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편의 결혼식에 시체가 떨어졌다'며 '킬링 로맨스'를 내걸고 흥미진진하게 시작했던 <마이 시크릿 호텔>이 16부작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마이 시크릿 호텔>의 결론은 조성겸(남궁민 분)의 한 마디로 결론 내릴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게 사랑 때문이라는 거군요. 내 어머니를 위해 진실을 덮은 총지배인도, 총지배인을 대신한 양경희도, 양경희를 대신한 차동민도 결국 모든 게 다 사랑 때문이라는 거군요.'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웨딩 플래너가 되어  주관하던 남상효(유인나 분)의 전남편 구해영(진이한 분)의 결혼식에 느닷없이 천장 유리를 깨고 떨어졌던 시체 황동배(김영춘 분)에서 시작되어 미스터리처럼 이어지던 살인 사건의 결말은, 러브스토리로 결론 맺어졌다. 

그리고, 그 시체로 인해 깨진 구해영의 결혼은 다행히도(?) 두 주인공의 사랑의 확인으로 달콤하게 역시나 러브스토리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 다 사랑이야'라고 부르짖는 결론을 향해, 오는 여정은 너무나 길고도 지리했다. 


(사진; 서울 경제)


마지막 회, 결국 구해영과 남상효의 그간 16부의 길고 지리했던 줄 다리기가 서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한국 드라마의 고질병 수많은 이야기를, 심지어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까지 사정없이 퍼붓지만, 정작 해야 할 단 한 마디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빙빙 돌리다, 마지막에 가서야, 사실은 이랬어? 요걸 몰랐지? 하는 그 전형적 수법이 다시 한번 <마이 시크릿 호텔>에 등장한다.

미국에서 사랑에 빠져 결혼식까지 올렸던 구해영과 남상효는 남상효의 호텔리어라는 직업과, 그 직업적 특성과 그에 대한 남상효의 열정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리고 자신의 일정까지 겹쳤던 구해영의 뉴욕 행으로 인해 겨우 짧은 3개월이라는 결혼 생활과 서로에 대한 원망만은 쌓고 헤어졌다. 

하지만, 16회, 철천지 원수처럼 여기던 서로에 대한 원망이 실은 오해에서 비롯되었음을 드라마는 밝힌다. 호텔리어라는 직업마저도 내팽겨친 채 남상효는 구해영을 찾아갔으며, 구해영 역시 남상효를 찾으러 다시 돌아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그들의 사랑이 여전함을 확인한다. 첫 회에 만나서, 사실은 내가 너를 만나러 갔었다. 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서로 믿는다, 안믿는다. 이러면서 16부작의 실랑이를 벌인 것이다. 심지어 시체까지 등장하며 난리를 치루었던 구해영의 결혼마저 정수아(하연주 분)의 애걸에 넘어가 준 것이라니! 한참 무르익던 조성겸과 남상효의 러브 라인을 정리하기 위해 뜬금없이 등장한 남상효의 출생의 비밀에 이르면 막판 반전이라기 보다는 실소가 나온다. 

그러다 보니, <마이 시크릿 호텔>의 중심 러브 스토리는 구해영과 남상효의 사랑을 둘러싼 해프닝으로 이어진다. 미워하는데 웨딩 플래너와 고객으로 만나게 되고, 어려운 호텔때문에 심지어 대신 결혼까지 해주는 해프닝으로, 두 사람의 사연은 16부를 어렵게 이어간다. 남상효 주변으로 다가간 조성겸이 멋지지만, 시청자들은 이미 안다. 한번에 두번 결혼까지 한 두 사람이 다시 헤어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마지막회, 다시 한번, 구해영의 뉴욕행으로 시청자들을 낚고 남상효는 울고 앉았지만, 이미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가 긴장감을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이 시크릿 호텔>이 재미를 놓친 것은 이른바 킬링 로맨스라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주인공, 혹은 네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와, 호텔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 서로 따로 놀았다는 점이다.

남상효가 주관하는 구해영의 결혼식에 느닷없이 떨어진 시체, 그로 인해 살인 사건에 얽매여 들어가는 두 주인공, 이런 클리셰는 이미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익숙하게 보아왔던 설정이다. 더구나, 두 주인공의 주변 사람들, 특히나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용의자가 되는 미묘한 상황이, 바로 이런 스토리의 매력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런 매력적인 스릴러에, 정작 두 주인공의 몫이 없었다. 

웨딩 플래너였던 남상효가 앞장 서서 사건을 해결할 만도 하건만, 용의자로 심문 한 번 받고는 일찌감치 사건으로 부터 달아나 버려, 구해영과 조성겸과 삼각 로맨스에 열중한다. 그렇게 달아난 주인공은, 해프닝으로 치뤄진 결혼식 첫 날 밤, 그들의 호텔 방에서 또 한 사람 허영미(김보미 분)가 죽음으로써 살인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하지만 그뿐, 두 주인공은 신혼여행이랍시고 달아나 버리고 살인 사건의 해결은, 촉 좋은 형사 김금보(안길강 분)의 손에 맡겨질 뿐이다. 

보통 이렇게 살인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주인공은, 범인의 의심을 받거나, 불가피하게 오해를 뒤집어 쓰고 그 사건 해결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주인공들의 러브 스토리는, 살인 사건 해결과 맞물려 진행되게 마련인데, 초반 그럴 듯하게 남상효를 용의자 심문까지 하던 스토리는 버거웠는지, 두번 째 살인 사건에 이르면 일찌감치 주인공들을 호텔 밖으로 보내 버린다. 그러다 보니, '킬링' 도, '로맨스'도 삐걱거리면서, 길고 지리한 주인공들의 사랑의 줄다리기만이 16부를 채워간다. 


<마이 시크릿 호텔>을 통해서 로맨틱한 러브 스토리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tvn은 킬링 로맨스를 내걸고 미스터리 스릴러와 러브 스토리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러브 스토리의 변주를 시도했지만, 결국 킬링도, 로맨스도 제대로 만족시킬 수 없었다. 과연 이 스토리를 가지고 굳이 tvn이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케이블에서 16부작을 고집할 이유가 있었나 의심해 본다. 차라리 조금 더 회차를 줄여 압축적인 스토리로 풀어냈다면, 지금 보다는 나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러브 스토리의 신선한 변주, 그건, <마이 시크릿 호텔>의 다음 작품, <라이어 게임>으로 넘어간다. 흡족치 않음에도, '킬링 로맨스'를 내건, 장르적 변주의 신선한 시도는 그럼에도 <마이 시크릿 호텔>의 성취이다. 부디 다음 작품에서는 좀 더 다음엔 좀 더 그럴 듯한 '킬링 로맨스'가 되어 돌아오기를. 

by meditator 2014. 10. 15. 10:57

10월 13일 kbs2 새 월화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가 첫 선을 보였다.

제목에서부터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를 본 사람이라면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듯이, <내일도 칸타빌레>는 2009년에 방영된 우에노 주리와 타마키 히로시가 출연했던 <노다메 칸타빌레>를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두 주인공의 개성 넘치는 연기와 만화적 상상력이 넘쳐 흘렀던 <노다메 칸타빌레>였기에, 이 작품을 리메이크 한다고 했을 때 일본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십중 팔구 우려의 목소리를 드러내었었다. 심지어 여주인공으로 걸그룹 소녀시대의 윤아가 하마평에 오르내리다, 우에노 주리가 열연했던 노다 메구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고, 한 발 물러서는 해프닝까지 발생했었다. 우여곡절 끝에 심은경이 노다메구미 역으로 낙점되고,<수상한 그녀>를 통해 검증받았던 그녀의 연기력에 대한 기대로 <노다메 칸타빌레>의 리메이크에 대한 우려도 불식되는 듯 싶었다.

그리고 10월 13일 첫 방송을 선보인 <내일도 칸타빌레>, 불행히도, <수상한 그녀>에서 발군의 연기를 보였던 심은경이 무색하게, 일본 드라마를 리메이크 했던 한국 드라마들이 노정했던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리메이크 된 일본 드라마를 떠올려 보자. <직장의 신>을 비롯하여, <여왕의 교실>, <수상한 가정부>까지가 기억에 남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그 중 <직장의 신>은 파견직 사원의 애환을 다루었던 일본 드라마 <파견의 품격>을 우리 실정에 맞는 비정규직 사원의 애환을 '미스김'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빗대어 재탄생시켜 리메이크의 성공적 사례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그에 반해 <여왕의 교실>은 교육의 현실을 드러낸 좋은 주제 의식에도 불구하고, 여주인공 마여진(고현정 분)을 비롯하여, 상황 설정등이 우리 현실에 맞지 않아, 그 본래의 취지마저 펴폄하된 케이스이다. 마지막 <수상한 가정부>의 평가는 더 열악하다. 마치 복사기로 찍어내듯 일본 드라마 <가정부 미타>를 베끼듯 만들었지만, <가정부 미타>가 제시하고자 했던 가정의 행복에 대한 의미 마저도 희석시킨 어설픈 흉내내기란 평가만을 받은 채 조용히 퇴장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섣부르지만 첫 선을 보인, <내일도 칸다빌레>가 차지한 좌표는 저 세 드라마 중 어디에 가까울까? 안타깝게도, <내일도 칸다빌레>는 대사부터 일본 드라마를 마치 그대로 베껴온 듯 <노다메 칸타빌레>와 흡사했지만, 역설적으로 <노다메 칸타빌레>와 가장 다른 드라마처럼 느껴졌다.

