은 '도발적인' 음모를 통해 그 욕망을 점검한다. 

엄마 양미정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자식을 위해서라고 다짐한다. 자신의 딸이 죽고 으슥한 인가에서 어린 지수를 만났을 때, 그냥 두면 죽었을 것이라며 자신의 딸처럼 끌어안았던 그 '이기적 모성'은 변함없이 이제 다시 그냥 두면 스스로 고사될 것같은 딸 지안을 위해 거짓말을 해버린다. 그리고 나머지 자식들을 위해 기꺼이 딸을 키운 대가로 음식점을 받는다. 남편의 사업 실패 이후 경제적으로 쪼달리던 양미정의 모성은 그 해결책으로 기꺼이 '돈'을 선택한다. 

딸 지안도 그리 다르지 않다. 자신이 사실은 재벌집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대번에 태세를 전환한다. 말리는 아빠도, 동생도 아랑곳없이, 그간 세상과의 싸움에서 너무 지쳤던 그녀는 선뜻 재벌가의 딸이라는 자리를 받아든다. 

그러나 그 덜컥 받아든 '황금'은 그녀들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금수저가 된 지안의 하루하루는 금수저로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인정 투쟁'의 시간이 되었다. 밖에서 고달팠지만 돌아오면 따수웠던 가정 대신, 형제도, 부모도 피보다 진한 '재벌가'라는 위계 속에서 자신을 버텨내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마치 작가가 88만원 세대에게 당신들이 원하는 그 '수저'의 삶도 만만치 않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재벌가로 들어간 지안의 하루하루는 고달프다. 소현경 작가는 흔히 주말 드라마들이 빠지기 쉬운 흙수저 집안의 가족주의 vs. 금수저 집안의 이기주의라는 이분법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절묘하게 지안이 무엇을 탐했고, 외면했는가를 그녀의 선택 이후의 과정을 통해 통렬하게 짚어낸다. 

그리고 이제 진실이 밝혀지며 양미정, 지안 모녀는 외적으로는 자신들이 저지른 사태에 대한 감당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며, 동시에 자신들이 따른 '물신주의적 선택'이 낳은 생각지도 못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자식을 위해서라며 자신을 합리화했던 모정의 선택은, 큰 아들의 외면은 물론, 편의적으로 행복을 위한 선택이라던 두 쌍둥이 딸 중 그 누구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결국 '가족'을 잃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또한 자신만을 생각하며 재벌가로 들어갔던 지안은 자신이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간의 과정에서 보인 자신의 걷잡을 수 없는 선택에 대해 깊은 회한에 빠지고, 그 결과 법적 처벌 이전에 자기 스스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극단적 선택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게, <황금빛 인생>을 위해 선택했던 엄마와 딸의 이기적 선택은 가장 처절한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드라마의 한 장을 마무리한다. 흙수저의 어긋난 로또는 이렇게 자기 반성과 회한으로 종결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흙수저의 도발과 그 '처리'의 과정에 집중했던 드라마는 또 다른 수저, 금수저 집안의 반성과 회한이라는 2막을 열고자 한다. 그 2막의 시작은 그래도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사랑으로 보다듬어졌던 지수의 도발적 재벌가 행으로 열어진다. 


 

by meditator 2017. 11. 12. 1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