<내일도 칸타빌레>의 첫 회 드라마 속 모든 설정들은 <노다메 칸타빌레>의 그것도 거의 똑같다. 비행기 공포증을 가져서 은혜하는 선생님이 계신 유럽으로 유학을 갈 수 없는,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 자신이 속한 대학이 추구하는 콩쿨 경력 따기 위주의 교육에는 반발하는 남자 주인공. 쓰레기 더미에서 살며 악보를 보지 못하고, 박자마저 제대로 맞출 수 없지만 천부적 연주 실력을 가진 4차원의 여주인공, 그들이 우연히 술 취한 남자 주인공으로 인해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계속 만나게 되는 해프닝은 이미 일본 드라마를 통해 익숙한 것들이다. 주원이 연기한 차유진은 타마키 히로시처럼 뭇 여성들의 찬사를 받는 자뻑 캐릭터이고, 심은경이 연기하는  설내일은 우에노 주리처럼 명랑 만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존재감을 보인다. 심지어 그들이 매번 마주치는 상황은 해프닝의 연속이며, 대사마저도 만화적이다.

 

물론 일본 원작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역시 첫 회부터 손발이 오그라드는 정서를 견뎌내야 드라마의 재미로 다가갈 수 있는 만화적 정서로 가득하다. 그리고 <내일도 칸타빌레> 역시 이 드라마의 촛점이 바로 그런 만화적 설정과 캐릭터에 있다고 판단 한 듯, 원작의 분위기를 충실히 옮기려 노력한다.

그런데, 비록 첫 회지만, 보고 있다보면 자꾸 드는 생각은, <노다메 칸타빌레>가 그랬었나? 타마키 히로시가 그랬었나? 우에노 주리가 그랬었나? 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 상황도 설정도 일본 원작과 비슷하고, 주원은 타마키 히로시처럼 자존감이 넘치다 못해 자뻑이 된 대학생을 연기하고, 심은경은 그녀 자신의 세계에 갇힌 4차원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충실한데, 그 맛이 전혀 다르다. 리메이크니, 맛이 달라야 하는 건 맞는 말인데, 그 다른 맛이 그저 열심히 흉내를 내는데, 전해 다른 맛을 준달까? 마치 <수상한 가정부>나, <여왕의 교실>에서 최지우나, 고현정이 일본 드라마의 여주인공의 말투와 행동거지까지 똑같이 하는데도, 어색했던 그 느낌을 <내일도 칸다빌레>가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노다메 칸다빌레>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스런 여주인공의 우스꽝스런 4차원 연기, 잘 생긴 남주인공의 도를 넘친 자뻑 캐릭터, 만화적 해프닝들? 그런 만화적 설정 뒤에 숨겨진 것은, 대학에 가서도 여전히 경력을 따기 위해 경쟁적으로 콩쿨이나 나가는 학습을 하고 있는 대학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 면에서 <노다메 칸다빌레>는 그런 현실에서 튕겨져 나온 이단아들, 괴짜들이 만들어 내는 하나의 우화이자, 대안인 것이다. 과연 그런 숨겨진 고민들을 <내일도 칸타빌레>가 담고 있을까? 그러기에는, 첫 회를 선보인 <내일도 칸다빌레>가 보여준 모습은, 그런 현실을 고민한 캐릭터라기 보다는, 타마키 히로시를, 우에노 주리를 고민한 두 주인공이 앞서 보인다. 무엇보다, 한국으로 들어온 일본 드라마가, 일본의 정서에 맞게 각색된 만화적 상상력을 한국의 정서에 맞게 재창조해야 한다는 고민에서 <내일도 칸타빌레>는 아직 아쉬워 보인다.

 

또한 <노다메 칸타빌레>는 기본적으로 음악을 매개로 한 드라마이다. 그렇다면 <내일도 칸타빌레>는 어떨까? 이미 <베토벤 바이러스>를 시작으로, 최근 <밀회>까지, 음악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드라마들이 있었기에, <내일도 칸타빌레>에 대한 평가는 더 냉정해 질 수 밖에 없다. 드라마 내내 흘러나오는 클래식은 듣기 좋았지만, 드라마로서 클래식에는 의문 부호가 붙여진다. 피아노 연주자로 나오는 두 주인공의 연주 모양새와 음악의 부조화는 옥의 티라기엔, 음악 드라마로서 아쉬움을 남기고, 클래식 레슨에 등장한 정체 불명의 음악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차유진의 경쟁자로 나오는 지휘자의 연주는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내내 클래식이 만연하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가요 ost에 이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아직 첫 방을 선보인 <내일도 칸타빌레>가 가야할 여정은 길다. 부디 우에노 주리를 흉내낸 <노다케 칸다빌레>의 어설픈 짝퉁이 아니라, 설내일의 <내일도 칸타빌레>가 되기를 바란다. 심은경의 내공과 주원의 성실성이라면, 불가능한 도전이 아닐꺼라 믿어본다.  

 

by meditator 2014. 10. 14. 09:30

간만에 sbs의 단막극이 한 편 찾아왔다. 주말 드라마 <기분 좋은 날>이 종영하고, <모던 파머>가  아직 그 자리를 메우기 전 빈 틈을 메꾸기 위해서이다. 비록, 불현듯 찾아든 2부작 단막극이지만, 김미숙이 호연했던 <사건 번호 113>에 이어  자식 앞에서 딜레마에 빠진 모성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더구나, 최근 사회적으로 '성폭력' 범죄에 대한 자각이 높아지는 시점에서, 당사자건, 피해자건을 떠나, 부모된 자의 입장에선 등골 서늘한 고민을 던져준다. 아니, 극중에서 등장한 성폭력 범죄만이 아니다. '맹목적' 부성이나, 모성이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암묵적인 우리 사회 분위기에서, <엄마의 선택>은 오늘을 사는 부모들에게 현실적인 질문은 던진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냐고?




2부작으로 이루어진 <엄마의 선택>에서, 선택에 기로에 놓인 엄마는 이제 막 시사프로그램의 간판 mc가 된 잘 나가는 앵커우먼 진소영(오현경 분)이다. 시사 프로그램을 이끌고 갈 만큼 사회적 인식도 높다. 그런 그녀가 아침 출근 길에 차 앞으로 뛰어든 소녀 서현아(화영 분)를 만난다. 흐트러진 옷 매무새, 바지 아래로 흘러내린 흔적이 있는 피, 정신줄을 놓은 듯 당황한 기색, 진소영은 그녀가 성폭력 피해자임을 짐작하고,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현아에게 산부인과로 가 폭력 상대방의 정액을 채취할 것을 설득한다. 
하지만, 그렇게 적극적으로 막상 자신이 적극적으로 설득했던 그 소녀의 가해자가 바로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진소영은 혼란을 느낀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러하듯이, 부인하는 아들의 말을 믿고, 아들의 범죄 사실을 전제로 하여 사건을 진행하려는 변호사마저 바꾸려 든다. 그러나, 바로 그녀의 설득으로 남긴 정액에서 채취한 dna 검사 결과가 자신의 아들 역시 가해자임을 드러내자, 그녀는 오열한다. 모든 사실을 알고도 처음에는, 예의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던 자각을 가진 이성적 존재로, 아들의 사건을 접근하고자 한다. 아들을 설득하여, 모든 죄를 자백하고, 대가를 치루자고 한다. 하지만, 오로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숨쉬는 거 외에 공부만 해왔다는 아들과, 그런 아들을 위해 무엇을 해준게 있느냐는 남편 앞에, 심지어, 지금까지 해온 것을 포기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는 아들의 자살 시도에, 냉철한 사회적 인식을 가졌던 진소영은 흔들린다. 

엄마의 선택
(사진; tv데일리)

그리고 결국 아들을 위해, 진소영은 '맹목적' 모성의 길을 택하고, 그런 그녀가 선택한 수단은 또 다른 모성을 유린하는 것이었다. 즉, 도박 빚에 몰린 현아의 어머니를 찾아가, 도박판 앞에서 물불을 안가리는 그녀에게 2억을 쥐어주고 합의서를 들이민 것이다. 그 결과 당장은, 아들의 소원대로, 재판정은 아들의 무죄를 선고한다. 
하지만, 진소영이 가린 하늘은 그녀의 손바닥만했다. 현아의 엄마는 딸에게 또 한번 정신적 폭력을 행사하는 재판을 목격하고, 죄책감에 죽어가며 탄원서를 남긴다. 진소영이 처음 현아를 설득했던 블랙박스가 재판장 앞으로 배달되었다. 결국, 진소영의 말대로, 아들의 성폭력 범죄는 에돌아, 이제 진소영조차 위증죄로 얽어매어 아들과 함께 감옥행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엄마의 선택>이 그 어떤 스릴러보다 섬뜩한 것은, 바로 이 드라마가 던지는 '선택'에 대한 질문에 있다.  잘 나가는 앵커 진소영조차, 아들의 범죄 사실과, 아들의 탄원 앞에서 무릎을 끓을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부모된 자, 그 누구도, <엄마의 선택>을 두고 자신의 입장을 떳떳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나토 가나에의 원작을 옮긴 영화 <고백>(2010년 일본)처럼, 내 자식이 피해자라, 엄마로써 그들을 단죄하는 위치라면 당당하게 자신의 범죄를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지만, 같은 맹목적 모성인데, <엄마의 선택>처럼 내 자식이 가해자라면, 자신은 진소영과 다를 것이라고 쉬이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성의 위대함은 역사 이래 늘 칭송의 대상이었기에, 그 모성이 이렇게 왜곡되게 씌여졌을 때, 그 앞에서 우리는 난감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맹목적 모성을 논하기에 앞서, 바로 그런 맹목적 모성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우리 사회 학부모의 현주소를 직시해야만 한다. 극중 진소영의 아들은 하버드 대학 입시를 앞둔 모범생이다. 그런 아들이 성폭력 범죄를 저질렀을 때 처음 진소영은 아들에게 말한다. 우리 모든 처벌을 감수하자고. 그런 엄마에게 아들은 말한다. 그럴 수 없다고, 1000시간이 넘는, 자신이 중학교를 들어 간 이래, 오로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자신은 숨을 쉬는 시간 외에, 공부만 했다고. 바로, 그 맹목적 모성의 전제에 깔린 것은, 우리 사회의 맹목적 입신주의, 학력주의인 것이다. 내 자식이 그저 좋은 대학만 간다면 다 된다는 입장으로, 자식을 키워 온 우리 사회의 부모들의 현주소를 <엄마의 선택>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단지 <엄마의 선택>의 아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다. 좋은 대학을 가겠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우리의 자녀들이, 도덕성이나, 사회적 의식 따위는 내팽겨쳐 둔 채, '상위 1%의 엘리트'가 되기 위해 공부에만 매진하는지 새삼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다. '카르페디엠'을 포기한 채, 맹목적으로 입시에 희생된 아이들에게 어떻게 부모가 맹목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기소 전까지는 무죄 추정의 법칙을 똑부러지게 말하는 괴물들을, 키운 것은, 바로 우리 부모들이라는 걸, <엄마의 선택>은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갈림길에 선 모성의 맹목성에 공감하기에 앞서, 그런 상황을 조장하고 있는 우리의 진짜 '맹목적'인 교육관을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드라마의 마지막 부분, 아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결국 에돌아 죄과를 치루게 된 것 뿐이라는 진소영이 낯설다. 재판정에 선 아들의 반성과 사과도 낯설다. 심지어 위증 죄로 감옥을 향해 걸어가는 진소영은 현실감이 없다. 

아마도 오늘도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자식의 좋은 학교 입학을 위해서는 국적 따위는 쉽게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재벌가의 기사들을 보면서, 죄값을 치루는 진소영이 현실감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드라마의 진소영은 단죄를 받게 되지만, 현실의 진소영들은, 자신이 권력과 부를 이용하여, 여전히 이리저리 법망을 잘 피하거나, 피하지 못해도 최소화하고 있다는 현실은 또 어떨까. 아니, 남의 부모를 논하기에 앞서, <엄마의 선택>을 보며, 반성은 커녕, 부모된 자, 자식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맹목성'이 여전히 기세 등등한 '나'의 현실 때문일 지도 모른다. 


by meditator 2014. 10. 13. 09:28

텔레비젼 속의 허지웅이란 캐릭터는 언제나 '방관자'에 가깝다. 평론가라는 직업 때문일까 흥분을 해서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는 제시되는 사안이나, 연애 사건에 대해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고자 한 발 물러나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마녀 사냥>에서 등장한 성적 본능에 초월하다는 '사마천'이라는 별명이 낯설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학창 시절이래 가장 좋았다는 자신의 짝꿍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언제나 객관을 유지하던 그가, 자신이 유지하던 틀을 깨고, 쓰윽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놀라웁다.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나? 하면서, 동시에, <학교 다녀왔습니다>가 뭐길래?

 

처음 연예인들이 고등학교로 간다고 했을 때만 해도, 지금의 고등학교 현실에서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란 회의가 앞섰다. 교육부 장관이 바뀔 때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번씩은 손을 봐야 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그러나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이 사회의 경쟁 이데올로기가 해소되지 않는 한 그 누가 손을 대도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닫는 끔찍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공감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군대보다도 더 끔찍한 곳이 고등학교라 해도 과언이 아닌 현실에서, 고등학교로 간 예능이라니?

 

<학교 다녀왔습니다>가 시작했을 때만 해도, 과중한 수업을 허겁지겁 따라가는 연예인들의 모습,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 되어, 혹은 외국에서 생활하여 낯선 연예인들의 당혹스러운 모습에 초점이 맞추어 졌었다. 그러던 것이, 회를 거듭하면서, '학교'와 '연예인'들의 시너지가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중구난방이었던 다수의 연예인의 조합도, 회를 거듭하면서 이제는 거의 고정이 된 출연자와, 거기에 맞추어 신선한 피를 수혈하며, 학교별로 색다른 구성을 만들어 낸다.

또한 획일적일 거 같았던 고등학교 생활도, 인천 외국어 고등학교처럼 기숙사 생활을 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최대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함으로써, 일률적인 연예인 학교 가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0월 11일로 마무리 된 인천 외국어 고등학교에 간 연예인은 성동일, 윤도현, 남주혁, 오상진, 허지웅, 강남이었다. 그 중, 성동일, 윤도현, 남주혁은 이미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를 해왔던 출연자이고, 거기에 새로운 피로 오상진, 허지웅, 강남이 합류하게 되었다.

 

처음 시선을 끈 것은 1987년생 일본 출신의 강남이었다. 현재 고등학생들보다는 한참 형이지만, 아직 신인 아이돌 그룹 멤버로 연예계의 능란함이 덜 묻어나는 그는, 동료 학생들에게 물량 공세를 펴며 호의를 얻던 동료 연예인들과 달리 혼자만 매점행을 강행하는 예외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런 그였기에, 그가 같은 반 학우들과 마음을 열고, 제작진에게 돈을 빌려서라도 매점의 군것질을 나누고, 그들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모습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이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의 백미가 되었다.

 

기숙사라는 함께 지내는 공간이 있었기에, 인천 외고 편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는 새로운 예능의 재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선생님 몰래 함께 컵라면을 나누어 먹다 걸리는 모습은 학창 시절이 아니고서는 경험해 보지 못하는 해프닝인 것이다.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고, 강남이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어설프게 나누어 먹다 걸려서 톡톡히 혼을 나는 것과 달리, 성동일은 거의 스파이 작전을 불사하며 같은 반 아이들에게 '치킨'을 먹인다. 물론 그런 행동은 학칙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아이들을 둔 아빠 성동일이 밤늦게 까지 공부하는 같은 반 친구들을 안쓰러워 하며 준비한 작전에 눈쌀이 찌푸려지기보다는, 흐뭇한 미소가 먼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지막, 치킨을 다 먹고 교장 선생님께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옵션의 애교다.

 

같은 반 아이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형님이지만, 아빠같이 푸근한 모습을 보이는 성동일, 여전히 모범생의 포스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마흔이 넘는 나이에도 같은 반 학우의 연애가 신기해 한 달음에 달려가는 순진함을 잃지 않는 윤도현, 19금 방송을 주로 해와, 그런 그가 고등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이 말이 안되는, 하지만, 가장 자유로울 것 같던 그가, 낮져 밤이의 당혹스런 질문을 넘어 고등학생의 연애에 대해,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뜻밖의 답을 보여, 오히려 진솔해 보였던 허지웅, '이게 뭐라고' 하면서도, 한국사 퀴즈건, 학급티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오상진 등이, 새로운 학교에 걸맞는 새로운 재미 이상을 준다.

 

(사진; tv리포트)

 

하지만 무엇보다 회를 거듭하면서 <학교 다녀오겠습니다>가 회를 거듭하면서 재미의 깊이를 더하는 것은, 그저 연예인의 학교 체험기, 적응기가 아니라, 연예인과 학생, 학교간의 교감이 프로그램의 주된 내용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인천 외고 마지막 회, 겨우 일주일 남짓 연예인들과 함께 생활했던 아이들이 하나같이 운다. 심지어 코피까지 흘리며 엉엉 운다. 이제는 한달 동안 교생 선생님이 실습을 다녀가도 덤덤한 아이들이, 겨우 일주일 만에,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학교 방송에 게스트로 나간 허지웅은 그에게 전달된 학생의 편지 서두만 보고도 그 학생이 바로 자기 반 학생 누구라는 걸 알아챈다. 그 이야긴, 겨우 일주일이지만 그의 속사정까지 알아챌 정도로 서로가 깊은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 학생들도 연예인들을 보내기 위해, 이벤트와 선물을 준비하지만, 허지웅 등은 자신의 짝꿍을 위해, 자신이 쓰는 것과 똑같은 수첩에 자신의 글을 담아 선물로 남긴다. 학창 시절 이래 가장 좋은 짝꿍이었다는 말을 남기며.

강남 역시 학생들에게 말한다. 자신이 학교에서 짤렸다며, 너희같은 친구들을 만났다면 자신의 학창 시절과 그 이후의 삶이 달라질 것이라고. 그런 강남은 자기 반의 반장까지 하면서, 그러면서도 샤워하는 동료 학생의 욕실을 도발할 정도로 개구진 모습도 보이며 열심히 잃어버린 학창 시절을 다시 열심히 해보고자 한다. 함께 공부하던 정자에서 친구의 무릎을 베고 누은 강남의 모습이 어느덧 어색하지 않게 될 정도로.

 

하지만 한편에서 단 일주일을 함께 생활하는 연예인들에게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사람이 그리운 학생들이 보여져 안쓰럽기도 하였다. 친구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부모님까지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있지만, 단 일주일 동안이지만, 공부와, 경쟁과, 규칙이란 것을 벗어나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생활하는 그런 여유를 가지게 해준 연예인들의 방문이 준 일탈이 그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들지 않았나 해서 안쓰러운 것이다. 자신들을 성적이 아니라, 그저 같은 반 친구로 다가온 그들에게 눈물 흘리는 아이들에게서 순수함과 함께 고립감을 느꼈다면 지나친 확대 해석일까. 한참 정신적으로도 성숙해질 나이에, 낮져밤이가 궁금해, 19금 프로에 등장하는 허지웅이 인기인이 되는 나이의 그들에게, 연애도 좋지만, 유한한 학창 시절이 아쉬우니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진심어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더 많은 기회가 그들에게 주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를 통해 드는 생각이다.

 

뻔할 것 같다는 예측과 달리, 회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예능적 재미를 만들어 가고 있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다음 회는 한국 학교로 간 외국인들이다. 과연 이들은 또 우리에게 몰랐던 학교의 어떤 모습을 알게 해줄까?

 

 

by meditator 2014. 10. 12. 12:50

10월 10일 밤 10시부터 방영되는 <kbs파노라마>는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자본론]을 다루고 있다.

 

칼 맑스가 [자본론]을 통해 19세기의 자본주의를 정의내렸듯이,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론]을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에 이르기까지의 자본주의를 새롭게 정의내리고자 한다.

영어로 695페이지, 우리 말로는 820페이지에 이르는 피케티의 책은 201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것을 2014년 4월 하버드 대학 출판부가 출간하자마자, 전세계 각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심지어 책은 과거 200년 동안 프랑스,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부의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세무 통계를 기초로 하여 그 추이를 수치화한 책으로, 수많은 그래프와 통계적 내용들로 가득찬 전문 경제 서적이다. 하지만, 2011년 월가 시위에서도 보여지듯이 전세계적으로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각 국민의 소득 불균형을 정확하게 수치화한 피케티의 책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바이블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kbs 파노라마>는 지난 9월 한국어판 발행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피케티를 밀착 취재하면서,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의 내용을 되짚어 간다. 그저 책의 내용을 되짚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 걸맞는 각종 사례들을 들어가면서, 지금 한국에서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 가지는 의미를 밝히고자 노력한다.

 

피케티는 그의 책 [21세기 자본론]에서,미국의 사례를 들면서, 20세기에서 21세기 초까지 상위 1%의 소득 계층이 차지하는 소득 비율을 추적한다. 2007년을 기준으로 상위 1%는  23.5나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 해의 차지하는 비율이 아니다. 지난 몇 십년 동안 노동 계층의 실질 임금율은 물가 상승률에 비해 감소되었다는 결론이 나올 만큼 전체 소득 비율 중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든 반면, 자본 소득의 비중은 늘어났다는 것이다.  회사는 커져도 노동자들의 삶은 위축되고, 노동 생산성에 미치지 못한 실질 임금의 감소는 기업이 잘 되도 가계에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노동자들의 삶을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피케티는 단언한다. 새로운 세습 사회가 등장하고 있다고. 노동 소득 비율이 증가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세습된 부의 존재가 중요하고, 심지어 노동을 하는 것보다, 부를 물려 받는 것이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되어간다고 말한다.

 

<kbs파노라마>는 이런 피케티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전달하기 위해 마트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주부를 보여준다. 지난 10년간 '근속' 표창장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일해 온 그녀, 하지만, 그녀의 월급은 동결되었거나, 일년에 50원을 오르는 정도라, 10년 전과 비교해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금액을 받고 있다. 그러니 결국 실질임금은 감소하고, 10년 동안, 맘 편히 제대로 쉬어보지도 못한 채 일에 매달린 그녀는 여전히 마이너스인 삶에 시달린다. 피케티의 책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열풍의 근저에는 바로 이런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박한 현실 인식이 존재함을 다큐는 보여준다.

 

이런 불평등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피케티가 제시한 통계 자료에서 이른바 피케티 지수라고 하는 국민 소득대 자본 소득의 비율을 의미하는 베타지수가 제시된다. 베티 지수의 증가는 곧 불평등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인데, 1950년대 이후 베타 지수가 증가 일로에 있고, 앞으로도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라 피케티는 주장한다. 즉, 존이 돈을 버는 속도가 일을 해서 버는 속도보다 빠르기에 부의 불평등은 심화되어 왔으며 그 부는 세습되고 있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오늘날의 교육이 부모의 계급을 강화시켜주는 통로가 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하버드에 다니는 대학생들 학부모의 소득을 조사해 보니, 미국 상위 2%의 소득과 동일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국가에서 마찬가지였다. 저성장, 저출산이 심화된 사회에서, 신분 세습, 즉 부의 세습은 사회의 출발선에 선 젊은 층에게 중요한 부의 결정 요인이 되고 있다.

 

카메라는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온다. 하루 종일 패스트푸드 점에서 일을 마치고 나온 대학생,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힘들어 뒤뚱뒤뚱거리며 걷는 그녀의 일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취업 준비를 해야 하니까. 그런 그녀를 짖누르는 것은 그녀는 본 적도 없는 1000만원이 넘는 학자금 대출 빚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장미빛 미래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학비 조달에 따른 정규직 지원 현황은 피케티의 진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부모에게 학비를 조달받은 학생들이 더 많이 정규직을 얻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부모의 계급을 강화시켜주는 통로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듯이 사회는 이런 심화된 불평등을 간과한 채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한 성장만을 부르짖는다. 하지만 그런 성장 도그마가 허상이라는 것을 피케티는 그의 통계를 통해 논박한다.

미국의 지난 역사에서, 자본 소득 비율이 높았던 즉 소득 불평등이 최대였던 1928년, 그리고 2007년 바로 다음 해 미국은 경제 위기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빈곤한 가정이 많아지고, 그들이 빚을 지고, 그러면서 그들의 구매력이 떨어지면서, 자본의 산물을 구입하는 것이 용이해지지 않음으로써 사회 전체가 위기를 겪게 된다는 것을 피케티는 엄연한 통계를 통해 증명해 낸다.

즉, 레이건, 대처 등이 규제 완화를 시키고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킨 시킨 시기 경제는 위기를 겪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루스벨트 대통령 시기 미국은 상위 1%에게 소득세를 물리는 등 상위 1%의 소득비율은 감소했지만 경제는 황금기였다는 것을 통해 경제는 곧 정치이며, 선택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미래에 대해 피케티가 제시한 대안은 크게 글로벌 부유세, 교육 공공투자, 고소득자 누진과제 등 세 가지이다. 이 중에서, 피케티가 강조하는 것은 고소득자의 누진과세이다. 루스벨트가 상위 1%에게 82%의 누진세를 적용해도 자본주의가 파괴되지 않았음을, 아니 오히려 당시 경제 성장률이 80년대 이후보다 오히려 높았음을 들면서, 누진과세가 지금의 불평등을 해소할 좋은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tv파노라마>는 피케티의 주장을 넘어 실제 소득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소개한다. 미국 상위 1%에 속하는 닉 하나우어는 소수에게 집중되는 부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불평등이 심화되면 물건을 구매할 사람이 없어진다면서, 부자 증세 찬성론을 펼친다. 즉 소비자들이 돈을 더 많이 가져야 기업가들이 돈을 더 벌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일본 요코하마 게임 업체는 기업의 이익을 한 달에 하루 주사위를 던져, 그 나온 비율만큼 직원의 월급에 추가로 지불함으로써 이익을 환원하고자 한다.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로 알려진 일본의 작은 빵가게 와타나베 이타루는 가게 수익을 골고루 나눠주는 혁신적 경영 방식을 보여준다. 심지어 매출에 비례해 직원의 월급은 늘어나지만, 주인은 그대로 받는 식이다.

 

그렇다면 이런 부의 재분배가 정말 피케티가 말하는 바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올까?카메라는 미국의 최저임금 시위로 시선을 돌린다. 맥도날도 노동자들을 위시하여 미국의 노동자들은 오랜 시위 끝에 15달러라는 최저 임금의 상승을 얻어냈다. 시간당 그 금액의 인상은 큰 건 아니지만, 미국 전체 경제로 보면, 엄청난 금액이 되고, 이제 최저 임금이 상승된 노동자는, 자시만의 집 등 소비를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지하철 보안관인 김진훈씨 2012년 5월 정규직이 되어 월급이 두 배가 된 그의 삶이 달라졌다. 비정규직으로 살던 당시에는 소비란 개념이 없이 먹고 살기에 급급하던 그가, 정규직이 되면서 자녀의 보험에서 부터, 보금자리까지 규모있는 소비를 계획하기에 이른다.

결국 소득이 소비를 낳는다는 것을 카메라는 발품을 팔아 증명해 내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극명한 피케티의 획기적인 진단이 곧 현실로 이어지지 않고 있음을 <tv파노라마>는 보여준다. 여전히 현실은 불평등의 심화보다는 성장만이 우선시 되고 있는 것이다. 피케티의 나라인 프랑스의 올랑드 대통령은 대선 당시 상위 1%에 대한 소득세를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프랑스 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았다. 현실은 녹록치 않다.

 

<tv파노라마>의 마지막은 피케티의 질문을 맺는다. 피케티는 묻는다. 우리 사회가 정말 민주적일까? 21세기 자본주의가 나아갈 길은 어때야 할까?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다같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우스개 소리가 있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을 산 사람은 많아도 막상 그걸 완독한 사람은 별로 없다는. [21세기 자본론]에 대한 해설서가 다시 나오는 등 사회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화제가 되고, 갑론을박이 되고 있는 책이지만, 정작 800여 페이지가 넘는 그 책을 소화해 내기는 어려운 현실에서, <tv파노라마>는 피케티의 자본론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그저 설명만이 아니다. 우리와, 일본의 각종 사례를 예시로 들면서, 피케티가 주장하고 있는 각종 통계들이 얼마나 정확한 현실 진단인가를 확인해 준다. 뿐만 아니라, 미국 상휘 1% 기업가의 입을 통해, 그리고 우리나라 정규직 전환 노동자의 모습을 통해, 피케티의 해결책이 그저 이상향이 아님을 부연 설명한다. 비록 한 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쉽고, 설득력있는 21세기 자본론 독해였다.

by meditator 2014. 10. 11. 12:15

<해피 투게더>를 잡기 위해 무수한 예능을 런칭하는 mbc가 이제 방향을 선회해, 목요일 밤 11시 15분, 공익적 성격을 내세운 다큐 프로그램을 파일럿으로 등장시켰다. <제 3의 눈 써드아이>

 

<제 3의 눈, 써드 아이>는 말 그대로, 이제 우리 사회 요소요소에서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cctv, 블랙박스, 핸드폰 카메라를 공익의 도구로 불러온다. 하지만, 언제나 당신을 지켜보고 있어 하는 듯한 스릴러의 제목과 같은, 제3의 눈, 써드아이라는 제목과 달리, 우리를 지켜보는 시선의 공공성을 프로그램의 근간으로 삼는다.

 

제일 처음 등장한 사건은 지난 7월 광주 도심 한 가운데에서 폭발하여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린 광주 헬기 추락사고이다.

70~80도, 거의 수직으로 내리 꼿듯이 추락한 광주 헬기 추락 사건을 <제 3의 눈,  써드 아이>는 주변 cctv 영상, 차량 블랙 박스 영상을 동원하여 다시 한번 재조명한다.

우선 이를 통해 다시 부연 설명된 것은, 왜, 헬기는 그곳에 그렇게 가파른 각도로 추락하게 되었은가이다.

cctv 영상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통해 작은 공터에 추락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인명 보호를 우선으로 훈련받아왔던 소방관들이기에, 헬기를 조종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면서도, 상가와, 아파트, 심지어 버스까지 피하며, 좁은 공터에 헬기를 추락시키는 살신성인의 정신을 보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헬기가 추락할 시점에 바로 그 자리를 지나던 버스는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바로 그 공터 옆에 정류장에 서게 되어 있던 버스, 하지만 천재일우로, 버스는 새로 신설된 정류장에 내릴 사람이 없어서 그냥 지나칠 수 있었으며, 마치 하늘이 돕기라도 한듯이, 신호등도 바뀌지 않아 버스와 헬기의 추락을 피할 수 있었다는 간담이 서늘한 우연을 보여준다.

헬기를 탄 소방관들의 살신성인의 희생을 cctv 영상을 통해 재조명한 것도 감동적이었지만, 9일 방송에서, <제 3의 눈 써드아이>란 프로그램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 준 것은, 헬기의 각도나, 버스의 우연한 행운보다는, 마지막에 설명된, 버스 정류장의 여고생이었다.

사고 전 cctv를 통해 확인된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던 여고생, 그 학생이 앉아있는 정류장은 헬기가 추락한 지점으로부터 불과 어른 걸음으로 열 다섯 걸음이었다. 하지만 헬기가 폭발을 일으킨 후, 울면서 버스로 달려온 여고생은 겨우 다리에 2도 화상을 입은 정도일 뿐이었다.

그 학생이, 건너편 상가 유리창이 폭발의 잔여물로 인해 다 깨질 정도의 상황에서 그나마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류장 때문이었다.

강화 유리와, 철제 기둥으로 만들어진 정류장이, 학생의 폭발로 인한 부상을 막아주었던 것이다. 공무원의 인터뷰를 통해 혹시나 차량이 인도로 들이닥칠 경우를 대비해서 강화 유리와 철제 기둥으로 만들어진 정류장을 선택했다는 인터뷰를 통해, 그저 별 의미없이 표지판처럼 서있던 정류장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보기 좋은 디자인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디자인의 의미도 새롭게 부각된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본을 지키는 것들이, 유사시에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가를  <제 3의 눈, 써드 아이>는 광주 헬기 폭발 사고의 정류장을 통해 강조한다.

 

헬기 폭발 사고 현장의 정류장과, <제 3의 눈 , 써드 아이>의 소재가 되는 cctv, 블랙박스, 핸드폰 카메라는 비슷한 성격을 지닌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평상시에, 일상 생활에서 드러나지 않은 존재, 하지만, 언제나 그 자리를 묵묵히 성실하게 지켜 감으로써 유사이에 인명과 재물의 손상을 최소화하거나, 진실을 밝혀주는 존재로서의 '공공성'을 지닌 존재로써 말이다.

이후 이어진 13명의 인명 피해를 낳은 부산 마을 버스 사건도 마찬가지다. 폭우 속 고무 대야로 목숨을 구한 아이의 사연 역시 시민들의 공공성이 부각되는 사건이다.

이처럼 <제 3의 눈, 써드 아이>는 cctv, 블랙박스, 핸드폰 카메라처럼 일상화된 존재가 된 것들의 존재를 드러내며, 그 공공성을 강조한 프로그램이다. 첫 회, 광주 헬기 사건이나, 부산 마을 버스 사건에서 처럼, 이들 기기를 통해, 시청자들은 몰랐던 진실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 osen)

 

 

하지만, 어쩐지 그, 제 3의 눈, 써드아이의 공공성에 흔쾌히 맞장구만을 쳐줄 수는 없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다음 카카오톡 검열 논란에서 보여지듯이, 우리 사회에서 일상화되어 가고 있는 각종 정보 기기들이 우리 삶을 항시적으로 주시하고 있는 '빅브라더' 의 역할 때문이다.

이 기기들은, <제 3의 눈, 써드아이>에서처럼, 흘려지나가는 사건의 숨겨진 문제를 찾아내는 공공적 성격을 지니지만, 동시에,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는 무서운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해 내고 있다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cctv, 블랙박스, 핸드폰 카메라 가 숨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그들의 지켜봄을 용인하게 되지만은 않는 것이다.

 

첫회, <제 3의 눈, 써드 아이>는 숨겨진 1인치를 찾아내듯 재미있었다. 심지어, 광주 헬기 추락 사고의 소방관들의 살신성인과, 정류장의 공공성이 살려낸 학생에 이르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연예인들이 나와서 구성하는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맛볼 수 없는 사실이 전하는 감동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공공성에의 편향이, 혹은 '빅브라더'에 나를 양도하는 백지 수표가 될까 두렵기도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양자의 딜레마를 수용한 <제 3의 눈, 써드 아이>는 힘들까

by meditator 2014. 10. 10. 12:28

프로그램 제목이 아니라 진짜 농부가 사라지고 있다.

국정감사 보도 자료에 따르면, 2007년 327만명이던 농업 인구는 2012년 291만 명으로 무려 12%나 감소되었다고 한다. 1970년 1442만 명이래 지속적으로 감소되어 왔던 것이다. 그 이유는, <농부가 사라졌다> 1부를 통해 사실적으로 보고 되었다.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온, 2,3차 산업 위주의 농업 희생 정책, 그 와중에서 농가들은 밀려드는 저렴한 외국 농산물과 거대 외국 자본이 장악한 사료와 종자, 비료, 농약 시장에서 살아남기가 점점 힘들어 지고 있는 것이다. 귀농 인구가 늘어났다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농촌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고령의 노인들이다. 그런 현실에 <농부가 사라졌다>라는 가상 다큐의 근거가 마련된다.

 

1,2부에서 사라졌던 농부들이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돌아온 농부는 예전의 그 농부들이 아니다. 거대 자본에 씨앗과 농약을 사야만 했던 농부, 가축값보다도 비싼 사료값을 지불해야 했던 농부가 더 이상 아니다.

인터러뱅, 만농인력의 법칙, 스스로 소비자를 끌어당기는 힘을 기른 농부 조직은 이제 더 이상, 농작물을 수확하는 것에서 그들의 역할을 국한시키지 않는다.

마지막 4부에서는 인터러뱅 농부들의 궁극적 지향을, 닥파머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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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다공증을 걱정하는 주부의 주방, 주부는 모든 음식에  카레와 비슷한 색깔을 띤 황금색 가루를 넣는다. 황금색 부침, 황금색 국, 밥상은 온통 황금색 천지이다. 맛도 마치 조미료를 넣은 듯하단다. 인터러뱅 농부를 통해 얻은 비법이다. mc 마이클은 그 비법을 찾기 위해 농촌을 찾아간다. 전라남도 곡성에서 마이클이 만난 것은 옥수수와 비슷한 마이클 키를 넘는 작물들이다. 하지만 비법은, 그 웃자란 작물이 아니었다. 작물을 잘라내고, 흙을 캐내어, 찾아낸 뿌리, 마치 생강과도 비슷한 '울금'이 골다공증의 비기였다.

그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해 뼈를 다쳐 운신을 하지 못하다 울금을 먹고 기사회생한 경험을 가진 농부는 그 경험을 살려 울금 재배에 나섰다고 한다. 생강 과의 울금은, 고등어에 넣고 조리를 하면 비린내를 없애 주는 등, 요리의 밑재료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커큐민' 성분이, 골다공증 등에 특효가 있다는 것이다.

 

특효는 울금만이 아니다. 마이클이 찾아간 까페에서 비밀의 재료를 넣은, 연두빛의 해독 쥬스를 만난다. 역시나 그 비법을 찾아 해독 쥬스의 원료를 재배하는 농장에서 찾아낸 것은, 바로, 우리밀 싹이다. 15센티 정도 자란 밀싹은, 그대로 즙을 내어 쥬스로 마셔도, 부침개 등 각종 요리의 재료로 쓰여지며, 풍부한 비타민과 미네랄의 공급은 물론, sodg효소가 많아 암과 노화를 유발하는 활성 산소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렇게 다시 돌아온 인터래뱅의 농부들은 적극적으로, 편협한 식생활로 인해 병들어 가는 국민 식생활을 바로 잡는 '의사'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다.

그것을 위해 이제 그들이 키우는 것은, 골다골증에 좋다는 울금, 해독에 효과가 좋은 밀싹, 당뇨에 특효약인 여주 등이다.  이들 작물을 키우면서 그들은, 소극적인 생산자를 넘어, 주체적인 건강 지킴이로 되살아 난다.

어디 그뿐인가, 사과로 와인을 만들고, 도시 양봉을 개척하며, 집밥 트렌드에 맞춘 계절 밥상이라는 새로운 농업의 트렌드를 개척하는 농부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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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부를 통해 다시 돌아온, 이른바 인터래뱅 농부들을 통해 <농부가 사라졌다>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침체되어 가고 있는 농업의 대안이다.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저가의 쌀 생산 정책을 유지해왔던, 거기에 이제 쌀시장 마저 개방한 우리나라에서 우리쌀을 지키기 위한 농부들의 고육지책은 농업의 고사를 낳았다. 곡창 지대마저, 하나 둘씩 논을 갈아엎어, 꽃 등의 화훼 농가로 전업을 하는 실정이다.

그렇게 고사되어 가는 농업 현실에서, <농부가 돌아왔다>가 모색한 해결책은, 바로 '닥파머' 혹은 직접 트렌드를 개척해가는 인터래뱅 농부로 귀결된다. 각종 현대병에 시달리는 도시인들에 맞춤 건강 식품을 생산하고, 주체적으로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만농 인력의 법칙'을 구현하자는 것이다.

 

또한 <농부가 사라졌다>는 농가 인구가 급속도로 줄어드는 가운데에서도, 2012년 8706가구에서 2013년 상반기에만 17745가구로 급격하게 늘어나는 귀농 트렌드의 발맞춘 제안이기도 하다. 실제 귀농을 했다가도 적응을 하지 못해 역귀농하는 인구가 늘어나는 과정에서, <농부가 사라졌다>는 이 시대의 트렌드 귀농의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또한 유의미하다.

 

농사비와 사료값도 나오지 않아 사라졌던 현실의 농부들로 부터 시작하여, 현재의 트렌드에 맞춰 현대인의 건강을 지키고, 트렌드에 맞춘 농산물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농부상을 구현해 냄으로써, <농부가 사라졌다>는 대안적 농업의 지평을 열어보인다

by meditator 2014. 10. 10. 11:08

2012년에 발간된 이토 우지다카의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1934년 일본 나다 학교에서 '기적'을 일으킨 하시모토 선생님의 독서법을 소개하고 있다. 나다 학교에 부임한 하시모토 선생님은, 학생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책을 읽는 방법으로, 3년 간 단 한권의 책을 읽는 독서법을 택한다. 그리고 하시모토 선생님이 선택한 책은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칭송받는 나라 간스케의  '은수저' 이다. 선생님은 교실 구석구석까지 들리도록 낭랑한 목소리로 소설 은수저를 읽어내려가고, 학생들은 책을 천천히 따라 읽어가며, 그 내용과 거기에 나오는 단어들을 추적하며 때론 샛길로 빠져들며, 철저하게 음미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다. 

(사진; spicy curry님 블로그)



그리고 올해 3월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면서 용인 성서 초등학교에서는, 바로 이 하시모토 선생님의 '기적의 독서법, 슬로 리딩'을 국어 수업 시간에 도입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큐 프라임- 슬로 리딩, 생각을 키우는 힘> 3부작은 1부 스스로 읽다, 2부 오감으로 읽다, 3부 생각의 문을 열다를 통해 용인 성서 초등학교의 도발적인 슬로 리딩 실험을 카메라에 담는다. 

실험에 들어가기에 앞서 요즘 학생들의 독서 습관이 어떤지 알아본다. 조사 결과 놀랍게도 용인 성서 초등학교 학생들의 독서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하루에 한 권은 물론, 심지어 열 권까지도 읽는 학생들이 있었으며, 40% 이상의 학생들이 한달에 90권 이상의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이 많은 책을 다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있을까? 조금 더 심도 깊은 질문을 통해, 학생들의 진솔한 답을 얻었다. 읽어야 한다기에, 혹은 학교와 학원의 과제로 책을 주워 삼기듯 많이 읽지만, 읽다보면 그저 글을 형식적으로 읽어내리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보'를 중요시하는 세상에, 아이들은, 허겁지겁 다독을 하지만, 정작 그것이 의미있는 경험으로 자리잡고 있는가에 대해 설문은 회의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무모하지만, 성서 초등학교의 세분의 선생님들은, 한 학기 동안 한 권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는 실험을 하고자 한다. 그것을 위해 선택된 책은 박완서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다.  교사들이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한번에 읽어버리기엔 두터운 분량의 책으로, 하지만, 우리 말의 풍부한 어휘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주인공으 성장담이 담겨있는, 다양한 국어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보기에도 두꺼운 책을 교사들은 하시모토 선생님이 그러하셨듯이 천천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냥 읽고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되새김질을 하듯, 책에 나오는 모르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역사적 사실 하나 없이 하나하나 곱씹어 간다. 때로는 선생님이 설명을 하고, 때로는 아이들이 스스로 사전을 찾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그러면서, 처음에 책이 두껍다 난색을 표하던 아이들은, 차츰, 스스로 책에 달겨들기 시작한다. 학교 수업에서 읽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만이 아니다. 몇 달후 읽고 싶은 책을 물어본 질문에서, 학생들이 읽고 싶은 책은 비단 소설이 아니라, 역사, 과학, 상식 등 다양한 분야로 그 흥미가 확산되어져 있었다. 스스로 책을 읽어가는 힘을 키운 아이들은, 이제 그 어떤 분야의, 두꺼운 책에도 두려움이나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과정은 그저 책을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산과 들로 나가, 싱아를 비롯해 책에 등장했던 나무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소녀의 고향인 개성의 음식들을 직접 만들어 맛보는 등, 오감을 통해 책 속의 글을 각자 살아있는 경험으로 살려낸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역사 공부도 빠질 수 없다. 이젠 아이들에게 화신 백화점은 그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백화점의 이름이 아니다. 소녀가 유학 온 서울을 상징하던 그 시대의 상징적 건물로 되살아 난다. 

이렇게 책 속의 내용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보던 슬로 리딩은 아이들이 책을 이해하는 깊이와 비례하여, 독서 활동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온 비애'라는 책 속의 추상적 문장 하나를 길어올려, 아이들의 경험을 교차하여 글을 써보기도 하고, 책의 내용으로 신문을 만들고, 글의 배경이 된 일제 강점기의 또 다른 문학 작품들, 윤동주의 '참회록'이나, 김수영의 '사령'까지 찾아 읽게 보고, 시를 직접 써보는 과정에 이른다. 심지어, 그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책을 마무리할 즈음이 되자, 아이들은, 책을 그냥 보내기가 아깝다며, 책의 내용을 가지고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하며 노래도 만들고, 만화책도 만든다. 

학기말, 아이들은 한 학기동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가지고 했던 자신들의 활동을 모아 전시회를 연다. 실제 한 학기 동안 그저 단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수업을 한다하여 내심 미더워하지 않았던 부모들은, 아이들이 모아놓은 성과에 감탄을 한다. 한 권의 책이 문제가 아니라, 단 한 권이라도 스스로 씹어 자기 것을 만드느냐가 독서의 관건이란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님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선생님들은 발표를 꺼려하던 아이들이, 책을 스스로 읽게 되자 자기 의견을 발표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게 되었으며, 쓰는 것 역시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따분하기만 하던 국어 수업을 아이들이 이제는 스스로 즐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육 방송이라는 취지에 맞게, <ebs다큐 프라임>은 우리 교육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다양한 교육적 실험을 카메라에 담고자 노력한다. 3부작<슬로 리딩, 생각을 키우는 힘> 역시 마찬가지다. 단 한 권의 책이라도, 천천히 음미하듯, 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을 100권의 책을 다독한 것보다 더 깊고 넓은 성취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준다. 

용인 성서 초등학교의 경우, 앙케이트 조사에도 나왔듯이,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 능력을 가진 부모들을 둔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로 보인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의 교육 열풍에 발맞춰 아이들은, 변호사, 의사 등의 장래 희망을 가지고, 논술 수업을 듣고, 부모들이 권장하는 많은 책을 읽는 모양새이다. 그런 아이들의 경우, 오히려 다독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된다. 하지만, 정반대로, 부모 두 사람이 다 취업을 하고, 아이들을 돌볼 수 없는 저소득층 아이들의 경우는, 그 반대로 전혀 책에 관심을 가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게임등에 빠져드는 정반대의 현상도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실제 그런 아이들이 초등 고학년, 혹은 중학교에 올라가 공부를 포기하는 이유 중  상당 부분은, 한글을 읽어도 그게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되는 독해 불능의 장애를 가지기 때문이다. 형식적 다독의 학생들에게도 슬로 리딩의 혁명은 필요하지만, 책의 재미를 느낄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는, 그래서, 정작 글을 읽어도 독해가 되지 않는 아이들에게도 슬로 리딩을 통해 책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실험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14. 10. 9. 17:32

다시 한번 포맷을 변화시킨 <매직아이>가 이번에 들고 나온 승부수는 '취향의 발견'이다.

기존의 '뉴스'를 매개로 한 토크에서 벗어나, 게스트들 각자의 취향을 들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을 새로운 토크의 매개로 삼았다. 

 

새로운 포맷 '취향의 발견'을 발견해줄 게스트로, 생고기 회를 즐기는 이원종, 청소 매니아 허지웅, 물에 빠진 손미나, 살구와 체리에 빠진 터키 남자 에넥스 카야가 등장했다.

몸이 아파 들른 한의원에게서 자신의 체질이 일반 한국인들과 다르다는 진단을 들은 이원종은, 배우로서 형형한 눈빛을 유지하고자, 생고기 회를 즐긴다며, 육회와는 다른 자신만의 취향을 전한다. 그리고 이런 이원종의 취향을 소개하기 위해, 마장동에서 대를 이어 가업을 이어가는 고기 소믈리에의 꽃살회가 등장하고, 이어 고기매니아 이원종의 소개에 따라, 기름기없이 즐기는 삼겹살구이까지, 먹방의 진수가 이어진다.

 

이원종에 이어 등장한 취향은 홀로 살아서 더 매력있는 남자 허지웅의 취향, 청소이다. 일찌기 스무 살 시절, 고시원 총무로 생활하던 때, 무엇이든 잘 정리하지 않으면 난장판이 되고마는 한 평 남짓 좁은 방에서 시작된 그의 청소 취향은, mc들과 게스트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할 만큼, 결벽증에 가까운 취향의 끝판 왕을 보여준다.

 

허지웅에 이은 에넥스 카야의 취향은, 역시나 이원종에 이은 하지만 이원종과는 다른 달콤한 먹방이다. 한국에 터잡고 오래 살아,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같다는 평가를 받는 에넥스 카야의 소망은 뜻밖에도 한국에 생소한 터키 알리기이다. 이를 위해 그가 가지고 나온 것은, 터키의 동치미라 할 수 있는 한국에 없는 체리와 살구를 끓여 만든, 콤포스트이다. 과일의 향과  영양이 엑기스가 되어 담긴 이 음식은 한국인들도 접근하기 쉬운 에넥스 카야의 향수어린 음식이다.

 

(사진; 스포츠 경향)

 

마지막 게스트 손미나의 물은, 어머니의 정성을 상징한다. 학창 시절 이래 공부를 하고, 아나운서라는 고달픈 직업, 그리고 뒤이어 여행가로 바쁜 딸을 위해 어머니가 준비한 좋은 재료를 넣고 달인 물은, 몸의 상태나 체질에 맞춰 섭취하면, 약이 따로 없는 보약이 된다.

 

'취향의 발견'이라며 등장시킨, 이원종의 생고기 회, 허지웅의 청소, 에넥스 카야의 살구 콤포스트, 손미나의 물의 조합은, 마치 <해피 투게더>의 '야간매점'과 같은 컨셉이다. 게스트들이 각자 자신만의 취향이 담긴 것들을 들고 나와, 그것을 매개로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는 식인 것이다. 지리멸렬해 가던 <해피투게더>는 한참 먹방이 화제가 될 즈음, '야간 매점'을 통해, 프로그램의 생명을 화려하게 부활해 낼 수 있었다. 과연 <매직 아이>도 그럴까?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야간 매점'이 성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에는, 당시에 트렌드가 되어가던 야식이라는 신선한 컨셉도 한 몫을 했지만, 게스트별로 다른 음식을 프로그램의 매개체로 윤활하게 버무려 낸 유재석이라는 명 mc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 회를 마친 <매직 아이>는 어떨까? 특별한 취향만큼 도드라진 이원종의 존재감과, '성욕'을 거부한 청정 독신남에 어울리는 허지웅의 취향도, 그 맛과 향기가 궁금한 에넥스 카야의 살구 콤포스트도 기억에 남지만 그뿐이다. 마치, 매일 저녁 찾아오는 각종 정보 프로그램에서 소개하는 맛집처럼, 그렇게 '취향의 발견'도 게스트들만의 별달랐던 취향으로 기억에 남는다.

 

물론, 먹음직스런(?) 육고기 회에, 달콤한 살구 콤포스트의 맛이 궁금하고, 허지웅의 방안이 궁금하지만 그뿐이다. 도대체, 애초에 <매직 아이>가 무엇이었을까 되볼아 보기 조차 아득하다.  그저 익숙한 김구라와, 그가 주도하는 분위기에, 몇 마디 말을 얹는 이효리, 문소리, 그리고 추임새를 넣는 문희준이, 게스트들의 독특한 취향의 소개에 진력할 뿐이다. 애초에 야심차게 선보였던 '매직 아이'라 할만하던 신선한 시선도, 냉철한 견해도, 이제 '취향의 발견'에서는 찾아볼 여지가 없다. 이원종의 육고기 회 부분에서, 그저 채식을 즐기는 이효리를 위한 콩고기 요리가 등장할 뿐, 육고기 회를 먹는 자체에 대한 회의나 반문은 없이, 상찬만이 이어진다. 허지웅의 청소 취향에 대해서는 뻔한 '외로움'이 화두로 등장할 뿐이다. 당연히 게스트들의 말빨에 따라, 에넥스 카야와 손미나의 취향은 상대적으로 뒤로 밀린다.

 

애초에 이효리의 토크쇼라 하던 <매직 아이>는 이제 김구라의 <매직 아이>라는 게 더 정확할 것이고, 그런 김구라의 대한민국 보통 아저씨의 눈높이에 맞춘 토크쇼에서, 제주도에서 대안적 삶을 꿈꾸는 새댁 이효리의 시선이나, 촌철살인을 하는 문소리의 견해가 등장할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메인 mc 김구라에, 패널 이효리, 문소리, 문희준의 분위기가 되어간다.

더구나 김구라가 유재석처럼 분위기를 아울러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전히 <라디오 스타> 같다. 누군가 튀어오르는 사람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러다 보니, 토크의 참여도나 집중력이 떨어진다. 이원종의 생고기 회 이야기를 할 때, 에넥스 카야나, 손미나의 존재는 방기된다. 애써 생고기 회를 먹고자 하는 김구라와 허지웅만이 함께 할 뿐이다. 그 취향의 성격도, 김구라가 mc인 프로그램에서, 언제나 김구라의 색깔만이 도드라지듯이, 안타깝게도, '취향의 발견' 첫 회에서, 모두가 함께, 누군가의 취향을 발견하고 그것을 함께 하는 분위기는 형성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아저씨 김구라의 취향에 맞는 취향의 발견같기도 하다.

 

물론, 생고기 회나, 살구 콤포스트나, 각종 약재를 끓인 물에 청소까지, 취향의 발견에 등장한 소재들은, 이전의 <매직 아이>에 등장했던 토크의 매개체들보다 한결 친숙하고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들이다. 그러기에, '취향의 발견'이 이전 <매직 아이>에 비해 한결 덜 생경하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대신,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토크란 느낌 역시 주는 건 어쩔 수 없다. 결국 매회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끌어들이는 취향 여부에 따라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오고갈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그 익숙함과 친숙함 덕분에, 침체되어 있던 <매직 아이>는 전주 대비 1%의 상승이라는  시청률의 청신호를 얻었다. 이 호응을 mc들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게스트들을 어우러내는 매끄러운 진행으로 살리는 것이 남은 숙제가 될 것이다.

 

 

 

by meditator 2014. 10. 8. 11:54

10월 7일 <연애의 발견>이 16부작으로 마무리되었다. 시청률은 여전히 7% 대(10월 7일 7.6%, 닐슨 코리아)에서 머물고, 단 한번도 월화 드라마 중 1위를 차지한 적도 없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한여름(정유미 분)이 결국 누구와 이루어질 것인지를 두고 설전이 벌어질 만큼, 화제성넘치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정현정 작가의 대부분의 전작처럼, 역시나 <연애의 발견>에서도 한여름은, 그녀의 첫사랑 강태하(에릭 분)와 이루어 졌다.

 

멋진 성형외과 의사 애인 남하진(성준 분)을 놔두고, 전에 사귀었던 애인을 잊지 못해 오해를 사고, 결국 그로인해 이별을 반복한 끝에 다시 첫 사랑의 그 남자를 찾아가는 <연애의 발견>의 그 어떤 것이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앗아간 것일까?

 

첫 회, 드라마는 다짜고짜, 인터뷰라도 되는 듯, 과거의 연인이었던 한여름, 강태하의 카메라를 향한 독백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지난 사랑을, 하지만 여전히 감정이 섞인 채 발언하는 두 사람에게서, 여전히 마음 속 한 구석에 쟁여놓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흔적을 끄집어 내게된다. 모든 완성되지 않은 첫사랑은 위대하다고 했던가, 혹은 남자는 죽을 때까지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했던가, 등등, 우리가 사는 세상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첫사랑에 대한 격언들은, 우리가 어설퍼서 완수하지 못한 미션이 된 첫사랑에 대한 쓸쓸한 되새김질로 가득차있다.  왜? 아마도 말 그대로 '첫'사랑이기에, 대부분 성취하지 못한 사랑이기에, 처음이 가진 처녀지의 기억과, 그 처녀지를 일군 서투른 농부의 또 다른 경험이, 실패한 자에게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아주 경제)

 

이렇게 드라마는, 사랑을 해보았던 사람들에게 대부분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있는 '실패한 사랑'의 기억을 낚아 올린다. 그리고 그것을 반추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 실패를 되돌이킬 기회를 준다. 애인 남하진의 소개팅 장소로 돌진한 한여름은, 그 장소에서 우연히도 전 애인 강태하를 만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적나라한 연애사가 시작된다. 말 그대로 '양 손의 떡'을 쥔 전형적인 어장관리녀 한여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그게 또 실감난다. 왜? 그것 역시 '솔직히' 연애를 해본 사람들이 한번쯤은 경험해본 감정이니까.

동물의 세계도 아닌 인간 세계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공평하게 하나의 짝을 만나서 사랑을 한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 따박따박 수학 공식처럼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교통사고같은 사건 사고가 발생한다. <연애의 발견>은 바로 그 지점, 흔한 멜로 드라마의 삼각 관계를 인터뷰의 형식을 통해 솔직담백하게 접근해 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는 치졸한 모습들, 혹은 오해를 살만한 행동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감정들을, <연애의 발견>은 가감없이 드러낸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연애라는 것이, 사랑이란 감정 노동을 빌어, 결국은 내 짝을 쟁취하고야 마는 원초적인 짝짓기의 요식 행위이기에, 일찌기 도끼를 들고 대결을 벌이던 원시시대 이래, 승패가 분명하게 판가름날 수 밖에 없는 전투라는 것을 <연애의 발견>은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 승리의 과정은 '나쁜 년', 나쁜 놈'이라는 도덕적 댓가보다도 본능적으로 우선한다는 것 역시 가감없이 드러낸다.

 

물론 이런 두 남자를 양 손에 쥐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설정, 남하진과의 관계을 이어가면서, 여전히 전 애인 강태하를 놓지 못하는 식의 도돌이표 해프닝은, 솔직한 토로임에도, 애청자들을 중반부 많이 지치게 했다. 아마도, 그나마 '나쁜 년' 한여름을 정유미라는 선하고 사랑스러운 배우가 연기하지 않았다면, 시청자들을 외면하고 말았을 상황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젊은 시청자들은, 정유미의 솔직한 사랑스러운 연기에, 그리고 욕하면서도, 사실은 우리도 그렇지 하는 인지상정으로 <연애의 발견>의 개근 티켓을 딴다.

 

그러나 <연애의 발견>이 그저 흔한 삼각 관계와, 진정한 사랑의 쟁취에만 방점이 맞혀져 있지 않다. 마치 하루를 마치고 일기를 쓰듯이, 연애와 사랑에 대한 '성찰'에 이 드라마의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그러기에, 이제와 남하진을 사귀고 있는 한여름이 강태하를 만나 다시 흔들리는 사건은, 그저 사건이 아니라, 5년 전 강태하를 떠나보낼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어진 한여름의 트라우라로 이어진다.

언제나 자상한 남하진의 인내도, 어릴 적 입양 과정에서 같은 고아원에서 자란 동생에게 남겨준 상처로 이어진다.

가장 그럴 듯해보이는 연인 한여름, 남하진은, 결국 이제 다시는 실패하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른 연인 코스프레를 하는 슬픈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드라마는 묻는다. 진짜 사랑을? 그리고 엉뚱하게도, <연애의 발견>이 말하고자 하는 진짜 사랑은, 그 누굴 만나느냐가 아니라, 올곧게 자기 자신으로 선 주체적 자아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강태하랑 헤어진 한여름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꿈을 접었듯이, 자신을 접고, 남하진과의 사랑에 적합한 여자가 되고자 한다. 남하진 역시, 어린 시절의 슬픈 기억을 덮어두고, 누군가의 착한 아들, 멋진 남자로 살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위선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조차도 왜곡시킨다고 <연애의 발견>은 말한다.

그래서 한여름이 강태하를 다시 만나 흔드리는 것, 남하진이 안아름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은, 묻어두었던 자기 자신을 되찾아 가는 과정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그래서, 한여름의 뻔하디 뻔한 삼각 관계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찾아가는 '자아발견'의 과정으로 승화되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드라마를 보는 젊은이들에게 공감과 메시지를 남기면서, 그저 그런 사랑이야기와 차별성을 가지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한여름이 다시 강태하를 만나는 것은, 그저 진정한 사랑을 찾는 것만이 아니다. 방기했던 자기 자신을 추스려, 다시 자기답게 당당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선언 같은 것이다. 그래서, 뻔뻔하게 강태하 앞에 나타난 한여름이 티없이 밝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연애의 발견>은 가장 솔직한 연애 담론에, 자기 성장드라마까지 곁들여, 젊은이들의 절실한 감성을 건드려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지지를 얻는다. 때론 뻔하고 되풀이 되는 해프닝이었지만, 그래도 사랑의 본류에 가식없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 속에서 놓치지 않는 본질에 닿으려 했던 정현정 작가와, 작가의 감성을 200% 구현해낸 연출팀, 그리고, 그것을 더욱 설득력있고 사랑스럽게 연기한 배우들의 합이 만들어 낸 성취이다.

 

물론 현실의 그림자 따위는 찾아볼 길 없는 잘 나가는 선남선녀의 그림같은 사랑이야기라는 환타지, 순수 청춘 소설같은 감수성에서 한 치도 넘어서지 않는 정서 등의 한계는 여전히 남는다. 하지만, 그 한계마저도, 그저 한계가 아니라, 정현정 작가의 다음 작품의 화두로 남길, 가능성으로 접어둘만큼, 뻔한 사랑 이야기에서, 그나마 <연애의 발견>은 진솔하게 청춘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소통의 길을 열었다.

by meditator 2014. 10. 8. 10:08